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2 외계인과 외계 문명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이 아무리 복잡한 문양이나 보잘것없는 징조일지라도 그들이 남겼다는 것이 확실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이 바람을 주체하기 힘들다. 이 바람 안에는 인간이 과거부터 품어 왔던 소박한 소망이 깃들어 있다. - P582

590 과연 성간 공간에도 ‘로제타석‘이 있을까? 우리는 성간 로제타석이 있다고 믿는다. 아무리 다른 문명권들이라고 해도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공통의 언어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 공통의 언어는 바로 과학과 수학이다. 자연의 법칙은 우주 어디를 가든 동일하다. 멀리 있는 별이나 은하의 스펙트럼을 찍어 보면 태양의 스펙트럼과 비슷할 뿐 아니라 지구에서 적절히 설계한 실험 상황에서 만들어 낸 스펙트럼과도 일치한다. - P590

610-2 에르난 코르테스는 아스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을 이렇게 서술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들 중 하나이다. 그들의 활동과 행동거지는 거의 스페인에서 볼 수 있는 수준으로 조직적이고 질서정연하다. 이들이 기독교를 모르고 다른 문명 국가들과 교류를 하지 못했음에 불구하고, 그들이 어떻게 이토록 훌륭한 것들을 지니게 됐는지 그저 놀랍기만 하다." - P610

612 아스텍 황제 목테주마는 보고를 듣고 공포의 충격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그들이 먹는다는 음식물의 정체도 황제에게는 수수께끼였지만, 롬바르드 대포의 위력에 대한 설명을 듣고서 그는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다. 스페인 장교의 명령이 떨어지자 탄환이 대포에서 천둥소리를 내면서 힘차게 날아갔다는 것이었다. 그 소리에 정신을 잃거나 까무러진 사람도 있다는 설명이었다. 대포 구멍에서 돌멩이 하나가 화염과 섬광을 내면서 튀어나와 멀리 날아갔다고 했다. 이때 뿜어져 나온 연기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면서 구역질이 나게 했다. 날아간 탄환에 맞은 산은 산산조각 나 깨져 버렸다. 나무는 톱밥으로 변해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목테주마 황제는 이 모든 설명을 듣고 나자 정신은 몽롱해지고 심장은 멈추는 듯했다. 그는 충격과 공포에 질려 버릴 수밖에 없었다. - P612

613-4 유럽에서 데려온 400명의 군인과 일부 토착 협조자로 구성된 침략군은 아스텍 인들의 미신과 유럽이 누리던 기술적 우위에 힘입어 인구가 100만이나 되던 고도의 문명 사회를 지구상에서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했다. 때는 1521년이었다. 아스텍 인들은 그때까지 말을 본 적이 없었다. 신대륙에는 말이라는 동물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아스텍 인들은 철 공예를 전쟁에 사용할 줄 몰랐으며, 아직 화약을 발명하기 전이었다. 아스텍과 스페인의 기술 격차는 기껏해야 수세기에 불과했지만, 그 차이는 아스텍 인들을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 P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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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종교에 대한 이들 세 가지 측면은 서로 매우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가장 먼저 우리는 이런 식으로 얘기할 수 있다. 도덕적 가치는 신의 말씀에서 비롯된다고. 신의 말씀이라고 하는 순간, 종교의 도덕적인 측면과 형이상학적 측면은 서로 연결된다. 이러한 사실은 영감을 불어넣어 주기도 하는데, 신의 뜻에 복종하고 신을 위해 봉사한다면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우주 전체와 연결돼 있으며 인간의 행동은 더 커다란 세계에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바로 이것이 감화적인 측면이다. 그러므로 이 세 측면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으며 쉽게 통합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과학이 처음 두 측면, 즉 종교의 형이상학적 측면과 도덕적 측면과 가끔 갈등을 일으킨다는 사실이다. - P63

64-8 나는 방금 종교의 도덕적 가치들이 과학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했다. 이제 그 말을 옹호하는 몇 가지 근거를 대야할 것 같은데,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그 반대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과학을 통해 도덕적 가치에 대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주장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결정적인 이유 하나를 찾지 못하는 경우에는 자질구레한 이유 여러 개라도 가지고 있어야 하니까! 그래서 내가 도덕적 가치가 과학의 범주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네 가지 이유를 여기서 밝히겠다.
첫째, 앞서 기술한 대로, 과거에 종교의 형이상학적 입장과 과학적 사실 사이에 갈등이 몇 차례 존재했지만, 종교의 형이상학적 입장이 변한 후에도 도덕적 관점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것은 그 둘이 독립적이라는 사실에 하나의 근거를 제공한다.
둘째로, 최소한 기독교적인 윤리를 실천하는 선한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믿지 않는 이들이 있다는 걸 지적하고 싶다. 아, 그런데 내가 종교에 대해 언급할 때 아주 편협한 관점을 취할 거라는 말을 미리 했어야 했는데 그걸 깜빡 잊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도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처럼 폭넓은 주제를 다룰 때에는 구체적인 예를 드는 편이 나을 것 같아 기독교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여러분이 무슬림이거나 불교도거나 혹은 여타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다면, 내 말을 그에 맞게 번역한 다음 어떤지 살펴보면 되겠다.
셋째는, 내가 아는 한, 과학적인 증거를 전부 모아도 황금률(마태복음 7:12, 누가복음 6:31 의 교훈, 흔히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로 요약됨: 옮긴이)이 옳은지 그른지에 관해 알려 주는 근거는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과학적 연구에 기초해서 어떤 문제에 대한 "도덕적 근거"를 제시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좀 철학적인 논거를 펼쳐 보려고 한다. 이건 내가 잘 못하는 것이긴 하지만, 과학과 도덕적 가치가 왜 이론상 서로 독립적인가에 대해 약간의 철학적 논증을 해 보고 싶다. 보통 인간이 살면서 겪게 되는 중요한 문제들은 대부분 "내가 이걸 해야 할까?"와 같은 문제이다. 행동에 대한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할까? 이걸 해야 할까?"와 같은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 편리하다. 하나는 "이걸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부분인데, 그것만으로는 그 행동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두 번째 부분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그건 바로 "자, 나는 이런 상황이 벌어지길 원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이걸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첫 번째 부분은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된다. 사실 이 문제는 전형적인 과학적 질문이다. 그렇다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정확히 알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결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과학은 아직 무척이나 초보적인 단계에 와 있다. 그렇지만 최소한 첫 번째 부분은 과학의 영역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문제를 다룰 방법을 가지고 있다. 바로 "시도해 보고 결과를 보라." 그리고 "정보를 수집해라." 등인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시간에 얘기를 했다. "만약 이걸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문제는 전형적인 과학적 질문인 반면, 그 다음 질문인 "나는 이 일이 일어나길 원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과학으로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음, 여러분은 만약 어떤 행동을 하면 모든 사람이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물론 난 그런 상황을 원하지 않아‘ 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이 죽는 것을 당신이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과학으로 밝혀낼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최종적인 판단은 결국 과학을 벗어나 당신의 몫이 된다.
다른 예를 들겠다. "이 경제 정책을 따른다면 불경기가 발생하게 될 걸 나는 알아. 물론 불경기가 발생하는 걸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나 또한 마찬가지이고." 라고 말할 수 있다. 잠깐만! 불경기가 발생할거란 사실을 안다고 해서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곧바로 결론에 도달할 순 없다.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국가가 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장기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가에 대한 믿음, 불경기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존재하더라도 그 희생에 비해 더 많은 것을 얻을수 있는지에 대한 고려, 내가 국가 경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자존감 등 여러 가지 측면을 함께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 하나의 경제 정책은 그로 인해 이득을 얻는 사람과 고통받는 사람을 함께 만들어 내기 마련이다. 그래서 결국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 총체적으로 고려해서 궁극적인 판단을 내려야만 한다. 어떤 현상이 발생할 것인지에 대한 논증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끝에 가선 "난 이걸 원해" 혹은 "아니, 그건 원하지 않아" 중 하나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 질문은 과학적인 질문과는 매우 다른 종류의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안다는 것만으로, 다시 말해 첫 번째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얻게 될 최종 결과들을 안다는 것만으로 결국 그것을 원하게 될지 아닐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과학적인 방법만으론 도덕적 가치문제에 대해 아무런 해답을 제시할 수 없다고, 그래서 그 둘은 서로 독립적이라고 믿는 것이다. - P64

68-9 이제 종교의 세 번째 특징인 감화적인 측면으로 관심을 돌려 보고 싶다. 이 문제에 대해선 나도 답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 모두에게 물어보려고 한다. 종교로부터 오는 의지력이나 안정감과 같이, 오늘날 우리를 감화시켜 주는 종교적 원동력들은 종교의 형이상학적 측면들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감화는 신을 위해 일하고 그의 의지에 순종하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표현되는 감정적인 유대감이나 당신이 무언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은 신의 존재에 대한 아주 작은 의심만으로도 약해질 수 있다. 따라서 신에 대한 믿음이 불확실해지면 때론 그런 감화를 얻는 데 실패하게 된다. 형이상학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종교적 입장보다는 과학적 입장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불의와 싸울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종교의 감화적 기능을 유지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문제다. 이것이 가능한지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여러분은 과학과 결코 모순되지 않는 방식으로 종교의 형이상학적 입장을 반영한 우주‘를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과학과 같이 모험적이며 미지의 세계를 향해 끝없이 발전하는 분야에서 미리 질문에 대한 정답을 정해 놓고, 오랜 시간이 흘러도(혹은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간에) 우리의 답들 중 일부가 틀렸다는 사실에 직면하지 않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따라서 형이상학적인 측면에 대해 종교가 절대적인 신뢰를 요구한다면, 과학과 갈등이 생기는 건 피할 수 없다. 종교 자체에 대한 의심에도 불구하고 감화를 주는 종교의 실제적 가치를 유지해 나간다는 것도 나는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이건 정말이지 심각한 문제이다. - P68

69-71 서구 문명은 두 가지 위대한 유산 위에 건설되었다. 하나는 과학적 정신으로서의 모험이다. 이는 진리를 향해 ‘미지의 세계‘ 를 탐험하는 모험이며 우주에 대해 답할 수 없는 미스터리들은 답하지 않은 채로 남겨두도록 요구하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의심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인간 지성에 대한 겸허함‘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듯 싶다. 다른위대한 유산은 기독교적 윤리인데, 여기에는 사랑의 실천, 모든 인류를 향한 형제애, 개인의 인간적 가치 등이 포함된다. 이는 ‘영적인 겸허함‘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두 유산은 논리적으로 완전하게 일관성을 가진다. 하지만 논리가 전부는 아니다. 어떤 생각을 좇으려면 마음이 따라가야 하니까. 사람들이 종교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들은 무엇을 향해 가는 걸까? 현대 교회는 신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는 장소인가? 더 나아가 신을 불신하는 사람에게도? 아니면 현대 교회는 그런 의심의 가치를 인정하고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안식을 주며 장려해 주는 곳인가? 서구 문명을 지탱해 온 두 거대한 유산이 서로 일관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우리는 그중 하나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힘과 안식을 다른 유산의 가치를 공격하는 데서 얻어 오지 않았던가? 이제는 이런 불행한 역사를 피할 순 없을까? 서구 문명의 두 기둥이 모두 생동력 있게, 서로에 대한 두려움 없이 함께 설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감화는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이 문제들에 대한 답은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오랫동안 인간의 도덕적 규범의 근원이었으며 그 규범을 따르도록 감화를 주었던 종교를 위해, 그리고 종교와 과학과의 관계를 위해, 내가 말할 수 있는 최선은 이 정도인 것 같다. - P69

71-2 늘 그래 왔듯이, 우리는 요즘도 국가 간의 충돌을 경험한다. 특히 소련과 미국이라는 두 강대국이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다(이 강연이 진행되던 1960년대는 미국과 소련이 심각한 냉전 상황에 놓여 있던 시절이었다: 옮긴이). 나는 우리가 도덕적 가치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사람들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다르다. 만약 우리가 서로 옳다고 믿는 것들이 실상 불확실한 것이라면 이 갈등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이 갈등은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일까? 시장 경쟁을 통한 자본주의와 정부의 규제를 통한 사회주의 중 어느 체제가 옳은가 하는 문제가 과연 확고하고 자명한 답을 가진 문제일까?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도 불확실하다는 경계를 유지해야 한다. 어쩌면 자본주의가 정부 규제를 통한 경제 관리보다 더 효율적이라는 데 거의 확신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정부 또한 규제를 하긴 한다. 엄밀히 말하면, 52퍼센트만큼 규제를 한다. 이 수치는 법인에 대한 소득세 규제를 근거로 말하는 것이다.
흔히 미국을 상징하는 한쪽에 종교, 소련을 표현하는 반대편에 무신론을 놓고, 이분적으로 갈라놓은 상태에서 논쟁을 벌인다. 하지만 서로 다른 두 개의 관점이 있을 뿐 올바른 결정을 내릴 기준은 없다. 인간과 국가는 어떤 가치를 안고 있는가, 국가를 위협하는 범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같은 문제들 역시 중요한 문제들이고 여러 해답들이 존재하겠지만 그들 역시 그저 불확실한 상태로 놓아둘 수밖에 없다. 실제로 갈등이 있긴 한 걸까? 아마도 통제적인 독재정부는 좀 더 혼란스런 민주주의 쪽으로, 또 혼란스런 민주주의는 좀 더 통제적인 독재정부 쪽을 향해 어느 정도 절충하며 진보하고 있는 것 같다. 불확실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자연히 갈등은 없어진다. 이 얼마나 좋은가! 하지만 나는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 믿지 않는다. 갈등은 항상 존재한다.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모든 개인적인 노력은 국가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소련이 말하는 바로 그 순간, 갈등의 위험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과 다양성, 심각한 사회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 새로운 관점에 대한 열린 태도 등 이 모든 소중한 것들이 바로 그 순간 소련이 국가적으로 제시한 해결책과 충돌하게 되기 때문이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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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6 자연은 유기체 기능의 90% 정도까지가 자동적 순환운동원리에 따라 최소의 에너지 소비로 가동될 수 있게 하였다. 그 덕택에 절약된 에너지의 최대량을 자연 스스로가 새로이 전진하는 길을 모색하는 데 쓸 수 있는 인간의 기능 중 나머지 10%의 기능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사실 자연의 유기체도 인간 사회와 마찬가지로 창조적인 소수 ‘성원‘과 비창조적인 다수 ‘성원‘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 P345

346-7 그런데 자연과 인간이 만든 기계의 승리를 신이 나서 찬미하면서도, 그 밖에 ‘기계 제품‘이라든지 ‘기계적 행동‘이라는 냉소적인 표현이 나돌고 있는 것은, 각각의 표현에 있어서 기계라는 말의 의미는, 위의 경우와 정반대로서 생명의 물질에 대한 승리가 아니고 정반대로 물질의 생명에 대한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 불안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기계는 인간의 노예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인간이 자기가 만든 기계의 노예가 되는 수도 있다. 90% 기계화되어 있는 산 유기체는 50%밖에 기계화되어 있지 않은 산 유기체보다도 창조성을 발휘하는 기회나 능력이 크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식사를 자신이 조리할 필요가 없으면 그 만큼 우주의 비밀을 발견하기 위한 시간과 기회가 많아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100% 기계화한 유기체는 벌써 로봇이다.
이처럼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서 기계화 수단인 모방 능력을 이용하는 가운데 파국의 위험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정적인 사회에서 환기되는 것보다 다이내믹한 운동을 하고 있는 사회에서 환기된 경우에 파국의 위험이 더 큰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모방의 약점은 그것이 밖으로부터의 시사에 대한 기계적인 반응이기 때문에, 행위자의 자발적 의사에 의해서는 결코 행해지지 않는 행위라는 점에 있다. 즉 모방에 의한 행위는 자기 결정에 의한 것은 아니다. 모방의 능력이 어떠한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을 현재 음지 상태에 있는 미개 사회의 습성 또는 관습의 형태이다. 그러나 ‘관습의 껍질‘이 깨어지면 그때까지 뒤를 향해 불변의 사회적 전통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장로나 조상에게로 향해졌던 모방 능력이 방향을 바꿔 동아리를 저 앞의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려 하고 있는 창조적 인격에게로 향해진다. 그와 동시에 성장하는 사회는 위험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위험은 항상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상태에 있다. 왜냐하면 성장 유지에 필요한 조건은 끊임없는 유연성과 자발성이지만, 이에 반해 성장의 전제 조건인 효과적인 모방에 필요한 조건은 상당 부분에 있어 기계적 자동성이기 때문이다. 월터 배저트가 그 나름의 경귀를 써서 영국인 독자를 향해 영국이 위대한 국가로 성공한 것은 그들이 ‘바보‘였던 덕분이라고 말했을 때, 이것은 그의 염두에 있었던 생각이었다. 영국인이 성공한 것은 지도자가 훌륭했기 때문인가? 그렇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온갖 사물을 자기 혼자 생각하고 결심을 했다고 가정하면 좋은 지도자는 좋은 추종자를 얻을 수가 없었을 것이리라. 그러나 전부가 ‘바보‘라면 도대체 누가 지도자가 된단 말인가? 사실 문명의 선두에 서서 모방의 기구를 이용하는 창조적 인격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양면에 걸쳐 실패의 위험을 안고 있다. - P346

347 그러나 보통 이 소극적인 실패로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지도자가 지도할 능력을 잃으면 그들이 가진 권력은 남용된다. 병졸은 반항하고 사관은 힘으로써 질서를 회복하려 든다. 하프를 잃어버렸거나 아니면 하프의 주법을 잊어버린 오르페우스는 이제 크세르크세스의 매를 휘두르며 주위 사방을 후려친다. 결과는 눈으로 볼 수 없는 대혼란으로 부대의 형태는 완전히 무너지고 수습할 수 없는 지리멸렬 상태에 빠진다. 이것은 적극적인 실패이다. 우리는 이때까지 재삼 그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 왔다.
즉 쇠퇴한 문명의 ‘해체‘가 바로 그것이며, 문명의 해체는 ‘지배적 소수자‘로 타락한 일단의 지도자로부터 ‘프롤레타리아의 이탈‘ 형태를 취해서 나타난다.
지도자로부터 추종자들이 떠나는 현상을 사회를 구성하는 상호간의 부분적 조화 상실로 보아도 좋다. 어떠한 전체에 있어서나 부분적으로나 상호간의 조화가 흔들리면, 그 대상 전체가 자기결정의 능력을 잃는다. 이 자기결정 능력의 상실이야말로 쇠퇴의 궁극적 판별 기준이다. 그리고 이 결론은 앞서 이 연구에서 도달한 자기결정 능력의 증대가 성장의 기준이라는 결론의 번복임을 알면 의외라 할 것도 없다. - P347

348-50 적응·혁명·사회악 / 서유럽 민주주의 -> 유교 사상 종언이 신속히 이루어져야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제도 사이의 부조화 중 한 가지 원천은 기존의 제도가 기존의 사회를 짊어질 수 없도록 새로운 사회적 세력ㅡ새로운 능력과 감정과 사상ㅡ이 도입되는 것이다. 이 새로운 것과 낡은 것과의 조화되지 않는 병치가 가져오는 파괴적인 결과는 예수의 가장 유명한 말 속에 지적되어 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며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태> 9:16-17)

이 비유의 근본적 본보기인 가정 경제에서는 물론 그 가르침을 문자대로 실행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는 포도주를 넣는 가죽 부대나 옷처럼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많은 인간이 활동하는 장소인 공통의 기반이기 때문에 인간이 합리적 계획에 의거하여 마음대로 생활을 정리하는 능려이 매우 제한된다.
물론 이상적으로는 새로운 역동적인 힘의 도입과 함께 현존하는 제도 전체가 개조되어야 함이 마땅하겠지만, 현재 성장하는 사회에서는 언제나 심히 시대착오적인 것이 재조정된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든 사람의 타성 작용 때문에 사회악이 날로 커가고 한편으로 사회 구조를 구성하는 대부분은 늘 부딪치는 새로운 세력과의 부조화가 더욱 더 커짐에도 불구하고 현상대로 머물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 때 새로운 세력은 동시에 두 개의 전혀 상반되는 방법으로 작용한다.
한편으로 새로운 힘은 스스로 설립한 새로운 제도나 자기 목적에 맞도록 개조한 낡은 제도를 통해 창조적인 일을 행한다. 그리고 그런 낡은 제도와 조화된 노선으로 흘러들어감으로써 사회의 복지를 증진시킨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들은 자기 길 위에 놓인 것이면 어떤 제도든 무차별하게 비집고 들어간다. 마치 기관실 안에 침입한 강력한 증기압이 거기 장치되어 있는 어떤 낡은 기관의 엔진을 움직여 돌아가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때 2개의 재액 중 어느 한 쪽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새로운 증기압이 낡은 기관을 산산조각으로 박살을 내거나, 아니면 기관이 이러저럭 견뎌 내면서 불안 상태로부터 파괴적인 새 방법으로 움직이기 시작하거나 둘 중 어느 하나다.
이상의 증기기관의 비유를 사회 생활에 적용시키면 새로운 압력에 견딜 수 없는 낡은 엔진의 폭발ㅡ또는 새 포도주의 발효에 견디지 못한 낡은 가죽 부대의 파열ㅡ에 해당하는 것은 가끔 시대착으의 제도를 습격하는 혁명이다. 한편 본래의 목적과 전혀 다른 움직임을 하는 동안의 긴장을 견딘 낡은 기관의 유해한 작용에 해당하는 것은 ‘끝까지 저항을 계속하는‘ 제도상의 아나크로니즘(시대착오)이 흔히 만들어 내는 범죄적 사회악이다.
혁명이란, 지연되었기 때문에 그만큼 격렬한 모방 행위로 정의할 수가 있다. 모방은 혁명의 본질적 요소이다. 모든 혁명이 이미 어딘가 다른 곳에서 일어난 사건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혁명을 그 역사적 배경 속에서 조사해 보면, 언제나 그 전에 작용한 외부의 힘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지 결코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님이 판명된다.
그 명백한 예는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다. 프랑스 혁명은 두 사건의 영향을 받아 일어났는데, 하나는 그 직전에 영국령 아메리카에서 일어난 사건ㅡ실로 자살적인 행위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구체제의 프랑스 정부는 이 사건을 지원했다ㅡ에서, 또 하나는 1세기 전에 영국이 이룩한 업적을 몽테스키외 이래 2세기에 걸친 프랑스의 ‘철학자들‘에 의해 통속화되고 찬미되어 끌어왔다.
지연 또한 마찬가지로 혁명에 본질적 요소이며, 그것에 의해 혁명의 가장 현저한 특징인 폭력적 성격이 설명된다. 혁명이 폭력적이 되는 것은 상당히 끈질긴 구제도가 한동안 새로운 생명의 표현을 방해하고 억누름으로써 낡은 제도의 수명이 끈질기게 연기되었기 때문이며, 낡은 제도에 눌려 있던 새 사회적 세력이 그만큼 강력하게 승리하였기 때문이다. 방해가 오래 계속되면 될 수록 출구가 막혀 있는 외형 압력은 커진다. 그리고 압력이 커짐에 따라 갇혀 있던 힘이 마침내 장해를 돌파할 때의 폭발이 맹렬해진다.
혁명 대신에 나타나는 사회악은 한 사회가 낡은 제도를 새로운 사회적 세력에 조화시켜야 할 모방의 행위를 지연시켰을 뿐 아니라, 좌절시켰을 때 사회가 입어야 하는 형벌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어느 사회에서 기존의 제도적 구조가 새로운 사회적 세력의 도전을 받았을 경우에, 기존 구조의 힘에 조화가 된 새로운 조정, 혁명(즉 지연된 부조화의 조정), 범죄적인 사회악이라는 세 가지 결과의 어느 한 가지가 일어날 것은 명백하다.
또한 세 가지 결과 중 각각 또는 그 모두가 동일한 사회의 다른 부분, 이를테면 그 사회가 민족 국가로 분절되어 있는 경우에 다른 민족 국가로서 실현되는 일이 있다는 것도 또한 명백하다. 조화된 조정이 우세하면 그 사회는 성장을 계속한다. 혁명이 우세하면 그 사회의 성장은 차차 위험해진다. 범죄적 사회악이 우세하면 쇠퇴기로 진단해도 무방하다. 방금 제기한 공식을 입증하는 몇 개의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 P348

352-4 민주주의와 산업주의가 전쟁에 끼친 영향
산업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노예 제도의 비참함이 증대된 것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참혹성이 증대됐다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전쟁은 노예 제도가 그러했던 것과 거의 같은 정도의 도덕적 이유로 널리 일반적으로 비난받는 또 하나의 오랜 시대착오적인 제도이다. 엄밀히 지적한 이유로 인해 전쟁은 또 다시 노예 제도와 마찬가지로 이익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수지 맞지 않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널리 퍼져 있다.
미국 남북 전쟁 직전에 H.R. 헬퍼라는 남부인이 「절박한 남부의 위기」라고 제목을 붙인 저서를 내서 노예 제도는 노예 소유자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지만, 상식을 벗어난 일인데도 쉽게 설명을 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 진정한 이익에 눈뜨려고 하는 계급의 비난을 받았다. 그것과 똑같이 1914~1918년까지의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노먼 엔젤(1933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 「유럽의 낙관적 착각」이라는 책에서 피력한 바로는, 전쟁이란 패자는 말할 것도 없고 승자에게도 전적으로 손해라는 것을 증명했지만, 평화 유지에 열렬했던 이 이단설의 저자는 마찬가지로 열렬한, 많은 독자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의 사회는 노예 제도의 폐지에는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는 순조로운 성과를 거둘 수가 없는가? 대답은 분명하다. 전쟁의 경우에는 노예 제도의 경우와 다른, 민주주의와 산업주의라는 2개의 추진력이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산업주의와 민주주의가 출현하기 직전의 서유럽 세계 상태를 회고하면, 그것은 18세기 중엽의 일이지만 당시 전쟁은 노예 제도와 거의 같은 상태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전쟁은 분명히 내리막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의 횟수가 줄었다는 것이 아니라ㅡ통계적으로 증명하려 하면 안 될 것도 없지만ㅡ이전보다 조심성 있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는 의미이다. 18세기 서유럽 합리주의자들은 전쟁이 종교적 파나티시즘(광신주의적 경향)에 쫓겨 무섭고 격렬했던 가까운 과거를 혐오감을 가지고 돌아보았다. 이 종교적 열광이라는 악마는 17세기 후반에 쫓겨났고, 그 직접적 효과로서 전쟁이라는 해악이 서유럽 사회 역사 그 이전, 또는 이후의 어느 시기에도 결코 악에 가까워진 일이 없을 만큼 최소한으로 억제되었다. 비교적 ‘개화된 시대‘도 18세기 말에 끝을 고하고, 전쟁은 민주주의와 산업주의의 영향으로 다시 한 번 가열되어 끝이 나 버렸다.
지난 150년 간에 걸친 격렬한 전쟁 끝에, 두 개의 힘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가 하고 물으면, 아마도 첫쨰로 산업주의 쪽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다. 지금 여기서 문제삼고 있는 의미에서, 최초의 근대전쟁은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시작된 일련의 전쟁이었으며 이들 전쟁에 가해진 산업주의의 힘은 보잘것없는 것이며 민주주의의 즉 프랑스 혁명적 민주주의가 가한 힘이 가장 컸다.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던 대륙 제국의 18세기적 구식 방비를 마치 칼로 버터를 자르듯 힘 안 들이고 돌파하여 유럽 전체에 프랑스 군을 진출시킨 것은 혁명적 광포로서, 나폴레옹의 군사적 천재라기 보다는 차라리 새로운 프랑스 군대의 혁명적 열광이었다. 만약에 이 주장을 지지하는 증거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경험이 없는 프랑스 소집 군대가, 나폴레옹 등장 이전의 루이 14세의 직업 군대가 해내지 못한 난사업을 해낸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또한 로마나 아시리아, 기타 옛날의 고도로 발달한 군국주의적 열강들이 기계화된 장비의 도움을 받지 않고, 소련 병사가 보아도 매우 유치하게 보이는 16세기의 화승총을 써서 문명을 파괴시켰던 일을 생각해도 좋다.
그 전후의 시대에 비해 그 잔학성의 정도가 적었던 근본적 이유는 전쟁이 종교적 광신주의 무기에서 벗어났으나 아직 민족주의적 광신주의에 의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과도기의 전쟁은 단순히 ‘왕들의 유희‘였다. 도덕적으로는 그러한 경박한 목적에 전쟁을 이용하는 것이 한층 더 고약한 일인지도 모르나 전쟁의 물적 참화를 경감하는 효과가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전쟁놀이를 하는 국왕들은 국민이 그들에게 허용하는 한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한도 내에서 수행하도록 유의하였다. 그들의 군대는 징병 제도에 의해 모아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종교 전쟁 떄의 군대처럼 점령한 나라를 황폐하게 하지도 않았고, 또한 20세기의 군대처럼 평화 시대에 만들어진 시설을 모조리 말살하는 따위의 일도 없었다. 그들은 군사적 게임의 규율을 지켰고 설정한 목적은 온당했으며, 패배한 적에게 재기 불능의 조건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드물지만 어쩌다 이러한 판례가 깨어진 경우ㅡ이를테면 루이 14세가 1674년과 1686년에 파르쯔 지방을 황폐화시킨 경우ㅡ 그러한 잔학 행위는 피해자 뿐 아니라 중립국의 여론으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에드워드 기번은 이러한 사건을 고전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유럽 제국의 무력이 행사되는 전쟁은, 적절한 승패가 결정적으로 정해지지 않을 때 일어난다. 세력의 균형 상태를 위한 동요는 앞으로도 역시 계속될 것이므로, 영국이나 이웃나라의 번영에 상승과 하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러한 부분적인 사건은 행복한 상태를 근본적으로 다치게 하지는 못한다. 유럽 인과 그 식민지 개척자들은 다른 종족보다 우수한 존재로 구별하는 예술·법률·풍속의 체계를 본질적으로 해칠 수는 없다."

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낙천적인 구절을 쓴 기번은 그 만년에 가서 그의 판단을 무색하게 만드는 새로운 전쟁이 연이어 일어남으로써 충격을 받았다.
마치 산업주의의 힘에 의해 노예 제도가 강화됨으로써 노예 제도 폐지 운동이 일어났듯이, 민주주의의 힘ㅡ뒤엔 물론 산업주의의 힘이 가해지지만ㅡ에 의한 전쟁의 격화는 반전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1914~18년의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뒤 이 운동 최초의 구체적 표현으로서 탄생한 국제연맹도 세계가 다시 1939~45년의 대전을 경험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거듭된 고난을 치루고 우리는 이제 겨우 단 하나 살아남은 어떤 강국이 완력으로 세계 국가를 수립하는 형태ㅡ그것은 너무 지겹고 또 너무 늦다ㅡ 대신에 협력적인 세계 정치 체제에 의해 전쟁을 폐지한다는 어려운 사업을 시험하는 새로운 기회를 얻었다. 우리가 우리의 세계에서 아직껏 다른 어떤 문명도 달성하지 못했던 이 일을 다행히 달성할 수 있을지는 신만이 아는 바이다. -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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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8-9 외계 행성에 사는 지적 생물의 생김새가 지구인을 닮았을 가능성은 거의 0이라고 나는 믿는다. 지구의 경우를 보건대 유전적 다양성은 일련의 우발적 사건들에 따라서 결정된다. 그뿐만 아니라 특정 유전자들의 선택 과정도 따지고 보면 우연성을 동반하는 환경적 요인들에 따라 좌우된다. 그렇다면 외계 행성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우발적 사건들과 그곳 환경을 지배하는 우연적 요인들이 어떻게 지구에서와 동일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내가 외계인과 지구인의 외형에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론적 근거이다. 형태는 비록 우리와 다를지라도 지적 생명 자체는 분명 외계에 존재할 것이다. 그들 역시 뉴런의 역할을 하는 일종의 스위치 소자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뉴런이 작동하는 원리는 우리의 뉴런과 다를 수 있다. 우리의 뉴런은 상온에서 작동하는 유기체로 돼 있지만 그들의 ‘뉴런‘은 아주 낮은 온도에서 작동하는 초전도 소자일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 그들은 우리보다 1000만 배나 더 빠른 속도로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외계인의 ‘뉴런‘은 물리적으로 서로 붙어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뉴런과 뉴런이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더라도 전파 신호를 통한 상호 교신이 가능하기 때문에, 지적 개체 하나가 여러 개의 유기체에 분산돼 존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멀리 떨어져 있는 자기 분신들이 전파 교신을 통해 서로를 연결하여 하나의 총체적 개체를 이루는 일이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지구상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이산적 존재를 가능케 하는 매체가 반드시 유기체일 필요도 없다. 심지어 행성 여러 개에 분산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총체적 지적 자아가 하나의 개체로 존재하고, 그 자아가 자기의 분신들을 사방에 흩어 놓는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이때 분신 하나하나는 총체적 자아와 전파를 이용하여 정보와 생각을 교환함으로써 총체성 유지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 P568

570 만약 우리가 그들과 접촉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 머릿속에는 우리에게 매우 흥미로운 지식과 정보가 많이 들어 있을 것이다. 반대의 상황도 상상할 수 있다. 내 생각에는 외계 생물들도 ㅡ비록 그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진화된 존재라고 하더라도ㅡ 우리에게 큰 흥미를 가질 것임에 틀림이 없다. 지구인들은 무엇을 알고 있고 어떻게 생각하고 그들의 두뇌는 어떤 구조이며 진화해 온 과정과 미래는 어떤 것일까 하고 그들 자신도 우리에 대하여 많은 것을 궁금해 할 것이다. - P570

577 결국 우리는 지구라는 특정 지역에서 일어난 물질 진화의 산물이다. 150억 년의 긴 세월을 거쳐 결국 물질은 의식을 갖추게 됐다. 그러나 의식의 산물인 지능은 인간에게 무서운 능력을 부여했다. 인간이 자기 파멸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를 갖춘 현명한 존재라고 아직은 확신할 수 없지만 많은 이들이 이러한 파국을 피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중이다. 우주적 시간 척도에서 볼 때 지극히 짧은 시간이겠지만 우리는 어서 지구를 모든 생명을 존중할 줄 아는 하나의 공동체로 바꿔야 한다. 그리하여 지구상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한편, 외계 문명과의 교신을 이룩함으로써 지구 문명도 은하 문명권의 어엿한 구성원이 돼야 할 것이다. - P577

581 별과 별 사이의 공간이 광막하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현재 이들의 항해 속도는 꿈 속의 달리기와 같이 한량없이 느린 편일 것이다. - P581

581 은하수 은하에는 지구보다 나이가 수백만 년 더 된 행성들이 틀림없이 많이 있을 것이다. 지구보다 심지어 수십억 년 이상 나이를 먹은 행성들도 상당수에 이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지구가 이 행성들에서 온 여행객의 방문을 받은 적이 전혀 없다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겠는가? 지구가 태어난 지 벌써 수십억 년이 지났다. 그동안 외계 문명권으로부터의 지구 방문이 단 한 건도 없었다고 믿기에는 지구의 나이 45억 년은 너무 길다. - P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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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그렇다면 막다른 골목이 아닌, 우리를 무한한 잠재력의 세계로 이끌 열린 통로는 과연 무엇일까? ‘이 모든 것들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존재의 신비에 대해 지금 우리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고대인들이 제시한 해답을 포함해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사실들을 종합해 봐도, 우리는 아직 그 대답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하지만 바로 이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열린 통로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런 마음 자세를 계속 유지한다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게 해줄 새로운 사상을 발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설령 우리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지금 알고 있지 않더라도 말이다. - P52

53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시대들을 떠올려 보면, 하나같이 사람들이 무엇인가에 대한 절대적인 신념과 지나친 독단주의에 빠져있을 때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인 나머지, 다른 사람들 또한 자신들과 같은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고는 그들의 믿음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명백히 모순되는 행동을 하곤 했다. - P53

53 지난번 강연에서도 언급했지만, 오늘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지난 역사 속에서 여러 번 경험했듯이 우리는 매우 무지하며 우리가 가진 모든 해답은 불확실하다는 사실이다. 이를 인정할 때 인류는 ‘이 모든 것들의 의미‘를 향해 계속 뻗어 나갈 수 있는 열린 통로를 만날 수 있게 된다. 나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올바른 도덕적 가치란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해 우리가 아직 그 해답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 P53

61 무신론자인 나와 과학자 동료들을 (모든 과학자들이 다 무신론자는 아니다) 신을 믿는 동료들과 비교해 봤을 때 특별히 다른 행동을 한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도덕적 감성과 타인에 대한 배려, 인간성과 같은 문제들은 종교인이나 비종교인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주가 운행되는 원리와 도덕적 가치관 사이에는 일종의 독립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 P61

61-2 실제로 과학은 종교와 관련이 깊은 사상이나 주장에 영향을 미치지만(우주 탄생의 기원이라든가 진화론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옮긴이), 종교의 도덕적 가치관에 대해서는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나는 믿는다. 종교는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고, 온갖 종류의 질문들에 친절히 답을 해 준다. 그중에서도 종교가 가지는 세 가지 측면을 특별히 강조하고 싶다.
첫째, 종교는 우리에게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과연 무엇이며 그것들이 어디서 왔는지, 또 인간은 어떤 존재이고 신은 누구인지, 신의 성격은 어떠한지 등에 대해 알려준다. 이것을 종교의 형이상학적 측면이라고 부르겠다.
두 번째로는, 종교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려 준다. 종교적인 의식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가치관에서 일반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 준다는 얘기다. 이를 종교의 도덕적인 측면이라고 부르겠다.
끝으로, 종교는 선한 행동을 하도록 감화inspiration시킨다. 사람들은 나약하다. 옳은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양심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 심지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종교의 감화가 필요하다. 종교의 가장 강력한 측면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감화적인 기능이다. 덧붙여 종교는 예술을 포함해 다른 많은 인간 활동에도 감화와 영감을 제공한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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