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울러 역사가 ‘모두가 다 잘사는’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간다는 관념은 ‘지금, 여기’는 물론, 이전의 모든 시대를 과도기요 이행기로 간주하는 사유를 낳게 된다. 이거야말로 소외의 극치가 아닐까. 스티븐 호킹이 말했듯 우주에는 중심이 없다. 우주의 끝을 향해 가다 보면 결국 자신이 출발한 지점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므로 중요한 건 자신이 선 자리에서 한 걸음을 내딛는 것뿐이다. 역사적 실천의 원리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해방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 그 자리를 해방의 공간으로 전환시 99 키는 것ㅡ이보다 더 혁명적인 실천은 없다!
개인의 경우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사주팔자를 뽑아 보면 오행상 어느 쪽으로든 다 기울어져 있다. 심한 경우 한 오행이 고립이거나 아니면 아예 없기도 하다. 한두 개의 오행만으로 된 경우도 있다.(윽!) 고스톱으로 치면 한두 종류의 패만 들어온 셈이다. 그럼 판을 포기해야 하나? 그렇지 않다. 좀 위험성이 있긴 하지만 또 패가 골고루 들어온 경우에는 누릴 수 없는 스릴이 있다. 그 스릴이 오히려 인생역전의 발판이 되기도 한다. 불급의 극단인 고립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고립은 다른 오행에 가로막혀서 순환이 불가능한 경우다. 하지만 그 카드는 존재의 무게중심이 된다. 엉? 어떻게? 아픈 곳이 몸의 중심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손가락이건 발톱이건(자식이 깊은 병이 들면 그 자식을 인생의 축으로 삼는 부모가 그런 것처럼). 그렇기 때문에 그 카드들이 야기하는 파장은 크다. 즉, 가장 문제적인 곳이지만 동시에 그것이 구원처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문제와 사건의 중심이 된 건 다른 일곱 개의 카드 때문이다. 즉, 그것 자체가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카드와의 관계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카드에 대해서는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고 이것만 쏙 뽑아 버리겠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무지의 산물이다. 만약 어떤 비책을 동원하여 그것을 제거해 버린다면 그 순간, 나머지 일곱 개의 카드도 다 위치를 바꾸어 버릴 것이다. 그러면 또 다른 카드가 고립이나 태과에 처하게 될 게 뻔하지 않은가. - P98

팔자가 차별상이 되는 건 어디까지나 사회적 조건과 통념으로 인해서다. 무엇보다 ‘부귀는 당연히 누리고 빈천은 무조건 피하고 싶은’ 욕망이 가장 큰 장벽이다. 원초적 간극에다 이런 식의 탐욕이 중첩되면서 차별이 이중 삼중으로 증폭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찰하지 못하면 마치 모든 차별상이 타고난 운명 탓이거나 아니면 외적 조건 탓이라는 전도가 일어난다. 그렇게 되면 한편으론 자신의 존재를 통째로 부정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운명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 한마디로 태과불급을 더더욱 심화시키는 셈이다. 승가원 꼬마와는 정반대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다. - P101

그 이름도 섬뜩한 공망살도 그렇다. 공망(空亡)이란 천간의 짝이 없이 지지만 있는 오행을 말하는데, 예전에는 독수공방하는 살이라 여겨 아주 꺼렸지만 이것도 운용하기 나름이다. 때론 공망살이 훨씬 유리한 경우도 많다. 또 공망이 다른 오행과 충을 하면 엉뚱한 리듬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런 사항을 알게 되면 살에 대한 맹목적 거부감을 벗어날 수 있다. 심지어 이렇게 토로하는 경우도 있다. "살(殺)이 있어 행복해요!^^" 실제로 그렇다. 명리의 기초를 배우다 보면 처음엔 살이 있을까봐 겁내지만 나중엔 살이 없는 걸 좀 서운해한다. 살이 없으면 안정감(혹은 지루함)은 있겠지만 대신 삶의 역동성을 맛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상식적 통념과는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정보다는 변화를 원한다. 미국의 한 조사에서 90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다시 젊은 날로 돌아가면 뭘 하겠느냐고 물었다. 노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모험을 하겠다!"고 대답했다. 이것이 인생이다. 변화는 고생스럽다. 하지만 그 속에서만이 ‘살 떨리는’(^^) ‘미친 존재감’을 맛볼 수 있다. 그러니 살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오히려 그걸 즐기는 훈련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 P108

모든 사람의 대운이 십 년마다 변한다는 건 여러 모로 의미심장하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의 인생또한 그러하다. 생리학적으로 몸을 이루는 세포들도 최소 7년이면 물갈이를 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아주 다른 존재다. 그렇다면 대운이 달라진다는 건 외부적 조건이기도 하지만 내 113 존재의 주름 하나가 펼쳐지는 내부적 변용이기도 하다. 참 절묘하지 않은가. 하긴 생로병사는 늙고 병든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몸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주름을 펼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대운의 변화 또한 존재가 밟아 가는 단계의 표현일 수 있다. 여덟 개의 카드 위에 겹쳐진 변화의 리듬, 그것이 곧 대운이다. (…)
대운을 주욱 뽑아 놓으면 자신이 밟아 갈 시공의 리듬이 한눈에 펼쳐진다. 거기에서 핵심은 상승과 하강의 변주다. 즉, 지금이 아주 만족스럽다면 분명 다음 혹은 다다음 단계는 반드시 불만족의 양상이 펼쳐질 것이다. 부와 권세를 누리는 경우라면 그 진폭은 더더욱 벌어질 것이다. 원국을 좋게 타고날 수는 있지만, 평생에 걸쳐 대운의 흐름이 계속 좋기란 불가능하다. 당연히 부침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상승할 때는 더욱 몸을 낮추고, 하강할 때는 결코 낙담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또 하나. 나의 리듬이 좋다고 해서 나의 가족이나 친구들이 다 좋은 건 아니다. 서로 대립되는 경우가 더 많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대신 누군가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된다. 내가 기운이 넘치는 대신 누군가는 지금 탈진하고 있을 것이다. 114 이것이 오면 저것이 가고, 저것이 생기면 이것이 사라진다. 공동체 생활을 해보면 그 점이 아주 확연히 드러난다. 작년에는 사건사고의 주역이었다가 올해는 사고를 수습하는 역할을 하고, 도무지 공부가 늘 것 같지 않은 사람도 어느 해가 되면 전혀 예상 밖의 성취를 이루고…… 이런 식의 변전이 실로 무쌍하게 벌어진다. 이걸 알면 누구든지 저절로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운이라는 것이 결국 ‘우주적 인연’의 산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운에도 강밀도의 차이가 있다. 특히 아주 기운이 센 간지가 있다. 갑목, 자수, 진술축미 등이 그렇다. 이들은 오행 중에서도 시작점이나 변화의 마디를 짓는 글자들이기 때문에 이 대운이 들어서면 인생이 그야말로 크게 국면전환을 한다. 상상도 못한 일을 하거나 전혀 예측불가능했던 관계망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위에 등장한 Y의 경우 병자(丙子)대운이 들어왔는데, 여기서 자수는 남편운이다. 거기다 해외역마까지 함께 들어섰으니 그야말로 기막히게 적중한 셈이다. C의 경우 갑신(甲申)대운이 들어왔는데 이걸 풀이하면 동료들과 조직운이 된다. P는 경진(庚辰) 대운이 들어왔다. 앞의 경우에 비해 115 서는 변화가 약한 편이지만, 진(辰)토 역시 환절기의 마디에 해당한다. 이처럼 셋 다 상식의 차원에선 기적에 가까운 일이지만 명리상으론 아주 자연스러운 변화를 겪은 셈이다. - P112

어린 시절의 경험을 생각해 보라. 당신이 명확하게 기억하는 것, 자신이 실제로 거기에 있는 듯이 보고 느끼고 나아가 냄새까지 맡을 수 있는 것, 어쨌거나 당신은 당시에 실제로 거기에 있었다. 그렇지 116 않은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기억하겠는가? 그러나 여기에 깜짝 놀랄 일이 있다. 당신은 거기에 없었다는 것이다. 현재 당신의 몸에 있는 원자는 단 하나도 그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에 거기에 없었다…… 물질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흐르며 순간적으로 모여서 당신이 된다. 따라서 당신이 무엇이든, 당신을 구성하는 재료들은 당신이 아니다. 그것이 당신의 머리카락을 쭈뼛 일어서게 하지 않는다면, 그럴 때까지 다시 읽어라. 중요하기 때문이다.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이한음 옮김, 김영사, 2007, 570쪽)

머리카락이 쭈뼛할 정도는 아니지만 오싹 소름이 돋는 건 사실이다. 내가 뭔가를 기억하는 순간, 나는 이미 그 기억 속의 내가 아니라니. 양자역학적으로 말하면, 나는 오직 지금, 여기만을 살 수 있을 뿐이다. 지금, 여기들이 무수히 모여 나라고 하는 것이 구성될 뿐이다. "‘나’의 정체성은 수많은 ‘너’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역동적인 과정일 뿐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마음은 몸으로 말한다』, 89쪽)이다.
대운의 이치도 그와 다르지 않다. 지금의 너는 이전의 시공간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존재라고 말해 주는 것이 바로 대운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나간 과거를 붙들고 그것에 끄달릴 이유가 없다. 과거의 어떤 상태를 자신의 진정한(혹은 순수한, 혹은 행복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한, 지금의 나는 늘 거기에 미달하거나 부족할 뿐이다. 그게 이어지다 보면 결국 나의 팔자는 온통 결핍으로 채워지고 만다. 117 대운이라는 강물은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는데, 나의 의식의 물결은 어느 한 모퉁이에 들러붙어 앞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의식은 웅동이나 늪이 될 것이다.
대운을 알면 전략을 짜기 쉽다. 시절인연을 만나기 전에는 결코 어떤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금이 잠수를 타야 하는 시기라면 느긋하게 때를 기다리면 되고, 잠수가 끝나고 막 떠오를 때라면 흥분할 필요 없이 여유있게 즐기면 된다. 물론 거기에는 지혜가 필요하다. 보통 일이 잘될 때는 대개 자기의 능력 덕분이라 여긴다. 그래서 자만심이 강해진다. 그리고 그런 식의 행운이 계속 뒤따를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러다가 대운이 바뀌어 만사가 막히게 되면 그때부터는 세상을 탓하기 시작한다. 상처로 얼룩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하나같이 자신은 빠져 있다. 모든 것의 원인과 책임은 세상과 타인들의 몫이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는 뜻인데, 따지고 보면 그게 더 심각한 일 아닌가.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주인이 되지 못하는 것, 그것이 곧 상처의 원천임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팁 하나. 혹시 지금 실연을 당했으면 딱 5년만 기다리시라. 나를 버리고 간 그 사람의 연애도 5년 안에 끝장이 난다. 대운 10년은 천간과 지지로 5년씩 마디가 지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이의 세운에 의해서도 완전 딴판이 될 수 있다. 동시에 그 사이에 자기 자신도 전혀 다른 인연의 장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은근히 감사하게 될 것이다. 자기를 버리고 떠난 옛 연인에게. 그가 아니었다면 어떻 118 게 새로운 삶이 가능했겠는가. 더 나아가 누가 누구를 버리고 버림받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서로 인연이 엇갈렸을 뿐임을,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진통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있을 수 없다. 원인도 주체도 없다. 다만 내 몸을 지배하는 시공간의 조건이 달라졌을 뿐이다. 요컨대, 모든 것은 지나간다. 대운이란 이 무상성의 이치를 깨우쳐 주는 명리학적 키워드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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