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만들다 보면 한 저자가 쓴 글 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글이 있습니다. 이런 글은 책이 발간되면 역시나 독자들에게도 오래도록 회자되는데요. 그 글들의 공통점은 다른 글들보다 주제가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내가 쓴 에세이가 잘 쓴 글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법은 간단합니다. 사람들이 커피숍이나 술자리에서 수다를 떨다가 "아, 내가 얼마 전에 이런 글을 봤는데" 하면서 전해줄 만한 이야기라면 성공한 것이지요. 그러려면 아무래도 추상적인 이야기보다는 구체적인 이야기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더 오래 남을 테고요. - P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 사는 일에 그 정도의 이별은 별로 대수로운 일도 아니니까. 이건 특별한 일이 아니야. 혜인은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다. 그건 그녀가 온갖 종류의 상처를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이 정도 일에 연연하지 말자. 다른 사람들이 겪는 일들에 비하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사람들은 다 이러고 살아, 너만 겪는 일인 것처럼 유난 부리지 마, 스스로를 다그쳤다. - P228

그 사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어. 처음에는 환자들의 말도 잘 들어주고 좋은 표정도 지으려고 애를 썼지. 그런데 오랜 시간 삼교대로 일을 하고, 그것도 너무 많은 일을…… 어느 순간 마음속에서 작은 블록 하나가 빠진 거야. 아주 작은 블록이었는데 그게 빠져버리니까 중요한 부분이 무너진 거지. 근데 본인은 자기가 엉망이 된 것도 모르는 거야. - P271

해설_ 정말 우정은 사랑보다 가볍거나 손쉬운 것일까. 우리는 대개 운명처럼 서로에게 빠져들고 거센 정념에 휘말리는 관계에 낭만성을 부여하며 사랑이라 부른다. 이에 비해 우정은 보다 잔잔하고 느슨하게 거리를 둔 채 이어지는, 하지만 그렇기에 쉽게 끊어지지 않는 견고함을 지녔다고 여긴다. 그러나 십대와 이십대 초반의 우정에 대해서라면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 시절 우리가 지니고 있는 천진함이란 연약하면서도 맹목적인 것이어서, 상대의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를 해석하기 위해 온 신경을 기울이고 희미한 낌새 하나에도 민감해지며 속없이 자신을 상대에게 내어주게 한다. 하지만 이 천진한 무방비함은 미숙함의 다른 말이기도 해서, 관계 끝에는 쉬이 지워지지 않는 상흔들이 남는다. 최은영은 인생의 가장 연한 시기에 순도 높은 우정들이 남긴 흔적들을 좇아 그 강렬한 감정의 밀도를 복구해낸다. - P306

해설_ 최은영은 관계가 연결되고 넓어지는 지점이 아니라 단절되는 지점을 잔인하리만큼 섬세하게 그려나간다. 이것이 짙은 애상을 자아내는 것은 우리가 이 단절에서 어떤 결정적인 이유나 잘못도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소설에는 극적인 각성과 도약의 순간이 없고, 특별한 치유의 순간 역시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소설의 바탕이 되는 주요한 생각 중 하나는 우리가 유일하지도 소중하지도 않으며 끊임없이 대체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부정적으로 치닫는 대신, 실망과 균열을 끌어안은 채 계속되는 평범한 일상의 삶을 의연하게 걸어가도록 한다. 시작도 끝도 분명치 않은 그들의 사랑과 이후의 삶은 여름날의 불꽃놀이보다는 이 불꽃놀이가 끝난 후의 기나긴 여운과 닮아 있다. 하지만 이미 사라졌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것들이 주는 적막한 위로에 기대면서, 우리의 평범한 삶은 그 짧은 여름을 영원히 살아간다. - P3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학교를 포기한 건 고등학교 3학년 7월이다. 담임이 아버지를 불러 병원에 데려가라고 충고한 게 발단이었다. 병원에 실려 간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담임이었다.
아버지의 분노는 아마 ‘거부’의 한 형태였을 것이다. 아버지에게도 당신의 아들이 세상에다 써주길 바라는 신화가 있었을 테니까. 그럴 재목이 아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오래전 ‘여기’와 ‘거기’의 경계선을 넘었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안에서 악령처럼 발현하는 아내의 모습을 못 본 척하고 싶었을 것이다. - P54

애당초 승민의 눈을 보지 말았어야 했다. 시계를 줍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봤고 주웠으니 버텨야 했다. 설사 최기훈이 팔 걷고 나섰다 하면 끝장을 보는 유의 인간이라 할지라도. - P129

여름밤이 지루하게 갔다. 현선 엄마는 현선이를 불렀고 나는 애타게 잠을 불렀다.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죽도록 피곤했다. 그런데도 정신은 말짱하기만 했다. 시계 때문이 아니었다. 전날 밤 본 승민의 눈이 신경을 자꾸 건드렸다. 어둠 속에서 마주쳤던 눈빛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럴 때마다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불편한 ‘무엇’이 있었다. 그 ‘무엇’의 정체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알려 들면 들수록 혼란만 커졌다.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현자의 목소리가 타이르고 있었다. ‘그놈한테 신경 꺼.’ - P131

그는 40점에 덜컥 감격해버렸다. 나는 때 이른 공치사에 마음이 찔렸다. 공부를 시작한 지 겨우 일주일째였다. 성의를 다하는 것도 아니었다. 귀찮고 힘든 걸 간신히 표 내지 않는 정도였다. 어쨌거나 그는 승민의 소식을 전해주는 파랑새였으므로. - P133

담배 두 대를 연달아 피우고 식당으로 향했다.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자축하는 의미였다. 불면증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한 세숫대야를 마셔도 쿨쿨 잘 듯한 기분이었다. 근심 걱정 없는 밤 아니겠는가. 범죄자의 시간이 끝난 것이다. 대타의 시절도 갔다. 나무늘보 시대도 막을 내렸다. 만식 씨가 등에서 떨어지자 중력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다리만 뻗으면 곧장 달로 날아가 버릴 것 같아 불안하기까지 했다. 만식 씨를 매달고 다니는 동안 근육에 초인적인 힘이 붙었던 것이다. 안면 마비는 완벽하게 풀렸다. 침도 흘리지 않았다. 손 떨림까지 사라졌다. 목 터지게 떠들고, 손에 쥐가 나도록 수식을 휘갈겼더니 어느 틈에 그렇게 돼 있었다. 팔자에 없는 선생 노릇이 낳은 ‘부작용’이었다. - P14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런 게 아니구. 내가 먹는 걸 그 언니가 보는 게 싫었어요. 아저씨만큼 친한 것두 아니구."
그녀가 뜻 없이 뱉은 ‘친하다’는 말이 나를 놀라게 했다. 그 말이 누군가의 입에서 그토록 순수하게 흘러나오는 것을 나는 오랜만에 들었다. - P110

L의 마음이 나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짐작하고 있었다. 마음의 변화란 누구에게나, 언제건 일어나게 마련이다. 오히려 영원히 나에게 집착하는 편이 더 괴로울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아직 그녀와의 관계를 좋아하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변화는 나를 쓸쓸하게 했다. - P120

만일, 닷새 전 내가 인사동에 들르기 전에 우연히 종로통을 걷고 있지 않았다면 나는 L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내가, 어젯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그녀의 자췻집 앞을 배회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L과 엇갈리고 말았을 것이다. 바로 어제가 L이 그 집에 들어간 마지막 날이 되었으므로. - P137

담담하게 나는 말했다.
"괜찮을 거야."
내 건조한 기질이 도움이 되는 때도 있는 것이다. 담요의 온기 때문이기도 했겠으나, 그녀의 경련이 차츰 수그러들었다. 그녀의 눈물이 그치고, 금이 간 눈이 감기고, 입술의 떨림이 멈출 때까지 나는 그녀의 차가운 손을 말없이 쥐고 있었다." - P150

그 얼굴은 이렇게 말하구 있었어요. 거짓말쟁이거나 위선자거나, 타고나길 신부나 스님이 됐으면 좋았을 사람이겠지. 평범한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란 가끔가다 있는 법이니까. 그런데 대체 얜 이런 얘길 나한테 왜 하는 거야? - P16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런데 우리는 초중고뿐만 아니라 대학에서조차 아직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엄청난 낭비를 하고 있어요. 2014년에 서울대 교수학습개발센터에 근무하던 이혜정 교수가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라는 책을 냈어요. 서울대에서 많은 학생을 대상으로 실증 연구를 해 보니, 교수가 수업 시간에 한 이야기를 토씨 하나도 안 빼먹고 필기해서 그대로 답안지에 써 내는 게 에이 플러스를 받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더래요. 이게 우리나라 최고 대학의 모습이라면 정말 우리나라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 P78

물론 우리나라에서 프랑스나 독일, 스웨덴을 이야기하면 조금 괴리감이 느껴지지요. 너무 먼 나라 이야기 같고요. 우리 현대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나라는 미국과 일본이니까요. 그런데 이 두 나라에는 모두 대학 서열(랭킹)이 있어요. 미국의 『USA 투데이』 같은 언론에서는 아예 1년에 한 번씩 미국 대학 랭킹을 1등에서 100등까지 대서특필합니다. 그래도 한국만큼 대학 서열이 심하지는 않아요. 우리는 대부분의 분야에서 1등이 서울대라고 보잖아요. 하지만 미국은 하버드, 프린스턴, 예일, 엠아이티(MIT), 스탠퍼드, 캘리포니아 공대 등이 있어 분야별 1등이 다른 데다가 대학들 사이의 격차가 우리보다는 확실히 작아요. 또 사립대 등록금이 너무 비싸기 때문에 어지간한 중산층도 대학 랭킹에서 아예 사립대 명단을 지우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 P88

이제부터 ‘대학 서열’이 ‘학벌’로 발전하게 된 메커니즘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그러다 보면 ‘정부’와 ‘민간’의 학벌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웬만한 장관, 차관, 검찰 총장 들이 대부분 ‘스카이’ 대학을 나왔습니다. 정부에 학벌이 존재하죠. 그런데 이것이 선배들이 후배들을 끌어 준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걸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정부 내의 학벌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면 곤란합니다. 특히 서울대를 나온 사람들은 아는데, 서울대 출신들은 후배들에 대해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에요. 정부의 학벌은 인위적인 작용보다 ‘제도’의 산물이에요. 특히 심한 대학 서열이 고시 제도와 겹쳤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 P89

사람이 가진 능력 중에 시험으로 드러나는 능력은 부분적입니다. 시험을 잘 보는 사람들은 인간형 자체가 좀 남다르지요. 저는 농담 삼아 ‘시험형 인간’이라고 부르는데요, 인정 욕구와 성취욕이 강한 편이고 지능도 높은 편이고 약간 강박적 성향이 있는 경우도 많아요. 저도 사실 시험형 인간이었습니다. 이과여서 고시와는 좀 거리가 멀었습니다만. 하여튼 입시가 일종의 ‘필터’로 작용해서 ‘스카이’ 대학이 이런 시험형 인간들로 채워지는 겁니다. 이 사람들은 당연히 고시도 잘 보겠지요. 그래서 남들이 7급, 9급에서 시작할 때 5급에서 시작합니다. 시작부터 유리하지요. 좀 승진하다 보면 1, 2급이 보이겠고요. 자, 이 과정이 선배들이 끌어 준 덕인가요? 이 과정에 어떤 인위적 작용이 있나요? 없어요. 대학 서열화와 고시 제도가 겹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정부의 인재 풀이 명문대 출신들로 채워진 겁니다. - P92

여러분이 지금 우리나라 주력 산업인 제조업계의 사장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옛날이 아니라 지금요. 그러면 정부가 계속 ‘갑’일 것 같습니까? 이젠 기업이 정부에게 ‘그냥 방해나 하지 마.’ 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예전에 비하면 완전히 데면데면한 관계가 되었죠. 정부가 갑, 기업이 을인 관계가 해체된 겁니다. 그러면 학벌 구조의 변화는 정부에서 일어나겠어요, 아니면 민간에서 일어나겠어요? 당연히 민간에서 일어납니다. 정부 고위 관료들이 ‘스카이’ 출신이더라도 이들이 민간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민간에서 학벌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거죠. - P1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