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적 수행 가운데 위파사나 명상법이 있다. 그 명상법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건 보는 것이다. ‘보면 사라진다’가 이 명상법의 기본 원리다. 뭘 보는가? 자신의 번뇌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어떻게 변화, 소멸되어 가는지를 보라는 것. 그러면 번뇌를 소멸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보면 사라진다고? 잘 믿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쉽다면 누가 못한담? 맞는 말이다. 하지만 틀린 말이기도 하다. 보기만 해도 사라진다는 명제는 방법적으로는 참 간단하다. 그런데 본다는 행위 자체는 실로 어렵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개는 자신도 모르게 실수로, 습관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한다. 당연히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그런 다음엔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주로 변명, 아니면 원망이다. 그래서 또다시 반복한다. 어떻게 보면 인생 전체가 이런 식으로 반복되는 쳇바퀴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보라!’고 하는 것이다. 자신이 지금 어떤 감정과 의식의 상태에 있는지를. 가장 간단하고도 근본적인 훈련은 호흡관찰이다. 호흡을 면밀히 관찰하노라면 온갖 잡념과 망상이 흘러가는데, 그것들을 잘 보기만 해도 무차별적으로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다는 이치다. 하지만 이 120 것 자체가 엄청난 집중력을 요한다. 집중(集中)이란 ‘중(中)을 잡는다’는 말로 ‘지금, 여기’와의 완벽한 일치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집중력 자체가 자신의 행위와 말과 생각을 통찰하는 ‘마음의 근육’에 다름 아니다. - P119

그때 비장의 카드로 쓸 수 있는 오행이 바로 용신이다. 필요한 오행이 팔자 안에 있다면 당연히 그것을 용신으로 삼으면 되고, 원국에 없으면 지장간에 있는 히든 카드라도 찾아내야 한다. 만약 대운에 용신이 온다면 절호의 찬스라 여기고 힘을 충만하게 쌓아서 대운이 불리하게 바뀌는 시절을 대비해야 한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외부에서라도 끌어다 써야 한다. 무슨 뜻인고 하니, 인맥을 적극 활용하라는 것이다. 즉, 용신에 해당하는 기운을 많이 가진 친구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한다. 같은 기운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있으면 처음엔 잘 통하는 듯 보이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불통의 상태가 되어 버린다. 비슷비슷한 정서의 회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타자들의 향연’이라는 말이 있다. 낯선 것과의 마주침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용신의 원리도 바로 거기에 있다. - P121

십신(十神) 팔자와 ‘표상’의 마주침

언급했듯이, 여덟 개의 카드로 읽을 수 있는 첫 번쨰 기호는 오장육부의 생리적 배치다. 오장육부 역시 음양오행에 배속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배속은 곧 칠정, 곧 ‘희노우사비경공’(喜怒憂思悲驚恐)의 흐름이기도 하다. 이 칠정의 관계와 구성은 마음의 행로를 결정한다. 생리와 심리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존재성의 서로 다른 표현이자 이름이라고 보면 된다. 이 존재성이 사회적 조건과 마주치는 기운의 배치를 십신이라고 한다. 팔자의 생극적 흐름에 부여된 ‘사회적 표상’이라 할 수 있다. 일간을 중심으로 모두 열 가지의 힘이 형성되기 때문에 ‘십신’이라고 한다.
비겁(비견과 겁재)은 일간과 동일한 오행을 뜻한다. 일간이 을목이라면 목기를 지닌 카드들이 비겁이 된다. 비견(比肩)은 음양도 같기 때문에 말 그대로 나와 나란히 어깨[肩]를 겨루는[比] 기운이다. 나의 확대 혹은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겁재는 말 그대로 ‘나의 재산을 겁탈한다’는 의미인데, 나와 맞서는 라이벌이라 보면 된다.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그래서 겁재다. 겁재라고 하면 기분이 좀 언짢을 수 있겠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뺏길 게 있다는 건 그만큼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진 게 133 없으면 뜯길 것도 없는 법이다. 또 라이벌이나 적을 가지려면 유형이든 무형이든 그에 걸맞은 자산이나 내공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비견과 마찬가지로 나의 팽창 혹은 확대라고 볼 수 있다.
식상(식신과 상관)은 일간이 낳는 오행이다. 즉 내가 외부를 향해 생하는 기운이다. 밥, 말, 끼, 자식 등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일간과 음양이 같으면 식신(食神)이다. 말 그대로 밥그릇의 신, 곧 평생의 먹거리다. 식신이 있으면 어디를 가도 굶지는 않는다. 먹는 것도 좋아하고 먹거리를 만드는 것도 좋아한다. 좌우지간 먹는 것과 인연이 깊다는 뜻. 말도 유창하다. 자식복도 있다. 인생살이에서 ‘말’과 ‘밥’, 그리도 ‘생식’이 같은 계열임을 말해 주는 개념이다. 일간과 음양이 134 다르면 상관이다. 식신이 자연스러운 스텝이라면 상관은 일종의 엇박이다. 말이든 밥이든 생식이든 좀 ‘튀는’ 것으로, 일종의 불규칙 바운딩에 해당한다. 규칙을 일탈했기 때문에 때론 비범한 재능이 되기도 하고, 때론 비난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상관(傷官; 관성을 상하게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연예인들, 그중에서도 예능인들이 특히 식상에 강하다. 말과 끼가 재산이요 밥그릇이지만, 그러다 보면 자칫 구설에 오르기 십상이다. 그런 점에서 말은 정말 힘이 세다.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이 이 말이다. 또 말에 수반되는 끼(리액션 혹은 어팩션)도 포함된다. 말이든 끼든 내가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런지는 의문이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말들(혹은 행동)이 참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에 의해 사건이 구성되고 인연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칼보다 무서운 게 세치 혀" "말 한 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 경구들이 거기에서 나온 것이리라. 또 식욕과 성욕은 함께간다. 끼는 달리 말하면 에로스의 무의식적 표출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요즘은 문화 전체가 ‘섹시’ 컨셉이니 그야말로 식상이 만발하는 시대인 셈이다.
다음, 식상이 낳는 기운이 재성(정재와 편재)이다. 일간을 중심으로 보면 내가 극하는 기운에 해당한다. 식상으로 기운을 내고 그걸 밑천으로 유형의 자산을 만들어 내는 힘, 그래서 재성이다. 재성이라고 하면 바로 돈을 떠올릴 테지만, 단지 화폐화된 것들만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물질화된 것들이 다 여기에 포함된다. 재성부터는 음양관계가 달라진다. 일간과 음양이 같으면 편재, 다르면 정재다. 편재 135 는 불규칙한 재성, 정재는 규칙적인 재성. 전자는 비정규직이나 프리랜서의 활동에 가깝고, 후자는 정규직이나 안정된 사업에 가깝다. 요즘 같은 시대야 정규직이 최고 선망의 대상이라 정재가 더 좋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정재는 좀 답답한 재성에 해당한다. 성실하고 믿음직하지만 다소 쫀쫀해 보이는 속성이랄까. 편재는 그와 반대다. 불규칙한 재물을 의미하니 재물이 들락날락하는 변수가 많은 편이다. 그래서 불안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오히려 똑 같은 액수를 가지고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도 있다. 하여, 진짜 재물의 주인이 되려면 정재보다는 편재가 있어야 한다. 얼마를 버는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어떻게 버는가이다. 정규직을 지향한다지만 정작 직장인들의 꿈은 창업이나 독립 아니던가. 또 모든 인간은 궁극적으로 프리랜서다. 첫 출발도 그렇지만, 평생을 정규직에 복무한다 해도 정년을 하고 나면 결국 프리랜서로 귀환할 수밖에 없다. 아, 물론 우리 시대의 편재는 부동산이나 주식 등 투기성 자본이 많아서 편재를 이렇게 쓸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프리랜서가 아니라 돈의 노예가 되기 십상이다.
자, 일단 식신과 재성까지는 내가 주도하는 세계다. 내가 생하고 또 극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말하고 낳고 만들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구나 이 리듬을 타야 한다. 말하자면 나의 존재성 혹은 기운을 발산하는 리듬이라 할 수 있다.
발산의 흐름이 있으면 수렴의 작용이 있게 마련이다. 재성 다음이 관성(정관과 편관), 곧 나를 극하는 기운이다. 왜 관성인가? 관(官) 136 이란 조직 혹은 그와 비슷한 관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나를 어떤 조건으로 밀어넣는 힘을 뜻한다. 내 활동의 바운더리와 토대를 구획하는 속성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위치에 있건 내가 속한 조건이면서 동시에 책임을 지는 관계망이다. 그래서 조직력 혹은 리더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서도 일간과 같으면 편관, 다르면 정관이다. 굳이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따라서 관성을 써야만 변화의 마디를 넘어갈 수 있다. 생물의 진화건 문명의 발전이건 혹은 혁명적 변화건 다 주체를 강하게 압박하는 어떤 장애물 혹은 문턱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선 먼저 고난이 확실하게! 주어져야 한다. 십신 가운데 ‘정관’을 최고로 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를 강하게 압박해 오는 조건에 처하게 되면 선택은 둘 중 하나다. 그 압박에 무릎을 꿇거나 아니면 밀고 당기는 과정 속에서 내가 다른 것으로 변용되거나. 소위 고난이나 역경이란 이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누구도 사회적 존재로서의 힘과 덕성을 발휘할 수 없다. 인류학적으로 보면, 모든 종족, 모든 문명권이 청년들에게 이니시에이션(통과의례)을 거치도록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학교의 본래 목적 역시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 시대엔 학교가 그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 학교에서 사회적 관계에 필요한 힘과 덕목을 한 가지도 배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전 독재정권 시절엔 학교가 억압과 금기의 장소였다. 이것은 관성의 상극이 지나친 경우다. 당시 전국민에게 암기를 강요했던 「국민교육헌장」이 잘 보여 주듯이, 모든 개인은 민족과 국가를 137 위해 이 땅에 태어났고, 그걸 연마하는 것이 학교였다. 이렇게 관성의 압박이 심하면 비겁이 제대로 활동하기 어렵다. 그래서 다들 개성과 창조성을 감추고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억압과 강제가 지속되다 보면 당연히 반대의 힘들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그것이 80년대 민주화운동이었다. 그때 대학생들은 저항과 투쟁의 상징이었다. 독재와의 투쟁, 그것이 그 시절의 통과의례였던 것이다. 80년대 학생운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있을 수 있지만, 당시 청년들은 정말 기세등등했다. 입학한 지 두어 달만 되면 시위에 참여하고 짱돌을 던지고 화염병을 투척한다. 바로 코앞에서 다연발 최루탄이 터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지금 청년들로선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용기와 배짱이다. 철학적으로는 더 기고만장했다.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인생을 역사와 혁명을 위해 기꺼이 바치겠다고 할 정도로 ‘지적 파토스’가 흘러넘쳤다. 나처럼 체력도 후지고 세계관도 영 모자랐던 경우도 시대적 소명에 대해 늘 되뇔 수밖에 없었던 시대, 그게 바로 불의 연대라 불리는 80년대다. 한편으론 고난의 시대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당시 청년들은 그 시대의 힘으로 청춘을 통과했으니 대단한 행운이기도 했다. 관성이라는 건 바로 이런 의미다.
하지만 지금은 반대상황이 되었다. 민주주의의 형식적 확대와 자본의 무한한 증식으로 학교는 이제 서비스센터가 되어 버렸다. 초중고의 목적은 오직 대학입시, 또 대학의 목적은 오직 취업(정규직)이다. 관성은커녕 온통 재성만을 연마하도록 주입한다. 시대적 소명 138 같은 건 사라진 지 오래고, 성공의 척도는 다만 연봉일 뿐이라고 가르친다. 학교에서도 또 집에서도. 그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즉 돈을 사회적 관계에서 어떻게 쓸 것인가는 전혀 가르치지 않는다. 소유에 대한 집착만 지독하게 키워 주는 셈이다. 재성이 곧 소유욕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데도 결국 우리 시대에는 재성이 소유와 즈익으로 고착되는 ‘홈파인 회로’가 만들어진 것이다. 하여, 아이들은 교환 경제를 넘어선 증여와 보시에 대해선 듣도 보도 못하고 자라게 된다. 명리학적으로 보면 재성과 관성 사이에 철옹성이 놓인 것이다. 관성은 재성을 순환시키면서, 곧 내가 이룬 것을 사회적으로 환원하면서 비로소 작동한다. 그것이 재능이건 힘이건 돈이건 간에, 돈을 무작정 풀어서 방탕하게 쓴다면 그건 오히려 식상에 가깝다. 관성은 그 돈이 흐르는 방향을 규정하는 힘이다. 리더십이나 경영능력 같은 것에 해당한다. 이런 활동에는 명분과 의리, 그리고 사회적 차원의 인정욕망이 수반되어야 한다. 자신의 행동과 말에 책임을 지고 타자들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는 속성, 그것이 곧 관성이다. 그릇 혹은 내공이라는 말과도 상통한다. 이걸 연마하는 것이 청춘이고 학교인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 시대 학교에선 사람과 사람이 서로 연결되는 장이 없다. 교사와 학부모는 학생들을 모래알처럼 흩어 놓기 바쁘다. 경쟁을 부추기고 불안과 의심을 증폭시키고 여차하면 갈라 놓기에 급급하다. 책임감과 리더십은 고사하고 우정과 연대의 기초조차 배울 기회가 없다. 그래서 학생들은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인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재성에 대한 탐착은 있는 139 대로 키우고 관성은 증발시키는 것, 우리 시대 교육이 얼마나 무용하고 위태로운지를 한눈에 보여 주는 중요한 지표다. 하여, 십대를 몽땅 학교에서 보내고서도 통과의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한 청춘들이 부지기수다. 그 결과, 독재정권 시절보다 더 나약하고 무력한 청춘들이 되고 말았다. 엄청나게 많은 배려를 받고 있으면서도 늘 결핍과 박탈감에 시달리고 뚜렷한 이유도 없이 자신들이 가장 불행한 처지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 세상에 온전한 제도란 불가능하다. 이걸 이루면 저것이 부족해지고, 저걸 보충하면 이것이 모자라게 되는 법. 그것이 인생과 우주의 이치가 아닐지. 그래서 역사에는 진보가 있을 수 없다. 역사적 실천이란 어떤 정해진 목표지점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배치 속에서 ‘단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일 뿐이다. 다윈이 말하는 진화의 원칙도 마찬가지다. 생명의 진화에는 목표도, 방향도 없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우주의 중심이고 거기서 단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바로 진화일 뿐이다. 흔한 속담처럼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고,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인 것이다.
관성이 낳는 기운이 인성(정인과 편인)이다. 인성은 일간인 나를 낳아 주는 기운이다. 나의 존재감을 높여 주는 무형의 베이스라 생각하면 된다. 관성의 혹독한 마디를 넘어야 인성에 도달한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모든 오행이 그렇지만 관성 역시 이중적이다. 나를 극하면서, 동시에 나의 베이스이자 모태인 인성을 낳아 주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관성의 단계를 제대로 밟지 못하면 인성을 생성시킬 수 140 없다. 나를 극하는 기운에 충분히 노출되어야 그 팽팽한 긴장 속에서 상생의 관계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럼, 나를 낳아 주는 기운이란 대체 무엇일까? 공부 혹은 지성이다. 생명의 원천이 앎이라는 사실, 사주명리학이 전해 주는 기막힌 메시지다. 인성의 인(印)은 도장이라는 의미다. 대지, 문서, 명예 등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하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 이때의 공부는 무형의 통찰력이다. 인간은 아는 만큼 살아 내고, 사는 만큼 알 수 있다. 인생의 행로에서 무지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죽음이 왜 두려운가? 모르기 때문이다. 죽음이 삶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죽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두렵고 무서운 것이다. 부처와 공자, 예수 등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이 하나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친 것은 이런 맥락이다. 죽음의 공포로부터의 자유 혹은 해방, 예나 이제나 인류의 위대한 지혜는 모두 여기로 수렴된다. 문명이 발달하고 수많은 혁명이 일어나도 인류가 결코 종교적 가르침으로부터 떠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명과 혁명, 역사와 경제에 대한 담론들은 결코 죽음을 설명하지 못한다. 죽음은 탄생과 마찬가지로 자연과 우주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의 지혜가 없다면 삶의 비전 또한 무력하다. 죽음이 배제된 삶, 그것은 반쪽 이하에 불과하다. 그래서 삶도 늘 위태롭다. 요컨대, 무지는 모든 번뇌의 원천이다. 하여, 공부는 선택이 아니다. 존재의 근원적 토대다ㅡ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내가 사주명리학에 매료된 가장 141 큰 이유가 바로 이 인성이라는 개념이었다. 한낱 ‘구복의 노하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공부운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고, 그것이 나의 존재감을 드높여 주는 상생의 기운이라니, 명리학이 운명의 우주적 비전으로 격상되는 순간이었다.)
인성은 바로 이 공부의 존재론을 말해 준다. 일간과 음양이 같으면 편인, 다르면 정인이다. 식상에서 재성으로 이어지는 발산의 흐름만 있으면 아마 사람들은 금방 탈진해 버릴 것이다. 발산의 흐름을 멈출 수가 없을 테니 말이다. 그 흐름을 제어하고 거두면서 내적으로 단련시키는 리듬이 관성과 인성이다(‘십신’에 대해 좀더 탐구하고 싶으면 안도균, <운명의 열쇠를 찾아서>, 『누드 글쓰기』 참조).
자, 이렇게 해서 카드 여덟 개의 봉인이 또 하나 풀렸다. 음양오행과 생극의 동그라미 속에서 볼 때랑 십신의 흐름 속에서 볼때랑 느낌이 아주 다를 것이다. 물론 두 개의 차원을 동시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오행적으로 목/화가 많은 명리가 있다고 치자. 여기서 목화가 비겁과 식상인지 아니면 관성과 인성인지를 따져 봐야 한다. 둘다 목화지기가 많은 사주라고 해도 목화가 식상·재성인 경우와 관성·인성인 경우는 아주 다른 운명의 지도에 속한다. 용신을 뽑을 때도 마찬가지다. 목기가 필요하다고 했을 때 목기가 인성에 해당하는 것인지 식상에 해당하는 것인지에 따라 그 동선과 현장은 아주 달라진다. 예컨대, 계수 일간의 경우, 식상이 없는 팔자가 있다고 치자. 그래서 식상의 기운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는 식상이 목기운이다(→수생목). 식상은 ‘밥과 말, 끼’라고 했다. 그런데 142 그게 목기운이라고? 목기는 그 자체로 교육과 관련되어 있다. 우주적 인과론에서 보자면, 사람을 키우는 것과 나무를 키우는 것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용신은 말로 하는 교육, 강의와 글쓰기가 가장 적합하다. 이런 식으로 읽어 내는 것이다.
비겁, 식상, 재성, 관성, 인성 ㅡ이 열 개의 배치는 존재의 리듬이 ‘사회체’와 마주칠 때 각인되는 기본코드에 해당한다. 언제 어디서 태어나든 인생에는 이 열 개의 힘들이 각축한다. 누구든 자신의 힘과 재능을 발휘하여 밥벌이를 하고(식상→재성), 사회적 조건 안에서 관계를 만드는 훈련을 하고(관성), 그 과정에서 매 순간 배움을 닦아야 한다(인성). 이 과정을 밟지 않아도 좋은 사람이 있는가? 없다! 누구는 오직 밥벌이만 하고 누구는 오직 공부만 해야 한다면 그게 바로 신분사회다. 인류가 신분을 해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렀는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명리학적으로 보면, 신분사회란 모든 이들의 팔자를 한두 가지 방향으로 고정시켜 놓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신분사회가 해체되었다는건 이 편향된 고정성을 벗어나 모두가 십신의 전 과정을 스스로의 힘으로 겪어 낼 수 있음을 뜻하는 셈이다. 요컨대 이 십신은 계급과 세대, 직업과 성별을 불문하고 누구나 거쳐야 하는 관문들이다. 여기서도 차이와 운동, 곧 순환이 핵심이다. 식상이 재성으로, 재성에서 관성으로, 관성에서 인성으로 이어지는 이 리듬을 제대로 밟아야 일간인 내가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다. 그렇게 매끄러운 순환을 거치고 나면 그 힘으로 또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건 끊임없이 내가 143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운동과 차이는 같은 말이기도 하다. 일찍이 우임금이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일신우일신’ (日新又日新), 이것이 가능하다면 누구든 최고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 P132

일간이 나의 명주고 비겁이 나의 수평적 확장이라고 했다. 그럼 비겁이 일종의 무게중심인 셈인데, 무게중심을 잘 지키려면 내가 스톡(stock)만 해서는 안 된다. 순환의 강밀도를 조정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밀고 당기고 조이고…… 비겁이 튼실하다는 건 바로 이 조절능력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겁이 강해지면 주체성이 확고해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주체성이 아니라, 고집과 탐착이 강해진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아상(我相)이 견고해진다. 그렇게 되면 식상, 재성, 관성, 인성이 다 파극당할 염려가 있다. 반대로 비겁이 약하면 반대의 양상이 펼쳐진다. 자신이 그저 다른 힘들이 오고가는 통로가 되어 버리니 근기가 약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자기를 버리고 다른 오 145 행과 합(合)을 이룸으로써 다른 오행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일간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중심이 현저히 교란될 가능성이 높다. 그럴 때는 당연히 다른 힘들이 나의 서포터즈가 될 수 있도록 치열하게 훈련을 해야 한다. 결국 신강하면 신강한 대로, 신약하면 신약한 대로 다 그 나름의 강점과 애로사항이 있는 셈이다. 거기에 사회적 가치와 표상이 덧붙여질 때 각종 차별상이 부각되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팔자가 좋다, 나쁘다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팔자의 잠재력을 보려면 이 차별상과의 대결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어떤 팔자를 타고나도 이 차별상 안에 들어가면 운명을 사랑하기란 불가능하다. 특이성이 사라진 곳엔 위계와 서열이 지배하게 되고 거기에선 모두가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운명을 긍정할 수 있는 원초적 토대 자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생극의 파노라마에서 십신의 각축장으로 들어오면 특히 이 점을 더더욱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팔자를 십신의 차원에서 재구성해 보면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나온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리듬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식상생재(食傷生財). 곧 식상이 재성을 생하는 경우, 이것은 유형적인 것으로 발산하고 표현하는 장이다. 말과 음식, 성욕 등으로 기운을 내고 그것이 구체적인 물질적 재화와 자산을 구축하는 흐름이다. - P144

이것이 관성에서 인성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리듬이다. 식상은 생성의 흐름이고 재성은 상극의 리듬이다. 상생과 상극이 이루어 147 지면 하나의 물건, 그것이 무엇이든 구체적인 현장이 만들어진다. 여기서 그치면 다시 또 내고 쌓고 하는 스톡으로 진행된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자기 팔자와는 무관하게 ‘식상생재격’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 배터리가 방전된다. 내가 생하고 내가 극하는 기운으로만 살기 때문이다. 식상생재격으로 타고난 사람도 계속 이렇게 살면 멍~하게 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야 이렇게 살면 몸이 성할 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휴가를 내거나 여행을 떠난다. ‘나를 충전해야겠어’라고 하면서. 재성에서 곧바로 인성으로 튀는 것이다. 관성을 거치지 않고 바로 인성으로 튀면 일시적으로 안정이 되고 편안할 수 있지만 돌아오면 도루묵이다. 관성이라는 관문을 넘지 않고 편안한 울타리로 들어가 안주하는 탓이다. 결국 돈만 날리고(재성은 인성을 극한다) 되돌아와서 다시 이번엔 식상이라는 단계도 건너뛰고 바로 재물을 구하려 든다. 결국 평생 동안 재물과 인성 사이를 오락가락하게 된다.
이럴 때는 반드시 관성을 용신으로 써야 한다. 관성이란 ‘타자들과의 네트워킹’이다. 익숙한 존재들과의 관계는 관성이 아니라, 식상에 가깝다. 계모임이나 동호회, 친목단체 등등. 이 관게에선 나의 변용이 불가능하다. 비슷한 상태의 확장과 변주만 있을 뿐. 반대로, 관성은 낯설고 불편한 관계를 감수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책임을 져야 하고 갈등과 충돌도 불사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전혀 새로운 기운이 형성된다. 그것을 바탕으로 재물을 모을 수도 있다. 그 재물이 다시 관성을 낳기도 하고. 따라서 관성을 적극 활용하면 재성과 148 인성이 서로 맞서는 형국에서 재ㅡ관ㅡ인으로 이어지는 순환이 이루어질 수 있다.
관인상생도 역시 상극과 상생이다. 먼저 관성은 나를 극하는 기운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나를 생해 주는 관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식상생재와는 반대의 흐름이다. 먼저 형극을 감내하면 그 다음엔 아주 느긋하게 나를 생성시켜 주는 대지의 품에 들어설 수 있다. 관성은 나를 규정하고 압박하는 무형의 관계망이다. 거듭 말하지만, 관성의 단계를 밟지 않으면 나는 변용이 불가능하다. 비겁은 나의 양적 확대고, 식상은 그 안에서 나오는 것이고, 재성은 양적 다양성으로 귀결될 뿐이다. 이 단계에는 질적 전환의 과정이 없다. 식상생재로 이어지는 경우 사회적 적응력은 뛰어난 반면 크게 변화를 겪진 못한다. 동일성의 궤도 위를 왕복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관성은 내가 다른 존재로 변이되는 통과의례이자 관문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다. 가수들이 마치 스포츠 선수처럼 경연대회를 하다니. 이거야말로 스스로 자기를 극하는 조건에 뛰어든 꼴이다. 노래는 원래 식상의 힘이다. 인기는 비겁에 해당하고. 즉, 가수라는 직업은 나와 비슷한 취향의 사람들과 공통감각을 주고받으면서(비겁) 즐겁게 놀고(식상) 그 즐거움을 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재성) 흐름을 타는 것인데, 그런 패턴을 가로질러 다음 마디로 넘어간 것이다. 사회적 시선과 경쟁심이 작동하면 이젠 돈이 문제가 아니다. 자존심, 예술혼, 나아가 내공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그래서 그 마디를 넘으면 노래실력은 149 물론 인생 자체에 대하여 큰 공부를 하게 된다. 노래가 갑자기 인생과 철학의 그릇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나가수’ 스타들 가운데는 이 프로를 통해 인생역전을 한 경우가 많다. 국면의 대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이게 바로 관성을 통한 ‘일간’의 변용에 해당한다. 그런 점에서 십신의 다섯 스텝이 하나하나 모두 중요하지만 가장 결정적 마디는 뭐니뭐니해도 재성에서 관성으로 가는 길목이다.
자, 이 정도면 대강 식상생재의 흐름과 관인상생의 흐름이 잡힐 것이다. 이걸 바탕으로 다양한 배치의 변화를 읽어 내면 된다. 예컨대 비겁이 과다할 경우, 그러면 당연히 나에 대한 팽창욕이 강하니까 다른 기운이 약할 수밖에 없다. 또 인성과 식상으로 이루어진 경우는 상생으로만 되어 있으니 구체적인 현장과 유형적 성취가 어려워진다. 또 재성과 관성으로 이루어진 경우는 상극으로만 되어 있으니 몸이 고달프다. 항상 뭔가가 치열하게 이루어지는 현장만 있게 될 터이니 말이다. 중요한 건 상생과 상극의 이치를 아는 것이다. 역술가들도 이런 이치에다 수많은 임상적 경험을 덧붙여 분석을 하는 것이지 다른 특별한 묘방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치와 용법만 익히면 훨씬 더 다이내믹한 흐름을 읽어 낼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개인뿐 아니라 시대의 흐름은 물론 직업이나 활동공간에 따라 어떤 기운을 더 주도적으로 쓰는지도 포착할 수 있다.
가령, 네티즌들은 인터넷 공간 안에서 십신의 흐름을 다 소비할 것이다. 발산하고 수렴하고, 상생하고 상극하고, 유형과 무형의 소비와 충전을 하는 등등. 그 안에서도 모든 과정이 다 이루어진다. 하지 150 만 그것은 순환이 되지 못한다. 사이버 공간 안에서는 아무리 대단한 네트워킹을 하는 것 같아도 결국은 독백이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하지만 소통이라기보다는 거의 배설에 가까운 경우도 많다. 상대와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익명성의 바다에 몸을 숨겨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나를 극하는 배치에 들어서지 못하고, 그저 나의 일부를 일방적으로 발산하는 수준에서 끝나고 만다. 그래서 비겁만 증식되어 망상이 확대되거나 아니면 식상만 쓰느라 기진맥진할 수밖에 없다.(구설수와 송사의 아수라장!) 사이버 공간에 집중할수록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신체적 소통력은 점차 떨어지게 되는 건 그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누구는 오직 돈만 벌고, 누구는 오직 공부만 하는 신분사회, 인류는 이걸 타파하기 위해 온갖 투쟁을 다 해왔다. 누구든 스스로의 힘으로 밥벌이를 하고, 누구든 스스로의 힘으로 삶의 지혜를 닦아 가는 사회, 이것이 인류가 기획하는 최고의 비전이 아니었던가. 헌데, 참 희한하게도 막상 그런 자유와 선택이 주어지자 다들 오직 물질적 분배에만ㅡ그것도 주로 상품과 쾌락의 증식과 관련된ㅡ주력할 뿐 정신적 자산을 나누고 누리는 데는 대체로 무관심하다. 이것이 우리 앞에 놓인 표상의 배치다. 보다시피 그 자체로 태과불급이다. 이 흐름에 장단을 맞추다 보면 당연히 모든 구성원들의 팔자가 꼬이게 마련이다. 원초적으로 타고난 태과불급에다 자본주의적 욕망의 배치가 덧보태지면서 십신의 리듬이 더한층 혼탁해지는 것이다. 리듬이 혼탁해지면 무엇보다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151 살아내기 어렵다. 잘 살고 못 살고는 다음 문제다. 더 중요한 건 타고난 명(命)을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운전할 수 있느냐이다. 운명의 주인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도 긴박한 문제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선 팔자의 진면목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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