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출, 향유, 무계산적인 구매(‘사는 것은 지금, 지불은 나중에‘)라고 하는 주제가 절약, 노동, 유산이라는 기존의 ‘청교도적‘인 주제들을 대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체는 외관상으로만 인간의 혁명일 뿐이다.……소비자의 욕구와 그 충족은, 오늘날에는 다른 생산력(노동력 등)과 마찬가지로 강요되고 합리화된 생산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소비의 사회』

철학적으로 볼 때 20세기 후반부터 공동체보다는 개인을, 이성보다는 감성을, 정신보다는 몸을, 동일성보다는 차이를, 그리고 정착민보다는 유목민을 강조하는 지적인 경향이 보다 강하게 대두하였다. 흔히 이러한 일련의 경향들을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해체주의라고 부른다. 이런 새로운 사유 경향은 기존의 낡고 억압적인 사유를 극복하면서 개인의 자유와 해방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이 같은 사상적 흐름은 인문학적으로 볼 때 분명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데리다나 들뢰즈의 철학에 열광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 대목에서 보드리야르의 차가운 진단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산업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 공동체적 소비보다 파편화된 개인적인 소비가 더 많은 잉여가치를 남기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심지어 산업자본은 다양한 광고 전략을 통해 하나의 개인마저도 다양한 소비 주체들로 분열시키기까지 한다. 엄마로서 소비해야 할 때가 있고, 직장 여성으로서 소비해야 할 때가 있으며, 동창회 일원으로서 친구들 앞에 과시하기 위해 소비해야 할 때도 있다. 이처럼 어떤 개인이 상품들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서로 상이한 취향과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산업자본은 통일된 한 개인의 경우에서보다 더 많은 잉여가치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보드리야르는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산업자본이 개인적 욕망과 그 충족의 자유를 선전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서가 결코 아니라고, 오직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고 말이다. 매우 두려운 일이 아닌가? 모든 억압적인 중심을 공격해서 삶을 해방시키려고 했던 인간의 사상적 노력마저도, 자본주의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이토록 적절히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 P374

갓난아이에게 최초의 타자는 곧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최초의 타자가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일 필요는 전혀 없다. 중요한 것은 최초의 타자가 자기 자신을 지속적으로 돌보아 주느냐의 여부이기 때문이다. 타자로부터 지속적인 사랑을 받기 위해서 갓난아이는 자신을 돌보는 타자가 자신에게서 욕망하는 것을 행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자신이 김치 먹는 것을 좋아한다면, 갓난아이는 김치에 대한 자신의 불쾌감을 무릅쓰고 그것을 먹으려고 한다. 비록 괴롭긴 하지만 김치를 먹었을 때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스럽게 생각할 것이라는 점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갓난아이가 최초로 만난 어머니가 아주 느끼한 파스타를 좋아했던 경우라도 마찬가지의 결과가 나올 것이다. 이 아이는 어머니로부터 지속적인 사랑을 얻기 위해서 파스타를 기꺼이 먹을 테니까 말이다.

어른이 되었을 때, 인간은 자신이 타자가 욕망했던 것을 욕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쉽게 망각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음식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고 믿게 된다. 하지만 김치찌개나 파스타를 먹고 싶어하는 자신의 욕망은 사실 어머니의 욕망을 반복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타인의 욕망에 입각해서 욕망하는 것은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불행은 언제든지 찾아오는 법이니까. 본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그러니까 어머니의 욕망을 수용하느라고 억압되었던 자신의 욕망이 분출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와 자식 간의 대립 혹은 갈등은 이로써 보면 매우 자연스런 현상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어머니의 욕망은 어머니의 것이지 우리의 것은 아니다. 언젠가 우리는 진정한 주체로서 다시 태어나는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게 될 것이다. 타자의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회복할 수 있다면 결국 진정한 주체가 되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라캉의 말대로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이 소망하는 것인지 혹은 소망하지 않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주체는 다시 태어날 수 있어야만" 한다. - P379

하나의 달팽이 개체를 넘어서는 거시적 생명 역사의 흐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촉각, 나아가 이 촉각을 가진 달팽이라는 생명체 자체가 이미 생명의 문제 해결의 한 가지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달팽이는 지금 현존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엄밀하게 보면 과거의 존재 혹은 과거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문제 해결의 결과로 주어진 한 생명체에게 있어 그 해결된 문제가 이미 회복 불가능한 흔적으로만 남게 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시력을 가능하게 하는 기관으로서의 눈은 분명히 어떤 것에 대한 문제 해결, 즉 해법으로서 등장하게 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전통적인 설명에 따르면 흔히 눈이란 기관은 보기 위한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탄생했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 설명이 아닐까? 도대체 무엇을 보기 위해 이것이 만들어졌으며, 또 봄으로써 어떤 문제가 해결되었는지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가령 본다는 것이 어떤 문제의 해결이라면 도대체 보기 이전에 그 생명체가 조우했던 문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왜 생명은 보는 기관인 눈을 만들어 냈는가? 이곳이 바로 유전자의 논리로 대표되는 현대의 자연과학적 탐구가 근본적 한계에 부딪혀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는 지점이며, 생명에 대한 철학적 숙고가 다시 필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 P401

결론적으로 도킨스는 유전자와 생명체 사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유전자는 자기 복제자이고 우리는 그들의 생존 기계인 것이다." 그의 생각이 타당하다면, 인간의 모든 사유와 행동의 진정한 주인은 우리 자신이라기보다 영원히 살려고 하는 이기적인 책략가인 유전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지점은 그동안 인간을 주체로 정립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한 수많은 철학적 노력이 일순간 와해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우리 삶의 진정한 목적은 자신의 삶의 향유가 아니라 자신을 만든 유전자를 안전하게 보존해서 가장 건강한 상태로 후세에 물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누군가 인간은 스스로 욕망을 억제할 수 있고 심지어는 후손을 낳지 않으려고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반레로 들어 도킨스를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후손을 낳지 않는 것이 실패한 생존 기계라는 증거가 될 뿐 그것으로 인해 유전자가 끊어진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진화와 관련된 도킨스의 다음 이야기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겠다.

어떤 유전자는 100만 년을 살 수가 있으나 많은 새로운 유전자는 최초의 세대조차 다 살지 못한다. 소수의 유전자가 성공을 거두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운이 좋아서이지만, 대개는 그 유전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이며, 이는 곧 그들의 유전자가 생존 기계를 만드는 데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한다. …… 예컨대 ‘우세한’ 유전자는 자기가 붙어 살고 있는 몸에 긴 다리를 주어 그 몸이 포식자로부터 도망가기 쉽게 하므로 자기의 생존을 확실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개별적인 예이지 보편적인 예는 아니다. 즉 긴 다리는 반드시 이점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두더지에게는 긴 다리가 핸디캡일 수밖에 없다. 『이기적 유전자』

도킨스에 따르면 유전자는 우리를 만드는 원초적인 정보이자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유전자가 만든 모든 생존 기계들이 적응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환경에 적응하는 데 실패한다면, 유전자들은 자신이 만든 생존 기계와 함께 숨을 거두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에 대한 도킨스의 이해 방식이다. 도킨스는 소수의 유전자들만이 100만 년에 걸쳐서도 생존하는 데 성공했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생존에 불가피한 생명체를 환경에 적응하도록 잘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말해 생존 기계를 잘 만든 유전자들만이 영속적으로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살하거나 굶거나 성관계를 회피하는 개체들은 유전자가 잘 만들지 못한 생존 기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책임은 전적으로 유전자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도킨스의 논리는 일견 그럴듯해 보이기도 하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다. 도킨스는 잘 만든 생존 기계의 사례로 "긴 다리"를 가진 생명체를 이야기한다. 그는 "‘우세한’ 유전자는 자기가 붙어 살고 있는 몸에 긴 다리를 주어 그 몸이 포식자로부터 도망하기 쉽게 하므로 자기의 생존을 확실하게 할 것"이라고 해석한다. 도킨스의 논리는 사실 거대한 동어반복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생명체가 환경에 적응하여 존재한다면, 그는 이것이 모두 유전자가 생존 기계를 만드는 데 탁월했다는 증거라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유전자에게 지나치게 전지전능한 힘을 부여하는 것이 아닐까? 도킨스의 생각이 옳다면, 유전자는 환경의 변화마저도 예측하면서 가장 합리적인 생존 기계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과연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르원틴은 『이데올로기로서의 생물학: DNA 독트린』에서 진화의 과정에서 생명체에게는 적응과 무관해 보이는 속성들이 자주 생긴다는 사실을 강조했던 적이 있다. 르원틴의 말대로 우발적인 환경 변화가 일어난다면, 적응에 무관해 보이는 속성들이 오히려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반대로 환경이 변화되기 이전에 적응에 유리했던 속성들은 새로운 적응에 불리한 요소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유전자는 앞날을 내다보고 미리 합리적 계산에 따라 생존 기계를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니다. 유전자의 새로운 교차와 배열 과정에서 고려하지 않았던 요소들이 생명체의 차원에서 부각될 수 있다. 이런 우발적 요소들에 의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성공한 유전자는 운이 좋아 생존할 수 있게 된 것일 뿐이다. 결국 ‘우세한’ 유전자가 미리 존재하여 적응에 유리한 새로운 생존 기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운 좋게 적응에 성공했던 생명체의 유전자만이 생존할 수 있게 되는 것인데, 이에 대해 우리는 사후적으로 ‘우세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을 뿐이다. - P406

그렇다면 이제 마투라나가 진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차례이다. 도킨스는 다윈의 자연선택 개념을 받아들여서 진화를 이해하였다. 자연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생명체를 만든다면, 유전자는 그만큼 잘 보존될 수 있다는 것이 도킨스의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자기생산’을 강조하는 마투라나에게 있어 자연선택 개념은 생명체의 능동성과 부합되지 않는 발상으로 보였을 뿐이다. 그가 진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자연 표류’라는 개념을 제안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하나의 거대한 산꼭대기 가운데에 물을 부으면, 그 물은 다양한 방향으로 표류하면서 흘러내려 가게 된다. 어느 경우는 물이 더 흐르지 못해서 물길이 차단될 수도 있고, 다른 경우는 나름대로 길을 찾아서 지금까지 물길이 계속 이어져 올 수도 있다. 전자가 지금은 모습을 감춘 어느 생명종이라면, 후자는 우리가 지금도 확인하고 있는 식물들이나 동물들의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자기생산을 하는 생명은 자연 표류를 하면서 다양한 생명종들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투라나는 진화를 다음과 같이 ‘방랑하는 예술가’에 비유하게 되었다.

진화란 오히려 방랑하는 한 예술가와 비슷하다. 그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여기저기에서 실 한 가닥, 깡통 한 개, 나무 한 토막을 주워 그것들의 구조와 주위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그것들을 합친다. 그가 그렇게 합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저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가 떠돌아다니면서 서로 어울리게 연결해 놓은 부분들이나 형태들로부터 온갖 복잡한 형태들이 생겨난다. 여기에는 어떤 계획도 없으니, 그저 자연스럽게 표류하는 가운데 생겨날 뿐이다. 『앎의 나무』

유전자들이 자신을 보존하기 위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생존 기계를 만든다는 이미지는 마투라나에게서는 찾아보기 매우 힘들다. 세상에 떠도는 예술가들처럼 생명은 자신의 경로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것들과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형태로 자신을 만들어 나간다. 흥미로운 것은 마투라나의 진화 이미지가 알튀세르의 유고에 등장하는 짧은 글「유물론 철학자의 초상」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알튀세르가 다음과 같이 묘사한 진정한 유물론자는 마투라나의 생명체와 너무도 닮아 있다.

이 사람의 나이는 문제가 아니다. 그는 아주 늙었을 수도 있고, 아주 젊을 수도 있다. 핵심적인 것은 그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 그리고 어디론가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언제나 그는 미국 서부영화에서 그런 것처럼 달리는 기차를 탄다. 자기가 어디서 와서(기원), 어디로 가는지(목적) 전혀 모르면서. 그는 도중에 아주 조그만 어느 역 부근 오지에 내린다. 「유물론 철학자의 초상」

알튀세르는 진정한 유물론자에게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데 이르렀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나이란 사회적인 분류법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직접 그 사람을 보게 된다면, 누군가는 그가 자신보다 늙었다거나 혹은 젊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유물론자는 이런 평가를 귀담아듣지 않는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는 자신보다 늙은 사람을 맹목적으로 존경하지도 않고, 혹은 자신보다 젊은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도 않는다. 그는 누구를 만나든 자신과 마찬가지로 단독적인 삶을 영위하는 주체로서 대우할 뿐이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자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전혀 모르는" 진정한 유물론자는 "도중에 아주 조그만 어느 역 부근 오지에 내리는" 사람이다. 그렇다. 유물론자는 자신의 출발지나 도착지를 의식하지 않는 진정한 여행가와 같은 사람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여행 도중에 마주치는 우발적인 사건,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기쁨 혹은 슬픔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반면 출발지와 도착지를 의식하는 여행가는 여행을 즐길 수 없다. 출발지와 도착지에 연연하는 여행가는 과거나 미래에 사로잡혀 현재를 긍정할 수 없는 자와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는 알튀세르가 들뢰즈와 공명하는 멋진 장면을 목격하고 있다. 『스피노자: 실천철학』에서 들뢰즈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중간으로 미끄러져서 들어간다. 우리는 리듬들을 취하거나 아니면 리듬들을 부여하기도 한다"라고 말이다. 여행 도중에 우발적으로 어느 작은 오지에 내려선 유물론자는 "중간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는 자신만의 리듬을 갖고 있고, 이 작은 오지에 살고 있는 미지의 사람들도 그들만의 리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의 리듬은 이곳 사람들의 리듬과 상호작용할 것이고, 마침내 두 가지 리듬은 하나의 새로운 리듬으로 결합하게 될 것이다. 알튀세르의 유물론자는 점점 더 들뢰즈의 유목민에 가까워진다. 『천 개의 고원』에서는 "유목민들은 단지 생성과 상호작용 속에서만 존재한다"라고 설명되고 있다. 말년의 알튀세르는 우발성의 유물론, 다시 말해 우발적인 마주침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새로운 생성을 꿈꿨고, 들뢰즈 역시 새로운 연결을 통한 생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기억한다면, 마투라나를 통해서도 마주침과 생성의 철학에 대한 중요한 생물학적 기초 하나를 더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 P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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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 원리는 이 책을 이해하고 암기하는 순간 바로 익힐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사주를 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니, 그것은 사주의 여러 가지 원리가 머릿속에서 다양하게 한꺼번에 종합되면서 응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론 다른 학문을 하는 분들도 그렇겠지만 특히 명리학을 하는 사람들은 수도승처럼 생활을 깨끗하고 맑게 해야 한다.
명리학은 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한 운명을 해석하는 일이다. 때문에 그 책임이 막중하여 지금까지도 인격이 갖추어진 사람이 아니면 전해 주지 않아야 하는 비인부전非人不傳의 학문으로 여겨진다. 남의 인생을 읽고는 그것을 빌미로 금품을 갈취하거나 속이는 일 등의 나쁜 일에 명리를 악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189

사주는 사람의 선천적인 에너지장을 나타내니 운명은 거의 대부분 그대로 흘러간다고 보면 된다. - P198

화기가 많고 강하니 성격 역시 불처럼 급하다. - P199

공망은 그 작용이 반감되기 때문에 - P200

이쯤하여 혹시 사주에 의해 그 사람의 인생이 이미 결정되었다고 보는 독자가 있다면 꼭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음양오행의 방향은 분명히 정해져 있지만 세세하게 사주 인자를 다르게 사용함으로써 전혀 다른 길을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굳센 의지를 가지고 영혼을 순화시키려고 노력하지 않고 오행의 기운에 그대로 휩쓸려 쉽게 살게 되니, 술사는 가능성이 많은 방향으로 사주를 풀이하여 단지 그 사람의 삶을 맞추는 것일 뿐이다. 앞의 사주도 열기를 해소하기 위해 명예에 뜻을 두고 열심히 노력하며 살 수도 있고, 잘못하여 관을 쾌락의 도구로 나쁘게 사용할 수도 있으니, 그 운명이 어떻게 결정되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훌륭한 인생의 목표를 정해 놓고 인내하며 살면, 사주 안의 기질에 201 끌려가지 않고 다른 길로 가게 되어 일반적인 사주 풀이로는 그 인생을 추측할 수 없다. 그러니 운명이 꼭 정해졌다고만 볼 수는 없는 셈이다. 위의 사주는 관과 인이 뚜렷하고 너무 뜨거운 사주라 열기로 가득한 식신 미토의 사용을 꺼리니, 자신의 화기를 식혀 주는 명예를 위해 열심히 공부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희박하지만 혹시 부모나 조부모 대에서 나쁜 생활을 했다면, 그 기운이 후손으로 이어져 잘못된 삶을 살 수도 있다. 관은 명예도 되지만 여자에게 남자도 되기 때문이다. 자식이나 손자가 전혀 모르게 나쁜 생활을 해도 그 기운이 그대로 흘러가니 이를 명심해야 한다. 정말 인과응보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육친에 능통해지면 남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만 봐도 그 사람의 대략을 파악할 수 있다. 말이 거의 없다면 금과 수로 인성이 발달해 점잖은 사람일 확률이 높고, 조용하고 차분하게 말을 한다면 금과 수로 식상관이 발달한 사람으로 유흥을 즐길 수 있다. 빠르고 큰 소리로 말을 유창하게 한다면 목과 화로 식상관이 발달한 자로 남들을 잘 선동할 가능성이 높다. 여자가 조용하면서 공부를 많이 했다면 인성이 발달한 여자인데, 인성이 식상관 곧 자식을 극하기 때문에 그 자손이 드물고 또 잘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부록에도 육친표가 있으니 참고하여 능숙해질 때까지 익히고 또 익히길 바란다.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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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적‘이란 말은 행하려는 일이나 도달하려는 목적에 대한 사람의 강렬한 의향을 가리킨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강렬한 의향을 ‘집착‘에 속하는 것으로 여기며, 모든 번뇌의 근원으로 생각한다. 정호는 불교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일이란 없을 수 없겠지만 마음으로 헤아리면 어긋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이는 ‘주경‘의 시작 단계에서는 반드시 주의하고 힘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볼 때 주의하지 말 것을 강조하거나 ‘주정‘을 강조하는 일은 모두 불교 수양 방법의 특징이다. 그는 "경하면 저절로 허정해지겠지만, 허정을 경으로 부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주경‘하면 자연스럽게 마음의 평정에 이르며, 혼란스럽지 않게 된다. 하지만 ‘정‘ 자체가 ‘경‘은 아니며, 더욱이 ‘경‘의 유일한 내용일 수도 없다. - P167

격물의 목적은 천하의 이치를 장악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결코 만물을 하나하나 전부 궁구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정이의 사상에 따르면, 격물의 과정이 일정한 단계까지 축적되면 자연히 어떤 비약이 생겨나고, 보편적인 원리를 인식하게 된다. 천하의 이치를 구한다는 것이 모든 구체적인 이치를 반드시 궁구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천지만물의 가장 근본적인 법칙을 장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격물의 과정이란 개별 사물의 이치로부터 보편적인 천리를 인식하는 데까지 상승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정이는 이치에 대한 인식이 개별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상승해 갈 수 있는 까닭을 이치가 통일적인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수많은 길을 통해 도읍에 갈 수 있지만 한 길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마침내 통할 수 있는 까닭은 만물이 모두 하나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 P175

정이는 평생토록 자신에 대한 규율과 남을 대하는 태도를 매우 엄격히 하였다. 그는 한평생 "행동거지는 항상 예에 들어맞았고", "나아가고 물러남은 반드시 의례에 합당했으며", "자신을 수양하고 법도를 실천할 때 모두 마땅한 기준에 따라으니, 오직 그만이 유학자의 본보기를 드러내었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어떤 사람은 그에게 "선생께서는 사오십 년 동안이나 예에 맞게 근신하며 사셨으니, 분명 대단히 힘들고 고통스러웠겠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에 정이는 "나는 매일 편안하게 살아왔는데, 어째서 힘들고 고통스러웠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매일 위험하게 살아가니, 그것이 바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다"라고 답변했다. 이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도덕 규범을 자기 자신에게 엄격히 요구하고 자신을 단속해 가면서 그는 진정으로 자기의 이상과 사상을 실천하였다. - P176

4. 천리와 인욕은 본체가 같고, 작용이 다르다
호굉의 생각에 따르면, ‘도‘는 우주의 보편 법칙이다. 폭넓은 관점에서 도를 말하자면 ‘천지에 가득 차 있는‘ 자연계의 보편 규율이며, 좁은 관점에서 도를 말하자면, "식욕이나 색욕과 같은 일상 생활에도 존재하는" 것으로서 인류 생명 활동의 규범이자 준칙이다. 호굉은 "사람들이 부부간의 일을 추하게 여기는 이유는 음욕을 일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인은 그것을 편안하게 여기니, 이는 인류 보존을 위한 결합으로 의미를 새기기 때문이다. 교접하는 데에도 예절이 있고 도가 있음을 안다"고 하였다. 그가 볼 때, 부부 사이의 성관계는 추한 일이 아니다. 합리적인 성관계를 ‘음욕‘으로 간주하는 것은 용속한 사람들의 태도이다.
그는 양성 관계에도 각자 마땅히 준수해야 하는 준칙과 규범이 있다는 생각을 견지하였다. 양성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 입고 먹고 거처하며 행위하는 모든 활동들 가운데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요컨대 사람의 생명 활동은 부정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은 본체적인 의미는 물론이고 도덕적인 의미도 함께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일정한 준칙을 규범화해야 하는 것이다.
호굉은 이러한 사상을 "천리와 인욕은, 본체가 같고 작용이 다르다. 함께 움직이지만 그 상태가 다를 뿐이다"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부부간의 일을 예로 들어 보자면, 성인은 법도가 있으면서 편안하게 그 일을 실행하므로 천리인 반면에, 용속한 사람은 무절제하므로 인욕이 된다. 이것이 바로 본체는 같지만 작용이 다르고, 함께 움직이지만 그 상태가 다른 까닭이다. 나중에 주희는 이 두 마디 말을 놓고 "천리와 인욕을 뒤섞어 하나의 범주로 삼았다"는 말로 호굉을 비판하였다. 이 비판은 사실 옳지 못하다. 호굉은 사람들에게 생리적인 욕구 활동을 할 때는 그 당연한 준칙을 따르도록 주의할 것을 요구하였다. 다시 말해서 정당한 욕구의 발휘가 곧 ‘천리‘이고, 준칙에 합치되지 않는 방탕한 욕구만이 ‘인욕‘인 것이다. 그러므로 천리와 인욕의 구분이란 사람의 정당하며 자연적인 욕망을 배척하거나 금지해야 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람의 자연적인 욕망을 사회에서 통행되는 준칙에 따라 합리적으로 표출시킬 것인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 P228

사람의 실제적인 윤리 생활에서, 사람의 내심은 종종 도덕 관념과 감성적 욕망 사이의 충돌이 교차하고 있다. 도덕 활동의 기본적인 특징은 도덕 의식으로 감성적 욕망을 평가하고 판단하며 제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 평가와 자아 제어의 심리 과정은 리학에서 ‘인심도심설‘의 현실적 근거를 이룬다. 도덕의 기본적인 특징은, 사람들로 하여금 도덕 의식의 활동 중에 도덕 이성으로 개체의 이기적인 욕망을 제한하고 제어하게 함으로써 사회에서 통용되는 도덕 규범에 복종하도록 강조하는 데 있다.
주희는 사람의 자연적 욕망을 일률적으로 배척하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전체적인 사상 경향은 개인의 욕망을 가능한 한 감소시켜서 사회의 도덕적 요구에 복종시킬 것을 강조한다. 이는 그의 사상이 봉건적인 신분 제도에서 출발하여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고 있음을 드러내 준다. 이같은 그의 사상은 근대 이래 자본주의가 계급을 파괴할 것을 요구하며, 개인의 이익 추구를 위해 계급과 봉건적 도덕 원칙의 제한을 받지 않으려 했던 점과 매우 다른 사상으로서, 리학이 전근대적인 사회 사상이었음을 반영한다.
마땅히 알아야 할 점으로서, 리학의 ‘도심인심설‘과 ‘천리인욕설‘은 사회 전체의 이익과 개인의 다양한 욕망 사이의 충돌이 인류 사회의 기본 모순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리학에서 제시하는 사회와 개인, 이성과 감성, 도덕과 욕망이라는 윤리학적 모순은 보편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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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면, 연주는 수많은 조상으로 사주 당사 176 자의 토대다. 그 토대가 사주 당사자와 음양이 맞으면 월주에서부터 60갑자가 순행하고 어긋나면 역행한다. 사주 당사자와 바탕이 어긋나는지 여부는 간단하게 알 수 있다. 남자는 양이니, 그 바탕인 연간이 양이면 사주 당사자와 음양이 맞아 순서대로 돌아간다. 여자는 음이니, 그 바탕인 연간이 음이면 사주 당사자와 음양이 맞아 차례대로 돌아간다. 반대로 남자의 사주에서 연간이 음이거나, 여자의 사주에서 연간이 양이면 바탕이 서로 맞지 않으니 거꾸로 돌아간다. - P175

필자가 지금까지 공부한 경험과 강의를 토대로 명리학에 꼭 필요한 핵심만을 뽑아서 논리적이고 학문적으로 설명했다. 신살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직 필자의 명리학에 대한 학문적인 역량이 모자라 이해는 물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천을귀인이니, 사주에 적용해 보면 신기할 정도로 너무 잘 맞지만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직 논리적으로 명쾌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앞으로 연구가 더 깊이 진행되면 아직까지 이해하지 못한 것까지 연구해서 세상에 전하겠으나 현재까지 연구된 것만으로도 사주를 어느 정도 볼 수 있다고 여겨 감히 글을 썼다.
세상에서는 명리학을 어리석은 사람들이 믿는 미신쯤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앞에서 설명했듯이 명리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두철미하게 음양오행의 상생상극과 그 운행법칙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처럼 체계적인 명리학을 미신 취급하는 것은 미신으로 보는 181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다. 명리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아직까지 그 학문적 구조를 자세히 밝혀내지 못한 것에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감히 이것으로 명리학의 모든 것을 밝혔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상과 같은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고 여겨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전하고자 하였다.
(…)
명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음양오행의 상생상극과 몇 가지 운행 법칙을 적용하여 인생을 바라보며 수행하는 학문이다. 명리를 모를 때는 타고난 기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천지의 기운에 휩쓸려 그렇게 살아간다. 그렇지만 그 기운 때문에 인생이 그렇게 요동친다는 것을 알때 비로소 조용히 내 자신을 돌아보며 몸과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된다. 그러니 명리학을 미리 길흉화복을 알아 부귀를 추구하는 세속의 잡된 술수로 봐서는 안 되고 수행을 시작하게 하는 거룩한 학문으로 봐야 한다.
이 책을 통해 명리를 익히는 독자들은 명심하길 바란다. 명리를 알면 알수록 인과응보의 고리가 아주 질기고 처절하게 얽혀 있음을 깨닫곤 한다. 그러니 명리를 통해 좋은 것을 찾아가고 나쁜 것을 피해갈 것이 아니라 그대로 받아들여 수행으로 극복해야 한다. 내 운명이 이 삶을 택했다면 그것을 아름답게 승화시켜야 다음 생에서 현재의 삶 182 을 반복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수강생들 중에 간혹 이혼한 분들이 있는데, 어느 정도 강의를 듣고 자신의 사주를 되돌아볼 능력이 생기면, 그토록 미운 배우자에게 도리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말을 하곤 한다. 조금만 시각을 달리 보면 인생의 많은 문제가 남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 때문에 생긴 것임을 직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명리학은 젊은 시절에 익히기보다는 빨라도 인생의 희비를 다소 맛본 40대 후반 이후에 익히는 것이 좋다고 본다. 세상에는 의지를 가지고 성실하게 살아도 되지 않는 일도 많고, 어쩌다 시작한 사업이 승승장구하여 성공하는 일도 종종 있는데, 사주를 보면 이미 그렇게 판이 정해져 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사주를 믿지 않는데, 역시 사주를 보면 그 구조가 사업가로 혹은 직업인으로 잘 살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으니, 부처님 손바닥에 있는 손오공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의 사주를 모두 다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100명 중에 2~3명 정도로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있으니, 더 연구해야 할 일이다. - P180

원국은 그 사람이 타고난 선천적인 특성이나 환경으로서 그 사람의 성격을 비롯하여 타고난 모든 것을 알려 주는 상징적인 부호다. 원국에 충이나 형이 많으면 성격이 까칠하여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다고 보고, 합이 많으면 다정다감하고 인간관계가 좋다고 본다. 성격 외에도 가령 재성이 식상관의 도움을 받는 형태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면 대운이 좋을 때에는 많은 돈을 벌 수 있고, 그다지 운이 좋지 않을지라도 망하지는 않는다.
원국에 있는 것은 평생 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운에서 오는 것은 운이 끝나면 사라지기 때문에 먼저 원국에 어떤 특성이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원국대로 살게 되는 것은 선천적으로 자신의 기질 구조에 따라 세상을 그렇게 바라보고 상황에 그렇게 대응하기 때문이다. 원국에 배우자가 병약한 구조로 있으면 그 사람은 건강한 이성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병약한 이성에게 매력을 느끼고 구애하게 되어 있다.
이것에 대해 우리 선조들은 동기상응同氣相應이라 하여 같은 기운은 서로 호응한다고 했다. 천지는 음양오행으로 기운을 뿌리면서 흘러가고, 어느 순간 태어난 생명은 그 시점에서 오행의 기질을 받아 그것을 가지고 세상과 반응하면서 죽을 때까지 사는 것이다. - P183

흔히 <<주역>>의 건乾과 곤坤을 이용해 남자는 건, 여자는 곤으로 표시하는데, 한글로 ‘남’이나 ‘여’로 표시해도 상관없다. 공망과 천을귀인이 사주 원국에 있는지 확인하고 있으면, 동그라미 등으로 표시하여 사주를 보는 도중에도 잊지 않도록 해 놓기 바란다. 원국에 귀인이 둘 이상 있으면 그것들에게 너무 의지해 좋지 않지만 하나 정도 있으면 그것이 육친 중 무엇이든 아주 좋게 작용한다. 언젠가 어느 지방 국립대 교수 부인이 남편 사주를 봐 달라고 해서 보니, 재가 천을귀인이었다. 그 부인이 어렵게 뒷바라지하여 교수를 만들었다고 하니, 얼마나 귀한 재인가!
사주 원국의 구조가 아주 나쁜 경우를 제외하면, 천을귀인이 있을 경우 인생에 그것이 좋은 영향을 많이 미친다. 그리고 운에서 오면 그때 해당 육친에게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니, 천을귀인은 꼭 암기해 두기 바란다. 덧붙여 말하건대, 공망은 오행으로는 작용하지만 육친으 188 로는 그 작용이 약화되는 것이다. - P187

거듭 당부하건대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 아무리 편리하다 할지라도 사주를 익히는 초기에는 핸드폰에 깐 프로그램으로 사주를 뽑지 않기를 바란다. 필자는 2015년 여름까지 핸드폰으로 사주를 뽑지 않고 만세력을 살피며 사주 원리와 관련된 내용에 대해 생각을 다시 해 보고는 했다. 핸드폰이나 컴퓨터를 이용해서 사주를 뽑을 경우, 이와 같은 과정이 생략되어 원리에 대해 고민하는 기반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사주는 비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음양오행의 원리에 대해 아주 무르익을 정도로 생각하고 생각하여 저절로 터져 나오게 하는 것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고수와 하수의 차이는 사주를 익힌 기간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그 기반이 얼마나 튼튼한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에 달려 있을 뿐이다.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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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왕들이 화병(火病)으로 죽었다. 숙종도 그랬고 경종, 그리고 영조의 손자인 정조도 화병에 시달렸다. 그래서 원기를 돋우는 인삼을 먹지 못했다. 인삼은 명약이나 열이 뜬 사람에게는 화(火)를 더 조장할 수 있다. 영조는 인삼을 달고 살았다고 한다. 이상곤 한의사는 영조의 체질이 소음인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그럴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후천적인 노력이 있었다. "그는 소식은 기본이고 기름진 음식과 술을 피하는 절제된 식습관을 평생 고수했다. 소화 기능이 약한 소음인 체질 때문에 자기한테 맞춤한 식습관을 실천한 것이다."이상곤, <<이상곤 낮은 한의학>>, 사이언스북스, 2011, 110쪽 - P415

정치 분쟁에서 논리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리고 공론의 정치를 이끌어가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조는 공부벌레였고 독서광이었다. 그의 실력은 경연(經筵)에서 자신이 직접 신하들을 가르칠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앎을 최선을 다해서 정사를 펼치는 데 이용했다. 그러다 보니 관여할 것도 할 일도 너무 많았다. "정조는 일중독에 걸렸다고 할 만큼 늘 정무에 바빴다."안대회, 앞의 책, 93쪽 스스로 "나는 바빠서 눈코 뜰 새 없으니 괴롭고 괴로운 일"같은 책, 94쪽이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영조가 83세까지 살았던 반면, 정조는 47세에 죽었다. 정조는 몸에 열이 많았다. - P416

화병은 울화(鬱火)병이라고도 한다. 화병이 성립되려면 울증, 즉 감정의 울체가 있어야 한다. 억울함 등의 감정이 몸속에 오래 머물면 울증이 생긴다. 그것이 열을 내면서 몸에 여러 증상들이 나타나는 것이 화병이다. 병증은 일반적으로 분노가 심해지고, 갑자기 울컥한 마음이 생기며, 얼굴에 열감이 오르고, 두통이 생기며, 목에 무언가 걸린 것 같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등의 증상으로 나타난다. 정조의 화병은 자신의 생부인 사도세자의 끔찍한 비극을 겪은 충격이 일차적인 원인이었으리라. 정조는 죽음을 앞두고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몬 자들 418이 자수를 하지 않고 있다. 내가 한 번 행동을 하면 저들이 결단 날 텐데"이상곤, 앞의 책, 116쪽라며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에 정조는 번 아웃이 되도록 열심히 일했다. 말 그대로 에너지를 다 태워 버리고 나가떨어지는 지경이 되도록 정기를 끌어올린 것이다. 이런 행동은 화기를 조장한다. 그는 스스로도 "심혈(心血)이 메말라 눈이 어두워졌다"안대회, 앞의 책, 97쪽고 판단했다. 화기는 심혈을 말린다. 심혈이 마르면 진액이 마르고 간으로 피가 저장되지 않아 눈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진액이 마르면 열은 더 심해지고 결국 기존의 울화병에 화력을 보태는 꼴이 된다. - P417

물론 이런 상황을 여러 가지 사주 이론으로 대입하여 설명할 수 있다. 신(辛)이 나란히 붙어 있다거나, 을과 신의 충이 두 개 있다거나, 421 또 묘유충을 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고, 관성의 부재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사주가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산다고 하는 말은 우리가 가장 피해야 할 초월적 결정론이다. 연예인이 자살을 하는 사건이 벌어지면, 임상가들은 앞다투어 사주가 그래서 자살을 한 것이라고 해설을 한다. 그러나 그런 사주라고 다 자살을 선택하진 않는다. 끼워 맞출 순 있지만 원래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처럼 말해선 안 된다.​ - P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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