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이르니 이사의 뜻은 아주 분명해진다. 그 주요 관념은, 즉 ‘法敎‘와 ‘私學‘의 대립에 있다. 대체로 이사는 사상과 언론은 마땅히 법교에 복종해야 하며, 사학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官方에서 결정한 모든 것은 곧 영원히 잘못이 없는 표준적인 규범인 것이다. 관방에서 결정하지 않은 사상에 속하는 것은 모두 ‘사학‘이며, 마땅히 금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이 통하지 않음은 아주 쉽게 알게 된다. 천하 사람들의 지혜와 능력을 이용하면 반드시 소수인의 지혜와 능력을 이용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것은 따질 필요가 없는 이치이다. 이사가 사학을 금하려 한 것은 사실 학술사상 그 자체는 개인이 표현하고 세워 놓은 바가 아닐 수가 없으며, 사학을 금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모든 학술사상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관가에서 가질 수 있는 것은 소수의 통치집단의 사상적인 견해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이 빈곤하고 어리석은 견해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P11

 ‘금문‘은 한대에 사용하던 문자이며, ‘고문‘은 올챙이처럼 생긴 과두문자를 가리킨다. 한대 초에 빠져 없어진 경전을 찾고자 하는 사람이 의거한 경전은 모두가 나이 많은 儒生의 口述로 말미암아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두 당시의 문자를 사용하였다. 이른바 금문의 경전이 이것이다. 고문의 경전은, 즉 남아 있었던 簡策이기 때문에 한대에 통용되던 글자가 아니었다. 이것이 두 가지가 구분이 지어지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경학을 하는 선비들은 또 파가 나뉘어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금문에 의 14 거하고 어떤 사람은 고문에 의거하여 논쟁은 그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지식인들의 정력은 거의 대부분이 훈고를 하는 것에 빨려 들어가버렸다. - P13

 도가의 기본정신은 원래 ‘情意我‘의 자유를 활달하게 드러내는 데 있다. 그러므로 밖에 대해서는 냉철한 지혜로 靜觀하였고, 안에 대해서는 淸虛 17 로서 스스로 지켰다. 한나라 왕실이 처음 일어났을 때는, 본래 일정한 문화의식이 없었다. 文帝 이후에는 조정 안에서 ‘黃老‘를 중시하여 도가의 말을 마루[宗]로 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 도가의 설은 역시 커다란 왜곡을 당했으니, 이것은 즉 정의아의 경계가 육체생활의 작용으로 바뀌어진 것이다. 노자는 "아무것도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無爲而無不爲]는 말을 하였는데, 그 말의 본래의 취지는 自我가 아무 데도 집착한 데 없고 아무 데도 구속됨이 없는 경지를 드러내는 데 있었다. 그러나 ‘智‘를 말했기 때문에 때로는 權術의 말이 들어있었다. 장자에는 <逍遙遊> 및 不死不生의 설이 있었는데, 이것은 모두 자아가 육체의 일들에 봉쇄되지 않은 것을 묘사한 것이지만, 萬言을 쓰기 좋아했기 때문에, 때로는 ‘늙지 않는다‘ 및 ‘고통이 없다‘는 말로 비유하였다.
 한나라 초에 선진의 옛 학문은 이미 그 전통이 끊겼고, 도가를 말하는 자는 모두 노자·장자가 긍정한 ‘자아‘가 어디에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단지 그 껍데기의 비유만을 뚝 잘라 취하여, 이것이 바로 도가의 학이라고 여기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도가의 설을 권모술수로 보았다. 그리고 법가의 순전히 속임수 잘 쓰는 마음으로 도가의 냉철한 지혜를 운용하였다. 그리고 ‘黃老‘에 통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도가의 설을 長生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날마다 守尸之術에 마음을 썼다. 두 가지 중 하나는 조정에 있고, 하나는 민간에 있는 것[在野]이다. 조정에 있는 것은 황노의 권술 사상을 위탁하였고, 민간에 있는 것이 점점 ‘道敎‘로 전환이 되었으며, 역시 황노의 종교에다 위탁하였다. 위탁이 위탁되는 까닭은 바로 ‘정의아‘의 기본적인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권술이 다룬 것은 정치利害이며, 장생술이 추구한 것은 육체의 생존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육체생활 중의 일이다. 이런 태도를 가지고서 도가를 논하면 도가의 학은 왜곡되어 육체생활 중에 어떠한 효력을 구하는 학문이 된다. 어찌 커다란 잘못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것이 바로 한대 지식인의 도가에 대한 공통적인 오해였다. 그러나 우리는 한대에 들어온 이후 도가가 말한 ‘정의아‘는 이미 다시는 사람들에게 알려진 바가 없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일반 관념 중에서 도가는 점점 육체생활의 효과를 구하는 것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변화가 바로 커다란 왜곡이며, 이러한 왜곡이 도가에 대한 영향이 막대한 것은, 역시 음양오행 관념의 유가에 대한 영향보다 못지 않았다. - P16

 공맹의 유학은 원래가 心性을 위주로 한다. 이 하나의 심성론 문제는 맹자의 ‘性善‘ 두 자로서 그것을 표시한다. 이 문제는 본래 두 가지 부분을 함유하고 있다. 한 부분은 가치와 덕성의 해석에 관계되는 것이며, 또 다른 한 부분은, 즉 人性의 이해에 관계되는 것이다. 맹자는 가치 덕성의 근원을 주체의 자각 위에 두었기 때문에 ‘善‘은 그 근본이 인간의 자각성에 있는 것이다. 즉 세상에 전해져 오는 ‘성선설‘이 그것이다. 한대의 유가는 ‘마음[心靈]의 자각‘이란 의미를 잘 알지 못하였으며, 단지 비루하고 조잡한 우주론의 틀에 묶여서 철학 문제를 처리하였다. 그러므로 심성론 문제는 한대유가의 손에서 두 가지 문제로 분열되었다. 그래서 각기 아주 가소로운 처리를 하게 된 것이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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