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자 매슈 리버먼은 페스팅거의 실험을 동아시아인들에게 했을 때 아시아인이 미국인보다 합리화를 훨씬 적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시아인들은 모순을 받아들이는 문화적 환경 속에서 컸기 때문으로 분석되었다.
어떤 식으로든 흡연을 정당화하려는 흡연자는 자신의 인지 부조화를 줄이기 위해 4가지 자기암시 수법을 쓴다. 첫째, 매우 즐기기 때문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 둘째, 유전자가 좋아 나는 괜찮을 것이다. 셋째, 인생을 살면서 모든 위험을 다 피해가면서 살 수는 없는 법이다. 넷째, 금연하면 체중이 늘거나 스트레스가 심해져 건강에 오히려 좋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왜 사람마다 인지 부조화에 대응하는 방식이 다른가? 왜 어떤 사람은 전혀 다른 사태가 벌어졌을 때 이성적으로 발을 빼는데, 어떤 사람은 계속 매달리는가? 페스팅거의 제자인 심리학자 엘리엇 애런슨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저는 정직한 성찰을 통해 부조화 문제에 대응하는 사람은 성격이 원만하고 높은 자기 존중감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반대로 아주 낮은 자기 존중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투자한 것이 별것 아니라 여기고 스스로 바보라고 생각하는 거죠."
이 설명에 따른다면, 광신도들은 아주 높은 자기 존중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자신이 투자한 것이 별것 아니라 여기고 스스로 바보라고 생각하는 걸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씻을 수 없는 모욕이 된다.
정도의 차이일 뿐 우리 사회에는 심리적 부조화를 줄이기 위해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다. 누구든 자신은 예외일 거라고 믿고 싶겠지만, 예외는 없다. 단지 자신의 인지 부조화를 줄이려는 분야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 P65

69, 71 해병대 출신의 엄청난 자부심도 그들이 받은 혹독한 훈련에서 비롯된다. 해병은 전원이 지원병인데, 3.5~5 대 1의 지원율은 보통이고 학기 말, 학기 초엔 10 대 1까지 치솟는다. 합격자의 47퍼센트가 두 번 이상 지원자다. 게다가 아무나 해병대 훈련을 통과할 수 없다는 믿음은 "우리는 다르다"는 엘리트 의식을 낳고, 이게 기반이 되어 전역 후에도 끈끈한 전우애를 유지한다. 해병대 출신들의 유난스러운 단결력에 대해 한양대학교 교수 정기인은 "엄청난 기합과 지옥 훈련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스스로 엘리트 의식을 가지며, 이러한 의식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타 집단이 이해할 수 없는 고도의 동질감이 형성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처럼 자신이 큰 고생을 했거나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은 일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하는 심리적 현상을 ‘노력 정당화 효과‘라고 한다. 그 심리적 메커니즘은 앞에서 살펴본 ‘인지 부조화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게 어떻게 해서 얻은 자격인데……" 하는 생각이 자신의 소속 집단에 대한 과대평가는 물론 집착에 가까운 애정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중략)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간혹 과도한 탐욕과 오만의 포로가 되는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내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라는 생각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서비스를 하는 감정 노동자들에게 폭력이나 폭언을 하는 스캔들이 자주 일어나는 것도 그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 P69

여러 연구 결과, 소비자는 조립 등과 같은 참여를 통해 자기 취향과 의지를 많이 반영해 만든 제품을 더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를 가리켜 ‘이케아 효과‘라고 한다. 앞에서 살펴 본 ‘노력 정당화 효과‘의 일종이다.
이와 관련, ‘이케아 효과‘라는 말을 만든 듀크대학 행동경제학자 댄 애리얼리는 미국 주부들이 가사에 투입하는 노동력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1950년대에 인스턴트 케이크 믹스가 출시되자, 처음에는 주부들이 썩 내켜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왜 그랬을까? 인스턴트 케이크 믹스의 도입으로 손쉽게 케이크를 만들 수 있게 되면 주부들의 노동력과 요리 기술이 평가절하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제조 업체들은 주부가 계란을 집어넣어야 케이크가 완성되도록 인스턴트 케이크 믹스의 조리법을 바꾸었으며, 그 결과 인스턴트 케이크 믹스가 더 널리 보급되었다. - P75

그러나 이케아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는 기업도 있는데,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애플이다. 애플 창업주 스티브 잡스는 통제욕과 완벽주의 성향이 강해 하드웨어,소프트웨어, 콘텐츠,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제품의 모든 측면을 통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통합된 엔드투엔드end-to-end 방식을 선호했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제품과 호환이 되지 않는 컴퓨터를 만들었다.
애플의 엔드투엔드 방식은 ‘애플 생태계‘라는 말까지 낳게 했다. 아이폰 · 아이패드 같은 하드웨어와 이를 작동시키는 운영체제iOS, 보고 즐기는 콘텐츠, 기기를 사고파는 오프라인 매장(애플 스토어)과 애플리케이션(앱)을 거래하는 앱스토어를 통틀어 생태계로 칭한 것이다. 세계에서 애플만 유일하게 이런 생태계 전체를 갖고 있다. 기기를 만들어 애플 스토어에서 팔고, 아이튠즈에서는 음악을, 앱스토어에서는 앱을 판매한다. 이렇게 하드웨어 · 소프트웨어의 생산에서 소비까지 전 과정을 틀어쥐고 있는 데서 애플의 시장 장악력이 나온다는 게 경영학자들의 분석이다.
그런데 엔드투엔드 방식이 가진 문제점은 사용자들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열망 때문에 사용자들에게 권한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이크 데이지는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애플 제품의 사용자들은 자기 뜻대로 프로그램을 설치할 수 없고, 애플이 통제하는 애플의 서버로부터 다운로드를 받아야 한다"며 모든 프로그램은 "애플의 통제와 검열을 받는다"고 비판했다. 또 하버드대학 법대 교수 조너선 지트레인은 「왜 나는 아이패드를 사지 않으려고 하는가」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매우 사려 깊고 멋진 디자인이다. 하지만 또한 사용자에 대한 명백한 멸시가 포함되어 있다. 아이들에게 아이패드를 사주는 것은, 이 세상이 자신의 것이며 스스로가 분해해 재조립해야 할 대상임을 깨닫게 해주는 방법이 될 수 없다. 그보다는 배터리를 바꿔 끼우는 단순한 일조차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고 일깨워주는 수단이 된다."
반면 잡스는 통합적인 접근법을 정의正義의 문제로 간주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하는 이유는 통제광이라서가 아닙니다. 훌륭한 제품을 만들고 싶어서, 사용자들을 배려해서, 남들처럼 쓰레기 같은 제품을 내놓기보다는 사용자 경험 전반에 대해 책임을 지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다."
엔드투엔드 방식에 대한 비판은 사회적인 반면, 잡스의 반론은 종교적이다. 과연 소비자들은 어떤 걸 더 원할까. 이케아 효과에 빗대 말하자면, 사용자 경험 전반을 통제해 책임을 지고 싶다는 잡스의 생각은 ‘애플 효과‘라고 할 수 있겠지만, 소비자의 기질과 취향에 따라 이케아 효과를 원하기도 하고 애플 효과를 원하기도 한다고 보는 게 옳겠다. - P76

손실 회피 편향은 조직 관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공무원이나 회사원에 대해 너무도 쉽게 ‘복지부동‘이라거나 ‘무사안일‘이라는 비판을 하지만, 역지사지를 해볼 필요가 있다. 혼자서 의사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지는 구조를 가진 조직에선 직원들이 위험을 기피하는 경향을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위험을 감수해 잘해내면 보너스를 조금 더 받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일자리를 빼앗길 정도라면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하려고 들겠는가? 이와 관련, 롤프 도벨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느 회사에서든 거의 모든 경우에 출세를 위협하는 요소가 성공 가능성을 능가한다. 그러므로 이제 회사의 상관으로서 직원들에게 위험을 감수하려는 자세가 부족하다고 하소연해온 사람이 있다면, 마침내 그 이유를 알았을 것이다. 바로 손실 회피 편향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바꿀 수 없다. 나쁜 것이 좋은 것보다 더 강하다. 우리는 긍정적인 일보다 부정적인 일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거리를 가다 보면 친절한 얼굴들보다 불친절한 얼굴들이 눈에 더 빨리 띈다. 나쁜 태도는 좋은 태도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물론 예외는 있는데, 우리 자신에 관한 일일 때가 그렇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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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서 말하는 적에 대한 사랑도 [교환]경제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돌려주기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일방적으로 주라는 요구는 성스러운 경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신이 보상해주기를 기대하기 떄문입니다. "잘 돌려주는 사람들에게만 무엇인가를 빌려주면서 그대들은 왜 보상을 기대합니까? 빌려주면서 돌려주기를 요구하는 것은 신에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도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대들은 적도 사랑해야 합니다! 좋은 일을 하십시오! 그리고 돌려받기를 기대하지 말고 빌려주십시오! 그러면 그대들은 충분한 보상을 받습니다. [...] 선사하십시오. 그렇다면 신이 그대들에게 선사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은 그대들이 다 들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많이 선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넉넉한 기준을 사용하십시오. 신은 그대들에게 동일한 기준을 사용할 것입니다."(「누가복음」6장 32-38절) 그와 반대로 선불교에는 더 높은 차원의 경제를 재건할 신과 같은 판관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전혀 경제[가계]적으로 계산하지 않은 채 주고 나누어 줍니다[용서해줍니다]. 가계를 돌볼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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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 정도의 민감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를 보면,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이 없다고 확신할 때도 대부분 속임수를 쓰거나, 규칙을 어기거나, 이기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또 이런 어린이들은 도덕적인 딜레마에 직면했을 때 사회적으로 만족할 만한 해답을 제시했다(코찬스카 & 톰프슨, 1998).
남들보다 민감한 사람은 대체로 양심적이고 모든 일에 책임감을 느낀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주변에 대해 예민하게 느끼고, 불안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 P39

민감한 사람들은 남에게 고통이나 불편을 주는 걸 극도로 싫어하고 피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덜 민감한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이것은 민감한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나는 남들의 무신경한 말 때문에 상처 받는 민감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왔다. 그들은 남들도 그들처럼 인간관계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신경을 쓸 거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민감한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의 태도에 충격을 받지 않도록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민감한 사람들은 인간관계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에 반응이 느리고 부자연스러울 때가 많다. 그들은 논쟁에서 대부분 패배하고, 다음 날이 되어서야 뒤늦게 자기가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 게 옳았는지 깨닫고 후회한다.
민감한 사람들이 항상 양심적이고, 주의 깊고, 공감능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다. 그들도 과도한 자극을 받거나 당황하면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을 할 수 있고, 때로는 굉장히 까다로운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 P41

누구보다 풍부한 내면의 삶
높은 민감성을 가진 사람들은 풍요롭고 이상적인 삶, 창의적인 내면세계,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 나는 혼자 있을 때 지루하다고 느낀 적이 거의 없다. 오히려 혼자 있는 시간이 내게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나를 즐겁게 하기 위해 타인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으므로, 나 자신으로 살아갈 충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많은 활동을 하며 분주한 삶을 살던 사람이 실직하거나 은퇴하면 위기에 빠지는 사례를 많이 보게 된다. 그러나 민감한 사람들은 그것을 새롭게 발견한 자유로 받아들이고 환영한다. 그 시간을 자신을 창조적으로 표현하는 기회로 삼고, 삶을 더 느린 속도로 즐기며 살아간다.

우리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민감한 사람들 중에는 영감을 받을 때 즉각 그 일을 시행하라는, 외면할 수 없는 내면의 강렬한 요구로 느끼고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지만 때로는 그 일이 무거운 짐 같아요. 새로운 이미지가 떠오르면 최대한 빨리 그 이미지를 캔버스 위에 옮겨야 할 것 같은 강박을 느끼니까요."
- 리사, 30세

강렬한 영감을 느끼는 건 매우 소중한 경험이지만, 영감을 다루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는 조건이 전제된다. 높은 민감성을 가진 사람들은 강렬한 영감을 자주 느낀다. 그들 중에 여러 장르의 예술적인 창작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밤 10시 이후에는 아예 영감의 근원을 차단하는 편이다. 한밤중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밤새 잠을 못 이루기 때문이다.
민감한 사람들의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얇은 칸막이가 놓여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잠재의식의 재료에 쉽게 접근할 수 있고, 그것을 창조적인 표현과 꿈으로 시각화할 수 있다. - P43

두 번째는 민감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전형적인 전략이다. 그들은 말을 하거나 행동을 취하기 전에 자세히 관찰하고 깊이 생각한다. 당신은 아마도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몇 단계 앞서서 생각하는 습관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 말하면 나는 이렇게 말할 거야. 그리고 그가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면 나는 이렇게 행동할 거야‘라는 식으로. 그리고 당신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생길 수 있는 모든 결과를 머릿속으로 그려볼 것이다.
높은 민감성을 가진 사람들은 모든 긍정적인 가능성을 예상할 뿐 아니라 부정적인 가능성에 대해서도 대비할 수 있다. 당신은 어떤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그 상황의 세세한 부분을 미리 검토하고 준비한다. 이것은 당신이 실수할 위험을 미리 막아준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행동이 느리고 위험에 대해 걱정하느라 많은 시간을 낭비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 P47

하루 종일 심리치료 훈련을 강행하고 나면, 내 에너지는 완전히 바닥을 드러낸다. 나는 예기치 못했던 사건이나 문제가 터졌을 때 끌어낼 에너지를 비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전에 모든 일을 주도면밀하게 검토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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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아내는 방에 놓여 있고
나는 내 자리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
육중하게 어두워지고 있을 뿐이다."
무서운 일 아닌가? 없을 때는 찾게 되고 있을 때는 서로 무관심한 관계, 즉 가구와 같은 관계라면 말이다.
(주 : 도종환「가구」) - P86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맥락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 규칙을 따른다. 바로 이들이 우리가 하루하루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다. 언어와 문화가 완전히 다른 외국인들을 만날 때는 그래도 상황은 좋은 편이다. 우리는 외국인들이 그들만의 삶의 규칙에 따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같은 언어나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을 만날 때 발생하기 쉽다. 겉으로는 유사해 보이지만 그들은 지역, 가족, 학교, 전공 등등에 의해 나의 문맥과는 일치하지 않는 언어를 사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욕쟁이 할머니의 식당에서 느끼기 쉬운 불쾌감이나 거부감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자신과 대화하는 사람이 어떤 삶의 문맥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는지 섬세하게 읽어내야 한다. 자신의 문맥에 따라 상대방의 이야기를 재단하는 순간, 오해와 갈등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 P104

표면적으로 피의자의 입장에서 검사는 비인간적으로, 그리고 변호사는 인간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과연 그럴까? 검사는 피의자가 100퍼센트 자유롭게 범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하고 있다면, 변호사는 피의자가 다른 원인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고 주장하려고 한다. 간단히 말해 검사는 피의자가 자유로운 사람이었다고, 변호사는 피의자가 부자유스러운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결국 재판은 범죄 행위에 대해 피의자가 어느 정도 자유로웠는지를 따지는 행위인 셈이다. 만약 자유의 정도가 결정된다면, 피의자는 그에 걸맞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재판정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우리는 항상 자유와 책임의 관계를 따진다. 그래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칸트의 후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는 인간의 윤리적 행위는 인간이 자유로울 때에만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던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 P121

과거 사람들은 가정에서든 사회에서든 국가에서든 조화를 최고의 이념으로 생각했다.그렇지만 어느 경우든 조화라는 이념은 구성원들이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지 않는다면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자신의 가정이 화목하다고 뿌듯해하는 여인이 있다고 하자. 그렇지만 이것은 그녀만의 착각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 실제로는 그녀가 가족들의 욕망에 자신을 맞추고 있거나, 아니면 가족들이 그녀의 욕망에 맞추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조화의 이념 속에서는 타자와 차이에 대한 경험이 발생할 수 없다. - P127

만약 타자와 마주쳤을 때 기쁨을 느낀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게 될까? 당연히 우리는 그와의 만남을 지속하려고 할 것이다. 그와 만났을 때 발생하는 기쁨과 유쾌함 때문이다. 반대로 타자가 슬픔을 준다면 우리는 어떨까? 아마 그를 떠나려고 할 것이다. 자신에게 고통과 우울함을 주는 타자와 같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도 기쁨이나 슬픔에 빠져 있는 인간의 행동 양식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던 것이다.
정신은 신체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촉진시키는 것을 가능한 한 생각하고자 한다. 반면 정신은 신체의 활동 능력을 감소시키거나 방해하는 것을 생각할 때, 그런 것의 존재를 배제하는 사물을 가능한 한 생각하게 한다.
-『에티카』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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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 금지나 파괴 같은 방식으로만 작용한다는 것은 잘못된 믿음이다. 권력은 커뮤니케이션 매체이며 커뮤니케이션이 특정한 방향으로 원활히 흘러가게 한다. 권력에 복종하는 자는 권력자의 결정을, 곧 그의 행위 선택을 받아들이도록 유도된다(그것이 반드시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권력은 [본래] "비개연적 선택이 일어날 개연성을 증가시키는" "기회"이다. 권력은 권력자와 권력에 복종하는 자 사이에 존재하는 행위 선택의 편자를 없앰으로써 커뮤니케이션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거나 조정한다. 이를 통해 권력은 "누군가의 행위 선택을 다른 이의 결정에 이전"시킴으로써 "인간의 행위 가능성의 불확정적 복잡성을 감소"시킨다. 권력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적 지도가 반드시 억압적인 방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권력은 억압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커뮤니케이션 매체로서 권력은 구성적으로 기능한다. 이런 점에서 니클라스 루만은 권력을 "촉매"라고 정의한다. 촉매는 자신은 변화하지 않으면서 사건의 발생을 촉진하거나 특정한 과정의 흐름에 영향을 미친다. 이를 통해 촉매는 "시간"을 얻게 해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권력은 생산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 P23

각주) 니체의 과장된 수사학이 특히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수용소 거주자 ‘무젤만‘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는 끔찍한 방식으로 순수한, 나아가 절대적인 명령으로 축소되어버린 언어를 떠올리게 한다. 무젤만은 수용소 관리의 명령과 살을 파고드는 추위를 구별할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타자라는 단어는 상처 입힘 혹은 고통스러운 파고듦으로 육체적으로 체감되고 있다. 물리적 고통과 언어 사이의 이러한 밀접한 관계는 상처로서의 언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 P53

푸코가 감옥, 군대 또는 병원에서 찾아내는 정형외과적 권력은 무엇보다 신체에 집중되어 있다. 푸코는 신체에 시선을 고정시킨 나머지 상징적 차원에서 관습화하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권력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다. 아비투스는 한 사회 집단의 경향이나 관습을 지칭한다. 그것은 특정한 지배 질서를 관철시키는 데 기여하는 가치나 지각 형태를 내면화함으로써 생겨난다. 반성 이전에 작동하면서 신체적으로 작용하는 아비투스는 현존하는 지배 질서로의 편입을 가능하게 하는 습관의 자동주의를 산출해낸다. 그로 인해 사회적 소수자들이 오히려 자신들을 배제했던 지배 질서를 공고화하는 태도 전범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아비투스는 신체적인 것에서도 작동하는 지배 질서를, 의식하기도 전에 긍정하고 승인하게 해준다. 우리가 사회적 위치 때문에 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을 우리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여기게 만드는 것도 이것이다. 해야만 하는 것이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취향이라고 양식화된다." 이를 통해 "희생자들이 사회적으로 부여된 운명에 스스로를 봉헌하고 희생하게 만드는 아모르파티, 즉 운명에 대한 사랑"이 생겨난다. 운명이 자유로운 선택인 양 체험되는 것이다. 피지배자들이 그 자체로 부정적인 자신의 상태를 자기 취향으로 삼게 된다. 빈곤이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이 되고, 강제나 억압이 자유로 여겨지는 것이다. 아비투스는 지배전 권력관계가 합리적인 근거들과 무관하게 거의 마법적 방식으로 재생산되도록 만든다.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이론이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권력은 강제라는 모습으로 등장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권력은 자유의 감정을 불러내는 곳에서, 어떠한 폭력도 필요로 하지 않는 곳에서 가장 막강하고 가장 안정적이다. 이때의 자유는 사실일 수도 있고 가상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것은 권력을 안정시키고 구성하는 데 기여한다. - P73

왜 인간은 권력을 행사하려 하는가라는 물음에 철학은 어떤 대답을 줄 수 있는가. 푸코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서로의 관계에서 자유로울수록 타자의 태도를 규정하는 데서 더 큰 쾌락을 느낀다. 타자의 태도를 유도할 때 얻는 유희가 다양하고 자유로울수록 쾌락은 더 커진다. 그에 반해 이러한 유희 가능성이 없는 사회에서는 권력이 가져다주는 쾌락도 줄어든다.
권력은 행위의 유희/여유 공간을 전제한다. 이것이 없다면 폭력과 강제만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후기 푸코가 도입한 쾌락주의적 권력 개념은 권력을 지나치게 유희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권력은 악이 아니다. 권력이란 전략적 유희에 다름아니다. 우리는 권력이 악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성적 관계나 쾌락 관계를 보라. 열려 있는 전략적 유희 속에서 타인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일에 나쁜 점이란 하나도 없다. 그것은 사랑과 열정, 성적 쾌락의 일부분이다."
권력은 유희에 속할 수도, 또 유희의 요소를 갖추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권력이 유희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희는 권력의 대립물을 등장시킬 수도 있다. 하이데거가 권력의 특징이라고 보는, 더 많은 것을 향한 의욕은 유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권력은 그 이상의 권력이 되려고 의욕하는 한에서만 권력으로서 존재한다. 이러한 의지가 중단되면, 원래 지배하던 것이 아직 자기 힘의 테두리 안에 있을지라도 권력은 이미 더 이상 권력이 아니다." 생명이란 자기보존이 아니라 자기주장이다. "생명은 다윈이 이야기하듯이 자기보존을 향한 충동뿐이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은 자기주장이다. 보존하려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에만 집착하고, 그 위에서 자신을 경직시키며, 그 속에서 자신을 상실하고, 그를 통해 자기 자신의 본질에 대해 무지해지고 만다." 하이데거는 늘 니체의 말로 되돌아온다. "인간이라면, 아니 살아 있는 유기체라면 그것이 아무리 미물일지라도 더 많은 권력을 의욕한다." - P87

스스로 고백하듯이, 푸코는 인간학이나 인간 영혼에 정통하지 못하다. 권력의 인간학적 토대는 그의 주장과는 달리 쾌락적인 유희가 아니다. 이 점에서는 푸코보다 니체가 인간의 영혼을 더 잘 이해하고 있다. 니체는 이렇게 쓴다. "권력의 쾌락은 우리가 수백 번이나 경험했던 의존성과 무력에 대한 불쾌함을 통해 설명된다. 이 경험이 없다면 쾌락도 없다." 권력을 행사할 때 생기는 쾌락은 부자유와 무력이라는 트라우마적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권력을 얻었을 때 생기는 쾌락의 감정은 자유의 감정이다. 무력은 타자에게 내맡겨졌다는 것이며, 타자 속에서 자신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권력이란 그와 반대로 타자에게서도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것, 다시 말해 자유롭다는 것이다. 따라서 쾌락의 강도는 유희의 자유로움이나 다양성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쾌락은 권력과 더불어 자라나는 자아의 연속성에서 기인한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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