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전략은 직접적 공격이라기보다는 상황, 즉 객관적 조건을 유리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략은 쉬움을 추구한다. 이 점에서 59 도 동양적 사유는 어려움을 칭송하는 서구적 사유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훌륭한 장수의 전략은 병사들이 승리의 이유를 모를 정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칭찬받지도 않으며 승전식과 같은 이벤트도 없다. "적의 형세에 적절히 다른 조치를 취하여 백성들 앞에서 이겼더라도, 대부분의 백성들은 그 승리의 요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백성들은 아군이 승리하는 형세이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라고만 알 뿐, 그와 같이 승리하도록 제어하는 형세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점이야말로 가장 큰 공적이다. 효율적인 전략은 승리를 쉽게 만들고, 사람들이 칭찬할 생각도 하지 않을 정도로, 점진적인 방식으로 개입함으로써 승리의 방향으로 상황이 진화하도록 이끌어가는 데 있다. - P58

 전쟁의 법칙에 따르면, 적국을 온전히 두고서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책이며, 전쟁을 일으켜 적국을 깨부수고 굴복시키는 것은 차선책이다. 적의 전군을 온전히 두고서 항복시키는 것이 최상책이며, 전투를 벌여서 전군을 깨부수고 항복시키는 것은 차선책이다. ...... 그러므로 싸울 때마다 이기는 것은 최선의 방법이 아니며, 싸우지 않고도 적을 완전히 굴복시키는 전술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 손무, 앞의 책 3편 84~85쪽. - P62

 도덕
상황의 흐름에 의거하는 전쟁 전략, 그리고 인간의 성향을 간파하는 외교 전략의 논리는 역설적으로 유가의 도덕에서 가장 깊은 의미로 드러난다. 물론 맹자는 인을 따르는 도덕을 이익[利]을 추구하는 행위와 견주지 말라고 일갈했다. 그래서 전쟁에 이기는 방법을 제시하는 병법가들을 경멸했다. 그러나 그의 논의 구조를 보면 전략의 구조와 공통점이 있다. 나아가 그는 도덕을 가장 효율적인 것으로 보았다. 상황을 읽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흐름을 형성해가는 것이 중국적 효율성의 핵심이라면, 맹자는 "절차의 전개 과정"에 있어서 "가장 뒤로, 혹은 가장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언급한 바 있는 대담집 《바깥(중국)으로부터 사유하기》에서 중국적 전략 개념은 유가의 도덕성과 연결된다.

전략가들은 말한다. 적을 파괴하는 것은 무용하니, 적을 온전하게 두어라. 그러나 너의 쪽으로 그가 기울도록 하라. 혹은 좀 더 정확히 하자면, 거칠게 적과 맞대면하기보다는 부드럽게, 심지어 그가 자각하지 못한 채 방향을 바꾸도록 만들어라. 이 점에서 가장 앞서 결정짓는 것, 즉 가장 효율적인 것은 가장 은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여 보자. 맹자는 이렇게 답 70 할 것이다. "가장 미묘한 방향 변화, 결과적으로 그 영향이 가장 폭넓게 전개될 방향 변화는 바로 도덕성에 의한 변화이다."*

* 《Penser d’un dehors (la Chine)바깥(중국)으로부터 사유하기》, Paris: Seuil, 2000, 389쪽.

"어진 사람은 적이 없다仁者無敵"라는 맹자의 말은 도덕의 효율성을 보여준다. 어진 마음과 행동은 모두가 환영하는 태도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성은 관습이 되어 확산되고 모든 사람들에게 배어들면서 세계 전체에 영향력을 미친다. 모든 사람들의 선과 이익을 위해 통치하는 군주는 전쟁을 할 필요가 없다. 그는 다른 민족들에게 환영받을 뿐이기 때문에 그의 영향력은 계속 커질 것이다. 맹자가 누누이 강조하듯이, 어진 군주의 국가에는 사람들이 모이게 되어 있다. 폭압적 국가의 백성은 어진 군주의 병사들을 환영할 것이며 그의 국가로 와서 살고 싶어할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 모든 백성이 폭군만 남겨두고 어진 군주가 다스리는 이웃나라로 이주하면 폭군의 국가는 망하게 된다. 실제로 고대 중국에는 이러한 식으로 망하는 국가들이 있었다고 한다.

즉 선하고 어진 군주의 통치는 경쟁자들의 "자연적 71 경향성"에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 저항도 받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도덕성은 만인의 본성에 부합하는 것이므로 그 효율성은 근원적인 것이며 전략가들의 그것보다 포괄적으로 발휘된다. 전략가들은 특정 부분에서의 ‘세’를 통해 효율성을 획득하지만 도덕성을 가진 군자는 세계의 운행 전체와 결합한다.
전략가가 한 국가의 이익[利]을 추구한다면, 현자는 세계 전체[天下]의 이익을 추구한다. 이러한 현자의 덕성은 공자에게서 완벽하게 구현된다. 공자의 효율성 역시 직접적이기보다는 줄리앙이 《운행과 창조》에서 언급한 "자발적 감화"를 유도하는 간접적 영향력이다. 이러한 점은 논쟁을 통해 타인의 견해를 비판하고 직접적으로 설득하는 서양의 방식이 아니다. "항상 설득을 염두에 두는 변론과는 달리, 말없이 이행되는 현자의 가르침은 하늘이 그러하듯 자발적 감화를 가능하게 한다."* 다음의 대화는 유가 도덕의 간접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공자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
자공 선생님께서 말씀을 안 하시면 저희들은 무엇을 72 기술하겠습니까?

* 프랑수아 줄리앙, 《운행과 창조》, 유병태 옮김, 케이시, 2003, 48쪽.

공자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네 계절이 돌아가고 만물이 생장하는데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공자는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거나 규범을 제시하기보다는 스스로 실천하는 모습을 보인다. 제자들이 스스로 실행할 때까지 기다려줄 뿐이다. 지극히 도덕적인 행동을 몸소 실천하고 일상적으로 모범을 보임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점진적이고 자연스럽게 교화시킨다. 타인들은 부담을 갖지 않은 채 서서히 그를 따르게 되며 자연스럽게 그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다.
감지할 수 없을 만큼 지극히 미묘하고 점진적인 효율성을 지닌 영향력이 타인에게 간접적이면서도 끝없는 자극으로 작용하니, 타인은 내처 스스로 자신의 행동거지를 고쳐 나아가는 것이다.**

* 《논어論語》, 17편 19장.
** 프랑수아 줄리앙, 앞의 책 129쪽.

공자의 도덕적 가르침은 중국적 세계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중국에서 세계 또는 자연은 서양의 신과 같은

73 《주역周易》의 ‘팔괘八卦‘
주역은 동아시아 문명의 원형이다. 주역의 괘卦와 효爻는 만물의 점진적인 변화를 상징한다. 음과 양의 끊임없는 교대로 이루어지는 자연의 운행은 천지만물의 원리이자 도덕의 근거로서 작용한다.

74 단일한 원리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다. 자연은 음양의 조화를 구현한다. 음과 양은 대립과 상보, 상관성, 상호작용, 교대 등을 나타낸다. 중국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실재는 운행이다"라는 명제로 표현할 수 있겠다.
하늘[天]과 땅[地]은 낮과 밤, 온기와 냉기의 교대며 사물들의 조정 원리다. 천지는 실재가 유래하는 원리이면서 실재를 발전시키고 상승시키는 원리다. 천지는 세계의 흐름이고 과정이다. 천지는 말없이 행할 뿐이다. 천지는 한결같으며 이탈하지 않는다.
하늘이 이탈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도덕적 차원이 부각되며 이는 중국 사상의 본질적인 실마리다. 즉 실재를 쇄신하는 원리가 또한 선의 원천이다. 천덕天德은 인성人性의 원천이며 이러한 점이 성선설의 근원이다. 이 점에서도 중국 사상은 서양 사상과 갈라진다. 중국은 자연만 생각했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개념이 따로 없었다. 중국에서 자연은 ‘객관화’ 또는 ‘대상화’되지 않는다.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자연의 문제에서 도덕과 인성의 문제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분리가 시작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인위적 측면(기술)과 자연을 분리한다. 기독교도 자연과 초자연을 구분한다. 칸트도 도덕의 세계와 자연세계를 구분한다. 데카르트도 역시 정신과 자연을 분리시킨다. 간신히 스피노자 정도가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추구했을 뿐이다. - P6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회상하는 기억들은 그립고 달콤하다. 고통과 방황의 시간마저 아름답게 채색된다. 어디 그뿐이랴, 당시에는 알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한 답을 주기도 하고 선택한 것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아, 그때 그래서 헤어지게 된 거구나. 그 선택은 오히려 잘 된 것이었구나.
오직 시간이 지나서야 문제가 풀리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우리는 신의 큰 뜻은 시간이 흘러서야 알게 된다고 말한다. 신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한다면서. - P167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은 세상과 나를 연결한다는 환상을 심어주기에 나를 세상의 노예로 만들기 쉽다. 세상의 노예가 되지 않고 세상의 주인으로 사는 길은 안다는 확신을 버리고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 즉 감정의 날개를 펴는 것이다.
감정의 날개는 이성을 무시하고 무조건 ‘감정적‘이 되라는 뜻이 아니다. 이럴 때 감정적이란 말은 이성 중심주의에서 말하는 감정의 몰입이다. 최근 심리학이나 뇌과학에서 말하는 감정의 날개란 의식과 감각의 적절한 조화를 의미한다. 의식이 전부라고 믿으면 세상의 노예가 되기 쉽고 감각이 전부라고 믿으면 몸의 노예가 된다. 자기 정체성을 세상의 기준에 맡긴 이는 과거 어느 시점에 고착되어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는 사람이다. 언제나 밝고 낙천적이면서 평화롭게 사는 사람은 마음을 자연의 변화에 맡긴다. 여행하듯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런 삶이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불행한 일을 겪으면서도 그 일에 매달리지 않는 것은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오는 계절의 순환이 그렇기 때문이다. - P178

철학자 스피노자가 감정을 이성보다 열등하게 봤던 당대의 주류 사상과 정면으로 대립하면서 감정을 의식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은 대단히 뇌과학적이다. 감각 혹은 감정이 의식보다 먼저 있다는 것,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결코 접근할 수 없고 오직 의식에 의해 느낄 뿐이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학문이 심리학이나 뇌과학이다. 아, 철학자 칸트도 이미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물자체에 접근할 수 없고 오직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이라고! 그렇다면 그런 과학적 사실을 감정의 경험을 통해 연습하게 하는 길은 없는가. 칸트의 사상이 가장 성숙했을 때 나온 저서 『판단력 비판』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세 가지 자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 세 가지 자유를 프로이트의 심리학으로 풀어보자.
입맛에 맞는 것을 먹을 자유The Agreeable는 모든 동물이 누리는 자유다. 소는 풀을 먹고 사자는 고기를 먹고 인간은 이것저것 다 먹는다. 몸이 누리는 가장 기본적인 자유이며, 이드에 속한다. 그다음은 옳은 것을 주장할 자유로, 개념이 작동하는 선The Good의 영역이다. 슈퍼에고에 속한다. 사회적 구속력이 있지만 사적인 이익이 공적인 것과 혼돈될 위험이 있다. 이 둘의 중간, 동물과 인간의 양면을 포함한 중간 영역은 무엇일까. 바로 미The Beautiful가 주는 자유다. - P181

세 번째 항목인 미는 우리에게 가장 정확한 판단을 내리게 한다. 왜 그럴까. 예술작품의 감상은 사적인 것이지만 이익과 상관없이 즐거움을 위한 것이다. 그 사적인 경험은 타인에 대한 공감을 통해 보편성에 이른다. 작품의 형식Form을 통해 감정을 연습하고 판단을 내리기 때문에 사적이면서도 제한을 받고 모호하면서도 타인과 공유하는 경험이 된다. 안다는 확신에서 벗어나는 연습이다. 가장 공정한 주관적 보편성에 이르는 길이 예술 감상이고 그래서 예술의 ‘형식적 완결성‘이 중요하다고 칸트는 말한다. 이것이 감각과 의식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에고의 역할이다.
정지용의 「호수」는 감정 연습이라는 무한한 상상력에 관한 사이고 「대미지」는 의식이 시간의 형식이요 느낌의 형식이자 감수성의 형식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하는 영화다. 물론 이 모든 것보다 더 절실하게 감정을 경험케 하는 것은 우리의 삶 그 자체다. 그러나 단 한 번이고, 한정된 시간이 주어졌고, 한번 실패하면 돌이키기 어려운 게 삶이기에 우리는 예술작품을 통해 미리 감정을 연습하고 판단의 오류를 줄여야 한다.
예술작품은 언제나 안다는 확신이 위험하다는 것을 경고한다.
안다는 확신은 의식의 속임수다. 감각에 접근하는 길이 이미지를 만드는 길 외에 달리 없음에도 우리가 현실에 즉각적이고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의식은 모든 것을 아는 척, 이미지가 실체인 척한다. 믿기에 아는 것이 아니라 알기에 믿는다고 속인다. 마치 울기에 슬픈데 슬퍼서 우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과 같다. - P182

마침내 강요에 의해 마일즈의 자백을 받아내는 순간 그 아이는 숨이 막혀 그녀의 품 안에서 죽고 만다. - P184

"믿음은 없는 것을 보게 한다"는 제임스의 심리학을 따른다면 그녀의 단순한 경험에서 비롯되는 확신은 위험한 것이다. 그녀의 지나친 확신에서 오는 추궁은 마일즈의 숨을 멈추게 했기 때문이다. 185 무엇보다 그녀에게 부족했던 것은 다양한 세상과 예술작품들을 경험하면서 감정을 풍부하게 할 기회였다. 마음을 열고 세상을 호기심으로 보는 대신 그녀는 단순한 믿음을 앎으로 착각했다. 자신이나 타인의 실수를 통해 배울 기회가 없었기에 단순한 경험에서 얻은 신념은 안다는 확신으로 이어져 어린아이를 막무가내로 밀어붙인다. - P184

안다고 확신하는 순간 우리는 의식의 속임수에 그대로 노출되고 그 너머에 있는 감정을 연습할 기회를 잃는다. 호기심을 가지고 그저 모호함을 차근차근 경험하는 것이 감정을 풍요롭게 경험하는 길이다. 그러는 사이에 판단의 오류를 저지르고 실수하며 깨닫는다. 미궁에 빠지고 스스로 문제를 풀어가면서 판단의 오차를 줄인다. 감정을 미리 실습해보는 것이 실제 삶에서 부딪히는 판단의 오차를 줄이는 길이다. - P185

감정과 의식 어느 한편에 치우치면 안 된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개인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감각보다 이미지의 편이고 의식의 편이다. 그쪽이 사회가 요구하는 견고한 질서와 법을 지키고 문화를 키우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국력을 키우고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의식의 편에 서야 한다. 효율성이 강조되는 사회에서 감각을 지키며 산다는 것, 이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게다가 효율성의 노예가 되는 만큼 반대로 감각의 노예가 되기도 쉽다. - P187

매케이와 머니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아니 그가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거친 말을 타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리치와 결투를 벌인 이유는 무엇일까. 진짜 용기는 자신에게 증명하는 것이고 남을 위한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개인의 감정이 집단의 것으로 바뀌는 것은 그 개인이 힘을 과시하는 데서 온다. 보안관 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 P231

모든 동물에게 내장된 원초적 감정은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생명을 지키는 강력한 감정이다. 모든 동물은 먹이를 찾는 적들에게 둘러싸여 평생을 살아간다. 원시적인 포식자가 드문 현대 산업 사회에서 이는 경쟁자로 바뀐다. 먹고 먹히는 생존의 싸움은 ‘불안‘으로 내재하고 생명의 동반자가 된다. 두려움은 적을 발견하는 순간 방어하라는 의미에서 일어나는 감정이지만 문제는 그 빈도가 지나치면 건강에 해를 끼친다는 것이다. 몸의 요구와 의식의 방어가 균형을 잃으면 공황장애와 같은 질병이 생긴다. 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감정이 용기다. 두려움과 맞서 싸우는 용기다. 그래서 용기는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그렇기에 남에게 보이는 용기는 허세가 되고 남에게 이용당하기 쉽다. 사람들은 그 힘을 빌려 자신의 결핍을 채우고자 하기 때문에 겁쟁이들의 거짓 용기가 되고 집단폭력의 근원이 되기 쉽다. 두려움이 ‘나의 것‘이듯이 용기도 ‘나의 것‘이고 자신에게 증명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자존감 혹은 자긍심의 원천이다. 그리고 그 길이 개인과 사회를 개선하는 올바른 길이다. - P231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돌봄이나 놀이를 통해 기쁨이라는 긍정적 감정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혐오감, 허영, 질투, 부러움, 죄의식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더 강렬하다. 앞의 감정들은 의식적인 시도와 노력이 요구되지만 뒤의 감정은 소리없이 잦아들어 몸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앞의 감정은 사회가 장려하고 뒤의 감정은 사회가 억압하기 때문이다. 감정은 억압하면 더 강해진다. 인정하고 살살 달래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화두가 태어난다. 비록 감정은 하부에서 상부로 진화되었고 하부가 더 강하지만 소통과 적절한 균형을 위해 상부에서 하부로 이행하는 의도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항상성을 유지하려면 의도적으로 긍정적인 감정을 키워야 한다. - P236

몇 번이나 포기하고 돌아갈까, 전과를 할까 생각할 때 나에게 용기를 준 두 작품이 있었다. 에머슨의 「자긍Self-Reliance」과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Walden』이었다. "네가 밖에 나가기 싫으면 문 앞에 ‘고독‘이라는 팻말을 걸어놓고 몇 날이라도 안에 있어라"라는 에머슨의 말을 나는 "네가 영어를 못한다 해도 무슨 상관이냐, 문학을 좋아하면 되는 거야"라는 말로 이해했다. 또 한 사람이 소로다. - P245

우리는 때로 그를 돕고 싶어도 거부당합니다. 그러나 비록 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그를 완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 P251

마음의 근심은 뼈를 녹인다. 왜? 영어로 E-motion은 ‘생각이 몸을 움직이게 한다‘는 뜻이다. 계속 두렵다는 생각을 하면 실제로 두려운 반응이 일어나고 계속 근심하면 건강에 이상이 생긴다. 의사를 절대적으로 신뢰할 때는 그가 처방한 약이 가짜이더라도 때로 효력을 본다. 이것을 의학에서 ‘위약 효과‘ 혹은 ‘플라세보 효과Placebo Effect‘라고 부른다. 생각이 실제로 몸의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계속 생각하면 없는 것이 보인다. 어떤 감정의 증상들을 의식적으로 일으키면 그 감정이 일어난다. 즐거운 추억은 행복감을 증진시키고, 긍정적인 생각은 몸을 건강하게 바꾼다. 좋은 글을 읽고 노트에 적어놓는다든지 혹은 좋은 이야기를 들으면 친구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유머를 즐긴다.
그렇다면 나는 의도적인 몸의 훈련으로 감정을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배럿이 조언하듯이 조용한 분위기에서 산책하고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등 의도적인 몸의 활동과 운동을 통해 불쾌한 기분을 동요와 즐거움의 기질로 적절히 조절하는 것이다. 제임스는 말한다. 나는 흐느낄수록 슬픔을 더 강하게 느낀다. 마치 도망칠수록 공포를 더 느끼듯이. 분명히 우리는 몸의 움직임으로 느낌을 바꿀 수 있다. 계속 웃으면 행복감을 느끼고 쌓인 슬픔을 울어서 풀어버리면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분노의 표정을 계속 지으면 분노가 커진다. 이것이 몸의 반응을 통해 감정을 훈련하는 방법이다. 운동으로, 얼굴 표정으로 긍정적인 감정을 연습한다. 반대로 부정적인 감정은 발산하여 풀어버린다. 그러면 그런 감정들은 시들해져서 슬며시 사그라든다. 우울증은 절대 사절이다. - P254

우울하면 몸이 느려지고 기분도 가라앉는다. 이때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더 가라앉고 더 우울해진다. 숲길을 걷고 꽃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운동하고 소통하면 우울함이 한결 나아진다. 걷기와 크게 숨쉬기, 팔다리 흔들기 등 몸의 훈련은 낙담을 즐거움으로 바꾼다. 생각이 몸을 움직이게 할 뿐 아니라 몸의 움직임이 생각을 바꾸기도 한다. 운동을 하면 좋은 호르몬이 배출되어 기분이 좋아진다.
외부와 소통을 거부하고 낙담에 계속 빠지면 얼굴 표정만 나빠지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는다. 얼굴, 목, 목구멍은 감정 표현과 친근하게 연결되어 있다. 근심은 뼈를 녹인다는 말처럼 감정은 뼈와 근육에도 영향을 미친다. 등뼈와 신경중추는 몸과 뇌를 소통시키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온몸이 감정의 영향을 받으며 뇌는 이 감정들을 호르몬의 분비 등 몸의 반응으로 표현한다. 제임스의 감정에 대한 연구는 감정이 건강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배럿의 말처럼 마음의 건강이 곧 몸의 건강인 것이다. - P256

많은 학자는 항상성을 유지하거나 회복하는 데 예술이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감각과 인지 판단의 다리를 놓아 두 영역이 소통하고 감정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돕는 데 예술, 특히 서사 예술은 가장 이상적이다. 몸과 의식, 혹은 느낌과 인지 판단을 융합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회상이라는 기억의 진화와 함께 동굴벽화가 시작된 이유다. 인간이 되는 순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예술은 뇌의 진화과정을 가장 유사하게 모방한다. - P259

사랑이 보이십니까? 희망이 보이십니까?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나요? 절망해도 힘들어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뭔가 곧 밝혀질 것 같은데 밝혀지지 않고 뭔가 이루어질 것 같은데 주먹은 늘 텅 비어 있다. 그래도 인간은 계속 간다. 그리고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에 이렇게 느낄지도 모른다. 아, 결국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온 숭고한 유혹의 정체는 죽음이었단 말인가. 예술작품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문제가 속 시원히 해결되지 않기에 나는 계속 그 영화에 몰입하고 그 소설을 읽는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읽게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 그 동력은 감정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 P262

고독과 공감은 일상을 누리기 위한 생존의 조건이다. 모든 정상인은 어느 정도 불안과 우울을 느낀다. 이때 나와 세상의 균형이 깨지면 공황장애나 우울증 등 정신 질환이 생긴다. 세상이 나를 본다는 것을 잘 모르는 사람은 자의식이 결핍된 것이다. 양심이나 타자의식이 없는 경우다. 반대로 세상이 나를 본다는 것을 지나치게 느끼는 사람은 자의식이 과잉된 것이다. 양심이 부족한 게 아니라 유행에 민감하고 과시하며 자신을 부풀린다. 그리고 정도가 심하면 폭력이나 광기, 우울증 등 정신 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고독과 공감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병이 되듯이 나와 세상도 치우치면 병이 된다. 앞서 반복했듯이 감정이라는 뇌의 하부와 전두엽이라는 상부가 연결되어 느낀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정상적인 인지요 판단이다. 소통과 균형이 중요하며, 똑같은 맥락에서 공감이 일어난다. 공감은 고독한 인간에게 신이 내린 축복이다. 우리가 그림이나 음악, 이야기 등을 창조하고 감상하는 상상력은 바로 감정과 인지의 균형 및 소통을 돕는 공감능력에 다름아니다. - P322

칸트의 법을 믿었던 독일인들이 그토록 잔인하게 유대인을 학살한 것은 법을 밀어붙일 때 잉여인 사도마조히즘의 쾌락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법과 쾌락, 현실원칙과 쾌감원칙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지기에 어느 한쪽을 밀어붙이면 다른 쪽으로 빨리 옮겨간다. 선배 프로이트를 다시 읽은 라캉의 독창성이다.​ - P3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꺼이 시간을 내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걸 보면 이 부유한 청년 실업가는 나쁜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 P106

레온의 인생에는, 아니 자신의 인생에 대한 그의 이야기 속에는 비열한 사람도 없었고, 음모를 꾸미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배신을 하는 사람도 없었다. 모든 사람이 적어도 한 가지씩은 좋은 면을 가지고 있다는 레온의 말을 듣고 있으면 마치 그것이 모든 인간이 존재한다는 경이로운 사실의 이유라도 되는 것 같았다. 그는 친구들이 했던 재미있는 농담을 기억해내어 들려주곤 했다. 레온이 하는 말을 들으면 언제나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나약함에 대해서 너그러워지곤 했다. 레온에게는 모든 사람이 적어도 ‘좋은 사람‘이거나 ‘괜찮은 친구‘였고, 겉과 속이 다르다고 비판받는 사람은 없었따. 어느 한 친구가 속을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거나 말과 행동이 다르다고 느껴지면 레온은 시간을 두고 그 친구를 지켜보며 오래 생각한 끝에 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마땅한 이유를 찾아내곤 했다. 문학과 정치, 과학과 종교가 지루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세계에는 이런 것들이 차지할 자리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심각하게 논쟁을 벌이는 주제라 해도 그의 세계에는 발을 붙이지 못했다. 그는 법학을 전공했지만 그 학문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외롭거나 지루해하거나 풀이 죽어 있는 그의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의 침착함은 욕심 없는 마음과 더불어 그 끝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고, 그는 사람들이 다 자기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의 온화함은 용인할 수 있는 정도일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을 위로해주기까지 했다. - P155

바로 이거야. 기쁨에 가까운 느낌을 갖게 된 건 자기 내면의 힘 덕분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나약하지 않았다. 결국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기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다. 그 밖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때때로 다른 사람들이 무심코 하는 말과 행동이 우리 자신에 대해 무언가를 가르쳐 주기도 한다. - P170

심지어 계속해서 거짓말을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 역시 관심이 있어야 가능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오랜 기간 치밀하게 거짓말을 했다면, 그는 그녀에게 상당히 신경을 쓰고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의 거짓말은 그들의 결혼생활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증거였다. - P214

푸대접받던 아이는 이제 푸대접받는 아내가 되었다. 그러나 에밀리는 그렇게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의 경험을 통해 내성이 생긴 덕분이다. - P214

그녀는 가족들과 의절했다고 했다. 부모님과 오빠, 여동생과는 다시는 만나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 P289

레온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아무하고나 어울리는 줏대없는 바보였어. - P296

브리오니는 그의 무죄 입증을 도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비쳐왔다. 그러나 그것은 그를 위한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으니까. 그것은 그애 자신을 위한 것이었으며, 양심상 도저히 견디기 어려워지자 자신의 범죄에 대해 면죄부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그가 고마워해야 할까? - P322

그러나 그가 눈치채지 못한 어떤 신호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브리오니는 삼 년 동안 그에 대한 연모의 감정을 비밀스레 키워오면서 환상이라는 자양분을 주고, 상상을 통해 아름답게 꾸며온 것이 분명했다. 자기 생각 속에 빠져 사는 애였으니까. 그러므로 그때 강가에서의 그 한 장면이 삼 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애를 지탱해준 것이 분명했다. - P328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 편지는 그녀의 아픈 곳을 찌르고 있었다. 소녀는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그들에게 끔찍한 불행을 가져다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 정말로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그녀는 보잘것없는 글재주로 하찮은 소설 하나 써냄으로써 그 사실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 소설을 잡지사에 보냄으로써 허영심을 만족시키려 했던 것 아닐까? 빛과 돌과 물에 대한 장황한 묘사, 세 명의 관점으로 나뉜 서술방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끝없이 계속되는 고요, 그 어떤 것도 그녀의 비겁함을 숨길 수는 없다. 그녀는 정말로 남을 모방한 소위 현대적 글쓰기 양식 뒤에 숨어서 의식의 흐름ㅡ그것도 세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의식의 흐름ㅡ속에 죄책감을 익사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녀의 소설에 없는 것은 그녀의 삶에도 없었다. 그녀가 삶에서 정면으로 부딪치기 싫어했던 것은 소설에서도 빠져 있었다. 진정한 소설이 되기 위해 빠져서는 안 될 것이 바로 그것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녀에게 부족한 것은 소설의 척추가 아니었다. 그녀 자신의 척추, 인생의 척추였다. - P448

사람들은 그가 사회에 좋은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며 그의 공적을 칭찬해주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는 평생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온 건지도 모른다. 별다른 생각 없이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왔을지도 모르지만. - P5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재작년부터 마음속에 품고 다닌 말이다. 무슨 책의 서문 마지막 문장이었다. 어느 옛 현자가 했다는 이 말이 사실이라면, 쉬운 것은 아름답지 않다. 아름답다면, 그것은 어렵다.

 인생도 어렵다. 모든 인생이 어렵다. 모든 인생이 아름다운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어쩌면" 인생은 아름다울 수 있다. 어렵지 않은 것이 아름다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인가가 어렵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이 아름다운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이 나를 두렵게 하는 생각이다. 어쩌면 나는 아름답지도 않은데 그저 어렵기만 한 것을 붙잡고 헛수고만 해온 것은 아닐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삶은 어렵다(다만 어려움이 동일한 모습으로 찾아오지 않을 뿐이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공평히 주어진 가능성 같은 것이다. 아름다울 수 있는 가능성.

 어렵기만 한 삶이냐, 아름답고 어려운 삶이냐. 할 수만 있다면 아름답고 어려운 삶을 사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심슨 가족이 사는 법 - 코미디를 뛰어넘는 철학의 성찰
윌리엄 어윈.마크 T. 코너드.이언 J. 스코블 엮음, 유나영 옮김 / 글항아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심슨 가족>> 에피소드 한 편을 제작하는 데 150만 달러가 들고 8개월간 300명이 매달려야"(p11) 할 만큼, <<심슨 가족>>은 다양하고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다. 그래서 엮은이는 "<<심슨 가족>>에 대한 책 한 권을 쓰려면 몇 명의 철학자가 필요할까? 자신 있게 말하건대 쓰는 데 20명, 엮는 데 3명이다."(p11) 라고 말한다.

33년째 방영되고 있는 애니메이션 시리즈 <심슨 가족>을 소재로 철학자들이 쓴 글들을 엮은 철학 에세이집(혹은 대중문화비평서)이다. <심슨 가족>을 재미있게 본 독자라면 분명 좋아할 책이다. 만화에서 느낀 여운을 길게 할 뿐더러 윤리•반지성주의•종교 등 현대 사회의 다양한 주제를 성찰할 기회를 준다. 다만 내용을 모르면 철학적 성찰이 크게 흥미롭지는 않을 것이고,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기에 안 본 사람에게까지 굳이 권하고 싶지는 않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22-01-02 2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베텔게우스님, 새해가 되고 처음 맞는 주말, 즐겁게 보내셨나요.
2022년 임인년이 되었습니다.
항상 건강하고 좋은 되시고, 행운 가득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베텔게우스 2022-01-03 04:40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답방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날씨가 추워 주말에 거의 집에만 있었습니다..ㅎㅎ 감기와 코로나 조심하시고, 좋은 추억을 많이 쌓을 수 있는 임인년 한 해 되시길 기원드립니다. Happy New Y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