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가장 큰 행복을 가져다주면서, 동시에 가장 큰 불행을 안겨주기도 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란 감정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성이든, 선배이든, 후배이든, 아니면 자식이든 간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의 이면에는 그도 나를 사랑하기를 원하는 무의식적인 욕망이 깔려 있기 마련이다. 물론 겉으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만족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다는 것! 이것이 사랑이란 감정을 가졌을 때 우리가 소망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태는 삶에서 빈번하게 발생한다. 바로 여기에 사랑이 낳을 수 있는 불행이 도사리고 있다. 이 경우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 것 자체를 신의 저주라도 되는 양 후회하게 된다.
그렇지만 사랑이란 감정이 낳을 수 있는 더 큰 불행이 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것이 상대방에게 행복을 안겨주지 못하고, 오히려 불행을 선사하게 될 수도 있다. 장자라는 철학자가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사랑이 낳을 수 있는 가장 큰 불행에 직면해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소통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장자가 우리에게 주는 지혜를 배우기 위해서 먼저 ‘바닷새 이야기‘라고 불리는 다음 에피소드를 꼼꼼하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너는 들어보지 못했느냐?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아름다운 궁궐의 음악을 연주해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하였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하기만 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결국 죽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 아니다.
- 『장자』「지락」 - P190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앞서, 그가 누구이며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누군가를 알아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알려고 하는 존재이다. 우리가 ‘타자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숙고해야만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타자란 우선 나와는 다른 삶의 규칙을 가진 존재를 의미한다. 노나라 임금에게 바닷새는 바로 타자였다. 어떻게 하면 노나라 임금은 바닷새의 속내를 독해할 수 있을까? 장자의 대답은 ‘허‘나 ‘망‘이란 표현에 응축되어 있다. 여기서 ‘허‘가 비운다는 뜻이면, ‘망‘은 잊는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모두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타자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을 비우거나 잊어버려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제야 우리는 노나라 임금과 관련된 심각한 문제를 풀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 노나라 임금이 사랑하는 바닷새를 놓아주지 않으면서 바닷새를 죽음으로 몰고 가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노나라 임금은 우선 "이렇게 하면 바닷새가 좋아할 거야"라는 생각을 잊어야만 했다. 오직 그럴 때에만 노나라 임금은 바닷새가 던지는 암호들을 섬세하게 읽어낼 수 있는 마음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 P193

사랑의 비극은 막아야 한다.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타자를 파괴한다는 것! 이것보다 비극적인 상황이 어디에 있겠는가? 타자에 대한 선입견은 나와 타자 사이의 연결을 가로막는 것, 그래서 타자와 연결되기 위해서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마음을 비운다고 해서 타자와의 소통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나 자신의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타자와 소통하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 결코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우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즉 타자에 대한 선입견을 비우는 데 최선을 다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기다려야 한다. 사랑하는 타자가 나의 수줍은 손을 잡아주기를. 아직도 2,000년 전 중국 대륙에 살았던 장자라는 철학자의 목소리가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타자를 사랑할 때 사랑하는 마음을 제외한 일체의 마음을 비워야 한다. 오직 비어 있는 잔만이 술이 가득 차기를 희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195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는 누구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그 대가는 분명하다. 사랑이 주는 기쁨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다. - P197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해탈하기 이전의 우리 마음, 즉 ‘요동치는 마음‘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내면, 즉 기억의식 때문에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열정적으로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위의 반대로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두 명의 남녀가 있다고 하자. 불가항력적인 이별은 두 사람 내면에 모두 지울 수 없는 결여의 상처를 남기기 마련이다. 인간은 금지된 것과 결여된 것을 욕망하는 법이다. - P19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태어날 때부터 신경이 예민한 아이는 버림을 받거나 낯선 사람의 손에 맡겨질 때 평범한 아이들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그런 경험은 아이의 불안 수준을 높인다.
당신은 가끔 자신이 어른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아직도 작고 무력하고 혼자 생존할 수 없는 어린아이처럼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지도 모른다. 어린아이는 어느 정도의 사랑과 보호를 받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다. 그러나 어른은 외딴 섬에서 혼자 몇십년간 생존할 수도 있다.
당신의 어린 시절은 과거이고, 지금은 살아남았고, 이제 삶은 위험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한 인식은 불안을 줄여줄 것이다. 그러나 불안이 당신의 몸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새로운 경험이 신경 시스템에 파고들어 내면을 변화시켜야만 불안을 없앨 수 있다. 지식은 당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 개인적이고 실제적인 경험만이 불안을 해결할 수 있다.

"나는 더 이상 직장에서 남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전전긍긍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첫 번째 실행으로 사무실 동료가 큰 소리로 통화할 때 방해가 된다고 솔직하게 말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 결심을 하자 머릿속에 온갖 시나리오가 펼쳐지더군요. 동료가 화를 내며 벌떡 일어나서 상사에게 달려가 나를 다른 직원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하는 모습도 상상했습니다.
다음 날 오전 내내 말할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지만, 동료가 통화를 멈출 때마다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더군요. 점심시간에 산책을 하고 와서 심호흡을 하고 벼르고 벼르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어서 숨을 쉬기도 힘들더군요. 갑자기 무거운 침묵이 흐르자 나는 떨려서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몇 초의 시간이 흐른 뒤 드디어 동료가 입을 열었습니다. "더 빨리 얘기해 주지 그랬어. 하지만 지금이라도 해줘서 고마워"라고.
우리는 함께 해결 방법을 의논했습니다. 이 일은 내게 매우 긍정적인 경험이었습니다. 나는 그 동료를 전보다 더 좋아하게 되었고, 그 역시 그런 것 같았어요. 우리는 지금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 경험은 내게 큰 용기를 주었습니다. 집에 돌아가서 남편에게도 밤중에 갑자기 일어나 불을 켜는 게 내게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 리너, 43세

당신의 행동 규칙 중에서 자신을 힘들게 하고 제한하는 것들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런 노력은 엄격한 규칙으로 자기 자신을 옭아매지 않고, 더 많은 선택권을 갖고, 진정한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여유를 갖도록 도와줄 것이다. - P74

분노의 내면에는 현실이 달라질 수 있고, 달라질 거라는 희망이 숨겨져 있다. 분노는 장애물에 대항하기 위해 고안된 강력한 에너지다. 당신은 그 장애물과 싸우기 위해 변화되기를 원한다. 분노의 감정을 느낀다면, 의식하든 못 하든 싸워야 할 대상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러나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싸울 때 문제가 발생한다. 배우자의 어떤 면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화가 나면, 계속 그 점을 지적하고 고치려고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배우자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두 사람의 삶을 더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성격의 어떤 부분은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연로한 부모님에게 계속 화를 내고 있다면, 그 분노의 내면에는 당신의 과거가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서 어릴 때 받지 못했던 것을 보상받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분노의 감정 밑에 부모님이 달라지면 함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 P142

우리의 삶은 불가능한 바람으로 가득 차 있다. 그 바람을 인식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특히 실제의 삶이 바라는 삶과 큰 차이가 있을 때에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당신의 바람은 깊은 슬픔을 드러낸다.
그러나 나는 상처를 깊이 감춰둔 채 무감각하고 우울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슬픔을 직시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고 싶다. 도덕적인 비판을 할 때 당신은 사실 자신의 내면이나 외부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바람을 인식하고 있다면, 당연히 그 바람이 성취되지 않을 때 고통을 느끼고 성취될 때 기쁨을 느낄 것이다. - P147

어떤 사람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직시하는 것보다 분노의 감정을 부모에게 돌리는 걸 더 편하게 느낀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바꿀 수 없다.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는 없어지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평생 상실감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그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분노는 슬픔으로 바뀐다.
슬픔은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 슬픔은 기다려야 하는 과정이다. 슬픔의 감정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타인의 사랑과 배려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 분노로 가득 차 있을 때는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애정과 친절을 베풀지 못한다. 당신이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슬픔은 사람들을 곁으로 불러들이지만, 분노는 멀어지게 한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대처할 수 있어야 해"라는 자기 판단은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대처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라는 말로 바꾸어야 한다. 이것은 내면에 슬픔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당신은 나를 더 지지해줬어야 해"라는 말은 "당신이 나를 더 많이 도와주면 좋았을 텐데"라는 말로, 아니면 더 간단하게 "나는 네가 도와주기를 기다렸어"라는 말로 바꾸어야 한다.
나는 독자들이 도덕적인 비판을 할 때 "해야 한다(should)"라는 말 대신 "했으면 좋을 텐데(wish)"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를 바란다. 그런 표현이 자기 자신과 상대방에 깊은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평소에 자기 자신이나 타인을 판단하는 말 대신 "한다면 좋을 텐데" 또는 "그렇게 하지 않아서 아쉽다"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표현이 자아의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경험해보기를 바란다. 여전히 슬픔의 감정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편안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민한 신경을 가진 당신에게는 분노의 에너지보다 슬픔의 감정이 훨씬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 P148

자신에게 병이 생기면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었거나, 운동을 충분히 하지 않아서 병에 걸렸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병에 걸리지도 않았을 거라고 자책한다.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병이 난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면, 당신은 자기 자신에게 더 건강해질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분명히 죽음이 다가온다. 자신의 무기력함과 삶의 불확실성을 직시할 때, 지나친 죄책감으로 고통당하지 않을 수 있다.
어떤 아이들은 집안에 갈등이 있거나 문제가 생기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아이들은 문제의 원인을 자질을 갖추지 못한 부모의 탓으로 돌리는 것보다, 자기 자신에게 상황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해야 더 안전하게 느낀다. 그들은 착하고 공손한 아이가 되기 위해 노력하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한다. 다른 대안은 부모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에게 너무 두려운 일이다. - P1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민한 정치사회적 주제에 대해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걸 꺼리는 한국인들은 설문조사 시 당위적인 답을 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긴 하지만,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탁월한 연구임이 틀림없다. 다원적 무지에 의해 지역감정이 실제 이상으로 증폭될 가능성은 엄존하고 있기에, 상호 소통의 기회를 확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 P163

그간의 여러 실험 결과에 따르면, 미디어의 메시지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느냐 아니냐가 제3자 효과의 유무를 결정하는 관건이 된다고 한다. 즉, 자신에게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메시지에 대해서는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이 많은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하겠지만, 긍정적 효과를 가지는 메시지에 대해서는 그것이 자신들에게 미친 효과와 비슷하게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 P167

리처드 펄로프는 제3자 효과가 발생하는 이유를 9가지나 제시했는데, 두 개의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될 것 같다. 첫째는 남보다 자신을 좋게 보는 인간 본성 때문이다. "미디어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하는 것은 잘 속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또는 자신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속성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수 있다. 자신은 미디어 효과로부터 나약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은 미디어 효과에 약하다고 가정함으로써 사람들은 자아를 긍정적으로 유지하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신념을 재확인하게 된다."
둘째는 예측하기 어려운 사건을 통제하려는 욕구 때문이다. "만약 미디어에서 제공하는 모든 프로그램이 우리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믿는다면 이는 과민 반응일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매스미디어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미디어가 점령한 이 세상에 적응하면서 미디어를 이용하고 만족을 얻으며 우리 삶에 미디어를 통합할 수 있다는 것이다." - P167

사회적 거리는 ‘평균 이상 효과‘라고 일컬어지는 현상과도 관계가 있다. 이것은 사람들이 일반 동료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상황에서 자신을 더 호의적으로 평가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사실 대다수 사람이 자신을 평균 이상이라 생각한다. 미국에서 이루어진 조사에서 모든 운전자 가운데 자신의 운전 실력이 평균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90퍼센트, 대학 교수 가운데 자신이 평균적인 교수들보다 낫다고 믿는 교수는 94퍼센트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바로 이런 평균 이상 효과 때문에 어떤 메시지에 대해 "나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지만, 평균에 속하거나 그 이하일 다른 사람들에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대중이 어떻다는 말을 즐겨하면서도 막상 자신은 대중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자신을 엘리트로 여기지 않는 보통 사람들도 그런 정도의 엘리트주의는 갖고 있는 셈이다. - P168

허연은 "요즈음 어느 자리에서나 와인 이야기로 너스레를 떠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들이 와인 이야기를 가지고 몇 시간을 떠드는 이유는 예의가 없어서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와인에 관심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 허위 합의 효과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 P1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날처럼 정보를 쉽게 구할 수 있게 된 사회에서는 신뢰에서 통제로의 시스템적 전환이 일어난다. 투명사회는 신뢰사회가 아니라 통제사회다. - P5

전면적 커뮤니케이션과 전면적 네트워크화의 흐름 속에서 아웃사이더가 되는 것, 튀는 견해를 밝히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려워졌다.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은 매끈하게 다듬고 평준화하는 작용을 하여, 결국 획일화를 초래하고 이질성을 제거한다. 투명성은 순응에 대한 강압을 낳고 이로써 지배 시스템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한다. - P6

커뮤니케이션은 같은 것끼리 반응할 때, 동일자의 연쇄반응이 일어날 때 최대 속도에 도달한다. 다름과 낯섦의 부정성, 타자의 저항은 매끄러운 동일자의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하고 지연시킨다. 투명성은 타자와 이질적인 것을 제거함으로써 시스템을 안정시키고 가속화한다. 이러한 시스템의 강제로 투명사회는 곧 획일적 사회가 된다. 바로 이 점에 투명사회의 전체주의적 특성이 있다. "획일화를 표현하는 새 단어 : 투명성." - P15

인간의 영혼은 분명 타자의 시선을 받지 않은 채 자기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을 필요로 한다. 불투과성은 영혼의 본질에 속한다. 영혼의 내부를 훤히 비춘다면, 영혼은 불타버릴 것이며 특별한 종류의 소진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오직 기계만이 투명하다. 즉흥성과 우발성, 자유처럼 삶을 이루는 본질적 요소들은 투명성을 용납하지 않는다. 훔볼트도 언어에 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 가운데에는 어떤 이성으로도 그 현상 이전의 상태에서 원인을 찾아낼 수 없는 것이 있다. [......] 그렇게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의 가능성을 언어에서 배제한다면, 이는 언어의 발생과 변화에 관한 역사적 진실에 해를 입히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 P16

잘 알려진 대로, 정보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더 좋은 결정이 내려지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직관은 주어진 정보를 초월하여 자기 고유의 논리를 따라간다. 오늘날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정보의 더미 속에서 고차적인 판단 능력은 위축되어간다. 종종 더 적은 지식과 정보가 더 많은 작용을 한다. 생략과 망각의 부정성이 생산적인 효과를 일으키는 일은 드물지 않다. 투명사회는 정보의 공백도 시각의 공백도 용인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유도 영감도 어떤 빈자리를 필요로 한다. 게다가 행복Gluck이란 단어는 빈틈에서 유래한 것이다. 행복은 중고지 독일어에서는 gelucke였다. 빈틈의 부정성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사회는 행복이 없는 사회이다. 시각적 빈틈이 없는 사랑은 포르노이다. 그리고 지식의 빈틈이 없다면 사유는 재산으로 전락하고 만다. - P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애인으로서의 소크라테스는 그의 제자들로부터 아토포스(atopos, 부정의 접두어 a와 ‘장소‘를 뜻하는 topos가 결합된 말이다.)라고 불렸다. 내가 욕망하는 타인은 장소가 없다. 그는 어떤 비교로부터도 벗어난다.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에서 타자의 아토포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타자는 아토포스로서 말을 전율시킨다. 우리는 이 타자를 말할 수도, 이 타자에 대해서 말할 수도 없다. 모든 수식어는 잘못된 것이고, 고통스럽고, 어울리지 않고, 어색하다. [……]" 욕망의 대상으로서 소크라테스는 비교할 수 없고 단독적이다. 단독성은 진정성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다. 진정성은 비교 가능성을 전제한다. 진정한 사람은 타인들과 다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아토포스, 즉 비교할 수 없는 존재다. 그는 타인들과 다를 뿐만 아니라, 타인들과 다른 모든 사람들과도 다르다. - P36

신자유주의적 생산 전략으로서 진정성은 상품화할 수 있는 차이들을 산출한다. 이를 통해 진정성은 자신을 물질화하는 상품들의 다양성을 증가시킨다. 개인들은 자신의 진정성을 무엇보다 소비를 통해 표현한다. 진정성의 명령은 자율적인 주권자로서의 개인을 형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명령은 상업에 의해 완전히 장악된다.
진정성의 명령은 나르시시즘적인 강제를 낳는다. 나르시시즘은 병적인 것과는 무관한, 건강한 자기애가 아니다. 건강한 자기애는 타자에 대한 사랑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나르시시즘은 타자를 보지 못한다. 타자는 에고가 이 타자 안에서 자신을 알아볼 때까지 계속 왜곡된다. 나르시시즘적인 주체는 세계를 오로지 자신의 음영으로만 지각한다. 그 불행한 결과가 타인의 소멸이다. 자신과 타인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자신이 용해되어 불명료해진다. 자아는 자신 안에서 익사한다. 이에 반해 안정된 자아는 타인에 직면할 때 비로소 형성된다. 이와 달리 과도하고 나르시시즘적인 자기연관은 공허감을 낳는다. - P37

오늘날에는 성적 에너지가 무엇보다도 자아에 투자된다. 자아 리비도의 나르시시즘적인 축적은 대상 리비도, 즉 대상을 점유하는 리비도의 감소를 초래한다. 대상 리비도는 대상에 대한 결속을 낳으며, 그 대가로 자아를 안정화한다. 자아 리비도의 나르시시즘적인 누적은 병을 초래한다. 이는 두려움, 수치감, 죄의식, 공허감과 같은 부정적 감정들을 낳는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매우 강력한 과정이 대상으로부터 리비도를 철회할 것을 강요하는 경우는 이와 전혀 다르다. 이 경우 나르시시즘적으로 변한 리비도는 대상으로 회귀하는 길을 찾을 수 없고, 이렇게 리비도의 가동성이 방해받으면 병이 생겨난다. 나르시시즘적 리비도의 누적이 일정 정도를 넘어서게 되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바뀌는 것 같다." 어떤 대상도 리비도로 점유할 수 없게 되면 두려움이 생겨난다. 그 결과 세상은 공허하고 무의미해진다. 대상과의 결속이 사라짐에 따라 자아는 자기 자신에게로 되던져진다. 자아는 자신과 충돌하여 파괴된다. 우울증은 자아 리비도의 나르시시즘적 누적으로 인해 생겨난다. - P38

모든 부정성의 제거가 오늘날 사회의 특징이다. 소통 또한 매끄러워져서 서로 만족감을 교환하는 행위가 된다. 슬픔처럼 부정적인 감정에는 어떤 언어도, 어떤 표현도 제공되지 않는다. 타인으로 인한 상처의 모든 형태가 회피된다. 그러나 이는 자기상해로 부활한다. 타자의 부정성을 추방하면 자기파괴의 과정이 초래된다는 일반적인 논리의 정당성이 여기서도 확인된다. - P41

알랭 에랭베르에 따르면 우울증이 증가하는 것은 사람들이 갈등 관계를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과와 최적화를 중시하는 오늘날의 문화는 갈등을 처리하는 작업을 허용하지 않는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성과주체는 오직 두 가지의 상태만을 알고 있다. 기능하기와 실패하기다. 이 점에서 성과주체는 기계와 비슷하다. 기계 또한 갈등을 알지 못한다. 기계는 오류 없이 기능하거나, 아니면 고장이 났다.
갈등은 파괴적이지 않다. 갈등에는 건설적인 측면이 있다. 갈등을 통해서야 비로소 안정된 관계와 정체성이 성립된다. 사람은 갈등을 처리하는 작업을 하는 가운데 성장하고 성숙한다. 생채기를 내는 행위는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갈등 처리 과정 없이, 누적된 파괴적 긴장을 신속하게 완화시켜준다는 점에서 유혹적이다. 생채기로 인한 화학 과정이 신속하게 긴장을 완화한다고 한다. 몸이 스스로 산출하는 마약이 뿌려진다는 것이다. 이 마약은 항우울제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항우울제 또한 갈등 상태를 억압함으로써 우울한 성과주체가 신속하게 기능하도록 만든다. - P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