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희: 토론이라는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를 합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제시해서 다른 사람과 접근하든가 설득하든가 하는 과정이 이뤄져야 하는 것인데, 우리 사회의 커뮤니케이션은 ‘카타르시스 커뮤니케이션‘이기 때문에 어려운 것 같습니다. 설득을 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생각을 일방적으로 주장만 하면 되는 일종의 ‘배설 커뮤니케이션‘인 겁니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우리 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이미 있는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 커뮤니케이션밖에 없는 거죠. 그 서클 안에서는 카타르시스가 있어요. 지지도도 오르고. 우리 정치 문화가 그래요. 지역주의에 기반을 두고는 자연히 이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 P56

우리 사회의 커뮤니케이션은 ‘카타르시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손석희의 주장이 반갑다. 나 역시 평소 한국의 언론과 대중매체는 ‘카타르시스 산업‘이라는 주장을 해왔기 때문이다. 대중의 한을 달래주고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주는 카타르시스 기능에 관한 한 한국 대중매체는 박수를 받을 만하지만 그늘도 있다. 정상적인 공론장 형성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대화와 타협의 문화를 위축시킨다는 뜻이다. 그 어느 일방의 속을 후련하게 해주는 대화와 타협은 원초적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손석희의 고민도 바로 이 지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 P57

내가 대신 답을 해준다면, 정치 입문에 대한 질문 자체가 우문이다. 지승호가 질문에서 지적한 ‘정치를 우위에 놓고 생각하시는 분들‘을 넘어서 대부분의 한국인이 어떤 분야에 종사하건 그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뒤엔 정치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식의 최종 목표쯤으로 생각하는 정치 지상주의에 만연되어 있는 풍토 자체가 짜증이 나는 거다.
나는 이런 풍토 자체가 바뀌지 않는 한 정치 개혁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각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에게 "왜 자원봉사 활동을 하지 않으세요?" 라고 묻진 않는다. 왜? 그건 ‘출세‘가 아니니까. 그런데 정치는 출세로 생각한다. 정치가 출세로 통용되는 세상에서 무슨 개혁이 가능하겠는가 말이다. - P61

2005년 1월 8일 손석희는 <시선집중>에서 유명한 말을 남겼다. "전 지도층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민주사회에서 지도층은 없으니까요." 좋은 말이다. 나는 손석희가 정치 입문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차라리 이 답을 내놓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동문서답이 결코 아니다. 정치 입문에 대한 질문은 "이젠 이만큼 성공했으니 지도층이라는 위치에 오를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아주 몹쓸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말이다. - P65

"손석희는 군더더기가 없는 사람이다. 그의 멘트는 목표물을 향해 공중에서 일직선으로 내리 꽂히는 매를 연상시킨다. 그만큼 간략하고 정확하다. ‘말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 중 손석희처럼 언어의 절제미를 보여주는 사람도 그리 흔치는 않을 것이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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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되는 사회에서는 모든 주체가 스스로를 광고의 대상으로 삼는다. 모든 것이 전시가치로 측정된다. 전시되는 사회는 포르노적 사회이다. 모든 것이 겉으로 나오고, 벗겨지고, 노출된다. 과도한 전시의 결과로 모든 것이 "어떤 비밀도 없이 즉각적인 소비에 내맡겨진" 상품으로 전락한다. 자본주의 경제는 모든 것을 전시의 강제 아래 복속시킨다. 오직 전시적 연출만이 가치를 생성한다. 사물의 고유한 형태는 폐기된다. 사물들은 어둠 속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과도한 조명 속으로 사라진다. "일반적으로 볼 때, 가시적인 사물들은 어둠이나 침묵 속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가시적인 것보다 더 가시적인 것, 즉 외설적인 것 속에서 휘발되어버린다." - P32

전시가치는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외양에 달려 있다. 그래서 전시의 강제는 성형수술과 피트니스클럽에 대한 강박을 낳는다. 성형수술의 목표는 전시가치의 극대화에 있다. 오늘날에는 내적 가치를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외적인 척도를 제공하는 자가 모범으로 여겨지고, 사람들은 폭력적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그러한 척도에 자신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전시의 명령은 가시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절대화를 초래한다. 비가시적인 것은 전시가치, 주의를 생산하지 못하는 까닭에 존재하지조차 않는 것이 된다. - P34

투명사회는 쾌락에 대해 적대적인 사회이다. 인간적 쾌락의 경제 내부에서 쾌락과 투명성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리비도의 경제는 투명성을 알지 못한다. 비밀과 베일과 은폐와 같은 부정적 요소야말로 욕망을 자극하고 쾌락을 강화한다. 그래서 유혹자는 가면과 환상, 가상을 가지고 노는 것이다. 투명성의 강제는 쾌락의 놀이 공간을 파괴한다. 명백성은 유혹 대신 절차만을 허용한다. 하지만 유혹자는 돌아가는 길, 갈라진 길, 미로처럼 꼬인 길을 걸어간다. 그는 다의적인 기호를 동원한다. "유혹은 흔히 다의적 약호에 의존한다. 이 때문에 서양 문화에서 원형적인 유혹자들은 특정한 의미의 비도덕성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유혹자들은 다의적인 언어를 구사하는데, 이는 그들이 진지함과 대칭성의 규범에 대해 아무런 구속력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정치적으로 올바른‘ 실천 양식은 투명성을 요구하고 다의성의 포기를 주장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능한 한 최대의 계약적 자유와 평등을 확보하고, 유혹의 수사적, 감정적 후광을 무력화하려는 것이다." 다의성과 양가성, 비밀과 수수께끼의 유희는 에로틱한 긴장을 고조시킨다. 투명성과 명백성은 에로스의 종언을 초래할 것이다. 즉 포르노의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투명사회가 동시에 포르노사회이기도 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투명성의 이름으로 무제한의 상호 폭로전을 부추기는 ‘포스트프라이버시‘의 관행 역시 쾌락에 대해서는 오직 파괴적 작용만 할 뿐이다. - P38

리비도 경제는 권력경제적 논리를 따른다. 왜 인간에게는 권력을 행사하려는 성향이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푸코는 쾌락경제에 관한 언급으로 답하고 있다.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자유로울수록 다른 사람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서 오는 쾌락은 그만큼 더 크다는 것이다. 이때 게임이 더 불확실해질수록, 그리고 타인의 행동을 조종하는 게임의 방식이 더 다채로워질수록 쾌락도 그만큼 더 증대된다. 전략 게임에서 불투명성과 예측 불가능성은 대단히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권력도 하나의 전략 게임이다. 그래서 권력은 열린 공간에서 작용한다. "권력이란 전략 게임이다. 사람들은 권력이 악이 아님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성적 관계나 연애 관계를 예로 들어보자. 사태가 정반대로 뒤집힐 수 있는 일종의 불확실한 전략 게임 속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과 정열과 성적 쾌락의 일부이다." - P43

계략은 정언명령에 의해 이끌린 행동보다 더 효과적이고 덜 폭력적이다. 그래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계략은 폭력보다 더 낫다." 계략은 주변을 둘러보고 그때그때 상황 속의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점에서 더 유연하고 더 많은 융통성을 발휘한다. 계략은 정언명령보다 더 잘 본다. 반면 정언명령은 경직되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해 투명하다. 폭력은 계략보다 진리에 더 가깝다. 그리하여 폭력은 더 큰 ‘명백성‘을 낳는다. 니체는 여기서 완벽한 조명과 통제의 사회에서는 가능하지 않을 보다 자유로운 삶의 형식을 옹호한다. 그것은 대칭성과 동등성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계약 사상이나 교환 경제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도 자유롭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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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소통에는 시선과 음성이 매우 부족하다. 연결과 네트워크는 시선과 음성 없이 이루어진다. 이 점에서 연결과 네트워크는 음성과 시선을 필요로 하는 관계나 만남과 다르다. 실로 관계와 만남은 음성과 시선의 특별한 경험들이다. 그것들은 몸의 경험들이다.
디지털 메체는 탈육체화하는 작용을 한다. 디지털 매체는 음성으로부터 거칢을, 육체성을, 나아가 공동과 근육, 점막, 연골의 심층을 빼앗는다. 음성은 매끄러워진다. 음성은 의미를 위해 투명해지고, 완전히 기의로 변한다. 이 매끄럽고, 육체가 없고, 투명한 음성은 유혹하지 않고, 아무런 육욕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유혹을 낳는 것은 기의로 환원될 수 없는 기표의 과잉이다.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고, 아무 정보도 전달해주지 않는 그 음성은 "기표들의 육욕"을 가능하게 한다. 유혹은 기표가 기의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유통되는 공간에서 일어난다. 명료한 기의는 유혹하지 않는다. 의미 위에 펼쳐지는 피부가 육욕의 장소다. 또한 단순히 가려지고 은폐된, 덮개를 벗겨 모습을 폭로해야 할 기의가 아니라, 기의로는 풀어낼 수 없는 기표의 잉여가 비밀이다. 이 기표는 폭로할 수 없다. 그것은 말하자면 덮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 P90

아도르노는 "세상에 대한 낯섦"을 예술의 한 계기로 본다. 세상을 낯선 것으로 지각하지 않는 자는 세상을 전혀 지각하지 않는다. 음전압, 즉 부정적 긴장은 예술에 본질적이다. 따라서 아도르노는 편안함의 예술이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세상에 대한 낯섦은 철학의 계기이기도 하다. 그것은 정신 자체에 내재한다. 따라서 정신은 본질적으로 비판이다. - P93

‘좋아요‘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드는 것이 된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주관적 정신과 다른 것을 확정적인 네트워크로 빈틈없이 뒤덮을수록, 인간은 저 타자에 대한 경이의 습관을 버리게 되고, 익숙함의 증가와 함께 낯선 것을 잃어버린다. 예술은 미약하게, 금방 지쳐버리는 몸짓처럼, 이를 보상하려고 애쓴다. 선험적으로 예술은 인간을 경이로 이끈다. [……]." 오늘날 세상은 주관적 정신 외에는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는 디지털 네트워크로 뒤덮인다. 그 결과 낯선 것, 다른 것의 모든 부정성이 제거된, 익숙한 시각 공간이 생겨났다. 이 디지털 반향공간에서 주관적 정신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만날 뿐이다. 말하자면 주관적 정신은 자신의 망막으로 세계를 뒤덮은 것이다. - P93

예술은 수수께끼의 특징을 갖고 있다. "예술은 수수께끼의 성질을 통해 행동 객체의 의심할 여지 없는 현존에 가장 단호하게 대립한다. 결국 예술의 고유한 수수께끼는 이 수수께끼의 성질 속에서 지속된다." 행동 객체는 경이의 능력을 상실한 행동 주체의 생산물이다. "폭력 없는 관찰"과 "거리의 가까움," 나아가 멂의 가까움만이 사물들을 행동 주체의 강제로부터 해방시킨다. 아름다움은 오래 지속되는 관조적 시선에만 자신을 드러낸다. 행동 주체가 뒤로 물러날 때, 객체를 향한 주체의 맹목적인 충동이 꺾일 때, 그럴 때만 사물들은 그 다름을, 그 수수께끼의 성질을, 그 낯섦과 비밀을 돌려받는다. - P94

예술은 자기초월을 전제한다. 예술을 염두에 두는 사람은 자신을 망각한다. 예술은 "나에 대한 멂"을 만들어낸다. 자신을 망각한 채 예술은 섬뜩한 것, 낯선 것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나의 의문에 불과하지만, 문학은 예술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망각한 자아와 함께 저 섬뜩한 것, 낯선 것으로 나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지상에서 시적으로 살지 않는다. 우리는 안락한 디지털 지대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이름이 없거나 자신을 망각하는 것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에고가 거주하는 디지털 네트워크는 모든 낯선 것, 모든 섬뜩한 것을 잃어버렸다. 디지털 질서는 시적이지 않다. 우리는 같은 것의 수적인 디지털 공간 속을 돌아다닌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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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세계는 거의 대부분 인간 자신이 제작한 사물과 질서로 구성되어 있다. 반면 하이데거의 세계는 인간의 개입 이전부터 언제나 존재해온, 이미 주어져 있는 그런 세계이다. 이처럼 이미 늘 전부터 있었다는 것이 하이데거적 세계의 소여성을 이룬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간섭에서 벗어나 있는 하나의 산물이며, 영원한 반복의 세계이다. 근대의 기술로 인해 인간이 점점 더 땅에서, 대지에서 멀어져가고 동시에 땅의 강제에서 해방되어가는 상황에서, 하이데거는 오히려 "토착성"을 고집한다. 인류가 결국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탈소여화와 세계의 제작 덕택이겠지만, 하이데거는 어떤 탈소여화도, 어떤 형태의 세계 제작도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이데거는 조종할 수 있고 제작할 수 있는 과저으로 탈소여화된 세계에 맞서 "만들 수 없는 것" 또는 "비밀"에 강하게 호소한다. - P119

사물은 제작과정에 종속되는 생산품이 아니다. 사물은 인간에 대해 일정한 자율성을,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일정한 권위를 획득한다. 사물은 인간이 수용하고 따라야 할 세계의 중심이 된다. 제약 작용을 하는(사물적으로 만드는) 사물 앞에서 인간은 제약받지 않는 자(사물적으로 되지 않은 자)를 자처하며 반항할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신은 "만들어낼 수 없는 것." 개입하는 인간의 손길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를 상정한다. 신이야말로 제약받지 않는 자der Un-Bedingte이다. 세계는 탈소여화되고 전면적인 제작의 대상이 됨에 따라 완전히 신이 없는 상태가 된다. "궁핍한 시간"은 신이 없는 시간이다. 인간은 마땅히 "사물적으로 제약된 존재" "유한한 존재"로 남아 있어야 한다. 죽음을 폐기하려는 모든 시도는 신성모독이며 인간적 간게일 뿐이다. 죽음의 폐기는 결국 신의 폐기로 이어질 것이다. 하이데거는 고통받는 인간, 고통의 철학자로 남았다. 고통받는 인간만이 "영원한 것"의 향기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하이데거라면 죽음의 폐기가 안트로포스(인류)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불멸의 존재가 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새로이 발명해야 할 거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 P121

하이데거는 다른 시간으로 가는 길 위에 있다. 노동의 시간이 아니라 길고 느린 것의 시간, 머무름을 가능하게 만드는 시간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노동은 결국 지배와 동화를 지향하게 된다. 노동은 사물과의 거리를 제거한다. 반면 사색적 시선은 사물을 지켜준다. 그러한 시선은 사물이 고유한 공간과 고유한 빛깔 속에 머물도록 놓아둔다. 그것은 친절의 실천이다. 하이데거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일상적 진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포기는 취하는 것이 아니다. 포기는 주는 것이다. 포기는 무한정한 단순함의 힘을 준다." 사색적 시선은 거리의 제거와 사물의 동화를 포기한다는 점에서 금욕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도르노와 하이데거는 가깝다. "오랜 사색적 시선이란 [......] 속에서 언제나 대상에 대한 충동이 굴절되고 반사되는 그런 시선을 말한다. 비폭력적인 관찰은 모든 진리의 행복을 낳는 원천이며, 이는 관찰하는 자가 대상을 자기에게 동화시키지 않는다는 사실과 긴밀하게 관련된다. 오랜, 사색적 시선은 사물을 바라볼 때 사물과의 거리를 지키면서도 그것에 대한 가까움 또한 잃지 않는다. 그러한 시선의 공간적인 정식은 "거리에의 가까움"이다. - P126

카미유는 오히려 과거의 시대를 돌아보며 그리워한다. "사람들이 건전한 이성이라고 이름 붙인 일반적인 통념은 참을 수 없이 따문해. 가장 행복한 인간은 자기가 신이고 아버지이고 아들이고 성령이라고 멋대로 상상할 수 있었던 사내였어." - P129

사건이 없는 시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깊은 권태가 찾아노는 것은 아니다. 다름 아닌 역사와 혁명의 시대, 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지속성의 반복의 상태에서 이탈한 이 시대야말로 권태에 취약한 것이다. 아주 약간의 반복조차 이제는 단조로운 거승로 느껴진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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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학이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을 추구한다면, 수사학은 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중점을 둔다. 흥미로운 점은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는 모두 수사학을 궤변이라고 비판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모두 옳다고 인정하는 것, 다시 말해 누구에게나 혹은 어느 지역에서나 타당한 것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가 지향했던 논리의 궁극적 목적은 대화 상대방을 설득하는 데 있지 않았을까? 불행히도 논리적인 논증만으로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는 없는 법이다. 오히려 상대방은 논리의 힘으로 자신을 압박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간과했던 점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공자가 위대했던 진정한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논리를 품고 있었지만, 그것을 수사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인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듣는 상대방에 맞추어 이야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상대방의 내면까지 읽어낼 수 있는 노력은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P205

군주에게 간언하고 유세하며 합당한 논의를 설명하려는 지식인은 애증을 가진 군주를 살핀 뒤에 유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무릇 용이란 짐승은 길들여서 탈 수 있다. 그렇지만 용의 목 아래에는 지름이 한 척 정도 되는 거꾸로 배열된 비늘, 즉 역린이 있다. 만일 사람이 그것을 건드리면 반드시 용은 그 사람을 죽이고 만다. 군주에게도 마찬가지로 역린이란 것이 있다. 설득하는 자가 능히 군주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그 설득을 기대할 만하다.
-『한비자』「세난」
(...) 용을 길들이려는 사람은 용의 목에 있는 거꾸로 된 비늘, 즉 역린을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역린을 자극받는 순간, 용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타고 있는 사람을 물어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 (...) 한비자의 통찰은 매우 단순하다. 아무리 논리적인 주장이라고 할지라도, 수사학적 노력이 실패하면 그 주장은 채택될 수 없다는 것이다.
공자의 제자들이나 한비자의 군주들에게만 역린이 있는 것일까?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역린이 있기 마련이다.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반성하고 체계화하는 일은 우리가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덕목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타자를 설득하는 데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논리적으로 정당화된 생각만으로 상대방을 실제로 움직이기 어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무의식적 정서, 즉 상대방이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 상대방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을 읽을 수 있는 타자에 대한 감수성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표면적으로 상대방은 나의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옳다고 인정할 수는 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타당한 주장, 즉 논리적으로 옳은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상대방을 실제로 움직이도록 할 수 없는 이유는, 나의 이야기가 그의 역린을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비판적이고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은 상대방의 역린을 읽을 수 있는 수사학적 감수성이 없다면 빛을 발할 수 없는 법이다. - P206

논리적 사유와 관련하여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이성, 즉 근거를 찾고 제시하는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 나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 즉 타자라는 점이다. 만약 타자가 나의 주장을 듣자마자 그것을 즉각 수용한다면, 나는 근거들을 찾아서 제시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로부터 이성의 능력을 강제하는 것은 나 자신이라기보다 타자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논리적 사유란 타자를 폭력이 아닌 평화스러운 방법으로 설득하려는 의지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기계적으로 보이지만, 논리적 사유는 타자를 대화 상대자로 인정하고 배려하는 정신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리적 사유는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힘으로 밀어붙이려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논리학이 발달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시 폴리스는 제한적으로나마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던 곳, 따라서 폭력이 아니라 토론과 설득의 정신을 지향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 P213

유연한 것,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 생동적인 것에 반대되는 경직된 것, 기성적인 것 그리고 집중에 반대되는 방심, 요약하자면 자유스러운 활동성에 대립되는 주동주의, 이것이 결국 웃음이 강조하고 교정하려고 하는 결점이다.
- 베르그송,『웃음』 - P219

복제에서 빠져 있는 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한 현존성을 우리는 아우라라는 개념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즉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의 시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작품의 아우라이다. (······) 복제기술은 복제품을 대량 생산함으로써 일회적 산물을 대량 제조된 산물로 대치시킨다. 복제기술은 수용자로 하여금 그때그때의 개별적 상황 속에서 복제품과 대면하게 함으로써 그 복제품을 현재화한다. 이 두 과정, 즉 복제품의 대량 생산과 복제품의 현재화는 결과적으로 전통적인 것을 마구 뒤흔들어놓았다.
- 발터 벤야민,「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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