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100퍼센트 확실한 건 아닙니다. 제 경험입니다만, 글에서 본 작가와 실제로 본 작가의 모습이 아주 다른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대부분은 그렇지 않지만요. 한때 힘찬 저항시로 이름을 날렸던 어떤 시인이 실생활에서는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권위주의적으로 행동하더군요. 섬세하고 나긋한 서정시를 썼던 작가가 알고 보니 권력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속물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떤 작가는 평소에는 그렇지 않은데 유독 글을 쓸 때만 경건해지기도 했고, 환경이 바뀌면 행동 양식도 금세 따라 변하는 사람도 있었죠.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심리학자들은 사람에게 복수의 ‘페르소나(인격)’가 있다고 하더군요. 감정이 크게 흔들리면 이성이 힘을 쓰지 못한다고도 하고요. 인간이 원래 그런 존재랍니다. 그러니 자신이든 타인이든, 사람에 대해서 지나친 신뢰를 보내지는 않는 게 현명하겠지요. - P40

그런데 세상에는 시비와 선악과 미추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악한 사람, 추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도 많아요. 악하지 않은 사람이 악한 행동을 하기도 하고, 어리석지 않은 사람이 어리석은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미학적 도덕적 직관 또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영구히 또는 한시적으로 잃어버린다는 것이죠. 왜 그렇게 될까요? 욕망과 감정과 충동에 휘둘리기 때문입니다. 욕망과 감정과 충동은 선한 것만 있는 게 아니라 나쁜 것, 고약한 것도 많습니다. 탐욕, 두려움, 시기심과 같은 부정적 욕망과 감정, 충동이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압도하면 도덕적 미학적 직관은 힘을 쓰지 못합니다.
글 쓰는 사람을 위협하는 것이 욕망만은 아닙니다. 훌륭한 이상을 추구하는 종교와 사상도 조심해야 합니다. 이념과 종교의 교조가 도덕적 미학적 직관을 질식시키기도 하거든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역사 사례가 있습니다. 중세 교회가 자행한 마녀 사냥과 십자군전쟁, 유럽인들의 북아메리카 원주민 대학살, 히틀러의 홀로코스트, 스탈린의 독재와 대숙청, 크메르루즈의 킬링필드, 북한의 우상숭배와 3대 세습, 소위 이슬람국가(IS)의 민간인 참수와 같은 어리석음과 죄악의 배후에는 그것을 정당화한 지식인의 말과 글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말과 글로 만든 이념과 종교의 도그마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목 졸라 죽였기 때문에 그런 비극이 벌어진 겁니다. - P49

예술적으로 쓰고 싶다면 자유롭게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정해진 도그마보다 자기 자신의 눈과 생각, 마음과 감정을 믿는 게 현명합니다. 저에게 진보냐고 묻는 분들, 진보적 원칙을 글쓰기에 어떻게 반영하느냐고 묻는 분들게 솔직하게 대답하겠습니다. 저는 글을 쓸 때 그런 생각을 아예 하지 않습니다. 사실에 부합하는가? 문장이 정확한가? 논리에 결함이 없는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인가? 독자의 마음에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가? 그런 것만 살핍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하면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 근처까지라도 가져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말입니다.
예술은 자유를 먹고 피어납니다. 돈과 권력만 사람의 생각과 감각을 얽어매는 게 아닙니다. 고정관념과 이념의 교조에 생각과 감정이 묶이면 글이 진부해집니다. 빤한 글, 지루한 글, 첫 문장만 보아도 마지막 문장을 짐작할 수 있는 글을 쓰게 됩니다. 독창적인, 기발한, 창의적인, 흥미로운, 반전이 있는 글을 쓰지 못합니다. 진보냐 보수냐? 내 이념을 어떻게 글쓰기에 반영할까? 창의적인 글을 쓰고 싶다면 이런 헛된 질문을 털어 버리고 오로지 아름다운 것과 옳은 것만 생각하면서 글을 쓰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렇게 씁니다. - P60

인터뷰이가 말한 그대로 실었다고는 하지만, 제가 <프레시안> 편집자였다면 당사자의 양해를 구해서 표현을 살짝 고쳤을 겁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렇게 기사가 나갔습니다. 저는 변영주 감독의 발언 취지에 어느 정도 공감했습니다만 표현 방식은 그리 좋게 보지 않았어요. 책에 대한 비평이 아니라 저자에 대한 험담이 될 수 있는 말이니까요. 저는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쓰레기 같은 글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쓰레기라고 볼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쓴 사람을 쓰레기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글과 사람은 다르거든요. 저는 제가 인간쓰레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쓰레기 같은 말을 하거나 글을 쓴 적이 없다고 자신하지는 못합니다. - P68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입니다. 혼자 태어나고 혼자 죽는, 운명적인 단독자입니다. 단독자의 삶은 고독합니다. 어떤 말, 어떤 글, 어떤 행동으로도 둘 이상의 단독자가 서로를 완전하게 이해하면서 교감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홉 개의 악플을 흘려보낸 끝에 정상적인 댓글 하나를 찾고 좋아합니다. 알고 지내는 사람 열 가운데 단 하나라도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존중한다면 인생이 외롭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타인에 대한 기대 수준을 바닥으로 내리는 것을 현명한 처세술로 여깁니다. 그렇게 하면 악플에 상처받지 않습니다. 어마어마한 악플 세례를 받은 끝에 제가 발견한 정신승리법입니다. 저는 악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악플 때문에 자기 검열을 하지도 않습니다. 제 취향대로 글을 쓰고, 제 감정과 생각을 타인과 나누면서, 제 색깔대로 살아갑니다. ‘치열한 무플’로 악플의 파도와 싸우면서!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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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는 인간을 본능적으로 ‘우리’와 ‘그들’의 두 부류로 나눈다. 우리란 너와 나, 언어와 종교와 관습이 같은 사람들을 말한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책임을 지지만 그들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언제나 그들과 전혀 다르며, 그들에게 빚진 것은 전혀 없다. 우리는 그들 중 한 명이라도 우리 영토에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으며, 그들의 영토 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그들은 심지어 사람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수단의 딩카족(수단의 유목 부족) 언어에서 ‘딩카’는 그냥 ‘사람들’이란 뜻이다. 딩카가 아닌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딩카의 숙적은 누에르족이다. 누에르족 언어에서 누에르는 무슨 뜻일까? ‘원래의 사람들’이란 뜻이다. 수단 사막으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알래스카의 동토와 시베리아 북동부에는 유픽족이 살고 있다. 유픽어로 ‘유픽’이란 단어는 무슨 뜻일까? ‘진정한 사람들’이란 뜻이다. - P280

역사상의 선인과 악당
역사를 좋은 편과 나쁜 편으로 깔끔하게 나누고 모든 제국은 나쁜 편에 속한다고 분류하고픈 유혹이 들기는 한다. 어쨌든 거의 모든 제국은 유혈사태 위에 세워졌고 압제와 전쟁으로 권력을 유지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오늘날의 문화 대부분은 제국의 유산을 기초로 하고 있다. 제국이 정의상 나쁜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세상에는 인간의 문화에서 제국주의를 제거하고 죄에 더럽혀지지 않은 소위 순수하고 진정한 문명만을 남기자는 취지의 학파와 정치운동이 있다. 이런 이데올로기들은 잘해봐야 순진할 따름이고, 나쁜 경우에는 노골적인 민족주의와 편견을 가리려는 표리부동한 눈속임으로 기능한다. 어쩌면 역사의 여명에 출현했던 무수히 많은 문화들 중 일부 문화는 순수하고 죄에 물들지 않았으며 다른 사회에 의해 오염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야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여명기 이후에는 어떤 문화도 그런 주장을 합리적으로 펼칠 수 없었으며, 오늘날 존재하는 문화 중에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 인류의 모든 문화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제국과 제국주의 문명의 유산이며, 어떤 학술적, 정치적 외과수술을 한다 해도 환자를 죽이지 않고 제국의 유산만을 도려낼 수는 없다.
예컨대 오늘날 독립한 인도 공화국과 영국령 인도 제국 사이에 존재하는 애증관계를 생각해보라. 영국은 인도를 정복하고 점령하는 과정에서 인도인 수백만 명의 목숨을 희생시켰다. 식민 정부는 수억 명 이상의 인도인을 지속적으로 모욕하고 착취한 책임이 있다. 하지만 많은 인도인은 개종의 기쁨을 누리면서, 민족자결이나 인권 같은 서구의 개념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은 영국이 스스로 천명한 가치에 부합하도록 인도인들에게 영국인과 동등한 권리나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 데 대해 실망했다.
그럼에도 인도라는 현대 국가는 대영제국의 자식이다. 영국인들은 인도 아대륙의 거주자들을 살해하고 부상을 입히고 처형했지만, 왕국과 공국과 부족들이 서로 전쟁을 벌이며 혼란스럽게 뒤섞였던 것을 하나로 통일하여 공통의 민족의식을 가지고 어느 정도 하나의 정치 단위로 기능하는 국가를 창조해냈다. 영국인들은 인도 사법제도의 초석을 놓았으며, 행정부 구조를 창건했고, 경제적 통합에 극히 중요한 철도망을 건설했다. 독립 인도는 영국에서 구현된 형태의 서구식 민주주의를 정부 형태로 받아들였다. 영어는 아직도 공용어로 쓰여, 힌디어, 타밀어, 말라얄람어를 쓰는 사람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중립적 언어로서 쓰인다. 인도인들은 크리켓 경기를 매우 좋아하고 차를 열심히 마시는데, 둘 다 모두 영국의 유산이다. 상업적 차 재배는 19세기 중반까지 인도에 존재하지 않다가 영국 동인도회사에 의해 처음 도입되었다. 인도 전체에 차를 마시는 문화를 퍼뜨린 것은 젠체하는 영국인 사입(sahib, 과거 인도인이 신분 있는 유럽인을 불렀던 호칭)들이었다.
오늘날 인도인 중에서 민주주의, 영어, 철도망, 사법제도, 크리켓, 차가 제국주의의 유산이라며 여기서 벗어나자고 국민투표를 요구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서 국민투표를 요구하는 행위 자체가 그들이 옛 지배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 아닐까?
설령 우리가 더 이전에 존재했던 진정한 문화를 재건하고 지키려는 희망에서 잔인한 제국의 유산을 모조리 거부하더라도, 보나마나 그때 우리가 지키는 것은 그보다 오래되고 덜 야만적인 제국의 유산에 불과할 것이다. 영국의 식민지배로 인해 인도 문화가 불구가 되었다고 분개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굴 제국의 유산과 그들의 델리 점령을 신성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외래 무슬림 제국의 영향에서 ‘진정한 인도 문화’를 구하려고 시도하는 사람은 누구나 굽타 제국, 쿠샨 제국, 마우리아 제국의 유산을 신성시하는 셈이다. 만일 어떤 극단적 힌두 민족주의자가 있어서 뭄바이 기차역을 비롯해 영국 정복자가 남긴 모든 건물을 파괴한다면, 인도의 무슬림 정복자들이 남긴 타지마할 같은 구조물은 어떻게 할 것인가?
문화적 유산이라는 까다로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정말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떤 길을 택하든 그 첫걸음은 이 딜레마가 복잡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과거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해서 선인과 악당으로 나누는 것은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물론 우리가 보통 악당들의 뒤를 따른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려는 것이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겠지만. - P291

오늘날 종교는 흔히 차별과 의견충돌과 분열의 근원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실상 종교는 돈과 제국 다음으로 강력하게 인류를 통일시키는 매개체다. 모든 사회 질서와 위계는 상상의 산물이기 때문에 모두 취약하게 마련이다. 사회가 크면 클수록 더욱 그렇다. 종교가 역사에서 맡은 핵심적 역할은 늘 이처럼 취약한 구조에 초월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있었다. 종교는 우리의 법은 인간의 변덕의 결과가 아니라 절대적인 최고 권위자가 정해놓은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러면 최소한 몇몇 근본적인 법만큼은 도전받지 않을 수 있었으므로, 사회의 안정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종교는 ‘초인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의 규범과 가치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기준이 있다.

1. 종교는 인간의 변덕이나 계약의 산물이 아닌 초인적 질서가 있다고 여긴다. 프로 축구는 종교가 아니다. 수많은 규칙과 의식과 이따금 기묘한 의례가 있지만, 모두가 잘 알듯이 축구는 인간이 발명한 것이다. 국제축구연맹은 언제라도 골문의 크기를 늘리거나 오프사이드 규칙을 폐기할 수 있다.

2. 이런 초인적 질서를 기반으로, 종교는 스스로 구속력이 있다고 여기는 규범과 가치를 설정한다. 오늘날 많은 서구인이 유령이나 요정, 환생을 믿지만, 이런 믿음이 도덕과 행동의 기준의 원천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은 종교가 아니다.

종교는 광범위한 사회정치적 질서를 정당화할 능력이 있지만, 모든 종교가 그 잠재력을 작동시킨 것은 아니었다. 서로 다른 인간 집단들이 사는 광대한 영역을 자신의 기호 아래 묶어두려면, 종교에는 두 가지 초인적인 속성이 필요하다. 첫쨰, 언제 어디서나 진리인 보편적이고 초인적인 질서를 설파해야 한다. 둘쨰, 이 믿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라고 강력히 요구해야 한다. 달리 말해, 종교는 보편적이면서 선교적이어야 한다.
이슬람교나 불교처럼 역사상 가장 잘 알려진 종교는 보편적이고 선교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든 종교가 그렇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실상 대부분의 고대 종교는 지역적이고 배타적이었다. 신자들은 국지적 신과 영혼을 믿었으며, 인류 전체를 개종시키는 데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우리가 아는 한 보편적이고 선교적인 종교는 기원전 1000년에 와서야 비로소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출현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혁명의 하나였고, 보편적 제국과 보편적 화폐의 등장과 매우 비슷하게 인류의 통일에 크게 기여했다. - P298

하지만 위대한 신들의 등장으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양이나 악마가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의 지위였다. 애니미즘은 인간을 세상에 살고 있는 수많은 존재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한편 다신교는 세상이 신들과 인간의 관계를 반영한다는 시각을 점점 더 키워가기 시작했다. 우리의 기도와 희생과 죄업과 선행이 생태계 전체의 운명을 결정했다. 멍청한 사피엔스 몇 명이 신들을 노하게 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끔찍한 홍수가 닥쳐와 수십억 마리의 개미와 메뚜기, 거북, 영양, 기린, 코끼리를 쓸어버릴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다신교는 신들의 지위뿐 아니라 인간의 지위도 격상시켰다. 옛 애니미즘 체계에 속하던 다른 불운한 존재들은 지위를 잃고, 인간과 신의 관계라는 위대한 드라마에서 엑스트라나 말없는 장식물로 전락했다. - P303

선과 악의 싸움
다신교는 일신교만 낳은 것이 아니라 이신교도 낳았다. 이신교는 서로 반대되는 두 힘의 존재를, 즉 선과 악을 믿는다. 일신교와 달리 이신교에서 악은 독립적인 힘이다. 선한 신에 의해 창조된 것도 그 신에 종속된 것도 아니다. 이신교는 온 세상을 이들 두 힘의 전쟁터로 본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싸움의 일부라는 것이다.
이신교는 이른바 악의 문제에 간명한 해답을 주기 때문에 매우 매력적인 세계관이다. 이 유명한 문제는 인간의 사상에서 가장 근본적 관심사 중 하나다.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할까? 왜 고통이 존재할까?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일신론자들은 이런 물음에 대답하려면 지적인 곡에를 부려야만 했다. 전지전능하며 완벽하게 선한 하느님이 세상에 그토록 많은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널리 알려진 하나의 설명에 따르면, 이것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는 신의 방식이라고 했다. 악이 없다면 인간은 신과 악 사이에서 선택할 필요가 없으므로 자유의지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직관에 반하는 답으로서, 즉각 수많은 새로운 의문을 낳는다. 자유의지는 인간에게 악을 선택하도록 허락한다. 많은 사람이 실제로 악을 택하며, 일신교의 정통적 설명에 따르면 이런 선택은 반드시 신의 벌을 부른다. 그러나 만일 그 인물이 자유의지로써 악을 선택하고 그 결과로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신이 미리 알았따면, 신은 왜 그를 창조했을까? 신학자들은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책을 썼다. 이런 답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다고 보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튼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일신론자들이 악의 문제에 쩔쩔매고 있다는 것이다.
이신론자들에게는 악을 설명하기가 쉽다. 착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세상이 전지전능하고 완벽하게 선한 신에 의해서만 통치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독립된 악의 힘이 돌아다니고, 악의 힘은 나쁜 일을 저지른다.
이신론자들의 견해에는 나름의 단점이 있다. 악의 문제를 풀어주기는 하지만, 질서의 문제 앞에서 당황하게 한다. 만일 세상을 유일신이 창조했다면, 세상이 이토록 질서가 잘 잡히고 모든 것이 동일한 법칙을 따르는 현실이 분명하게 설명이 된다. 그러나 만일 세상에 두 대립되는 힘인 선과 악이 있다면, 둘 사이의 싸움을 관장하는 법칙을 정한 존재는 누구인가? 두 나라가 싸울 수 있는 것은 둘 다 똑같은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파키스탄에서 발사된 미사일이 인도의 목표물에 명중할 수 있는 것은 양국에서 동일한 물리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만일 선과 악이 싸운다면, 이들을 따르는 공통의 법칙은 무엇이며 그 법칙은 누가 정했는가?
요약하면, 일신론은 질서를 설명하지만 악 앞에서 쩔쩔맨다. 이신론은 악을 설명하지만 질서 앞에서 당황한다. 이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논리적 방법이 하나 있다. 온 우주를 창조한 전능한 유일신이 있는데 그 신이 악한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신앙을 가질 배짱이 있는 사람은 역사상 아무도 없었다.
이신교는 1천 년 이상 번성했다.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1000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조로아스터(자라투스트라)란 이름의 예언자가 중앙아시아의 어느 지역에서 활동했다. 그의 교리는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져 마침내 가장 중요한 이신교인 조로아스터교가 되었다. 그 신봉자들은 세상을 선신인 아후라 마즈다와 악신인 앙라마이뉴 사이의 우주적 싸움터로 보았다. 인간은 이 전쟁에서 선신을 도와야만 했다. 조로아스터교는 고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기원전 550~350)에서 중요한 종교였고, 나중에는 사산 제국(기원후 224~651)의 공식 종교가 되었다. 이후 중동과 중앙아시아에서 발흥한 거의 모든 종교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노시스파와 마니교 등 여러 이신교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마니교는 기원후 3~4세기 동안 중국에서 북아프리카로 퍼졌으며, 잠시나마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누르고 지배적인 종교가 될 것으로 예상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마니교도들은 로마의 영혼을 기독교도들에게 빼앗겼고,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한 사산 제국은 일신교를 믿는 무슬림들에게 무너졌다. 이렇게 해서 이신교의 파도는 잦아들었다. 오늘날 이신론을 믿는 공동체는 인도와 중동에 한 줌 정도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일신교의 물결이 정말로 이신교를 싹 쓸어낸 것은 아니다. 일신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이신교에서 수많은 신앙과 관례를 흡수했으며, 오늘날 우리가 ‘일신교’라고 부르는 것의 가장 기본적 사상 일부는 사실 그 기원이나 정신이 이신교적이다. 수없이 많은 기독교인, 무슬림, 유대교인이 강력한 악의 힘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기독교인이 악마로 부르는 것이 그런 존재다. 이 존재는 선한 신에 대항해 독자적으로 싸울 수 있고, 신의 허락 없이 파괴를 불러올 수 있다.
일신론자가 어떻게 그런 이신론적 신념을 품을 수 있을까(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것은 구약에서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다)?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전지전능한 유일신을 믿거나 둘 다 전능하지는 않은 서로 대립되는 힘을 믿거나 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모순을 믿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수백만 명의 경건한 기독교인, 무슬림, 유대교인이 전능한 신과 독립적인 악마를 둘 다 동시에 믿는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수없이 많은 기독교인, 무슬림, 유대교인은 심지어 선한 신이 악과 싸울 때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상상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런 상상은 여러 가지를 고취시켰는데 이 중에는 자하드와 십자군을 일으켜야 한다는 요구도 포함된다.
또 다른 이신교인 그노시스파와 마니교의 핵심 개념은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을 정확하게 구분한다. 이들 종교에 따르면 선신은 정신과 영혼을, 악신은 물질과 육체를 창조했고, 인간은 선한 영혼과 악한 육체의 전쟁터 역할을 한다. 일신교적 시각에서 보면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을 그렇게 정확히 구분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육체와 물질이 악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쨌든 만물은 동일한 선한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일신론자들은 악의 문제를 다루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이유에서 이신론자들의 이분법에 매혹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이 (선과 악의) 대립은 결국 기독교와 무슬림 사상의 초석이 되었다. 천국(선신의 영역)과 지옥(악신의 영역)에 대한 믿음 역시 그 기원은 이신론에 있었다. 구약에는 이런 믿음의 흔적조차 없다. 사람들의 영혼이 육체가 죽은 다음에도 계속 산다는 주장 또한 전혀 나오지 않는다.
사실 일신론은 역사에서 나타났듯이 일신론과 이신론, 다신론, 애니미즘 유산이 하나의 신성한 우산 밑에 뒤섞여 있는 만화경이다. 보통 기독교인은 일신론의 하느님만이 아니라 이신론적 악마, 다신론적 성자, 애니미즘적 유령을 모두 믿는다. 종교학자들은 이처럼 서로 다르고 심지어 상충하는 사상을 동시에 인정하는 행위와 각기 다른 원천에서 가져온 의례와 관례를 혼합하는 행위에 대한 명칭으로, ‘제설諸說혼합주의’를 썼다. 실제로 제설혼합주의야말로 단 하나의 위대한 세계 종교일지 모른다. -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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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이 호수의 바닥에 대해 갖가지 얘기가 있었고, 바닥이 없다는 얘기까지 나돌았는데 그런 소문 자체가 바닥이 없는 것이었다. - P349

만약 우리가 자연의 모든 법칙을 알고 있다면, 어느 한 지점에서의 모든 특수한 결과를 추론하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 사실 또는 실제 현상 한 가지에 관련된 기술만 알면 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불과 몇 가지 법칙밖에 알지 못하며, 따라서 우리의 추론 결과는 무효인 셈이다. 그것은 물론 자연의 혼란이나 불규칙성 때문이 아니라 계산에 필요한 인자를 모르기 때문이다. 법칙과 조화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대부분 우리가 밝혀낸 사례에 한정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얼핏 상충되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일치하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수한 법칙에서 우러나온 조화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경이로운 것이다. 특수한 법칙은 길을 가는 나그네의 눈에 매 걸음마다 산의 윤곽이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우리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이게 마련인데, 그것은 원래 절대적인 단 하나의 형태를 갖고 있으면서도 무한대의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혹 그 산을 쪼개거나 구멍을 뚫는다 해도 전체가 파악되지 않는 것이다. - P354

이 모래톱이 폭풍이나 조수나 해류에 의해 점차 높아지거나 또는 바다에 침전물이 있어서 차츰차츰 수면에 근접하게 되면, 처음엔 단순히 사상이 정박하고 있던 물가의 한 기질에 불과했던 것이 바다와 분리된 별개의 호수가 되면서 그 안에서 사상은 독자적인 조건을 확보하게 된다. 요컨대 해수에서 담수로 바뀐다거나 짠맛을 잃거나 사해 또는 늪으로 바뀌는 것이다. 한 개인이 인생의 장(場)에 발을 내디디게 될 때 그의 내면 어딘가에서 바로 그러한 모래톱이 수면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사실이지 우리는 너무도 서투른 항해사여서 우리의 사상 대부분은 종종 항구도 없는 해변에 얹히거나 시(詩)의 만에서 흘러나오는 밝은 불빛만을 보게 된거나 그렇지 않으면 공공의 항만 시설로 들어가서는 과학이라는 수리용 도크에 입소하여 이 세상에 적응하도록 수리를 받는데, 거기에는 하나하나의 개성을 도와 줄 자연의 조류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 P355

단 한 차례의 이슬비에도 풀빛은 한층 더 짙어진다. 마찬가지로 보다 나은 생각을 집어넣을 경우 우리의 전망도 더 밝아진다. 만일 우리가 언제나 현재에 살면서, 조그만 이슬 하나로부터 받은 감화까지도 고스란히 털어놓는 저 풀잎처럼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일들을 이용한다면, 그리고 과거의 기회를 무시한데 대한 보상을 의무로 여기고 거기에 송두리째 시간을 보내지만 않는다면 분명 축복을 받을 것이다. 온 세상에 이미 봄이 왔는데도 우리는 겨울 속에서 늑장을 부리는 셈이다. 상쾌한 봄날 아침에는 모두의 죄가 용서받는다. 이런 날은 악덕도 쉬는 것이다. 봄의 태양이 타오르는 동안에는 아무리 부도덕한 죄인이라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순수성을 회복함으로써 이웃의 순수성도 알아보게 된다. 어제만 해도 이웃을 도둑이나 주정뱅이, 호색가로 여기고는 그를 가엾이 여기거나 경멸하면서 세상에 대해 절망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최초의 봄날 아침 태양이 밝고 따스하게 빛나며 세상을 재창조할 때 평온하게 일에 몰두하고 있는 그와 마주치게 된 당신이, 그의 지치고 방탕에 물든 혈관이 고요한 기쁨으로 가득 차서 새날을 축복하고 있으며 갓난애 같은 순수함으로 봄의 감화를 흠씬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그의 모든 허물도 순식간에 잊을 수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선의의 분위기뿐만 아니라 갓 태어난 본능으로 맹목적으로 표현하려는 일종의 성스러운 기미마저 느낄 수 있다. 그리하여 잠시 동안 언덕의 남쪽 기슭에서는 어떤 저속한 농담도 들리지 않게 된다. 그의 비틀린 외양에서는 아주 어린 초목처럼 연하고 싱그럽고 순결하고 밝은 싹이 솟아나 새로운 한해의 삶을 시도하는 것도 엿볼 수 있다. 그런 인간까지도 자신의 하느님의 기쁨에 동참한 것이다. 어째서 교도관은 감옥 문을 활짝 열지 않는 걸까? 어쨰서 판사는 사건을 기각시키지 않는 걸까? 어째서 목회자는 신자들을 돌려보내지 않는 걸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하느님이 내린 지시에 따르지 않고 모두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 P382

"매일같이 평정하고 자비로운 아침의 숨결에서 나와 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덕을 사랑하고 악덕을 미워한다는 면에서 보다 근원적인 본성에 다가가게 하는데, 그것은 죽은 숲에서 새싹이 돋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루에 한 번씩 행하는 악은 다시 움트기 시작한 덕의 싹이 자라지 못하도록 망가뜨리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덕의 싹이 여러 번 자라지 못하게 되면 저녁의 자비로운 숨결로도 싹을 보존할 수 없다. 저녁의 숨결로 더 이상 싹을 보존할 수 없으면 곧 인간의 본성이 금수의 본성과 다를 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사람의 본성이 금수의 본성과 같다고 보고 그에게 원래 본유의 이성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것이 인간의 참되고 자연스러운 성정일까?" -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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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다져진 직업의 길을 선택하는 편이 가장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린 결코 젊지 않은 젊은이들……. 이들 모두가 대체로, 현재의 내 처지에서는 그다지 쓸 만한 일을 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아, 바로 거기에 난관이 있었다. 늙고 병든 사람들과 소심한 이들은 나이나 성별과 상관없이 질병과 불의의 사고와 죽음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그들에게 인생이란 위험으로 가득 찬 것이며(위험에 대해 노심초사하지 않는다면 무슨 위험이 있단 말인가?) 신중한 사람이라면 마을 의사 B박사가 즉각 달려올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장소를 선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P185

내게는 하등동물의 본능 같은 것이 분명 있다. 그러나 인정이 더 늘거나 지혜로워진 것도 아니면서도 해가 갈수록 점점 더 낚시를 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전혀 낚시를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만약 황야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다시 본격적인 낚시꾼이나 사냥꾼이 되고자 할 것임을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생선과 다른 모든 육식에는 본질적으로 불결한 면이 있다. 나는 집안일이 어디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 매일매일 말쑥하고 보기 좋은 모양을 갖추고 집 안에서 온갖 악취와 보기 흉한 물건들을 치우려는 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노고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깨닫기 시작했다.
나 자신이 요리를 제공받는 신사인 동시에 정육점 주인이며, 주방 일꾼이자 조리사였기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경험에서 나는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내 경우 육식에 대한 실질적인 반론은 그 불결함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물고기를 잡아서 창자를 빼내고 조리하여 먹었음에도 본질적인 면에서 허기를 채워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건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일이었으며 실제로 얻는 것에 비해 대가가 너무 컸다. 약간의 빵이나 감자 몇 알을 먹더라도 그 정도의 허기는 감출 수 있을 것이고 수고와 불결함은 훨씬 적을 것이다. 나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나는 오랫동안 육식이나 차, 커피 등을 그다지 즐겨 먹지 않았다. 그런 음식들에 무슨 해로운 영향이 있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내 상상력에 그다지 유쾌하게 작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육식에 대한 반감은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모든 면에서 검소한 삶과 식단이 보다 아름다워 보였으며, 비록 정말 그렇게 하지는 못했더라도 내 상상력을 만족시킬 정도는 노력했다. 보다 높은 정신 능력 또는 시적 능력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육식을 삼갈 뿐 아니라 어떤 종류의 음식이든 절제하려 할 것이다. 커비와 스펜스 같은 곤충학자의 다음 진술은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성충 상태에서 음식물 섭취 기관을 갖추고도 전혀 쓰지 않는 곤충들이 있다. 성충 상태의 거의 모든 곤충이 유충 때보다 훨씬 적은 음식을 섭취한다는 일반론을 도출할 수 있다. 식욕이 왕성한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고 게걸스러운 구더기가 파리가 되면" 꿀이나 다른 감미로운 음료 한두 방울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나비의 날개 아래쪽에 붙은 복부는 유충 때를 상징하고 있다. 이 복부 때문에 나비는 다른 종에게 먹힐 운명을 자초한다. 유충 상태의 인간 역시 대식가이다. 국민 전체가 그런 상태에 처한 경우도 있는데, 그들은 공상이나 상상력이 결여된 국민으로서, 그 방대한 복부가 그들의 실상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 - P263

어째서 상상력이 살코기나 지방분과 일치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은 불필요한 것일지 모른다. 나로서는 그런 불일치 자체에 만족할 뿐이다. 인간이 육식동물이라는 사실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까? 실제로 인간은 대부분 다른 동물들을 먹이로 삼음으로써 삶을 영위할 능력도 있고 또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로 딱한 일이다(토끼를 덫으로 잡거나 새끼양을 도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인간에게 보다 순결하고 위생적인 식사를 하도록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인류의 은인으로 간주될 것이다. 실제 경험이 어떻든 나는 인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육식을 버리게 될 운명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것은 미개인 부족이 보다 개화된 부족과의 접촉을 통해 서로 잡아먹는 일을 버리게 된 일만큼이나 확실하다.
만약 자신의 정신에서 나오는 극히 희미하면서도 끊임없는 참된 제안에 귀를 기울여 보면 그것이 자기를 어떤 극단으로, 아니 심지어 광기로까지 이끌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흐를수록 결의와 믿음이 쌓이게 되면서 자신의 길이 바로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건전한 사람이 생각하는 아주 미약하면서도 확고한 반론은 결국 인류의 주장과 관습도 이기게 될 것이다. 자신의 정신을 따르는 사람은 오도되지 않는다. 그 결과로 육체가 쇠약해진다 해도 후회할 만한 결과라고는 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보다 높은 원칙에 부합한 삶이기 때문이다. 만약 낮과 밤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게 된다면, 그리하여 삶이 꽃과 향기로운 풀처럼 방향을 내뿜고 보다 탄력있고 별처럼 빛나며 불멸의 것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성공한 것이다. 그때에는 모든 자연이 축복일 것이며 당신 또한 시시각각 자신을 축복할 이유가 생긴다. 가장 큰 이득과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는 일은 그만큼 드물다. 우리는 그런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의심을 품는다. 그리고는 이내 그것들을 잊어버린다. 그것들은 지고의 실체다. 아마도 가장 경이롭고 진실된 사실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결코 전해지지 않는 것 같다. 내가 일상생활에서 거두는 참된 수확물은 아침이나 저녁의 색조처럼 만져 볼 수도, 형언할 수도 없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내 손에 떨어진 별이며 내 손에 잡힌 무지개의 한 부분이다. - P265

우리는 평생을 놀라우리만큼 도덕적으로 지낸다. 덕과 악덕 사이에는 한시도 휴전이 없다. 선은 결코 손해 볼 수 없는 유일한 투자다. 온 세상에 울려퍼지는 하프의 음악에서 우리를 전율케 하는 것은 바로 선에 대한 집요한 추구다. 그 하프는 우주의 법칙을 권하며 돌아다니는 우주 보험사의 행상이며 우리가 행하는 약간의 선이 우리가 치른 유일한 보험금인 셈이다. 젊은이도 나이가 들면서 결국에는 냉담해지지만 우주의 법칙은 냉담해지는 법이 없고 영원토록 가장 예민한 사람의 편에 선다. 책망하는 산들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그 소리는 분명 있으니까.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는 가엾은 인간이다. 하프의 줄을 건드리거나 손을 멈출 때마다 언제나 우리는 그 매혹적인 도덕의 선율에 사로잡힌다. 지루하기 그지없는 소음도 멀리 떨어져서 들으면 우리의 천박한 삶을 풍자하는 당당하고도 감미로운 음악처럼 들릴 수 있다.
우리는 몸 속에, 우리의 보다 높은 본성이 잠들수록 깨어나는 짐승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그 짐승은 파충류 같고 관능적이며, 건강하게 살고 있는 우리의 몸 속에 들어 있는 기생충들이 그렇듯이 어쩌면 완전히 내쫓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 짐승으로부터 떨어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놈의 본성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놈은 나름대로 건강하며, 따라서 우리는 건강할 수는 있지만 순결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언젠가 하얗고 멀쩡한 이빨이 달린 돼지의 아래턱을 주웠는데, 그 뼈는 정신적인 것과 명확히 구분되는 동물적 건강과 힘이 존재함을 암시해 주었다. 이놈은 절제와 순결이 아닌 다른 방식에서 성공을 거둔 셈이다. 맹자는, "사람이 금수와 다른 점은 극히 하찮은 데 있다. 소인은 그것을 곧 잃고 말지만 군자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지닌다"고 했다.
우리가 순결에 이를 경우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그 누가 알 수 있을까? 내게 순결을 가르쳐 줄 정도로 현명한 이가 있다면 나는 당장이라도 그 사람을 찾아 나설 것이다. 베다에 의하면 "우리의 정열과 육체의 외적 감각을 다스리는 힘, 그리고 선행은 정신이 신에게 접근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라고 한다. 그런데 정신은 얼마 동안 육신의 모든 부분과 기능을 통제할 수 있고 외적으로 볼 때 더할 나위 없이 천박한 관능이라도 순결과 헌신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 생식력은 우리가 해이해져 있을 때에 우리를 방탕하고 불결하게 만들며 우리가 절제할 때는 기력과 영감을 북돋워 준다. 순결함은 인간의 꽃이다. 이른바 재능이나 영웅적 행위, 신성함 같은 것들도 순결의 밑에 맺히는 여러 가지 열매일 뿐이다. 순결의 수로가 열릴 때 비로소 인간은 곧장 신에게로 흘러가게 된다. 순결은 우리에게 영감을 주며 불순함은 우리를 파멸시킨다. 매일같이 내면의 짐승이 죽어가고 있으며 신성이 자리잡아 가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다. 자신과 굳게 맺어져 있는 열등하고 동물 같은 본성 때문에 수치를 느끼지 않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파우니나 사티로스 같은 신 혹은 반신이며 짐승과 결합된 신성이며 욕망의 동물이다. 요컨대 우리의 삶 자체가 우리에게는 치욕스러운 것이다.

"마음속에 자신의 짐승이 있을 곳을 마련해 주고
그 숲을 개척한 자는 얼마나 행복할까!
……
말이나 염소, 이리 등 모든 짐승을 마음대로 부리면서도
스스로 다른 모든 것의 나귀 노릇을 하지 않는 자는!
그렇지 못한 인간은 돼지 치는 자일 뿐 아니라
돼지들을 사납게 날뛰게 함으로써
그들을 더 못되게 만드는 악마나 다름없는 자다."

​ 모든 관능은 비록 갖가지 형태를 취하고 있더라도 실은 하나이며, 마찬가지로 모든 순결 역시 그러하다. 육욕이라는 면에서는 음식을 먹든 마시든 누구와 잠자리를 같이하든 잠을 자든 매한가지다. 이것들은 하나의 욕망이므로, 어떤 사람이 얼마나 육욕적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이들 중에서 하나만 보면 된다. 불순한 인간은 서나 앉으나 순결할 수가 없다. 그 파충류는 자기 굴의 한쪽 입구가 공격받으면 다른 쪽 입구로 모습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순결을 원한다면 절제해야 한다. 대체 순결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이 자신이 순결한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인간은 그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덕에 대해 듣기는 했지만 그 정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다. 그저 귀로 들은 소문에 따라 말할 뿐이다. 노력하는 데서 지혜와 순결이 나온다. 나태에서는 무지와 관능이 나올 뿐이다. 학생에게 있어서 관능이란 정신의 게으른 습관이다. 불순한 인간은 대체로 게으른 인간이며, 난롯가에 앉아 있는 인간, 해가 떴는데도 엎어져 있는 인간, 피곤하지 않은데도 쉬고 있는 인간이다. 불순함과 모든 죄악을 피하려면 마구간 청소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열심히 일하라. - P268

그러나 피리의 선율은 자신이 일하고 있는 곳과는 다른 천체로부터 울려오면서 그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어떤 기능들을 작동시키라고 제안했다. 그 선율은 부드럽게 그가 살고 있는 거리와 마을과 국가를 없애버렸다. 그때 누군가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어째서 찬란한 삶이 가능한데도 이곳에 머물며 그토록 뼈빠지게 일하며 살고 있는 거지? 저 별들은 여기만이 아닌 다른 들판 위에서도 반짝이고 있는데 말이야. - 하지만 어떻게 이곳을 벗어나 그쪽으로 자리를 옮긴단 말인가?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새로운 금욕 생활을 실천에 옮긴다는 것, 정신을 육체 속으로 내려보내 그 육체를 구원하며, 자신을 더욱 존중한다는 것뿐이었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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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종종 가장 감미롭고 다감하며 순수하고 힘을 북돋워 주는 교제를 자연 속의 대상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경험했는데, 그건 사람을 극도로 싫어하는 가엾은 사람이나 몹시 우울한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연 속에 살면서 평온한 감각을 유지하는 사람에게는 암담한 우울이란 있을 수 없다. 건강하고 순결한 이의 귀에는 폭풍도 이올리안의 음악 소리로 들리리라. 소박하고도 용기 있는 사람을 천박한 슬픔으로 몰아넣을 권리를 가진 것은 아무 데도 없다. 내가 계절과의 우정을 즐기는 동안 그 어떤 것도 삶을 짐스럽게 만들 수는 없으리라. 오늘 콩밭에 물을 주는 이슬비로 나는 집 안에 박혀 있었음에도 결코 따분하다거나 우울한 기분을 느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내게도 도움이 되었다. 비록 비 때문에 콩밭을 매지는 못했지만 그건 잡초를 뽑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다. 만일 비가 계속 내려서 땅에 묻은 씨앗이 썩고 저지대에 심은 감자를 버리게 된다 해도, 그 비는 고지대의 풀에는 유익하며 풀에 유익하다면 내게도 좋은 것이리라. - P158

사람들은 종종 내게, "그곳에서 외로우시겠군요. 특히 눈이나 비가 오는 날과 밤이면 사람이 가까이 있었으면 하실 테죠?" 하고 말하곤 한다. 그럴 때면 이렇게 대답해 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ㅡ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라는 것도 알고 보면 우주 속의 점 하나일 뿐이오. 우리가 가진 도구로는 도무지 폭을 알 길 없는 저 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주민이 서로 얼마나 멀리 떨어져서 살고 있는 것 같소? 그러니 어째서 내가 외롭다고 느껴야 하오? 우리 행성이 은하수에 있기라도 하단 말이오? 당신이 방금 던진 질문은 내가 보기엔 그다지 중요한 질문 같지 않구려. 사람을 동료로부터 고립시킴으로써 외롭게 만드는 건 대체 어떤 공간이겠소? 나는 아무리 두 다리로 애를 써봤자 두 마음이 서로 더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오. 우리가 가장 가까이 살고 싶어하는 것이 뭐겠소? 분명 많은 사람들 곁은 아닐 거요. 역이나 우체국, 술집, 공회당, 학교, 식품점, 그리고 사람들이 몰려드는 비콘 힐이나 파이브 포인츠 같은 곳도 아닐 것이오. 그보다는 버드나무가 물가에 서서 그쪽으로 뿌리를 뻗듯이 모든 경험에서 볼 때 생명을 분출하는 영구적인 원천 가까이에 있고 싶어할 거요. 그곳이 어디인가는 각자의 본성에 따라 다를 테지만,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곳에다 자신의 지하광을 팔 거요……. - P161

나는 보다 많은 시간을 혼자 지내는 일이 유익함을 알고 있다. 아무리 좋은 상대라도 함께 있으면 이내 싫증이 나고 좋아하는 감정도 식게 마련이다. 나는 홀로 있기를 좋아한다. 고독만큼 상대하기 좋은 친구를 보지 못했다. 우리는 대부분 방에 박혀 있을 때보다 밖에 나가 사람들과 섞일 때 훨씬 더 외로움을 느낀다. 생각하거나 일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든 늘 혼자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고독은 두 사람 사이의 거리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다. 하버드 대학의 북적거리는 교실에서라도 정말로 공부에 전념하는 학생이라면 사막의 탁발승만큼이나 격리된 셈이다. 농부는 하루 종일 혼자서 들이나 숲에서 김을 매거나 나무를 베며 지내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데 그것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밤이 되어 집에 돌아온 농부는 방 안에 혼자 앉아 생각에 잠기지 못하고, ‘사람들을 볼’ 수 있고 기분전환을 할 만한 곳으로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온종일 혼자 지낸 데 대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농부는 학생이 어떻게 밤이든 낮이든 집에 혼자 있으면서 권태와 우울증에 빠지지 않는 건지 의아해한다. 농부는 학생이 집 안에 있더라도 농부가 그렇듯 자신의 밭에서 일을 하고 자신의 숲에서 나무를 베고 있는 것임을, 그리고 비록 좀더 응결된 형태이긴 해도 역시 농부처럼 기분전환과 교제를 원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 P163

그의 내면에는 아주 작은 것이긴 해도 어떤 긍정적인 창의성이 엿보였으니, 나는 종종 그가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자기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는 것을 관찰 끝에 알아냈다. 그런 현상은 아주 희귀한 것이어서 그것을 관찰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 10마일을 걸을 용의가 있다. 그의 경우는 갖가지 사회제도를 재창조하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종종 주저하며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표현하지는 못했으나 그는 언제나 배후에 그럴싸한 사상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고라는 것이 너무도 원시적이고 동물적인 삶에 묻혀 있어서, 비록 한낱 학식만 갖춘 인산의 사고보다 더 유망한 것이긴 해도 다른 사람에게 발표할 만큼 성숙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는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신분에 평생 무식한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더라도 인생의 최하층에 비범한 인물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만의 생각을 갖고 있거나, 또는 전혀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들의 생각은 비록 어둡고 탁할지 몰라도 월든 호수만큼이나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이다. - P182

어느 날, 온순하고 지능이 모자라는 한 빈민이 나를 찾아왔는데, 나는 종종 그가 들판에서 소 떼와 그 자신이 길을 잃지 않도록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서 있거나 통에 앉은 채 울타리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는 내게 자기도 나처럼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겸손이라는 것을 훨씬 능가하거나 아니면 한참 미달하는 극도의 단순성과 진실성을 가지고 내게 말하기를, 자신은 "지능에 결함이 있다"고 했다. 그건 그가 쓴 표현이었다. 하느님이 원래 자신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지만, 그래도 하느님은 남들만큼 자신을 걱정해 준다고도 했다. 그리곤 이렇게 말했다. "전 언제나 그랬답니다. 어렸을 때부터 말이에요. 한 번도 정신이 온전한 적이 없었어요. 다른 아이들 같지 않았죠. 전 머리에 문제가 있어요. 그건 하느님의 뜻일 테죠." 그리곤 자기 말이 맞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듯이 보였다. 그는 내겐 몹시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다. 나는 이처럼 유망한 바탕을 지닌 사람을 거의 만난 적이 없었다. 그가 한 모든 말은 너무나 소박하고 진지하고 진실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스스로를 낮춘 그 비율만큼이나 고귀해 보였다. 나는 처음엔 몰랐지만, 그것이야말로 현명한 처신에서 우러난 결과였다. 지능이 떨어지는 이 가엾은 친구가 마련해준 진실과 정직을 기반으로 하면 우리의 교제도 현자들 간의 교제보다 훨씬 더 나은 것으로 발전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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