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포기한 건 고등학교 3학년 7월이다. 담임이 아버지를 불러 병원에 데려가라고 충고한 게 발단이었다. 병원에 실려 간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담임이었다.
아버지의 분노는 아마 ‘거부’의 한 형태였을 것이다. 아버지에게도 당신의 아들이 세상에다 써주길 바라는 신화가 있었을 테니까. 그럴 재목이 아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오래전 ‘여기’와 ‘거기’의 경계선을 넘었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안에서 악령처럼 발현하는 아내의 모습을 못 본 척하고 싶었을 것이다. - P54

애당초 승민의 눈을 보지 말았어야 했다. 시계를 줍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봤고 주웠으니 버텨야 했다. 설사 최기훈이 팔 걷고 나섰다 하면 끝장을 보는 유의 인간이라 할지라도. - P129

여름밤이 지루하게 갔다. 현선 엄마는 현선이를 불렀고 나는 애타게 잠을 불렀다.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죽도록 피곤했다. 그런데도 정신은 말짱하기만 했다. 시계 때문이 아니었다. 전날 밤 본 승민의 눈이 신경을 자꾸 건드렸다. 어둠 속에서 마주쳤던 눈빛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럴 때마다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불편한 ‘무엇’이 있었다. 그 ‘무엇’의 정체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알려 들면 들수록 혼란만 커졌다.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현자의 목소리가 타이르고 있었다. ‘그놈한테 신경 꺼.’ - P131

그는 40점에 덜컥 감격해버렸다. 나는 때 이른 공치사에 마음이 찔렸다. 공부를 시작한 지 겨우 일주일째였다. 성의를 다하는 것도 아니었다. 귀찮고 힘든 걸 간신히 표 내지 않는 정도였다. 어쨌거나 그는 승민의 소식을 전해주는 파랑새였으므로. - P133

담배 두 대를 연달아 피우고 식당으로 향했다.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자축하는 의미였다. 불면증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한 세숫대야를 마셔도 쿨쿨 잘 듯한 기분이었다. 근심 걱정 없는 밤 아니겠는가. 범죄자의 시간이 끝난 것이다. 대타의 시절도 갔다. 나무늘보 시대도 막을 내렸다. 만식 씨가 등에서 떨어지자 중력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다리만 뻗으면 곧장 달로 날아가 버릴 것 같아 불안하기까지 했다. 만식 씨를 매달고 다니는 동안 근육에 초인적인 힘이 붙었던 것이다. 안면 마비는 완벽하게 풀렸다. 침도 흘리지 않았다. 손 떨림까지 사라졌다. 목 터지게 떠들고, 손에 쥐가 나도록 수식을 휘갈겼더니 어느 틈에 그렇게 돼 있었다. 팔자에 없는 선생 노릇이 낳은 ‘부작용’이었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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