침팬지와의 대화
로저 파우츠. 스티븐 투겔 밀스 지음, 허진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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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동안 한 글자, 한 단어, 한 문장을 천천히 읽다가 덮어버리기를 반복했다. 님 침스키를 읽을 때나, 프로젝트 님 다큐멘터리를 볼 때와는 다른 감정때문에 책을 빨리 읽어 넘겨버릴 수도 없었고, 책을 읽는 내내 점점 더 우울해졌다.

님 침스키를 읽을 때, 나는 침팬지를 연구하는 학자 모두에게 반감이 들었다. 책을 통해 묘사된 연구자 모두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학문적 성과를 위해 감정이 있고 생각을 할 수 있는 동물을 이용하는 사람, 그 이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다큐멘터리 프로젝트 님을 볼 때는 책과 다르게 조금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활자와 영상의 문법 차이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도 침팬지를 이용한 수화 연구는 여전히 불편했다.

침팬지와의 대화를 읽으면서 님 침스키나 프로젝트 님을 읽고 봤을 때보다 더 우울했던 것은 아마 로저 파우츠의 글이 침팬지와 더 깊은 감정적 교류를 토대로 쓰여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침팬지를 비롯한 영장류에게 수화를 가르치고, 영장류의 행동을 연구해서 영장류가 인간과 매우 많이 비슷하다는 연구를 진행한 것이 영장류를 더 괴롭게 만든 것일까? 인간은 영장류를 연구한 논문을 바탕으로 무엇을 얻었는가? 영장류가 인간과 비슷하다는 것? 유전적으로 비슷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감정,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까지 인간과 다르지 않다는 점? 그럼 그 결과를 토대로 무엇을 바꾸었는가?
여전히 영장류는 동물원에 갇혀있거나 실험실에서 실험동물로 사용되고, 정신병에 걸리거나 인간에 의해 강제로 전염병에 감염이 되며, 자연적으로 살고 있던 숲에서 멀리 떨어진 콘크리트에서 살고 있지 않나.




이제 더 많은 침팬지를 길러내서 더 많이 고통받게 만드는 체계에 속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과학자가 된다는 것이 워쇼를 감금해야 한다는 의미라면 나는 과학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 p256

똑똑하고 의식이 있고 감정을 느끼는 이토록 많은 침팬지들이 자연스러운 사회적 접촉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 p297

어미 침팬지의 머리에는 금속 볼트 네 개가 박혀있었는데, - p297

동정심은 종을 나누는 상상 속의 경계 앞에서 멈추지 않으며 멈춰서도 안 된다. (중략) 다른 존재의 고통을 모르는 척하는 과학은 금방 괴물이 된다. (중략) 생물 의학에 종사하는 의사들은 <무엇보다도 해를 끼치지 말라>라는 히포크라테스 선언의 기본 원칙에서 너무 많이 벗어났다. 히포크라테스가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그는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의 육체는 다르지만 그 안의 영혼은 똑같다>라고 말했다. - p460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연구를 통하여 인간이 아닌 동물을 행동을 알고 그 동물이 인간과 다르지 않음을 아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침팬지를 비롯한 영장류 뿐만 아니라 코끼리, 돌고래, 늑대를 비롯한 모든 동물이 인간과 다르지 않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모든 동물이 하나의 종족이면서 개별적인 존재이며, 감정이 있고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더 이상의 연구를 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우리 모두는 다르지 않다. 다르다고 믿고 싶을 뿐이다. 다르다고 믿어야만 존중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저 편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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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절기
이동은.정이용 지음 / 이숲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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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절기라는 책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신문 아니면 인터넷에 나왔던 책 소개 코너였을 것이다.
짧은 지면에 나왔던 어떤 단어와 문장이 나를 흔들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그 글을 읽고 알라딘에서 이 책을 찾아 장바구니에 담아두었고, 그 후로 꽤 오랫동안 사지 않았다는 사실 뿐이다.

밤 늦게 집에 도착했을 때, 현관문 앞에 놓여진 알라딘 박스를 보게 되었다. 박스 안에는 늑대의 지혜와 함께 환절기가 들어있었다. 내 방 침대에 앉아서 환절기를 펴서 덮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인지 움직이지 않은 것이지 확실치 않다.

둘의 이야기는 한국적이면서 한국같지 않았다. 어머니의 반응이 인상적이었다. 자동차 사고가 난 뒤, 수현이와 용준이의 관계를 알고 불같이 화를 내지 않았지만, (아마도) 배신감을 느꼈고 용준이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찾아온 용준이를 매몰차게 내쫓지도 않았다. 한국의 드라마에서 표현되는 것보다 감정이 짓눌러져 있었고, 다른 방식으로 되어 있었지만 훨씬 더 사실적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의 드라마는 언제나 감정이 왜곡되어진 느낌이다.

계절이 바뀔 때, 사람은 쉽게 약해진다. 약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 우리는 변화할 수 있다.

영화 환절기가 지난 2월에 개봉했다던데, 왜 나는 기억에 없지? 알았다면 보러갔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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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말 - 은둔 시절의 마지막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권진아 옮김 / 마음산책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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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유명해지면 그 사람에 대하여 이런저런 말이 많이 나온다. 그 말은 루머일 때도 있고, 진실일 때도 있으며, 사실일 때도 있다. 그 모든 말이 정확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모든 '사실'과 '진실'은 관점, 개념, 시간, 기억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헤밍웨이에 대해 잘 모른다. 헤밍웨이가 쓴 책 몇 권을 읽은 적이 있으며, 헤밍웨이가 술을 좋아해서 자주 마시던 칵테일 다이키리에 일반적인 럼의 양보다 2배를 더 넣어 마셔서 '헤밍웨이 다이키리'라는 칵테일이 있다는 것이나, 모히토를 즐겨 마셨고, 글을 쓴다는 이유로 지인에게 돈을 빌려 갚지 않아 사기꾼 소리를 들었으며, 낚시와 투우를 좋아하고, 젊었을 적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적이 있다는 단편적인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단편적인 사실 몇 가지 때문에 헤밍웨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에 나왔던 여성에 대한 편협한 시선을 싫어하고 낚시와 투우를 즐겼던 헤밍웨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싫어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내가 모히토라는 칵테일을 처음 마셨던 이유 중 하나가 헤밍웨이가 좋아했던 칵테일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나는 여전히 모히토를 좋아한다.

헤밍웨이의 말은 읽으면서 우울했다. 아마 바로 직전에 읽었던 로저 파우츠의 침팬지와의 대화의 영향때문이리라. 책을 읽으면서 헤밍웨이가 좋아지지 않았지만 더 싫어지지도 않았다. 모든 사람은 변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다가왔을 뿐이다.
그리고 글을 쓸 때, 어떤 진심을 글로써 남길 때 신중한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그가 글로 무언가를 남길 때, 그 마음과 내용은 진심이었고 그 진심에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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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치가 개봉하기 전, 그리고 개봉한 후 많은 영화 사이트와 관련 프로그램에서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이야기거리가 많은, 그래서 할 이야기가 많은 아주 좋은 영화이다.

인터넷과 SNS가 이전 세대보다 과다하게 발달하고 아주 과도하게 사용되며 익명이 보장되는 것 같지만, 익명이 없는 세대. 나를 숨기고 싶어하면서 드러내고 싶어하는 아주 이중적인 세상.
한국인으로 이루어졌지만 모국어가 영어인 가족.

'searching'하는 내용을 말 할 수 없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난, 인터넷에서 글을 쓰고 댓글을 다는 모든 내용이, 꾸미고 있는 모습의 단면이 진실과 사실이 아니며 왜곡되고 굴절된다고 생각했다.
왜곡되고 굴절된 내용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미 세상은 겉잡을 수 없이 돌아가고 있다. 모두가 자신의 글이 남에게 상처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행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상처를 누군가 보살펴주길 바라지만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할 사람은 적고, 너무 외롭고 슬픈  존재라는 것을 안다.

딸을 찾던 데이빗, 새벽에 호수로 향하던 마고. 모두 외로워보였다. 우리에게 세상과 연결되어있는 통로가 생겼지만 더 외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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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요청으로 강제 개봉되었다는 영화 더 보이스.
영화를 보려고 했더니 상영관이 거의 없고, 상영시간도 극악이었던 영화.

영화를 보면서 사실 중반 이후까지는 제리의 상황에 공감했고, 동정심이 생길 때도 있었다.
플래시백으로 제리의 아동/청소년기가 나왔을 때는 제리도 많이 외롭고 고통스러웠을 거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면서 제리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슬펐던 기분이 엄청 더럽다는 기분으로 전환된 것은 리사를 연기한 안나 켄드릭이 죽고 연이어 앨리슨이 죽었을 때부터였다.
피오나가 죽은 것은 우연에 이은 실수였다 생각되었고 제리가 어머니를 죽이는 일은 어머니가 원했고 강제로 시켰던 일(개인적으로는 아동학대라고 생각한다.)이었다.
하지만 리사와 앨리슨을 죽인 그 순간부터 이것은 남성이 정신착란 증세를 핑계로 자신보다 약한 여성을 죽이는 일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새로운 여성 혐오 영화인가?

게다가 영화 끝에서 제리가 죽인 여성(피오나, 리사, 앨리슨)과 제리가 예수와 함께 노래를 부를 때, 예수는 왜 거기서 나와?
가해자와 피해자가 즐겁게 웃으며 Happy song 노래를 부르며 춤추는 것을 보니, 이 영화는 뭐지? 싶기도 하고.

단지, 감독이 조현병(정신분열)에 대해 최대한 편견없이 영상을 찍으려고 한 것 같았다. - 주인공인 살인만 안 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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