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도무지 통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제 대답은 내버려 두라는 겁니다.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을 비난하는 가족과 친지들의 생각을 바꾸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볼까요? 다른 사람이 여러분의 생각을 바꾸려고 한다는 느낌이 들 경우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아마 좋지 않을 겁니다. 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도 바꾸기 싫은데 남들이라고 바꾸고 싶겠습니까?
사람은 저마다 다른 인격체이며 독립해서 활동하는 정보 처리 주체입니다. 이해관계, 경험, 학습, 개인적 성향에 따라 똑같은 상황을 다르게 해석하며 똑같은 정보도 다르게 처리합니다. 이미 지니고 있는 인식과 가치관에 잘 들어맞는 정보는 쉽게 수용하지만 날카롭게 충돌하는 정보는 배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뇌에 ‘폐쇄적 자기 강화 메커니즘’이 있다는 말, 혹시 들어 보셨나요? 그런 것이 정말로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미 믿고 있는 것과 다른 사실, 다른 이론, 다른 해석은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이나 글로 남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는 것이죠. 사람은 스스로 바꾸고 싶을 때만 생각을 바꿉니다. 어린아이라면 모를까, 열다섯 살이 넘어 뇌가 이미 다 자란 사람은 그렇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뭘 할 수 있을까요? 대화하는 것뿐입니다. 강요하지 말고, 바꾸려 하지 말고, 이기려고 하지 말고, 무시하지도 말고, 그 사람의 견해는 그것대로 존중하면서 그와는 다른 견해를 말과 글로 이야기하면 됩니다. 남이 내 말을 듣고 곧바로 생각을 바꿀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중 단 한 조각이라도 그 사람의 뇌리에 남아서, 지금 가진 생각에 대해 지극히 사소한 의심이라도 품을 수 있게 한다면 그 대화는 성공한 겁니다. 이런 일은 실제로 일어납니다. 자신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도 있지만, 바꿀 의지와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죠. - P95

저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학명을 가진 종(種)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도 불신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이성과 욕망을 다 가진 존재입니다. 욕망은 아름답고 또한 추악합니다. 이성은 고결하지만 때로 나약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빛나는 선과 끔찍한 악을 다 저지릅니다. 저는 인간의 사악함은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악함은 누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일부여서 악한 사람 자신도 스스로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회악이 생기면 그 원인을 나쁜 사람한테서 찾는 경우가 많은데, 모든 악이 악한 사람 때문에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소수의 사악함보다 다수의 어리석음이 사회악을 부르는 때가 더 많습니다. - P101

지금까지 여러 직업을 거쳤고, 서로 다른 자기소개서를 숱하게 써 본 사람으로서 자기소개서 때문에 고민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제 생각을 말씀드렸습니다. 노파심에서, 뱀다리가 될지도 모를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자기소개서를 쓰다 보면 조금은 비굴해지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누구에겐가 잘 보이고 싶어서 애쓰는 모습 말입니다. 나는 남들과 똑같이 존엄한 인간이고 똑같이 귀한 소우주(小宇宙)인데 누구에겐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버둥거리다니, 어쩐지 비참한 기분이 들어! 그런 생각을 한 번쯤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런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노력하는 것 역시 좋은 일이 아닐까요? 우리는 그런 노력을 하면서 존엄을 잃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확인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사람은 저마다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독립해서 살아가는 철학적 주체이지만 생물학적으로는 ‘군집(群集)’을 이루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동물입니다.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게 우리의 본성이며 운명입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서로 서로 잘 보여야 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그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고 봅니다. 누군가에게 자기를 제대로 소개하려고 애쓰는 모든 분들의 건투를 빌며! - P126

독서는 타인이 하는 말을 듣는 것과 같습니다. 책을 쓴 사람에게 감정을 이입해서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 그 사람이 펼치는 논리, 그 사람이 표현한 감정을 듣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겁니다. 평가와 비판은 그 다음에 하면 됩니다. 저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글 속으로 들어가 더 많이 배우고 느끼고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읽어야 평가와 비판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감정을 이입해서 책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다음, 자기 자신의 시선과 감정으로 그 간접 경험을 반추해 보는 작업이 비판적 독해라는 말이지요. - P153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을 수는 없죠. 설사 다 읽을 수 있다 해도 굳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으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사귀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의미도 없고요. 행복하게 살려면 나하고 잘 맞는 사람, 통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교감해야 합니다. 맞지 않는 사람과 다투면서 시간을 보내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짧으니까요. 같은 이치로 내게 재미있는 책,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책, 내가 감동받는 책을 읽으면서 사는 게 최선입니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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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한대의 자연력, 광활하고 거대한 지형, 잔해가 깔린 해변, 살아 있거나 썩어 가고 있는 나무로 가득한 황야, 뇌운, 3주 동안 계속 내려 홍수를 일으키는 장마를 보고 충전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경계가 침범당하고 우리가 결코 발길을 들이지 않는 곳에서 어떤 생명체가 자유로이 풀을 뜯고 있는 광경을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혐오감을 일으키고 언짢게 만드는 썩은 고기를 독수리가 뜯어먹고 건강과 힘을 얻는 광경을 보면 기분이 나아진다. 집으로 가는 길옆 움푹 패인 땅에 말 시체가 있었는데, 그 때문에 나는 종종 다른 길로 가야 했다. 특히 대기가 무겁게 가라앉는 밤이면 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 광경은 자연의 강한 식욕과 침범할 수 없는 건강에 대해 확신을 갖게 해주었으며, 그것이 내겐 보상인 셈이었다. 나는 자연이 그토록 생명으로 충만하여 수많은 생명체가 희생되고 서로 먹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차라리 기분 좋았다. 왜가리가 먹어치우는 올챙이라든가 길에서 마차에 친 거북과 두꺼비 등등 연약한 유기체가 과육처럼 그토록 평온하게 으스러뜨려질 수 있다는 사실말이다. 때로는 그 살과 피를 비가 씻어주기까지 하는 것이다! 사고를 당할 위험이 상존하고 있는 인간으로서는 거기에 설명될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여기서 만유의 순결함이라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독은 결코 유해하기만 한 것이 아니며 어떠한 상처도 치명적인 것은 아니다. 동정이란 근거가 없는 감정일 뿐이다. 그것은 일시적인 감정이어야만 한다. 그에 대한 변명은 진부함을 면치 못할 것이다. - P386

그러나 우리는 호기심 많은 승객들이 그러하듯 좀더 자주 우리가 탄 배의 고물 난간 너머를 내다봐야 하며, 뱃밥이나 만들고 있는 멍청한 선원들처럼 항해해서는 안 된다. 지구의 반대편은 우리가 편지를 보내는 이의 고향일 뿐이다. 우리의 항해는 대권항해일 뿐이며 의사는 피부병에 대한 처방을 해줄 뿐이다. 기린을 사냥하러 남아프리카로 달려가는 사람이 있지만, 그가 쫓고자 하는 것은 기린이 아니다. 사람이 기린을 얼마 동안이나 쫓아다니며 사냥하겠는가? 도요새와 멧도요 역시 좋은 사냥감이긴 하지만, 내 생각에는 자기 자신을 사냥하는 편이 훨씬 더 고귀한 사냥일 것 같다.

"그대의 눈을 내면으로 돌려 보라, 그러면
그대의 마음속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수많은 곳을 보게 되리라. 그곳을 여행하라,
그리하여 자신의 우주에 통달하라."

아프리카는 무엇을 표상하며, 서부는 무엇을 표상하는가? 우리 자신의 내면은 해도에 하얀 공백으로 있지 않은가? 발견하고 보면 그것 역시 저 해안처럼 시커멓게 보일 수도 있을 테지만 말이다. 우리가 찾으려는 것이 나일 강과 니제르 강, 미시시피 강의 수원일까? 아니면 이 대륙의 서북항로일까? 과연 그런 것들이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들일까? 프랭클린만이 길을 잃어 아내가 그토록 열심히 찾아다니는 유일한 인간일까? 그린넬은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나 알고 있을까? 그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강과 바다를 찾아다니는 멍고 파크나 루이스와 클라크, 프로비셔가 될 일이다.
자신의 극지방을 탐험하라. 필요하다면 식량으로 고기 통조림을 한 배 가득 싣고 가되 빈 깡통은 표지가 될 수 있도록 높이 쌓으라. 고기 통조림이 그저 고기를 보존하려고 발명된 것일까? 아니다. 차라리 자신의 내면에 있는 완전한 신대륙과 신세계를 찾아나설 콜럼버스가 되어 무역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상을 위한 새 항로를 열라. 사람은 누구나 왕국의 군주이며, 그 앞에서는 러시아 황제의 제국도 한낱 소국, 얼음 위에 솟은 조그만 얼음덩이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자신을 존경할 줄 모르는 인간이 애국자가 되어 소(小)를 위해 대(大)를 희생시키는 일도 왕왕 벌어지고 있다. 그런 자들은 자신의 무덤을 만들 땅은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육신에 활력을 넣어 줄 정신에는 아무런 공감도 하지 못한다. 애국심이란 그런 자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구더기에 다름아니다. 그처럼 큰 비용을 들여 화려하게 출항했던 남해 탐험대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 의미는 단지 정신세계에도 대륙과 바다가 있다는 사실(인간은 누구나 그 정신세계 속에 있는 지협이거나 조그만 만일 뿐이지만, 아직 그 자신이 탐험하지 않은 땅이다), 그리고 각자의 바다, 각자의 대서양과 태평양을 탐험하기보다는 추위와 폭풍과 식인종들과 싸우며 정부의 배를 타고 500명의 선단을 이끌고 수천 마일을 항해하는 편이 훨씬 쉽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데 불과하다. - P391

나는 숲에 처음 들어갈 때만큼 확실한 이유가 있어서 숲을 떠났다. 그때 내게는 아직 살아야 할 몇 개의 삶이 더 있는 것처럼 보였기에, 하나의 삶에 그 이상 많은 시간을 내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쉽게 또 부지불식간에 어느 특정한 길 하나에 들어서서 스스로의 걸음으로 그 길을 다져놓는 것인지 놀라울 정도다. 숲에서 산 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내 집 문에서 호숫가까지 내 발걸음으로 길이 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그 길을 밟은 지 벌써 5, 6년이 지났음에도 그 길은 여전히 선명하기만 하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그 길로 접어들어서 그 길이 지금처럼 남아 있도록 거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표면은 부드럽기 때문에 사람의 발자국이 찍힌다. 그리고 그 점은 마음이 가는 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세상의 큰길은 얼마나 닳고 부스러졌으며, 또 전통과 순응의 바퀴자국은 얼마나 깊을 것인가! 나는 선실 여행보다는 세상의 돛대 앞, 그 갑판 위에 서기를 원했는데, 그 자리에서라면 산 속의 달빛도 잘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배 밑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
나는 경험에 의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웠다. 즉, 사람이 자신이 꿈꾸는 방향으로 자신 있게 나아가면서 자신이 꿈꾸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면 보통 때는 생각지도 못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일은 받아들이고, 어떤 일은 내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를 넘게 된다. 요컨대 새롭고 보편적이며 보다 자유로운 법칙이 그의 주위와 그의 내부에 확립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예전의 법칙이 확대되면서 보다 자유로운 의미에서 그에게 유리하게 해석됨으로써 보다 높은 존재의 질서에 대한 허락을 받고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이다. 삶을 단순화하는 데 비례하여 삼라만상의 법칙은 덜 복잡해질 것이며, 고독도 고독이 아니고 가난도 가난이 아니며 약점도 약점이 아니게 된다. 설혹 공중누각을 세운다 해도 그 일은 헛된 수고가 되지 않는데, 누각이란 것은 마땅히 그곳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그 아래 기초만 만들면 되는 것이다. - P394

쿠루 시에 완벽을 추구하는 한 예술가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문득 지팡이를 하나 깎을 생각을 했다. 불완전한 일에는 시간이 고려할 요인의 하나일 테지만, 완벽한 일에는 시간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고 여긴 그는, 비록 평생 다른 일을 아무것도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모든 점에서 완벽한 지팡이를 깎고야 말겠노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적합치 않은 재료는 쓰지 않기로 마음먹은 그는 곧 나무를 구하려 숲으로 갔다. 그가 나뭇가지를 살피며 하나하나 퇴짜를 놓는 동안 그의 친구들은 하나씩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는데, 그것은 그들이 일하다 늙어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나이를 먹지 않았다. 그의 일사불란한 결의와 고결한 믿음이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영원한 젊음을 주었던 것이다. 그는 결코 시간과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은 그의 길에서 비켜서서 그 예술가를 굴복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멀리서 한숨만 짓고 있었다. 그가 모든 점에서 적당한 재료를 찾아내기 전에 쿠루 시는 고색창연한 폐허로 변했으며, 그는 그 흙무더기 위에 앉아 나무를 깎았다. 지팡이 모양이 채 갖추어지기 전에 칸다하르 왕조가 멸망했기 때문에 그는 지팡이 끝으로 모래 위에 최후의 왕족 이름을 쓰고는 다시 작업을 계속했다. 그가 지팡이를 매끄럽게 다듬었을 때 칼파는 더이상 지표가 될 수 없었다. 그가 지팡이에 물미를 달고 보석 장식을 씌우기 전에 브라마는 잠을 깨었다 다시 잠들기를 여러 차례 거듭했다.
그런데 내가 어째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걸까? 그가 마지막 손질을 가했을 때 갑자기 지팡이는 놀란 예술가의 눈앞에서 브라마의 모든 창조물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피어났다. 그는 지팡이를 만들면서 하나씩 새로운 체계, 가득하고도 완벽하게 균형 잡힌 세계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옛날의 도시와 왕조는 사라졌지만 그 안에는 보다 아름답고 더 찬란한 도시와 왕조가 자리잡았다. 그리고 이제 그는 자기 발치에서 아직 마르지 않은 부스러기더미를 보고 자기 자신과 자신이 한 일과 지금까지 지나간 시간이란 것이 한낱 허상에 불과했다는 것, 그 시간은 브라마의 머리에서 떨어진 하나의 섬광이 인간의 머릿속에 든 부싯깃에 불을 붙이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료가 순수했고 그의 솜씨도 순수했으니, 어떻게 경이롭지 않은 결과가 나올 수 있으랴?
결국 우리가 어떤 일에 부여할 수 있는 외관이란 것은 진실만큼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진실만이 오래가는 법이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현재 있어야 할 곳이 아닌 엉뚱한 자리에 있다. 우리는 무한한 충동으로 하나의 상황을 상정하고는 그 속에 자신을 집어넣기 때문에 동시에 두 가지 상황에 처하는 경우도 있어서 빠져나오기가 그만큼 더 어렵다. 우리는 정신이 온전할 때는 사실을, 실재하는 상황만을 염두에 둔다. 거짓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것을 말하라. 어떠한 진실도 거짓보다 나은 법이다. 땜장이 톰 하이드는 교수대에 서자 할말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러자 이렇게 말했다. "재봉사들에게 바느질을 하기 전에 먼저 실 끝에 매듭짓기를 잊지 말도록 전해 주시오." 그의 동료가 무슨 기도를 했는지는 전해진 바가 없다. - P398

철학자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세 개 사단으로 이루어진 군대라도 그 장수의 목숨만 빼앗으면 혼란에 빠뜨릴 수 있지만,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에게서라도 그 생각을 빼앗을 수는 없다." 많은 감화에 자신을 굴복시켜 가면서까지 스스로를 개발하려고 너무 애쓰지 마라. 그것은 낭비일 뿐이다. 겸손은 어둠이 그렇듯이 천상의 빛을 드러내 준다. 가난과 빈약함의 어둠이 주위로 몰려드는 순간, "보라, 삼라만상이 눈앞에 전개되지 않는가!" 설혹 크로이소스의 재산이 주어진다고 해도 우리의 목적은 여전히 똑같을 것이고, 우리의 수단 역시 본질적으로는 매한가지임을 상기해 보자. 뿐만 아니라, 가난 때문에 활동 범위가 제약되면, 그래서 가령 책이나 신문을 사서 읽을 형편이 되지 못한다 해도, 그것은 가장 의미 있고 중요한 경험만을 하도록 제한받는 것뿐이다.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이 가장 중요한 에센스를 산출할 재료를 구할 수밖에 없으리라. 아주 빈한한 삶이야말로 가장 감미로운 삶이다. 그런 삶에서는 빈둥거릴래야 그럴 수 없다. 낮은 생활 수준에서는 높은 수준의 아량 때문에 잃는 법이 없다. 남아도는 부로는 없어도 상관없는 것만 살 수 있다. 영혼의 필수품을 사는 데 돈은 필요 없다. - P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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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100퍼센트 확실한 건 아닙니다. 제 경험입니다만, 글에서 본 작가와 실제로 본 작가의 모습이 아주 다른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대부분은 그렇지 않지만요. 한때 힘찬 저항시로 이름을 날렸던 어떤 시인이 실생활에서는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권위주의적으로 행동하더군요. 섬세하고 나긋한 서정시를 썼던 작가가 알고 보니 권력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속물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떤 작가는 평소에는 그렇지 않은데 유독 글을 쓸 때만 경건해지기도 했고, 환경이 바뀌면 행동 양식도 금세 따라 변하는 사람도 있었죠.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심리학자들은 사람에게 복수의 ‘페르소나(인격)’가 있다고 하더군요. 감정이 크게 흔들리면 이성이 힘을 쓰지 못한다고도 하고요. 인간이 원래 그런 존재랍니다. 그러니 자신이든 타인이든, 사람에 대해서 지나친 신뢰를 보내지는 않는 게 현명하겠지요. - P40

그런데 세상에는 시비와 선악과 미추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악한 사람, 추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도 많아요. 악하지 않은 사람이 악한 행동을 하기도 하고, 어리석지 않은 사람이 어리석은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미학적 도덕적 직관 또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영구히 또는 한시적으로 잃어버린다는 것이죠. 왜 그렇게 될까요? 욕망과 감정과 충동에 휘둘리기 때문입니다. 욕망과 감정과 충동은 선한 것만 있는 게 아니라 나쁜 것, 고약한 것도 많습니다. 탐욕, 두려움, 시기심과 같은 부정적 욕망과 감정, 충동이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압도하면 도덕적 미학적 직관은 힘을 쓰지 못합니다.
글 쓰는 사람을 위협하는 것이 욕망만은 아닙니다. 훌륭한 이상을 추구하는 종교와 사상도 조심해야 합니다. 이념과 종교의 교조가 도덕적 미학적 직관을 질식시키기도 하거든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역사 사례가 있습니다. 중세 교회가 자행한 마녀 사냥과 십자군전쟁, 유럽인들의 북아메리카 원주민 대학살, 히틀러의 홀로코스트, 스탈린의 독재와 대숙청, 크메르루즈의 킬링필드, 북한의 우상숭배와 3대 세습, 소위 이슬람국가(IS)의 민간인 참수와 같은 어리석음과 죄악의 배후에는 그것을 정당화한 지식인의 말과 글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말과 글로 만든 이념과 종교의 도그마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목 졸라 죽였기 때문에 그런 비극이 벌어진 겁니다. - P49

예술적으로 쓰고 싶다면 자유롭게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정해진 도그마보다 자기 자신의 눈과 생각, 마음과 감정을 믿는 게 현명합니다. 저에게 진보냐고 묻는 분들, 진보적 원칙을 글쓰기에 어떻게 반영하느냐고 묻는 분들게 솔직하게 대답하겠습니다. 저는 글을 쓸 때 그런 생각을 아예 하지 않습니다. 사실에 부합하는가? 문장이 정확한가? 논리에 결함이 없는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인가? 독자의 마음에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가? 그런 것만 살핍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하면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 근처까지라도 가져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말입니다.
예술은 자유를 먹고 피어납니다. 돈과 권력만 사람의 생각과 감각을 얽어매는 게 아닙니다. 고정관념과 이념의 교조에 생각과 감정이 묶이면 글이 진부해집니다. 빤한 글, 지루한 글, 첫 문장만 보아도 마지막 문장을 짐작할 수 있는 글을 쓰게 됩니다. 독창적인, 기발한, 창의적인, 흥미로운, 반전이 있는 글을 쓰지 못합니다. 진보냐 보수냐? 내 이념을 어떻게 글쓰기에 반영할까? 창의적인 글을 쓰고 싶다면 이런 헛된 질문을 털어 버리고 오로지 아름다운 것과 옳은 것만 생각하면서 글을 쓰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렇게 씁니다. - P60

인터뷰이가 말한 그대로 실었다고는 하지만, 제가 <프레시안> 편집자였다면 당사자의 양해를 구해서 표현을 살짝 고쳤을 겁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렇게 기사가 나갔습니다. 저는 변영주 감독의 발언 취지에 어느 정도 공감했습니다만 표현 방식은 그리 좋게 보지 않았어요. 책에 대한 비평이 아니라 저자에 대한 험담이 될 수 있는 말이니까요. 저는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쓰레기 같은 글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쓰레기라고 볼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쓴 사람을 쓰레기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글과 사람은 다르거든요. 저는 제가 인간쓰레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쓰레기 같은 말을 하거나 글을 쓴 적이 없다고 자신하지는 못합니다. - P68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입니다. 혼자 태어나고 혼자 죽는, 운명적인 단독자입니다. 단독자의 삶은 고독합니다. 어떤 말, 어떤 글, 어떤 행동으로도 둘 이상의 단독자가 서로를 완전하게 이해하면서 교감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홉 개의 악플을 흘려보낸 끝에 정상적인 댓글 하나를 찾고 좋아합니다. 알고 지내는 사람 열 가운데 단 하나라도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존중한다면 인생이 외롭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타인에 대한 기대 수준을 바닥으로 내리는 것을 현명한 처세술로 여깁니다. 그렇게 하면 악플에 상처받지 않습니다. 어마어마한 악플 세례를 받은 끝에 제가 발견한 정신승리법입니다. 저는 악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악플 때문에 자기 검열을 하지도 않습니다. 제 취향대로 글을 쓰고, 제 감정과 생각을 타인과 나누면서, 제 색깔대로 살아갑니다. ‘치열한 무플’로 악플의 파도와 싸우면서!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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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는 인간을 본능적으로 ‘우리’와 ‘그들’의 두 부류로 나눈다. 우리란 너와 나, 언어와 종교와 관습이 같은 사람들을 말한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책임을 지지만 그들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언제나 그들과 전혀 다르며, 그들에게 빚진 것은 전혀 없다. 우리는 그들 중 한 명이라도 우리 영토에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으며, 그들의 영토 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그들은 심지어 사람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수단의 딩카족(수단의 유목 부족) 언어에서 ‘딩카’는 그냥 ‘사람들’이란 뜻이다. 딩카가 아닌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딩카의 숙적은 누에르족이다. 누에르족 언어에서 누에르는 무슨 뜻일까? ‘원래의 사람들’이란 뜻이다. 수단 사막으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알래스카의 동토와 시베리아 북동부에는 유픽족이 살고 있다. 유픽어로 ‘유픽’이란 단어는 무슨 뜻일까? ‘진정한 사람들’이란 뜻이다. - P280

역사상의 선인과 악당
역사를 좋은 편과 나쁜 편으로 깔끔하게 나누고 모든 제국은 나쁜 편에 속한다고 분류하고픈 유혹이 들기는 한다. 어쨌든 거의 모든 제국은 유혈사태 위에 세워졌고 압제와 전쟁으로 권력을 유지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오늘날의 문화 대부분은 제국의 유산을 기초로 하고 있다. 제국이 정의상 나쁜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세상에는 인간의 문화에서 제국주의를 제거하고 죄에 더럽혀지지 않은 소위 순수하고 진정한 문명만을 남기자는 취지의 학파와 정치운동이 있다. 이런 이데올로기들은 잘해봐야 순진할 따름이고, 나쁜 경우에는 노골적인 민족주의와 편견을 가리려는 표리부동한 눈속임으로 기능한다. 어쩌면 역사의 여명에 출현했던 무수히 많은 문화들 중 일부 문화는 순수하고 죄에 물들지 않았으며 다른 사회에 의해 오염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야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여명기 이후에는 어떤 문화도 그런 주장을 합리적으로 펼칠 수 없었으며, 오늘날 존재하는 문화 중에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 인류의 모든 문화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제국과 제국주의 문명의 유산이며, 어떤 학술적, 정치적 외과수술을 한다 해도 환자를 죽이지 않고 제국의 유산만을 도려낼 수는 없다.
예컨대 오늘날 독립한 인도 공화국과 영국령 인도 제국 사이에 존재하는 애증관계를 생각해보라. 영국은 인도를 정복하고 점령하는 과정에서 인도인 수백만 명의 목숨을 희생시켰다. 식민 정부는 수억 명 이상의 인도인을 지속적으로 모욕하고 착취한 책임이 있다. 하지만 많은 인도인은 개종의 기쁨을 누리면서, 민족자결이나 인권 같은 서구의 개념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은 영국이 스스로 천명한 가치에 부합하도록 인도인들에게 영국인과 동등한 권리나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 데 대해 실망했다.
그럼에도 인도라는 현대 국가는 대영제국의 자식이다. 영국인들은 인도 아대륙의 거주자들을 살해하고 부상을 입히고 처형했지만, 왕국과 공국과 부족들이 서로 전쟁을 벌이며 혼란스럽게 뒤섞였던 것을 하나로 통일하여 공통의 민족의식을 가지고 어느 정도 하나의 정치 단위로 기능하는 국가를 창조해냈다. 영국인들은 인도 사법제도의 초석을 놓았으며, 행정부 구조를 창건했고, 경제적 통합에 극히 중요한 철도망을 건설했다. 독립 인도는 영국에서 구현된 형태의 서구식 민주주의를 정부 형태로 받아들였다. 영어는 아직도 공용어로 쓰여, 힌디어, 타밀어, 말라얄람어를 쓰는 사람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중립적 언어로서 쓰인다. 인도인들은 크리켓 경기를 매우 좋아하고 차를 열심히 마시는데, 둘 다 모두 영국의 유산이다. 상업적 차 재배는 19세기 중반까지 인도에 존재하지 않다가 영국 동인도회사에 의해 처음 도입되었다. 인도 전체에 차를 마시는 문화를 퍼뜨린 것은 젠체하는 영국인 사입(sahib, 과거 인도인이 신분 있는 유럽인을 불렀던 호칭)들이었다.
오늘날 인도인 중에서 민주주의, 영어, 철도망, 사법제도, 크리켓, 차가 제국주의의 유산이라며 여기서 벗어나자고 국민투표를 요구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서 국민투표를 요구하는 행위 자체가 그들이 옛 지배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 아닐까?
설령 우리가 더 이전에 존재했던 진정한 문화를 재건하고 지키려는 희망에서 잔인한 제국의 유산을 모조리 거부하더라도, 보나마나 그때 우리가 지키는 것은 그보다 오래되고 덜 야만적인 제국의 유산에 불과할 것이다. 영국의 식민지배로 인해 인도 문화가 불구가 되었다고 분개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굴 제국의 유산과 그들의 델리 점령을 신성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외래 무슬림 제국의 영향에서 ‘진정한 인도 문화’를 구하려고 시도하는 사람은 누구나 굽타 제국, 쿠샨 제국, 마우리아 제국의 유산을 신성시하는 셈이다. 만일 어떤 극단적 힌두 민족주의자가 있어서 뭄바이 기차역을 비롯해 영국 정복자가 남긴 모든 건물을 파괴한다면, 인도의 무슬림 정복자들이 남긴 타지마할 같은 구조물은 어떻게 할 것인가?
문화적 유산이라는 까다로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정말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떤 길을 택하든 그 첫걸음은 이 딜레마가 복잡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과거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해서 선인과 악당으로 나누는 것은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물론 우리가 보통 악당들의 뒤를 따른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려는 것이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겠지만. - P291

오늘날 종교는 흔히 차별과 의견충돌과 분열의 근원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실상 종교는 돈과 제국 다음으로 강력하게 인류를 통일시키는 매개체다. 모든 사회 질서와 위계는 상상의 산물이기 때문에 모두 취약하게 마련이다. 사회가 크면 클수록 더욱 그렇다. 종교가 역사에서 맡은 핵심적 역할은 늘 이처럼 취약한 구조에 초월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있었다. 종교는 우리의 법은 인간의 변덕의 결과가 아니라 절대적인 최고 권위자가 정해놓은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러면 최소한 몇몇 근본적인 법만큼은 도전받지 않을 수 있었으므로, 사회의 안정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종교는 ‘초인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의 규범과 가치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기준이 있다.

1. 종교는 인간의 변덕이나 계약의 산물이 아닌 초인적 질서가 있다고 여긴다. 프로 축구는 종교가 아니다. 수많은 규칙과 의식과 이따금 기묘한 의례가 있지만, 모두가 잘 알듯이 축구는 인간이 발명한 것이다. 국제축구연맹은 언제라도 골문의 크기를 늘리거나 오프사이드 규칙을 폐기할 수 있다.

2. 이런 초인적 질서를 기반으로, 종교는 스스로 구속력이 있다고 여기는 규범과 가치를 설정한다. 오늘날 많은 서구인이 유령이나 요정, 환생을 믿지만, 이런 믿음이 도덕과 행동의 기준의 원천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은 종교가 아니다.

종교는 광범위한 사회정치적 질서를 정당화할 능력이 있지만, 모든 종교가 그 잠재력을 작동시킨 것은 아니었다. 서로 다른 인간 집단들이 사는 광대한 영역을 자신의 기호 아래 묶어두려면, 종교에는 두 가지 초인적인 속성이 필요하다. 첫쨰, 언제 어디서나 진리인 보편적이고 초인적인 질서를 설파해야 한다. 둘쨰, 이 믿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라고 강력히 요구해야 한다. 달리 말해, 종교는 보편적이면서 선교적이어야 한다.
이슬람교나 불교처럼 역사상 가장 잘 알려진 종교는 보편적이고 선교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든 종교가 그렇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실상 대부분의 고대 종교는 지역적이고 배타적이었다. 신자들은 국지적 신과 영혼을 믿었으며, 인류 전체를 개종시키는 데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우리가 아는 한 보편적이고 선교적인 종교는 기원전 1000년에 와서야 비로소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출현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혁명의 하나였고, 보편적 제국과 보편적 화폐의 등장과 매우 비슷하게 인류의 통일에 크게 기여했다. - P298

하지만 위대한 신들의 등장으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양이나 악마가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의 지위였다. 애니미즘은 인간을 세상에 살고 있는 수많은 존재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한편 다신교는 세상이 신들과 인간의 관계를 반영한다는 시각을 점점 더 키워가기 시작했다. 우리의 기도와 희생과 죄업과 선행이 생태계 전체의 운명을 결정했다. 멍청한 사피엔스 몇 명이 신들을 노하게 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끔찍한 홍수가 닥쳐와 수십억 마리의 개미와 메뚜기, 거북, 영양, 기린, 코끼리를 쓸어버릴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다신교는 신들의 지위뿐 아니라 인간의 지위도 격상시켰다. 옛 애니미즘 체계에 속하던 다른 불운한 존재들은 지위를 잃고, 인간과 신의 관계라는 위대한 드라마에서 엑스트라나 말없는 장식물로 전락했다. - P303

선과 악의 싸움
다신교는 일신교만 낳은 것이 아니라 이신교도 낳았다. 이신교는 서로 반대되는 두 힘의 존재를, 즉 선과 악을 믿는다. 일신교와 달리 이신교에서 악은 독립적인 힘이다. 선한 신에 의해 창조된 것도 그 신에 종속된 것도 아니다. 이신교는 온 세상을 이들 두 힘의 전쟁터로 본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싸움의 일부라는 것이다.
이신교는 이른바 악의 문제에 간명한 해답을 주기 때문에 매우 매력적인 세계관이다. 이 유명한 문제는 인간의 사상에서 가장 근본적 관심사 중 하나다.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할까? 왜 고통이 존재할까?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일신론자들은 이런 물음에 대답하려면 지적인 곡에를 부려야만 했다. 전지전능하며 완벽하게 선한 하느님이 세상에 그토록 많은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널리 알려진 하나의 설명에 따르면, 이것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는 신의 방식이라고 했다. 악이 없다면 인간은 신과 악 사이에서 선택할 필요가 없으므로 자유의지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직관에 반하는 답으로서, 즉각 수많은 새로운 의문을 낳는다. 자유의지는 인간에게 악을 선택하도록 허락한다. 많은 사람이 실제로 악을 택하며, 일신교의 정통적 설명에 따르면 이런 선택은 반드시 신의 벌을 부른다. 그러나 만일 그 인물이 자유의지로써 악을 선택하고 그 결과로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신이 미리 알았따면, 신은 왜 그를 창조했을까? 신학자들은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책을 썼다. 이런 답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다고 보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튼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일신론자들이 악의 문제에 쩔쩔매고 있다는 것이다.
이신론자들에게는 악을 설명하기가 쉽다. 착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세상이 전지전능하고 완벽하게 선한 신에 의해서만 통치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독립된 악의 힘이 돌아다니고, 악의 힘은 나쁜 일을 저지른다.
이신론자들의 견해에는 나름의 단점이 있다. 악의 문제를 풀어주기는 하지만, 질서의 문제 앞에서 당황하게 한다. 만일 세상을 유일신이 창조했다면, 세상이 이토록 질서가 잘 잡히고 모든 것이 동일한 법칙을 따르는 현실이 분명하게 설명이 된다. 그러나 만일 세상에 두 대립되는 힘인 선과 악이 있다면, 둘 사이의 싸움을 관장하는 법칙을 정한 존재는 누구인가? 두 나라가 싸울 수 있는 것은 둘 다 똑같은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파키스탄에서 발사된 미사일이 인도의 목표물에 명중할 수 있는 것은 양국에서 동일한 물리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만일 선과 악이 싸운다면, 이들을 따르는 공통의 법칙은 무엇이며 그 법칙은 누가 정했는가?
요약하면, 일신론은 질서를 설명하지만 악 앞에서 쩔쩔맨다. 이신론은 악을 설명하지만 질서 앞에서 당황한다. 이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논리적 방법이 하나 있다. 온 우주를 창조한 전능한 유일신이 있는데 그 신이 악한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신앙을 가질 배짱이 있는 사람은 역사상 아무도 없었다.
이신교는 1천 년 이상 번성했다.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1000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조로아스터(자라투스트라)란 이름의 예언자가 중앙아시아의 어느 지역에서 활동했다. 그의 교리는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져 마침내 가장 중요한 이신교인 조로아스터교가 되었다. 그 신봉자들은 세상을 선신인 아후라 마즈다와 악신인 앙라마이뉴 사이의 우주적 싸움터로 보았다. 인간은 이 전쟁에서 선신을 도와야만 했다. 조로아스터교는 고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기원전 550~350)에서 중요한 종교였고, 나중에는 사산 제국(기원후 224~651)의 공식 종교가 되었다. 이후 중동과 중앙아시아에서 발흥한 거의 모든 종교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노시스파와 마니교 등 여러 이신교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마니교는 기원후 3~4세기 동안 중국에서 북아프리카로 퍼졌으며, 잠시나마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누르고 지배적인 종교가 될 것으로 예상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마니교도들은 로마의 영혼을 기독교도들에게 빼앗겼고,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한 사산 제국은 일신교를 믿는 무슬림들에게 무너졌다. 이렇게 해서 이신교의 파도는 잦아들었다. 오늘날 이신론을 믿는 공동체는 인도와 중동에 한 줌 정도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일신교의 물결이 정말로 이신교를 싹 쓸어낸 것은 아니다. 일신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이신교에서 수많은 신앙과 관례를 흡수했으며, 오늘날 우리가 ‘일신교’라고 부르는 것의 가장 기본적 사상 일부는 사실 그 기원이나 정신이 이신교적이다. 수없이 많은 기독교인, 무슬림, 유대교인이 강력한 악의 힘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기독교인이 악마로 부르는 것이 그런 존재다. 이 존재는 선한 신에 대항해 독자적으로 싸울 수 있고, 신의 허락 없이 파괴를 불러올 수 있다.
일신론자가 어떻게 그런 이신론적 신념을 품을 수 있을까(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것은 구약에서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다)?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전지전능한 유일신을 믿거나 둘 다 전능하지는 않은 서로 대립되는 힘을 믿거나 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모순을 믿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수백만 명의 경건한 기독교인, 무슬림, 유대교인이 전능한 신과 독립적인 악마를 둘 다 동시에 믿는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수없이 많은 기독교인, 무슬림, 유대교인은 심지어 선한 신이 악과 싸울 때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상상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런 상상은 여러 가지를 고취시켰는데 이 중에는 자하드와 십자군을 일으켜야 한다는 요구도 포함된다.
또 다른 이신교인 그노시스파와 마니교의 핵심 개념은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을 정확하게 구분한다. 이들 종교에 따르면 선신은 정신과 영혼을, 악신은 물질과 육체를 창조했고, 인간은 선한 영혼과 악한 육체의 전쟁터 역할을 한다. 일신교적 시각에서 보면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을 그렇게 정확히 구분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육체와 물질이 악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쨌든 만물은 동일한 선한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일신론자들은 악의 문제를 다루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이유에서 이신론자들의 이분법에 매혹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이 (선과 악의) 대립은 결국 기독교와 무슬림 사상의 초석이 되었다. 천국(선신의 영역)과 지옥(악신의 영역)에 대한 믿음 역시 그 기원은 이신론에 있었다. 구약에는 이런 믿음의 흔적조차 없다. 사람들의 영혼이 육체가 죽은 다음에도 계속 산다는 주장 또한 전혀 나오지 않는다.
사실 일신론은 역사에서 나타났듯이 일신론과 이신론, 다신론, 애니미즘 유산이 하나의 신성한 우산 밑에 뒤섞여 있는 만화경이다. 보통 기독교인은 일신론의 하느님만이 아니라 이신론적 악마, 다신론적 성자, 애니미즘적 유령을 모두 믿는다. 종교학자들은 이처럼 서로 다르고 심지어 상충하는 사상을 동시에 인정하는 행위와 각기 다른 원천에서 가져온 의례와 관례를 혼합하는 행위에 대한 명칭으로, ‘제설諸說혼합주의’를 썼다. 실제로 제설혼합주의야말로 단 하나의 위대한 세계 종교일지 모른다. -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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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이 호수의 바닥에 대해 갖가지 얘기가 있었고, 바닥이 없다는 얘기까지 나돌았는데 그런 소문 자체가 바닥이 없는 것이었다. - P349

만약 우리가 자연의 모든 법칙을 알고 있다면, 어느 한 지점에서의 모든 특수한 결과를 추론하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 사실 또는 실제 현상 한 가지에 관련된 기술만 알면 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불과 몇 가지 법칙밖에 알지 못하며, 따라서 우리의 추론 결과는 무효인 셈이다. 그것은 물론 자연의 혼란이나 불규칙성 때문이 아니라 계산에 필요한 인자를 모르기 때문이다. 법칙과 조화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대부분 우리가 밝혀낸 사례에 한정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얼핏 상충되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일치하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수한 법칙에서 우러나온 조화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경이로운 것이다. 특수한 법칙은 길을 가는 나그네의 눈에 매 걸음마다 산의 윤곽이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우리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이게 마련인데, 그것은 원래 절대적인 단 하나의 형태를 갖고 있으면서도 무한대의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혹 그 산을 쪼개거나 구멍을 뚫는다 해도 전체가 파악되지 않는 것이다. - P354

이 모래톱이 폭풍이나 조수나 해류에 의해 점차 높아지거나 또는 바다에 침전물이 있어서 차츰차츰 수면에 근접하게 되면, 처음엔 단순히 사상이 정박하고 있던 물가의 한 기질에 불과했던 것이 바다와 분리된 별개의 호수가 되면서 그 안에서 사상은 독자적인 조건을 확보하게 된다. 요컨대 해수에서 담수로 바뀐다거나 짠맛을 잃거나 사해 또는 늪으로 바뀌는 것이다. 한 개인이 인생의 장(場)에 발을 내디디게 될 때 그의 내면 어딘가에서 바로 그러한 모래톱이 수면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사실이지 우리는 너무도 서투른 항해사여서 우리의 사상 대부분은 종종 항구도 없는 해변에 얹히거나 시(詩)의 만에서 흘러나오는 밝은 불빛만을 보게 된거나 그렇지 않으면 공공의 항만 시설로 들어가서는 과학이라는 수리용 도크에 입소하여 이 세상에 적응하도록 수리를 받는데, 거기에는 하나하나의 개성을 도와 줄 자연의 조류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 P355

단 한 차례의 이슬비에도 풀빛은 한층 더 짙어진다. 마찬가지로 보다 나은 생각을 집어넣을 경우 우리의 전망도 더 밝아진다. 만일 우리가 언제나 현재에 살면서, 조그만 이슬 하나로부터 받은 감화까지도 고스란히 털어놓는 저 풀잎처럼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일들을 이용한다면, 그리고 과거의 기회를 무시한데 대한 보상을 의무로 여기고 거기에 송두리째 시간을 보내지만 않는다면 분명 축복을 받을 것이다. 온 세상에 이미 봄이 왔는데도 우리는 겨울 속에서 늑장을 부리는 셈이다. 상쾌한 봄날 아침에는 모두의 죄가 용서받는다. 이런 날은 악덕도 쉬는 것이다. 봄의 태양이 타오르는 동안에는 아무리 부도덕한 죄인이라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순수성을 회복함으로써 이웃의 순수성도 알아보게 된다. 어제만 해도 이웃을 도둑이나 주정뱅이, 호색가로 여기고는 그를 가엾이 여기거나 경멸하면서 세상에 대해 절망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최초의 봄날 아침 태양이 밝고 따스하게 빛나며 세상을 재창조할 때 평온하게 일에 몰두하고 있는 그와 마주치게 된 당신이, 그의 지치고 방탕에 물든 혈관이 고요한 기쁨으로 가득 차서 새날을 축복하고 있으며 갓난애 같은 순수함으로 봄의 감화를 흠씬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그의 모든 허물도 순식간에 잊을 수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선의의 분위기뿐만 아니라 갓 태어난 본능으로 맹목적으로 표현하려는 일종의 성스러운 기미마저 느낄 수 있다. 그리하여 잠시 동안 언덕의 남쪽 기슭에서는 어떤 저속한 농담도 들리지 않게 된다. 그의 비틀린 외양에서는 아주 어린 초목처럼 연하고 싱그럽고 순결하고 밝은 싹이 솟아나 새로운 한해의 삶을 시도하는 것도 엿볼 수 있다. 그런 인간까지도 자신의 하느님의 기쁨에 동참한 것이다. 어째서 교도관은 감옥 문을 활짝 열지 않는 걸까? 어쨰서 판사는 사건을 기각시키지 않는 걸까? 어째서 목회자는 신자들을 돌려보내지 않는 걸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하느님이 내린 지시에 따르지 않고 모두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 P382

"매일같이 평정하고 자비로운 아침의 숨결에서 나와 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덕을 사랑하고 악덕을 미워한다는 면에서 보다 근원적인 본성에 다가가게 하는데, 그것은 죽은 숲에서 새싹이 돋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루에 한 번씩 행하는 악은 다시 움트기 시작한 덕의 싹이 자라지 못하도록 망가뜨리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덕의 싹이 여러 번 자라지 못하게 되면 저녁의 자비로운 숨결로도 싹을 보존할 수 없다. 저녁의 숨결로 더 이상 싹을 보존할 수 없으면 곧 인간의 본성이 금수의 본성과 다를 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사람의 본성이 금수의 본성과 같다고 보고 그에게 원래 본유의 이성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것이 인간의 참되고 자연스러운 성정일까?" -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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