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2-3 "생물은 바다 속에서 시작된다. 바다 속에서 생물은 대단한 능률화의 높은 수준에 도달한다. 어류는 기능과 외형이 대단히 잘 되어 있으므로, 오늘날까지 조금도 변화하지 않고 존속해 온 형태(예를 들면 상어와 같은)를 그대로 낳고 있다. 그러나 계속 높은 단계로 올라가는 진화의 과정은 없었다. 진화의 면에서 보면 ‘성공만큼 실패하는 것은 없다‘고 하는 잉그 박사의 경구가 항상 타당한 것 같다. 환경에 완전히 적응한 생물, 그 능력과 생명력의 전부를, 지금 일에 집중하고 소모해 버리는 동물은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을 경우에 그 변화에 적응할 여력을 전혀 갖지 못하게 된다. 시대가 그러한 동물은 점점 계획된 대로의 현재 기회에 이전의 능력을 습관적으로 맞추어 나간다. 결국에는 전혀 의식적인 노력을 하지 않고 또 불필요한 가외 운동도 하지 않고 생존에 필요한 모든 활동만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 반면에 만일 그 장소의 환경이 변화하면 어떨까? 그렇게 되면 그들은 절멸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을 것이다. 이렇듯 습관적 기능화에 성공하는 일이 오히려 많은 수의 종류가 절멸하는 원인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기후 조건이 변화했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변하기 전의 기후 조건에 자신을 적응하기 위해 생활력의 여분을 완전히 써 버렸다. 여분의 여력이나 자극에의 도전도 없다. 예의 생각이 얕은 처녀(<마태> 25:1~13)처럼 더 이상의 적응을 하기 위한 여분의 기름을 남겨 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한 가지에 너무너무나 집착했고 새로운 적응에 여력이 없어 결국 멸망해 버린 것이다." - P402

428 약탈자가 된 변경 태수(일부)
티무르와 샤를마뉴, 그리고 후기 앗시리아 왕들의 생애를 분석한 결과 우리는 이 세 가지 경우에서 모두 동일한 현상이 있음을 관찰했다.
한 사회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변경민들에게 발달시킨 뛰어난 군사력이 본래 영토인 변경 바깥쪽의 주인 없는 지대로부터 자신들의 형제인 내부 동포에게로 향하게 되면 군국주의자라는 도덕적 병폐로 전환하여 재앙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런 사회적 해악의 다른 몇 가지 예가 곧 우리들 머리에 떠오른다. - P428

433-5 11세기에 그리스도교 공화제를 수립했고 서유럽 사회를 봉건적 무정부 상태로부터 구출하려고 했던 로마 교회의 창조적 인물은 오늘날 국제적 무정부 상태를 해소하여 세계 질서를 세우려고 한 그들의 정신적 후계자가 빠진 것과 같은 딜레마에 처했다. 그들의 목적의 본질은 정신적 권위에 의해 물리적인 힘을 배제하는 데 있었고, 정신적 칼이 그들의 더할 나위 없는 승리를 거두게 한 무기였다. 그러나 물리적인 힘을 믿는 기성 체계가 정신적인 칼을 무시하고 태연한 자세를 취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이런 정신적 위기에 로마 교회의 투사들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 대해 답을 내라는 도전을 받았다. 신의 병사는 비록 그 전진이 정지되는 위험에 부닥치더라도 결코 정신적 무기 이외의 무기를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아니면 악마에 대항하는 신의 싸움을 위해 상대편과 같은 무기를 써서 수행할 것인가? 힐데브란트는 그레고리우스 6세(재위 1045~46년)로 부터 교황청 재산의 관리인으로 임명되었을 때, 교황청의 재산이 끊임없이 비적에게 약탈당하는 것을 보고 후자를 택하여 군대를 모집하고 무력으로 비적을 근절시켰다.
힐데브란트가 이런 조치를 취했을 때, 그위 행위의 내적인 도덕적 성격은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40년 뒤에 그의 최후의 시기가 오자 마침내 이 수수께끼에 대한 뚜렷한 답이 나왔다.
1058년 힐데브란트가 교황으로서 살레르노(이탈리아 서남부의 도시)에서 망명 중에 숨을 거두려 할 때, 로마 자체는 교황의 정책이 초래한 무거운 재앙 때문에 짓눌리고 있었다. 이 때 로마는 성 베드로 사원 제단ㅡ교황청의 보고ㅡ의 층계로부터 시작하여 차츰 확대되어 마침내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를 휩쓸었던 군사적 투쟁에서 교황이 원조를 청한 바 있었던 노르만 인에 의해 약탈당하고 불타 버린 직후였다. 힐데브란트와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와의 싸움은 150년이 지난 뒤에 인토켄티우스 4세와 프리드리히 2세의 가장 치명적이고 가장 큰 재해를 초래했던 싸움의 예고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법률가에서 군국주의자로 돌변한 인노켄티우스 4세(재위 1243~54년)의 시대에 이르러서 이미 우리의 의심은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힐데브란트 자신이 힐데브란트 교회를 결국 그의 적들ㅡ현세·혈육·악마ㅡ이 그가 지상에 세우려고 노력했던 신의 나라를 이겨내는 방향으로 돌렸던 것이다.

정치는 믿지도 믿은 적도 없다.
가르치는 자는 교회조차 믿지 않는다.
교회마저 교권조직이 비밀회의를 거듭하여
성 베드로를 황제의 자리에 앉혀놓고, 그것으로써
그를 위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숭배해 온 약속을 인간을 위해 얻으려고 꾸미며,
교회의 지상에서의 지배권을 확대하기 위해 그리스도
천국의 계율을 늦추었다.

이상으로써 교황청이 어떻게 하여 자신이 물리치려고 노력했던 물리적 폭력의 악마에 사로잡히게 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동시에 교황청의 미덕이 반대의 악덕으로 바뀌게 된 다른 여러가지 이유도 설명할 수 있었다는 결과가 된다. 물질적인 칼이 정신적인 칼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이 근본적인 변화이며, 그 뒤는 모두 그로 인해 파생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교황청은 성직자의 재정 문제에 관하여 11세기에는 주로 성직 매매의 근절에 관심을 쏟고 있었으며, 13세기에는 고위의 성직을 사기 위해 부정하게 세속적인 권력에 교회의 수입을 넘기는 악습의 뿌리를 애써 뽑아내고 교황청의 서임된 성직자들을 위해 그 수입을 나누어 주었는데, 14세기에 와서 교황청 자신을 위해 세금을 부과시키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일까? 답은 간단하다. 교황청은 군국주의적으로 변했고 전쟁은 돈이 들기 때문이었다. - P433

465-7 현재 <마카베오 하후서>(경의 성서 「아포크리 파산」에 수록되어 있는 책) 중에 전해지는 저 온순한 순교자들ㅡ노 율법 학자 엘르아잘과 7인의 형제 및 그들의 어머니(안티오코스의 박해에 굴하지 않고 죽음을 택함)ㅡ이 고지식한 바리새인의 정신적 조상이었다. 이 바리새라는 것은 ‘분리하는 자‘라는 뜻으로 그들이 스스로 칭한 명칭이다. 헬라스 사회에서 오리엔트 출신의 내적 프롤레타리아의 역사를 보면 기원전 2세기 이래 폭력과 비폭력이 서로 사람들의 혼을 지배하려고 다투지만, 결국 폭력은 자멸하고 비폭력만이 남았음을 볼 수 있다.
폭력을 택하느냐 비폭력을 택하느냐 하는 것은 처음부터 문제가 되었다. 기원전 167년 초기의 순교자들이 취한 비폭력적 태도는 곧 성급한 유다스에 의해 버려졌다. 그리고 이 프롤레타리아의 ‘무장한 힘 있는 사람‘이 거둔 직접적 물질적 성공이ㅡ그것은 표면적일 뿐 가짜요, 일시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ㅡ후세 사람들의 눈을 현혹했다. 예수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마저도 그들의 스승이 자신의 운명을 예언하는 것을 듣고 분개했으며, 그 예언이 실현됨에 이르러서는 일어설 기운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지 불과 수 개월 후에 가말리엘(국민 전체로부터 존경받은 율법학자)이 처형된 예수의 제자들이 기적적으로 기운을 회복하는 것을 보고, 신이 그들의 옆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또 다시 그 수년 후에는 가말리엘 자신의 제자 바오로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선전하기에 이르렀다.
초대 그리스도교도가 이렇듯 폭력에서 비폭력으로 전향하는 일은 물질에 대한 그들의 욕망을 떨쳐 버림으로써 얻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십자가상에서 죽음으로써 예수의 제자들에게 일어난 부활에 대한 신앙과 같은 일이, 기원 70년 예루살렘의 파괴를 기점으로 정통파 유대교의 유대인들 사이에 지켜지는 일로 일어났다.
‘하느님의 나라는 지금 막 실현되려는 어떤 외면적 관념‘을 부정한 새로운 유대교의 일파가 나타난다. 유대인의 폭력주의가 문학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묵시록적 문서는 <다니엘> 하나만 빼놓고 이제 율법과 예언자의 시로 이루어지는 유대교 정전에서 추방되어 버렸다.
그리고 인간의 활약으로 신의 의지를 이 세상에서 실현·촉진시키려는 일체의 노력을 삼간다는 그와 반대의 원칙이 유대교의 전통 속에 든든하게 뿌리를 박게 되었다. 현재에도 엄격하게 유대교의 전통을 지키는 ‘아구다스 이스라엘‘파는 시온주의자의 운동을 옆눈으로 흘겨보고 20세기의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향토‘를 건설하는 시온주의 사업에 전혀 참가하지 않으려고 할 정도이다.
정통파 유대교도에게 일어난 보수적 믿음이 유대 민족을 화석의 형태로 존속하게 했지만, 예수의 제자들에게 일어난 그와 같은 믿음은 그리스도교를 위해 더욱 큰 승리에의 길을 열어 주었다. 박해의 도전에 대해 그리스도교회는 엘르아잘이나 ‘7인 형제‘의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응전하여 그 대가로서 헬라스 사회의 지배적 소수자를 개종시키고, 또 나중에는 외적 프롤레타리아의 야만족 전투 단체를 개종시킬 수 있었다.
성장하는 수 세기 동안 그리스도교의 직접적 적대자는 가장 새로운 형태를 한 헬라스 사회의 원시 부족 종교였는데, 그것인즉 ‘신성한 카이사르‘의 인격에 의해 대표되는 헬라스 사회의 세계 국가에 대한 우상 숭배였다. 교회가 잇달아 관헌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결국 로마 정부가 도저히 누를 수 없었던 정신적인 힘으로 로마 정부를 굴복시킨 것은, 모든 성원에게 비폭력적이면서도 어디까지나 완강하게, 단지 단편적 형식일지라도 우상 숭배를 허용하지 않았던 단호한 태도 때문이다.
그러나 이 로마 제국의 원시적인 국가 종교는 정부가 전력을 기울여 유지하고 강제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인심을 얻을 수 없었다. 로마 당국자가 그리스도교도에 대해 어떤 일정 의식을 행함으로써 표명하도록 명한 형식적인 존경이 이 국가 종교의 처음 시작이자 마지막이었다. 비그리스도교도에게 있어서는 형식적인 것 이상 아무 의미도 두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의무를 당연한 것으로 실행하였고, 그리스도교도가 어찌하여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 별것 아닌 관습에 따르기를 거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신앙 자체에 있어서ㅡ왜냐하면 정치적 강제의 뒷받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선천적인 인심을 끄는 힘에 의한다는 의미에서ㅡ유력한 그리스도교의 경쟁 상대는, 이 국가 종교도 다른 어떠한 형태의 원시 종교도 아니고, 그리스도교 자체와 마찬가지로 헬라스 사회의 내적 프롤레타리아 안에서 발생한 몇 개의 ‘고등 종교‘였다. - P465

470 해체기의 사회가 이처럼 외래 건설자에게 자기네 세계 국가를 만들어 달라고 한 것은, 그 사회 고유의 지배적 소수자가 전적으로 무능해져 창조력을 잃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피할 수 없는 노쇠 현상에 대한 형벌은 굴욕적인 권리 상실이었다. 지배적 소수자의 일을 하기 위해 찾아오는 외국인은 극히 당연한 과정으로서 현지에서 지배적 소수자의 특권을 가로챈다. 이리하여 외래자가 건설한 세계 국가의 토착민인 지배적 소수자는 모두 내적 프롤레타리아와 같은 지위로 하락된다. - P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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