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60 민주주의와 산업주의가 지역 국가에 미친 영향
민주주의 찬미자들은 종종 민주주의가 그리스도교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노예 제도에 대한 태도로 보아 이 고매한 주장이 그다지 들어맞지 않은 것도 아니라는 것도 증명된 차에, 명백한 해악인 전쟁에 대해서는 어찌하여 한층 더 나쁘게 만드는 영향을 미쳤는가? 그 대답은 민주주의가 전쟁이라는 제도에 부닥치기 전에 지역 국가라는 제도에 맞닥뜨린 사실로 알 수 있다.
민주주의와 산업주의라는 새로운 추진력이 지역 국가라는 낡은 기구에 도입되었기 때문에 정치적 내셔널리즘과 경제적 내셔널리즘이라고 하는 쌍둥이 죄악을 만들어 냈다. 민주주의의 고매한 정신이 이질적인 매체를 통과하여 이처럼 거칠고 천한 형태로 변해 버렸기에 민주주의는 전쟁을 방지하는 대신 오히려 부채질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도 서유럽 사회는 18세기에 내셔널리즘이 출현하기 전보다 행복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한두 가지의 주목할 만한 예외는 별도로 하고 당시 서유럽 세계의 지역 국가는 국민 전체의 의지를 수행하는 수단이 아니라 사실상 왕가의 사유 재산이었다. 왕가 사이의 전쟁과 혼인은 재산의 일부를 하나의 가문으로부터 다른 가문으로 이양하는 방법이었으며, 이 두 가지 방법 중 분명히 왕가 사이의 혼인이 즐겨 쓰였다.
합스부르크가의 외교 정책을 칭찬한 유명한 말ㅡ전쟁은 다른 이들에게 맡겨라.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그대는 결혼하라ㅡ이 탄생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18세기 전반의 주요 전쟁의 세 가지 명칭 자체ㅡ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ㅡ는 혼인의 협정이 뒤얽혀서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전쟁이 일어난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이 결혼 외교에는 분명히 야비하고 치사한 점이 있었다. 왕가 사이의 협약에 의해 영토와 주민을 마치 토지와 가축을 함께 양도하듯이 한 사람의 소유자로부터 다른 소유자에게 양도한다는 것은 민주주의 시대의 감각으로 보면 실로 혐오할 일이다. 그러나 18세기적 방식에는 그것을 합리화할 장점이 있었다. 그것은 애국심에서 빛나는 의미를 빼앗았으나 그와 함께 생명을 위협하는 독침도 뽑아 버렸다.
스턴의 「감상 여행」의 잘 알려진 구절 가운데 영국과 프랑스가 7년 전쟁을 하고 있는 중에 저자가 전쟁 중임을 깜빡 잊고 프랑스로 가는 이야기가 있다. 프랑스 경찰과 약간의 옥신각신이 있은 후 초대면의 프랑스 귀족의 알선으로 스턴은 그 이상 조금도 불쾌한 꼴을 당하지 않고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40년 후 아미앵 조약이 결렬됐을 때 나폴레옹은 당시 마침 프랑스에 체류하고 있던 18세에서 60세까지의 영국인을 모조리 억류하도록 명령했다. 그의 이런 행위는 코르시카 인의 야만성의 실례가 되었고, 뒤에 웰링턴이 말한 "그는 신사가 아니다"라는 말을 뒷받침하는 예증이 되었다. 또한 실제로 나폴레옹도 자기가 취한 조치에 대해 변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아무리 인도적이고 관대한 정부에서도 당연하고 상식적인 일로서 취하는 조치에 불과하다. 이제 전쟁은 ‘총력전‘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은 지역 국가들이 민족주의적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총력전이라는 것은 전투원이 육·해군이라는 이름의 선택된 ‘장기 말‘뿐 아니라, 당사국의 국민 전체가 전투원으로 간주되는 그러한 전쟁이다. 이러한 새로운 전쟁관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독립전쟁이 끝났을 때, 승리를 얻은 영국계 미국인 개척자들이 모국 영국 편을 든 자들에 대해 취한 조치가 아마도 그 시초라고 생각된다.
이들 ‘영국 충성파‘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 남자·여자·아이들 할 것 없이 그들의 집에서 추방되었다. 그들이 받은 이 조치는 20년 이전에 정복된 프랑스계 캐나다 인에 대해 영국이 취한 조치와 대단한 차이가 있다. 프랑스계 캐나다 인은 그들의 집을 잃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법제도와 종교 조직을 보전할 것이 허용되었던 것이다. 이 ‘전체주의‘의 최초의 예는 의미 깊은 것이다. 왜냐하면 승리를 얻은 미국 정착자들이야말로 우리 서유럽 사회 최초의 민주화된 국민이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내셔널리즘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해악이 된 경제적 내셔널리즘 역시 같은 지역 국가의 비좁은 틀 속에서 왜곡된 산업주의가 작용하여 탄생한 것이다.
물론 산업주의 이전 시대의 국제 정치에 있어서도 경제적 야심과 경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18세기의 ‘상업 중심주의(중상주의)‘ 가운데 경제적 내셔널리즘의 전형적인 실현을 볼 수 있고, 또한 스페인령을 통한 미국 식민지의 노예 매매 독점권을 영국에게 내어준 유트레히트 조약의 저 유명한 조항이 가리키듯, 이 시장과 독점권의 획득이라는 것이 18세기의 전쟁 목적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18세기의 경제적 투쟁이 영향을 미친 대상은 소수 계급과 한정된 업자뿐이었다. 나라마다, 아니 마을마다 생활 필수품의 거의 전부를 생산하고 있던 농업을 주로 하는 시대에 있어서는 영국이 행한 시장 획득 전쟁은 대륙의 영토 획득 전쟁을 ‘국왕들의 유희‘라고 불러 무방했듯이 ‘상인들의 유희‘로 불러도 무방할 만한 것이었다.
규모가 작고, 긴장이 적었던 이 경제적 평형의 일반적 상태를 심히 교란시킨 것은 산업주의의 출현이었다. 그것은 산업주의는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그 작용이 본질적으로 전세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민주주의의 참된 본질이 프랑스 혁명의 기만적인 선언대로 우애의 정신이라면, 산업주의가 그 잠재 세력을 완전히 발휘하기 위한 불가결의 요건은 전세계적인 협력이다.
산업주의가 요구하는 사회 체제는 18세기의 새로운 기술 개척자들이 외친 저 유명한 표어 "자유롭게 만들게 하라, 자유롭게 통과시켜라"ㅡ즉 제조의 자유와 교환의 자유ㅡ는 말 가운데 정확하게 표명되어 있다. 세계가 작은 경제 단위로 분할되어 있는 것을 보고, 산업주의는 150년 전에 다같이 세계적 통일의 방향으로 향하던 두 가지 방식으로 세계의 경제 구조를 개조하는 일에 착수했다. 산업주의는 경제 단위의 수를 적게 나눔으로써 규모를 크게 하는 동시에, 상호간의 장벽을 낮게 하도록 노력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역사를 바라보면 지난 세기의 60년대와 70년대쯤에 하나의 전환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즈음까지의 산업주의는 민주주의의 도움을 받아 경제 단위의 수를 감소시키고 장벽을 낮게 하는 노력을 해 왔다. 그러나 그 뒤 산업주의와 민주주의는 다같이 정책을 역전시켜 반대 방향으로 실행시켰다.
우선 첫째로 경제 단위의 크기를 고찰하면, 18세기 말에는 영국이 서유럽 세계 최대의 자유 교역 지역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실로 해서 산업혁명이 다른 어느 나라도 아닌 영국에 처음으로 일어난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1788년에 북아메리카의 옛 영국령 식민지들이 필라델피아 헌법을 채택함으로써 각 주 간의 모든 통상상의 장벽을 완전히 철폐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 자연히 팽창을 거듭하였고 세계 최대 자유 교역지역이 된다. 따라서 그 직접적 결과로서 가장 강대한 공업국이 될 기초가 마련되었다.
그로부터 수 년 뒤에 이번에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서 그때까지 프랑스의 경제적 통일을 방해하고 있던 지방 간의 관세 경계가 전부 철폐되었다. 19세기의 제 2·4분기에는 독일이 ‘관세 동맹‘의 형태로 경제적 통일을 실현하여 그것이 정치적 통일의 선구가 되었다. 제 3·4분기에는 이탈리아가 정치적 통일을 이룩하고 그와 동시에 경제적 통일을 획득했다.
다음으로 계획의 나머지 절반, 즉 국제 간의 교역을 방해하고 있는 관세와 그 밖의 지방적인 장벽을 낮게 하는 노력 쪽을 보면, 아담 스미스의 제자라고 자처한 피트가 자유 무역 촉진의 운동을 개시하였고, 그것이 19세기 중엽에 필·코브던·글래드스턴 등의 손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또한 미합중국도 고관세 정책을 시험해 본 뒤 1832년에서 1860년에 걸쳐 착실하게 자유 무역의 방향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루이 필립과 나폴레옹 3세 시대의 프랑스, 비스마르크 이전의 독일도 같은 길을 걸었다.
그 후 형세가 일변한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선 다수의 소국이 통일되어 하나의 민주주의에 의한 내셔널리즘이 되었고, 이 즈음부터 합스부르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따위의 다민족 국가를 해체시키기 시작했다. 1914~18년의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본디 하나의 자유 교역권이었던 도나우 왕국이 각각 경제적 아우타르키(자급 자족)를 지향하면서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몇 개의 후계 국가로 분열해 버린 동시에 다같이 영토를 잘려서 작아진 독일과 러시아의 사이에 새로운 경제적 구획이 끼어들게 되었다.
한편 약 30년 전부터 자유 무역으로의 음직임은 후계 국가로 한 나라 한 나라 분열하는 식으로 역행을 다시 시작하여, 1931년에는 마침내 ‘상업중심주의(중상주의)‘의 역류가 영국 자체에까지 미쳤다.
이 자유 무역 정책 포기의 원인은 쉽사리 규명할 수가 있다. 자유 무역은 ‘세계의 공장‘이었던 당시의 영국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1832~1860년에 걸쳐 합중국 정부를 좌지우지하던 여러 주의 면화수출에 있어서도 좋은 기회였다. 같은 시기의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좋은 기회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각국이 차례차례로 산업화되어감에 따라 단기적으로는 이웃 모든 나라와 격렬한 산업 경쟁을 하는 것이 각 지역 국가 이익에 맞는 것 같았다. 지역 국가가 각각 주권을 쥐고 있는 체제 아래서 과연 누가 그것을 안 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코브던과 그 신봉자들은 대단한 오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세계의 여러 국민과 여러 국가가 영국을 중심으로 하여 산업주의의 젊은 에너지를 투입해 맹목적으로 형성해 가는 새로운 전대미문의 전세계적 경제 관계의 거미줄에 의해 단일 사회로 끌려들어올 것을 기대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자유 무역 운동을 단순히 총명한 이기주의가 낳은 걸작에 지나지 않는다고 배격하는 것은 코브던 일파에게는 공평하지 못한 견해일 것이다.
그 운동은 또한 하나의 도덕적 관념의 표현이자 건설적인 국제 정책의 표현이었다. 가장 존경해야 할 그 운동의 대표자들은 영국을 세계 시장의 지배자로 만든다는 목적 이상의 것을 지향하고 이썼다. 그들은 새로운 경제적 세계 질서가 번영할 수 있는 그러한 정치적 세계 질서가 차차 발전할 수 있도록 촉진할 것을 바랐다. 전세계적인 물질과 무의 교환이 평화롭고 안전하게 행해지는 정치적 분위기를 만들어 냄으로써 더욱 더 안전을 증대함과 동시에 인류 전체의 생활 수준을 한 단계 높여갈 것을 바랐던 것이다.
코브던의 오산은 민주주의와 산업주의의 힘이 지역 국가 상호간의 경쟁을 촉진한다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던 데에 있다. 그는 이 두 거대한 시스템이, 18세기와 마찬가지로 19세기에도 가만히 얌전하게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현재 부지런히 세계적인 산업주의 거미줄을 치고 있는 인간이 두 거대한 시스템을 완전히 거미줄로 묶어 버릴 때까지 말이다. 그는 민주주의가 우애를 대표하고 산업주의가 협력을 대표하는 본래의 민주주의와 산업주의가 낳을 효과에 기대를 걸었다. 그것은 속박되지 않은 민주주의와 산업주의가 비로소 이룰 수 있는 통일과 평화의 기대이다.
그는 이 같은 2개의 힘이 그 새로운 ‘증기압‘을 지역 국가라고 하는 낡은 기계 속에 막무가내로 침입시켜 분열과 세계적 무정부 상태를 야기시킬 가능성은 계산에 넣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대변자가 가르치는 우애의 복음이 근대 최초의 커다란 민족주의 전쟁을 야기했던 것을 상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것이 이런 종류의 전쟁이 처음일 뿐 아니라 마지막이 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는 18세기라는 한정된 상업 중심주의적 시기에 거대한 두 시스템의 지배가 당시 국제 통상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던 비교적 중요성이 적은 사치품의 무역을 촉진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킬 수가 있었다고 하면, 산업혁명이 국제 통상을 사치품의 교환에서 생활 필수품의 교환으로 바꾸는 시대에는 한층 더 민주화된 여러 국민이 경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서로 철저하게 싸우게 될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요컨대 맨체스터 학파(자유 방임주의와 자유 무역 주장)는 인간의 본성을 오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경제적 세계 질서라고 해도 단순히 경제적 기반 위에만 구축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참된 이상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이상주의의 궁극의 원천인 그레고리우스 대교황과 그 밖의 서유럽 그리스도교 사회의 창시자들은 결코 그러한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 초현세적인 목적에 전심을 바친 이러한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하나의 세계 질서를 건설하려고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현세적인 목적은 난파한 사회(헬라스 사회)의 살아남은 생명을 살리자는 좀더 소극적인 물적 양심에서 우러난 것이다.
그레고리우스와 그의 무리들이 성가시고 짐스러운 필요물로서 세운 경제 구조는 분명히 임시 방편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 구조를 건설함에 있어 그들은 경제라는 모래 위가 아니라, 종교라는 바위 위에 세우려고 힘썼다. 그래서 그들이 힘쓴 덕으로 서유럽 사회의 구조는 견고한 종교의 기초 위에 안정을 찾았고, 1400년도 못 되는 동안에 처음에는 남의 눈에 띄지 않는 한쪽 구석에서 대수롭잖게 발족한 경제 사회 구조가 세계의 곳곳에 퍼진 오늘날의 대사회로 성장한 것이다.
만약 그레고리우스의 자그마한 경제적 건물에 견고한 종교적 기초가 필요했다면, 오늘날 우리가 건설할 임무를 지고 있는 훨씬 거대한 세계 질서라는 건물은 단순한 경제적 이익이라는 안정감 없는 기초 위에서는 도저히 안전하게 설 가망이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 P355

361-2 산업주의가 사유 재산제에 준 영향
사유 재산제란 개개의 가족이나 세대 단위로 경제 활동을 하는 사회에 설립되는 경향이 있는 제도로서, 그런 사회에서는 아마도 그런 사유 제산제가 부의 분배를 지배하는 가장 적합한 제도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경제 활동에서 현실적인 단위는 이미 단일한 가족이나 단일한 마을, 단일한 민족 국가도 아니고, 현재 살고 있는 ‘인류‘ 전체인 것이다. 산업주의가 출현한 이래 현대의 서유럽 사회 경제는 사실상 가족 단위를 초월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가족 단위의 사유 재산 제도를 넘어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이 오랜 가족 단위의 제도는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 이런 사정으로 해서 산업주의는 사유 재산제에 강대한 추진력을 주게 되어 재산가의 사회적 세력을 증대시킴과 동시에 그 사회적 책임을 감소시켰다. 그 결과, 산업주의 이전의 시대에는 이익을 가져왔던 사유 재산 제도가 여러 가지 점에서 노예 제도에 이어 또 다시 사회적 해악의 양상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의 사회는 오랜 사유 재산 제도를 새로운 산업주의의 힘과 조화되도록 조정한다는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평화적으로 조정하는 방법은 국가의 힘으로 사유 재산을 계획적·합리적으로 또한 공정하게 관리해서 재분배하는 것을 통해 산업주의가 불가피하게 야기하는 사유 재산의 편재를 방지하는 것이다. 기간 산업을 관리함으로써, 국가는 그런 사유 재산의 편중으로 인해 어느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생활에 지나친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억제하는 한편 부자에 대한 높은 과세로 경비가 조달되는 각종 사회 산업을 벌임으로써 빈곤의 비참한 결과를 완화시킬 수 있다. 이 방법은 국가를 전쟁 만드는 기계ㅡ이제까지 그것이 국가의 가장 눈에 띄는 기능이었다ㅡ에서 사회 복지를 증진시키는 기관으로 바꾼다는 부수적인 사회적 이점을 가지고 있다.
만일 이 평화적인 정책이 잘 되지 않는다면 그 대신 혁명적인 방법이 취해질 것이다. 그리고 어떤 형태의 공산주의에 의해 사유 재산을 거의 완전히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은 얼핏 생각해도 확실한 일이다. 이것이 조정에 실패하는 경우 감수해야만 할 유일하고 실제적인 귀결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산업주의의 힘에 의한 사유 재산의 편재는 사회 사업과 고율 과세에 의해서 완화되지 않는 한 참을 수 없는 이상 현상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실험이 보이고 있듯이 공산주의라는 혁명적 요법은 병 자체에 그치지 않고 더욱 치명적인 것이 될 염려가 있다. 사유 재산제는 산업주의 이전 시대의 사회적 유산 가운데 가장 좋은 제도 중 하나이다. 이를 함부로 폐지하게 되면 우리 서유럽 사회의 사회적 전통에 불행한 단절이 생기게 되는 것은 거의 틀림이 없다. - P361

362-5 민주주의가 교육에 준 영향
민주주의의 출현으로 실현된 최대의 사회적 변화 중 하나는 교육의 보급이었다. 선진 국가에서는 무상의 국민 초등의무교육제도가 채택되어 교육은 모든 아동의 기본 권리로 되었다. 이것은 교육이 소수의 특권 계급에 독점되어 있었던 민주주의 이전 시대의 교육의 역할과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 이 새로운 교육 제도는 현대의 국제 사회에서 명예 지위를 획득하기를 염원하는 모든 국가에게 있어 주요한 사회적 이상의 하나였다.
국민 교육은 최초에 창시되었을 때 당시의 자유주의자들로부터 정의와 개화의 승리로서 환영되었다. 그리고 인류를 위한 행복과 안녕의 새시대를 초래하는 것으로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지금 보면 이러한 기대는 행복한 이상의 시대에 이르는 큰길 위에 몇 개의 거치적거리는 장애물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을 계산에 넣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점에 관해서도 그 밖의 다른 많은 경우와 마찬가지로 예견하지 못했던 요소가 가장 중대한 것이 되었다.
첫 번째 장애는, 전통적인 문화적 배경에서 따로 떼어놓는다는 희생을 치르면서 교육을 ‘대중화‘하는 데서 생기는 피할 수 없는 교육 내용의 빈약화가 생긴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선한 의도라 하여도 빵과 물고기의 기적(<마태> 15:32~39)을 행하는 신통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량 생산하는 지적 양식에는 좋은 맛이나 영양이 들어 있지 않다. 두 번째 장애는 교육이 모든 인간에게 주어짐과 동시에, 그 성과가 자칫하면 공리적으로 이용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교육이 사회적 특권으로서의 권리를 이어받았지만, 그 권리가 한정된 사회 체제하에서는, 교육이란 돼지에게 던져 준 진주(<마태> 7:6)든지, 아니면 그것을 발견한 사람이 자신의 전재산을 팔아 구하는 고가의 진주(<마태> 13:46) 중 어느 하나이다. 그것이 어느 쪽이든 교육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거나 세속적인 야망 또는 경박한 오락의 도구는 아니다. 교육을 대중오락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가능성ㅡ따라서 또 그런 오락을 제공하는 기업가가 이윤을 올리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가능성ㅡ이 생긴 것은 의무 초등교육이 시작되고 난 이후의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기업가의 새로운 이윤추구 수단으로 이용됨으로써 세 번째 최대 장애가 생기게 되었다. 보통 교육이라는 빵이 물 위에 던져(<전도서> 11:1)지자마자 바다 속으로부터 상어 떼가 떠올라와서 교육자의 눈 앞에서 아이들의 빵을 빼앗아 먹어 버린다. 초등보통교육제도는 대체로 1870년의 포스터법에 의ㅡㄴ해서 완성되었지만, 그로부터 약 20년 뒤ㅡ즉 초등교육이 시작된 초기의 어린 학생들이 충분한 구매력을 획득하자마자ㅡ박애주의적 교육자의 사랑의 노고를 잘 이용한 기업가 신문왕(新問王)은 훌륭한 이익을 취하였고, 그런 사실을 재빨리 간취한 무책임한 인간은 뒤이어 천재적 수완으로 황색 신문을 발명하였다.
민주주의가 교육에 미친 영향에 대한 이 우려할 만한 대중적 반응이 현대의 전체주의를 표방하는 국민국가의 지배자들의 주의를 끌게 되었다. 출판왕이 어중간한 교육을 받은 인간에게 쓸데없는 오락을 제공함으로써 몇백만의 큰 돈을 벌어들였다고 한다면, 착실한 정치가 역시 이러한 언론 경제의 대중화를 이용하려 들 것이다. 설사 돈은 벌리지 않는다고 해도 권력을 끄집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현대의 독재자들은 신문왕 위에 군림하면서 강하고 저속한 개인적 오락 대신, 강하고 저속한 국가적 선전 조직을 만들어 냈다. 영국과 미국의 자유 방임 체제 하에서 개인적 이익을 위해 발명된 어중간한 교육을 받은 인간이 집단적으로 노예화되었고, 정교하고 세밀한 기계를 국가 지배자가 그대로 접수해서 이들 지적인 기구를 영화나 라디오로 보강하여 그들의 사악한 목적을 위해 이용하였다. 노스클리프를 뒤이어 히틀러ㅡ이 방면에 첫 인물은 아니다ㅡ가 나타났다. 이와 같이 민주적 교육이 채용된 나라에서의 국민은 이윤을 추구하는 사기업이라든지 정부 당국에 의해 조종되는 지적인 전제 정치 체제하에 놓이는 위험에 부딪쳤다. 국민의 정신을 구출하려 한다면, 대중 교육의 수준을 높여 피교육자가 적어도 영리주의나 선전의 저급한 형태에 걸려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지만 전적으로 의지할 방법은 못 된다. 다행하게도 오늘날의 서유럽 사회에는 이 문제와 관련된 몇 개의 이해를 초월한 유력한 교육 기관이 존재하는 바, 영국의 노동자협회라든지, 영국방송협회(BBC) 등이 그것이다. - P362

369-70 공의회 운동은 봉건 시대에 이미 지방 자치로 중세 국왕들의 행동을 억제하는 수단으로서 유효하다는 것이 입증된 의회 제도를 본따서 교회의회 제도를 전 세계적 규모로 확대 설치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자임하는 교황이 권력을 악용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려는 건설적인 노력이었다. 그러나 공의회 운동이 무르익자 교황의 태도는 완전히 굳어졌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교황의 비타협적인 태도가 성공했다. 즉, 공의회 운동은 원점으로 돌아갔고, 이렇게 조정의 마지막 기회를 물리침으로써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를 전통적 유산인 세계주의와 새로운 지역주의적 경향 간의 심한 내부 불화로 분열되는 운명에 몰아넣었다.
그 결과 정말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혁명과 사회악이 되풀이되었다. 전자(혁명)의 예로는, 교회가 몇몇의 적대적인 교회로 분열되어 서로 상대방편을 반그리스도의 집단이라고 헐뜯으며 전쟁과 박해를 계속 일으킨 것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후자(사회악)의 예로서는, 교황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신성한 권리‘를 세속적 군주가 중간에서 빼앗은 사실을 들 수 있다. 이 신성한 권리가 지금도 여전히 주권국민국가의 이교적인 숭배라고 하는 무서운 형태로 서유럽 세계에 커다란 재앙을 가져오려 한다. 그것은 바로 애국심으로서, 존슨(영국의 문인) 박사가 경향을 달리한 표현으로 ‘악당들의 마지막 은신처‘라고 부르고, 캐벌(영국의 간호사)이 좀 더 그 본질을 들추어내 그것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말한 애국심이 서유럽 세계의 종교로서, 거의 그리스도교를 대신해 들어앉아 있다. 어쨌든, 지역주의가 서유럽 그리스도교회에 가한 압력의 결과 생긴 애국주의라는 이 괴물만큼, 그리스도교의 본질적인 가르침ㅡ그리스도교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역사적 고등 종교의 가르침과는 확실히 모순 되는 점ㅡ을 생각해 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 P369

374-5 문명이 분업에 끼친 영향(일부)
미개 사회에 분업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고, 대장간이나 음영 시인, 승려, 주술사 등의 전문화가 있었다고 하는 것은 이미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다. 그러나 문명의 힘이 분업에 작용하면, 일반적으로 분화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아가, 분업에 의한 사회적 이익이 오히려 감소되기 시작할 뿐 아니라 반대로, 반사회적인 작용을 할 염려가 있다. 그리고 그 효과는 창조적 소수자와 비창조적 다수자가 서로 교류하는 가운데 생활에서 나타난다. 창조자들끼리는 비밀주의에 빠지게 되고, 일반 대중은 불균형에 빠지게 된다.
비밀주의라는 것은 창조적 개인의 생애에 나타나는 실패의 징조로서, 예의 은퇴와 복귀의 리듬적 운동이 전반 부분만 강조되어, 전체 과정을 복귀까지 완료하는 데 실패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그리스 인은 이런 형태로 실패한 인간을, ‘이디오테스‘라 부르며 비난했다. 이디오테스라는 것은 기원전 5세기경의 그리스 어 용법으로는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그 재능을 공공의 복지에 유용하게 쓰지 않고, 자기 혼자만 만족하는 행동을 하는 사회적 죄과를 저지른 인간을 가리켰다. 그런 행동이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에서는 어떤 눈으로 보였는지를, 오늘날 유럽의 여러 언어에서 ‘이디움트‘(그리스 어에서 유래된 단어)가 백치를 의미하게 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대강의 짐작은 간다. 그러나 현대 서유럽 사회의 참된 ‘이디오타이‘(이디오테스의 복수형)는 정신박약자 수용 시설에서 볼 수 없다. 그들 가운데 하나의 집단은 특수화되고 타락해서 ‘호모 이코노믹스(경제인)‘가 된 ‘호모 사피엔스‘로서 디킨스가 풍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인간상이다. 그리고 그래드그라인드의 상대를 제공한다. 또 다른 창조적 개인은 자신은 그것과는 반대쪽 끝에 있으며 ‘빛의 아들‘이라고 믿고 있지만, 실은 같은 비난을 받지 않으면 안 될 친구들로서, 자기들의 예술을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아니꼬운 태도로 거드름을 피우는 지적 예술적 인텔리 즉 길버트가 풍자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 번손의 무리들이 그것이다. 디킨스와 길버트의 연대의 차이는 아마도 전자의 집단이 빅토리아조 초기에 영국에 눈에 띄게 나타난 존재들이고 후자의 집단은 빅토리아 왕조 후기에 더 드러난 자들인 것으로 알 수 있으리라. 두 사람은 북극과 남극의 차이처럼 현격하게 다르지만 그러나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북극과 남극은 사실상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기후적으로 같은 결점을 지니고 있다. - P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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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2 외계인과 외계 문명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이 아무리 복잡한 문양이나 보잘것없는 징조일지라도 그들이 남겼다는 것이 확실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이 바람을 주체하기 힘들다. 이 바람 안에는 인간이 과거부터 품어 왔던 소박한 소망이 깃들어 있다. - P582

590 과연 성간 공간에도 ‘로제타석‘이 있을까? 우리는 성간 로제타석이 있다고 믿는다. 아무리 다른 문명권들이라고 해도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공통의 언어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 공통의 언어는 바로 과학과 수학이다. 자연의 법칙은 우주 어디를 가든 동일하다. 멀리 있는 별이나 은하의 스펙트럼을 찍어 보면 태양의 스펙트럼과 비슷할 뿐 아니라 지구에서 적절히 설계한 실험 상황에서 만들어 낸 스펙트럼과도 일치한다. - P590

610-2 에르난 코르테스는 아스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을 이렇게 서술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들 중 하나이다. 그들의 활동과 행동거지는 거의 스페인에서 볼 수 있는 수준으로 조직적이고 질서정연하다. 이들이 기독교를 모르고 다른 문명 국가들과 교류를 하지 못했음에 불구하고, 그들이 어떻게 이토록 훌륭한 것들을 지니게 됐는지 그저 놀랍기만 하다." - P610

612 아스텍 황제 목테주마는 보고를 듣고 공포의 충격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그들이 먹는다는 음식물의 정체도 황제에게는 수수께끼였지만, 롬바르드 대포의 위력에 대한 설명을 듣고서 그는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다. 스페인 장교의 명령이 떨어지자 탄환이 대포에서 천둥소리를 내면서 힘차게 날아갔다는 것이었다. 그 소리에 정신을 잃거나 까무러진 사람도 있다는 설명이었다. 대포 구멍에서 돌멩이 하나가 화염과 섬광을 내면서 튀어나와 멀리 날아갔다고 했다. 이때 뿜어져 나온 연기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면서 구역질이 나게 했다. 날아간 탄환에 맞은 산은 산산조각 나 깨져 버렸다. 나무는 톱밥으로 변해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목테주마 황제는 이 모든 설명을 듣고 나자 정신은 몽롱해지고 심장은 멈추는 듯했다. 그는 충격과 공포에 질려 버릴 수밖에 없었다. - P612

613-4 유럽에서 데려온 400명의 군인과 일부 토착 협조자로 구성된 침략군은 아스텍 인들의 미신과 유럽이 누리던 기술적 우위에 힘입어 인구가 100만이나 되던 고도의 문명 사회를 지구상에서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했다. 때는 1521년이었다. 아스텍 인들은 그때까지 말을 본 적이 없었다. 신대륙에는 말이라는 동물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아스텍 인들은 철 공예를 전쟁에 사용할 줄 몰랐으며, 아직 화약을 발명하기 전이었다. 아스텍과 스페인의 기술 격차는 기껏해야 수세기에 불과했지만, 그 차이는 아스텍 인들을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 P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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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종교에 대한 이들 세 가지 측면은 서로 매우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가장 먼저 우리는 이런 식으로 얘기할 수 있다. 도덕적 가치는 신의 말씀에서 비롯된다고. 신의 말씀이라고 하는 순간, 종교의 도덕적인 측면과 형이상학적 측면은 서로 연결된다. 이러한 사실은 영감을 불어넣어 주기도 하는데, 신의 뜻에 복종하고 신을 위해 봉사한다면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우주 전체와 연결돼 있으며 인간의 행동은 더 커다란 세계에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바로 이것이 감화적인 측면이다. 그러므로 이 세 측면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으며 쉽게 통합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과학이 처음 두 측면, 즉 종교의 형이상학적 측면과 도덕적 측면과 가끔 갈등을 일으킨다는 사실이다. - P63

64-8 나는 방금 종교의 도덕적 가치들이 과학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했다. 이제 그 말을 옹호하는 몇 가지 근거를 대야할 것 같은데,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그 반대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과학을 통해 도덕적 가치에 대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주장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결정적인 이유 하나를 찾지 못하는 경우에는 자질구레한 이유 여러 개라도 가지고 있어야 하니까! 그래서 내가 도덕적 가치가 과학의 범주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네 가지 이유를 여기서 밝히겠다.
첫째, 앞서 기술한 대로, 과거에 종교의 형이상학적 입장과 과학적 사실 사이에 갈등이 몇 차례 존재했지만, 종교의 형이상학적 입장이 변한 후에도 도덕적 관점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것은 그 둘이 독립적이라는 사실에 하나의 근거를 제공한다.
둘째로, 최소한 기독교적인 윤리를 실천하는 선한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믿지 않는 이들이 있다는 걸 지적하고 싶다. 아, 그런데 내가 종교에 대해 언급할 때 아주 편협한 관점을 취할 거라는 말을 미리 했어야 했는데 그걸 깜빡 잊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도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처럼 폭넓은 주제를 다룰 때에는 구체적인 예를 드는 편이 나을 것 같아 기독교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여러분이 무슬림이거나 불교도거나 혹은 여타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다면, 내 말을 그에 맞게 번역한 다음 어떤지 살펴보면 되겠다.
셋째는, 내가 아는 한, 과학적인 증거를 전부 모아도 황금률(마태복음 7:12, 누가복음 6:31 의 교훈, 흔히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로 요약됨: 옮긴이)이 옳은지 그른지에 관해 알려 주는 근거는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과학적 연구에 기초해서 어떤 문제에 대한 "도덕적 근거"를 제시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좀 철학적인 논거를 펼쳐 보려고 한다. 이건 내가 잘 못하는 것이긴 하지만, 과학과 도덕적 가치가 왜 이론상 서로 독립적인가에 대해 약간의 철학적 논증을 해 보고 싶다. 보통 인간이 살면서 겪게 되는 중요한 문제들은 대부분 "내가 이걸 해야 할까?"와 같은 문제이다. 행동에 대한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할까? 이걸 해야 할까?"와 같은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 편리하다. 하나는 "이걸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부분인데, 그것만으로는 그 행동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두 번째 부분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그건 바로 "자, 나는 이런 상황이 벌어지길 원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이걸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첫 번째 부분은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된다. 사실 이 문제는 전형적인 과학적 질문이다. 그렇다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정확히 알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결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과학은 아직 무척이나 초보적인 단계에 와 있다. 그렇지만 최소한 첫 번째 부분은 과학의 영역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문제를 다룰 방법을 가지고 있다. 바로 "시도해 보고 결과를 보라." 그리고 "정보를 수집해라." 등인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시간에 얘기를 했다. "만약 이걸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문제는 전형적인 과학적 질문인 반면, 그 다음 질문인 "나는 이 일이 일어나길 원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과학으로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음, 여러분은 만약 어떤 행동을 하면 모든 사람이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물론 난 그런 상황을 원하지 않아‘ 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이 죽는 것을 당신이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과학으로 밝혀낼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최종적인 판단은 결국 과학을 벗어나 당신의 몫이 된다.
다른 예를 들겠다. "이 경제 정책을 따른다면 불경기가 발생하게 될 걸 나는 알아. 물론 불경기가 발생하는 걸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나 또한 마찬가지이고." 라고 말할 수 있다. 잠깐만! 불경기가 발생할거란 사실을 안다고 해서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곧바로 결론에 도달할 순 없다.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국가가 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장기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가에 대한 믿음, 불경기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존재하더라도 그 희생에 비해 더 많은 것을 얻을수 있는지에 대한 고려, 내가 국가 경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자존감 등 여러 가지 측면을 함께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 하나의 경제 정책은 그로 인해 이득을 얻는 사람과 고통받는 사람을 함께 만들어 내기 마련이다. 그래서 결국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 총체적으로 고려해서 궁극적인 판단을 내려야만 한다. 어떤 현상이 발생할 것인지에 대한 논증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끝에 가선 "난 이걸 원해" 혹은 "아니, 그건 원하지 않아" 중 하나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 질문은 과학적인 질문과는 매우 다른 종류의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안다는 것만으로, 다시 말해 첫 번째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얻게 될 최종 결과들을 안다는 것만으로 결국 그것을 원하게 될지 아닐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과학적인 방법만으론 도덕적 가치문제에 대해 아무런 해답을 제시할 수 없다고, 그래서 그 둘은 서로 독립적이라고 믿는 것이다. - P64

68-9 이제 종교의 세 번째 특징인 감화적인 측면으로 관심을 돌려 보고 싶다. 이 문제에 대해선 나도 답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 모두에게 물어보려고 한다. 종교로부터 오는 의지력이나 안정감과 같이, 오늘날 우리를 감화시켜 주는 종교적 원동력들은 종교의 형이상학적 측면들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감화는 신을 위해 일하고 그의 의지에 순종하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표현되는 감정적인 유대감이나 당신이 무언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은 신의 존재에 대한 아주 작은 의심만으로도 약해질 수 있다. 따라서 신에 대한 믿음이 불확실해지면 때론 그런 감화를 얻는 데 실패하게 된다. 형이상학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종교적 입장보다는 과학적 입장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불의와 싸울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종교의 감화적 기능을 유지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문제다. 이것이 가능한지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여러분은 과학과 결코 모순되지 않는 방식으로 종교의 형이상학적 입장을 반영한 우주‘를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과학과 같이 모험적이며 미지의 세계를 향해 끝없이 발전하는 분야에서 미리 질문에 대한 정답을 정해 놓고, 오랜 시간이 흘러도(혹은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간에) 우리의 답들 중 일부가 틀렸다는 사실에 직면하지 않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따라서 형이상학적인 측면에 대해 종교가 절대적인 신뢰를 요구한다면, 과학과 갈등이 생기는 건 피할 수 없다. 종교 자체에 대한 의심에도 불구하고 감화를 주는 종교의 실제적 가치를 유지해 나간다는 것도 나는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이건 정말이지 심각한 문제이다. - P68

69-71 서구 문명은 두 가지 위대한 유산 위에 건설되었다. 하나는 과학적 정신으로서의 모험이다. 이는 진리를 향해 ‘미지의 세계‘ 를 탐험하는 모험이며 우주에 대해 답할 수 없는 미스터리들은 답하지 않은 채로 남겨두도록 요구하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의심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인간 지성에 대한 겸허함‘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듯 싶다. 다른위대한 유산은 기독교적 윤리인데, 여기에는 사랑의 실천, 모든 인류를 향한 형제애, 개인의 인간적 가치 등이 포함된다. 이는 ‘영적인 겸허함‘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두 유산은 논리적으로 완전하게 일관성을 가진다. 하지만 논리가 전부는 아니다. 어떤 생각을 좇으려면 마음이 따라가야 하니까. 사람들이 종교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들은 무엇을 향해 가는 걸까? 현대 교회는 신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는 장소인가? 더 나아가 신을 불신하는 사람에게도? 아니면 현대 교회는 그런 의심의 가치를 인정하고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안식을 주며 장려해 주는 곳인가? 서구 문명을 지탱해 온 두 거대한 유산이 서로 일관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우리는 그중 하나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힘과 안식을 다른 유산의 가치를 공격하는 데서 얻어 오지 않았던가? 이제는 이런 불행한 역사를 피할 순 없을까? 서구 문명의 두 기둥이 모두 생동력 있게, 서로에 대한 두려움 없이 함께 설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감화는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이 문제들에 대한 답은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오랫동안 인간의 도덕적 규범의 근원이었으며 그 규범을 따르도록 감화를 주었던 종교를 위해, 그리고 종교와 과학과의 관계를 위해, 내가 말할 수 있는 최선은 이 정도인 것 같다. - P69

71-2 늘 그래 왔듯이, 우리는 요즘도 국가 간의 충돌을 경험한다. 특히 소련과 미국이라는 두 강대국이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다(이 강연이 진행되던 1960년대는 미국과 소련이 심각한 냉전 상황에 놓여 있던 시절이었다: 옮긴이). 나는 우리가 도덕적 가치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사람들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다르다. 만약 우리가 서로 옳다고 믿는 것들이 실상 불확실한 것이라면 이 갈등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이 갈등은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일까? 시장 경쟁을 통한 자본주의와 정부의 규제를 통한 사회주의 중 어느 체제가 옳은가 하는 문제가 과연 확고하고 자명한 답을 가진 문제일까?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도 불확실하다는 경계를 유지해야 한다. 어쩌면 자본주의가 정부 규제를 통한 경제 관리보다 더 효율적이라는 데 거의 확신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정부 또한 규제를 하긴 한다. 엄밀히 말하면, 52퍼센트만큼 규제를 한다. 이 수치는 법인에 대한 소득세 규제를 근거로 말하는 것이다.
흔히 미국을 상징하는 한쪽에 종교, 소련을 표현하는 반대편에 무신론을 놓고, 이분적으로 갈라놓은 상태에서 논쟁을 벌인다. 하지만 서로 다른 두 개의 관점이 있을 뿐 올바른 결정을 내릴 기준은 없다. 인간과 국가는 어떤 가치를 안고 있는가, 국가를 위협하는 범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같은 문제들 역시 중요한 문제들이고 여러 해답들이 존재하겠지만 그들 역시 그저 불확실한 상태로 놓아둘 수밖에 없다. 실제로 갈등이 있긴 한 걸까? 아마도 통제적인 독재정부는 좀 더 혼란스런 민주주의 쪽으로, 또 혼란스런 민주주의는 좀 더 통제적인 독재정부 쪽을 향해 어느 정도 절충하며 진보하고 있는 것 같다. 불확실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자연히 갈등은 없어진다. 이 얼마나 좋은가! 하지만 나는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 믿지 않는다. 갈등은 항상 존재한다.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모든 개인적인 노력은 국가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소련이 말하는 바로 그 순간, 갈등의 위험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과 다양성, 심각한 사회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 새로운 관점에 대한 열린 태도 등 이 모든 소중한 것들이 바로 그 순간 소련이 국가적으로 제시한 해결책과 충돌하게 되기 때문이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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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6 자연은 유기체 기능의 90% 정도까지가 자동적 순환운동원리에 따라 최소의 에너지 소비로 가동될 수 있게 하였다. 그 덕택에 절약된 에너지의 최대량을 자연 스스로가 새로이 전진하는 길을 모색하는 데 쓸 수 있는 인간의 기능 중 나머지 10%의 기능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사실 자연의 유기체도 인간 사회와 마찬가지로 창조적인 소수 ‘성원‘과 비창조적인 다수 ‘성원‘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 P345

346-7 그런데 자연과 인간이 만든 기계의 승리를 신이 나서 찬미하면서도, 그 밖에 ‘기계 제품‘이라든지 ‘기계적 행동‘이라는 냉소적인 표현이 나돌고 있는 것은, 각각의 표현에 있어서 기계라는 말의 의미는, 위의 경우와 정반대로서 생명의 물질에 대한 승리가 아니고 정반대로 물질의 생명에 대한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 불안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기계는 인간의 노예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인간이 자기가 만든 기계의 노예가 되는 수도 있다. 90% 기계화되어 있는 산 유기체는 50%밖에 기계화되어 있지 않은 산 유기체보다도 창조성을 발휘하는 기회나 능력이 크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식사를 자신이 조리할 필요가 없으면 그 만큼 우주의 비밀을 발견하기 위한 시간과 기회가 많아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100% 기계화한 유기체는 벌써 로봇이다.
이처럼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서 기계화 수단인 모방 능력을 이용하는 가운데 파국의 위험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정적인 사회에서 환기되는 것보다 다이내믹한 운동을 하고 있는 사회에서 환기된 경우에 파국의 위험이 더 큰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모방의 약점은 그것이 밖으로부터의 시사에 대한 기계적인 반응이기 때문에, 행위자의 자발적 의사에 의해서는 결코 행해지지 않는 행위라는 점에 있다. 즉 모방에 의한 행위는 자기 결정에 의한 것은 아니다. 모방의 능력이 어떠한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을 현재 음지 상태에 있는 미개 사회의 습성 또는 관습의 형태이다. 그러나 ‘관습의 껍질‘이 깨어지면 그때까지 뒤를 향해 불변의 사회적 전통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장로나 조상에게로 향해졌던 모방 능력이 방향을 바꿔 동아리를 저 앞의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려 하고 있는 창조적 인격에게로 향해진다. 그와 동시에 성장하는 사회는 위험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위험은 항상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상태에 있다. 왜냐하면 성장 유지에 필요한 조건은 끊임없는 유연성과 자발성이지만, 이에 반해 성장의 전제 조건인 효과적인 모방에 필요한 조건은 상당 부분에 있어 기계적 자동성이기 때문이다. 월터 배저트가 그 나름의 경귀를 써서 영국인 독자를 향해 영국이 위대한 국가로 성공한 것은 그들이 ‘바보‘였던 덕분이라고 말했을 때, 이것은 그의 염두에 있었던 생각이었다. 영국인이 성공한 것은 지도자가 훌륭했기 때문인가? 그렇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온갖 사물을 자기 혼자 생각하고 결심을 했다고 가정하면 좋은 지도자는 좋은 추종자를 얻을 수가 없었을 것이리라. 그러나 전부가 ‘바보‘라면 도대체 누가 지도자가 된단 말인가? 사실 문명의 선두에 서서 모방의 기구를 이용하는 창조적 인격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양면에 걸쳐 실패의 위험을 안고 있다. - P346

347 그러나 보통 이 소극적인 실패로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지도자가 지도할 능력을 잃으면 그들이 가진 권력은 남용된다. 병졸은 반항하고 사관은 힘으로써 질서를 회복하려 든다. 하프를 잃어버렸거나 아니면 하프의 주법을 잊어버린 오르페우스는 이제 크세르크세스의 매를 휘두르며 주위 사방을 후려친다. 결과는 눈으로 볼 수 없는 대혼란으로 부대의 형태는 완전히 무너지고 수습할 수 없는 지리멸렬 상태에 빠진다. 이것은 적극적인 실패이다. 우리는 이때까지 재삼 그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 왔다.
즉 쇠퇴한 문명의 ‘해체‘가 바로 그것이며, 문명의 해체는 ‘지배적 소수자‘로 타락한 일단의 지도자로부터 ‘프롤레타리아의 이탈‘ 형태를 취해서 나타난다.
지도자로부터 추종자들이 떠나는 현상을 사회를 구성하는 상호간의 부분적 조화 상실로 보아도 좋다. 어떠한 전체에 있어서나 부분적으로나 상호간의 조화가 흔들리면, 그 대상 전체가 자기결정의 능력을 잃는다. 이 자기결정 능력의 상실이야말로 쇠퇴의 궁극적 판별 기준이다. 그리고 이 결론은 앞서 이 연구에서 도달한 자기결정 능력의 증대가 성장의 기준이라는 결론의 번복임을 알면 의외라 할 것도 없다. - P347

348-50 적응·혁명·사회악 / 서유럽 민주주의 -> 유교 사상 종언이 신속히 이루어져야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제도 사이의 부조화 중 한 가지 원천은 기존의 제도가 기존의 사회를 짊어질 수 없도록 새로운 사회적 세력ㅡ새로운 능력과 감정과 사상ㅡ이 도입되는 것이다. 이 새로운 것과 낡은 것과의 조화되지 않는 병치가 가져오는 파괴적인 결과는 예수의 가장 유명한 말 속에 지적되어 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며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태> 9:16-17)

이 비유의 근본적 본보기인 가정 경제에서는 물론 그 가르침을 문자대로 실행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는 포도주를 넣는 가죽 부대나 옷처럼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많은 인간이 활동하는 장소인 공통의 기반이기 때문에 인간이 합리적 계획에 의거하여 마음대로 생활을 정리하는 능려이 매우 제한된다.
물론 이상적으로는 새로운 역동적인 힘의 도입과 함께 현존하는 제도 전체가 개조되어야 함이 마땅하겠지만, 현재 성장하는 사회에서는 언제나 심히 시대착오적인 것이 재조정된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든 사람의 타성 작용 때문에 사회악이 날로 커가고 한편으로 사회 구조를 구성하는 대부분은 늘 부딪치는 새로운 세력과의 부조화가 더욱 더 커짐에도 불구하고 현상대로 머물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 때 새로운 세력은 동시에 두 개의 전혀 상반되는 방법으로 작용한다.
한편으로 새로운 힘은 스스로 설립한 새로운 제도나 자기 목적에 맞도록 개조한 낡은 제도를 통해 창조적인 일을 행한다. 그리고 그런 낡은 제도와 조화된 노선으로 흘러들어감으로써 사회의 복지를 증진시킨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들은 자기 길 위에 놓인 것이면 어떤 제도든 무차별하게 비집고 들어간다. 마치 기관실 안에 침입한 강력한 증기압이 거기 장치되어 있는 어떤 낡은 기관의 엔진을 움직여 돌아가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때 2개의 재액 중 어느 한 쪽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새로운 증기압이 낡은 기관을 산산조각으로 박살을 내거나, 아니면 기관이 이러저럭 견뎌 내면서 불안 상태로부터 파괴적인 새 방법으로 움직이기 시작하거나 둘 중 어느 하나다.
이상의 증기기관의 비유를 사회 생활에 적용시키면 새로운 압력에 견딜 수 없는 낡은 엔진의 폭발ㅡ또는 새 포도주의 발효에 견디지 못한 낡은 가죽 부대의 파열ㅡ에 해당하는 것은 가끔 시대착으의 제도를 습격하는 혁명이다. 한편 본래의 목적과 전혀 다른 움직임을 하는 동안의 긴장을 견딘 낡은 기관의 유해한 작용에 해당하는 것은 ‘끝까지 저항을 계속하는‘ 제도상의 아나크로니즘(시대착오)이 흔히 만들어 내는 범죄적 사회악이다.
혁명이란, 지연되었기 때문에 그만큼 격렬한 모방 행위로 정의할 수가 있다. 모방은 혁명의 본질적 요소이다. 모든 혁명이 이미 어딘가 다른 곳에서 일어난 사건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혁명을 그 역사적 배경 속에서 조사해 보면, 언제나 그 전에 작용한 외부의 힘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지 결코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님이 판명된다.
그 명백한 예는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다. 프랑스 혁명은 두 사건의 영향을 받아 일어났는데, 하나는 그 직전에 영국령 아메리카에서 일어난 사건ㅡ실로 자살적인 행위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구체제의 프랑스 정부는 이 사건을 지원했다ㅡ에서, 또 하나는 1세기 전에 영국이 이룩한 업적을 몽테스키외 이래 2세기에 걸친 프랑스의 ‘철학자들‘에 의해 통속화되고 찬미되어 끌어왔다.
지연 또한 마찬가지로 혁명에 본질적 요소이며, 그것에 의해 혁명의 가장 현저한 특징인 폭력적 성격이 설명된다. 혁명이 폭력적이 되는 것은 상당히 끈질긴 구제도가 한동안 새로운 생명의 표현을 방해하고 억누름으로써 낡은 제도의 수명이 끈질기게 연기되었기 때문이며, 낡은 제도에 눌려 있던 새 사회적 세력이 그만큼 강력하게 승리하였기 때문이다. 방해가 오래 계속되면 될 수록 출구가 막혀 있는 외형 압력은 커진다. 그리고 압력이 커짐에 따라 갇혀 있던 힘이 마침내 장해를 돌파할 때의 폭발이 맹렬해진다.
혁명 대신에 나타나는 사회악은 한 사회가 낡은 제도를 새로운 사회적 세력에 조화시켜야 할 모방의 행위를 지연시켰을 뿐 아니라, 좌절시켰을 때 사회가 입어야 하는 형벌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어느 사회에서 기존의 제도적 구조가 새로운 사회적 세력의 도전을 받았을 경우에, 기존 구조의 힘에 조화가 된 새로운 조정, 혁명(즉 지연된 부조화의 조정), 범죄적인 사회악이라는 세 가지 결과의 어느 한 가지가 일어날 것은 명백하다.
또한 세 가지 결과 중 각각 또는 그 모두가 동일한 사회의 다른 부분, 이를테면 그 사회가 민족 국가로 분절되어 있는 경우에 다른 민족 국가로서 실현되는 일이 있다는 것도 또한 명백하다. 조화된 조정이 우세하면 그 사회는 성장을 계속한다. 혁명이 우세하면 그 사회의 성장은 차차 위험해진다. 범죄적 사회악이 우세하면 쇠퇴기로 진단해도 무방하다. 방금 제기한 공식을 입증하는 몇 개의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 P348

352-4 민주주의와 산업주의가 전쟁에 끼친 영향
산업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노예 제도의 비참함이 증대된 것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참혹성이 증대됐다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전쟁은 노예 제도가 그러했던 것과 거의 같은 정도의 도덕적 이유로 널리 일반적으로 비난받는 또 하나의 오랜 시대착오적인 제도이다. 엄밀히 지적한 이유로 인해 전쟁은 또 다시 노예 제도와 마찬가지로 이익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수지 맞지 않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널리 퍼져 있다.
미국 남북 전쟁 직전에 H.R. 헬퍼라는 남부인이 「절박한 남부의 위기」라고 제목을 붙인 저서를 내서 노예 제도는 노예 소유자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지만, 상식을 벗어난 일인데도 쉽게 설명을 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 진정한 이익에 눈뜨려고 하는 계급의 비난을 받았다. 그것과 똑같이 1914~1918년까지의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노먼 엔젤(1933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 「유럽의 낙관적 착각」이라는 책에서 피력한 바로는, 전쟁이란 패자는 말할 것도 없고 승자에게도 전적으로 손해라는 것을 증명했지만, 평화 유지에 열렬했던 이 이단설의 저자는 마찬가지로 열렬한, 많은 독자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의 사회는 노예 제도의 폐지에는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는 순조로운 성과를 거둘 수가 없는가? 대답은 분명하다. 전쟁의 경우에는 노예 제도의 경우와 다른, 민주주의와 산업주의라는 2개의 추진력이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산업주의와 민주주의가 출현하기 직전의 서유럽 세계 상태를 회고하면, 그것은 18세기 중엽의 일이지만 당시 전쟁은 노예 제도와 거의 같은 상태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전쟁은 분명히 내리막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의 횟수가 줄었다는 것이 아니라ㅡ통계적으로 증명하려 하면 안 될 것도 없지만ㅡ이전보다 조심성 있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는 의미이다. 18세기 서유럽 합리주의자들은 전쟁이 종교적 파나티시즘(광신주의적 경향)에 쫓겨 무섭고 격렬했던 가까운 과거를 혐오감을 가지고 돌아보았다. 이 종교적 열광이라는 악마는 17세기 후반에 쫓겨났고, 그 직접적 효과로서 전쟁이라는 해악이 서유럽 사회 역사 그 이전, 또는 이후의 어느 시기에도 결코 악에 가까워진 일이 없을 만큼 최소한으로 억제되었다. 비교적 ‘개화된 시대‘도 18세기 말에 끝을 고하고, 전쟁은 민주주의와 산업주의의 영향으로 다시 한 번 가열되어 끝이 나 버렸다.
지난 150년 간에 걸친 격렬한 전쟁 끝에, 두 개의 힘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가 하고 물으면, 아마도 첫쨰로 산업주의 쪽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다. 지금 여기서 문제삼고 있는 의미에서, 최초의 근대전쟁은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시작된 일련의 전쟁이었으며 이들 전쟁에 가해진 산업주의의 힘은 보잘것없는 것이며 민주주의의 즉 프랑스 혁명적 민주주의가 가한 힘이 가장 컸다.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던 대륙 제국의 18세기적 구식 방비를 마치 칼로 버터를 자르듯 힘 안 들이고 돌파하여 유럽 전체에 프랑스 군을 진출시킨 것은 혁명적 광포로서, 나폴레옹의 군사적 천재라기 보다는 차라리 새로운 프랑스 군대의 혁명적 열광이었다. 만약에 이 주장을 지지하는 증거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경험이 없는 프랑스 소집 군대가, 나폴레옹 등장 이전의 루이 14세의 직업 군대가 해내지 못한 난사업을 해낸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또한 로마나 아시리아, 기타 옛날의 고도로 발달한 군국주의적 열강들이 기계화된 장비의 도움을 받지 않고, 소련 병사가 보아도 매우 유치하게 보이는 16세기의 화승총을 써서 문명을 파괴시켰던 일을 생각해도 좋다.
그 전후의 시대에 비해 그 잔학성의 정도가 적었던 근본적 이유는 전쟁이 종교적 광신주의 무기에서 벗어났으나 아직 민족주의적 광신주의에 의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과도기의 전쟁은 단순히 ‘왕들의 유희‘였다. 도덕적으로는 그러한 경박한 목적에 전쟁을 이용하는 것이 한층 더 고약한 일인지도 모르나 전쟁의 물적 참화를 경감하는 효과가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전쟁놀이를 하는 국왕들은 국민이 그들에게 허용하는 한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한도 내에서 수행하도록 유의하였다. 그들의 군대는 징병 제도에 의해 모아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종교 전쟁 떄의 군대처럼 점령한 나라를 황폐하게 하지도 않았고, 또한 20세기의 군대처럼 평화 시대에 만들어진 시설을 모조리 말살하는 따위의 일도 없었다. 그들은 군사적 게임의 규율을 지켰고 설정한 목적은 온당했으며, 패배한 적에게 재기 불능의 조건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드물지만 어쩌다 이러한 판례가 깨어진 경우ㅡ이를테면 루이 14세가 1674년과 1686년에 파르쯔 지방을 황폐화시킨 경우ㅡ 그러한 잔학 행위는 피해자 뿐 아니라 중립국의 여론으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에드워드 기번은 이러한 사건을 고전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유럽 제국의 무력이 행사되는 전쟁은, 적절한 승패가 결정적으로 정해지지 않을 때 일어난다. 세력의 균형 상태를 위한 동요는 앞으로도 역시 계속될 것이므로, 영국이나 이웃나라의 번영에 상승과 하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러한 부분적인 사건은 행복한 상태를 근본적으로 다치게 하지는 못한다. 유럽 인과 그 식민지 개척자들은 다른 종족보다 우수한 존재로 구별하는 예술·법률·풍속의 체계를 본질적으로 해칠 수는 없다."

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낙천적인 구절을 쓴 기번은 그 만년에 가서 그의 판단을 무색하게 만드는 새로운 전쟁이 연이어 일어남으로써 충격을 받았다.
마치 산업주의의 힘에 의해 노예 제도가 강화됨으로써 노예 제도 폐지 운동이 일어났듯이, 민주주의의 힘ㅡ뒤엔 물론 산업주의의 힘이 가해지지만ㅡ에 의한 전쟁의 격화는 반전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1914~18년의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뒤 이 운동 최초의 구체적 표현으로서 탄생한 국제연맹도 세계가 다시 1939~45년의 대전을 경험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거듭된 고난을 치루고 우리는 이제 겨우 단 하나 살아남은 어떤 강국이 완력으로 세계 국가를 수립하는 형태ㅡ그것은 너무 지겹고 또 너무 늦다ㅡ 대신에 협력적인 세계 정치 체제에 의해 전쟁을 폐지한다는 어려운 사업을 시험하는 새로운 기회를 얻었다. 우리가 우리의 세계에서 아직껏 다른 어떤 문명도 달성하지 못했던 이 일을 다행히 달성할 수 있을지는 신만이 아는 바이다. -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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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8-9 외계 행성에 사는 지적 생물의 생김새가 지구인을 닮았을 가능성은 거의 0이라고 나는 믿는다. 지구의 경우를 보건대 유전적 다양성은 일련의 우발적 사건들에 따라서 결정된다. 그뿐만 아니라 특정 유전자들의 선택 과정도 따지고 보면 우연성을 동반하는 환경적 요인들에 따라 좌우된다. 그렇다면 외계 행성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우발적 사건들과 그곳 환경을 지배하는 우연적 요인들이 어떻게 지구에서와 동일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내가 외계인과 지구인의 외형에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론적 근거이다. 형태는 비록 우리와 다를지라도 지적 생명 자체는 분명 외계에 존재할 것이다. 그들 역시 뉴런의 역할을 하는 일종의 스위치 소자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뉴런이 작동하는 원리는 우리의 뉴런과 다를 수 있다. 우리의 뉴런은 상온에서 작동하는 유기체로 돼 있지만 그들의 ‘뉴런‘은 아주 낮은 온도에서 작동하는 초전도 소자일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 그들은 우리보다 1000만 배나 더 빠른 속도로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외계인의 ‘뉴런‘은 물리적으로 서로 붙어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뉴런과 뉴런이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더라도 전파 신호를 통한 상호 교신이 가능하기 때문에, 지적 개체 하나가 여러 개의 유기체에 분산돼 존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멀리 떨어져 있는 자기 분신들이 전파 교신을 통해 서로를 연결하여 하나의 총체적 개체를 이루는 일이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지구상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이산적 존재를 가능케 하는 매체가 반드시 유기체일 필요도 없다. 심지어 행성 여러 개에 분산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총체적 지적 자아가 하나의 개체로 존재하고, 그 자아가 자기의 분신들을 사방에 흩어 놓는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이때 분신 하나하나는 총체적 자아와 전파를 이용하여 정보와 생각을 교환함으로써 총체성 유지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 P568

570 만약 우리가 그들과 접촉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 머릿속에는 우리에게 매우 흥미로운 지식과 정보가 많이 들어 있을 것이다. 반대의 상황도 상상할 수 있다. 내 생각에는 외계 생물들도 ㅡ비록 그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진화된 존재라고 하더라도ㅡ 우리에게 큰 흥미를 가질 것임에 틀림이 없다. 지구인들은 무엇을 알고 있고 어떻게 생각하고 그들의 두뇌는 어떤 구조이며 진화해 온 과정과 미래는 어떤 것일까 하고 그들 자신도 우리에 대하여 많은 것을 궁금해 할 것이다. - P570

577 결국 우리는 지구라는 특정 지역에서 일어난 물질 진화의 산물이다. 150억 년의 긴 세월을 거쳐 결국 물질은 의식을 갖추게 됐다. 그러나 의식의 산물인 지능은 인간에게 무서운 능력을 부여했다. 인간이 자기 파멸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를 갖춘 현명한 존재라고 아직은 확신할 수 없지만 많은 이들이 이러한 파국을 피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중이다. 우주적 시간 척도에서 볼 때 지극히 짧은 시간이겠지만 우리는 어서 지구를 모든 생명을 존중할 줄 아는 하나의 공동체로 바꿔야 한다. 그리하여 지구상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한편, 외계 문명과의 교신을 이룩함으로써 지구 문명도 은하 문명권의 어엿한 구성원이 돼야 할 것이다. - P577

581 별과 별 사이의 공간이 광막하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현재 이들의 항해 속도는 꿈 속의 달리기와 같이 한량없이 느린 편일 것이다. - P581

581 은하수 은하에는 지구보다 나이가 수백만 년 더 된 행성들이 틀림없이 많이 있을 것이다. 지구보다 심지어 수십억 년 이상 나이를 먹은 행성들도 상당수에 이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지구가 이 행성들에서 온 여행객의 방문을 받은 적이 전혀 없다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겠는가? 지구가 태어난 지 벌써 수십억 년이 지났다. 그동안 외계 문명권으로부터의 지구 방문이 단 한 건도 없었다고 믿기에는 지구의 나이 45억 년은 너무 길다. - P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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