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6-7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폭탄은 곧이어 있었던 나가사키의 경우와 다르게 지표에서 멀리 떨어진 고공에서 폭발했기 때문에 낙진의 문제가 비교적 덜 했다. 그러나 1954년 3원 1일 마셜 군도 비키니 섬에 있었던 수소 폭탄 시험은 예상보다 훨씬 높은 파괴력을 나타냈다. 폭발 지점에서 150킬로미터나 떨어진 작은 산호섬 롱애러프도 거대한 방사능 구름으로 덮였다. 그 섬의 주민들은 핵폭발이 서쪽에서 떠오르는 태양 같았다고 증언했다. 폭발한 지 수시간 후 방사능 낙진이 롱애러프 섬에 눈송이가 내리듯 떨어졌다. 평균 방사능 조사량이 175래드였는데, 이 값은 보통 체격의 사람이 사망할 수 있는 치사량의 반이 조금 못 되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 산호섬이 폭발 지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 그렇게 많이 죽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음식물을 통해 방사능 동위 원소인 스트론튬이 체내에 누적되고, 방사능 요오드가 갑상선에 차곡차곡 쌓였다. 어린이의 3분의 2와 어른의 3분의 1에게서 갑상선 이상, 성장 장애, 악성 종양 등이 발견되었다. 마셜 군도의 주민들은 특수하고 전문적인 치료를 받아야 했다. - P636

637-9 핵 공격에서 비록 몇몇 사람들이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쉽게 밖으로 드러나지는 않는 묘한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핵폭발은 지구 상층 대기의 질소와 산소의 결합을 촉진시켜 오존의 상당량을 파괴시킬 것이다. 오존층의 파괴로 태양 자외선이 지구 대기로 침투할 수 있고, 그 때문에 지구 표면에 도달하는 자외선의 양이 수 년 동안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태양 자외선은 피부암을 유발하는데 피부암은 특히 백인종에게 위험하다. 더욱 두려운 것은 지구 생태계에 가져올 변화이다. 하지만 변화의 실상을 모르기 때문에 대책을 세울 수 없다. 자외선은 곡식의 수확량을 격감시킬 뿐 아니라, 여러 종류의 미생물들을 죽일 것이다. 미생물의 어느 종이, 어떻게, 어떤 내용의 피해를 우리에게 가져다줄지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미생물의 멸종이 우리에게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미생물이 거대한 생태계 피라미드의 맨 밑바닥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류는 생태계 피라미드 맨 위층에서 겨우 아장거릴 줄만 아는 지극히 불안한 존재가 아닌가. - P637

642-3 리처드슨은, 자신의 곡선을 M=0까지 외삽한다면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살인의 빈도를 추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추정해 본 결과, 전 세계에는 대략 5분에 한 건꼴로 살인 사건이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개인 단위의 살인과 최대 규모의 전쟁이 연속적인 현상의 양끝인 셈이다. 전쟁과 살인은 동일한 성격의 현상이라는 이야기이다. 나는 심리적 관점에서 전쟁은 살인이라고 확신한다. 자신의 생존에 위협이 가해질 때, 자신의 생존이 도전을 받게 될 때 인간의 ㅡ적어도 일부 사람들의ㅡ 분노는 사람을 살인의 상황으로까지 치닫게 하는 경향이 있다. 같은 종류의 위협이 국가들에 가해질 때, 국가도 겉잡을 수 없는 살인적 분노에 휘말린다. 개인적 권력이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몇몇이 다수의 대중을 부추겨 당면 상황을 국가 간의 전쟁으로 몰아가는 경우를 우리는 역사의 기록에서 종종 보게 된다. 그렇지만 전쟁에서 사용되는 살인 기술이 발달하면서 전쟁의 피해상은 도를 넘는 처참한 수준으로 치달아 왔다. 이러한 변화는 다수의 사람들이 살인적 분노를 동시에 느끼게 만들고 결국 대규모 전쟁에 여러 나라가 말려들게 한다. 국가가 매스컴의 근간을 틀어쥐고 있으므로, 국가는 국민을 쉽게 선동하여 전쟁으로 몰아갈 수 있다.(이 점에 있어서 핵전쟁을 예외라고 할 수 있다. 핵전쟁은 극소수의 사람들이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642

643-4 우리는 여기에서도 우리의 열정과 좀 더 바람직한 인간 본성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을 볼 수 있다. 사람을 죽이고 싶을 정도의 격렬한 분노는 아주 먼 옛날 진화 과정에서 만들어져서 아직도 우리 머리 깊숙한 곳에 남아 있는 파충류의 뇌, 소위 뇌의 R-영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한편 감정의 중재와 기억의 관장은 진화의 가장 최근 단계에서 발달한 포유류와 인간의 뇌, 즉 변연계와 대뇌 피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앞에서 이야기한 갈등은 파충류와 포유류의 뇌가 벌이는 대립의 소산인 셈이다. 인류가 적은 규모의 집단으로 하찮은 수준의 무기만을 사용하며 살아갈 때에는 아무리 분노가 극에 달한 전사라고 하더라도 그가 죽일 수 있는 사람의 수는 겨우 한들에 불과했다. 현대로 오면서 기계 문명과 함께 전쟁 수단도 급격히 발달했다. 그러나 이 짧은 기간 동안에 ‘우리‘도 많이 변했다. 이제 우리는 분노, 좌절, 절망 등의 동물적 격정을 이성의 힘으로 달랠 줄 알게 됐다. 인류는 최근에 벌어진 세계적 불의와 지역적 불의를 행성 규모에서 어느 정도는 개선할 수 있게 됐다. 그렇지만 현대 무기는 수십억의 인명을 한꺼번에 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성숙 정도는 충분치 않단 말인가? 과연 우리는 이성의 기능을 우리 자신에게 가장 효율적으로 가르치고 있는가? 우리는 전쟁의 원인을 규명하려고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가? - P643

645-6 지구 전역에 걸쳐 공포의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핵전쟁을 억지하는 정책을 처음 시도한 나라는 아메리카합중국과 (구)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이었다. 양측은 이 정채그이 성공을 위하여 결국 인류 전체를 볼모로 잡았다. 양국은 상대 진영이 취할 수 있는 행동 양식의 경계를 정했다. 어느 한쪽이 정해진 선을 넘는 행동을 하면 핵전쟁에 즉각 돌입하게 됨을 양측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경계의 정의는 때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새로운 경계선을 서로에게 확실히 해 둘 필요가 끊임없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각 진영은 군사적 우위에 서야 한다는 강한 휴혹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 유혹의 실현은 항시 상대방이 심각하게 경계할 수준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그러므로 쌍방은 상대의 인내 한계선을 계속 타진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핵 폭격기의 북극 통과 비행, 쿠바 미사일 위기, 대인공 위성 무기의 실험, 베트남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이 그 길고도 슬픈 타진 목록의 일부이다. 전 지구적 공포의 균형은 유지되기 힘든 아주 미묘하고 불안정한 평형이다. 미묘한 균형을 깨지 않기 위하여 쌍방은 범하지 말아야 할 실수를 반드시 피해 가야 한다. 그 어떤 일도 삐끗 어긋나면 안 된다. 무엇보다 인간의 파충류적 열정을 적정 수준 이하로 제어해야 한다. - P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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