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와 언어에 대한 장자의 원칙적인 입장을 분석해 보았다. 그렇다면 장자는 어떤 식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었으며, 또한 구체적 삶에서 과연 어떤 식으로 언어를 사용했을까? 『장자』의 「제물론」 편에 등장하는 다음의 유명한 에피소드는 우리의 이 같은 궁금증을 해소해 줄 것이다.



원숭이 키우는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 셋, 저녁에 넷을 주겠다"라고 말했다.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러면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겠다"라고 말했다.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 『장자』, 「제물론」



방금 읽어 본 것은 ‘조삼모사’라는 고사로 더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간사한 꾀로 남을 속일 때 흔히 언급되곤 하지만, 장자가 강조하려고 했던 것은 그런 맥락의 의미가 아니었다. 이 에피소드를 읽을 때는 다음과 같은 단서를 고려해야 한다. 그것은 원숭이 키우는 사람, 즉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원숭이들을 무척 아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주인공에게는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다. 경제적 사정으로 인해 원숭이들에게 줄 수 있는 도토리의 양을 7개로 줄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원숭이들을 아끼지 않았다면, 그는 아예 원숭이들을 내다 팔아서 경제적 곤란을 모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잘 키워 온 원숭이들을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주인공은 심사숙고하여 아침에 도토리를 세 개 주고, 저녁에는 네 개를 주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것이 그가 원숭이와 소통하기 위해 제안한 첫 번째 도였다. 아마도 그는 저녁에 많이 주어야 원숭이들이 숙면을 취할 것이라고 추측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첫 번째 제안은 여지없이 거부되고 만다.

주인공은 원숭이들과 대화하기 위한 길을 잘못 뚫은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실망하지 않고 아침에 네 개를 주고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는 두 번째 제안을 다시 내놓는다. 원숭이와 소통하려는 두 번째 도인 셈이다. 이때 다행스럽게도 원숭이들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마침내 원숭이들의 마음에 이르는 길이 새로 만들어진 셈이다.

방금 우리는 "도는 걸어 다녔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고, 사물은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그렇게 구분된 것"이라는 장자의 전언을 풀어 주는 한 가지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보았다. 계속 도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리고 새로운 제안을 계속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모두 원숭이로 상징되는 타자의 타자성 때문이었던 셈이다. 물론 새로 만들어진 도 혹은 언어가 지속적으로 통용 가능한 것으로 남을지의 여부는 여전히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 P487

사실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은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역설에 빠질 때 우리가 흔히 정신적 분열증에 노출된다는 점이다. 베이트슨은 ‘이중구속‘이란 조건 속에서 우리가 분열증에 빠질 수 있다고 지적했던 적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이중구속의 사례로 인용했던 말들이 대부분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벌을 주면서) ‘이것을 벌로 생각하지 마라‘, (처벌을 하면서) ‘나를 처벌의 행위자로 생각하지 마라‘, ‘내가 금지한 것에 복종하지 마라‘, ‘네가 반드시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생각하지 마라‘ …… 등등이다. 이중구속이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에 의해 고통받을 때는 다른 예들이 가능하다. 예를 들면 부모 중 한 사람은 다른 부모의 명령을 더 추상적인 차원에서 부정할 수 있다. 『마음의 생태학』



베이트슨이 든 이중구속의 예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내가 금지한 것에 복종하지 마라"라는 어머니의 말을 생각해 보자. 어머니에게 이 말을 듣는 순간, 아이는 몹시 당혹스러울 것이다. 어머니가 금지한 행동을 수행하는 순간, 아이는 어머니의 말을 따른 것이고 동시에 어긴 셈이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머니가 금지한 행동을 수행하지 않는 순간, 아이는 어머니의 말을 어긴 것이며 동시에 따른 셈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분열증적 상황에 빠지게 될 것이다. 지금 어머니는 자신이 금지한 것을 나보고 하라는 것일까, 하지 말라는 것일까? 그러나 이런 말을 듣는다고 모든 아이들이 분열증에 빠지게 될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들의 변덕이나 경솔함에 의해 내뱉어진 이중구속의 명령을 듣고도 분열증에 빠지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논의를 단순화하기 위해서 베이트슨이 들고 있는 이중구속의 또 다른 예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아이에게 손을 들고 있으라고 하면서 "이것을 벌이라고 생각하지는 마라"라고 아이의 어머니가 말했다고 해보자. 어머니에게서 이 말을 듣고 과연 모든 아이들이 당혹스럽게 생각할까? 간혹 이중구속의 논리에 빠져 분열증을 느끼는 아이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논리적으로 보았을 때 명확한 이중구속의 사례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분열증에 빠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이들이 어머니의 이야기가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그냥 ‘수사학적‘인 표현이라는 사실을 지레짐작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령 그들은 논리적으로는 분명 모순적인 어머니의 말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행동을 잘못했기 때문에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래야 다시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테니까. 네가 꼭 미워서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네가 잘 되기를 바라는 엄마의 마음 때문에 그런 것이란다. 그러니 이것을 벌이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앞서 언급한 에피메니데스의 역설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끝끝내 역설로만 보이는 사람들은 논리를 맹신하는 사람들의 경우뿐이다. 이 점에서는 철학자 러셀도 예외가 아닐 수 없다. "에피메니데스라는 크레타 사람이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했다"라는 명제는 ‘논리‘의 수준에서는 여전히 역설을 일으킨다. 그렇기 때문에 러셀은 1차 명제와 2차 명제를 구분하는 논리적 절차를 통해 이 역설을 없애려는 부질없는 노력을 시도했던 것이다. 하지만 ‘수사학‘의 수준에서는 이 명제가 전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하자 누군가가 ‘너도 크레타 사람이니까 너의 말은 역설이다‘라고 말했다면, 당사자 에피메니데스는 당혹감을 느끼고 침묵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상대방이 대화를 나눌 필요도 없는 고지식한 사람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모든‘이란 단어가 ‘대부분‘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과 대화한다는 것은 난감한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도 없어"라고 말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러셀이나 베이트슨이 이러한 표현을 들었다면 여전히 역설이라고 혹은 이중구속이라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어떤 문장을 역설로 만드는 것은 그 문장의 내용이 아니라 논리를 맹신하는 사람들의 집착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자신의 『국가』 안에서 시인들을 추방하려고 했던 플라톤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플라톤은 시인이 역설적인 표현이나 모순적인 묘사 없이는 자신의 미묘한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데아의 자기동일성만을 추구했던 플라톤은 이 점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마치 사랑의 고뇌에 빠진 애인에게 "나를 사랑하거나 혹은 사랑하지 않거나 둘 중에 하나일 수밖에 없다"라고 따져 묻는 사람과도 비슷했던 것이다.

고대의 플라톤으로부터 현대의 러셀에 이르기까지, 논리중심주의 혹은 이성주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매우 불행한 일일지 모르지만, 사실 논리의 한계는 매우 명확한 것이다. 누구에게든 적용 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논리에는 타자란 것이 전혀 고려되지 않기 때문이다. 논리를 맹신하는 사람들이 대화 상대방, 즉 타자의 속내를 읽으려 하지 않고 말꼬리만을 잡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바로 이런 측면 때문이다. 이 점에서 논리는 보편적인 것 같지만, 그 내면에 지독한 유아론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경향은 논리를 맹신하는 사람이 ‘모든‘ 혹은 ‘~하지만 동시에 ~하지 않는‘과 같은 언어 표현에 과도하게 집착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수사학‘은 항상 타자를 염두에 두고 진행된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수사학은 언어의 표면적 내용에 집착하지 않고 타자의 속내를 읽으려는 인문학적 감수성을 갖추고 있는 사람에게만 적용된다고 할 수 있겠다. 논리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우리에게는 비트겐슈타인의 경우에서 확인되듯이 ‘수사학적 전회‘가 불가피하다고 볼 수 있다. - P506

코멘터리 혜시 VS 공손룡

고대 그리스철학에서 논리가 발달했던 이유는 당시 폴리스가 제한적이나마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던 곳이었다는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인정되는 폴리스 주민으로서 당시 그리스 사람들은 상대방을 폭력이 아니라 논리로 설득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제자백가는 고대 그리스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조건에서 자신들의 사유를 피력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군주들이 자신의 이론을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자신의 철학을 현실화시킬 창구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제자백가의 그들은 다분히 수사학적으로 진행된다. 복잡한 논리보다는 정서적으로 군주를 감동시켜야만 했기 때문이다. 제자백가의 저술에서 논증보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들, 전설, 우화, 에피소드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이것이 곧 동양의 사유가 논리를 거부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인가를 누군가에게 주장한다면, 그의 최종 목적은 상대방이 자기의 주장을 따르도록 설득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제대로 설득할 수 있을까? 그 방법은 물론 설득해야만 하는 상대방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 상대방이 자신과 동등한 권리와 자신과 유사한 지적 상태를 보유하고 있다면, ‘논리’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다시 말해 상대방의 지적인 수준이 자신과 다르거나 혹은 신분의 차이가 현격하다면, ‘수사학’이 가장 좋은 설득의 한 방법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제자백가 가운데 혜시와 공손룡으로 상징되는 명가가 왜 독특한 성격의 ‘논리’를 지향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혜시가 ‘합리론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고 공손룡이 ‘경험론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상가는 결국 자신들과는 다른 입장과 지위를 가진 한 나라의 군주들을 혹은 다른 사상가들을 상대하면서 설득의 논리를 피력했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 P569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죽여 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 그렇게 한다면 비로소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임제어록』



정통 인도철학에서 해탈은 윤회의 수레바퀴로부터 벗어나서 다시는 윤회하지 않고 우리의 아트만이 브라흐만에 머물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불교에서의 해탈은 본질과 실체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났을 때의 자유를 상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해탈이란 다른 어떤 것의 지배도 받지 않고 스스로 주인으로 서게 되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임제가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죽여 버려라"라고 그토록 강하게 역설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해탈에 대한 지나친 열망 때문에 자기 내면에 부처의 모습이 자꾸 떠오르면 이것마저도 제거해야 한다고 보았다. 부처가 되려는 열망은 고통을 낳아 오히려 해탈하는 데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외적으로 스승을 만났을 때 그 스승이 자신의 모범이나 혹은 이상향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결국 그 스승도 제거하라고 말한다. 스승을 본받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집착이며 해탈의 장애물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임제가 현실적으로 직접 스승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권위의 상징으로서 내면에 자리 잡은 스승의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이런 그에게 종밀의 자성청정심은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아마도 그는 ‘자성청정심‘을 비유하는 맑은 거울 자체를 깨 버려야 해탈할 수 있다고 역설했을 것이다. 임제가 죽이라고 역설했던 대상들은 사실 구체적인 현실적 대상들이 아니라, 내면에 우리를 지배하는 주인들로 들어서 있는 이상향 혹은 특정 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가 죽이려고 했던 대상은 프로이트의 용어를 빌리자면 ‘초자아‘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육체적 욕망을 반영하는 이드, 사회적 금기를 반영하는 초자아, 그리고 자아라는 마음의 위상학을 고려한다면, 초자아를 제거했을 때 남는 것은 자아와 이드뿐일 것이다.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조건도 그대로 남겨지지만 말이다. 초자아를 제거한 자아는 이제 자신의 육체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 사이를 직접 매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임제의 다음 구절은 이런 측면에서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임제가 법당에 오르면서 말했다. "‘벌거벗은 신체‘에 하나의 ‘무위진인‘이 있어서 항상 그대들의 얼굴에 출입하고 있다. 아직도 이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거듭 살펴보아라." 『임제어록』



집착의 근원인 이상적인 초자아를 제거하는 순간, 우리의 자아는 자유를 얻게 된다. 임제의 ‘무위진인‘이란 것은 바로 자유를 얻은 자아를 의미한다. ‘무위‘라는 말은 정해진 자리가 없다는 뜻이다. 선생 앞에서는 제자의 자리, 군주 앞에서는 신하의 자리, 아내 앞에서는 남편의 자리, 학생 앞에서는 선생의 자리, 남편 앞에서는 아내의 자리 등, 자리라는 것은 바로 자신에게 기대되는 임무나 역할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임무나 역할로 인해 우리는 자신의 삶을 검열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리‘란 결국 앞서 말한 초자아의 기능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임제가 참다운 사람, 즉 진인의 수식어로 ‘자리가 없음‘을 든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주의를 기울여 보아야 할 것은, 초자아가 제거되었을 때 비로소 자아와 이드는 서로 화해하게 된다는 점이다. 초자아가 진정으로 우려했던 것은 바로 육체적 욕망, 즉 이드가 자아를 지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초자아를 제거한 자아는 이제 이드를 검열할 이유가 없어진다. 이제 우리 자아는 이드의 욕망, 혹은 육체적 역능을 마음껏 향유하는 주체가 된다. 임제가 "‘벌거벗은 신체‘에 하나의 ‘무위진인‘이 있어서 항상 그대들의 얼굴에 출입하고 있다"라고 말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벌거벗은 신체란 바로 검열로부터 벗어난 우리의 육체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초자아를 제거하자마자 자아는 무위진인이 되고 결국 벌거벗은 신체와 화해하게 된다. 자유를 얻은 우리가 신체적 자아이면서도 동시에 자아적 신체로 통일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위진인 혹은 벌거벗은 신체는 어떻게 현실의 삶을 영위하게 될까?



불교의 가르침에는 특별히 공부할 곳이 없으니, 다만 평상시에 일없이 똥을 누고 소변을 보며,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며, 피곤하면 누워서 쉬는 것일 뿐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비웃겠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알아들을 것이다. 옛사람은 "외부로 치달아서 공부하는 자들은 모두 멍청한 놈들이다"라고 하였다. 그대들이 어느 곳에서나 주인이 된다면 자신이 있는 그곳이 모두 참될 것이다. 『임제어록』



평상심이 바로 도라고 사자후를 토했던 선종의 정신은 바로 이로부터 생긴 것이다. 세계에 대한 모든 생각이 단지 마음으로 수렴된다고 이야기했던 불교의 사유가 이제 임제 선사를 통해서 생활과 몸의 세계로 내려오게 된 것이다. 구체적 삶의 세계 속에 이미 진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임제의 통찰은, 비트겐슈타인의 다음 이야기를 통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에 오직 사다리를 통해서만 올라갈 수 있다면, 나는 거기에 도달하려는 것을 포기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정말로 가야만 하는 곳, 그곳에 나는 원래 이미 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사다리에 의해 도달될 수 있는 곳은 나에게 흥미를 주지 못한다. 『문화와 가치』



『논리철학논고』에서 청년 비트겐슈타인은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한다"라고 강조했던 적이 있다. 이것은 물론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면서 ‘말할 수 없는 세계‘로 건너가려는 그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철학적으로 성숙해지면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초월에의 의지를 스스로 내던지고 만다. "사다리에 의해 도달될 수 있는 곳은 나에게 흥미를 주지 못한다"라고 술회할 정도로 말이다. 마침내 그는 임제가 도달했던 생활 세계에 대한 긍정에 이르렀던 셈이다. "내가 정말로 가야 하는 곳, 그곳에 나는 원래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배변의 욕구가 느껴지면 배변을 하고, 추우면 옷을 입고, 배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누워서 쉰다. 너무나 쉽지 않은가? 지금 임제는 자유를 되찾자마자, 우리가 신체적 역량과 정신적 역량의 통일 속에서 삶을 영위하게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일상적인 사람들은 배변의 욕구를 느끼지만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서 참는다. 또 그들은 춥지만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 옷을 입지 않는다. 그들은 배고프지만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서 먹기를 거부하기도 한다. 심지어 그들은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 피곤하지만 졸음을 쫓기까지 한다. 이것은 그들이 자신의 삶의 역량이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를 숭배하기 때문이다.

다른 무엇인가의 자리에는 ‘자본‘, ‘국가‘, ‘관습‘, ‘사회적 통념‘, ‘이상‘, ‘신‘, ‘부처‘, ‘불성‘, ‘자성청정심‘, ‘인간의 본성‘ 등 어느 것이라도 들어올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부자유가 놓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임제는 자신의 - P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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