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인간을 가두고 있는 담벼락으로 "유일한 것, 완전한 것, 자기 충족적인 것, 그리고 불멸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영원히 고정되어 있어서 바뀔 수 없다고 상정된 것이야말로 인간을 가로막고 있는 담벼락이라는 것이다. 상징적으로 니체는 이것을 ‘신‘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그가 망치로 부수겠다고 선언한 담벼락을 기독교의 신에 한정시킬 이유는 전혀 없다. 신은 영원불멸한 존재라는 생각뿐만 아니라 지금의 사회구조는 영원히 바뀔 수 없다는 생각도 인간을 체념적이고 수동적으로 만드는 담벼락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가로막고 길들이려는 담벼락을 파괴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제 ‘영원회귀‘에 대한 니체의 육성을 직접 들어볼 순서이다.

모든 것은 가며,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바퀴는 영원히 돌고 돈다. 모든 것은 시들어가며, 모든 것은 다시 피어난다. 존재의 해는 영원히 흐른다. 모든 것은 부러지며, 모든 것은 다시 이어진다. 똑같은 존재의 집이 영원히 지어진다. (......) 나는 더없이 큰 것에서나 더없이 작은 것에서나 같은, 그리고 동일한 생명으로 영원히 돌아오는 것이다. 또다시 만물에게 영원회귀를 가르치기 위해서 말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P22

이렇게 반문하면서 니체는 영원불멸의 세계관이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삶을 부정하게 만드는 주범이라고 진단한다.
그렇지만 영원불멸을 추구하려는 시도 자체를 붕괴시킬 수 있는 새로운 세계관을 제안하지 않는다면, 니체의 진단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니체가 제안한 ‘영원회귀‘의 세계관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만약 영원회귀가 영원불멸의 세계관을 붕괴시킬 정도로 강력하지 않다면, 니체는 자신의 철학이 과거 전통에 대한 투정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직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사활을 걸고 제안한 ‘영원회귀‘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생각이다. 10만 년 주기로 모든 것이 반복된다고 해보자. 오늘 커피를 마시고 있다. 이것은 10만년 전에도, 20만 년 전에도 그리고 30만 년 전에도 동일하게 반복되었던 것이며, 10만 년 뒤에도, 20만 년 뒤에도 그리고 30만 년 뒤에도 동일하게 반복될 일이다.
기독교에서는 살아 있을 때 가난과 억압을 참으라고 한다. 그러면 영원불멸한 천국에서 모든 것을 보상받고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지금 고통스러운 것을 기꺼이 감내하라고 가르친다. 언젠가 진학하거나 취업하면 고통의 대가로 뿌듯한 성취감이 찾아올 테니까 말이다. 직장에서는 상사나 거래처 사람에게 비굴한 행동도 서슴지 않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나중에 승진하거나 혹은 거래가 성사되는 단맛을 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런 통념에 따르면 순간의 고통과 비굴은 아무것도 아니다. 힘들지만 이 순간만 참고 견디면 된다. 바로 여기 이 순간은 미래의 행복이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버려도 될 수단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바로 이런 통념에 브레이크를 건다. 영원회귀의 가르침에 따르면 굴욕과 비겁으로 점철된 고통의 순간은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10만 년 주기로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우리가 순간의 굴욕과 비겁을 선택할 리는 없다. 순간으로 보였지만 그것은 사실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 그리고 지금의 삶이 비겁하다면 우리는 자신이 10만 년 주기로 지금까지 비겁했다는 슬픈 과거를, 동시에 자신이 앞으로도 영원히 10만 년 주기로 비겁하리라는 슬픈 미래를 갖게 될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우리가 굴욕과 비겁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인가? 들뢰즈는 영원회귀로 응축되는 니체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은 윤리적 강령으로 해석했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무엇을 의지하든 그것의 영원회귀를 의지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의지하라."
- 『차이와 반복』

영원회귀를 주장한 니체는 얼마나 용의주도하고 영민한가? 우리는 자신이 과거 10만 년 전에 무엇을 했는지, 혹은 앞으로 10만 년 뒤에 무엇을 할지 전혀 모른다. 단지 지금 무엇인가를 의지하고 실행하려는 순간, 우리는 그것이 10만 년 전에도 반복되었고, 그리고 10만 년 뒤에도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는 것만을 안다. 그러니까 온갖 억압과 고통을 극복하여 현재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영위해야만 한다. 자신의 삶을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지금 노예의 굴종과 비겁을 감내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노예로 살기를 결정한 셈이고, 지금 주인의 당당함과 자유를 쟁취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주인으로 살기를 결정한 셈이다. 마침내 우리는 자신을 가두어 길들이는 담벼락을 무너뜨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유롭고 싶은가? 그렇다면 니체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지금 인생을 다시 한 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P24

우선 라캉은 인간이 금지된 것만을 욕망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에 따르면 우리의 욕망은 금지된 것을 갖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금지가 없다면 욕망도 생길 수 없다는 뜻이다. 작은 구멍이 뚫려 있는 어느 공사장 외벽 한켠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써 있다. "들여다보지 마시오." 이 경우 "들여다보지 말라고 하니 들여다보지 말아야지"라고 가볍게 돌아서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비록 들여다보지는 않지만, 보고 싶다는 욕망이 우리를 사로잡을 테니까 말이다. 이제 다시 정신분석학의 논의로 돌아가자.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인간은 두 살 때까지 구강기(oral stage)를 거친다고 한다. 이 시기에 유아는 자신의 입에서 가장 강한 쾌감을 느끼게 된다. 유아가 젖을 먹기 위해서만 엄마의 젖꼭지에 매달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아는 젖꼭지를 물고 빨면서 쾌감을 느낀다. 유아가 인공 젖꼭지를 물고서 행복하게 잠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 엄마는 유아에게 젖꼭지를 내주지 않으려고 한다. 유아는 자신에게 쾌락을 제공하는 젖꼭지가 이제는 금지되었다고 느끼게 된다. 이 경우 젖꼭지는 아이의 쾌락을 충족시켜주는 단순한 대상을 넘어선다. 한떄 쾌락을 주었던 젖꼭지가 금지되자마자, 이것은 유아에게 욕망 대상이 된다. 당연히 이 순간 유아는 욕망 주체로 탄생한다. (......) 금지된 쾌락은 잃어버린 쾌락으로서 영원히 우리를 따라다닌다. 그래서 젖꼭지를 금지당한 유아는 볼펜이나 인형을 입으로 빨거나, 자라서는 이성에게 키스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볼펜이나 인형, 혹은 이성의 입술은 금지된 젖꼭지, 즉 대상a의 아우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현재 욕망하는 것은 과거 부모나 사회로부터 금지된 쾌락 대상의 아우라를 가진 것뿐이다. 현재 작동하는 우리의 욕망은 모두 과거 금지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라캉이 인간에 대해 내린 결론이다. 그러니까 지금 애인의 입술에 키스하고 싶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유년 시절 금지된 쾌락 대상으로서 젖꼭지를 그리워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라캉이 우리에게는 생각과 삶의 불일치가 존재한다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머릿속에서는 애인을 사랑해서 키스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젖꼭지에 대한 잃어버린 쾌락을 절망스럽게 회복하려고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생각과 존재의 불일치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과거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신에게 각인된 금지를 극복해야만 한다. 그래서 라캉은 정신분석학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세상에 태어날 때 주체는 타자로부터 욕망되는 자로서건 아니면 욕망되지 않는 자로서건 간에 타자의 욕망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이 소망하는 것인지 혹은 소망하지 않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주체는 다시 태어날 수 있어야만 한다. 정신분석의 방법을 고안함으로써 프로이트가 밝힌 진리의 본성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 『에크리』 - P29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당신이 소망하는 것인가?" 지금 내가 욕망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과거 타자가 욕망했던 것, 혹은 금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불일치를 극복했을 때, 우리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사랑이 아니었으며, 혹은 우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사랑이었다는 때늦은 후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 P31

너는 작가의 의지에 의해서 결정된 인물인 연극 배우라는 것을 기억하라. 만일 그가 연극이 짧기를 바란다면 짧을 것이고, 만일 길기를 바란다면 길 것이다. 만일 그가 너에게 거지의 구실을 하기를 원한다면, 이 구실조차도 또한 능숙하게 연기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만일 그가 절름발이를, 공직 관리를, 평범한 사람의 구실을 하기를 원한다고 해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엥케이리디온』

에픽테토스에게 ‘작가‘는 신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그에 따르면 신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가 연기해야 할 배역들을 모두 정했다는 것이다. 그 배역에 따르면 우리는 거지가 될 수도 있고, 왕이 될 수도 있고, 사형수도 될 수 있고, 절름발이가 될 수도 있다. 에픽테토스는 왕이 되었다고 뻐길 것도 없고, 거지가 되었다고 해서 슬퍼할 이유도 없다고 한다. 왕이나 거지는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삶이란 연극판에 부여된 배역에 지나지 않는다. 연기를 마치면, 그러니까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우리는 모두 배역에 충실했던 배우들이었을 뿐이다. 어린 나이에 죽을병에 걸렸다고 슬퍼할 이유도 없다. 단지 자신이 맡은 배역이 그럴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충실하게 자신의 배역을 잘 소화하고 연극판을 떠나면 된다. 괜히 신이라는 작가에게 투덜거려서도 안 된다. "왜 저에게 이런 초라한 배역을 주었나요?" 이 말을 듣는다면 작가는 말할 것이다. "누군가 어차피 그런 배역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프로답게 연기에 집중해야지, 왜 아마추어처럼 투덜대는 거니?"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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