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7 세상의 나이가 겨우 수천 년이라는 성서적 사고의 오류를 유럽 문명이 겨우 인식하기 시작한 게 인류사의 아주 최근의 일이 아닌가. 그런데 그보다 1,000년 전에 마야 문명은 이미 100만 년의 세월을 생각할 줄 알았고, 인도인들은 수십억 년을 상상할 수 있었다. - P517

519-20 과학자들은 팽창이 수축으로 바뀌는 순간 진동 우주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궁금해한다. 자연의 법칙들이 그 순간 무작위적으로 마구 뒤섞인다고 믿는 학자들도 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우주에서 일어나는 온갖 자연 현상들을 지배한다고 알려진 물리학과 화학의 제반 법칙들은 무수히 많은 가능성들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매우 제한된 범위의 법칙들만이 현생 우주에서 볼 수 있는 은하, 별, 행성, 생명 그리고 지능 등의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우주의 팽창과 수축이 역전되는 순간에 법칙들이 멋대로 뒤섞인다면 그때 얻어지는 법칙이 현생 우주를 설명하는 법칙들과 우연히 일치할 확률은 실질적으로 0이다. 그러니까 전생 우주와 현생 우주 사이에 어떤 공통성도 기대할 수 없다. - P519

520 자연 법칙의 뒤섞임이 팽창과 수축의 변환점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주가 이미 여러 차례 팽창과 수축을 반복했으며 그때마다 다른 중력 법칙들이 선택됐다고 하자. 중력 법칙의 후보들 대부분이 실제로는 매우 미약한 중력을 동반한다. 이렇게 미약한 세기의 중력만으로는 우주를 한데 묶어 둘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가 선택한 대부분의 중력에서는 우주가 흩어질 것이고,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팽창과 수축의 반복은 기대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중력 법칙의 새로운 후보가 채택될 가능성이 자동적으로 배제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우주가 유한한 기간 동안만 존속하든가, 팽창.수축의 매 주기마다 자연은 제한된 극히 일부의 법칙들만 선택할 것이다. 그렇다면 팽창이 수축으로 반전되는 순간에 일어나는 자연법칙의 뒤섞임이 완전히 제멋대로일 수는 없다. 후보 법칙들에서 선택이 이루어질 때 모종의 규칙이 준수돼야 할 것이다. 어떤 법칙은 선택되고 어떤 것들은 선택해서는 안 되고 하는 식의 제한 조건들이 있을 것이란 말이다. ‘법칙 선택의 법칙‘은 기존의 물리학을 뛰어넘는 새로운 물리학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이 지경에 이르면 인간의 언어는 빛을 잃는다. 새로운 물리학에 붙일 적당한 이름을 찾기 어렵다. ‘파라물리paraphysics‘ 이니 ‘메타물리metaphysics‘니 하는 이름들은 여기서 요구되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뜻으로 이미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초월물리transphysics‘라는 표현은 어떨까? - P520

527 정말로 4차원적 생물이 존재한다면 어떨까? 4차원에서의 실체인 그는, 우리 3차원 세계에 마음대로 나타나서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다가, 또 자신의 모습에 주목할 만한 변화를 주기도 하고, 마음만 먹으면 우리를 밀폐된 방에서 잡아 밖으로 끌어내기도 하고, 또 아무도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다시 불러들여 실체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안팎이 뒤집혀질 수도 있다. 하나만 예를 들자. 창자와 온갖 장기가 외부로 나와 전 우주에 흩어지고, 그 대신 벌겋게 빛을 발하는 은하 간 물질, 은하, 행성, 그 외의 온갖 천체들이 내부에 들어앉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차원 간 여행을 간절히 원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이라면 정중히 사양하겠다. - P527

529 우주의 중심은 어디인가? 우주에 경계가 있는가? 있다면 그 경계 바깥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2차원 우주에는 중심이 없다. 비록 2차원 우주가 3차원적으로 구부러져 있어도 그 공의 표면에 해당하는 2차원 우주에서는 중심을 정할 수 없다. 그런 우주의 중심은 그 우주에 있지 않다. 중심이 있다면 그것은 그 우주의 주민들이 접근할 수 없는 3차원에 있다. 납작이나라의 영토는 구의 표면일 뿐이다. 그러므로 2차원 우주는 유한하다. 그렇지만 경계는 찾아볼 수 없다. 경계 바깥의 정체는 질문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질문할 성질의 것이 아니란 말이다. 납작이나라에 사는 남작이들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2차원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 - P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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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까지 철학 수입국으로 살았다. ‘보통 수준의 생각‘은 우리끼리 잘하며 살았지만, ‘높은 수준의 생각‘은 수입해서 산 것이다. 다른 사람이 한 사유의 결과를 숙지하고 내면화하면서도 스스로 ‘생각한다‘고 착각해왔다. 수입된 생각으로 사는 한, 독립적일 수 없다. 그렇게 하면 당연히 산업이든 정치든 문화든 가장 근본적인 면에서는 종속적이다. 훈고 訓詁에 갇힌 삶을 창의創意의 삶으로 비약시키고 싶다. 종속성을 벗어나서 독립적인 삶을 함께 누리다 가고 싶다. 남들이 벌여놓은 판 안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그물 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일은 이제 지겹다. 우리는 정말 우리 나름대로의 판을 벌여보는 전략적인 시도를 할 수 없을까? 선도력을 가져볼 수 없을까? - P7

언제 다시 돌아가도 되겠느냐는 판단을 의식적으로 정확하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확한 시점을 알려고 할 필요도 없을 것 같고요. 그냥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단 하나 조건이 있다면, 제 경험에서 얻은 건데 좌우지간 자신한테만은 진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길이 될지는 모르지만 해석되지 않는 어떤 운명 같은 것이 나를 어디론가 데려갈 것입니다. 절차나 순서나 내용을 정확히 인식하려는 것도 의미가 있겠으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세계에 자신을 직접 내던지는 일입니다. 진실하게 자신을 대면하는 일입니다. - P297

300-305 문 깨달음은 혼자의 문제지만 결국 가족과 공유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은 가족한테 나의 사유를 어떻게 드러내고 또 어떻게 설득해서 같이 끌고 가셨는지 궁금합니다.

답_가족이라는 틀이 식구들의 개성을 크게 억압해서는 안 됩니다. 식구들 각자의 욕망을 최대한 존중하고 지지해야만 더욱 튼튼하고 발전하는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가족이 특별한 하나의 이념이나 목표에 갇히면, 그 구성원들의 개성이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즉 부모가 자식들에게 반드시 의사가 되라고 요구하는 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자식의 꿈을 부모가 정해놓고 거기에 자식이 따르도록 하면 안 되지요.
우리는 모두 가족과의 조화보다는 나의 욕망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펼치기도 전에 왜 가족이나 사회와의 조화를 그렇게 먼저 생각해야 하죠? 우선 자신에게 집중해보세요.
가족보다는 자신의 꿈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 가운데 가족과의 조화를 의식하면서 자신의 일을 시작한 인물이 있던가요? 그분들은 그분들의 지성의 높이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뿐이지 주변 사람들에 대한 고려부터 시작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논의의 완결성을 추구한다든지 합리성을 추구한다든지 또는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혹시 자기가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지나친 고려가 시작되는 순간, 그 사람은 이미 울퉁불퉁한 삶, 새로운 삶, 고유한 삶을 살기가 힘들어집니다. 자기를 발휘하고 표출하는 일을 하면서 주변을 너무 자주, 너무 깊게 고려하는 것은 매우 점잖아 보이지만 실은 별로 필요 없는 일들로 보입니다. 큰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문 개인의 성숙만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나요?

답_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변화를 꿈꾸는 그 사람이 우선 성숙해 있어야 합니다. 대부분이 그냥 이전부터 계속해왔던 주장을 다른 사람보다 더 강하게 펼침으로써 변화를 시도하는 일이 많은데, 그건 성공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오히려 사회에 해를 끼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혁명이 완수되지 못하는 이유는 혁명을 하려는 사람이 먼저 혁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함석헌 선생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즉 혁명을 하려는 사람이 먼저 성숙되어 있지 않으면 그 혁명은 성공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개인의 성숙이 그만큼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성숙된 개인은 그냥 ‘개인‘이 아닙니다. 성숙의 높이와 깊이는 이미 그 개인을 넘어서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래서 공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격적으로 상당한 성숙에 이른 사람은 혼자가 아니고, 반드시 동조하는 사람이 생긴다.
(덕불고德不孤, 필유린必有隣)

성숙된 개인은 반드시 그 성숙도에 따라 동조자를 갖게 됩니다. 즉 사회적 확산을 이룰 수 있다는 말입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라는 말을 들어보셨죠? 미네르바는 지혜의 여신입니다. 아테네라는 도시를 지키는 신이지요. 그런데 이 미네르바는 왜 황혼녘이 되어서야 날기 위해 날개를 펴는 것일까요?
대낮에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지적인 활동에 익숙한사람들은 사건이 잠잠해지는 황혼이 되어서야 비로소 숙고熟考에들어갑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지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대낮에 벌어지는 사건은 생소한 것, 처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지적 체계로 바로 대응하기에는 어색하기 마련이죠. 그러니 사건이 발생하는 대낮에는 납작 엎드려 있다가 사건이 잠잠해지고 나면 그 사건을 분석하고 해석하는데, 그것을 황혼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사건을 분석하고 해석하여 지적 체계로 남긴 것, 이것을 이론이라고도 하고 지식이라고도 합니다. 대낮에 A라는 사건이 벌어지면, 지식인들은 황혼녘에나 나타나서 A라는 사건을 분석하고 따져서 A‘라는 이론이나 지식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하나의 사건은 한번 발생하고 나면 똑같은 사건으로는 다시 등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만난 A라는 사건은 평생 다시 만날 수 없는 단 한 번뿐인 사건인 것입니다. A라는 사건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B라는 완전히 새로운 국면의사건을 만납니다. 그러니우리의 사명은 B라는 사건에 가장 적절하게 대응하는 체계적인 방법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죠. 당연히 B라는 사건을 만나서는 B‘라는 체계적 방법이 예측되어야 하는 것입니다.그런데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A‘ 라는 지식을 갖고 또 그것을 신뢰하게 됨으로써, B라는 사건을 만나서도 A‘라는 지식을 가지고 B를 관리하려고 듭니다. 그렇지 않으면 좋을 텐데 문제는 그렇게 안 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A라는 사건과 A라는 이론(지식)과의 유기적 연관성을 이해한 후, B라는 사건을 만나면 A라는 사건과 A‘라는 지식 간의 유기적 연관성을 기초로 해서 B‘라는 이론(지식)을 건립하여 대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을 생산하는 입장에 서본 나라는 새롭게 마주하는 세계를 새로운 방법으로 대응할 줄 알기 때문에 계속 전진할 수 있지만, 지식을 생산하는 입장에 서보지 않은 나라는 계속해서 이미 소유하고 있는 지식을 변화하는 세계에다 억지로(본인은 자연스럽다고 착각하지만...) 적용하니까 과거에 사로잡혀 있을 수밖에 없고, 당연히 전진이 더디거나 아예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식의 생산국이 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지식의 생산은 곧 사유의 생산력에 의존합니다. 사유의 생산력은 독립적 주체만이 할 수 있는 것이고요.
우리가 자아를 성숙시킨다, 자아를 독립시킨다는 말은 사건 B를 마주할 때 이미 가지고 있던 지식(이론) A‘로부터 이탈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A‘에서 이탈해서 B를 A로 보지 않고 B‘를 생산하려는 용기를 발휘한다는 것이지요. 이를 통해 개인의 성숙, 지적 성장, 독립, 이런 것들은 그것 자체가 이미 사회적 진보와 관련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독립적 주체가 발휘하는 인문적 용기는 문명이나 국가나 사회나 인간이나 인류의 방향과 관련되는 일이므로 이미 사회적입니다. 성숙한 개인은 자신의 개인적 성숙을 통해서 이미 사회적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앞에서 이야기한 내용을 다시 한번 음미해볼까요? 우리는 지식과 경험이 증가함에 따라서 정말 자유로워졌는가? 지식과 경험이 증가함에 따라서 정말 더 창의적이 되었고 더 여유로워졌는가? 더 행복해졌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예!"라고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는 지식과 경험이 주는 무게보다 나의 무게감이 작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지식과 경험의 무게보다 나의 무게를 더 크게 하는 것, 더 커진 자신의 내면을 가지고 지식과 경험을 밟고 서서 지배하는 것, 이것이 결국은 주체의 독립이자 성숙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단계에서 가질 수 있는시선이 탁월한 시선인데, 그 탁월한 시선이 B를 마주하면 바로 우리에게 B‘를 말해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철학가나 예술가가 혁명가이고 더 나아가 문명의 깃발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 개인의 성숙은 매우 높은 수준의 사회적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 P300

결국 지금 자기가 살고 있는 구체적인 세계에서 포착된 자기만의 문제가 자기에게서 먼저 진리로 드러나는 것이 관건이지, 경전에 있는 진리를 묵수墨守하는 것이 진리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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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자연적인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고 인간의 손에 의해 가해지는 형벌 중에서 가장 뚜렷하고 가장 보편적인, 그리고 또 가장 가혹한 것이 노예가 되는 것이었다. - P167

167-8 고대 그리스 격언에 ‘노예가 되는 날 인간은 인간성의 절반은 박탈당한다‘(「오디세이아」17권 속에서 소지기 에우마이오스가 한 말)는 말이 있는데, 그때 이 격언이 그대로 무서운 형태로 실현되었다. 노예의 자손인 로마의 도시 프롤레타리아들이 부패하였다. 그들은 빵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빵과 구경거리‘로 소일했고, 이것이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6세기까지 마음껏 사치를 누린 생활 끝에 마침내 파탄을 가져왔으며, 그들이 지구상에서 모습을 감추게 되는 날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 장기간에 걸친 죽음과 같은 생활은 노예화의 도전에 대해 응전하지 않은 벌인데, 헬라스 사회 역사의 최악의 시대에 모조리 노예로 되고 말았던 이들 온갖 잡다한 출신과 내력을 가진 인간의 대다수가 그와 같은 멸망으로의 넓은 길을 다같이 걸어갔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도전에 대항하여 무슨 방법으로서든 ‘교묘하게 뚫고 나가‘ 성공한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자는 하인의 신분으로 차차 입신하여 큰 소유지의 관리 책임자가 되었다. 카이사르의 소유지는 헬라스 사회가 세계 국가로 발전한 뒤에도 계속 카이사르의 해방 노예의 손에 관리되었던 것이다. 어떤 자는 주인으로부터 소규모로 장사할 것을 허락받아서 모은 돈으로 자유를 되찾아 마침내 로마의 실업계에서 부유와 명성을 떨치는 신분으로 출세했다. 그런가하면 어떤 자는 내세에서 철인왕 또는 교회의 사제가 되기 위해, 현세에서는 그대로 노예로 지낸 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나르시스와 같은 자아도취에 빠진 난리 중의 부당한 권세나, 트리말키오처럼 영화를 누리는 젊은 부자의 화려한 생활을 거리낌 없이 경멸한 정통적인 로마 사람조차도, 절름발이 노예 에픽테토스(스토아파 철학자, 해방 자유민으로 많은 로마 인들에게 철학을 가르쳤다)의 조용하고도 맑은 지혜에 대하여 진심으로 존경했다. 또한 이름도 없는 수많은 노예나 해방 노예의 산이라도 움직일 듣한 열렬한 신앙에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니발 전쟁으로부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그리스도교로의 개종까지 5세기 동안 로마의 위정자들은 힘으로 제지하려고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눈앞에서 이 노예들의 신앙이 기적을 행하고 또한 그것이 되풀이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 자신이 여기에 굴복하고 말았다. - P167

181-3 오늘날, 서유럽의 해방 유대인 중에는 굳이 그들의 사회에다 근대 서유럽식의 민족 국가를 세움으로써 해방을 완성하려고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를테면, 팔레스타인 땅에 쫓겨났던 유대인을 복귀시키자고 하는 독자적 시온주의자(유대민족주의자)의 궁극적 목적은 몇 세기에 걸친 박해 때문에 생긴 특수한 심리적 컴플렉스로부터 유대 민족을 해방시키려는 데 있었다. 이 궁극의 목적에 있어서는 시온주의자들도 그에 반대 의견을 가진 해방 유대인 사상의 일파와 일치한다. 시온주의자나 동화주의자나 모두 ‘특수 민족‘이라는 생각으로부터 빠져나오려는 염원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시온주의자가 동화주의자와 의견을 달리하는 이유는 후자가 내세우는 방침이 불충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화주의자의 이상은 네덜란드나 잉글랜드, 또는 아메리카에 사는 유대인들이 그대로 ‘유대교를 신봉하되 단순히‘ 네덜란드 인·잉글랜드 인·아메리카 인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데 있다. 그들은 문명국에 사는 유대인 시민이 일요일에 교회에 가는 대신 토요일에 유대교회당(시나고그)에 간다고 해서 단지 그 이유만으로, 동화한 그 나라에서 만족할 만한 완전한 시민이 될 수 없다고 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 대하여 시온주의자들은 두 가지 대답을 한다. 첫째로, 가령 동화주의자의 방침이 그 지지자의 주장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해도 그것은 문명국에서만 해당될 뿐이지 실제로 문명국의 시민이 되는 행운을 가진 유대인의 수 중 온 세계에 퍼져 있는 유대인 수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들은 지적한다. 둘째로, 가장 좋은 환경 밑에 있다 할지라도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단지 ‘유대교를 신봉하는‘ 인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뜻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방법으로는 유대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시온주의자의 눈으로 볼 때, 네덜란드 인·잉글랜드 인·아메리카 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유대인은 다만 공연히 그 유대인적 성격을 손상시킬 뿐 그들이 선택한 국적이 네덜란드이건 다른 어떤 이방의 나라이건 그 나라 사람의 성격을 완전히 몸에 지닐 가망성은 전혀 없는 것이다. 만일 유대인이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무엘기> 85) 되는 데 성공하려면 동화의 과정은 개인적 기초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민족적 기초 위에 서서 이루어 나가야 한다ㅡ시온주의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개개의 유대인이 개개의 잉글랜드 인 또는 네덜란드 인으로 동화하려는 헛된 노력을 하는 대신 유대 민족은 잉글랜드 인이 잉글랜드에서 그러하듯이 유대인이 내 집의 주인으로서 행동할 수 있는 민족의 향토를 획득하거나 또는 회복함으로써 잉글랜드 국민이나 네덜란드 국민과 동화해야 한다.
시온주의 운동이 실제적인 활동을 실천 단계에 옮긴 지 불과 반 세기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사회 철학이 옳다는 것은 실제의 결과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팔레스티나의 유대인 농민 식민지에서 지난날의 ‘유대인 거리‘의 자손들이 완전히 면목을 일신하고 ‘이방인‘의 식민지 개척자 타입의 특성을 다분히 나타내는 개척적 농민이 되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실험의 비극적 불행은 이 지방에 전부터 거주하고 있던 아랍 사람과 화해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마지막으로 그 역사를 통해 한 번도 자극을 받지 않았고 별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도 않은 유대인 집단에 관해 이야기하기로 한다. 이들 집단은 모두가 변방의 땅에서 ‘성채‘ 안에 틀어박혀 살며 그 곳에서 완강한 농부, 또는 양성적인 고지 주민의 특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아라비아 반도는 서남단의 야만(예멘)의 유대인이나 아비시니아의 팔라샤 인, 카프카스(영어로 코카서스)의 유대계 고지 주민, 크리미아의 투르크 말을 쓰는 유대계 크림차크 인이 바로 그들이다. - P181

223-4 초원에서는 유목민과 사람 아닌 가축 무리와 함께 구성되어 있는 혼합 사회가 그러한 자연 환경에 대처하기 위해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수단이다. 그렇다고 해도 유목민은 엄밀하게 말해 그의 ‘인간 외의 협력자‘에게 의존하는 기생충은 아니다. 그들 둘은 서로 적절하게 도우며 살아간다. 가축은 자기의 우유뿐만 아니라 고기까지 유목민에게 주어야 하지만, 그 대신 무엇보다도 먼저 유목민이 가축을 위하여 생활 수단을 확보해 주는 것이다. 초원 지대에서는 이들이 서로 돕지 않으면 생존할 수가 없다.
이와 반대로 농지나 도시에서 이루는 환경에서는 이주해 온 유목민과 토착민 즉 ‘인간 가축‘과의 혼성 사회는 경제적으로 불건전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목자‘는 경제적으로는ㅡ정치적으로는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 없지만ㅡ늘 남아도는 여분이며, 따라서 기생적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견지에서 보면, 그들은 이미 양떼를 지키는 목자가 아니라 일벌을 착취하는 수펄이 되었던 것이다. 생산적인 주민의 노동이 부양해야 되는 비생산적인 지배 계급이 없다면 주민은 경제적으로 더욱 유복해질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유목민 정복자에 의하여 수립된 제국은 급속히 쇠퇴하여 멸망해 버리는 운명을 겪었다. 마그리브(북아프리카)의 위대한 역사가 이본 할둔(유목민과 농경민 관계를 중심으로 독창적인 역사철학을 세움. 1332~1406)은 제국의 평균 수명은 4대 즉 120년을 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역사가는 유목민 제국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한번 정복이 이루어지면 정복자인 유목민은 이제까지 살던 영토에서 나와 떠돌아 경제적으로 불필요한 여분의 인간이 되기 때문에 타락하게 마련이지만, 그들의 ‘인간 가축‘인 쪽은 자기 토지에 머무르며 여전히 경제면에서 생산적이기 때문에 차차 세력을 되찾는다. ‘인간 가축‘은 다시 자기의 인간성을 주장하고, 그들의 주인인 목자 즉 지배자를 나라 밖으로 추방하거나 동화시킨다. - P223

225-6 초원 지대 사회는 단순히 가축을 사육하는 인간, 그리고 가축 무리만으로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초원 지역의 땅에 나오는 생산물에 의존하여 살아가기 위해 기르는 동물 외에 그들의 일을 도와주는 다른 동물ㅡ개, 낙타, 말ㅡ도 기르고 있었다. 이들 보조 역할을 하는 동물은 유목 문명의 걸작품인 동시에, 또한 그들의 성공의 열쇠가 되었다. 양이나 소는 인간에게 쓸모있게 하려면, 다만 기르기만 하면 된다(하긴 이것만도 충분히 힘들고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개와 낙타와 말은 단지 기를 뿐만 아니라, 훈련까지 시키지 않으면 한층 어려운 그들의 임무를 해낼 수가 없다. 인간이 아닌 보조자를 훈련시키는 일이야말로, 유목민이 해낸 가장 훌륭한 업적이다.
그런데 오스만 제국이 아바르 제국과 달리 훨씬 오래 계속되었던 까닭은, 이렇게 뛰어난 유목민의 기술을 정착 사회의 조건에 알맞게 적응시킨 점에 있다. 오스만의 파디샤들은 노예를 훈련항여, 그들의 ‘인간 가축‘ 사이에 질서를 유지하는 일을 도와주는 인간 보조자가 되게 함으로써 그들의 제국을 지탱해 나갔던 것이다.
노예를 군인이나 행정 관리로 삼는, 이러한 주목할 만한 제도ㅡ유목민 천재에게는 그럴 듯 하지만, 우리에게는 낯선ㅡ를 오스만이 발명해낸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그것을 정착 민족을 지배했던 다른 몇 개인가의 유목민 제국ㅡ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제국ㅡ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기원전 3세기에 시리아 왕국으로부터 독립한 파르티아 제국에 노예 군대가 존재했던 흔적이 있다. 그것은 기원전 4세기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맞서려는 듯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야망을 때려 부순 군대 중 하나는, 모두 5만 명의 병력 가운데 자유인이 불과 400명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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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자신의 실패에 낙담했지만 실패는 그의 잘못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경험해야 했던 실패의 아픔은 15세기 인류가 안고 있었던 어쩔 수 없는 한계였던 것이다. - P410

420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를 탐험한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일이다. 그러한 곳을 찾아가 보아야만 역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즉 이제 역사도 경험 과학의 영역이 되는 것이다. 플라톤, 사도 바울, 표토르 대제와 같은 세계사의 주요 인물들이 없었다면, 이 세계는 과연 어떻게 달라졌을까? 고대 이오니아 그리스 인들의 과학 전통이 살아남아 발전했더라면 또 어떻게 됐을까? 역사를 바꾸는 데에는, 예를 들어 노예 제도를 자연스럽고 정당하게 받아들이는 여론을 압도할 만한, 어떤 강력한 시대적 요구와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그런데 2,500년 전 동지중해를 밝힌 등불이 꺼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또 산업 혁명이 있기 2,000년 전에 이미 과학적 방법론 및 기술과 공학에 대한 선구적인 개념이 있었다면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더 나아가 이렇게 진보된 생각들을 그 시대가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면 또 어땠을까? 그런 경우라면 아마 인류 역사는 1,000년 내지 2,000년은 앞당겨서 진보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지의 발명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과학적 업적 또한 1,000년 내지 500년 가까이 앞당겨졌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형성된 또 하나의 ‘지구‘에서는 레오나르도나 아인슈타인과 같은 인물이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외에도 너무나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남성이 한 번 사정할 때 수억 개의 정자가 나오는데, 이중에서 오직 하나의 정자만이 다음 세대의 생식을 위해 선택된다. 그런데 바로 이 선택을 통해서 그 다음 세대의 육체적, 정신적인 특징들이 결정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2,500년 전의 아주 사소한 상황들이 조금만 다르게 전개됐더라면 우리는 현재 이 자리에 있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런 생각에 기초한다면, 우리와 동시대를 사는 또 다른 다중 세계들이 무수히 존재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 P420

458-60 생명의 기원과 진화는 별의 기원과 진화와 그 뿌리에서부터 서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첫째, 우리를 구성하는 물질이 원자적 수준에서 볼 때 아주 오래전에 은하 어딘가에 있던 적색 거성들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우주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원소들의 원자 번호에 따른 상대 함량 비율의 분포가 별에서 합성되는 원소들의 상대 함량 비율과 딱 들어맞기 때문에 그것들이 모두 적색 거성과 초신성이라는 특별한 용광로와 도가니에서 제조됐음을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다. 우리의 태양은 제2세대, 또는 제3세대의 별일지 모른다. 태양에 들어있는 모든 물질, 아니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물질은 두세 차례에 거친 항성 연금술의 결과물이다. 둘째 지구에서 발견되는 무거운 원소들 가운데 어떤 동위 원소는 태양이 태어나기 직전에 근처에서 초신성의 폭발이 있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하기 때문이다. 어찌 이것을 우연의 결과라고만 치부할 수 있겠는가? 초신성에서 유래한 충격파가 성간 기체와 성간 티끌로 구성된 성간운을 통과하면서 그곳의 밀도를 증가시킴으로써 중력 수축이 유발됐을 것이다. 그 결과로 태어난 것이 우리 태양계이다. 셋째, 우리는 생명의 탄생에서 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새로 생긴 태양에서 쏟아져 나온 자외선 복사가 지구 대기층으로 들어와서 그곳에 있던 원자와 분자에서 전자를 떼어내면서 대기 중에는 천둥과 번개가 난무하게 됐고 이것이 복잡한 유기 화합물들의 화학 반응 에너지원으로 작용했다. 바로 이 과정에서 생명이 태어났던 것이다. 넷째,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생명 활동이 결국 태양 에너지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식물은 태양의 빛을 받아서 빛 에너지를 화학 에너지로 변환시킨다. 따지고 보면 모든 동물은 식물에 기생하여 사는 존재이다. 농사가 무엇인가? 태양 광선을 조직적으로 추수하는 방법에 다름이 아니다. 마지못해 응하는 식물을 매개체로 하여 태양 광선의 에너지를 긁어모으는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 농업이다. 따라서 인류는 전적으로 태양의 힘에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이다. 끝으로 유전의 관점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돌연변이라고 불리는 유전 형질의 변화가 진화를 추동한다. 자연은 돌연변이를 통해서 생명의 새로운 존재 양식을 찾아내는데 고에너지의 우주선 입자들이 돌연변이를 촉발하기도 한다. 우주선은 초신성에서 높은 에너지를 가지고 태어나 거의 광속으로 움직이는 하전 입자들을 뜻한다. 지구상에서 이루어지는 생명의 진화도 이렇게 그 근원을 따져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광대한 우주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질량이 큰 별들의 극적인 최후에서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P458

473-6 스와힐리 어로 ‘자유‘를 뜻하는 우후루라는 이름의 이 위성은 최초의 엑스선 위성 천문대였다. 이 위성은 1971년에 백조자리에서 초당 1,000번씩 깜빡거리는 밝은 엑스선원을 하나 발견했다. 이 엑스선 원은 그 후에 ‘백조자리 X-1‘이라고 명명됐다. 이 천체의 엑스선 밝기가 변하는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상관없이 언제 빛을 밝히고 언제 빛을 끄느냐 하는 정보가 백조자리 X-1을 가로질러 전달되는 속도는 결코 빛의 속도인 초속 30만 킬로미터를 넘을 수 없다. 그러므로 백조자리 X-1의 크기도 기껏 커 봐야 300킬로미터를 넘을 수가 없음은 뻔한 사실이다.(300,000km/s * 1/1,000s = 300km) 크기로만 보면 겨우 소행성 규모의 천체가, 성간 공간을 통과한 다음에도 관측이 가능할 정도로 강력한 세기의 엑스선을 방출한다니, 도대체 이 천체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백조자리 X-1의 위치는 가시광선으로 관측했을 때 고온의 청색 초거성이 보이는 자리였다. 직접 확인은 불가능했지만 천문학자들은 이 청색 초거성에 근접 동반성이 있음을 스펙트럼 선의 주기적 이동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었다. 즉 이 별은 혼자가 아니라 동반성과 함께 쌍성계를 이루는 별이었다. 쌍성계에서는 두 별이 서로 맞물려 돈다. 그러므로 궤도 운동의 관측자에 대한 상대 속도가 주기적으로 변한다. 이 변화가 도플러 효과 때문에 흡수 스펙트럼선의 주기적 위치 변화로 나타난다. 천문학자들은 여기에서부터 쌍성계 구성원들의 질량을 추정할 수 있는데, 백조자리 X-1의 동반성은 태양의 약 10배 정도의 질량을 갖는 것으로 판명됐다. 초거성은 여러모로 보아 결코 엑스선의 방출원이 될 수 없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숨겨진 동반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질량은 태양의 10배인데 크기는 겨우 소행성 정도라니 블랙홀이 아니고서야 이럴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엑스선의 원천은? 초거성에서 블랙홀로 빨려가면서 소용돌이치는 회전 원반에서 기체와 티끌들이 서로 스치며 지나가기 때문에 막대한 양의 마찰열이 발생한다. 이 열이 회전 원반의 물질을 엑스선이 방출될 정도의 고온으로 가열한다. 전갈자리 V 861과 GX 339-4, SS 433, 컴퍼스자리 X-2 등도 블랙홀의 후보 천체들이다. 카시오페이아자리 A는 초신성의 잔해로 알려진 전파 방출원이다. 이 초신성에서 나온 빛이 17세기경에 지구에 도착했을 터인데, 당시 유럽에 상당수의 천문학자들이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초신성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슈클로프스키는 숨어 있는 블랙홀이 폭발하는 핵을 먹어치우고 초신성의 불길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유럽 천문학자들이 초신성 폭발을 눈치챌 수 없었을 것이라는 설명을 제안했다. 현존 자료의 편린들만으로 블랙홀이라는 퍼즐을 완성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우주 공간에 쏘아 올린 망원경이 이런 자료의 편린들을 통해 전설적인 블랙홀의 행각을 추적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카시오페이아 A의 정체 규명에도 우주 망원경이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블랙홀을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한 한 가지 방편이 있다. 공간의 곡률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모눈이 그려진 신축성 좋은 얇은 고무막이 있다고 하자. 그 위에 질량이 작은 물체를 올려놓으면, 고무막의 표면이 움푹 패여 보조개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렇게 변형된 고무막 위에 구슬을 살그머니 놓으면 그 구슬은 특정 궤도를 그리면서 보조개로 굴러 들어간다. 행성이 태양의 주위를 특정 궤도에 따라 돌고 있듯이 말이다. 이런 식의 설명은 아인슈타인에서 비롯됐다. - P473

476-7 공간을 신축성 있는 천으로 비유했을 때 질량의 영향으로 변형된 공간이 중력으로 기능한다. 고무막의 예를 들면, 고무막이라는 2차원 공간의 특정 지역이 질량 때문에 국부적으로 3차원으로 구부러진 것이다. 이제 2차원의 고무막 공간을 3차원의 우주 공간으로 확장해 놓고 생각해 보자. 3차원 공간 역시 질량 때문에 국부적으로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4차원으로 변형된다. 특정 부위에 있는 질량이 크면 클수록 그 주변 공간도 더 심하게 변형될 것이다. 보조개가 더 깊이 파인다는 말이다. 아인슈타인의 비유를 더 밀고 나가면, ‘블랙홀은 공간에 패인 바닥 없는 보조개‘라고 주장할 수 있다. 당신이 그 보조개에 빠지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보자. 밖에서 봤을 때 당신이 다 빠져 들어가는 데 무한대의 시간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렇게 강력한 중력장에서는 기게적, 생물학적 시계가 완전히 멈춘 것으로 감지되기 때문이다. 한편 빠져 들어가고 있는 당신의 세계에서는 모든 시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중력에 따른 막강한 조석력과 강력한 복사를 당신이 ‘신의 특별 배려로‘ 어떻게든 견뎌 낼 수만 있다면, 그리고 당신이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검은 구멍이 자전하는 블랙홀이라면,(자전할 확률이 대단히 높다.) 당신은 시공간의 또 다른 점으로 출현할 것이다. 공간과 시간적으로 모처와 모시에 다시 나타난다는 말이다. 벌레가 사과에 침입하여 과육을 갉아먹고 나방이 돼서 빠져나가면 사과에 벌레의 입구와 출구를 연결하는 터널이 뚫린다. 벌레구멍, 즉 웜홀은 사과에 뚫려 있는 입구와 출구에 해당한다. 존재를 증명할 수 없지만, 학자들은 벌레 구멍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다룬다. 성간 공간이나 은하 간 공간에 중력이 파 놓은 벌레 구멍들이 있다면 그 구멍들을 연결하는 ‘우주 지하철‘을 타고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접근이 불가능한 우주의 구석구석을 보통 방법으로는 구현될 수 없는 쾌속으로 여행할 수는 없을까? 블랙홀이 우주의 아득한 과거, 또는 먼 미래로 우리를 데려가는 타임 머신의 역할을 할 수 있지는 않을까? 농담 비슷하게라도 이러한 생각들이 논의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우주가 얼마나 ‘초현실적‘인지 쉽게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 P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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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안일로 지내는 사람들
우리가 지금 든 몇 개의 예는 너무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하는 비평가가 혹시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ㅡ어려운 생활 상태에서 쉬운 생활 상태로 옮겨진 사람들은 물론 한꺼번에 잔뜩 먹는 굶주린 인간처럼 ‘망쳐지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훨씬 용이한 조건에 혜택을 입어온 사람들은 이 이점을 잘 이용하는 일을 충분히 기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에서 구별한 두 경우 중 후자 즉, 용이한 환경 속에만 있었으며, 우리가 아는 한 아직 그 밖의 환경에 몸을 내맡긴 일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이 경우, 상이한 환경으로 옮아간다는 교란 요소가 배제되어 우리는 용이한 환경 조건이 나타낸 효과를 순수한 상태로 연구할 수 있다. 다음에 예시한 사례는 약 50년 전에 서양 관찰자의 눈에 비친 니아살핸드(말라위)에서의 용이한 조건의 효과에 대한 실견기이다.

"이 끝없는 삼림 속에 마치 숲 속의 새둥지처럼 서로 두려워하고, 또 공통의 적인 노예 상인을 두려워하는 작은 토인촌이 여러 군데 자리잡고 있다. 그곳에는 옷도 없고, 문명도 없고, 학문도 없고, 종교도 없는 원시인, 그리고 생각하는 일이 없으며, 걱정이 없는 만족된 자연아가 천진난만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외모로 보기에는 참으로 행복스러워 보이고 거의 아무런 부족도 느끼지 않는다. ······아프리카 인은 종종 게으르다고 비난당하나 그것은 말의 오용이다. 그는 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처럼 풍요한 자연 속에 있으면서 더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들의 나태는 그의 납작한 코처럼 그 자신의 한 부분으로, 거북의 느린 동작이 비난 대상이 되지 않는 것처럼 그들도 비난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빅토리아조 시대의, 남서풍보다도 북동풍을 좋아하는ㅡ영국에선 남서풍이 부는 계절이 가장 좋은 계절, 북동풍이 부는 때는 그 반대ㅡ노력과 역행 생활의 전형이었떤 찰스 킹즐리(영국의 성직자, 그리스도교 사회주의를 주장했다)는 하루 종일 비파적을 불고 놀고 싶었으므로 ‘근면‘한 나라에서 도망쳐 나온 위대하고 유명한 「나라의 역사」라는 소설을 썼다. 그러나 이 태평한 자들은 고릴라로 퇴화하는 벌을 받았다.
로토스를 먹으며 안락하게 지내는 인종에 대해 그리스의 시인과 근대 서유럽의 도덕가가 나타내는 태도에 차이가 분명 있다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호메로스의 경우에는, 로토스를 먹는 인종과 그들이 살고 있떤 로토스국이 가장 놀라운 유혹적 매력을 지닌 것이며, 문명화해가는 그리스 인의 앞길에 놓인 악마의 함성이었다. 이에 반해 킹슬리는 만사자유인을 모멸과 비난의 눈으로 바라보고, 일체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치 근대 영국인다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는 안락한 생활을 찾아 이동하는 이들 유민을, 물론 서유럽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이익을 위해 영국에 병합하여, 그들에게 바지를 입히고 성서를 주는 일이 절대적인 의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관심사는 시인도, 부인도 아닌 이해하는 일인 것이다. 이러한 교훈은 <창세기> 처음 몇 장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아담과 이브가 그들의 로토스국이었던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뒤 비로소 그들의 자손들이 농경과 도금술과 악기를 발명하게 된 것이다. - P121

130 시리아 사회의 전설에 보면 이스라엘 인의 신 야훼가 인간에 대해 적용할 수 있는 가장 엄중한 방법으로 이스라엘 왕을 시험한 이야기가 있다.

"하느님께서 밤의 꿈에 솔로몬에게 나타나 말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면 좋겠는가?" 솔로몬이 대답했다. "······지혜를 종에게 내려주소서" 솔로몬의 청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했다. "네가 이 일을 구하되 자신을 위한 장수를 구하지 않고, 또 자신을 위해 부를 구하지 않고, 또 자신의 적의 생명도 구하지 않고, 또 자신을 위해 불를 구하지 않고, 또 자신의 적의 생명도 구하지 않고, 오직 송사를 분별하는 지혜를 구했기 때문에 나는 너의 말대로 지혜롭고 현명한 마음을 주노라······ 너와 같은 자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네가 구하지 않은 부와 명예도 주겠노라.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열왕기 상> 3:11~13)
이 솔로몬 왕의 선택에 대한 전설은 ‘선민‘의 역사를 비유한 이야기이다. 정신적 이해력이라는 점에서 이스라엘은 필리스티아 인의 군사적 용감함과 페니키아 인의 해양적 용감함을 능가했다. 그들은 이교도들 구하는 것을 구하지 않고 먼저 신의 나라를 구했다. 그러자 구하지 않은 모든 것도 그들에게 저절로 주어졌다. (<마태> 6:31~33, <누가> 12:29~31). 적의 생명에 대해 말하면, 필리스티아 인은 이스라엘의 수중에 들어갔다. 부에 대해 말하면, 유대인은 티로스와 카르타고의 유산을 이어받았고, 페니키아 인이 미처 알지 못했던 대륙에서 페니키아 인이 꿈에도 생각지 못한 대규모 상거래를 하게 되었다. 장수에 대해 말하자면, 페니키아 인이나 필리스티아 인이 모습을 감춘 지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도 아직 그들을 몰아낸 유대인은 그때와 똑같이 여전히 특수한 민족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고대의 시리아에 있어서 그들의 이웃사람은 세상의 도가니 속에 끌려들어가, 새로운 모습과 이름을 새긴 화폐로 다시 주조되었으나, 이스라엘은 이교도들을 거의 다 굴복시킨 이 연금술ㅡ세계 국가와 세계 교회와 민족의 이동이라는 도가니 속에서 ‘역사‘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는ㅡ을 일체 받아들이지 않았다. - P130

158 그러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손실이 도나우 합스부르크 왕국의 이익이 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도나우 왕국의 영웅시대도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함께 종말을 고했기 때문이다. 오스만 세력이 붕괴됨으로써 동남 유럽에 다른 세력이 자유로이 들어갈 수 있는 공지가 마련되었으나, 그와 동시에 도나우 왕국에 그때까지 자극을 주고 있던 압박에서 해방시켰다. 도나우 왕국은 왕국이 성립되도록 끊임없는 도적으로 자극을 준 세력의 뒤를 따라 쇠퇴하여 결국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 운명을 함께 했다. - P158

159-60 끝으로 제1차 대전과 제2차 대전의 중간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와 투르크의 대조적인 태도를 살펴보기로 하자. 1914~18년의 대전 후 그들은 함께 공화국으로서 새로 탄생했으며, 한때 서로를 적으로 여겨왔던 제국의 모습을 탈피했다. 그러나 유사한 점은 그것만으로 끝났다. 오스트리아 인은 패전 5개국 국민 중에서 가장 심한 고통을 입었으며 가장 순종적이었다. 그들은 새 질서를 극도의 단념과 극도의 회한으로 순순히 받아들였다. 이에 반해, 투르크 인은 패전 5개국 중 유일하게 휴전 뒤 1년도 되기 전에 재차 무기를 들고 승전국과 싸움을 일으켜, 승전국이 그들에게 강요하려던 강화 조약의 근본적 개정을 요구하고 그 목적을 이룬 유일한 국민이었다. 그와 동시에 투르크 인은 그 젊음을 되찾고 그 운명을 변화시켰다. 그들은 이미 퇴폐한 오스만 왕조 밑에서 망쳐진 채 버림받은 제국의 어느 한 지방을 지키려고 싸우는 것은 아니었다. 왕조로부터 버림을 받자 그들은 다시 한번 국경전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초대 술탄의 오스만처럼 실력으로 선출된 지도자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것은 그들의 조국을 확장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1919~22년의 그리스·투르크 전쟁의 결전장이 되었던 인 에뉘(아나톨리아 고원의 서북단에 있는 거리)는 600년 전에 셀주크족의 마지막 왕이 오스만 왕조의 첫 왕에게 할당해준 본래의 세습 영토, 바로 그 ‘술탄의 새로운 시작의 땅 안‘에 있다. 수레바퀴는 완전히 일회전 한 셈이다. 첫 막이 올려질 때 나타났던 그 수레가 무대 뒤켠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 P159

165-6 살아 있는 유기체의 어떤 특정한 기관 또는 기능이 사용 불가능하게 되어 같은 종류에 속하는 다른 유기체에 비해 불리한 상태에 빠지게 되면, 이 도전에 대하여 다른 기관 또는 기능을 특별히 많이 사용하게 되므로, 결국 제2의 활동 분야에서 그 능력이 동료를 능가하게 되어 제1의 활동 분야상의 핸디캡을 메워주는 경향이 생기게 된다.
예를 들어, 장님은 눈이 보이는 정상적인 사람이 보통으로 가지고 있는 촉각보다도 그 촉각을 예민하게 발달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것과 거의 비슷한 현상이 사회 전체에서 발견된다. 우연에 의해서이건 자기의 행위에 의해서이건, 어쨌든 사회적으로 제재를 받고 있는 집단 또는 계급은 어떤 종류의 활동 분야에서 불리한 조건에 놓여지거나 그 분야에서 완전히 축출당하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는 그런 도전에 대하여, 그 활동력을 다른 분야에 집중시킴으로써 다른 것을 능가하는 식으로 웅전하는 수가 많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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