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보다 민감한 사람들 중에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많다. 그것은 지금 이 시대의 문화가 우리의 성향이나 행동과 매우 다른 성향과 행동 방식에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극도로 민감한 사람들 중에는 평생 남들이 기대하는 ‘활기 넘치는‘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은퇴한 후에야 느리고 사색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아마도 "지나치게 걱정하지 마", "더 강해져야 해", "남들처럼 즐기는 방법을 배워"라는 말을 수없이 들으며 살아왔을 것이다. 달라져야 한다고 끊임없이 부추기는 세상에서 당신은 남들보다 민감한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타인의 기대에 맞추기 위해 자기 자신을 바꾸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양으로 측정하지 않고 질로 측정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당신은 남들처럼 생산적이거나 효율적이지는 못하지만, 질적으로 우수한 일을 해낼 수 있고, 좁은 폭을 깊이로 상쇄할 수 있다.
오랜 시간 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살았다. 그리고 결코 그들을 쫓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좌절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할 수 없는 것에서 내가 갖고 있는 자원으로 초점을 옮기는 방법을 배우고 터득했다. - P8

"극도의 민감성은 인격을 풍요롭게 만든다. 단지 비정상적이고 어려운 상황에서만 이러한 장점이 매우 심각한 단점으로 바뀐다. 그것은 민감한 사람들의 침착하고 신중한 성향이 갑작스러운 상황으로 인해 혼란을 겪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도의 민감성을 본질적으로 병적인 성격의 구성 요소로 간주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류의 4분의 1을 병적인 사람으로 규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 카를 구스타프 융 - P10

일반적으로 다섯 사람 중 한 사람은 남들보다 민감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고등 동물들도 매우 민감한 유형과 ‘회복력이 더 강한(resilient)‘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두 가지 유형 중에서 대체로 후자가 더 모험을 좋아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성향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P20

높은 민감성을 가진 사람들의 특성이 새로운 발견은 아니다. 단지 ‘내향적인 성격‘ 같은 다른 이름으로 불려왔을 뿐이다. 미국의 임상심리학자 일레인 아론은 ‘타인보다 더 민감한 사람‘의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그녀는 타인보다 더 민감한 사람들 중 30퍼센트가 사회적으로 외향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전까지만 해도 내향성과 민감함을 동일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한다. - P20

극도로 민감한 사람들 중에는 혼자 사는 삶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다. 일상생활 속에서 그들에게 필요한 평안함과 고요함을 누리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런 삶을 선택하면 때때로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고, 해결하기 힘든 딜레마에 빠진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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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간단히 강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마법‘일 것입니다. 그런 ‘마법‘은 한 실체를 다른 실체로 변화시킵니다. 그러나 마법은 실체의 영역을 넘어가지는 않습니다. 그와 반대로 도겐의 "흐르는 산"은 마법을 통한 본질 변화로부터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흐르는 산은 사물들 서로 간의 스며듦이 일어나는 비어 있음의 일상적 모습을 나타냅니다. "진정한 진리 속에는 마술도 비밀도 기적도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바라는 사람은 잘못된 길을 가는 것입니다. 물론 선불교에는 모든 종류의 요술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주전자로부터 후지 산을 솟아나게 하거나, 불에 달궈진 부젓가락으로부터 물을 짜내거나, 나무 기둥 위에 앉거나, 혹은 두 개의 산의 위치를 서로 바꾸는 요술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마술도 기적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일상의 흔한 일입니다. - P64

라이프니츠는 무가 존재보다 "더 간단하고 더 쉽다고" 여깁니다. 존재하기 위해서는 힘, 의지 혹은 무에 저항하거나 무를 견디려는 충동이 필요합니다. 이런 존재 능력의 핵심은 자기를 좋아하는 것, 즉 "자기를 성취하려는" 의욕입니다. 그리하여 존재는 원함의 구조를 가집니다. 그런 원함은 자기를 원하기에 자기와 관계하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육체와 영혼을 벗어던지기를 요구하는 도겐이 가리키는 존재는 의지 혹은 욕구를 근본 특징으로 가지지 않습니다. 선불교의 수행은 마음에 완전히 다른 존재가 도달할 때까지 마치 마음을 굴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 다른 존재는 아페티투스가 없이 있습니다. - P86

『꽃꽃이에 관하여』에서 선불교 철학자 니시타니 게이지는 일본의 꽃꽃이 예술을 잘라냄 현상의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꽃을 삶의 뿌리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꽃의 영혼을 잘라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꽃으로부터 충동적 의욕, 즉 아페티투스가 제거됩니다. 이렇게 자르는 것은 꽃에게 죽음을 줍니다. 꽃은 고유한 방식으로 죽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죽음은 시드는 것과 다릅니다. 꽃에게 시든다는 것은 다 살았다는 것 혹은 자연사했다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꽃이 마지막까지 살기 전에 죽음을 줍니다. 꽃꽃이를 위한 꽃은 시들기 전에, 자연사하기 전에, 삶과 의욕이 멈추기 전에 절단되어야만 합니다. - P93

하이데거는 인간적 현존재의 근본 특징이 "걱정"이라고 주장합니다. 주장에 대한 "근거" 혹은 "증거"로 하이데거가 제시하는 것은 오래된 우화입니다. "옛날에 ‘걱정‘이 강을 건넜을 때 그녀["걱정"으로 번역한 독일어 "Sorge"는 여성 명사]는 점토질의 흙을 보았습니다. 생각에 빠진 채 그녀는 흙 한 덩어리를 주워 빚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만든 것에 대해 숙고할 때 유피테르가 다가옵니다. ‘걱정‘은 유피테르에게 빚어진 흙덩어리에 정신을 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녀의 부탁을 유피테르는 기꺼이 들어줍니다. 그러나 이제 그녀가 빚어진 것에 그녀의 이름을 붙이길 원했을 때, 유피테르는 허락하지 않았고 자기의 이름이 주어져야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름 때문에 ‘걱정‘과 유피테르가 싸울 때, 흙(Tellus[대지의 여신]}도 일어나 빚어진 것에 자기 이름을 붙이기를 원했습니다. 실제로 흙의 몸 한 덩어리가 빚어진 것에 제공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싸우는 이들은 사투르누스[계절의 신]을 심판관으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사투르누스가 내린 정당해 보이는 결정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유피테르, 그대는 정신을 주었기 때문에 그 빚어진 것이 죽을 때 정신을 받아야 하고, 흙, 그대는 육체를 선물했기 때문에 육체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최초로 빚은 ‘걱정‘은 그것이 살아 있는 동안 그것을 소유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름 때문에 싸움이 있으므로 그것은 ‘호모homo‘라고 불리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후무스humus(흙)로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호모는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기 위해 자기에게 죽음을 주어야만 할 것입니다. - P95

걱정이 없는 사람은 내가 있음[나의 존재]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는 계속 동일하게 있으려 하지 않고 만물의 운행에 맞춰 변합니다. 그의 아무것도 아니면서 자기가 없는 자아는 만물의 비춤과 비침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는 만물의 빛 속에서 빛납니다. 자기 마음에 있는 두 가지 영혼 때문에 고뇌하는 파우스트에게 바쇼는 어쩌면 다음과 같이 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대의 영혼들을 잘라내십시오! 그리고 거기에 매화가 피게 하십시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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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작위 편향은 앞으로 살펴본 ‘행동 편향‘에 반하는 성향인가? 꼭 그렇진 않다. 롤프 도벨리는 "행동 편향은 어떤 상황이 불분명하고 모순적이고 불투명할 때 작용하는 반면, 부작위 편향은 대개 통찰 가능한 상황에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폐해는 행동을 통해서 예방하려고 노력하지만 예측할 수 있는 폐해를 예방하는 것은 우리에게 강한 동기를 부여하지는 못한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 P28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행동하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행동하라Think like a man of action and act like a man of thought"고 했다. 쉽지 않은 주문이긴 하지만, 이 명언이야말로 행동 편향과 부작위 편향 사이에서 취할 수 있는 슬기로운 중용의 해법이 아닐까? - P29

하버드대학 심리학자 앨렌 랑거는 그런 환상을 가리켜 ‘통제의 환상‘이라고 불렀다. 현실적으로 권한이 없는 뭔가에 대해 통제하거나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믿는 경향으로, ‘통제력 착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로또에 당첨되기 위해 1등이 많이 나온 집을 찾아가기도 하고, 그간 나온 당첨번호들에 대한 분석을 하는 등 다양한 행동을 하는 것이 좋은 예다. - P32

여러 실험 결과, 통제의 환상은 정신 건강에 긍정적 기여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대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자기통제력이 약할수록, 즉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여지가 작을수록 스트레스는 커지고 그만큼 건강이 악화된다. 이는 아무리 강도 높은 운동을 하더라도 자신이 통제력을 행사하면서 즐길 수만 있다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건 물론이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정도도 높아질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즉, 삶과 일이 하나가 되면 건강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늙은 부모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모든 일을 자식의 보살핌에만 의존하게 만드는 게 진정한 효도일까? 현명한 자식들은 그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걸 직감으로 잘 알고 있다. 실제로 랑거가 1976년에 발표한, 요양원 거주자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 결과는 노인들에게 책임감과 선택을 증가시켜 ‘통제의 기쁨‘을 누리게 해주는 것이 그들의 건강과 행복에 더 기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격무에 시달리더라도 대통령이나 재벌 회장들은 멀쩡한 데 반해 대통령 참모나 재벌 회장 비서들이 스트레스를 견뎌내지 못해 정신적 · 육체적으로 쉽게 무너지는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대통령이나 재벌 회장들은 애국심이나 애사심이 부하들에 비해 훨씬 높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이에 대해 정신과 의사 정혜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통령은 자신의 내적인 세계를 온전히 장악할 수 있는 자기통제권을 가지고 살지만 참모들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측근 참모일수록 더 그렇다. 그러니 동일한 상황에서도 자기통제권을 가진 리더에 비해 정신적 에너지 소모가 훨씬 많은 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그런 현상을 ‘우리 회장님의 놀라운 건강 체질과 강철 같은 의지‘ 따위로 해석하는 일은 어리석다. 아무 언질도 없이 예측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대기를 강요받는 자가용 운전기사 중에서 만성 피로감을 호소하는 이가 많은 것도 자기통제권 상실이 결정적 이유다." - P33

통제의 환상은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나 도구에 의해 부추겨질 수 있다. 그 대표적 사례로 자주 거론되는 것이 바로 마이크로소프트가 1990년에 개발해 전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고 있는 파워포인트다.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이 통제의 환상을 부추긴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예일대학 정치학자이자 통계학자인 에드워드 터프트는 「파워포인트의 인지적 스타일」이라는 논문에서 파워포인트가 ‘정보 제공‘보다는 ‘설득‘에 치우쳐 복잡한 과정을 단순화시킴으로써 청중의 온전한 이해보다는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사람에게 확신감을 주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2003년 2월 1일 우주인 7명을 희생시킨 컬럼비아 우주왕복선 폭발 참사에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다.
『뉴욕타임스』 2010년 4월 27일자 1면에 실린 「우리의 적은 파워포인트다We Have Met the Enemy and He Is PowerPoint」라는 기사도 군대에서 보고나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많이 사용하는 파워포인트가 매우 복잡한 문제들을 마술적으로 축소함으로써 큰 위험을 낳고 있다고 지적했다. 논쟁과 비판을 억압하고 의사 결정 과정을 헝클어뜨릴 뿐만 아니라 이해와 통제라는 환상을 심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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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부처는 한 손으로 하늘을, 다른 손으로 땅을 가리켰습니다. 그는 원을 그리며 일곱 걸음을 걸었고, 하늘의 네 방향을 모두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하늘 아래 그리고 땅 위에 유일무이한 숭배의 대상입니다[천상천하유아독존].‘" 선사 운문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그것을 그 당시에 함께 체험했다면, 나는 부처가 뻗을 때까지 몽둥이질을 했을 것이고, 그를 개들에게 먹잇감으로 내던졌을 것입니다. 내 행동은 지상의 평화를 위한 고귀한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 P22

하이데거도 사물을 세계로부터 사유합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사물의 본질은 세계를 개방하는 것입니다. 사물은 땅과 하늘, 신들과 인간들을 모읍니다. 그것들은 사물에 비칩니다. 사물이 세계를 있게 합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철학에서는 사물 모두가 세계를 나타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신학의 구속을 받고 신에 의지하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사물들을 선택합니다. "신"은 하이데거의 "세계"를 비좁게 만듭니다. 하이데거가 고른 사물들의 목록에는 가령 ‘해충 Ungeziefer(글자 그대로 보면 신에게 제물로 바치기에는 부적합한 동물을 뜻합니다)‘은 포함될 수 없을 것입니다. 단지 "황소"와 "노루"만이 그의 사물 세계에 속합니다. 그와 반대로 하이쿠의 세계에는 제물이 되기에는 부적합한 수많은 벌레와 동물도 거주합니다. 그리하여 하이쿠의 세계는 하이데거의 세계보다 더 풍성하고, 더 친절합니다. 왜냐하면 하이쿠의 세계는 인간으로부터뿐만 아니라, 또한 신으로부터도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인간
그리고 한 마리 파리
공간 속에 있습니다.

잇사

벼룩과 이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나의 베개 가까이에서 말도 오줌을 쌉니다.

바쇼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씁니다. "사람들이 형식을 [...] 도외시하고 어쨌든 내용의 근본에 도달하면 사람들은 석가모니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독일 신학자]가 같은 내용을 가르친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태연함‘ 혹은 ‘무‘와 같은 에크하르트의 몇몇 신비주의적 개념은 확실히 비교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개념들을 더 정확하게 관찰하거나 혹은 내용의 근본에 실제로 도달하면 사람들은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와 불교 사이의 근본적 차이를 깨달을 것입니다.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선불교와 관련하여 드물지 않게 다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비주의의 근본이 되는 신은 선불교, 즉 내재성의 종교에 원칙적으로 낯선 것입니다.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초재성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초재성은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에서 긍정적 술어 모두를 박탈하는 부정성 때문에 비록 ‘무‘로 연해지기는 하지만, 술어적 세계의 저편에서 기이한 실체로 진해집니다. 그의 신비주의의 ‘무‘와 정반대로 선불교의 무는 내재성의 현상입니다. - P30

배고플 때 밥을 먹으라는 것 혹은 피곤할 때 잠을 자라는 것이 사람들더러 감각적 욕구와 성향에 쉽사리 탐닉하라는 의미가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욕구 충족을 위해서라면 정신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오랜 수행을 쌓아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온몸이 피로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마치 자기를 버리는 것처럼 [차를] 마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마시는 것인지 아니면 차가 [사람들을] 마시는 것인지 더 이상 알 수 없는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오랜 수행이 선행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자아를 완전히 망각하고 상실한 채 마시는 사람은 마실 것과 하나가 되고, 마실 것은 마시는 사람과 하나가 됩니다. 구분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차를 마실 때는 잔을 집는 것부터 잘해야만 할 것입니다. 특별한 정신 상태에 도달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양손은 마치 잔과 하나인 것처럼 그렇게 잔을 만집니다. 그래서 잔을 놓았을 때도 양손에는 잔의 모양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밥이 사람들을 먹을 때까지 계속 밥을 먹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밥을 받아들이기 전에 죽였을 것입니다. "나의 자아가 비어 있으면, 모든 사물도 비어 있습니다. 이것은 사물의 종류에 상관없이 만물에 적용됩니다. [...] 여러분이 ‘식사‘라고 부르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단 한 개의 밥알이라도 있는 곳은 도대체 어디입니까?" - P49

남전에게 조주가 "길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남전은 "일상의 정신이 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조주는 "사람들이 스스로 그 길로 향해야만 합니까 아니면 그럴 필요는 없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남전은 "특별히 그 길로 향하는 사람은 그 길을 외면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은 아무것도 욕망해서는 안 됩니다. ‘부처‘가 되려고 해도 안 됩니다. 욕망하면 바로 길을 벗어납니다. ‘부처‘를 죽이라는 괴상한 요구를 했던 선사 임제는 일상의 정신을 암시한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는 것과 마음을 ‘성스러운‘ 것으로부터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처 없이 가는 것이 바로 길입니다. 이렇게 정처 없을 때, 즉 이렇게 독특한 걱정 없는 시간에 날이 잘 갑니다. - P54

중국의 선사 임제는 승려들에게 지금 여기에 거주할 것을 거듭 권유합니다. 그의 격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배고프면 나는 밥을 먹습니다. 졸리면 나는 눈을 감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나를 비웃지만, 현명한 사람은 나를 이해합니다." 선사 도오원지는 삼십 년 동안 밥을 먹는 일만 했다고 합니다. "가장 시급한 말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선사 운문은 "먹으십시오!"라고 답합니다. 어떤 말이 "먹으십시오!"보다 더 많은 내재성을 포함하겠습니까? "먹으십시오!"가 함축하는 것은 깊은 내재성일 것입니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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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행동경제학자 댄 애리얼리는 "경제학은 종교입니다. 경제학은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행동하며 자신에게 가장 이익이 되도록 행동하리라고 가정하죠. 하지만 이것은 믿음일 뿐 증거는 없어요"라고 단언한다. - P7

그렇다고 해서 ‘이론 만능주의‘를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이론으로 모든 걸 설명하려는 시도는 위험할 수도 있다. 이론은 사고를 그 어떤 틀에 갇혀버리게 만드는 족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은 바로 이게 문제다. 사람들이 이론을 싫어한다고 하지만, 자신이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모두 다 나름의 이론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야구계에 떠도는 말 중에 이런 게 있다. "이론은 칫솔과 같다. 모든 이들은 각자 자기만의 이론을 갖고 있다. 다른 사람의 이론을 사용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야구 선수들만 그런 게 아니다. 모든 사람은 다 자기 나름의 이론을 갖고 있다. 그것이 고정관념이든 편견이든 버릇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 P10

이스라엘 학자 마이클 바-엘리는 축구 경기에서 페널티킥을 차는 선수들을 관찰했다. 3분의 1은 공을 골대의 중앙, 3분의 1은 왼쪽, 3분의 1은 오른쪽으로 차더라는 게 밝혀졌다. 그런데 골키퍼들 중 2분의 1은 왼쪽으로 몸을 날렸고 2분의 1은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다. 확률은 같은데도 중앙에 멈춰 서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왜 그랬을까? 동네 축구를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은 그 이유를 쉽게 짐작할 것이다.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공이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있는 건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차라리 틀린 방향으로라도 몸을 날리는 편이 훨씬 나아 보일 뿐만 아니라 골키퍼 자신도 심적으로 덜 괴롭다. 아무런 소용이 없더라도 행동을 보여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런 행동 편향은 인류의 오랜 진화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사냥꾼과 채집가들이 살던 환경에서는 번개처럼 빠른 반응이 생존하는 데 중요했으며, 오히려 생각하는 것은 치명적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 세상은 크게 달라졌지만, 인간의 그런 습성은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 P20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불운을 겪을 때‘ 느끼는 부정적 감정은, 실제로 무언가 행동을 하고 나서 불운을 겪을 때 느끼는 부정적 감정보다 더 크다. 불운이나 실패를 겪을지언정 ‘그래도 최소한 노력은 했잖아‘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좋은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데도 말이다. 예를 들어 주식거래에서는 주식을 팔지 않고 장기간 보유하고 있는 게(즉 행동을 취하지 않는 게) 더 나을 때가 많다. 하지만 고객이 보기에는 증권 브로커가 뭔가 행동을 취해야만 그가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 보인다. 고객 입장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 있으라고 브로커에게 돈을 지급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정부도 증권 브로커와 비슷한 처지에 처해 있다. 국민 역시 정부가 가만 있으라고 세금을 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공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최악의 행동 편향은 정부의 대학 입시 정책에서 나타난다. 살인적인 입시 경쟁과 과도한 사교육비 문제는 한국 사회의 학벌주의, 즉 간판주의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입시 방법을 좀 바꾸는 수준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역대 정부들은 달라질 게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는데도 입시 정책을 가지고 사실상 장난을 치는 어리석은 짓을 수없이 반복해왔다.
이명박 정부의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이주호는 장관이 되기 전에 "장관 따라 정권 따라 바뀌는 입시 제도에 신물이 날 지경이다. 교육부 장관이나 대통령 마음대로 입시를 좌지우지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 역시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압박에 굴복해 언론에서 "정권마다 성형수술되는 대입에 국민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비판을 받았다. 물론 그 이후로도 ‘대입 성형수술‘은 계속되었다. - P21

개인 차원에서든 사회 차원에서든 행동 편향은 사라지기 어렵다. 우리 인간은 행동을 예찬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상가 파스칼은 "인간의 모든 불행은 그들이 방 안에 조용히 머물러 있지 못하는 데 있다"고 했다지만, 행동(실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속담과 격언이 훨씬 많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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