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한대의 자연력, 광활하고 거대한 지형, 잔해가 깔린 해변, 살아 있거나 썩어 가고 있는 나무로 가득한 황야, 뇌운, 3주 동안 계속 내려 홍수를 일으키는 장마를 보고 충전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경계가 침범당하고 우리가 결코 발길을 들이지 않는 곳에서 어떤 생명체가 자유로이 풀을 뜯고 있는 광경을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혐오감을 일으키고 언짢게 만드는 썩은 고기를 독수리가 뜯어먹고 건강과 힘을 얻는 광경을 보면 기분이 나아진다. 집으로 가는 길옆 움푹 패인 땅에 말 시체가 있었는데, 그 때문에 나는 종종 다른 길로 가야 했다. 특히 대기가 무겁게 가라앉는 밤이면 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 광경은 자연의 강한 식욕과 침범할 수 없는 건강에 대해 확신을 갖게 해주었으며, 그것이 내겐 보상인 셈이었다. 나는 자연이 그토록 생명으로 충만하여 수많은 생명체가 희생되고 서로 먹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차라리 기분 좋았다. 왜가리가 먹어치우는 올챙이라든가 길에서 마차에 친 거북과 두꺼비 등등 연약한 유기체가 과육처럼 그토록 평온하게 으스러뜨려질 수 있다는 사실말이다. 때로는 그 살과 피를 비가 씻어주기까지 하는 것이다! 사고를 당할 위험이 상존하고 있는 인간으로서는 거기에 설명될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여기서 만유의 순결함이라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독은 결코 유해하기만 한 것이 아니며 어떠한 상처도 치명적인 것은 아니다. 동정이란 근거가 없는 감정일 뿐이다. 그것은 일시적인 감정이어야만 한다. 그에 대한 변명은 진부함을 면치 못할 것이다. - P386
그러나 우리는 호기심 많은 승객들이 그러하듯 좀더 자주 우리가 탄 배의 고물 난간 너머를 내다봐야 하며, 뱃밥이나 만들고 있는 멍청한 선원들처럼 항해해서는 안 된다. 지구의 반대편은 우리가 편지를 보내는 이의 고향일 뿐이다. 우리의 항해는 대권항해일 뿐이며 의사는 피부병에 대한 처방을 해줄 뿐이다. 기린을 사냥하러 남아프리카로 달려가는 사람이 있지만, 그가 쫓고자 하는 것은 기린이 아니다. 사람이 기린을 얼마 동안이나 쫓아다니며 사냥하겠는가? 도요새와 멧도요 역시 좋은 사냥감이긴 하지만, 내 생각에는 자기 자신을 사냥하는 편이 훨씬 더 고귀한 사냥일 것 같다.
"그대의 눈을 내면으로 돌려 보라, 그러면 그대의 마음속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수많은 곳을 보게 되리라. 그곳을 여행하라, 그리하여 자신의 우주에 통달하라."
아프리카는 무엇을 표상하며, 서부는 무엇을 표상하는가? 우리 자신의 내면은 해도에 하얀 공백으로 있지 않은가? 발견하고 보면 그것 역시 저 해안처럼 시커멓게 보일 수도 있을 테지만 말이다. 우리가 찾으려는 것이 나일 강과 니제르 강, 미시시피 강의 수원일까? 아니면 이 대륙의 서북항로일까? 과연 그런 것들이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들일까? 프랭클린만이 길을 잃어 아내가 그토록 열심히 찾아다니는 유일한 인간일까? 그린넬은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나 알고 있을까? 그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강과 바다를 찾아다니는 멍고 파크나 루이스와 클라크, 프로비셔가 될 일이다. 자신의 극지방을 탐험하라. 필요하다면 식량으로 고기 통조림을 한 배 가득 싣고 가되 빈 깡통은 표지가 될 수 있도록 높이 쌓으라. 고기 통조림이 그저 고기를 보존하려고 발명된 것일까? 아니다. 차라리 자신의 내면에 있는 완전한 신대륙과 신세계를 찾아나설 콜럼버스가 되어 무역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상을 위한 새 항로를 열라. 사람은 누구나 왕국의 군주이며, 그 앞에서는 러시아 황제의 제국도 한낱 소국, 얼음 위에 솟은 조그만 얼음덩이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자신을 존경할 줄 모르는 인간이 애국자가 되어 소(小)를 위해 대(大)를 희생시키는 일도 왕왕 벌어지고 있다. 그런 자들은 자신의 무덤을 만들 땅은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육신에 활력을 넣어 줄 정신에는 아무런 공감도 하지 못한다. 애국심이란 그런 자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구더기에 다름아니다. 그처럼 큰 비용을 들여 화려하게 출항했던 남해 탐험대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 의미는 단지 정신세계에도 대륙과 바다가 있다는 사실(인간은 누구나 그 정신세계 속에 있는 지협이거나 조그만 만일 뿐이지만, 아직 그 자신이 탐험하지 않은 땅이다), 그리고 각자의 바다, 각자의 대서양과 태평양을 탐험하기보다는 추위와 폭풍과 식인종들과 싸우며 정부의 배를 타고 500명의 선단을 이끌고 수천 마일을 항해하는 편이 훨씬 쉽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데 불과하다. - P391
나는 숲에 처음 들어갈 때만큼 확실한 이유가 있어서 숲을 떠났다. 그때 내게는 아직 살아야 할 몇 개의 삶이 더 있는 것처럼 보였기에, 하나의 삶에 그 이상 많은 시간을 내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쉽게 또 부지불식간에 어느 특정한 길 하나에 들어서서 스스로의 걸음으로 그 길을 다져놓는 것인지 놀라울 정도다. 숲에서 산 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내 집 문에서 호숫가까지 내 발걸음으로 길이 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그 길을 밟은 지 벌써 5, 6년이 지났음에도 그 길은 여전히 선명하기만 하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그 길로 접어들어서 그 길이 지금처럼 남아 있도록 거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표면은 부드럽기 때문에 사람의 발자국이 찍힌다. 그리고 그 점은 마음이 가는 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세상의 큰길은 얼마나 닳고 부스러졌으며, 또 전통과 순응의 바퀴자국은 얼마나 깊을 것인가! 나는 선실 여행보다는 세상의 돛대 앞, 그 갑판 위에 서기를 원했는데, 그 자리에서라면 산 속의 달빛도 잘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배 밑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 나는 경험에 의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웠다. 즉, 사람이 자신이 꿈꾸는 방향으로 자신 있게 나아가면서 자신이 꿈꾸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면 보통 때는 생각지도 못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일은 받아들이고, 어떤 일은 내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를 넘게 된다. 요컨대 새롭고 보편적이며 보다 자유로운 법칙이 그의 주위와 그의 내부에 확립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예전의 법칙이 확대되면서 보다 자유로운 의미에서 그에게 유리하게 해석됨으로써 보다 높은 존재의 질서에 대한 허락을 받고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이다. 삶을 단순화하는 데 비례하여 삼라만상의 법칙은 덜 복잡해질 것이며, 고독도 고독이 아니고 가난도 가난이 아니며 약점도 약점이 아니게 된다. 설혹 공중누각을 세운다 해도 그 일은 헛된 수고가 되지 않는데, 누각이란 것은 마땅히 그곳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그 아래 기초만 만들면 되는 것이다. - P394
쿠루 시에 완벽을 추구하는 한 예술가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문득 지팡이를 하나 깎을 생각을 했다. 불완전한 일에는 시간이 고려할 요인의 하나일 테지만, 완벽한 일에는 시간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고 여긴 그는, 비록 평생 다른 일을 아무것도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모든 점에서 완벽한 지팡이를 깎고야 말겠노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적합치 않은 재료는 쓰지 않기로 마음먹은 그는 곧 나무를 구하려 숲으로 갔다. 그가 나뭇가지를 살피며 하나하나 퇴짜를 놓는 동안 그의 친구들은 하나씩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는데, 그것은 그들이 일하다 늙어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나이를 먹지 않았다. 그의 일사불란한 결의와 고결한 믿음이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영원한 젊음을 주었던 것이다. 그는 결코 시간과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은 그의 길에서 비켜서서 그 예술가를 굴복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멀리서 한숨만 짓고 있었다. 그가 모든 점에서 적당한 재료를 찾아내기 전에 쿠루 시는 고색창연한 폐허로 변했으며, 그는 그 흙무더기 위에 앉아 나무를 깎았다. 지팡이 모양이 채 갖추어지기 전에 칸다하르 왕조가 멸망했기 때문에 그는 지팡이 끝으로 모래 위에 최후의 왕족 이름을 쓰고는 다시 작업을 계속했다. 그가 지팡이를 매끄럽게 다듬었을 때 칼파는 더이상 지표가 될 수 없었다. 그가 지팡이에 물미를 달고 보석 장식을 씌우기 전에 브라마는 잠을 깨었다 다시 잠들기를 여러 차례 거듭했다. 그런데 내가 어째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걸까? 그가 마지막 손질을 가했을 때 갑자기 지팡이는 놀란 예술가의 눈앞에서 브라마의 모든 창조물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피어났다. 그는 지팡이를 만들면서 하나씩 새로운 체계, 가득하고도 완벽하게 균형 잡힌 세계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옛날의 도시와 왕조는 사라졌지만 그 안에는 보다 아름답고 더 찬란한 도시와 왕조가 자리잡았다. 그리고 이제 그는 자기 발치에서 아직 마르지 않은 부스러기더미를 보고 자기 자신과 자신이 한 일과 지금까지 지나간 시간이란 것이 한낱 허상에 불과했다는 것, 그 시간은 브라마의 머리에서 떨어진 하나의 섬광이 인간의 머릿속에 든 부싯깃에 불을 붙이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료가 순수했고 그의 솜씨도 순수했으니, 어떻게 경이롭지 않은 결과가 나올 수 있으랴? 결국 우리가 어떤 일에 부여할 수 있는 외관이란 것은 진실만큼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진실만이 오래가는 법이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현재 있어야 할 곳이 아닌 엉뚱한 자리에 있다. 우리는 무한한 충동으로 하나의 상황을 상정하고는 그 속에 자신을 집어넣기 때문에 동시에 두 가지 상황에 처하는 경우도 있어서 빠져나오기가 그만큼 더 어렵다. 우리는 정신이 온전할 때는 사실을, 실재하는 상황만을 염두에 둔다. 거짓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것을 말하라. 어떠한 진실도 거짓보다 나은 법이다. 땜장이 톰 하이드는 교수대에 서자 할말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러자 이렇게 말했다. "재봉사들에게 바느질을 하기 전에 먼저 실 끝에 매듭짓기를 잊지 말도록 전해 주시오." 그의 동료가 무슨 기도를 했는지는 전해진 바가 없다. - P398
철학자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세 개 사단으로 이루어진 군대라도 그 장수의 목숨만 빼앗으면 혼란에 빠뜨릴 수 있지만,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에게서라도 그 생각을 빼앗을 수는 없다." 많은 감화에 자신을 굴복시켜 가면서까지 스스로를 개발하려고 너무 애쓰지 마라. 그것은 낭비일 뿐이다. 겸손은 어둠이 그렇듯이 천상의 빛을 드러내 준다. 가난과 빈약함의 어둠이 주위로 몰려드는 순간, "보라, 삼라만상이 눈앞에 전개되지 않는가!" 설혹 크로이소스의 재산이 주어진다고 해도 우리의 목적은 여전히 똑같을 것이고, 우리의 수단 역시 본질적으로는 매한가지임을 상기해 보자. 뿐만 아니라, 가난 때문에 활동 범위가 제약되면, 그래서 가령 책이나 신문을 사서 읽을 형편이 되지 못한다 해도, 그것은 가장 의미 있고 중요한 경험만을 하도록 제한받는 것뿐이다.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이 가장 중요한 에센스를 산출할 재료를 구할 수밖에 없으리라. 아주 빈한한 삶이야말로 가장 감미로운 삶이다. 그런 삶에서는 빈둥거릴래야 그럴 수 없다. 낮은 생활 수준에서는 높은 수준의 아량 때문에 잃는 법이 없다. 남아도는 부로는 없어도 상관없는 것만 살 수 있다. 영혼의 필수품을 사는 데 돈은 필요 없다. - P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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