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다져진 직업의 길을 선택하는 편이 가장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린 결코 젊지 않은 젊은이들……. 이들 모두가 대체로, 현재의 내 처지에서는 그다지 쓸 만한 일을 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아, 바로 거기에 난관이 있었다. 늙고 병든 사람들과 소심한 이들은 나이나 성별과 상관없이 질병과 불의의 사고와 죽음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그들에게 인생이란 위험으로 가득 찬 것이며(위험에 대해 노심초사하지 않는다면 무슨 위험이 있단 말인가?) 신중한 사람이라면 마을 의사 B박사가 즉각 달려올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장소를 선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P185

내게는 하등동물의 본능 같은 것이 분명 있다. 그러나 인정이 더 늘거나 지혜로워진 것도 아니면서도 해가 갈수록 점점 더 낚시를 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전혀 낚시를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만약 황야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다시 본격적인 낚시꾼이나 사냥꾼이 되고자 할 것임을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생선과 다른 모든 육식에는 본질적으로 불결한 면이 있다. 나는 집안일이 어디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 매일매일 말쑥하고 보기 좋은 모양을 갖추고 집 안에서 온갖 악취와 보기 흉한 물건들을 치우려는 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노고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깨닫기 시작했다.
나 자신이 요리를 제공받는 신사인 동시에 정육점 주인이며, 주방 일꾼이자 조리사였기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경험에서 나는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내 경우 육식에 대한 실질적인 반론은 그 불결함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물고기를 잡아서 창자를 빼내고 조리하여 먹었음에도 본질적인 면에서 허기를 채워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건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일이었으며 실제로 얻는 것에 비해 대가가 너무 컸다. 약간의 빵이나 감자 몇 알을 먹더라도 그 정도의 허기는 감출 수 있을 것이고 수고와 불결함은 훨씬 적을 것이다. 나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나는 오랫동안 육식이나 차, 커피 등을 그다지 즐겨 먹지 않았다. 그런 음식들에 무슨 해로운 영향이 있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내 상상력에 그다지 유쾌하게 작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육식에 대한 반감은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모든 면에서 검소한 삶과 식단이 보다 아름다워 보였으며, 비록 정말 그렇게 하지는 못했더라도 내 상상력을 만족시킬 정도는 노력했다. 보다 높은 정신 능력 또는 시적 능력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육식을 삼갈 뿐 아니라 어떤 종류의 음식이든 절제하려 할 것이다. 커비와 스펜스 같은 곤충학자의 다음 진술은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성충 상태에서 음식물 섭취 기관을 갖추고도 전혀 쓰지 않는 곤충들이 있다. 성충 상태의 거의 모든 곤충이 유충 때보다 훨씬 적은 음식을 섭취한다는 일반론을 도출할 수 있다. 식욕이 왕성한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고 게걸스러운 구더기가 파리가 되면" 꿀이나 다른 감미로운 음료 한두 방울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나비의 날개 아래쪽에 붙은 복부는 유충 때를 상징하고 있다. 이 복부 때문에 나비는 다른 종에게 먹힐 운명을 자초한다. 유충 상태의 인간 역시 대식가이다. 국민 전체가 그런 상태에 처한 경우도 있는데, 그들은 공상이나 상상력이 결여된 국민으로서, 그 방대한 복부가 그들의 실상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 - P263

어째서 상상력이 살코기나 지방분과 일치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은 불필요한 것일지 모른다. 나로서는 그런 불일치 자체에 만족할 뿐이다. 인간이 육식동물이라는 사실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까? 실제로 인간은 대부분 다른 동물들을 먹이로 삼음으로써 삶을 영위할 능력도 있고 또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로 딱한 일이다(토끼를 덫으로 잡거나 새끼양을 도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인간에게 보다 순결하고 위생적인 식사를 하도록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인류의 은인으로 간주될 것이다. 실제 경험이 어떻든 나는 인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육식을 버리게 될 운명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것은 미개인 부족이 보다 개화된 부족과의 접촉을 통해 서로 잡아먹는 일을 버리게 된 일만큼이나 확실하다.
만약 자신의 정신에서 나오는 극히 희미하면서도 끊임없는 참된 제안에 귀를 기울여 보면 그것이 자기를 어떤 극단으로, 아니 심지어 광기로까지 이끌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흐를수록 결의와 믿음이 쌓이게 되면서 자신의 길이 바로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건전한 사람이 생각하는 아주 미약하면서도 확고한 반론은 결국 인류의 주장과 관습도 이기게 될 것이다. 자신의 정신을 따르는 사람은 오도되지 않는다. 그 결과로 육체가 쇠약해진다 해도 후회할 만한 결과라고는 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보다 높은 원칙에 부합한 삶이기 때문이다. 만약 낮과 밤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게 된다면, 그리하여 삶이 꽃과 향기로운 풀처럼 방향을 내뿜고 보다 탄력있고 별처럼 빛나며 불멸의 것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성공한 것이다. 그때에는 모든 자연이 축복일 것이며 당신 또한 시시각각 자신을 축복할 이유가 생긴다. 가장 큰 이득과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는 일은 그만큼 드물다. 우리는 그런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의심을 품는다. 그리고는 이내 그것들을 잊어버린다. 그것들은 지고의 실체다. 아마도 가장 경이롭고 진실된 사실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결코 전해지지 않는 것 같다. 내가 일상생활에서 거두는 참된 수확물은 아침이나 저녁의 색조처럼 만져 볼 수도, 형언할 수도 없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내 손에 떨어진 별이며 내 손에 잡힌 무지개의 한 부분이다. - P265

우리는 평생을 놀라우리만큼 도덕적으로 지낸다. 덕과 악덕 사이에는 한시도 휴전이 없다. 선은 결코 손해 볼 수 없는 유일한 투자다. 온 세상에 울려퍼지는 하프의 음악에서 우리를 전율케 하는 것은 바로 선에 대한 집요한 추구다. 그 하프는 우주의 법칙을 권하며 돌아다니는 우주 보험사의 행상이며 우리가 행하는 약간의 선이 우리가 치른 유일한 보험금인 셈이다. 젊은이도 나이가 들면서 결국에는 냉담해지지만 우주의 법칙은 냉담해지는 법이 없고 영원토록 가장 예민한 사람의 편에 선다. 책망하는 산들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그 소리는 분명 있으니까.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는 가엾은 인간이다. 하프의 줄을 건드리거나 손을 멈출 때마다 언제나 우리는 그 매혹적인 도덕의 선율에 사로잡힌다. 지루하기 그지없는 소음도 멀리 떨어져서 들으면 우리의 천박한 삶을 풍자하는 당당하고도 감미로운 음악처럼 들릴 수 있다.
우리는 몸 속에, 우리의 보다 높은 본성이 잠들수록 깨어나는 짐승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그 짐승은 파충류 같고 관능적이며, 건강하게 살고 있는 우리의 몸 속에 들어 있는 기생충들이 그렇듯이 어쩌면 완전히 내쫓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 짐승으로부터 떨어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놈의 본성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놈은 나름대로 건강하며, 따라서 우리는 건강할 수는 있지만 순결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언젠가 하얗고 멀쩡한 이빨이 달린 돼지의 아래턱을 주웠는데, 그 뼈는 정신적인 것과 명확히 구분되는 동물적 건강과 힘이 존재함을 암시해 주었다. 이놈은 절제와 순결이 아닌 다른 방식에서 성공을 거둔 셈이다. 맹자는, "사람이 금수와 다른 점은 극히 하찮은 데 있다. 소인은 그것을 곧 잃고 말지만 군자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지닌다"고 했다.
우리가 순결에 이를 경우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그 누가 알 수 있을까? 내게 순결을 가르쳐 줄 정도로 현명한 이가 있다면 나는 당장이라도 그 사람을 찾아 나설 것이다. 베다에 의하면 "우리의 정열과 육체의 외적 감각을 다스리는 힘, 그리고 선행은 정신이 신에게 접근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라고 한다. 그런데 정신은 얼마 동안 육신의 모든 부분과 기능을 통제할 수 있고 외적으로 볼 때 더할 나위 없이 천박한 관능이라도 순결과 헌신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 생식력은 우리가 해이해져 있을 때에 우리를 방탕하고 불결하게 만들며 우리가 절제할 때는 기력과 영감을 북돋워 준다. 순결함은 인간의 꽃이다. 이른바 재능이나 영웅적 행위, 신성함 같은 것들도 순결의 밑에 맺히는 여러 가지 열매일 뿐이다. 순결의 수로가 열릴 때 비로소 인간은 곧장 신에게로 흘러가게 된다. 순결은 우리에게 영감을 주며 불순함은 우리를 파멸시킨다. 매일같이 내면의 짐승이 죽어가고 있으며 신성이 자리잡아 가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다. 자신과 굳게 맺어져 있는 열등하고 동물 같은 본성 때문에 수치를 느끼지 않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파우니나 사티로스 같은 신 혹은 반신이며 짐승과 결합된 신성이며 욕망의 동물이다. 요컨대 우리의 삶 자체가 우리에게는 치욕스러운 것이다.

"마음속에 자신의 짐승이 있을 곳을 마련해 주고
그 숲을 개척한 자는 얼마나 행복할까!
……
말이나 염소, 이리 등 모든 짐승을 마음대로 부리면서도
스스로 다른 모든 것의 나귀 노릇을 하지 않는 자는!
그렇지 못한 인간은 돼지 치는 자일 뿐 아니라
돼지들을 사납게 날뛰게 함으로써
그들을 더 못되게 만드는 악마나 다름없는 자다."

​ 모든 관능은 비록 갖가지 형태를 취하고 있더라도 실은 하나이며, 마찬가지로 모든 순결 역시 그러하다. 육욕이라는 면에서는 음식을 먹든 마시든 누구와 잠자리를 같이하든 잠을 자든 매한가지다. 이것들은 하나의 욕망이므로, 어떤 사람이 얼마나 육욕적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이들 중에서 하나만 보면 된다. 불순한 인간은 서나 앉으나 순결할 수가 없다. 그 파충류는 자기 굴의 한쪽 입구가 공격받으면 다른 쪽 입구로 모습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순결을 원한다면 절제해야 한다. 대체 순결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이 자신이 순결한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인간은 그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덕에 대해 듣기는 했지만 그 정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다. 그저 귀로 들은 소문에 따라 말할 뿐이다. 노력하는 데서 지혜와 순결이 나온다. 나태에서는 무지와 관능이 나올 뿐이다. 학생에게 있어서 관능이란 정신의 게으른 습관이다. 불순한 인간은 대체로 게으른 인간이며, 난롯가에 앉아 있는 인간, 해가 떴는데도 엎어져 있는 인간, 피곤하지 않은데도 쉬고 있는 인간이다. 불순함과 모든 죄악을 피하려면 마구간 청소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열심히 일하라. - P268

그러나 피리의 선율은 자신이 일하고 있는 곳과는 다른 천체로부터 울려오면서 그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어떤 기능들을 작동시키라고 제안했다. 그 선율은 부드럽게 그가 살고 있는 거리와 마을과 국가를 없애버렸다. 그때 누군가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어째서 찬란한 삶이 가능한데도 이곳에 머물며 그토록 뼈빠지게 일하며 살고 있는 거지? 저 별들은 여기만이 아닌 다른 들판 위에서도 반짝이고 있는데 말이야. - 하지만 어떻게 이곳을 벗어나 그쪽으로 자리를 옮긴단 말인가?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새로운 금욕 생활을 실천에 옮긴다는 것, 정신을 육체 속으로 내려보내 그 육체를 구원하며, 자신을 더욱 존중한다는 것뿐이었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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