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이 호수의 바닥에 대해 갖가지 얘기가 있었고, 바닥이 없다는 얘기까지 나돌았는데 그런 소문 자체가 바닥이 없는 것이었다. - P349

만약 우리가 자연의 모든 법칙을 알고 있다면, 어느 한 지점에서의 모든 특수한 결과를 추론하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 사실 또는 실제 현상 한 가지에 관련된 기술만 알면 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불과 몇 가지 법칙밖에 알지 못하며, 따라서 우리의 추론 결과는 무효인 셈이다. 그것은 물론 자연의 혼란이나 불규칙성 때문이 아니라 계산에 필요한 인자를 모르기 때문이다. 법칙과 조화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대부분 우리가 밝혀낸 사례에 한정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얼핏 상충되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일치하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수한 법칙에서 우러나온 조화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경이로운 것이다. 특수한 법칙은 길을 가는 나그네의 눈에 매 걸음마다 산의 윤곽이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우리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이게 마련인데, 그것은 원래 절대적인 단 하나의 형태를 갖고 있으면서도 무한대의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혹 그 산을 쪼개거나 구멍을 뚫는다 해도 전체가 파악되지 않는 것이다. - P354

이 모래톱이 폭풍이나 조수나 해류에 의해 점차 높아지거나 또는 바다에 침전물이 있어서 차츰차츰 수면에 근접하게 되면, 처음엔 단순히 사상이 정박하고 있던 물가의 한 기질에 불과했던 것이 바다와 분리된 별개의 호수가 되면서 그 안에서 사상은 독자적인 조건을 확보하게 된다. 요컨대 해수에서 담수로 바뀐다거나 짠맛을 잃거나 사해 또는 늪으로 바뀌는 것이다. 한 개인이 인생의 장(場)에 발을 내디디게 될 때 그의 내면 어딘가에서 바로 그러한 모래톱이 수면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사실이지 우리는 너무도 서투른 항해사여서 우리의 사상 대부분은 종종 항구도 없는 해변에 얹히거나 시(詩)의 만에서 흘러나오는 밝은 불빛만을 보게 된거나 그렇지 않으면 공공의 항만 시설로 들어가서는 과학이라는 수리용 도크에 입소하여 이 세상에 적응하도록 수리를 받는데, 거기에는 하나하나의 개성을 도와 줄 자연의 조류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 P355

단 한 차례의 이슬비에도 풀빛은 한층 더 짙어진다. 마찬가지로 보다 나은 생각을 집어넣을 경우 우리의 전망도 더 밝아진다. 만일 우리가 언제나 현재에 살면서, 조그만 이슬 하나로부터 받은 감화까지도 고스란히 털어놓는 저 풀잎처럼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일들을 이용한다면, 그리고 과거의 기회를 무시한데 대한 보상을 의무로 여기고 거기에 송두리째 시간을 보내지만 않는다면 분명 축복을 받을 것이다. 온 세상에 이미 봄이 왔는데도 우리는 겨울 속에서 늑장을 부리는 셈이다. 상쾌한 봄날 아침에는 모두의 죄가 용서받는다. 이런 날은 악덕도 쉬는 것이다. 봄의 태양이 타오르는 동안에는 아무리 부도덕한 죄인이라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순수성을 회복함으로써 이웃의 순수성도 알아보게 된다. 어제만 해도 이웃을 도둑이나 주정뱅이, 호색가로 여기고는 그를 가엾이 여기거나 경멸하면서 세상에 대해 절망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최초의 봄날 아침 태양이 밝고 따스하게 빛나며 세상을 재창조할 때 평온하게 일에 몰두하고 있는 그와 마주치게 된 당신이, 그의 지치고 방탕에 물든 혈관이 고요한 기쁨으로 가득 차서 새날을 축복하고 있으며 갓난애 같은 순수함으로 봄의 감화를 흠씬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그의 모든 허물도 순식간에 잊을 수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선의의 분위기뿐만 아니라 갓 태어난 본능으로 맹목적으로 표현하려는 일종의 성스러운 기미마저 느낄 수 있다. 그리하여 잠시 동안 언덕의 남쪽 기슭에서는 어떤 저속한 농담도 들리지 않게 된다. 그의 비틀린 외양에서는 아주 어린 초목처럼 연하고 싱그럽고 순결하고 밝은 싹이 솟아나 새로운 한해의 삶을 시도하는 것도 엿볼 수 있다. 그런 인간까지도 자신의 하느님의 기쁨에 동참한 것이다. 어째서 교도관은 감옥 문을 활짝 열지 않는 걸까? 어쨰서 판사는 사건을 기각시키지 않는 걸까? 어째서 목회자는 신자들을 돌려보내지 않는 걸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하느님이 내린 지시에 따르지 않고 모두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 P382

"매일같이 평정하고 자비로운 아침의 숨결에서 나와 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덕을 사랑하고 악덕을 미워한다는 면에서 보다 근원적인 본성에 다가가게 하는데, 그것은 죽은 숲에서 새싹이 돋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루에 한 번씩 행하는 악은 다시 움트기 시작한 덕의 싹이 자라지 못하도록 망가뜨리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덕의 싹이 여러 번 자라지 못하게 되면 저녁의 자비로운 숨결로도 싹을 보존할 수 없다. 저녁의 숨결로 더 이상 싹을 보존할 수 없으면 곧 인간의 본성이 금수의 본성과 다를 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사람의 본성이 금수의 본성과 같다고 보고 그에게 원래 본유의 이성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것이 인간의 참되고 자연스러운 성정일까?" -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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