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일에 그 정도의 이별은 별로 대수로운 일도 아니니까. 이건 특별한 일이 아니야. 혜인은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다. 그건 그녀가 온갖 종류의 상처를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이 정도 일에 연연하지 말자. 다른 사람들이 겪는 일들에 비하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사람들은 다 이러고 살아, 너만 겪는 일인 것처럼 유난 부리지 마, 스스로를 다그쳤다. - P228

그 사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어. 처음에는 환자들의 말도 잘 들어주고 좋은 표정도 지으려고 애를 썼지. 그런데 오랜 시간 삼교대로 일을 하고, 그것도 너무 많은 일을…… 어느 순간 마음속에서 작은 블록 하나가 빠진 거야. 아주 작은 블록이었는데 그게 빠져버리니까 중요한 부분이 무너진 거지. 근데 본인은 자기가 엉망이 된 것도 모르는 거야. - P271

해설_ 정말 우정은 사랑보다 가볍거나 손쉬운 것일까. 우리는 대개 운명처럼 서로에게 빠져들고 거센 정념에 휘말리는 관계에 낭만성을 부여하며 사랑이라 부른다. 이에 비해 우정은 보다 잔잔하고 느슨하게 거리를 둔 채 이어지는, 하지만 그렇기에 쉽게 끊어지지 않는 견고함을 지녔다고 여긴다. 그러나 십대와 이십대 초반의 우정에 대해서라면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 시절 우리가 지니고 있는 천진함이란 연약하면서도 맹목적인 것이어서, 상대의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를 해석하기 위해 온 신경을 기울이고 희미한 낌새 하나에도 민감해지며 속없이 자신을 상대에게 내어주게 한다. 하지만 이 천진한 무방비함은 미숙함의 다른 말이기도 해서, 관계 끝에는 쉬이 지워지지 않는 상흔들이 남는다. 최은영은 인생의 가장 연한 시기에 순도 높은 우정들이 남긴 흔적들을 좇아 그 강렬한 감정의 밀도를 복구해낸다. - P306

해설_ 최은영은 관계가 연결되고 넓어지는 지점이 아니라 단절되는 지점을 잔인하리만큼 섬세하게 그려나간다. 이것이 짙은 애상을 자아내는 것은 우리가 이 단절에서 어떤 결정적인 이유나 잘못도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소설에는 극적인 각성과 도약의 순간이 없고, 특별한 치유의 순간 역시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소설의 바탕이 되는 주요한 생각 중 하나는 우리가 유일하지도 소중하지도 않으며 끊임없이 대체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부정적으로 치닫는 대신, 실망과 균열을 끌어안은 채 계속되는 평범한 일상의 삶을 의연하게 걸어가도록 한다. 시작도 끝도 분명치 않은 그들의 사랑과 이후의 삶은 여름날의 불꽃놀이보다는 이 불꽃놀이가 끝난 후의 기나긴 여운과 닮아 있다. 하지만 이미 사라졌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것들이 주는 적막한 위로에 기대면서, 우리의 평범한 삶은 그 짧은 여름을 영원히 살아간다. - 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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