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부처는 한 손으로 하늘을, 다른 손으로 땅을 가리켰습니다. 그는 원을 그리며 일곱 걸음을 걸었고, 하늘의 네 방향을 모두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하늘 아래 그리고 땅 위에 유일무이한 숭배의 대상입니다[천상천하유아독존].‘" 선사 운문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그것을 그 당시에 함께 체험했다면, 나는 부처가 뻗을 때까지 몽둥이질을 했을 것이고, 그를 개들에게 먹잇감으로 내던졌을 것입니다. 내 행동은 지상의 평화를 위한 고귀한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 P22

하이데거도 사물을 세계로부터 사유합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사물의 본질은 세계를 개방하는 것입니다. 사물은 땅과 하늘, 신들과 인간들을 모읍니다. 그것들은 사물에 비칩니다. 사물이 세계를 있게 합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철학에서는 사물 모두가 세계를 나타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신학의 구속을 받고 신에 의지하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사물들을 선택합니다. "신"은 하이데거의 "세계"를 비좁게 만듭니다. 하이데거가 고른 사물들의 목록에는 가령 ‘해충 Ungeziefer(글자 그대로 보면 신에게 제물로 바치기에는 부적합한 동물을 뜻합니다)‘은 포함될 수 없을 것입니다. 단지 "황소"와 "노루"만이 그의 사물 세계에 속합니다. 그와 반대로 하이쿠의 세계에는 제물이 되기에는 부적합한 수많은 벌레와 동물도 거주합니다. 그리하여 하이쿠의 세계는 하이데거의 세계보다 더 풍성하고, 더 친절합니다. 왜냐하면 하이쿠의 세계는 인간으로부터뿐만 아니라, 또한 신으로부터도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인간
그리고 한 마리 파리
공간 속에 있습니다.

잇사

벼룩과 이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나의 베개 가까이에서 말도 오줌을 쌉니다.

바쇼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씁니다. "사람들이 형식을 [...] 도외시하고 어쨌든 내용의 근본에 도달하면 사람들은 석가모니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독일 신학자]가 같은 내용을 가르친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태연함‘ 혹은 ‘무‘와 같은 에크하르트의 몇몇 신비주의적 개념은 확실히 비교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개념들을 더 정확하게 관찰하거나 혹은 내용의 근본에 실제로 도달하면 사람들은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와 불교 사이의 근본적 차이를 깨달을 것입니다.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선불교와 관련하여 드물지 않게 다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비주의의 근본이 되는 신은 선불교, 즉 내재성의 종교에 원칙적으로 낯선 것입니다.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초재성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초재성은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에서 긍정적 술어 모두를 박탈하는 부정성 때문에 비록 ‘무‘로 연해지기는 하지만, 술어적 세계의 저편에서 기이한 실체로 진해집니다. 그의 신비주의의 ‘무‘와 정반대로 선불교의 무는 내재성의 현상입니다. - P30

배고플 때 밥을 먹으라는 것 혹은 피곤할 때 잠을 자라는 것이 사람들더러 감각적 욕구와 성향에 쉽사리 탐닉하라는 의미가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욕구 충족을 위해서라면 정신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오랜 수행을 쌓아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온몸이 피로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마치 자기를 버리는 것처럼 [차를] 마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마시는 것인지 아니면 차가 [사람들을] 마시는 것인지 더 이상 알 수 없는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오랜 수행이 선행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자아를 완전히 망각하고 상실한 채 마시는 사람은 마실 것과 하나가 되고, 마실 것은 마시는 사람과 하나가 됩니다. 구분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차를 마실 때는 잔을 집는 것부터 잘해야만 할 것입니다. 특별한 정신 상태에 도달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양손은 마치 잔과 하나인 것처럼 그렇게 잔을 만집니다. 그래서 잔을 놓았을 때도 양손에는 잔의 모양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밥이 사람들을 먹을 때까지 계속 밥을 먹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밥을 받아들이기 전에 죽였을 것입니다. "나의 자아가 비어 있으면, 모든 사물도 비어 있습니다. 이것은 사물의 종류에 상관없이 만물에 적용됩니다. [...] 여러분이 ‘식사‘라고 부르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단 한 개의 밥알이라도 있는 곳은 도대체 어디입니까?" - P49

남전에게 조주가 "길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남전은 "일상의 정신이 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조주는 "사람들이 스스로 그 길로 향해야만 합니까 아니면 그럴 필요는 없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남전은 "특별히 그 길로 향하는 사람은 그 길을 외면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은 아무것도 욕망해서는 안 됩니다. ‘부처‘가 되려고 해도 안 됩니다. 욕망하면 바로 길을 벗어납니다. ‘부처‘를 죽이라는 괴상한 요구를 했던 선사 임제는 일상의 정신을 암시한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는 것과 마음을 ‘성스러운‘ 것으로부터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처 없이 가는 것이 바로 길입니다. 이렇게 정처 없을 때, 즉 이렇게 독특한 걱정 없는 시간에 날이 잘 갑니다. - P54

중국의 선사 임제는 승려들에게 지금 여기에 거주할 것을 거듭 권유합니다. 그의 격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배고프면 나는 밥을 먹습니다. 졸리면 나는 눈을 감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나를 비웃지만, 현명한 사람은 나를 이해합니다." 선사 도오원지는 삼십 년 동안 밥을 먹는 일만 했다고 합니다. "가장 시급한 말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선사 운문은 "먹으십시오!"라고 답합니다. 어떤 말이 "먹으십시오!"보다 더 많은 내재성을 포함하겠습니까? "먹으십시오!"가 함축하는 것은 깊은 내재성일 것입니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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