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면적으로 사랑하는 남녀가 자유롭게 사랑과 결혼 생활을 영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종족을 보존하려는 맹목적인 삶의 의지의 한 책략, 혹은 한 가지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하는 남녀는 단지 맹목적 의지의 간지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쇼펜하우어의 발상이 아직도 생물학에서는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기적 유전자』에서 도킨스는 인간이 한 계기적 매체에 지나지 않을 뿐 진정한 주인공은 바로 유전자라고 주장했던 적이 있다. 이에 따르면 모든 개별적 생명체들은 유전자의 의도를 실현하고 있는 단계적 매체에 불과해진다. 따라서 오늘날 현대생물학계의 도킨스 역시 쇼펜하우어의 논리, 더 나아가 헤겔의 논리를 생물학 영역에서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 P228

쇼펜하우어나 도킨스 같은 사람들은 인간의 에로티즘이 종족을 보존하기 위한 맹목적 의지나 유전자의 책략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점에서 보면 인간은 다른 생물들과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을 것이다. 다른 모든 생물종들도 종족 보존의 본능에 따라 짝짓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타유만은 인간의 에로티즘이 동물의 성행위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 인간의 에로티즘은 사회적 금기, 그리고 이 금기에 대한 위반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갖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금지된 것에 대한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먹지 말아라", "보지 말아라"라고 금지된 것에 대한 선망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예외 없이 관찰되는 현상일 것이다. 이런 금지된 것에 대한 인간의 선망이 바로 성적인 대상과 관련될 때, 바타유가 말한 에로티즘이 비로소 강렬하게 발생한다. 바타유가 에로티즘에는 "유혹과 공포, 긍정과 부정의 엇갈림"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 P231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인 개인을 주체로 호명한다"라는 알튀세르의 주장이다. 이것은 흔히 ‘호명 테제’라고 불리는 주장이다. 어떤 인간이 태어났을 때, 그는 벌거벗은 한 개인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는 이미 그를 부를 준비를 모두 다 갖추고 있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김이라는 성을 쓰는 가정의 한 성원, 남자, 한국인, 노동자 계층이라는 사회구조 속에 던져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회구조에 익숙해 있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은 이제 하나둘씩 순차적으로 정해진 내용들을 가지고 그를 부르기 시작한다. "얘야!"라고 부르는 순간,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부르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대답하는 순간, 구체적인 개인은 점차 특정한 주체로 구성되기 시작한다. 결국 호명이란 행위를 통해서 주체는 스스로 사회구조의 어떤 한 가지 배역을 떠맡게 되는 것이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렇게 주체로 호명된 뒤, 구체적인 개인이 현실적으로 수행하는 생각이나 행동들에 이데올로기가 무의식적인 표상 체계로서 작동하게 된다. - P260

『지하생활자의 수기』라는 작품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는 세상에서 도피한 채 홀로 살아가는 한 남자의 유아론적인 삶을 기술하면서 우리 삶에 미치는 타자의 효과를 감각적으로 묘사했던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 레비나스는 도스토예프스키를 통해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배웠을 것이며, 이것이 바로 그로 하여금 타자의 철학을 개진하게 만든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타자의 문제를 핵심적인 과제로 도입했기 때문에 레비나스는 베르그손이나 사르트르와는 전혀 다른 사유를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에 대한 그의 이해가 베르그손이나 사르트르와 다르게 된 것도 당연히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도 나의 손아귀에 쥘 수 없는 것은 미래이다. 미래의 외재성은, 미래가 절대적으로 예기치 않게 닥쳐온다는 사실로 인해서 공간적 외재성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미래에 대한 기대, 미래의 기투는, 베르그손에서부터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이론들이 마치 시간의 본질적 특성인 것처럼 일반적으로 인식해 왔지만, 사실 이것은 미래의 현재에 지나지 않을 뿐 진정한 미래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시간과 타자』

미래는 마치 미개척지처럼 인간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는 베르그손과 사르트르의 생각과는 달리, 레비나스는 단호하게 미래는 "어떤 방식으로도 나의 손아귀에 쥘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미래는 외재적인 것, 다시 말해 나의 내면으로 결코 환원할 수 없는 외재성을 가진 것이다. 미래는 창조적 진화가 작동하는 비어 있는 공간, 혹은 한번 미끄러지면 계속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빙판과도 같은 것이 아니었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미래란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거친 땅"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의 ‘거친 땅’은 내가 앞으로 내디딜 발걸음을 방해하는 온갖 타자를 상징하는 것이다. 타자는 항상 나의 기대나 예측을 좌절시키는 방식으로 출현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레비나스에게 있어 기대나 예측에 의해 적중되는 미래란 진정한 미래가 아니었으니, 이것은 단지 미래로 투사된 현재라는 점에서 미래의 현재에 지나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미래는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이며, 우리를 엄습하여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다. 미래, 그것은 타자이다.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이다. 오로지 홀로 있는 주체라는 관점에서 시간을 이야기한다는 것, 순수하게 개인적인 지속에 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시간과 타자』

이제 레비나스는 왜 미래를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는지 보다 분명히 밝히기 시작한다. 그것은 미래와의 관계가 바로 타자와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타자와 마주치고 그와 관계하면, 우리는 자신의 미래 모습이 과거나 현재의 모습과는 전혀 다를 것이라고 직감하게 된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을, 다른 한편으로는 설레는 마음을 갖게 된다. 앞으로 자신의 삶이 이 타자로 인해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레비나스는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레비나스는 홀로 있는 주체라는 사르트르의 관점 혹은 순수한 개인적 지속이라는 베르그손의 이야기가 공허한 이야기로 보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어떤 타자도 만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내일은 오늘의 반복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레비나스에게 타자란 새로운 삶, 새로운 시간을 가능하게 해주는 축복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사실 타자가 나의 삶에 개입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동요시킬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레비나스가 말한 것처럼 이로부터 진정한 미래가 열리게 된다는 것을 사르트르 본인도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르트르에게 있어 나의 자유와 갈등할 수밖에 없는 타자의 존재는 축복이라기보다 오히려 재앙 혹은 저주에 가까운 것이었다. 사르트르가 타자와의 마주침이 낳는 설렘보다는 두려움에 주목하면서 "지옥, 그것은 타자이다"라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지옥이라도 그것은 타자와 마주쳤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사실 모든 타자와의 마주침이 우리를 반드시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비록 두려운 마음이 든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타자의 마주침을 전적으로 거부할 수도 없고 또한 그래서도 안 된다. 이 점이 바로 레비나스로 하여금 베르그손과 사르트르의 시간 논의를 넘어서도록 만든 중요한 통찰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 P307

사실 우리가 특정 에피스테메나 패러다임이란 규칙에 의해 지배될 때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기 힘들다. 오직 새로운 에피스테메나 패러다임으로 개종했을 때에만, 우리는 과거에 자신이 맹목적으로 따랐던 에피스테메나 패러다임이 어떤 성격을 가진 것이었는지 의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따르고 있는 현재의 규칙들은 과연 어떤 것일까? 푸코나 쿤이 우리에게 던져 준 심각한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미래로 갈 수 없는 우리가 자신의 현재를 알기 위해서 되돌아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바로 과거뿐이다. 과거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영위했던 다른 패러다임 혹은 다른 에피스테메에 충분히 익숙해졌을 때, 우리가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는 현재의 패러다임이나 에피스테메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자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외국에 나가 보았을 때만 자신이 지금까지 따르고 있던 무의식적인 삶의 규칙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쿤과 푸코를 통해 역사학은 과거 시대의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단순한 역할만으로는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현재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내적인 규칙을 반성하기 위한 성찰을 자임하면서, 역사학은 비로소 인문학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 P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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