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2-4 예를 들어 서유럽적인 학과를 가르치는 기술을 습득한 교사와 서유럽적인 형식에 따라 행정 사무를 수행하는 방법을 습득한 관리, 프랑스식 공공법 절차에 따라 나폴레옹 법전의 재탕을 적용하는 요령을 습득한 법률가가 그들이다.
인텔리겐차가 존재하는 경우에는 언제나 단순히 2개의 문명이 접촉했을 뿐 아니라, 두 개의 문명 가운데 한 쪽이 다른 쪽의 내적 프롤레타리아 안에 흡수되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추론해도 틀림이 없다.
그와 동시에 인텔리겐차의 생활에 역력히 나타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 그것은 인텔리겐차는 나면서부터 불행하다는 사실이다.
이 연락 장교 계급은 자기를 낳은 양친이 속하는 종족의 어느 쪽에서도 따돌림을 받는 혼혈아의 운명적인 불행을 맛보아야 한다. 인텔리겐차가 자국민으로부터 소외당하고 멸시당하는 것은 인텔리겐차의 존재 자체가 치욕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인텔리겐차가 있었다는 사실이, 그 문명 사회는 비위를 맞추어야 하고 싫어도 피할 수 없는 사회였음을 상기시키는 실마리가 된다. 바리새 인은 로마의 세리와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젤당(로마의 지배에 반항한 열광적 유대교도)은 헤롯 당원 로마파(친 로마파의 유대인)와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그런 상황이었을 것이라고 상기하게 된다.
이처럼 인텔리겐차는 본국에서 사랑을 받지 못하는 동시에 그 풍습과 기술을 그처럼 힘들여 재치있게 외교 관계를 득한 바로 상대국으로부터도 존경받지 못했다. 저 역사적인 인도와 영국과의 초기 관계에서 영국령의 인도 당국이 행정상의 편의를 위해 양성한 힌두교의 인텔리겐차는 언제나 영국인의 조소의 대상이 된 게 그 좋은 예이다. ‘영국적 교육을 받은 인도인‘인 ‘바부‘가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면 할 수록 인도인이 볼 때 유럽 인, 특히 영국인인 ‘사히부‘들은 한층 더 심술궂게, 아무래도 지울 수 없는 잘못된 영어의 미묘한 부조화를 웃음거리로 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웃음은 설령 별로 악의가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인텔리겐차는 이중으로 우리가 정의한 프롤레타리아에 합치한다. 그들은 하나의 사회가 아닌 두 가지 사회 ‘안에‘ 있으면서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그 역사의 처음 단계에서는 두 가지 사회 체제의 쌍방에서 없어서는 안 될 기관으로 느낌으로써 스스로를 위로할 수도 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러한 위로마저 빼앗기고 만다. 왜냐하면 인적 자원 자체가 상품화된 곳에서는 공급을 수요에 맞추는 것은 거의 당연한 일로서 때가 되면 인텔리겐차는 생산 과잉과 실업으로 고민하게 되기 때문이다.
표토르 대제는 많은 러시아 관리를 필요로 했고, 동인도회사가 많은 수의 서기를, 메메트 알리도 일정 수의 이집트 인 방적공과 조선공을 필요로 했다. 그렇게 되면 도공들이 인간 점토를 빚어 그들을 제조하기 시작한다. 인텔리겐차 제조의 과정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어서 시작하기보다 그만두는 것이 어렵다.
왜냐하면 이 연락 장교 계급은 그들이 봉사해서 이익 얻은 사람들에게서조차 경멸받지만, 그 직업의 단점은 그 일원이 되는 자격을 갖춘 사람의 눈으로 보면 인텔리겐차가 무척 경기가 좋아 보이기 때문에 상쇄된다. 지망자의 수가 고용의 기회와 전혀 균형이 잡히지 않게 증가하여 일자리를 얻은 최초의 인텔리겐차 주위에는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인생에서 퇴보한데다가 세상에서 소외당한 지적 프롤레타리아의 무리가 우글거리게 된다. 소수의 러시아 관리에 무수한 ‘허무주의자‘가 합치고, 소수의 하급 서기에 무수한 ‘실의에 빠진 학사‘들이 무리를 짓는다.
인텔리겐차의 고뇌는 이전보다 이후의 상태에서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크다. 사실 우리는 인텔리겐차가 운명적으로 짊어지고 있는 불행은 시간의 산술 급수적 진행에 대해 기하 급수적 비율로 증대한다고 하는 하나의 사회적 ‘법칙‘을 세워도 좋을 정도이다.
17세기 말경부터 모습을 나타내는 러시아의 인텔리겐차는 이미 1917년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볼셰비키 혁명 때에 쌓인 원한을 뱉어 내었다. 18세기 후반부터 모습을 나타내는 벵골의 인텔리겐차는 오늘날 인텔리겐차의 출현이 50년 내지 1백년쯤 뒤진 영국령 인도의 다른 지방에서는 아직 볼 수 없는 혁명적인 과격함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사회적 잡초가 번식하는 것은 본래 그것이 발생한 땅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최근에 그것은 반 서유럽화한 주변의 나라들 뿐 아니라, 서유럽 세계의 한가운데까지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다. 중등 교육과 대학 교육까지 받았으면서 훈련된 능력의 적당한 배출구를 얻지 못한 하층 중산 계급이 20세기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당과 독일의 국가사회당(나치스)의 주축이 되었다. - P482

491-3 그뿐 아니라, 설령 우리가 드디어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배신의 과정은 몹시 시간이 걸리고 힘드는 일이다. 앞으로 아무리 우리가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도 그 과정을 희망대로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뭐니 뭐니 해도 지금부터 1천 2백 년 이상이나 전에 서유럽 그리스도교 사회가 교회의 태내에서 가냘픈 갓난아이로서 탄생한 이래 우리와 우리의 조상이 그 안에서 태어나 성장해 온 전통을 버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데카르트·볼테르·마르크스·마키야벨리·홉스·무솔리니·히틀러 등이 우리 서유럽 사회 생활을 비그리스도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 왔으나 그들의 청소나 소독은 단지 부분적인 효과를 올린 데 불과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스도교의 바이러스 내지는 만능약이 서유럽 사회의 혈액 속에 들어 있는ㅡ그것이 저 불가결의 액체(혈액을 말함) 바로 그 자체의 별칭이 아닌 한ㅡ서유럽 사회의 정신 구조에서 완전히 제거되고 헬라스 사회처럼 순수한 이교 사회가 된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우리의 조직 안에 있는 그리스도교적 요소는 단순히 모든 곳에 편재해 있을 뿐 아니라, 프로테우스처럼 자유자재로 변신한다. 그의 장기의 하나는 그것을 박멸하기 위해 쓰이는 강력한 살균제 그 자체 속에 자기의 본질을 농후하게 숨어들게 함으로써 절멸을 면하는 점이다.
우리는 이미 반그리스도교적 근대 서유럽 철학의 반그리스도교적 적용을 지향하는 공산주의 속에도 그리스도교적 요소가 들어가 있음을 지적했다.
현대의 반서유럽적인 온건주의의 예언자들인 톨스토이나 간디도 그들의 사상이 그리스도교에서 자극을 얻은 것임을 결코 숨기려 하지 않았다.
상속권을 박탈당하고 서유럽 사회의 내적 프롤레타리아에 편입되는 시련을 겪은 여러 집단 중에서도 가장 참혹한 꼴을 당한 것은 노예로서 미국에 보내져 온 미개의 아프리카 흑인들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기원전 최후의 2세기 동안에 다른 모든 지중해 연안 제국에서 로마 시대의 이탈리아에 끌어모아져 온 노예 이민과 닮은 것임을 알았다. 또한 미국에 끌려온 아프리카인 농원 노예는 이탈리아에 끌려온 오리엔트 인 농원 노예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가해지는 거대한 사회적 도전에 종교적 응전으로 대처했음을 살펴보았다.
이처럼 양자 사이에는 유사점이 인정되나 중대한 차이점이 하나 있다. 이집트와 시리아와 아나톨리아에서 이탈리아로 끌려온 노예 이민은 자기네들이 가져온 종교 안에서 위안을 찾았으나, 북아메리카의 아프리카 인 노예는 그들 주인의 세습 종교 안에서 위안을 얻었다.
이 차이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부분적으로는 분명히 이 두 경우 각 노예의 사회적 전력(前歷)의 차이에 의해 설명이 된다. 로마 시대의 이탈리아 농원 노예는 주로 역사가 길고 교양이 깊은 오리엔트 주민 출신자였다. 따라서 그 자손들이 그들의 문화적 전통에 집착할 것은 당연히 예기되는 바이지만, 이에 반해 아프리카 흑인들의 선조 전래의 종교는ㅡ그들 문화의 다른 어느 요소도 마찬가지지만ㅡ도저히 그들의 주인인 백인들의 우월한 문명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이 못 되었다.
이 차이점이 바로 서로 다른 결과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이 되지만, 그러나 그 차이를 완전하게 설명하려고 한다면, 이번에는 양쪽 주인의 문화적 차이도 고려에 넣지 않으면 안 된다.
로마 시대의 이탈리아에서 오리엔트 인 노예는 그들의 주인인 로마 인이 종교적 진공 상태에서 생활하고 있었으므로, 실제로 그들 자신의 종교적 유산 이외에는 달리 종교적 위안을 얻을 것이 없었다. 그들의 경우 값비싼 진주는 노예의 유산 속에 있었지 주인의 유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서유럽 사회의 경우 세속적인 부와 권세는 물론이거니와 정신적 재보 또한 노예를 혹사하는 지배적 소수자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러나 정신적 재보를 소유하는 것과 그것을 남에게 나눠 준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점차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노예 소유자의 손이, 같은 인간을 노예로 한다는 모독 행위로 그 신성한 정신적 양식을 더럽혀오기는 했지만 그것을 원시적 이교를 신봉하는 그들의 희생자에게 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 한층 더 놀라운 현상으로 생각된다. 노예를 혹사하는 복음 전도자는 도대체 어떻게 하여 그처럼 지독한 학대를 가하여 정신적으로 떠난 노예의 마음을 어떻게 감동시킬 수 있었던 것일까?
그러한 상황에서도 개종자가 생겨났다면 확실히 그리스도교는 무엇에도 굴하지 않는 생명력을 가졌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종교란 이 지상에서 인간의 영혼 이외에는 거처를 갖지 않으므로 서유럽의 신이교 세계(그리스도의 신앙을 잃고 이교의 상태로 돌아간 세계)에도 아직 여기저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 된다. 그리하여 "아마도 성중에는 50명의 의로운 자가 있을지라도"
사실 미국의 노예 전도를 보면 어디까지나 신앙을 버리지 않는 그리스도교도 몇 사람이 활약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의 흑인 노예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사실은 한 손에 성서를 들고 한 손에 매를 든 농원의 노예 감독의 전도 사업에 의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존 G. 피라든지 페터 로스 클라베르 같은 사람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된 일이다.
그것은 노예가 주인의 종교로 개종한다고 하는 기적으로부터 생긴 결과로서, 내적 프롤레타리아와 지배적 소수자 사이에 항상 볼 수 있는 분열이 서유럽 사회의 사회 체제에서는 지배적 소수자가 포기하려고 해 온 그리스도교에 의해 치유되어 가고 있는 사실을 볼 수 있다. 더구나 미국 흑인의 개종은 근년의 그리스도교 전도 활동이 거둔 수많은 승리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 환하게 빛나 보이던 신이교적인 지배적 소수자의 전도가 급속히 빛을 잃고 계속되는 전란으로 고민하는 우리 시대에 있어,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의 모든 가지 속을 다시 생명의 수액이 맥맥이 흐르기 시작하고 있음이 분명히 눈에 보인다.
이러한 정경을 보면 서유럽 사회 역사의 다음 장은 결국 헬라스 사회 역사의 마지막 단계와는 다른 방향을 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적 프롤레타리아가 일구어 놓은 문명의 흙 속에서 새로운 교회가 싹트고 쇠퇴하고 해체되는 한편, 그런 문명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유언 집행인과 유산 수취인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아니다. 혼자서 서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한 문명이 뜻하지 않게도 지금까지 뿌리치고 밀어내려 하던 선조 전래의 교회의 팔에 결국 안기게 되어 치명적인 전략을 면하게 될 것 같다. - P491

509-10 북미 인디언은 최초 영국인 개척자가 도착한 그 순간부터 280년 후인 1890년 수 전쟁에서 인디언의 최후 무력 저항 시도가 분쇄될 때까지 거의 ‘도망쳐 다니기만‘ 했기 때문에 그들이 유럽 인의 침략이라는 도전에 대해 창조적인 종교적 응전을 할 수 있었다는 일 그 자체가 주목할 만한 일인데다 한층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인디언의 응전이 온건적인 성질이었다는 점이다. 인디언의 전투 단체에서 예상된 창조적 응전은 어느 정도 그들 자신의 모습을 본뜬 이교적 종교ㅡ이로쿼이족의 올림포스 또는 아스가르드 같은 것ㅡ를 창조하거나, 아니면 그들 공격자인 칼뱅적 신교의 가장 전투적인 요소를 받아들이거나, 어느 하나였다. 그런데 1762년의 무명 예언자 델라웨아를 비롯해, 1885년경 네바다에 출현해 인디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워보카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예언자들은 그와는 전적으로 다른 종류의 복음을 설파했다. 그들은 평화를 내세우고 그들의 제자들에게 화기 사용을 비롯해 그들의 적인 백인으로부터 배운 일체의 기술적 물질적 ‘개량품‘의 사용을 금하도록 요구했다. - P509

512-3 그런데 사실 오늘날 야만인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 한가운데에서가 아닌가? "고대의 문명은 밖에서 수입한 야만인 때문에 멸망하였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야만인을 키우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세대에서 우리의 바로 눈앞에서 한 국가 또는 국가라는 한 형태로, 이때까지 그리스도교 세계였던 그 사회의 주변이 아니라 중심에 다수의 신야만인 전투 단체가 편성되는 것을 봐오지 않았던가?
파쇼 전투 부대와 나치스 돌격대의 전투원들은 그 정신에 있어 야만인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들은 자신들이 그 사회의 의붓자식이며 풀어야 할 원한을 가진 학대받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차없이 무력을 행사하여 ‘해가 비치는 곳‘을 획득할 도덕적 권리를 갖고 있따고 그렇게 선동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 선종이 바로 겐세릭이나 아틸라와 같은 외적 프롤레타리아의 수령들이, 스스로의 잘못으로 방위 능력을 잃은 세계를 약탈하러 갈 때에 언제나 부하 전사들에게 타일러 주던 가르침이 아니었던가.
1935~36년의 이탈리아ㅡ아비시니아 전쟁(이티오피아 전쟁)에서 검은 피부가 아니라 검은 셔츠가 야만의 표지였음은 확실하며, 검은 셔츠를 입은 야만인 쪽은 그가 희생물로 하였던 검은 피부의 야만인보다 훨씬 무서운 흉조였다. 검은 셔츠를 흉조라고 하는 것은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광명을 배반하는 죄를 범했기 때문이며, 위험한 까닭은 죄를 범하는 수단으로서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선조 전래의 기술을 갖고서 그것을 신에 대한 봉사에 유용하게 쓰는 대신 악마에 대한 봉사에 전용했기 때문이다.
그렇긴 하나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여도 아직 문제의 근본까지 파내려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 이 이탈리아의 신야만주의가 도대체 어떤 원천에서 나왔는가 하는 거을 조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솔리니는 전에 "내가 이탈리아를 위해 하고 있는 것은 대영 제국을 건설한 위대한 영국인이 영국을 위하고, 또 위대한 프랑스 식민지 개척자가 프랑스를 위해 한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말한 일이 있다. 이 이탈리아 인의 말을 우리 자신의 선조가 이룬 업적의 희화라고 일소에 붙이기 전에 우리는 희화라는 것도 인물의 특징을 실로 잘 잡아서 표현하는 수가 있다는 사실에 반성할 필요가 있다.
문명의 길을 외면한 이탈리아 신야만인의 흉측한 얼굴 속에 그가 모범으로 찬양한 영국인ㅡ클라이브와 드레이크와 호킨스 등ㅡ의 모습이 약간 보인다고 자인하지 않을 수 없으나, 우리의 질문을 좀더 깊이 파고들어갈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의 조사에 의하면, 지배적 소수자와 외적 프롤레타리아의 싸움에서 처음에 공격을 거는 것은 지배적 소수자 쪽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하지 않을까?
이 ‘문명‘과 ‘야만‘과의 사이에 벌어진 싸움의 역사를 쓴 것은 거의 전부가 ‘문명‘진영에 속하는 필자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저 고전적이고 죄 없는 문명의 아름다운 영토 안에 야만과 전화와 살육을 들여오는 외적 프롤레타리아의 모습은 아무래도 사실의 객관적인 묘사가 아니라, ‘문명 쪽이‘ 자기가 도발하여 반대 공격의 목표가 되자 그 분노를 표현한 것처럼 생각된다.
야만인의 적에 의해 쓰여진 야만인에 대한 고소장은 결국 다음의 시와 별로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이 동물은 맹랑한 놈이다
때리면 덤벼든다! - P512

537-9 방종과 자제
해체기 사회 특유의 방종이나 자제의 출현을 확인한다는 것은 다소 곤란할지도 모르겠다. 이 두 가지 형태의 개인적 행동 양식은 여하한 사회적 환경에서도 인간 개개인이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개 사회의 생활에 있어서도 오르기아(난행)적 경향과 금욕적 경향을 찾아볼 수 있고, 또한 이 두 가지 기분은 해마다 계절 따라 주기적으로 바꾸어 가며 구성원의 감정을 집단적으로 표현하는 부족 전체의 의식 형태를 취하여 나타난다. 그러나 해체하는 문명이 생활 속에서 창조성을 대신하여 나타내는 방종에 의해 우리가 뜻하는 것은 이와 같은 원시적 감정의 유출보다도 더욱 엄밀히 규정되어 있는 것이 있다. 우리가 뜻하는 방종은 창조 활동 대신 계율에 반대되는 설ㅡ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또 이론적이건 철학적이건ㅡ이 받아들여지는 심적 상태이다. 그러면 이런 뜻에서의 방종의 예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창조성 대신 나타나는 또 하나의 현상으로서 그것과는 정반대의 태도인 자제의 예와 병행하여 동시에 보아 나가면 가장 확실하게 규명할 수가 있다.
예를 들어 헬라스 사회 동란 시대에, 쇠퇴 후 최초의 세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방종과 자제의 대립에 대한 구체적인 예가 플라톤이 묘사한 「향연」속의 알키비아데스와 소크라테스, 「국가」속의 트라시마코스와 소크라테스의 모습에 나타나 있다. 감정의 노예가 된 알키비아데스는 실천상의 방종을 대표하고 있으며 ‘힘이 정의이다‘라는 설을 주장하는 트라시마코스는 똑같은 분위기를 이론상으로 대표한다.
헬라스 사회 역사의 다음 단계에서 창조 대신 행해지고 있는 이 두 가지 양식의 자기 표현을 시도한 각 대표자가 자기들의 행동 방식이야말로 ‘자역에 따라 사는‘ 길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여기에다 관록을 붙이려고 했던 것을 인정할 수 있다. 방종이야말로 지금 말한 것 같은 장점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 것은 에피쿠로스의 이름을 함부로 인용하여 그 이름을 더럽혔기 때문에 에피쿠로스파 시인 루크레티우스로부터 그 당치 못한 행위를 심하게 힐책당한 저속한 쾌락주의자들이었다. 다른 한편, 금욕 생활이야말로 ‘자연적‘ 생활 태도로서 승인되어야 한다는 것이 키닉 학파ㅡ그 대표적 인물은 그 옛날 나무 통 속에서 생활했던 디오게네스이다ㅡ에 의해, 좀 더 세련된 형태로 스토아 학파에 의해 주장되었다.
헬라스 문명 세계에서 동란 시대의 시리아 문명 세계로 눈을 돌리면, 이와 똑같은 방종과 자제가 서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대립으로서 전도서 속의 차분하고 회의적인 이론에 의해, 그리고 은둔 생활을 하고 있던 에세네 교단의 경건하고 금욕적인 실천에 의해 대립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가 있다.
그리고 이 밖에도, 해체기에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그들 종교의 타락된 성욕주의와 그들 철학의 극단적인 금욕주의 사이에 틈이 벌어지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점에서 미개인 기풍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우리의 문명이 있다. 인도·바빌로니아·히타이트·마야의 각 문명이 바로 그렇다.
인도 사회의 경우, 링가 숭배(남성 생식기 숭배)와 요가 사이에는 일견 불가해한 모순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대응하는 해체기 바빌로니아 사회의 사원 매음과 점성 철학 사이, 마야족의 인신 공양과 참회 고행 사이, 히타이트 사회의 키벨레와 아티스 숭배의 오르기아적 측면과 금욕적 측면 사이의 모순에 대하여 역시 놀란다. 이 4개의 해체기 문명에서, 구성원의 정신 속에 방권자의 차가운 분석적인 눈에 도저히 서로 융합될 수 없는 것처럼 비치는 관례적인 행위들 간에 정서적인 조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방종의 실천 속에도 모두 공통의 정도를 넘지 않는 사디즘(가학성 변태)적 경향이 가미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두 가지 서로 상반되는 행동 양식이 오늘날 서유럽 사회 역사의 근대기라는 광대한 무대 위에서 또다시 그 역할을 재연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방종의 근거를 들기는 어렵지 않다. 이론의 영역에서 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매혹적인 부르짖음을 던진 루소가 방종의 예언자였고, 한편 오늘날의 방종의 실천에 관해서는 그야말로 ‘만일 당신이 그 기념비를 구하려거든 주위를 둘러 보라‘는 실례를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과는 반대로 여기에 대항하는 금욕주의 부활의 징조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이 사실에서 일단 잠정적으로 분명히 서유럽 문명은 쇠퇴했지만, 그 해체는 아직 그다지 진행되고 있지 않다는 냉소적인 결론을 내려도 좋을 것이다. - P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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