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적‘이란 말은 행하려는 일이나 도달하려는 목적에 대한 사람의 강렬한 의향을 가리킨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강렬한 의향을 ‘집착‘에 속하는 것으로 여기며, 모든 번뇌의 근원으로 생각한다. 정호는 불교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일이란 없을 수 없겠지만 마음으로 헤아리면 어긋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이는 ‘주경‘의 시작 단계에서는 반드시 주의하고 힘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볼 때 주의하지 말 것을 강조하거나 ‘주정‘을 강조하는 일은 모두 불교 수양 방법의 특징이다. 그는 "경하면 저절로 허정해지겠지만, 허정을 경으로 부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주경‘하면 자연스럽게 마음의 평정에 이르며, 혼란스럽지 않게 된다. 하지만 ‘정‘ 자체가 ‘경‘은 아니며, 더욱이 ‘경‘의 유일한 내용일 수도 없다. - P167

격물의 목적은 천하의 이치를 장악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결코 만물을 하나하나 전부 궁구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정이의 사상에 따르면, 격물의 과정이 일정한 단계까지 축적되면 자연히 어떤 비약이 생겨나고, 보편적인 원리를 인식하게 된다. 천하의 이치를 구한다는 것이 모든 구체적인 이치를 반드시 궁구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천지만물의 가장 근본적인 법칙을 장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격물의 과정이란 개별 사물의 이치로부터 보편적인 천리를 인식하는 데까지 상승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정이는 이치에 대한 인식이 개별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상승해 갈 수 있는 까닭을 이치가 통일적인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수많은 길을 통해 도읍에 갈 수 있지만 한 길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마침내 통할 수 있는 까닭은 만물이 모두 하나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 P175

정이는 평생토록 자신에 대한 규율과 남을 대하는 태도를 매우 엄격히 하였다. 그는 한평생 "행동거지는 항상 예에 들어맞았고", "나아가고 물러남은 반드시 의례에 합당했으며", "자신을 수양하고 법도를 실천할 때 모두 마땅한 기준에 따라으니, 오직 그만이 유학자의 본보기를 드러내었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어떤 사람은 그에게 "선생께서는 사오십 년 동안이나 예에 맞게 근신하며 사셨으니, 분명 대단히 힘들고 고통스러웠겠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에 정이는 "나는 매일 편안하게 살아왔는데, 어째서 힘들고 고통스러웠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매일 위험하게 살아가니, 그것이 바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다"라고 답변했다. 이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도덕 규범을 자기 자신에게 엄격히 요구하고 자신을 단속해 가면서 그는 진정으로 자기의 이상과 사상을 실천하였다. - P176

4. 천리와 인욕은 본체가 같고, 작용이 다르다
호굉의 생각에 따르면, ‘도‘는 우주의 보편 법칙이다. 폭넓은 관점에서 도를 말하자면 ‘천지에 가득 차 있는‘ 자연계의 보편 규율이며, 좁은 관점에서 도를 말하자면, "식욕이나 색욕과 같은 일상 생활에도 존재하는" 것으로서 인류 생명 활동의 규범이자 준칙이다. 호굉은 "사람들이 부부간의 일을 추하게 여기는 이유는 음욕을 일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인은 그것을 편안하게 여기니, 이는 인류 보존을 위한 결합으로 의미를 새기기 때문이다. 교접하는 데에도 예절이 있고 도가 있음을 안다"고 하였다. 그가 볼 때, 부부 사이의 성관계는 추한 일이 아니다. 합리적인 성관계를 ‘음욕‘으로 간주하는 것은 용속한 사람들의 태도이다.
그는 양성 관계에도 각자 마땅히 준수해야 하는 준칙과 규범이 있다는 생각을 견지하였다. 양성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 입고 먹고 거처하며 행위하는 모든 활동들 가운데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요컨대 사람의 생명 활동은 부정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은 본체적인 의미는 물론이고 도덕적인 의미도 함께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일정한 준칙을 규범화해야 하는 것이다.
호굉은 이러한 사상을 "천리와 인욕은, 본체가 같고 작용이 다르다. 함께 움직이지만 그 상태가 다를 뿐이다"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부부간의 일을 예로 들어 보자면, 성인은 법도가 있으면서 편안하게 그 일을 실행하므로 천리인 반면에, 용속한 사람은 무절제하므로 인욕이 된다. 이것이 바로 본체는 같지만 작용이 다르고, 함께 움직이지만 그 상태가 다른 까닭이다. 나중에 주희는 이 두 마디 말을 놓고 "천리와 인욕을 뒤섞어 하나의 범주로 삼았다"는 말로 호굉을 비판하였다. 이 비판은 사실 옳지 못하다. 호굉은 사람들에게 생리적인 욕구 활동을 할 때는 그 당연한 준칙을 따르도록 주의할 것을 요구하였다. 다시 말해서 정당한 욕구의 발휘가 곧 ‘천리‘이고, 준칙에 합치되지 않는 방탕한 욕구만이 ‘인욕‘인 것이다. 그러므로 천리와 인욕의 구분이란 사람의 정당하며 자연적인 욕망을 배척하거나 금지해야 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람의 자연적인 욕망을 사회에서 통행되는 준칙에 따라 합리적으로 표출시킬 것인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 P228

사람의 실제적인 윤리 생활에서, 사람의 내심은 종종 도덕 관념과 감성적 욕망 사이의 충돌이 교차하고 있다. 도덕 활동의 기본적인 특징은 도덕 의식으로 감성적 욕망을 평가하고 판단하며 제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 평가와 자아 제어의 심리 과정은 리학에서 ‘인심도심설‘의 현실적 근거를 이룬다. 도덕의 기본적인 특징은, 사람들로 하여금 도덕 의식의 활동 중에 도덕 이성으로 개체의 이기적인 욕망을 제한하고 제어하게 함으로써 사회에서 통용되는 도덕 규범에 복종하도록 강조하는 데 있다.
주희는 사람의 자연적 욕망을 일률적으로 배척하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전체적인 사상 경향은 개인의 욕망을 가능한 한 감소시켜서 사회의 도덕적 요구에 복종시킬 것을 강조한다. 이는 그의 사상이 봉건적인 신분 제도에서 출발하여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고 있음을 드러내 준다. 이같은 그의 사상은 근대 이래 자본주의가 계급을 파괴할 것을 요구하며, 개인의 이익 추구를 위해 계급과 봉건적 도덕 원칙의 제한을 받지 않으려 했던 점과 매우 다른 사상으로서, 리학이 전근대적인 사회 사상이었음을 반영한다.
마땅히 알아야 할 점으로서, 리학의 ‘도심인심설‘과 ‘천리인욕설‘은 사회 전체의 이익과 개인의 다양한 욕망 사이의 충돌이 인류 사회의 기본 모순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리학에서 제시하는 사회와 개인, 이성과 감성, 도덕과 욕망이라는 윤리학적 모순은 보편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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