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와 언어에 대한 장자의 원칙적인 입장을 분석해 보았다. 그렇다면 장자는 어떤 식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었으며, 또한 구체적 삶에서 과연 어떤 식으로 언어를 사용했을까? 『장자』의 「제물론」 편에 등장하는 다음의 유명한 에피소드는 우리의 이 같은 궁금증을 해소해 줄 것이다.



원숭이 키우는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 셋, 저녁에 넷을 주겠다"라고 말했다.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러면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겠다"라고 말했다.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 『장자』, 「제물론」



방금 읽어 본 것은 ‘조삼모사’라는 고사로 더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간사한 꾀로 남을 속일 때 흔히 언급되곤 하지만, 장자가 강조하려고 했던 것은 그런 맥락의 의미가 아니었다. 이 에피소드를 읽을 때는 다음과 같은 단서를 고려해야 한다. 그것은 원숭이 키우는 사람, 즉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원숭이들을 무척 아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주인공에게는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다. 경제적 사정으로 인해 원숭이들에게 줄 수 있는 도토리의 양을 7개로 줄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원숭이들을 아끼지 않았다면, 그는 아예 원숭이들을 내다 팔아서 경제적 곤란을 모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잘 키워 온 원숭이들을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주인공은 심사숙고하여 아침에 도토리를 세 개 주고, 저녁에는 네 개를 주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것이 그가 원숭이와 소통하기 위해 제안한 첫 번째 도였다. 아마도 그는 저녁에 많이 주어야 원숭이들이 숙면을 취할 것이라고 추측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첫 번째 제안은 여지없이 거부되고 만다.

주인공은 원숭이들과 대화하기 위한 길을 잘못 뚫은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실망하지 않고 아침에 네 개를 주고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는 두 번째 제안을 다시 내놓는다. 원숭이와 소통하려는 두 번째 도인 셈이다. 이때 다행스럽게도 원숭이들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마침내 원숭이들의 마음에 이르는 길이 새로 만들어진 셈이다.

방금 우리는 "도는 걸어 다녔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고, 사물은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그렇게 구분된 것"이라는 장자의 전언을 풀어 주는 한 가지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보았다. 계속 도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리고 새로운 제안을 계속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모두 원숭이로 상징되는 타자의 타자성 때문이었던 셈이다. 물론 새로 만들어진 도 혹은 언어가 지속적으로 통용 가능한 것으로 남을지의 여부는 여전히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 P487

사실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은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역설에 빠질 때 우리가 흔히 정신적 분열증에 노출된다는 점이다. 베이트슨은 ‘이중구속‘이란 조건 속에서 우리가 분열증에 빠질 수 있다고 지적했던 적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이중구속의 사례로 인용했던 말들이 대부분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벌을 주면서) ‘이것을 벌로 생각하지 마라‘, (처벌을 하면서) ‘나를 처벌의 행위자로 생각하지 마라‘, ‘내가 금지한 것에 복종하지 마라‘, ‘네가 반드시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생각하지 마라‘ …… 등등이다. 이중구속이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에 의해 고통받을 때는 다른 예들이 가능하다. 예를 들면 부모 중 한 사람은 다른 부모의 명령을 더 추상적인 차원에서 부정할 수 있다. 『마음의 생태학』



베이트슨이 든 이중구속의 예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내가 금지한 것에 복종하지 마라"라는 어머니의 말을 생각해 보자. 어머니에게 이 말을 듣는 순간, 아이는 몹시 당혹스러울 것이다. 어머니가 금지한 행동을 수행하는 순간, 아이는 어머니의 말을 따른 것이고 동시에 어긴 셈이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머니가 금지한 행동을 수행하지 않는 순간, 아이는 어머니의 말을 어긴 것이며 동시에 따른 셈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분열증적 상황에 빠지게 될 것이다. 지금 어머니는 자신이 금지한 것을 나보고 하라는 것일까, 하지 말라는 것일까? 그러나 이런 말을 듣는다고 모든 아이들이 분열증에 빠지게 될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들의 변덕이나 경솔함에 의해 내뱉어진 이중구속의 명령을 듣고도 분열증에 빠지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논의를 단순화하기 위해서 베이트슨이 들고 있는 이중구속의 또 다른 예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아이에게 손을 들고 있으라고 하면서 "이것을 벌이라고 생각하지는 마라"라고 아이의 어머니가 말했다고 해보자. 어머니에게서 이 말을 듣고 과연 모든 아이들이 당혹스럽게 생각할까? 간혹 이중구속의 논리에 빠져 분열증을 느끼는 아이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논리적으로 보았을 때 명확한 이중구속의 사례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분열증에 빠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이들이 어머니의 이야기가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그냥 ‘수사학적‘인 표현이라는 사실을 지레짐작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령 그들은 논리적으로는 분명 모순적인 어머니의 말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행동을 잘못했기 때문에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래야 다시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테니까. 네가 꼭 미워서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네가 잘 되기를 바라는 엄마의 마음 때문에 그런 것이란다. 그러니 이것을 벌이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앞서 언급한 에피메니데스의 역설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끝끝내 역설로만 보이는 사람들은 논리를 맹신하는 사람들의 경우뿐이다. 이 점에서는 철학자 러셀도 예외가 아닐 수 없다. "에피메니데스라는 크레타 사람이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했다"라는 명제는 ‘논리‘의 수준에서는 여전히 역설을 일으킨다. 그렇기 때문에 러셀은 1차 명제와 2차 명제를 구분하는 논리적 절차를 통해 이 역설을 없애려는 부질없는 노력을 시도했던 것이다. 하지만 ‘수사학‘의 수준에서는 이 명제가 전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하자 누군가가 ‘너도 크레타 사람이니까 너의 말은 역설이다‘라고 말했다면, 당사자 에피메니데스는 당혹감을 느끼고 침묵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상대방이 대화를 나눌 필요도 없는 고지식한 사람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모든‘이란 단어가 ‘대부분‘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과 대화한다는 것은 난감한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도 없어"라고 말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러셀이나 베이트슨이 이러한 표현을 들었다면 여전히 역설이라고 혹은 이중구속이라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어떤 문장을 역설로 만드는 것은 그 문장의 내용이 아니라 논리를 맹신하는 사람들의 집착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자신의 『국가』 안에서 시인들을 추방하려고 했던 플라톤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플라톤은 시인이 역설적인 표현이나 모순적인 묘사 없이는 자신의 미묘한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데아의 자기동일성만을 추구했던 플라톤은 이 점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마치 사랑의 고뇌에 빠진 애인에게 "나를 사랑하거나 혹은 사랑하지 않거나 둘 중에 하나일 수밖에 없다"라고 따져 묻는 사람과도 비슷했던 것이다.

고대의 플라톤으로부터 현대의 러셀에 이르기까지, 논리중심주의 혹은 이성주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매우 불행한 일일지 모르지만, 사실 논리의 한계는 매우 명확한 것이다. 누구에게든 적용 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논리에는 타자란 것이 전혀 고려되지 않기 때문이다. 논리를 맹신하는 사람들이 대화 상대방, 즉 타자의 속내를 읽으려 하지 않고 말꼬리만을 잡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바로 이런 측면 때문이다. 이 점에서 논리는 보편적인 것 같지만, 그 내면에 지독한 유아론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경향은 논리를 맹신하는 사람이 ‘모든‘ 혹은 ‘~하지만 동시에 ~하지 않는‘과 같은 언어 표현에 과도하게 집착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수사학‘은 항상 타자를 염두에 두고 진행된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수사학은 언어의 표면적 내용에 집착하지 않고 타자의 속내를 읽으려는 인문학적 감수성을 갖추고 있는 사람에게만 적용된다고 할 수 있겠다. 논리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우리에게는 비트겐슈타인의 경우에서 확인되듯이 ‘수사학적 전회‘가 불가피하다고 볼 수 있다. - P506

코멘터리 혜시 VS 공손룡

고대 그리스철학에서 논리가 발달했던 이유는 당시 폴리스가 제한적이나마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던 곳이었다는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인정되는 폴리스 주민으로서 당시 그리스 사람들은 상대방을 폭력이 아니라 논리로 설득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제자백가는 고대 그리스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조건에서 자신들의 사유를 피력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군주들이 자신의 이론을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자신의 철학을 현실화시킬 창구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제자백가의 그들은 다분히 수사학적으로 진행된다. 복잡한 논리보다는 정서적으로 군주를 감동시켜야만 했기 때문이다. 제자백가의 저술에서 논증보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들, 전설, 우화, 에피소드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이것이 곧 동양의 사유가 논리를 거부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인가를 누군가에게 주장한다면, 그의 최종 목적은 상대방이 자기의 주장을 따르도록 설득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제대로 설득할 수 있을까? 그 방법은 물론 설득해야만 하는 상대방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 상대방이 자신과 동등한 권리와 자신과 유사한 지적 상태를 보유하고 있다면, ‘논리’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다시 말해 상대방의 지적인 수준이 자신과 다르거나 혹은 신분의 차이가 현격하다면, ‘수사학’이 가장 좋은 설득의 한 방법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제자백가 가운데 혜시와 공손룡으로 상징되는 명가가 왜 독특한 성격의 ‘논리’를 지향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혜시가 ‘합리론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고 공손룡이 ‘경험론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상가는 결국 자신들과는 다른 입장과 지위를 가진 한 나라의 군주들을 혹은 다른 사상가들을 상대하면서 설득의 논리를 피력했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 P569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죽여 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 그렇게 한다면 비로소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임제어록』



정통 인도철학에서 해탈은 윤회의 수레바퀴로부터 벗어나서 다시는 윤회하지 않고 우리의 아트만이 브라흐만에 머물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불교에서의 해탈은 본질과 실체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났을 때의 자유를 상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해탈이란 다른 어떤 것의 지배도 받지 않고 스스로 주인으로 서게 되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임제가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죽여 버려라"라고 그토록 강하게 역설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해탈에 대한 지나친 열망 때문에 자기 내면에 부처의 모습이 자꾸 떠오르면 이것마저도 제거해야 한다고 보았다. 부처가 되려는 열망은 고통을 낳아 오히려 해탈하는 데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외적으로 스승을 만났을 때 그 스승이 자신의 모범이나 혹은 이상향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결국 그 스승도 제거하라고 말한다. 스승을 본받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집착이며 해탈의 장애물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임제가 현실적으로 직접 스승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권위의 상징으로서 내면에 자리 잡은 스승의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이런 그에게 종밀의 자성청정심은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아마도 그는 ‘자성청정심‘을 비유하는 맑은 거울 자체를 깨 버려야 해탈할 수 있다고 역설했을 것이다. 임제가 죽이라고 역설했던 대상들은 사실 구체적인 현실적 대상들이 아니라, 내면에 우리를 지배하는 주인들로 들어서 있는 이상향 혹은 특정 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가 죽이려고 했던 대상은 프로이트의 용어를 빌리자면 ‘초자아‘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육체적 욕망을 반영하는 이드, 사회적 금기를 반영하는 초자아, 그리고 자아라는 마음의 위상학을 고려한다면, 초자아를 제거했을 때 남는 것은 자아와 이드뿐일 것이다.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조건도 그대로 남겨지지만 말이다. 초자아를 제거한 자아는 이제 자신의 육체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 사이를 직접 매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임제의 다음 구절은 이런 측면에서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임제가 법당에 오르면서 말했다. "‘벌거벗은 신체‘에 하나의 ‘무위진인‘이 있어서 항상 그대들의 얼굴에 출입하고 있다. 아직도 이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거듭 살펴보아라." 『임제어록』



집착의 근원인 이상적인 초자아를 제거하는 순간, 우리의 자아는 자유를 얻게 된다. 임제의 ‘무위진인‘이란 것은 바로 자유를 얻은 자아를 의미한다. ‘무위‘라는 말은 정해진 자리가 없다는 뜻이다. 선생 앞에서는 제자의 자리, 군주 앞에서는 신하의 자리, 아내 앞에서는 남편의 자리, 학생 앞에서는 선생의 자리, 남편 앞에서는 아내의 자리 등, 자리라는 것은 바로 자신에게 기대되는 임무나 역할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임무나 역할로 인해 우리는 자신의 삶을 검열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리‘란 결국 앞서 말한 초자아의 기능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임제가 참다운 사람, 즉 진인의 수식어로 ‘자리가 없음‘을 든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주의를 기울여 보아야 할 것은, 초자아가 제거되었을 때 비로소 자아와 이드는 서로 화해하게 된다는 점이다. 초자아가 진정으로 우려했던 것은 바로 육체적 욕망, 즉 이드가 자아를 지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초자아를 제거한 자아는 이제 이드를 검열할 이유가 없어진다. 이제 우리 자아는 이드의 욕망, 혹은 육체적 역능을 마음껏 향유하는 주체가 된다. 임제가 "‘벌거벗은 신체‘에 하나의 ‘무위진인‘이 있어서 항상 그대들의 얼굴에 출입하고 있다"라고 말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벌거벗은 신체란 바로 검열로부터 벗어난 우리의 육체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초자아를 제거하자마자 자아는 무위진인이 되고 결국 벌거벗은 신체와 화해하게 된다. 자유를 얻은 우리가 신체적 자아이면서도 동시에 자아적 신체로 통일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위진인 혹은 벌거벗은 신체는 어떻게 현실의 삶을 영위하게 될까?



불교의 가르침에는 특별히 공부할 곳이 없으니, 다만 평상시에 일없이 똥을 누고 소변을 보며,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며, 피곤하면 누워서 쉬는 것일 뿐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비웃겠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알아들을 것이다. 옛사람은 "외부로 치달아서 공부하는 자들은 모두 멍청한 놈들이다"라고 하였다. 그대들이 어느 곳에서나 주인이 된다면 자신이 있는 그곳이 모두 참될 것이다. 『임제어록』



평상심이 바로 도라고 사자후를 토했던 선종의 정신은 바로 이로부터 생긴 것이다. 세계에 대한 모든 생각이 단지 마음으로 수렴된다고 이야기했던 불교의 사유가 이제 임제 선사를 통해서 생활과 몸의 세계로 내려오게 된 것이다. 구체적 삶의 세계 속에 이미 진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임제의 통찰은, 비트겐슈타인의 다음 이야기를 통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에 오직 사다리를 통해서만 올라갈 수 있다면, 나는 거기에 도달하려는 것을 포기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정말로 가야만 하는 곳, 그곳에 나는 원래 이미 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사다리에 의해 도달될 수 있는 곳은 나에게 흥미를 주지 못한다. 『문화와 가치』



『논리철학논고』에서 청년 비트겐슈타인은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한다"라고 강조했던 적이 있다. 이것은 물론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면서 ‘말할 수 없는 세계‘로 건너가려는 그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철학적으로 성숙해지면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초월에의 의지를 스스로 내던지고 만다. "사다리에 의해 도달될 수 있는 곳은 나에게 흥미를 주지 못한다"라고 술회할 정도로 말이다. 마침내 그는 임제가 도달했던 생활 세계에 대한 긍정에 이르렀던 셈이다. "내가 정말로 가야 하는 곳, 그곳에 나는 원래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배변의 욕구가 느껴지면 배변을 하고, 추우면 옷을 입고, 배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누워서 쉰다. 너무나 쉽지 않은가? 지금 임제는 자유를 되찾자마자, 우리가 신체적 역량과 정신적 역량의 통일 속에서 삶을 영위하게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일상적인 사람들은 배변의 욕구를 느끼지만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서 참는다. 또 그들은 춥지만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 옷을 입지 않는다. 그들은 배고프지만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서 먹기를 거부하기도 한다. 심지어 그들은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 피곤하지만 졸음을 쫓기까지 한다. 이것은 그들이 자신의 삶의 역량이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를 숭배하기 때문이다.

다른 무엇인가의 자리에는 ‘자본‘, ‘국가‘, ‘관습‘, ‘사회적 통념‘, ‘이상‘, ‘신‘, ‘부처‘, ‘불성‘, ‘자성청정심‘, ‘인간의 본성‘ 등 어느 것이라도 들어올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부자유가 놓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임제는 자신의 - P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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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곳은 목욕지다. (…) 일간이나 식상이 목욕지에 들어가면 옷 벗 215 고 목욕할 일이 생기니, 젊은 남녀는 쉽게 사랑이 이뤄지고, 노인은 입원하거나 수의를 입기 쉽다. 연예인처럼 인기를 먹고 사는 사람들은 식상이 목욕지에 들어가면 인기가 폭발한다. 남자는 재 목욕지에서 여자는 관 목욕지에서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나거나 재물이나 명예가 목욕할 일이 생기기 쉽다.
사주의 육친 하나하나를 대운·세운과 관련하여 12운성으로 각기 그 운기를 보고 해당 육친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추측하는 것이 사주를 보는 것이다. 관이 잘 흘러가고 있으면, 남자에게는 직장이나 명예가 튼튼하게 다져지고 자식들이 잘 자랄 것이고, 여자에게는 남편이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할 것이다.
그런데 보통 관이 잘 흘러갈 경우 그 반대편에 있는 비겁이 나쁘게 흘러가 형제들이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많으니, 사주 구조가 아주 좋지 않은 이상 모든 것이 좋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금이 관이고 그것의 운이 잘 흘러간다면, 그 반대편에 있는 비겁인 목은 운이 나쁘게 흘러 잘 되기 어렵다는 말이다. - P214

원래 인생에서 가장 신나는 시기가 식상관의 기운이 왕성할 때다.
(…) 원래 사주에서 가장 고달픈 시기는 인성 대운이다. 인성은 팔다리나 재주로 사용되는 식상관을 극해 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식상관 운에는 팔다리를 마음껏 움직이며 재주를 부리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바로바로 하면서 재미있게 보낸다.
그런데 상관 대운에는 말 그대로 나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정관을 극해 함부로 무질서하게 노니, 유년 시절에는 가출을 할 수 있고 그 이후에는 바람을 피우는 등 문제 많은 삶을 살기 쉽다. 더구나 원국에 231 상관이 있다면 그 기운의 극성으로 말미암아 삶이 평탄치 않지만 연예인과 같은 직업을 가지면 그것으로 그 기운을 해소하면서 인기를 얻을 수 있다.
상관은 일간이 생하는 오행이면서 음양이 다르기 때문에, 일간이 그것과 음양이 맞아 그 기운을 마음껏 분출한다. 기운을 양껏 받은 상관은 나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정관을 극하니, 윤리도덕은 물론 법규까지도 틈만 나면 무시하고 주색잡기에 골몰하게 된다. 상관이 왕성한 사람이 회사에 들어가면 정관과 맞서기 때문에 노조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군에 갈지라도 편한 보직을 맡게 된다. 이에 비해 식신은 일간과 음양이 같아 기운은 마음껏 분출하지 않으면서 나를 가장 심하게 닦달하는 편관을 극해 삶을 편안하게 한다. 눈치 보지 않고 밥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뜻으로 식신이라고 했는데, 약아빠진 상관에 비해 순진하고 착하다.
관은 나를 극하는 것이지만 정관은 일간과 음양이 맞아 나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반면 편관은 나와 음양이 맞지 않아 나를 아주 심하게 극하게 된다. 간지의 특성과 육친을 결합하여 함께 볼 경우 갑인목이나 庚申금이 편관으로 사용된다면, 그 사람의 거칠고 억센 성질을 알아 주어야 한다. 폭발하듯이 분출하는 갑인목과 내리꽂듯이 수렴하는 경신금이 편관으로 사용된다면, 편관이라는 육친의 특성에 간지 특유의 특성까지 합세하여 사람을 닦달할 때 조금도 인정사정을 봐주지 않기 때문이다. 다소 어려운 설명일 수 있지만 육친을 볼 때도 이렇게 간지의 특성까지 결합해서 봐야만 더욱 정교하게 해 232 석할 수 있다는 말이다. - P230

2. 세운 파악하기
앞에서 10년씩 흘러가는 대운은 직접적인 환경의 변화라고 했다. 235 이에 비해 세운은 그 환경을 하나의 현실로 구체화시켜 나타나게 하는 힘이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통해 오행의 변화를 어느 정도 이해했다면, 간지들이 12운성에서 사지·묘지·절지처럼 어렵고 힘든 환경에서는 소멸하기 쉽고, 장생·건록·제왕처럼 힘이 왕성한 곳에서는 건재하기 쉽다는 점을 알 것이다. 세운의 해석은 간지가 어떤 환경 속에서 어떤 모양으로 구체적으로 변화하는지 살피는 것으로 사주 풀이의 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주 풀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대운과 세운이 같은 방향으로 뚜렷하게 흘러가지 않고 서로 엇갈리게 흘러가거나 어정쩡한 상태로 흘러가서 명확하게 단정을 내리기 어려운 경우다.
대운에서 어떤 간지가 묘지·절지로 흘러가고 세운까지 그렇게 흘러간다면 그 간지에 해당하는 육친은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이럴 경우에 해당 육친이 관성이면 자식이나 남편을 잃기보다는 명예나 직장 등을 잃는 것이 낫고, 재성이면 부인이나 아버지를 잃기보다는 재물을 잃는 것이 나으며, 인성이면 어머니를 잃기보다는 문서나 자격 등을 날리는 것이 낫다. 사람을 잃기보다는 다른 것을 잃는 편이 낫다는 것인데 물론 그것이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
대운은 묘지·절지로 흘러가는데 세운이 건록·제왕지로 흘러간다 236 면 추워야 할 겨울이 별로 춥지 않아 해당 간지에 잠시 별 탈이 없는 것으로 보면 된다. 그러나 어떤 간지의 대운이 묘지·절지라면, 그 간지는 기진맥진한 상태에 있어 조금만 충격을 받아도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반대로 대운은 건록·제왕지로 흘러가는데 세운이 묘지·절지로 흘러간다면, 화창한 봄날 가벼운 차림으로 바깥에 나갔다가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닥쳐 잠깐 추위에 떠는 경우이니, 1년이라는 잠깐의 운일지라도 이때는 몸을 사려야 한다. 1년씩 흐르는 세운보다는 10년씩 흐르는 대운의 영향이 크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세운에서도 큰일은 반드시 몸을 사리고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운이 기운이 약해지는 쇠·병·사로 흘러가면 사건이 일어날 확률이 적어지는데, 세운도 그렇게 흘러간다면 더욱 그러하니, 대운과 세운의 영향을 적당히 가감하여 추리하면 된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대운이 나쁘게 흐르고 세운마저 나쁘게 흐를 때, 사업을 관두었다가 세운이 다시 겨우 고개를 내밀 때 사업하고 싶은 욕심에 몸이 근질거린다. 이럴 때는 그 운이 6~7년 정도 세운에서 온 것임을 단호하게 일러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동안 억누르고 있던 것을 한번에 만회하려고 크게 투자를 했다가 다시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망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런 때는 보통 인성 대운이니 재를 문서로 바꾸는 등으로 사업 규모를 최소로 축소하여 절약하며 지내라고 해야 한다.
간지의 힘을 따질 경우 원국과 대운 및 세운을 결합해서 함께 봐야 한다. 원국에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대운과 세운이 좋으면 큰 그 237 릇이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되는 경우이고, 원국에선 약한 힘을 가지고 있는데 대운과 세운이 좋으면 작은 그릇이 잘나가는 경우다.
원국은 강한데 대운과 세운이 약하면 원래의 특성을 절대 꺾지 못해 고난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반면 원국이 약한데 대운과 세운마저 약하면 원래의 특성을 꺾고 다른 일을 하기 쉽다. 원국의 힘이 강한 간지는 큰일을 할 수 있는 선천적 특성이 있어 운이 나쁠지라도 원래의 강한 힘 때문에 그것을 포기할 수 없고, 원국에서 약한 간지는 운이 나쁘면 그 힘이 약하기 때문에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작은 그릇일지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운이 점점 좋아진다면 즐겁게 살 수 있고, 큰 그릇일지라도 운이 나쁘다면 그 인생은 아주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다만 큰 그릇은 운이 좋든 나쁘든 원래의 뜻을 포기하지 못하고 그대로 살기 때문에 때를 만나면 세상에서 큰일을 하고 때를 만나지 못하면 자신은 물론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까지 고통스럽게 하기 쉽다. 작은 그릇이 그때마다 상황에 따라 이것저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원래 타고난 특성이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주를 볼 때 먼저 원국에서 그 그릇과 특성을 파악하고 이어 대운을 보면 그 사람의 전반적인 인생 행로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세운은 이와 같은 원국과 대운의 흐름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음양오행의 이치를 이해하고 사주를 보면 볼수록, 대운과 세운은 우리에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분명히 그 자국을 날카롭게 남기고 떠남을 절실하게 깨닫게 한다. - P234

식상관을 쓰는 경우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자신의 뿌리가 있어 강하게 식상관을 쓰는 경우는 운동선수가 될 수 있고, 자신의 뿌리가 없이 강하게 식상관을 쓰는 경우는 예술가나 소설가, 연예인 등이 될 수 있다. 특히 자신의 기운이 약하면서 목·화로 식상관을 사용하는 경우는 그 발랄함과 화려함 때문에 연예인이 될 수 있는데, 사주에서 식상관이 목욕지에 있어야 좋다. 연예인이 대운에서 식상관에 목욕지가 들어오면 10년 동안에 인기가 폭발하여 국민적인 사랑을 260 받는 큰 명예를 누릴 수 있다고 보면 된다. 인성이 있으면서 식상관을 쓰는 경우는 자격을 가지고 전문 기술에 종사하는 것이어서 전문직이 될 수 있다.
목·화로 식상관이 발달하면 그 성격이 아주 발랄한 반면 금·수로 식상관이 발달하면 우울한 성격이다. 아주 간혹 슬픈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의 자살 소식이 들려온다. 금·수의 수렴·응축하는 특성 때문에 우울한 노래를 잘 부르는데, 그 노래에 심취해서 계속 부를수록 금·수의 우울한 기운이 증폭되어 결국 그렇게 슬픈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이름에 목·화의 기운을 강하게 넣어 주고, 집을 동남쪽의 햇빛이 잘 드는 곳으로 정해야 하며, 옷도 푸르고 붉은색으로 입어야 한다. - P259

사주 인자가 공망이 되면 육친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데, 공망을 충으로 때리면 그 작용을 되찾아 육친의 역할을 회복한다.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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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멘터리 도킨스 VS 마투라나
도킨스는 인간의 모든 행동이 유전자의 자기 보존 본능에 따라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사실 도킨스는 플라톤에서부터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에 이르기까지 통용되던 철학적 생각을 유전자라는 과학적 발견을 이용하여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따를 때 인간 개체는 유전자라는 진정한 주체의 매체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이같은 도킨스의 논리에 근거하면, 우리 개체는 이제 자신의 몸과 관련된 모든 행동들에 대해 면죄부를 받게 된다. 모든 것들이 이미 유전자가 가진 이기적 자기 보존의 욕망으로부터 나왔다고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도킨스의 생각에는 살아가고 있는 구체적 생명체를 경시하게 되는 논리가 잠재되어 있다. ‘자기생산’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생명체에 대한 마투라나의 통찰이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그도 유전자의 중요성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는 유전자는 오직 살아 있는 생명체의 요소로서만 의미가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유전자는 생명체에게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도킨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절대적이고 유일한 요소는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생명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동적인 자기생산의 능력이었다. 물론 이런 능력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외부와의 우발적인 마주침에 상당 부분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투라나가 이야기하는 진화 과정은 생물체가 벌이는 일종의 게릴라전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적진에 뛰어들어 적이 남긴 무기나 식량으로 삶을 영위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투라나의 통찰은 스승보다 먼저 죽은 바렐라라는 제자, 그리고 바렐라와 함께 작업했던 톰슨이라는 인물을 통해 지금도 발전되고 있다. 마투라나의 통찰이 가진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중요성을 확인하려면, 톰슨이 2007년도에 출간한 대작 『삶 속의 마음』을 다시 넘겨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생명과 마음에 대한 새로운 통찰뿐만 아니라 동양사상, 특히 불교와 마투라나 사이의 대화 가능성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415

슈미트는 전체 인류를 포괄하는 세계국가라는 것은 결국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모든 인류가 동지가 된다면 이것은 결국 ‘적과 동지’라는 범주의 폐기이자 동시에 정치적인 것의 폐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적도 설정되지 않는다면 정치적인 것이 성립할 수 없고 어떤 국가도 존립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세계를 하나의 동지로 이루어진 평화적 집단으로 만들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본 것이다. 이 때문에 슈미트는 "정치적 세계란 다원체이지 단일체가 결코 아니다"라고 단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두 차례에 걸쳐 발발했던 세계대전으로 세계평화가 도래할 것이라는 착각을 여지없이 공격하고 있는 대목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슈미트의 비관론이 날카로움을 발한다. 그는 국가란 어떤 식으로든지 상호 간의 대립과 갈등을 조장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주요한 양분으로 삼아 존속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슈미트의 생각 이면에는 인간이란 존재가 끊임없이 적과 동지라는 정치적 범주를 통해서 편가르기를 할 것이라는 비관이 깔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의 억압과 국가 사이의 전쟁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슈미트의 지적을 다시 한번 진지하게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그것은 ‘적과 동지’라는 범주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에 대한 고민일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불행하게도 너무나 정치적이지 않은가? 학연, 지연, 혈연 등은 언제든지 ‘적과 동지’라는 정치적인 대립으로 점화될 수 있는 기폭제가 아닐까? 학벌을 가로지르고 지연을 가로지르며 혈연을 가로지르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적과 동지라는 범주를 폐기할 수 있단 말인가?
가령 슈미트의 통찰이 타당하다고 한다면, 우리는 국가의 고질적인 억압과 국가 간의 반복되는 전쟁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추상적으로나마 한번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정치적인 것’의 범주인 ‘적과 동지’를 해체하는 데 있다. 모든 짝 개념이 그렇지만, ‘정치적인 것’을 폐기하기 위해서는 ‘적’이란 범주나 ‘동지’라는 범주를 제거해야만 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동지’로 보거나, 아니면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적’으로 보면 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유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자신마저 적으로 삼는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자신을 적으로 삼는 태도는 일종의 자살행위와 같다. 현실적으로 ‘동지’라는 범주를 완전히 폐기하려는 후자의 방법은 일체의 부정 없이 오로지 자신의 삶을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형식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철학사를 살펴보면 모든 사람을 ‘동지’로 보는 입장을 취했던 대표적 인물로 서양의 경우 예수를, 동양의 경우 겸애를 주장했던 묵자를 언급하곤 한다. 반면 자신의 삶을 절대적인 긍정의 대상으로 삼은 대표적 인물로 서양의 경우는 에피쿠로스나 슈티르너를, 동양의 경우는 양주나 장자를 든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나 슈티르너, 양주나 장자 역시 그들이 궁극적으로 기대했던 것은 ‘자유로운 연대’라는 공동체 형식이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 P424

너는 들어 보지 못했느냐?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아름다운 궁궐의 음악을 연주해 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하였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하기만 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결국 죽어 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 아니다. 『장자』,「지락」 - P436

장자는 노나라 임금의 비유를 통해 새로운 유형의 행동 원리를 제안한다. 그것은 공자처럼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도 행하지 말라"라는 원리가 아니라 "남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라는 원칙으로 정리될 수 있겠다.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상대를 대하지 말고 오히려 나는 원하지 않더라도 상대가 정말 원하는 것으로 그를 대우하라는 말이다. 장자의 비판을 통해 우리는 공자 사상이 가진 가능성과 한계를 직감할 수 있다. 그의 위대함이 타자에 대한 감수성에 있었다면, 그의 한계는 그가 제안한 행위 원리가 타자에 대한 그의 감수성에 걸맞지 않게 폭력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데 있었다. 그렇다면 공자가 제안했던 최고의 가치, 즉 인이란 덕목도 결국 이런 한계를 가지고 있는 개념이 아니었을까? - P437

불교에서는 인간의 실존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를 오온이라고 부른다, 이 다섯 가지 요소들은 크게 두 가지 부분, 즉 ‘몸’이라는 물질적인 부분과 ‘감각’·‘지각’·‘성향’·‘의식’이라는 심리적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싯다르타가 인간을 종종 명색이라고 부른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명색이란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심리적인 통일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오온이 중요한 이유는 싯다르타가 집착이 일어나는 메커니즘을 이 오온을 통해 설명했기 때문이다. 먼저 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실존적 괴로움을 이야기하는 것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그의 말대로 생로병사라는 인간의 생명 과정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낙심의 감정도 괴로움이며, 불쾌한 것과 접촉하고 유쾌한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며, 바라는 것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도 괴로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그는 이런 괴로움의 기원을, 오온이란 것이 ‘자아’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것이라고 집착하는 데서 찾았다. 사실 이 표현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마치 싯다르타가 오온과 무관한 자아를 인정했던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미 그는 "인간을 이루는 다섯 가지 덩어리들"이라고 이야기했다. 이것은 싯다르타가 자아를 오온과 무관한 별도의 기능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에게 있어 자아란 오온이 결합되어 발생한 일종의 표면 효과에 불과한 것이었다. 마치 다양한 부품과 연료가 모여서 자동차가 움직이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오온을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자아의 착각은 어디서부터 유래하는 것일까?
예를 들어 몸이 건강하였을 때 오온이 결합되어 나타난 자아를 자아A로, 그리고 몸이 병들었을 때 나타나는 자아를 자아B라고 가정해 보자. 자아 A로 있을 때의 건강한 몸을 기억하고 있다면, 자아 B는 자신의 현재 상태에 대해 슬픔과 비탄의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의식’의 기능이다. 의식은 기억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자신을 구성하는 것은 병든 몸과 나머지 네 심리적 요소로 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아 B는 의식이 가진 기억의 힘으로 자신이 원래 가졌던 건강한 몸을 지금 상실했다고 느끼게 된다. 싯다르타가 "몸, 감각, 지각, 성향, 의식을 나의 자아가 가진 것이라고 집착한다"라고 이야기한 것이 바로 이런 의미였다고 볼 수 있다. 자아 B가 자신의 것이라고 집착하고 있는 것은 현재 자신을 구성하는 오온이 아니라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과거의 오온, 결국 자아A라고 할 수 있다.
싯다르타가 분석하고 있는 집착의 메커니즘은 사실 아직도 유효한 면이 있다. 그의 통찰은 육체적 상해를 입은 사람, 실연을 당한 사람, 부자였다가 가난해진 사람, 권력을 잃은 사람이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유를 잘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건강했을 때, 사랑에 빠졌을 때, 부자였을 때, 권력을 가졌을 때 구성된 과거의 자아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과거의 오온 상태에서 파생되어 나온 자아에 대한 현재의 집착을 무화시키는 것밖에 없다. 싯다르타의 유명한 무아론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출현한 것이다. 하지만 이 점 때문에 싯다르타의 무아론을 아지타의 경우처럼 동일한 허무주의적 발상이라고 쉽게 비판해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부정했던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불변할 것이라고 믿어진 과거의 자아이지, 현재의 오온들이 결합해 만들어 낸 자아의 모습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직면한 실존적인 현재 자아의 모습에 대해선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싯다르타의 정신이 새로운 마주침, 그리고 그로부터 야기되는 새로운 자아의 생성을 긍정하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 P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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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구연에게는 양간이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양간은 부양현의 주부를 맡고 있었다. 육구연이 부양을 지날 때, 양간은 그에게 "본심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육구연은 맹자가 말했던 ‘사단‘이 바로 본심이라고 대답하였다. 또다시 양간은 "사단이 본심이라는 점은 어려서부터 이미 알고 있던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본심인가"라고 묻다가 때마침 부채 장수가 관아에 분규를 고발해오자, 양간은 즉석에서 그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였다. 이 때 육구연은 "방금 그대가 송사를 판결할 때, 옳은 것에 대해 그 옳음을 알고, 그른 것에 대해 그 그름을 아는 것이 바로 그대의 본심이다"라고 말했다. 양간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깨달았다. - P277

주희와 육구연이 논쟁했던 초점은 학문 공부에서 심성의 도덕 함양과 경전의 연구,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보고 처리할 것인가에 있었다. 육구연이 볼 때 학문하는 목적은 오직 도덕 경지를 실현하는 것인데, 경전의 학습이나 외부 사물의 연구는 이러한 목적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의 본심은 도덕의 근원이므로 사람의 양심 구조를 확대해 나가서 완벽하게 한다면, 이러한 목적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육학의 체계에서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고, 마음을 보존하는 공부는 독서와 궁리를 수단으로 삼을 필요가 없다. 육구연은 요순 이전에 책이나 경전이 없었는데도 요순이 성현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성현이 되는 데 독서가 반드시 필요한 방법은 아니라는 점을 설명해 준다고 생각하였다. - P288

육구연은 ‘의로움‘과 ‘이로움‘의 문제를 중심으로 강연하였다. 그는, 모든 사람들의 사상은 그들의 일상적인 습관에 의해 결정되고, 사람들의 습관은 그들의 지향과 동기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하였다. 한 사람의 지향과 동기가 ‘의로움‘에 있다면 그의 습관과 깨달음은 ‘의로움‘에 있게 되고, 그 지향과 동기가 ‘이로움‘에 있다면 그의 습관과 깨달음도 ‘이로움‘에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군자가 되고자 하며 소인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라면, 우선 자신의 ‘뜻‘을 검사하여 자신의 추구와 지향이 ‘의로움‘인가 ‘이로움‘인가를 살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모름지기 우선적으로 자신의 정신 세계 속의 가치를 정확하게 수립해야만 하는 것이다.
육구연은, 어떤 사람이 도덕적인 사람(군자)인가, 아니면 부도덕한 사람(소인)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주로 그 사람의 표면적인 행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내심의 동기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어떤 사람이 종일토록 머리를 싸맨 채 성현의 책을 공부한다면, 이러한 행위는 매우 훌륭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공부하는 동기가 단지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을 날리기 위한 것이라면,그를 군자로 부를 수 없다. 육구연이 제시한 예는 그 자리에 있던 많은 학자들의 속마음을 정확히 꿰뚫었다. 그래서 듣는 사람들 모두가 가슴이 뜨끔했던 것이다. 나중에 육구연도 "나는 사람을 판단할 때, 언행을 보지도 않고, 공과를 보지도 않는다. 직접적으로 심장과 간을 도려 낸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요컨대 어떤 사람이 소인인지 혹은 군자인지는, 주로 ‘뜻을 변별하는‘ 것 즉 행위를 결정하는 동기 원칙을 변별하고 살피는 데 달려 있는 것이다. - P300

여기서 조단이 말한 『어록』이란 주희의 어록을 가리킨다. 조단이 볼 때 주돈이의 『태극도설』이나 주희의 『태극해의』에서는 태극 자체가 동정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는 반면, 『주자어류』에서는 태극 자체는 운동하지 못하고 다만 운동하는 기에 편승하여 동정할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마치 사람이 말을 탈 때 그 자신은 결코 달리지 않으면서도 말의 질주에 따라 상대적인 운동을 하는 사실과 같다는 것이다.
조단은 사람이 말을 타는 것에다가 태극의 동정을 비유한 주희의 견해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할 때 사람이 말을 타듯이 리가 기의 움직임에 편승할 뿐이라면, 리의 작용은 전혀 표현되지 못할 것이고, 리는 완전히 피동적인 존재로 전락하여 사물의 운동 과정에서 아무런 작용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그는 사람이 말을 타는 비유를 들더라도 마땅히 산 사람이 말을 타는 경우와 죽은 사람이 말을 타는 경우를 구분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죽은 사람이 말을 탄다면 그저 피동적으로 말 위에 앉아 말의 동정에 따라 동정할 수밖에 없겠지만, 산 사람이 말을 탄다면 주동적으로 말의 나아감과 멈춤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희는 이 두 상황을 엄밀하게 구분하지 않았다. 조단이 생각할 때, 사람이 말을 타는 경우에 대한 주희의 이해는 사실상 죽은 사람이 말을 타는 경우에 불과할 따름이다.
조단이 강조하려 했던 점은 사물의 운동에 대한 리의 능동적인 작용이다. 이러한 능동성은 결코 태극이 시공 안에서 기계적으로 위치를 변동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가 이해한 리의 능동성이란 산 사람이 말을 타는 것과 유사하다. 리는 기 위에 편승하면서도 나아가 기를 주도하고 제어하는 작용도 한다. 따라서 조단이 "태극 자체는 동정하지 않는다"는 주희의 주장에 반대한 이유는, 태극 자체가 운동할 수 있다는 점을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의 운동에 대해 태극이 동정의 소이연으로서 능동적인 작용을 한다는 점을 돌출시키기 위해서였다. 조단의 말로 표현하자면 ‘죽은 리‘를 ‘살아있는 리‘로 변화시킨 것이다. 리학사에서 조단의 이러한 사상은 그 연유가 있다. 이정도 리를 기 동정의 소이연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내재적으로 기의 운동을 지배하고 있는 리는 결코 죽은 리가 아니다. 그러나 주희가 태극의 동정을 논하면서 사용했던 ‘편승‘ 관념으로 리 또는 태극이 기 동정의 소이연이라는 사상을 반영해 낼 수 없다. 그러므로 주희의 이론이 지닌 문제에 대한 조단의 수정은 식견이 있는 것이었다. - P317

"공자와 안연이 즐거워한 것을 추구한다"는 말은 본래 도학이 창립된 초기에 사장과 훈고의 학문을 겨냥하여 사용했던 구호로서, 학문은 마땅히 화려한 문사나 번잡한 훈고를 벗어나 정신의 자유와 발전을 추구해야 함을 뜻한다. 그러나 유가 문화의 궁극적 경향을 살펴볼 때, ‘즐거움‘은 결코 정신 발전의 목표가 아니다. 즐거움은 단지 유학자가 최고의 인격적 경지(仁)에 도달하여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내심의 한 상태에 불과하다. 인은 즐거움을 포괄할 수 있지만, 즐거움은 인을 포용할 수 없다. 만약 정신의 화락과 기쁨을 평생토록 정신 발전의 유일한 목표로 생각한다면, 이는 여전히 안일을 좇는 동기를 전제하는 것이 되어, 궁극적으로 감성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쾌락주의와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또 불교나 도가와의 경계선도 분명치 못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조단이 인의 본원성을 견지하면서 인을 유학 최고의 원만한 경지로서 견지한 점은 유가의 전통에 부합된다. - 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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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오행을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수행을 하지 않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묘하게도 타고난 간지의 형태대로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 P202

오행으로 봐서 어떤 기운이 많으면 그 오행의 특성을 드러내니, 곧 203 목·화가 많은 사람은 분출·확산으로 성미가 급하고 시끄러우며, 또한 금·수가 많은 사람은 수렴과 응축으로 성격이 차분하고 조용하다.
간지의 특성도 봐야 하니, 양목인 갑목이나 인목이 있으면 팽팽한 차 타이어가 터졌을 때 처음 나오는 공기 또는 호랑이가 짐승을 사냥할 때 솟아오른는 것처럼 갑자기 뭔가 내놓는 특성이 있어 머리가 좋으며 앞장서기를 좋아한다. (…)
연·월·일·시의 오행이 서로 낳아 주는 구조로 연결되어 있고 각 간지에 힘이 있으면 최고의 사주인데, 운마저 재나 관을 돕는다면 그 인생의 부귀는 탄탄대로라고 볼 수 있다. 간지가 형·충·파·해로 손상되었으면 그 인생 또한 사고나 병 등으로 고생하는데, 사주 구조대로 살아가는 삶의 모양을 선택하여 그 기운을 해소하면 탈 없이 잘살 수 있다. 형살이 있을 경우 의료나 법률 등을 직업으로 선택하여 그 기운을 적극적으로 써서 해소하면 자신의 몸으로 직접 받는 피해가 적어 수술이나 소송당할 일이 적어진다는 말이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사주 구조의 기질대로 사람의 인생이 흘러가기 때문인데, 동기상응이라 하여 같은 기운이 서로 호응하면서 그런 삶의 형태를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과거 농경 위주의 사회에서는 직업이나 삶의 수단이 단순하여 형· 203 충·파·해 등으로 온전하지 못한 사주를 일방적으로 좋지 않게 봤다. 그러나 손톱이나 발톱까지도 다듬어 멋을 내 주는 네일아트처럼 온갖 직종이 다 있는 현대사회에서는 형·충·파·해 등으로 일그러진 사주를 하나의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보고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의 사주 구조에 삶을 맞추어 가는 것이 문제이지 그 사주 자체를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고 보면 된다. 형이 있으면 양보하고 조정하는 형태의 직업을 찾아서 사용하고, 충이 있으면 부딪힘으로 서로 오고 가는 삶의 형태를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운전이라도 하면 되니, 타고난 구조대로 사는 것이 가장 강하고 유리한 삶의 형태를 만들기 때문이다.
운에서 방해하지 않는 한 사람들이 같은 일을 겪을지라도 각자 자신이 타고난 사주의 구조대로 그 경험을 받아들여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고, 그렇게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만든 모양 그대로 내세까지 가져간다. 죽음으로 비록 그의 몸은 사라질지라도 그 사람이 추구하고 만든 삶의 모양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 형태로 남아 그것을 가장 잘 받아들여 펼칠 수 있는 비슷한 모양의 육체와 시간을 찾아 다시 태어나니, 그것이 다음의 생이다.
삶을 반드시 건전하고 아름답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재의 삶이 가꾸어 놓은 형태 그대로 다음 생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명리학에서 보면 현재의 삶은 전생의 연장선에서 다음의 생을 준비하는 중간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사주를 볼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재와 관이 어떤 구조 205 로 되어 있는지 살펴보는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재와 관에 의지해서 삶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관을 대부분 대학을 졸업한 20대 중반을 전후해 취직으로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이 선천궁인 연주나 월주에 인성과 함께 좋은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 좋다. 재는 40대를 전후로 세상물정을 다소 알아 철이 든 후에 사용하는 것이 좋기 때문에 일주까지 합해 식상관과 좋은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도 괜찮다.
그런데 사주는 근본적으로 음양 운동임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양은 음이 되려고 하고 음은 양이 되려고 하여 소용돌이치는 것이 태극이다. 양에서 음으로 오른쪽으로 뾰족하게 내려오는 것이 금이고, 음에서 양으로 왼쪽으로 뾰족하게 올라가는 것이 목이다. 물론 오행에서 양은 화이고 음은 수다. 일간을 기준으로 음양오행의 이런 특성을 사주에 응용할 때, 일간은 자신과 극단에 있는 재성과 관성을 향해 활기차게 움직이는 것으로 봐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업을 해서 돈을 벌거나 취직을 해서 월급을 받는 모양으로 자신의 삶을 유지하니,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음양 운동에 따라 오행의 균형을 맞추려는 것이다.
관인상생과 식상관생재를 많이 언급하는 이유는 관을 추구하며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성이 필요하고, 재를 추구하며 삶을 꾸리기 위해서는 식상관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곧 글자 그대로 관인상생은 사주에서 관성이 인성을 서로 생하는 구조로 된 것이고, 식상관생재는 식신이나 상관이 재성을 생하는 구조 206 로 된 것을 말하니, 취직을 하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하고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공장이나 농토처럼 상품을 만드는 생산수단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일간과 극단에서 음양 운동을 일으키는 재성과 관성이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식상관과 인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남자의 사주를 볼 경우, 가장 먼저 재와 관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를 보고 사업가인지 월급쟁이인지 판단한다. - P202

천간이 자신의 지지에 뿌리를 내릴 수 없으면 바로 옆의 지지에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지지는 지장간으로 환원하여 동일하게 따지면 되는데, 주로 대운이나 세운에서 어떤 힘을 갖게 되는지 따지면 된다. - P212

그런데 일지 인목(편관)이 시지의 사화(편인)와 인사형이 되어 인성과 관에 변형을 가하거나 또는 배우자궁이 형살을 받고 있으니 형살을 사용하는 배우자를 만날 수 있다. 옆짚에 사는 어머니 친구 분이 간호사로 있는 조카딸을 소개시켜 준다고 해도 만나지 않았는데, 결국 간호사로 있는 배우자를 만나 결혼했으니 운명이 어떻게 그렇게 흐르는지 참으로 신기하다. - P213

다음의 그림을 기준으로 운의 흐름을 쉽게 판별하는 하나의 요령이 있다. 계절의 시작인 간지는 앞의 계절과 자신의 계절에, 계절의 절정인 간지는 뒤의 계절과 자신의 계절에 힘이 있다고 보면 된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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