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이르니 이사의 뜻은 아주 분명해진다. 그 주요 관념은, 즉 ‘法敎‘와 ‘私學‘의 대립에 있다. 대체로 이사는 사상과 언론은 마땅히 법교에 복종해야 하며, 사학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官方에서 결정한 모든 것은 곧 영원히 잘못이 없는 표준적인 규범인 것이다. 관방에서 결정하지 않은 사상에 속하는 것은 모두 ‘사학‘이며, 마땅히 금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이 통하지 않음은 아주 쉽게 알게 된다. 천하 사람들의 지혜와 능력을 이용하면 반드시 소수인의 지혜와 능력을 이용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것은 따질 필요가 없는 이치이다. 이사가 사학을 금하려 한 것은 사실 학술사상 그 자체는 개인이 표현하고 세워 놓은 바가 아닐 수가 없으며, 사학을 금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모든 학술사상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관가에서 가질 수 있는 것은 소수의 통치집단의 사상적인 견해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이 빈곤하고 어리석은 견해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P11

 ‘금문‘은 한대에 사용하던 문자이며, ‘고문‘은 올챙이처럼 생긴 과두문자를 가리킨다. 한대 초에 빠져 없어진 경전을 찾고자 하는 사람이 의거한 경전은 모두가 나이 많은 儒生의 口述로 말미암아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두 당시의 문자를 사용하였다. 이른바 금문의 경전이 이것이다. 고문의 경전은, 즉 남아 있었던 簡策이기 때문에 한대에 통용되던 글자가 아니었다. 이것이 두 가지가 구분이 지어지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경학을 하는 선비들은 또 파가 나뉘어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금문에 의 14 거하고 어떤 사람은 고문에 의거하여 논쟁은 그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지식인들의 정력은 거의 대부분이 훈고를 하는 것에 빨려 들어가버렸다. - P13

 도가의 기본정신은 원래 ‘情意我‘의 자유를 활달하게 드러내는 데 있다. 그러므로 밖에 대해서는 냉철한 지혜로 靜觀하였고, 안에 대해서는 淸虛 17 로서 스스로 지켰다. 한나라 왕실이 처음 일어났을 때는, 본래 일정한 문화의식이 없었다. 文帝 이후에는 조정 안에서 ‘黃老‘를 중시하여 도가의 말을 마루[宗]로 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 도가의 설은 역시 커다란 왜곡을 당했으니, 이것은 즉 정의아의 경계가 육체생활의 작용으로 바뀌어진 것이다. 노자는 "아무것도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無爲而無不爲]는 말을 하였는데, 그 말의 본래의 취지는 自我가 아무 데도 집착한 데 없고 아무 데도 구속됨이 없는 경지를 드러내는 데 있었다. 그러나 ‘智‘를 말했기 때문에 때로는 權術의 말이 들어있었다. 장자에는 <逍遙遊> 및 不死不生의 설이 있었는데, 이것은 모두 자아가 육체의 일들에 봉쇄되지 않은 것을 묘사한 것이지만, 萬言을 쓰기 좋아했기 때문에, 때로는 ‘늙지 않는다‘ 및 ‘고통이 없다‘는 말로 비유하였다.
 한나라 초에 선진의 옛 학문은 이미 그 전통이 끊겼고, 도가를 말하는 자는 모두 노자·장자가 긍정한 ‘자아‘가 어디에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단지 그 껍데기의 비유만을 뚝 잘라 취하여, 이것이 바로 도가의 학이라고 여기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도가의 설을 권모술수로 보았다. 그리고 법가의 순전히 속임수 잘 쓰는 마음으로 도가의 냉철한 지혜를 운용하였다. 그리고 ‘黃老‘에 통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도가의 설을 長生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날마다 守尸之術에 마음을 썼다. 두 가지 중 하나는 조정에 있고, 하나는 민간에 있는 것[在野]이다. 조정에 있는 것은 황노의 권술 사상을 위탁하였고, 민간에 있는 것이 점점 ‘道敎‘로 전환이 되었으며, 역시 황노의 종교에다 위탁하였다. 위탁이 위탁되는 까닭은 바로 ‘정의아‘의 기본적인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권술이 다룬 것은 정치利害이며, 장생술이 추구한 것은 육체의 생존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육체생활 중의 일이다. 이런 태도를 가지고서 도가를 논하면 도가의 학은 왜곡되어 육체생활 중에 어떠한 효력을 구하는 학문이 된다. 어찌 커다란 잘못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것이 바로 한대 지식인의 도가에 대한 공통적인 오해였다. 그러나 우리는 한대에 들어온 이후 도가가 말한 ‘정의아‘는 이미 다시는 사람들에게 알려진 바가 없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일반 관념 중에서 도가는 점점 육체생활의 효과를 구하는 것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변화가 바로 커다란 왜곡이며, 이러한 왜곡이 도가에 대한 영향이 막대한 것은, 역시 음양오행 관념의 유가에 대한 영향보다 못지 않았다. - P16

 공맹의 유학은 원래가 心性을 위주로 한다. 이 하나의 심성론 문제는 맹자의 ‘性善‘ 두 자로서 그것을 표시한다. 이 문제는 본래 두 가지 부분을 함유하고 있다. 한 부분은 가치와 덕성의 해석에 관계되는 것이며, 또 다른 한 부분은, 즉 人性의 이해에 관계되는 것이다. 맹자는 가치 덕성의 근원을 주체의 자각 위에 두었기 때문에 ‘善‘은 그 근본이 인간의 자각성에 있는 것이다. 즉 세상에 전해져 오는 ‘성선설‘이 그것이다. 한대의 유가는 ‘마음[心靈]의 자각‘이란 의미를 잘 알지 못하였으며, 단지 비루하고 조잡한 우주론의 틀에 묶여서 철학 문제를 처리하였다. 그러므로 심성론 문제는 한대유가의 손에서 두 가지 문제로 분열되었다. 그래서 각기 아주 가소로운 처리를 하게 된 것이다. - P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대 유학사상의 특색은 우주론 중심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일체를 하나의 ‘천‘으로 돌아가게 하여 이것으로 일체의 존재 및 관계를 설명하고 역시 이것에 근거하여 가치표준을 세워 놓았다. 이것과 선진 공자·맹자의 심성론 중심의 철학과는 차이가 너무 심하게 드러난다. 한대 이후의 유학자는 비록 공맹을 종주로 삼는다는 이름을 내걸면서도 사실은 음양오행 등 원시관념을 잡다하게 취한 한대유학의 이론을 역시 언제나 맹목적으로 받아들였으며 그 방향이 공맹의 본래 의미를 크게 어그러뜨리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한대유학의 ‘우주론 중심의 철학‘은 역사적인 의미에서 공맹과 분리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론적인 의미에 있어서도 역시 퇴화되어 타락하였다. 대개 이른바 덕성 및 가치의 문제는 결코 존재의 영역에다 호소할 수는 없다. 우주론 관념을 기초로 삼아 건립된 어떠한 가치론도 그 자체는 모두 엉성하고 빈약하다. - P3

대개 불교의 가치론과 장단점을 논하려면, 우주론 중심의 철학을 포기하고 심성론 중심의 철학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론적인 측면으로 말하면 우주론 중심의 철학은 본래 유치한 사상에 속하므로 불교의 심성론과 맞설 수가 없었다. 이것은 객관적인 한계인 것이다. 이 한계가 일단 자각단계로 들어가면 우주론을 버리고 다시 가치문제를 돌아보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 P4

 당대에서 ‘중국불교‘가 성장한 뒤부터 불교의 측면에서는 이미 중국인의 마음에 최대한의 적응을 하였다. 그러나 그 기본정신 방향에서 본다면 불교의 ‘사리정신‘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원칙인 것이다. 이 점에서 불교와 유학은 타협할 방법이 없다. 중국 학자들은 이에 이르러 일대의 정신방향의 선택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만약 ‘사리정신‘을 받아들이면 반드시 세계를 부정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어야 하고, 세계에 대하여 긍정하는 바를 가지려 한다면 그리고 세계의 ‘유‘ 자체를 하나의 미혹된 집착으로 보기 원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사리정신‘을 거부해야 한다. 당대에 유학을 제창하고 불교를 배척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세계를 부정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 P4

철학문제 그 자체로 말하면 가치, 덕성 등등의 문제는 모두 본래 ‘유무‘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우주론은 본래 이러한 문제에 진정한 해답을 할 수가 없다. 또 경험을 초월한 ‘실유‘를 긍정하는 형이상학 계통 역시 해결할 수 없다. - P5

육구연은 처음 ‘심‘ 관념을 중히 여기어 ‘존재‘로부터 ‘활동‘에로 돌아왔다. 즉, 객체에 대치되었던 주체를 최고의 주체성으로 이끌어 올려놓았다. 왕양명은 양지설을 주장하여 최고의 주체성은 이로 말미암아 크게 완성되었으며 이에 이르러 송명유학은 최고봉에 이르렀다. 심성론을 다시 세우는 것은, 즉 유학의 가치철학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이러한 건립이 완성되었을 때 중국의 정신은 이미 인도의 사리교의에 제한을 받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또 다른 방면에서 유학의 가치이론의 장·단점이 역시 모두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명대 이후 중국철학사상은 점차로 반송명유학을 시도하는 경향이 생겨나게 되었다. - P6

왕양명의 학문은 송명유학의 높은 봉우리를 대표한다. 그러므로 ‘왕학‘에서 나온 결함은 사실 유학 자체의 내재적인 문제이다. 이 문제는 근원처에서 말하면 ‘도덕심‘ 대 ‘인지심‘의 압축문제인 것이다. 만약 문화생활의 측면에서 말하면, 지성활동이 덕성의식의 부속품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그 독립성을 잃는다는 문제인 것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되면, 즉 지식기술 발전이 지체되고, 정치제도가 발전되지 못하고, 인류는 객관세계 중에서 통제력이 날로 쇠퇴하여 간다. - P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어중형어외(誠於中形於外): 속마음이 참되면 겉으로 드러난다. <대학>

(​풍우란 『중국철학사(상)』(박성규 역) 582p의 번역을 따름)


Case 1. '속마음이 참되다'는 '겉으로 드러난다'의 충분조건이다.

= '속마음이 참되다'가 참이면 '겉으로 드러난다'는 항상 참이다.(충분조건의 정의에 의해)

=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속마음이 참되지 않은 것이다."(대우 규칙에 의해)


=> 겉으로 드러났지만 속마음이 참되지 않은 경우가 있다.(가식)



이렇게 해석한 경우:

1) 포커페이스는 자신의 속마음을 나타내지 않고 무표정하게 있는 얼굴을 뜻한다.

싫은 사람 앞에서 무표정이 되는 포커페이스는 어려운 일이다.

(http://www.imgnews.kr/default/reader_index_view_page.php?board_data=aWR4JTNEMTM0ODMlMjZzdGFydFBhZ2UlM0QlMjZsaXN0Tm8lM0QlMjZ0b3RhbExpc3QlM0Q=||&search_items=cGFydF9pZHglM0QxMjQ=||)

2) 그와는 반대로 가식으로 포장된 선의란 메마른 조화(造花)와 같아서 멀리서는 아름다운 화초의 모습이지만 가까이서는 그 생명력과 숨결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겉으로는 그 눈빛까지도 선을 흉내 낼 수 있지만 진실이 없는 선함은 생명의 숨결 없는 조화의 모습과 같이 언젠가는 그 거짓이 드러나게 된다.

(http://webzine.daesoon.org/board/index.asp?webzine=197&menu_no=3249&bno=5754&page=1)

Case 2. '속마음이 참되다'는 '겉으로 드러난다'의 필요조건이다.

= '속마음이 참되다'가 참이 아니면 '겉으로 드러난다'도 항상 참이 아니다.(필요조건의 정의에 의해)

= "속마음이 참되지 않으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 "겉으로 드러난다면 속마음이 참된 것이다."(대우 규칙에 의해)


=> 속마음이 참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티나지 않음)

Case 3. '속마음이 참되다'는 '겉으로 드러난다'의 필요충분조건이다.

= '속마음이 참되다'가 참이고 또한 오직 그런 경우에만 '겉으로 드러난다'는 참이다.(필요충분조건의 정의에 의해)

= "속마음이 참된 경우에만 (참된 마음이) 겉으로 드러나고, (참된 마음이) 겉으로 드러날 때에만 속마음이 참된 것이다."


=> '가식' or '티나지 않음'의 경우는 없음.

이렇게 해석한 경우:

1)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 속 들여다보듯 하고 있으므로 숨겨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이런 것을 일러 마음속에 들어있는 진실은 아무리 숨겨도 밖에 나타나게 된다고 한다.

(http://www.gof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8537)


2) 성실과 진실은 밖으로 나타난다.

자식이 야속하게 느껴지면 부모 자신의 성실과 진실이 자식에게 보이지 않았다는 점을 알아야 하고, 국민이 야속하게 느껴지면 정치인 자신의 성실과 진실이 국민에게 보이지 않았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https://blog.daum.net/ktckorea/14416754)


3) 속마음에 들어 있는 것은 숨기려 해도 밖으로 나타나게 된다

(http://www.jjan.kr/news/articleView.html?idxno=34828)


4) 마음속에 성실함이 있으면 반드시 외형으로 나타난다는 뜻으로 속마음에 있는 것을 숨기려 해도 자연히 밖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말.

(http://naju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216597)

5) 대학(大學)에 "성어중형어외(誠於中形於外)"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속에 정성스러움이 있으면 비록 숨기려 하여도 반드시 겉모양으로 나타난다"는 의미입니다.

(https://if-blog.tistory.com/3276 [교육부 공식 블로그])

4. 결론(내가 생각하는 "성어중형어외"의 정확한 의미)

'속마음이 참되다'는 '겉으로 드러난다'의 필요충분조건이다.

= '겉으로 드러난다'는 '속마음이 참되다'의 필요충분조건이다.

= '속마음이 참되면 겉으로 드러난다.'와 '겉으로 드러나면 속마음이 참된 것이다.'가 모두 참이다.

= "속마음이 참되면 겉으로 드러나고, 또한 겉으로 드러나면 속마음이 참된 것이다."


=> "숨기려 해도" 밖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 핵심!

전 6장

‘(...) 소인은 일 없이 홀로 있을 때 좋지 않은 일을 함에 못하는 짓이 없다. 그런데 군자를 본 뒤에 계면쩍어하면서 자신의 좋지 않은 점을 숨기고, 자기의 좋은 점을 드러내려 한다. 남이 자기 보기를 마치 그 마음속을 꿰뚫어 보듯이 하니, 그렇다면 (숨기는 것이)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이를 일러 마음속에 성실함이 가득하면 몸 밖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자신이 홀로 있을 때 삼가야 한다. (...)‘ - P39

‘(...) 小人閒居爲不善, 無所不至, 見君子而后厭然, 揜其不善, 而著其善. 人之視己, 如見其肺肝, 然則何益矣? 此謂誠於中形於外, 故君子必愼其獨也. (...)‘ - P5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의 현실감은 현상이 있다는 사실과 사물이 은폐된 존재의 어둠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 공론 영역이 있다는 사실에 의존한다. 그래서 사적이고 친밀한 삶을 비추는 희미한 빛도 결국 그 광력을 공론 영역의 보다 강한 빛에서 얻는다. 그러나 공적인 무대에 있는 타인의 지속적인 현존에서 오는 강력한 빛을 견뎌내지 못하는 것도 많다. 공론 영역에서는 보고 듣기에 적절하고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만이 공적인 빛을 견딜 수 있다. 따라서 그렇지 못한 것들은 자동적으로 사적인 문제가 된다. 사적인 관심이 일반적으로 부적절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반대로 우리는 매우 중요한 문제들이 오직 사적 영역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음을 안다. 예컨대 사랑은 우정과는 달리 공적으로 드러나는 한, 끝나거나 없어진다. ("사랑한다는 말을 결코 하지 마세요. / 사랑은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에 내재하는 무세계성 때문에 사랑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고 구원하려는 모든 정치적 시도는 우리에게 거짓되고 왜곡된 것으로 비친다. - P13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주는 미래를 100% 결정짓지 않는다
ㅡ 사주와 현대 사회

 정확하게 말하면 명리학(혹은 사주학)은 앞선 이들이 오랫동안 관심을 두었던 "인간 길흉화복 예측"이라고 하는 목적에 여전히 도달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사주는 없다를 외치며 폐기하는 것도 썩 바람직한 방법은 아닌 것 같다. 어떤 문화를 강제로 소멸시켜서는 안될 뿐더러, 명리학이 인간의 주요 관심사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리 되지도 않을 것이다.

 사주학의 근본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다른 모든 학문과 마찬가지로 자연과 세계의 원리를 탐구하는 데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 중에서 자연의 한 부분인 인간에게 내재된 자연의 원리를 인간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서 탐구한다는 것이다. 여느 학문처럼 연구 방법론과 도구도 존재한다. 근본적으로 천체가 순환한다는 사실로부터, 출생시의 시공간에 주어진 특정한 기가 인간에게 입력된다고 본다. 그것이 각각 네 개의 천간-지지 쌍으로 표현된다. 기본적인 개념으로서 음과 양, 그것이 구체화된 목화토금수의 오행, 천간과 지지, 십성, 십이운성, 오행의 생극제화 등이다. 사주명리학은 이러한 도구를 통해 인간에 내재한 자연의 원리를 탐구하며, 이를 통해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참고 자료로서 사용되고 있다.

 한편, 최근 2-30대가 사주학에 주목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점차 미래가 불확실해지는 사회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불안감을 표상하는군."같은 진부한 촌평(사실상, 미래는 과거에도 확실하지 않았고, 우리는 언제나 불안했다)을 제외한다면, 이러한 현상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다른 측면도 있을까.

 20세기 말 선진국 문턱에 진입한 이후의 세계화 국면에서, 현대 기술 문물을 누리며 과학기술 중심 교육을 받고 자라온 소위 말하는 "MZ세대"의 "미신"에 대한 관심이다. 신비주의적 권위로 무장하고 뜻 모를 글자를 적어가며 호통치듯 천기를 누설하던 역술인들의 손에서 벗어나 스스로 사주를 풀이하고 공부하는 이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여느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유튜브나 웹사이트를 통해서 손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다.

 사주는 이미 사업적인 면에서 제법 돈이 되기도 한다. 사주/운세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을 제공하는 "포스텔러"나, 사주 상담 예약 서비스인 "천명"과 같은 제법 성공한 벤처기업이 등장했다. 10만 구독자를 보유한 사주 유튜버도 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사주가 정신과 방문이 꺼려지는 이들에게 상담이나 카운셀링의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사업성은 이미 나타난 사주명리학의 하나의 가능성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주학이 가진 학문적 가능성은 없을까?

 나는 사주 이론이 보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모습으로 체계화되어 정립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본다. 다만 역술인의 직감과 예측력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기존 사주학과는 달리, 상관관계와 인과관계 파악에 대한 과학적 탐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고 이를 신진 연구가들이 해낼 수 있는 작업이라고 본다. 가장 큰 요인은 투입량(input)의 증가다. 한 명의 대중 인문 강연자의 성공 뒤에는 이를 받쳐주는 수많은 연구자들이 있는 것처럼, 인풋이 늘어나면 아웃풋도 커지기 마련이다. 직업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두는, 소위 "덕후"기질이 충만한 현대인의 특성상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이론적 지식은 무엇이어야 할까? 사주학의 기본 바탕은 천체의 운행, 즉 천문학이다. 음양오행이라는 전통 동양 개념과 현대 과학의 개념 및 용어 사이의 호환성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현대 천문학 지식을 적용하는 일도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작업이다. 가령 태양은 우리 은하의 중심을 공전한다고 알려졌는데, 이에 따르면 태양계 행성들은 동일한 공간을 반복적으로 운행하는 것이 아닌, 우주 공간에서 나선형의 궤도 운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60년마다 동일한 사주를 가진 사람이 태어난다. 태양의 공전 주기는 약 2억 3천만년이므로 같은 시공간의 에너지(혹은 기)를 부여받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지구와 가까워 인력을 크게 미치는 태양계의 천체들도 60년마다 같은 위치에 배열되지 않는다. 이 점이 사주학이 가진 치명적 맹점이 아닐까 한다.

 여전히 과학계에서조차도 인간이 천체 운동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는지에 대해서는 미지의 영역에 가깝다. 추후 다양한 연구가 진행될 여지가 충분한 이유다. 지금까지 공개된 연구 결과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보름달이 식욕 억제 호르몬 분비를 증가시키고 식욕 자극 호르몬은 억제시킨다는 연구(덴마크 코펜하겐 대학, 2015), 보름달이 떴을 때 대동맥 박리 수술을 받은 환자들의 사망률이 삭, 초승달, 그믐달이 뜬 날 수술을 받은 환자들에 비해 21% 낮았다는 연구(미국 로드아일랜드 병원, 2017), 그믐달이 뜬 날의 멜라토닌 분비량이 8pg/ml였던 것에 비해 보름달이 뜬 날은 4pg/ml로 수면에 영향을 주었다는 연구(스위스 바젤대학교, 2013) 정도다.

 현재 세계의 모든 곳은 "인간 창의성 실험장"과 마찬가지다. 기후 위기와 핵전쟁, AI의 위협과 같은 비관적인 미래가 우리를 짓누른다. 인간이 가진 모든 가능성을 시험해야 하는 시기다. 수많은 사람들은 세계의 어느 곳에서 나타날지 모를 놀라운 혁신을 기대하고 있다. 어쩌면 사주학에서 놀라운 혁신의 단초가 탄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주희는 《격물보전》에서, 격물치지의 누적이 계속될 때 어느 날 홀연히 활연관통의 경지에 다다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현대에 태어났더라면 분명 자연과학자가 되었을 거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비록 주자학이 당시 그러한 과학적 풍토를 조성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주희 자신은 확실히 과학적 탐구정신이 뛰어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주희가 풀 한 포기의 격물을 이야기했으니, 사주가 격물의 대상이 되는 것에 전혀 문제는 없을 것이다. 현대 학문에 다양한 분과 학문이 존재하고, 저마다의 탐구 방법을 사용하는 여러 학파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뜻있는 젊은 명리학 연구자들이 제시할 새로운 패러다임을 기대해본다. "사주," "명리"에 "學"자를 붙이는 것이 어색하지 않을 날이 조만간 찾아오기를 바라며 글을 마무리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