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인간을 가두고 있는 담벼락으로 "유일한 것, 완전한 것, 자기 충족적인 것, 그리고 불멸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영원히 고정되어 있어서 바뀔 수 없다고 상정된 것이야말로 인간을 가로막고 있는 담벼락이라는 것이다. 상징적으로 니체는 이것을 ‘신‘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그가 망치로 부수겠다고 선언한 담벼락을 기독교의 신에 한정시킬 이유는 전혀 없다. 신은 영원불멸한 존재라는 생각뿐만 아니라 지금의 사회구조는 영원히 바뀔 수 없다는 생각도 인간을 체념적이고 수동적으로 만드는 담벼락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가로막고 길들이려는 담벼락을 파괴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제 ‘영원회귀‘에 대한 니체의 육성을 직접 들어볼 순서이다.

모든 것은 가며,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바퀴는 영원히 돌고 돈다. 모든 것은 시들어가며, 모든 것은 다시 피어난다. 존재의 해는 영원히 흐른다. 모든 것은 부러지며, 모든 것은 다시 이어진다. 똑같은 존재의 집이 영원히 지어진다. (......) 나는 더없이 큰 것에서나 더없이 작은 것에서나 같은, 그리고 동일한 생명으로 영원히 돌아오는 것이다. 또다시 만물에게 영원회귀를 가르치기 위해서 말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P22

이렇게 반문하면서 니체는 영원불멸의 세계관이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삶을 부정하게 만드는 주범이라고 진단한다.
그렇지만 영원불멸을 추구하려는 시도 자체를 붕괴시킬 수 있는 새로운 세계관을 제안하지 않는다면, 니체의 진단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니체가 제안한 ‘영원회귀‘의 세계관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만약 영원회귀가 영원불멸의 세계관을 붕괴시킬 정도로 강력하지 않다면, 니체는 자신의 철학이 과거 전통에 대한 투정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직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사활을 걸고 제안한 ‘영원회귀‘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생각이다. 10만 년 주기로 모든 것이 반복된다고 해보자. 오늘 커피를 마시고 있다. 이것은 10만년 전에도, 20만 년 전에도 그리고 30만 년 전에도 동일하게 반복되었던 것이며, 10만 년 뒤에도, 20만 년 뒤에도 그리고 30만 년 뒤에도 동일하게 반복될 일이다.
기독교에서는 살아 있을 때 가난과 억압을 참으라고 한다. 그러면 영원불멸한 천국에서 모든 것을 보상받고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지금 고통스러운 것을 기꺼이 감내하라고 가르친다. 언젠가 진학하거나 취업하면 고통의 대가로 뿌듯한 성취감이 찾아올 테니까 말이다. 직장에서는 상사나 거래처 사람에게 비굴한 행동도 서슴지 않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나중에 승진하거나 혹은 거래가 성사되는 단맛을 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런 통념에 따르면 순간의 고통과 비굴은 아무것도 아니다. 힘들지만 이 순간만 참고 견디면 된다. 바로 여기 이 순간은 미래의 행복이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버려도 될 수단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바로 이런 통념에 브레이크를 건다. 영원회귀의 가르침에 따르면 굴욕과 비겁으로 점철된 고통의 순간은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10만 년 주기로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우리가 순간의 굴욕과 비겁을 선택할 리는 없다. 순간으로 보였지만 그것은 사실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 그리고 지금의 삶이 비겁하다면 우리는 자신이 10만 년 주기로 지금까지 비겁했다는 슬픈 과거를, 동시에 자신이 앞으로도 영원히 10만 년 주기로 비겁하리라는 슬픈 미래를 갖게 될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우리가 굴욕과 비겁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인가? 들뢰즈는 영원회귀로 응축되는 니체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은 윤리적 강령으로 해석했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무엇을 의지하든 그것의 영원회귀를 의지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의지하라."
- 『차이와 반복』

영원회귀를 주장한 니체는 얼마나 용의주도하고 영민한가? 우리는 자신이 과거 10만 년 전에 무엇을 했는지, 혹은 앞으로 10만 년 뒤에 무엇을 할지 전혀 모른다. 단지 지금 무엇인가를 의지하고 실행하려는 순간, 우리는 그것이 10만 년 전에도 반복되었고, 그리고 10만 년 뒤에도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는 것만을 안다. 그러니까 온갖 억압과 고통을 극복하여 현재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영위해야만 한다. 자신의 삶을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지금 노예의 굴종과 비겁을 감내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노예로 살기를 결정한 셈이고, 지금 주인의 당당함과 자유를 쟁취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주인으로 살기를 결정한 셈이다. 마침내 우리는 자신을 가두어 길들이는 담벼락을 무너뜨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유롭고 싶은가? 그렇다면 니체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지금 인생을 다시 한 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P24

우선 라캉은 인간이 금지된 것만을 욕망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에 따르면 우리의 욕망은 금지된 것을 갖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금지가 없다면 욕망도 생길 수 없다는 뜻이다. 작은 구멍이 뚫려 있는 어느 공사장 외벽 한켠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써 있다. "들여다보지 마시오." 이 경우 "들여다보지 말라고 하니 들여다보지 말아야지"라고 가볍게 돌아서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비록 들여다보지는 않지만, 보고 싶다는 욕망이 우리를 사로잡을 테니까 말이다. 이제 다시 정신분석학의 논의로 돌아가자.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인간은 두 살 때까지 구강기(oral stage)를 거친다고 한다. 이 시기에 유아는 자신의 입에서 가장 강한 쾌감을 느끼게 된다. 유아가 젖을 먹기 위해서만 엄마의 젖꼭지에 매달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아는 젖꼭지를 물고 빨면서 쾌감을 느낀다. 유아가 인공 젖꼭지를 물고서 행복하게 잠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 엄마는 유아에게 젖꼭지를 내주지 않으려고 한다. 유아는 자신에게 쾌락을 제공하는 젖꼭지가 이제는 금지되었다고 느끼게 된다. 이 경우 젖꼭지는 아이의 쾌락을 충족시켜주는 단순한 대상을 넘어선다. 한떄 쾌락을 주었던 젖꼭지가 금지되자마자, 이것은 유아에게 욕망 대상이 된다. 당연히 이 순간 유아는 욕망 주체로 탄생한다. (......) 금지된 쾌락은 잃어버린 쾌락으로서 영원히 우리를 따라다닌다. 그래서 젖꼭지를 금지당한 유아는 볼펜이나 인형을 입으로 빨거나, 자라서는 이성에게 키스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볼펜이나 인형, 혹은 이성의 입술은 금지된 젖꼭지, 즉 대상a의 아우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현재 욕망하는 것은 과거 부모나 사회로부터 금지된 쾌락 대상의 아우라를 가진 것뿐이다. 현재 작동하는 우리의 욕망은 모두 과거 금지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라캉이 인간에 대해 내린 결론이다. 그러니까 지금 애인의 입술에 키스하고 싶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유년 시절 금지된 쾌락 대상으로서 젖꼭지를 그리워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라캉이 우리에게는 생각과 삶의 불일치가 존재한다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머릿속에서는 애인을 사랑해서 키스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젖꼭지에 대한 잃어버린 쾌락을 절망스럽게 회복하려고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생각과 존재의 불일치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과거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신에게 각인된 금지를 극복해야만 한다. 그래서 라캉은 정신분석학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세상에 태어날 때 주체는 타자로부터 욕망되는 자로서건 아니면 욕망되지 않는 자로서건 간에 타자의 욕망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이 소망하는 것인지 혹은 소망하지 않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주체는 다시 태어날 수 있어야만 한다. 정신분석의 방법을 고안함으로써 프로이트가 밝힌 진리의 본성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 『에크리』 - P29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당신이 소망하는 것인가?" 지금 내가 욕망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과거 타자가 욕망했던 것, 혹은 금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불일치를 극복했을 때, 우리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사랑이 아니었으며, 혹은 우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사랑이었다는 때늦은 후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 P31

너는 작가의 의지에 의해서 결정된 인물인 연극 배우라는 것을 기억하라. 만일 그가 연극이 짧기를 바란다면 짧을 것이고, 만일 길기를 바란다면 길 것이다. 만일 그가 너에게 거지의 구실을 하기를 원한다면, 이 구실조차도 또한 능숙하게 연기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만일 그가 절름발이를, 공직 관리를, 평범한 사람의 구실을 하기를 원한다고 해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엥케이리디온』

에픽테토스에게 ‘작가‘는 신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그에 따르면 신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가 연기해야 할 배역들을 모두 정했다는 것이다. 그 배역에 따르면 우리는 거지가 될 수도 있고, 왕이 될 수도 있고, 사형수도 될 수 있고, 절름발이가 될 수도 있다. 에픽테토스는 왕이 되었다고 뻐길 것도 없고, 거지가 되었다고 해서 슬퍼할 이유도 없다고 한다. 왕이나 거지는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삶이란 연극판에 부여된 배역에 지나지 않는다. 연기를 마치면, 그러니까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우리는 모두 배역에 충실했던 배우들이었을 뿐이다. 어린 나이에 죽을병에 걸렸다고 슬퍼할 이유도 없다. 단지 자신이 맡은 배역이 그럴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충실하게 자신의 배역을 잘 소화하고 연극판을 떠나면 된다. 괜히 신이라는 작가에게 투덜거려서도 안 된다. "왜 저에게 이런 초라한 배역을 주었나요?" 이 말을 듣는다면 작가는 말할 것이다. "누군가 어차피 그런 배역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프로답게 연기에 집중해야지, 왜 아마추어처럼 투덜대는 거니?"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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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를 공장식으로 번식시키는 그 잔인한 사업은 사실 우리나라 반려견 문화의 어두운 단면이며 저와 같은 관련 종사자들의 밥줄이기도 합니다. 강아지가 많이 태어나야 고급 사료, 동물병원, 용품, 훈련소, 호텔, 미용 등과 관련된 사람들이 먹고삽니다. 어쩌면 저 역시 이런 비인도적인 산업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사실을 알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아지들이 더 건강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더 좋은 사람과 함께 자라나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나가다 우연히 애견숍 안에서 잠들어 있는 강아지를 본다면, 마냥 귀엽다고 쓰다듬고 충동적으로 살 일이 아니라, 그 배경에 이런 비인도적인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한 사람이 아는 일이 두 사람이 아는 일이 되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알게 되면, 무분별한 팻 팩토리는 점점 사라질 테니까요. - P50

그래서 우리가 강아지의 이름을 지어줄 때 고려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2음절이어야 한다.
둘째, 모음으로 끝나면 안 된다. - P78

‘퍼피 라이선스Puppy License‘
이 말은 생후 4개월에서 5개월 사이의 강아지는 무슨 실수를 하던 혼내지 않도록 하자는 취지로 유럽의 유명한 훈련사 투리드 루가스가 만든 타이틀입니다. 저 역시 이 말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많은 분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모든 강아지에게는 ‘퍼피 라이선스‘가 있습니다. 종이를 물어뜯어도 괜찮고, 아무 데서나 실수해도 괜찮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강아지가 있는 집에서는 보호자가 주의해야 하겠지요. 강아지는 물고, 뛰고, 달리고, 점프하고, 땅 파고, 화분 넘어뜨리고, 핥고, 잠자고, 쉬하고, 싸우고, 먹이를 보고 달려드는 게 당연하기에 우리는 그들을 이해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반려견을 기르는 보호자이니까요. - P94

강아지가 너무 많이 먹거나, 너무 안 먹어서 고민이라는 분이 많습니다. 보호자가 밥을 어떻게 주느냐에 따라 반려견의 식습관이 달라지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러울 것입니다. 처음 입양을 하고 일주일 정도는 입양 전과 똑같이 밥을 주는 것이 좋습니다. 갑작스럽게 식사 방법을 바꾸면 강아지에게 무리가 갈 수 있습니다. 강아지들은 저마다 다르고, 환경 또한 달라서 어떤 정답이 있는 게 아닙니다. 저는 입양 후 일주일이 지나고 나면 자율급식을 권장합니다. 강아지들에게 밥을 언제든지 먹을 수 있다는 안정감을 주는 방법이지요. 이 자율급식과 관련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평소 하루 종이컵으로 두 컵씩, 아침저녁으로 총 네 컵씩 먹는 반려견이 있습니다. 먹이를 보면 무서울 정도로 순식간에 먹어치웁니다. 의뢰인은 반려견이 항상 이렇게 배고파한다고 합니다. 보호자가 먹이를 주려고 컵만 들어도 점프를 하는 등 흥분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강아지에게 자기 스스로 밥 양을 조절할 수 있도록 자율급식을 제안했습니다. 자율급식으로 바꾸면서 며칠 동안 평소의 3배에서 4배나 많은 사료를 먹었습니다. 의뢰인은 이러다 강아지가 어떻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먹는 양이 늘어난 만큼 대변 보는 횟수도 많아졌고 마시는 물의 양도 늘었습니다. 그러자 숨도 헐떡이고, 묽은 변을 봅니다. 의뢰인의 걱정은 나날이 늘어만 갔습니다. 저는 그래도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해보자고 했습니다. 자율급식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주일이 지나고 이주일째 접어들자, 이제는 밥을 줘도 남기기 시작합니다. 밥을 가득 담아줬는데, 냄새만 맡고 돌아갑니다. 보호자가 전날 저녁에 종이컵으로 6컵이 들어가는 먹이그릇에 사료를 가득 부어놓아도 만 하루가 지날 때까지 그 사료를 다 먹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율급식을 시작하고 약 1개월이 지나자 그 강아지는 대략 24시간 동안 5~6컵 정도를 먹게 되었습니다. 예전보다 1컵에서 2컵 정도를 더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예전과 달리 사료를 보고 점프를 하거나 흥분하지 않고 보호자를 재촉하지도 않습니다. 그 강아지가 과연 한 컵을 더 먹게 되었기 때문에 그 양에 만족해서 이런 변화가 생긴 걸까요? 정말 그 강아지가 원했던 것이 종이컵 한 컵 정도의 사료를 더 먹는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 강아지가 그토록 원하던 것은 사료가 아니라, 먹이에 대한 안정감이었습니다. 바꿔 말하면 언제든 자신이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강아지에게 사료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는데, 아침저녁으로만 그것도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주인이 줄 때에만 먹을 수 있으니 위기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주인이 집에 오지 않으면 먹이를 먹을 수 없다는 불안감이 그 강아지에게 엄습했던 것이지요. 옛날 야생의 개들은 그리 풍족하게 지내지 않았습니다. 사냥 성공률도 그다지 높지 않았고요. 사냥감이라도 잡는 날에는 맘껏 먹어놓기 위해 정신없이 먹고 서로 치열하게 싸웠을 것입니다. 먹이는 곧 생존이니까요. 애완용으로 길러지는 다람쥐는 가을이 되어도 먹이 활동을 하지 않고, 겨울이 되어도 동면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늘 그들의 먹이그릇에는 먹이가 들어 있으니까요.

만족감은 사자도 온순하게 만듭니다. 자율급식을 하기 전에 그 보호자는 강아지의 배고픔을 이용해 앉아, 엎드려, 기다려 같은 것들을 가르쳤습니다. 영리한 강아지는 보호자가 시키는 대로 하면 먹을 것을 얻어먹을 수 있으니 필사적으로 따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배운다고 해도 먹이에 대한 안정감은 얻을 수 없습니다. 제가 자율급식을 제안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강아지가 먹이를 보면 흥분하는 이유가 먹이, 즉 생존에 대한 집착이었던 것입니다. 교육을 잘 따라가는 강아지가 될 수는 있었지만 그 강아지는 늘 못 먹을지도 모른다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을 것입니다. 부족한 물과 먹이는 반려견들의 감정을 단순하게 만듭니다. 오로지 먹기 위해서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지요. 그런 상태에서 보호자와의 복잡한 상호작용이나 교감이 나오기 어렵습니다. 강아지 입장에서는 보호자를 오로지 ‘먹이를 주는 고마운 사람‘으로만 인식할 수도 있습니다. 자유롭게 먹이를 먹을 수 있다면, 당신의 반려견은 훨씬 더 여유로워질 것입니다. 그러면 더 많은 생각을 가지고 보호자를 대할 수 있고, 먹이에 대한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돼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 P122

정답을 찾기는 어렵지만, 몇 가지 이유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반려견의 공격성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공격성은 당하는 사람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줍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이 반려견들이 언제든 사람을 공격할 수 있다고 잘못 알고 있습니다. 믿기지 않지만 사실입니다. 어린 시절 강아지에게 물렸거나 한 번도 물리지 않은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는 분이 많습니다. 그들은 다른 생명체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포심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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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타인의 생각과 느낌을 인지하고, 팀의 일원으로 자기 몫을 훌륭히 해 내고, 인간관계를 맺고, 남들과 힘을 모아 문제를 해결하고, 논리로는 불가능한 위대한 능력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등 말 그대로 인간다운 근원적인 본성에 관련된 자질이 가치 높은 기술로 새로이 주목받는다. 앞으로 부각될 그런 자질은 과거에 우리 경제가 가장 가치 있게 평가했던 능력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부류다. 이번에 맞이할 변혁을 통해서 우리는 일을 통한 금전적인 보상뿐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한층 풍요롭고 만족스러운 경험을 기대할 수 있다. - P17

산업혁명이 한창 시작될 즈음에는 기술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이미 굳게 자리를 잡았다.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기술에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19세기 초에 기계식 직조기를 부수면서 과격하게 저항했던 러다이트(Luddite, 영국 산업 혁명 당시 실직을 염려하여 기계 파괴 운동을 일으킨 직공단으로 지도자인 네오 러드의 이름을 따서 러다이트라고 불렀다-옮긴이)들은 그저 잘 알려진 한 가지 예에 불과했다. - P27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 역시 이 같은 경향을 주시하고 전례 없는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2014년 워싱턴DC에 모인 청중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운전자, 웨이터, 간호사 할 것 없이 사람의 일을 소프트웨어가 대체하는 추세가 진행 중입니다. 정보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시간이 흐르면 일자리 수요가 줄어들게 됩니다. 앞으로 20년 뒤에는 수많은 전문 분야의 노동 수요가 상당히 줄어들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그런 현실을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 P33

나는 그런 어려운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음을 느끼면서, 니콜라스 네그로폰테 교수는 과연 이런 변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 MIT 미디어랩 창시자로 유명한 그는 일찍이 전화가 유선에서 무선으로, 텔레비전이 무선에서 유선으로 바뀐다고 예측했는데 그가 예측했던 내용은 대부분 실제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나는 이메일로 "지금으로부터 5~10년 뒤에, 사람이 컴퓨터보다 잘 하는 일에 어떤 것이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보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즐기는 일‘을 빼고는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정말 일이 없는 세상을 원할까?
사실 인간의 노동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될 가능성은 아주 낮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욕구는 무한하기 때문이다. 기술이 인간을 위해 아무리 많은 걸 해주더라도 인간은 항상 더 많이 원할 것이다. 잘 알려진 밀턴 프리드먼의 말처럼, 앞으로는 사람들이 돈을 지불하고 정신과 의사를 대동하고 다니게 될지도 모른다. 실제로 예전에 헨리 포드(존 D. 록펠러라는 설도 있다)가 골프를 배우는데 실력이 좀처럼 늘지 않자, 남자 아이를 고용해 골프 코스를 따라 다니면서 고개를 들고 치라고 알려주도록 했다는 그와 비슷한 일화가 있다. - P58

산업혁명이 태동하고 기계시대가 시작된 이후 인간의 성공은 인간의 기계 같은 습성에서 유래한 경우가 많았다. 인간은 수십 년 동안 공장에서의 육체노동과 사무실에서의 정신노동 같이 반복적이며 규칙적인 활동에 몸담았다. 그것이 그 당시 일의 특성이었다. 헨리 포드가 "양손이 필요하다고 했더니만 왜 매번 머리가 딸려 오는 거야?"라고 불평했던 것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다. 그런 업무는 사실 기계에게 적합한 일이었다. 그저 그 시대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기계가 아직 만들어지지 못했을 뿐이었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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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보다 민감한 사람들 중에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많다. 그것은 지금 이 시대의 문화가 우리의 성향이나 행동과 매우 다른 성향과 행동 방식에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극도로 민감한 사람들 중에는 평생 남들이 기대하는 ‘활기 넘치는‘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은퇴한 후에야 느리고 사색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아마도 "지나치게 걱정하지 마", "더 강해져야 해", "남들처럼 즐기는 방법을 배워"라는 말을 수없이 들으며 살아왔을 것이다. 달라져야 한다고 끊임없이 부추기는 세상에서 당신은 남들보다 민감한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타인의 기대에 맞추기 위해 자기 자신을 바꾸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양으로 측정하지 않고 질로 측정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당신은 남들처럼 생산적이거나 효율적이지는 못하지만, 질적으로 우수한 일을 해낼 수 있고, 좁은 폭을 깊이로 상쇄할 수 있다.
오랜 시간 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살았다. 그리고 결코 그들을 쫓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좌절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할 수 없는 것에서 내가 갖고 있는 자원으로 초점을 옮기는 방법을 배우고 터득했다. - P8

"극도의 민감성은 인격을 풍요롭게 만든다. 단지 비정상적이고 어려운 상황에서만 이러한 장점이 매우 심각한 단점으로 바뀐다. 그것은 민감한 사람들의 침착하고 신중한 성향이 갑작스러운 상황으로 인해 혼란을 겪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도의 민감성을 본질적으로 병적인 성격의 구성 요소로 간주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류의 4분의 1을 병적인 사람으로 규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 카를 구스타프 융 - P10

일반적으로 다섯 사람 중 한 사람은 남들보다 민감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고등 동물들도 매우 민감한 유형과 ‘회복력이 더 강한(resilient)‘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두 가지 유형 중에서 대체로 후자가 더 모험을 좋아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성향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P20

높은 민감성을 가진 사람들의 특성이 새로운 발견은 아니다. 단지 ‘내향적인 성격‘ 같은 다른 이름으로 불려왔을 뿐이다. 미국의 임상심리학자 일레인 아론은 ‘타인보다 더 민감한 사람‘의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그녀는 타인보다 더 민감한 사람들 중 30퍼센트가 사회적으로 외향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전까지만 해도 내향성과 민감함을 동일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한다. - P20

극도로 민감한 사람들 중에는 혼자 사는 삶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다. 일상생활 속에서 그들에게 필요한 평안함과 고요함을 누리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런 삶을 선택하면 때때로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고, 해결하기 힘든 딜레마에 빠진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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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간단히 강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마법‘일 것입니다. 그런 ‘마법‘은 한 실체를 다른 실체로 변화시킵니다. 그러나 마법은 실체의 영역을 넘어가지는 않습니다. 그와 반대로 도겐의 "흐르는 산"은 마법을 통한 본질 변화로부터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흐르는 산은 사물들 서로 간의 스며듦이 일어나는 비어 있음의 일상적 모습을 나타냅니다. "진정한 진리 속에는 마술도 비밀도 기적도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바라는 사람은 잘못된 길을 가는 것입니다. 물론 선불교에는 모든 종류의 요술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주전자로부터 후지 산을 솟아나게 하거나, 불에 달궈진 부젓가락으로부터 물을 짜내거나, 나무 기둥 위에 앉거나, 혹은 두 개의 산의 위치를 서로 바꾸는 요술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마술도 기적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일상의 흔한 일입니다. - P64

라이프니츠는 무가 존재보다 "더 간단하고 더 쉽다고" 여깁니다. 존재하기 위해서는 힘, 의지 혹은 무에 저항하거나 무를 견디려는 충동이 필요합니다. 이런 존재 능력의 핵심은 자기를 좋아하는 것, 즉 "자기를 성취하려는" 의욕입니다. 그리하여 존재는 원함의 구조를 가집니다. 그런 원함은 자기를 원하기에 자기와 관계하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육체와 영혼을 벗어던지기를 요구하는 도겐이 가리키는 존재는 의지 혹은 욕구를 근본 특징으로 가지지 않습니다. 선불교의 수행은 마음에 완전히 다른 존재가 도달할 때까지 마치 마음을 굴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 다른 존재는 아페티투스가 없이 있습니다. - P86

『꽃꽃이에 관하여』에서 선불교 철학자 니시타니 게이지는 일본의 꽃꽃이 예술을 잘라냄 현상의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꽃을 삶의 뿌리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꽃의 영혼을 잘라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꽃으로부터 충동적 의욕, 즉 아페티투스가 제거됩니다. 이렇게 자르는 것은 꽃에게 죽음을 줍니다. 꽃은 고유한 방식으로 죽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죽음은 시드는 것과 다릅니다. 꽃에게 시든다는 것은 다 살았다는 것 혹은 자연사했다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꽃이 마지막까지 살기 전에 죽음을 줍니다. 꽃꽃이를 위한 꽃은 시들기 전에, 자연사하기 전에, 삶과 의욕이 멈추기 전에 절단되어야만 합니다. - P93

하이데거는 인간적 현존재의 근본 특징이 "걱정"이라고 주장합니다. 주장에 대한 "근거" 혹은 "증거"로 하이데거가 제시하는 것은 오래된 우화입니다. "옛날에 ‘걱정‘이 강을 건넜을 때 그녀["걱정"으로 번역한 독일어 "Sorge"는 여성 명사]는 점토질의 흙을 보았습니다. 생각에 빠진 채 그녀는 흙 한 덩어리를 주워 빚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만든 것에 대해 숙고할 때 유피테르가 다가옵니다. ‘걱정‘은 유피테르에게 빚어진 흙덩어리에 정신을 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녀의 부탁을 유피테르는 기꺼이 들어줍니다. 그러나 이제 그녀가 빚어진 것에 그녀의 이름을 붙이길 원했을 때, 유피테르는 허락하지 않았고 자기의 이름이 주어져야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름 때문에 ‘걱정‘과 유피테르가 싸울 때, 흙(Tellus[대지의 여신]}도 일어나 빚어진 것에 자기 이름을 붙이기를 원했습니다. 실제로 흙의 몸 한 덩어리가 빚어진 것에 제공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싸우는 이들은 사투르누스[계절의 신]을 심판관으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사투르누스가 내린 정당해 보이는 결정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유피테르, 그대는 정신을 주었기 때문에 그 빚어진 것이 죽을 때 정신을 받아야 하고, 흙, 그대는 육체를 선물했기 때문에 육체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최초로 빚은 ‘걱정‘은 그것이 살아 있는 동안 그것을 소유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름 때문에 싸움이 있으므로 그것은 ‘호모homo‘라고 불리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후무스humus(흙)로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호모는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기 위해 자기에게 죽음을 주어야만 할 것입니다. - P95

걱정이 없는 사람은 내가 있음[나의 존재]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는 계속 동일하게 있으려 하지 않고 만물의 운행에 맞춰 변합니다. 그의 아무것도 아니면서 자기가 없는 자아는 만물의 비춤과 비침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는 만물의 빛 속에서 빛납니다. 자기 마음에 있는 두 가지 영혼 때문에 고뇌하는 파우스트에게 바쇼는 어쩌면 다음과 같이 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대의 영혼들을 잘라내십시오! 그리고 거기에 매화가 피게 하십시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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