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면적으로 사랑하는 남녀가 자유롭게 사랑과 결혼 생활을 영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종족을 보존하려는 맹목적인 삶의 의지의 한 책략, 혹은 한 가지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하는 남녀는 단지 맹목적 의지의 간지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쇼펜하우어의 발상이 아직도 생물학에서는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기적 유전자』에서 도킨스는 인간이 한 계기적 매체에 지나지 않을 뿐 진정한 주인공은 바로 유전자라고 주장했던 적이 있다. 이에 따르면 모든 개별적 생명체들은 유전자의 의도를 실현하고 있는 단계적 매체에 불과해진다. 따라서 오늘날 현대생물학계의 도킨스 역시 쇼펜하우어의 논리, 더 나아가 헤겔의 논리를 생물학 영역에서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 P228

쇼펜하우어나 도킨스 같은 사람들은 인간의 에로티즘이 종족을 보존하기 위한 맹목적 의지나 유전자의 책략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점에서 보면 인간은 다른 생물들과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을 것이다. 다른 모든 생물종들도 종족 보존의 본능에 따라 짝짓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타유만은 인간의 에로티즘이 동물의 성행위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 인간의 에로티즘은 사회적 금기, 그리고 이 금기에 대한 위반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갖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금지된 것에 대한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먹지 말아라", "보지 말아라"라고 금지된 것에 대한 선망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예외 없이 관찰되는 현상일 것이다. 이런 금지된 것에 대한 인간의 선망이 바로 성적인 대상과 관련될 때, 바타유가 말한 에로티즘이 비로소 강렬하게 발생한다. 바타유가 에로티즘에는 "유혹과 공포, 긍정과 부정의 엇갈림"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 P231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인 개인을 주체로 호명한다"라는 알튀세르의 주장이다. 이것은 흔히 ‘호명 테제’라고 불리는 주장이다. 어떤 인간이 태어났을 때, 그는 벌거벗은 한 개인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는 이미 그를 부를 준비를 모두 다 갖추고 있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김이라는 성을 쓰는 가정의 한 성원, 남자, 한국인, 노동자 계층이라는 사회구조 속에 던져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회구조에 익숙해 있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은 이제 하나둘씩 순차적으로 정해진 내용들을 가지고 그를 부르기 시작한다. "얘야!"라고 부르는 순간,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부르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대답하는 순간, 구체적인 개인은 점차 특정한 주체로 구성되기 시작한다. 결국 호명이란 행위를 통해서 주체는 스스로 사회구조의 어떤 한 가지 배역을 떠맡게 되는 것이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렇게 주체로 호명된 뒤, 구체적인 개인이 현실적으로 수행하는 생각이나 행동들에 이데올로기가 무의식적인 표상 체계로서 작동하게 된다. - P260

『지하생활자의 수기』라는 작품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는 세상에서 도피한 채 홀로 살아가는 한 남자의 유아론적인 삶을 기술하면서 우리 삶에 미치는 타자의 효과를 감각적으로 묘사했던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 레비나스는 도스토예프스키를 통해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배웠을 것이며, 이것이 바로 그로 하여금 타자의 철학을 개진하게 만든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타자의 문제를 핵심적인 과제로 도입했기 때문에 레비나스는 베르그손이나 사르트르와는 전혀 다른 사유를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에 대한 그의 이해가 베르그손이나 사르트르와 다르게 된 것도 당연히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도 나의 손아귀에 쥘 수 없는 것은 미래이다. 미래의 외재성은, 미래가 절대적으로 예기치 않게 닥쳐온다는 사실로 인해서 공간적 외재성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미래에 대한 기대, 미래의 기투는, 베르그손에서부터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이론들이 마치 시간의 본질적 특성인 것처럼 일반적으로 인식해 왔지만, 사실 이것은 미래의 현재에 지나지 않을 뿐 진정한 미래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시간과 타자』

미래는 마치 미개척지처럼 인간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는 베르그손과 사르트르의 생각과는 달리, 레비나스는 단호하게 미래는 "어떤 방식으로도 나의 손아귀에 쥘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미래는 외재적인 것, 다시 말해 나의 내면으로 결코 환원할 수 없는 외재성을 가진 것이다. 미래는 창조적 진화가 작동하는 비어 있는 공간, 혹은 한번 미끄러지면 계속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빙판과도 같은 것이 아니었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미래란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거친 땅"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의 ‘거친 땅’은 내가 앞으로 내디딜 발걸음을 방해하는 온갖 타자를 상징하는 것이다. 타자는 항상 나의 기대나 예측을 좌절시키는 방식으로 출현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레비나스에게 있어 기대나 예측에 의해 적중되는 미래란 진정한 미래가 아니었으니, 이것은 단지 미래로 투사된 현재라는 점에서 미래의 현재에 지나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미래는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이며, 우리를 엄습하여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다. 미래, 그것은 타자이다.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이다. 오로지 홀로 있는 주체라는 관점에서 시간을 이야기한다는 것, 순수하게 개인적인 지속에 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시간과 타자』

이제 레비나스는 왜 미래를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는지 보다 분명히 밝히기 시작한다. 그것은 미래와의 관계가 바로 타자와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타자와 마주치고 그와 관계하면, 우리는 자신의 미래 모습이 과거나 현재의 모습과는 전혀 다를 것이라고 직감하게 된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을, 다른 한편으로는 설레는 마음을 갖게 된다. 앞으로 자신의 삶이 이 타자로 인해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레비나스는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레비나스는 홀로 있는 주체라는 사르트르의 관점 혹은 순수한 개인적 지속이라는 베르그손의 이야기가 공허한 이야기로 보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어떤 타자도 만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내일은 오늘의 반복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레비나스에게 타자란 새로운 삶, 새로운 시간을 가능하게 해주는 축복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사실 타자가 나의 삶에 개입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동요시킬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레비나스가 말한 것처럼 이로부터 진정한 미래가 열리게 된다는 것을 사르트르 본인도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르트르에게 있어 나의 자유와 갈등할 수밖에 없는 타자의 존재는 축복이라기보다 오히려 재앙 혹은 저주에 가까운 것이었다. 사르트르가 타자와의 마주침이 낳는 설렘보다는 두려움에 주목하면서 "지옥, 그것은 타자이다"라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지옥이라도 그것은 타자와 마주쳤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사실 모든 타자와의 마주침이 우리를 반드시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비록 두려운 마음이 든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타자의 마주침을 전적으로 거부할 수도 없고 또한 그래서도 안 된다. 이 점이 바로 레비나스로 하여금 베르그손과 사르트르의 시간 논의를 넘어서도록 만든 중요한 통찰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 P307

사실 우리가 특정 에피스테메나 패러다임이란 규칙에 의해 지배될 때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기 힘들다. 오직 새로운 에피스테메나 패러다임으로 개종했을 때에만, 우리는 과거에 자신이 맹목적으로 따랐던 에피스테메나 패러다임이 어떤 성격을 가진 것이었는지 의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따르고 있는 현재의 규칙들은 과연 어떤 것일까? 푸코나 쿤이 우리에게 던져 준 심각한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미래로 갈 수 없는 우리가 자신의 현재를 알기 위해서 되돌아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바로 과거뿐이다. 과거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영위했던 다른 패러다임 혹은 다른 에피스테메에 충분히 익숙해졌을 때, 우리가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는 현재의 패러다임이나 에피스테메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자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외국에 나가 보았을 때만 자신이 지금까지 따르고 있던 무의식적인 삶의 규칙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쿤과 푸코를 통해 역사학은 과거 시대의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단순한 역할만으로는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현재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내적인 규칙을 반성하기 위한 성찰을 자임하면서, 역사학은 비로소 인문학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 P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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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는 이렇게 언급했다.
대개 인간 마음의 신령스러움(Intelligence)은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천하에는 이치 없는 사물도 없다. 그러나 이치에 대해서 아직 다 궁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지식에는 끝까지 다 밝혀 내지 모한 것이 있다. 그러므로 대학은 처음 가르칠 때에 학생으로 하여금 이 세상의 사물을 이미 자기가 아는 이치에 따라서 더욱 캐고 들어가 그 끝에 이를 때까지 추구하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오랫동안 노력하면 드디어 어느날 아침 활연히 툭 트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만물이 정교하든 거칠든, 겉이든 속이든 할 것 없이 두루 미치어 자기 마음의 전체 큰 모습은 밝혀지지 않음이 없게 된다. - P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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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실현이나 자기만족을 위해 사랑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사랑에서 깊은 감정을 충족시키는 일도 줄어 들었습니다. 즐거움이나 행복감 이외에 외로움, 질투, 실망 같은 사랑의 또 다른 감정과는 대면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바로 그런 감정이 나의 변화와 성장을 촉진시킨다는, 사랑의 가장 강력한 역설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저자가 말합니다. 연애 불능과 애착 불능은 자기실현과 완벽을 향한 노력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요. 우리는 나와 더 잘 맞는 상대, 내 삶을 더 의미 있게 채워줄 상대가 어딘가에 존재할 거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사랑에 있어서도 완벽함을 추구하는 이 시대의 강박은 어떻게 내려놓아야 할까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이 사랑이라고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작가 조나단 프란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마음이 그렇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내 이기심이 줄어들었다."​ - P46

진정한 재능이란 지루한 반복을 견디고 지속하는 힘이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에요.
지구인에게는 지구력이 필요합니다. - P130

인생은 결국, 결코 잘하리라는 보장도 없이ㅡ거듭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티다가 몇 가지의 간단한 항목으로 요약되고 정리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지금도 버티고 있는, 그래서 아무 일 없이 흘러가고 있는 우리의 삶은ㅡ실은 그래서 기적이다.
_박민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 P133

"내가 신이라면 청춘을 인생의 맨 마지막에 놓겠다"고 말한 이는 톨스토이입니다.
이 말은, 삶의 가장 빛나는 순간은 청춘이라는 뜻일 테죠. 하지만 돌이켜보면 청춘은 아름답지만 가장 불안정하고 어리석은 시기이기도 합니다. 여기저기 씨앗을 뿌려도 도무지 싹이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슴 답답한 시절이기도 하죠(저는 그 힘든 20대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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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용신을 사용한다는 것은 개선해야 할 방향성을 가진 기운이 연운이나 대운 등 시절의 운으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절이 찾아온 뒤에도 자기가 해야 할 실천은 없다. 다만 시절이 저절로 그렇게 해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것은 수동적인 용법이다. 용신을 능동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그 기운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이 사주의 경우 조후와 억부 모두 금과 수가 용신이므로 금수 용신을 일상에서 어떻게 구현하는가가 관건이다.
금은 원리원칙적이고 구조화에 능하며 논리적이고 절제력이 있으며 마무리에 강하다. 수는 무겁고 자폐적인 단점이 있지만 유연하고 융통성이 있으며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과 배려심을 강점으로 가지고 있다. 금과 수의 기운이 부족하다는 것은 이런 능력들이 부족하다는 것이고, 금과 수가 용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이러한 능력 379 들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면 시절운으로 금과 수가 들어오지 않는다 해도 자신에게 부족한 금수 기운의 측면들을 평소에 극복하는 것으로 용신을 사용하면 된다. 이것이 능동적인 용신 사용법이다.
위 사주의 주인공도 평소에 맺고 끊는 것이 약하고, 우유부단하며, 사람을 깊게 이해하지 못하는 점이 있다. 주인공을 위한 처방 혹은 개운법은 위와 같은 금과 수의 측면들을 실천하는 것이다. 육친과 연결하자면, 금 식상은 명료하고 논리적인 말, 현실적인 도전과 계산된 기획, 기발하고 변칙적인 변화 등이 미덕에 해당하고, 수 재성의 미덕은 유연한 일 처리, 회사 동료에 대한 깊이 있는 배려와 원만한 대인관계 등이다. 그녀의 경우 현재 임자(壬子)대운(현 40세)으로 수 재성이 많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금 용신을 더 주목해야 하겠지만 수 재성의 미덕을 갖추지 못했다면 언제든 그것을 용신의 실천법으로 주시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 P378

소세키는 34살에 유학길에 올랐다. 그런데 그는 32세에 무술(戊戌) 대운이 온다. 무토와 술토는 그 자체로 큰 역마의 기운이 서려 있기 때문에 그가 유학을 갔을 것이라고 해석해도 된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무토는 임수와 충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임수와 정화의 합이 깨진다. 그렇게 되면 지지의 인목과 묘목은 지휘관을 잃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처지가 된다. 특히 인목은 일지의 신금과 충을 한다. 그 도발적 변화의 역량이 역마살이라는 기운과 만나서 런던이라는 생각지도 못했던 외지를 향해 나가게 했다. 그러나 이건 해석일 뿐이다. 그런 사주라 해서 반드시 그런 기회가 생기는 것도 아니 405 고 또 그 기회를 꼭 승낙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만일 이때 우리가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면 어떨까? 유학의 권유가 있었고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는 그때 우리는 자신의 사주를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만약 갈 마음이 없다면 굳이 사주를 들여다보지 않을 것이다. 변화 없는 상황에 머물러 있으려 할 때는 그런 운명론을 잘 보지 않는다. 선택을 앞두고 적극적으로 사주를 본다는 것은 가고 싶은 마음과 두려운 마음이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때는 새로운 선택을 지지하는 쪽으로 사주를 해석하면 된다. 예를 들어, "무술이 들어왔으니 거친 대지를 향해 나아가라는 뜻이군." "통근이 되지 않은 인목이 예기치 못한 지형을 향해 떠날 운명이라는 것을 지시하고 있군." 이런 식의 해석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운명에 스스로 개입할 수 있다. - P404

글쓰기 얘기가 나왔으니 이런 질문을 던져 보자. 글쓰기는 사주에서 어떤 세력으로 봐야 할까? 수업시간에 가끔 받는 질문이다. 그런데 글쓰기를 단일한 요소에 한정시킬 순 없다. 하나의 행위는 여러 세 408 력과 기운들의 인과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쉽게 생각하면 글을 쓴다는 것이 표현에 해당하므로 식상의 기운이라고 볼 수도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글쓰기는 표현의 의지와 실천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조의 사주에서도 천간의 경금과 지지의 신금이 통근을 하고 있어서 식상의 기운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글쓰기의 욕망, 재능과 연결시켜도 괜찮을 듯하다. 하지만 글쓰기 작업은 이 밖의 여러 육친적 역할들이 필요하다. 글쓰기에 담긴 사유의 깊이는 인성과 관련이 있고, 글쓰기의 욕망이 출발하는 곳은 자기애의 자리인 비겁이며, 그것을 표현하고 현장에 펼쳐 놓는 것이 식상, 그리고 글을 마무리하고 책으로 출간하는 일 등은 재성이며, 그 글이 이름 모를 독자들과 만나고 세상에 회자되는 장은 관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글쓰기를 비롯한 여러 행위들은 어느 한 요소에 환원될 수 없는 힘의 네트워크 속에 혼융되어 있다. 다만 식상을 먼저 언급한 이유는 식상이 자기 안의 욕망을 표출하는 첫 현장이기 때문이다. - P407

이런 정서는 오행에서 목화토의 기운에 속한다. 금수의 기운은 냉정하고 차갑다. 수가 유연하고 부드럽긴 하나 이렇게 다정다감한 정서는 아니다. - P410

목화는 따뜻하고 순진하며 다정다감한 기운이지만 속도가 빠르고 직설적이고 화를 참지 못하고 열정적이며 바쁘고 부산하게 움직인다. - P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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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고 가며 머리에서 지장간이 저절로 떠오를 수 있을 정도로 연습해야 사주를 볼 때도 능수능란하게 응용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정리하자면 드러나지 않게 하는 일이 지장간의 흐름이라고 보면 된다. - P153

선현들께서 이처럼 음양오행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우리에게 남겨준 것은 그 운을 알아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신 수행을 하기 위한 것, 곧 마음을 비우고 천리에 따라 살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사주를 오래도록 연구하다 보면 저절 161 로 알게 되는 것 중 하나는 그 부모나 조상의 영향이 마치 유전자처럼 후손으로 계속 이어진다는 것이다. 굳이 "선한 일을 많이 하면 반드시 그 후손이 복을 받고, 악한 일을 많이 하면 반드시 그 후손이 화를 당한다."는 <<주역>>의 말을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마음을 닦으며 천지의 흐름에 따라 바르게 살라는 것이 선현들께서 명리학을 남기신 절대적인 이유다. 운을 미리 알아 하늘의 복을 훔치면 결국 후손들이 그 이상으로 재앙을 당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 P160

궁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자면, 연주를 조상궁으로 보아 조부모와 조상으로 해석하고, 월주를 부모·형제궁으로 보아 부모와 형제로 해석하며, 일지를 배우자궁으로 보아 배우자로 해석하고, 시주를 자식궁으로 보아 자식으로 해석한다. 사주에서 간지의 위치로 대응시키는 궁은 육친보다 다소 약하게 작용하는 것으로 해석하지만 태어난 연월일시인 사주 원국의 해석에서는 중요하다.
이를 테면 무토일간인 필자는 일지와 시지가 인사형이어서 간호사 출신의 배우자를 만나 살고 있다.(??) 사주 당사자가 의료나 법률과 관계된 일로 직접 사용할 수 있고, 이처럼 배우자궁에 있으면 그 궁에 해당하는 배우자가 사용할 수도 있다.
12강에서 자세히 보겠지만 후천운인 대운과 세운에 따라 인성印星에 변화가 생기면, 그것이 상징하는 어머니나 문서 등에 변화가 생긴다. 또한 그 인성이 자리 잡고 있는 궁에도 적용할 수 있는데, 곧 인성 163 이 배우자궁에 자리 잡고 있다면 배우자의 신상에 변화가 생길 수도 있다. 혹 인성이 부모궁에 자리 잡고 있다면 궁과 육친이 모두 어머니를 상징하니, 어머니께 변화가 생길 확률이 아주 높아진다. 사주의 감정은 육친과 궁을 위주로 해석하는 것인데, 궁과 육친이 동일하게 하나를 나타내면 그것이 상징하는 일이 발생할 확률은 매우 높아진다는 것이다. 육친과 궁이 따로 나누어져 있을 경우 필자는 육친을 위주로 보고 궁을 부수적으로 보며 해석한다. - P162

167 3. 연월일시의 의미
앞에서 말했듯이 연주·월주·일주·시주의 각 자리를 조상궁·부모와 형제궁·본인과 배우자궁·자식궁이라고 하는 이유는 연주를 기반으로 월주가 있고, 월주를 기반으로 일주가 있으며, 일주를 기반으로 시주가 있기 때문이다.
또 연주와 월주를 합해 선천궁, 일주와 시주를 합해 후천궁이라고도 하니, 연주와 월주는 나를 낳아 주시는 조상과 부모에 해당하고, 일주와 시주는 내가 태어난 이후의 삶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허무맹랑한 것 같지만 이치로 보면 말이 되는 소리이니 "수많은 조상님들이 부모님을 낳으시고 부모님이 나를 낳으시니, 내가 일지의 짝을 만나 시주의 자식을 낳으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더라!"라고 연주·월주·일주·시주의 상징에 대해 외우길 바란다.
사주는 궁과 육친을 주로 본다고 했다. 일간을 기준으로 다른 간지와 오행의 상생과 상극을 따져 비겁·식상·관성·재성·인성으로 나눈 것이 육친이고, 궁은 바로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연·월·일·시의 의미를 따져 조상궁·부모와 형제궁·나와 배우자궁·자식궁으로 보는 것이다.
배우자궁을 때리는 지지가 오면 배우자가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병 168 원에 입원하는 등으로 사고가 생기고, 자식궁을 흔드는 간지가 오면 자식이 공연히 반항하며 말썽을 부리는 등의 일이 생기곤 한다. 마찬가지로 인성을 극하거나 충하는 간지가 오면 갑자기 일이 생겨 집을 팔 일이 생기거나 어머니가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관을 돕는 기운이 오면 남편이 진급하거나 사업이 잘 되는 등으로 좋은 일이 생기곤 한다. 물론 전자의 예시가 궁이고 후자의 예시가 육친이다.

















말년(61~80세)

장년(41~60세)

청장년(21~40세)

초년(0~20세)

자식

본인과 배우자

부모와 형제

조상

사지

몸통

어깨

머리

하급자

본인

상급자

사장

연주·월주·일주·시주를 위의 표에서처럼 확장하여 보기도 하니, 표를 기준으로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할수록 얼마든지 더 넓게 응용할 수 있다. 그리고 연·월·일·시를 20년씩 계산한 것은 현재의 평균 수명인 80세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예전에는 15년씩 하여 전체를 간지가 한 바퀴 다 돌고 돌아오는 60년으로 보았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 - P167

(…) 사주 통변에 적용해 보면 알겠지만 아주 잘 맞는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공망은 비어 있다는 글자의 뜻 그대로 있어도 없는 것과 같아서 나에게 그 영향과 작용이 별로 없게 된다. 사실 말로는 실감이 별로 나지 않을 것인데, 자식이나 부모가 공망이라면,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도 없는 것과 같으니 서운하고 속상할 일이 무척 많이 생긴다는 것이다.
(…)
172쪽의 공망표와 179쪽의 공망 뽑는 공식을 통해 무엇이 공망인지 알아 두자. 원국에 공망이 있으면 오행에서는 그 작용이 그대로 살아 있지만 짝을 짓지 못한 앙갚음으로 다른 간지에 냉담하기 때문에(??) 공망에 해당하는 간지의 육친 작용이 약화되어 없는 것처럼 된다. 다소 신비한 말로 들릴 수 있겠지만 천지의 기운도 사람들과 동일하게 감정이 있다고 보면 된다. 지지가 공망이면 그 위의 천간도 함께 공망이니, 연민과 원망을 가진 지지와 같이 있어 그 천간에까지 연민과 원망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국에서 공망 맞은 글자는 충을 당하면 도리어 그 인자가 활성화되니, 이미 나와 관계없던 것이 도리어 제대로 되는 것으로 본다.
171 일주를 기준으로 공망을 보는 것이 기본이고, 그 나머지 주를 기준으로 공망을 봐도 된다. 이를 테면 일주를 기준으로 연주가 공망이면 조상과 인연이 박해 제사를 지내지 않는 일이 잘 발생하고, 월주가 공망이면 부모와의 인연이 좋지 못하고, 시주가 공망이면 자식과의 인연이 나쁘다.
또한 어떤 육친이 공망이면 그 육친과 인연이 박하다고 보면 된다. 궁과 육친이 겹칠 경우에는 그 확률이 더 높다고 보면 된다. 예를 들어 월주에 인성이 있고 월주가 공망이면 부모 특히 어머니와의 인연이 박하다고 여기면 된다. 겹치지 않을 경우에는 상담을 하면서 어느 쪽으로 공망이 발생할지 참작하여 설명해 주면 된다.
대운에서 공망을 만나면 오행으로는 영향이 있으나 육친으로는 영향이 없다. (…)
사주의 원국 자체에 간지가 있음에도 공망 때문에 육친의 작용이 약화된 것이 아쉬워서 그것을 채우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지만 결국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 바로 공망이니, 여기에 집착하여 인생을 아주 길게 허비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테면 관 공망인 경우, 자신도 모 172 르게 그것에 대한 허전함을 만회하려고 고시와 같은 큰 벼슬에 집착하여 인생을 걸고 오랫동안 노력하지만 끝내 이루지 못하고 젊음과 시간만 낭비하게 되는 식이다.
사주에 원래 어떤 형태로 있든지 그것은 그 사람이 타고난 본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같은 형태의 삶을 살면 본성적인 능력을 발휘 173 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니 사주에 공망이 있으면 공망 형태의 삶을 살면 된다. 식상 공망이면 속이 빈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니 곧 속이 빈 과자 뻥튀기나 솜사탕 같은 것을 만들어 팔면 된다. 식상 공망에 형이나 충과 같은 것이 더해졌으면, 형과 충이 가공을 더하는 것에 해당하니, 충격을 주어 모양을 다듬는 뭔가를 만들면 된다. 이를 테면 속이 빈 과자에 충격을 주어 아름다운 색깔을 입히거나 다듬어서 팔면 본성을 그대로 발휘하는 것이 되어 남보다 뛰어나게 된다. 곧 형과 공망을 있는 그대로 사용해서 반드시 기술까지 넣어야 성공한다는 것이다.
공망이 관이나 재 및 인성 등에 어떤 형태로 오든지 상관이 없다. 곧 어떤 육친이 공망이든지 생긴 모양 그대로 삶의 형태를 만들면, 자신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니, 천부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주에 형살이 있으면 형살과 관계된 삶을, 충이 있으면 충이 있는 모양의 삶을, 합과 충이 함께 있으면 그런 모양의 삶을 찾아 살면 된다. 타고난 본성을 제대로 발휘하는 것이어서 남들과의 경쟁에서 강할 수밖에 없다. 오랫동안 사주를 보다 보면 발견하게 되는 것이지만, 성공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사주의 특성을 제대로 발휘하여 좋은 영향 쪽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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