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기인.달사들과 만남을 가지면서 제산은 어느새 영기(靈氣)가 계발되었던 것 같다. 대체로 머리 좋은 사람들은 영기 즉 직관력이 부족한 수가 많다. 분석적이기 때문이다. 매사를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은 영기가 쇠퇴한다. 마치 모래시계의 양면과 같아서 논리가 강하면 반대쪽 사이드인 직관 쪽은 기능이 퇴화되게 마련이다. 반대로 직관이 강하면 논리가 약해진다.
필자가 많은 도사들을 만나본 경험에 따르면 산에서 ‘기도발’이 잘 받는 사람은 성격이 단순해 깐깐하게 따지지 않는 경향이 있다. 쉽게 상대방의 말을 받아들인다. 반대로 대학에서 논문 많이 쓰는 교수들을 만나보면 논리적이기는 한데 시원하게 터진 맛이 없다. 물증(物證)만 중시하고 심증(心證)은 무시해버리는 경향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답답하다. 기도만 많이 하고 학문을 하지 않으면 부황(浮黃)해지기 쉽고, 반대로 학문만 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성품이 속되게 변한다. 그래서 조선 중기의 서산대사(西山大師)는 ‘사교입선(捨敎入禪)’을 강조했다. 학문을 어느 정도 연마했으면 마직막에는 이를 버 155 리고 선정(禪定)에 들어가는 것이 순서라는 말이다. - P154

도가의 경전인 『음부경(陰府經)』을 보면 ‘은생어해 해생어은(恩生於害 害生於恩)’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원수에게서 은혜가 나오고, 은인으로부터 원수가 나온다는 뜻이다. 은인이 원수 되고 원수가 은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 P157

백운산 들어가는 계곡 옆에는 백운사라고 하는 허름한 절이 있다. 179 보기에는 허름하지만 이 절은 계곡의 물소리가 아주 좋다. 커다란 바위절벽 옆에 붙어 있는 이 절은 경내를 감싸고 흐르는 물소리가 아주 일품이다. 특히 춘수만사택(春水滿四澤)의 계절인 봄이 되면 물소리가 나그네의 마음을 붙잡는다. 왜냐하면 번뇌를 없애는 데는 계곡의 물소리가 가장 특효약이기 때문이다. 화창한 봄날 노란 산수유가 만발한 계곡에서 물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만 가지 시름이 모두 사라지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 수도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의식의 집중이다. 문제는 어디에 집중할 것인가이다. 화두에 집중할 것인가, 염불에 집중할 것인가.
『능엄경』에서는 물소리에 집중할 것을 권하고 있다. 물소리에 대한 집중이 가장 쉬우면서도 효과가 크다는 것이다. 소리에 집중하는 수행법이 바로 청각을 이용한 이근원통(耳根圓通)이다. 관음보살이 수행해서 효과를 본 수행법이 이근원통이다. - P178

기독교인들이 예배할 때 외우는 ‘주기도문’도 필자가 보기에는 주문의 일종이다. 신비주의를 거부하는 유교에서도 『서경(書經)』 서문이 주문의 대용품 역할을 한다. 그런가 하면 ‘옴-마-니-반-메-훔’의 여섯 글자가 전부인 육자대명진언(六字大明眞言)도 유명한 주문으 184 로, 산동네인 티베트에서 발효된 특유의 영성이 물씬 풍겨나오는 주문이다. 1992년에 베트남 출신의 세계적 종교지도자 칭하이(靑海)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필자는 부산 KBS 홀에서 처음 그녀를 상면했는데, 그가 대중들에게 보여주었던 수행 방법도 역시 인도.히말라야의 신들을 부르는 5단계 주문이었다. - P183

겪어본 사람들의 체험담에 따르면 박 도사는 입이 근질근질해서 도저히 말을 하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했다고 한다. 거기서 함구하고 스톱하는 자제력을 갖추기는 웬만한 인내심 갖고는 어림없다고 한다. 십중팔구는 나가서 떠들게 마련이다. 고스톱의 핵심도 고와 스톱을 시중(時中)에 맞게 판단하는 것이지만, 인생사 전체도 따지고 보면 고와 스톱을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길흉이 결판난다. 조용헌이만 보아도 조금 아는 것 가지고 이렇게 떠들고 있지 않은가!
특히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는 그만 감동해 천기를 누설하는 경향이 많다. 박 도사도 어려운 상황일 때 자기에게 도움을 준 장덕진 장관의 요청을 거절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삼국지』의 제갈공명도 천하대사 운운하는 유비의 꾐에 넘어가지 않았더라면 재야에서 조용히 수도해서 틀림없이 신선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 중기의 토정 선생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조심하라!’는 잠언을 남긴 것 아닌가 싶다.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바친다’는 말도 있지만,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조심하라’는 잠언도 있다 195 는 것을 독자들은 염두에 두기 바란다.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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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적 수행 가운데 위파사나 명상법이 있다. 그 명상법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건 보는 것이다. ‘보면 사라진다’가 이 명상법의 기본 원리다. 뭘 보는가? 자신의 번뇌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어떻게 변화, 소멸되어 가는지를 보라는 것. 그러면 번뇌를 소멸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보면 사라진다고? 잘 믿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쉽다면 누가 못한담? 맞는 말이다. 하지만 틀린 말이기도 하다. 보기만 해도 사라진다는 명제는 방법적으로는 참 간단하다. 그런데 본다는 행위 자체는 실로 어렵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개는 자신도 모르게 실수로, 습관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한다. 당연히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그런 다음엔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주로 변명, 아니면 원망이다. 그래서 또다시 반복한다. 어떻게 보면 인생 전체가 이런 식으로 반복되는 쳇바퀴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보라!’고 하는 것이다. 자신이 지금 어떤 감정과 의식의 상태에 있는지를. 가장 간단하고도 근본적인 훈련은 호흡관찰이다. 호흡을 면밀히 관찰하노라면 온갖 잡념과 망상이 흘러가는데, 그것들을 잘 보기만 해도 무차별적으로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다는 이치다. 하지만 이 120 것 자체가 엄청난 집중력을 요한다. 집중(集中)이란 ‘중(中)을 잡는다’는 말로 ‘지금, 여기’와의 완벽한 일치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집중력 자체가 자신의 행위와 말과 생각을 통찰하는 ‘마음의 근육’에 다름 아니다. - P119

그때 비장의 카드로 쓸 수 있는 오행이 바로 용신이다. 필요한 오행이 팔자 안에 있다면 당연히 그것을 용신으로 삼으면 되고, 원국에 없으면 지장간에 있는 히든 카드라도 찾아내야 한다. 만약 대운에 용신이 온다면 절호의 찬스라 여기고 힘을 충만하게 쌓아서 대운이 불리하게 바뀌는 시절을 대비해야 한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외부에서라도 끌어다 써야 한다. 무슨 뜻인고 하니, 인맥을 적극 활용하라는 것이다. 즉, 용신에 해당하는 기운을 많이 가진 친구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한다. 같은 기운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있으면 처음엔 잘 통하는 듯 보이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불통의 상태가 되어 버린다. 비슷비슷한 정서의 회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타자들의 향연’이라는 말이 있다. 낯선 것과의 마주침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용신의 원리도 바로 거기에 있다. - P121

십신(十神) 팔자와 ‘표상’의 마주침

언급했듯이, 여덟 개의 카드로 읽을 수 있는 첫 번쨰 기호는 오장육부의 생리적 배치다. 오장육부 역시 음양오행에 배속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배속은 곧 칠정, 곧 ‘희노우사비경공’(喜怒憂思悲驚恐)의 흐름이기도 하다. 이 칠정의 관계와 구성은 마음의 행로를 결정한다. 생리와 심리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존재성의 서로 다른 표현이자 이름이라고 보면 된다. 이 존재성이 사회적 조건과 마주치는 기운의 배치를 십신이라고 한다. 팔자의 생극적 흐름에 부여된 ‘사회적 표상’이라 할 수 있다. 일간을 중심으로 모두 열 가지의 힘이 형성되기 때문에 ‘십신’이라고 한다.
비겁(비견과 겁재)은 일간과 동일한 오행을 뜻한다. 일간이 을목이라면 목기를 지닌 카드들이 비겁이 된다. 비견(比肩)은 음양도 같기 때문에 말 그대로 나와 나란히 어깨[肩]를 겨루는[比] 기운이다. 나의 확대 혹은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겁재는 말 그대로 ‘나의 재산을 겁탈한다’는 의미인데, 나와 맞서는 라이벌이라 보면 된다.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그래서 겁재다. 겁재라고 하면 기분이 좀 언짢을 수 있겠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뺏길 게 있다는 건 그만큼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진 게 133 없으면 뜯길 것도 없는 법이다. 또 라이벌이나 적을 가지려면 유형이든 무형이든 그에 걸맞은 자산이나 내공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비견과 마찬가지로 나의 팽창 혹은 확대라고 볼 수 있다.
식상(식신과 상관)은 일간이 낳는 오행이다. 즉 내가 외부를 향해 생하는 기운이다. 밥, 말, 끼, 자식 등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일간과 음양이 같으면 식신(食神)이다. 말 그대로 밥그릇의 신, 곧 평생의 먹거리다. 식신이 있으면 어디를 가도 굶지는 않는다. 먹는 것도 좋아하고 먹거리를 만드는 것도 좋아한다. 좌우지간 먹는 것과 인연이 깊다는 뜻. 말도 유창하다. 자식복도 있다. 인생살이에서 ‘말’과 ‘밥’, 그리도 ‘생식’이 같은 계열임을 말해 주는 개념이다. 일간과 음양이 134 다르면 상관이다. 식신이 자연스러운 스텝이라면 상관은 일종의 엇박이다. 말이든 밥이든 생식이든 좀 ‘튀는’ 것으로, 일종의 불규칙 바운딩에 해당한다. 규칙을 일탈했기 때문에 때론 비범한 재능이 되기도 하고, 때론 비난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상관(傷官; 관성을 상하게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연예인들, 그중에서도 예능인들이 특히 식상에 강하다. 말과 끼가 재산이요 밥그릇이지만, 그러다 보면 자칫 구설에 오르기 십상이다. 그런 점에서 말은 정말 힘이 세다.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이 이 말이다. 또 말에 수반되는 끼(리액션 혹은 어팩션)도 포함된다. 말이든 끼든 내가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런지는 의문이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말들(혹은 행동)이 참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에 의해 사건이 구성되고 인연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칼보다 무서운 게 세치 혀" "말 한 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 경구들이 거기에서 나온 것이리라. 또 식욕과 성욕은 함께간다. 끼는 달리 말하면 에로스의 무의식적 표출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요즘은 문화 전체가 ‘섹시’ 컨셉이니 그야말로 식상이 만발하는 시대인 셈이다.
다음, 식상이 낳는 기운이 재성(정재와 편재)이다. 일간을 중심으로 보면 내가 극하는 기운에 해당한다. 식상으로 기운을 내고 그걸 밑천으로 유형의 자산을 만들어 내는 힘, 그래서 재성이다. 재성이라고 하면 바로 돈을 떠올릴 테지만, 단지 화폐화된 것들만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물질화된 것들이 다 여기에 포함된다. 재성부터는 음양관계가 달라진다. 일간과 음양이 같으면 편재, 다르면 정재다. 편재 135 는 불규칙한 재성, 정재는 규칙적인 재성. 전자는 비정규직이나 프리랜서의 활동에 가깝고, 후자는 정규직이나 안정된 사업에 가깝다. 요즘 같은 시대야 정규직이 최고 선망의 대상이라 정재가 더 좋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정재는 좀 답답한 재성에 해당한다. 성실하고 믿음직하지만 다소 쫀쫀해 보이는 속성이랄까. 편재는 그와 반대다. 불규칙한 재물을 의미하니 재물이 들락날락하는 변수가 많은 편이다. 그래서 불안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오히려 똑 같은 액수를 가지고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도 있다. 하여, 진짜 재물의 주인이 되려면 정재보다는 편재가 있어야 한다. 얼마를 버는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어떻게 버는가이다. 정규직을 지향한다지만 정작 직장인들의 꿈은 창업이나 독립 아니던가. 또 모든 인간은 궁극적으로 프리랜서다. 첫 출발도 그렇지만, 평생을 정규직에 복무한다 해도 정년을 하고 나면 결국 프리랜서로 귀환할 수밖에 없다. 아, 물론 우리 시대의 편재는 부동산이나 주식 등 투기성 자본이 많아서 편재를 이렇게 쓸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프리랜서가 아니라 돈의 노예가 되기 십상이다.
자, 일단 식신과 재성까지는 내가 주도하는 세계다. 내가 생하고 또 극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말하고 낳고 만들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구나 이 리듬을 타야 한다. 말하자면 나의 존재성 혹은 기운을 발산하는 리듬이라 할 수 있다.
발산의 흐름이 있으면 수렴의 작용이 있게 마련이다. 재성 다음이 관성(정관과 편관), 곧 나를 극하는 기운이다. 왜 관성인가? 관(官) 136 이란 조직 혹은 그와 비슷한 관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나를 어떤 조건으로 밀어넣는 힘을 뜻한다. 내 활동의 바운더리와 토대를 구획하는 속성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위치에 있건 내가 속한 조건이면서 동시에 책임을 지는 관계망이다. 그래서 조직력 혹은 리더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서도 일간과 같으면 편관, 다르면 정관이다. 굳이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따라서 관성을 써야만 변화의 마디를 넘어갈 수 있다. 생물의 진화건 문명의 발전이건 혹은 혁명적 변화건 다 주체를 강하게 압박하는 어떤 장애물 혹은 문턱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선 먼저 고난이 확실하게! 주어져야 한다. 십신 가운데 ‘정관’을 최고로 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를 강하게 압박해 오는 조건에 처하게 되면 선택은 둘 중 하나다. 그 압박에 무릎을 꿇거나 아니면 밀고 당기는 과정 속에서 내가 다른 것으로 변용되거나. 소위 고난이나 역경이란 이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누구도 사회적 존재로서의 힘과 덕성을 발휘할 수 없다. 인류학적으로 보면, 모든 종족, 모든 문명권이 청년들에게 이니시에이션(통과의례)을 거치도록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학교의 본래 목적 역시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 시대엔 학교가 그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 학교에서 사회적 관계에 필요한 힘과 덕목을 한 가지도 배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전 독재정권 시절엔 학교가 억압과 금기의 장소였다. 이것은 관성의 상극이 지나친 경우다. 당시 전국민에게 암기를 강요했던 「국민교육헌장」이 잘 보여 주듯이, 모든 개인은 민족과 국가를 137 위해 이 땅에 태어났고, 그걸 연마하는 것이 학교였다. 이렇게 관성의 압박이 심하면 비겁이 제대로 활동하기 어렵다. 그래서 다들 개성과 창조성을 감추고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억압과 강제가 지속되다 보면 당연히 반대의 힘들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그것이 80년대 민주화운동이었다. 그때 대학생들은 저항과 투쟁의 상징이었다. 독재와의 투쟁, 그것이 그 시절의 통과의례였던 것이다. 80년대 학생운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있을 수 있지만, 당시 청년들은 정말 기세등등했다. 입학한 지 두어 달만 되면 시위에 참여하고 짱돌을 던지고 화염병을 투척한다. 바로 코앞에서 다연발 최루탄이 터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지금 청년들로선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용기와 배짱이다. 철학적으로는 더 기고만장했다.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인생을 역사와 혁명을 위해 기꺼이 바치겠다고 할 정도로 ‘지적 파토스’가 흘러넘쳤다. 나처럼 체력도 후지고 세계관도 영 모자랐던 경우도 시대적 소명에 대해 늘 되뇔 수밖에 없었던 시대, 그게 바로 불의 연대라 불리는 80년대다. 한편으론 고난의 시대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당시 청년들은 그 시대의 힘으로 청춘을 통과했으니 대단한 행운이기도 했다. 관성이라는 건 바로 이런 의미다.
하지만 지금은 반대상황이 되었다. 민주주의의 형식적 확대와 자본의 무한한 증식으로 학교는 이제 서비스센터가 되어 버렸다. 초중고의 목적은 오직 대학입시, 또 대학의 목적은 오직 취업(정규직)이다. 관성은커녕 온통 재성만을 연마하도록 주입한다. 시대적 소명 138 같은 건 사라진 지 오래고, 성공의 척도는 다만 연봉일 뿐이라고 가르친다. 학교에서도 또 집에서도. 그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즉 돈을 사회적 관계에서 어떻게 쓸 것인가는 전혀 가르치지 않는다. 소유에 대한 집착만 지독하게 키워 주는 셈이다. 재성이 곧 소유욕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데도 결국 우리 시대에는 재성이 소유와 즈익으로 고착되는 ‘홈파인 회로’가 만들어진 것이다. 하여, 아이들은 교환 경제를 넘어선 증여와 보시에 대해선 듣도 보도 못하고 자라게 된다. 명리학적으로 보면 재성과 관성 사이에 철옹성이 놓인 것이다. 관성은 재성을 순환시키면서, 곧 내가 이룬 것을 사회적으로 환원하면서 비로소 작동한다. 그것이 재능이건 힘이건 돈이건 간에, 돈을 무작정 풀어서 방탕하게 쓴다면 그건 오히려 식상에 가깝다. 관성은 그 돈이 흐르는 방향을 규정하는 힘이다. 리더십이나 경영능력 같은 것에 해당한다. 이런 활동에는 명분과 의리, 그리고 사회적 차원의 인정욕망이 수반되어야 한다. 자신의 행동과 말에 책임을 지고 타자들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는 속성, 그것이 곧 관성이다. 그릇 혹은 내공이라는 말과도 상통한다. 이걸 연마하는 것이 청춘이고 학교인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 시대 학교에선 사람과 사람이 서로 연결되는 장이 없다. 교사와 학부모는 학생들을 모래알처럼 흩어 놓기 바쁘다. 경쟁을 부추기고 불안과 의심을 증폭시키고 여차하면 갈라 놓기에 급급하다. 책임감과 리더십은 고사하고 우정과 연대의 기초조차 배울 기회가 없다. 그래서 학생들은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인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재성에 대한 탐착은 있는 139 대로 키우고 관성은 증발시키는 것, 우리 시대 교육이 얼마나 무용하고 위태로운지를 한눈에 보여 주는 중요한 지표다. 하여, 십대를 몽땅 학교에서 보내고서도 통과의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한 청춘들이 부지기수다. 그 결과, 독재정권 시절보다 더 나약하고 무력한 청춘들이 되고 말았다. 엄청나게 많은 배려를 받고 있으면서도 늘 결핍과 박탈감에 시달리고 뚜렷한 이유도 없이 자신들이 가장 불행한 처지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 세상에 온전한 제도란 불가능하다. 이걸 이루면 저것이 부족해지고, 저걸 보충하면 이것이 모자라게 되는 법. 그것이 인생과 우주의 이치가 아닐지. 그래서 역사에는 진보가 있을 수 없다. 역사적 실천이란 어떤 정해진 목표지점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배치 속에서 ‘단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일 뿐이다. 다윈이 말하는 진화의 원칙도 마찬가지다. 생명의 진화에는 목표도, 방향도 없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우주의 중심이고 거기서 단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바로 진화일 뿐이다. 흔한 속담처럼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고,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인 것이다.
관성이 낳는 기운이 인성(정인과 편인)이다. 인성은 일간인 나를 낳아 주는 기운이다. 나의 존재감을 높여 주는 무형의 베이스라 생각하면 된다. 관성의 혹독한 마디를 넘어야 인성에 도달한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모든 오행이 그렇지만 관성 역시 이중적이다. 나를 극하면서, 동시에 나의 베이스이자 모태인 인성을 낳아 주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관성의 단계를 제대로 밟지 못하면 인성을 생성시킬 수 140 없다. 나를 극하는 기운에 충분히 노출되어야 그 팽팽한 긴장 속에서 상생의 관계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럼, 나를 낳아 주는 기운이란 대체 무엇일까? 공부 혹은 지성이다. 생명의 원천이 앎이라는 사실, 사주명리학이 전해 주는 기막힌 메시지다. 인성의 인(印)은 도장이라는 의미다. 대지, 문서, 명예 등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하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 이때의 공부는 무형의 통찰력이다. 인간은 아는 만큼 살아 내고, 사는 만큼 알 수 있다. 인생의 행로에서 무지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죽음이 왜 두려운가? 모르기 때문이다. 죽음이 삶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죽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두렵고 무서운 것이다. 부처와 공자, 예수 등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이 하나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친 것은 이런 맥락이다. 죽음의 공포로부터의 자유 혹은 해방, 예나 이제나 인류의 위대한 지혜는 모두 여기로 수렴된다. 문명이 발달하고 수많은 혁명이 일어나도 인류가 결코 종교적 가르침으로부터 떠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명과 혁명, 역사와 경제에 대한 담론들은 결코 죽음을 설명하지 못한다. 죽음은 탄생과 마찬가지로 자연과 우주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의 지혜가 없다면 삶의 비전 또한 무력하다. 죽음이 배제된 삶, 그것은 반쪽 이하에 불과하다. 그래서 삶도 늘 위태롭다. 요컨대, 무지는 모든 번뇌의 원천이다. 하여, 공부는 선택이 아니다. 존재의 근원적 토대다ㅡ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내가 사주명리학에 매료된 가장 141 큰 이유가 바로 이 인성이라는 개념이었다. 한낱 ‘구복의 노하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공부운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고, 그것이 나의 존재감을 드높여 주는 상생의 기운이라니, 명리학이 운명의 우주적 비전으로 격상되는 순간이었다.)
인성은 바로 이 공부의 존재론을 말해 준다. 일간과 음양이 같으면 편인, 다르면 정인이다. 식상에서 재성으로 이어지는 발산의 흐름만 있으면 아마 사람들은 금방 탈진해 버릴 것이다. 발산의 흐름을 멈출 수가 없을 테니 말이다. 그 흐름을 제어하고 거두면서 내적으로 단련시키는 리듬이 관성과 인성이다(‘십신’에 대해 좀더 탐구하고 싶으면 안도균, <운명의 열쇠를 찾아서>, 『누드 글쓰기』 참조).
자, 이렇게 해서 카드 여덟 개의 봉인이 또 하나 풀렸다. 음양오행과 생극의 동그라미 속에서 볼 때랑 십신의 흐름 속에서 볼때랑 느낌이 아주 다를 것이다. 물론 두 개의 차원을 동시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오행적으로 목/화가 많은 명리가 있다고 치자. 여기서 목화가 비겁과 식상인지 아니면 관성과 인성인지를 따져 봐야 한다. 둘다 목화지기가 많은 사주라고 해도 목화가 식상·재성인 경우와 관성·인성인 경우는 아주 다른 운명의 지도에 속한다. 용신을 뽑을 때도 마찬가지다. 목기가 필요하다고 했을 때 목기가 인성에 해당하는 것인지 식상에 해당하는 것인지에 따라 그 동선과 현장은 아주 달라진다. 예컨대, 계수 일간의 경우, 식상이 없는 팔자가 있다고 치자. 그래서 식상의 기운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는 식상이 목기운이다(→수생목). 식상은 ‘밥과 말, 끼’라고 했다. 그런데 142 그게 목기운이라고? 목기는 그 자체로 교육과 관련되어 있다. 우주적 인과론에서 보자면, 사람을 키우는 것과 나무를 키우는 것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용신은 말로 하는 교육, 강의와 글쓰기가 가장 적합하다. 이런 식으로 읽어 내는 것이다.
비겁, 식상, 재성, 관성, 인성 ㅡ이 열 개의 배치는 존재의 리듬이 ‘사회체’와 마주칠 때 각인되는 기본코드에 해당한다. 언제 어디서 태어나든 인생에는 이 열 개의 힘들이 각축한다. 누구든 자신의 힘과 재능을 발휘하여 밥벌이를 하고(식상→재성), 사회적 조건 안에서 관계를 만드는 훈련을 하고(관성), 그 과정에서 매 순간 배움을 닦아야 한다(인성). 이 과정을 밟지 않아도 좋은 사람이 있는가? 없다! 누구는 오직 밥벌이만 하고 누구는 오직 공부만 해야 한다면 그게 바로 신분사회다. 인류가 신분을 해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렀는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명리학적으로 보면, 신분사회란 모든 이들의 팔자를 한두 가지 방향으로 고정시켜 놓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신분사회가 해체되었다는건 이 편향된 고정성을 벗어나 모두가 십신의 전 과정을 스스로의 힘으로 겪어 낼 수 있음을 뜻하는 셈이다. 요컨대 이 십신은 계급과 세대, 직업과 성별을 불문하고 누구나 거쳐야 하는 관문들이다. 여기서도 차이와 운동, 곧 순환이 핵심이다. 식상이 재성으로, 재성에서 관성으로, 관성에서 인성으로 이어지는 이 리듬을 제대로 밟아야 일간인 내가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다. 그렇게 매끄러운 순환을 거치고 나면 그 힘으로 또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건 끊임없이 내가 143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운동과 차이는 같은 말이기도 하다. 일찍이 우임금이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일신우일신’ (日新又日新), 이것이 가능하다면 누구든 최고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 P132

일간이 나의 명주고 비겁이 나의 수평적 확장이라고 했다. 그럼 비겁이 일종의 무게중심인 셈인데, 무게중심을 잘 지키려면 내가 스톡(stock)만 해서는 안 된다. 순환의 강밀도를 조정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밀고 당기고 조이고…… 비겁이 튼실하다는 건 바로 이 조절능력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겁이 강해지면 주체성이 확고해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주체성이 아니라, 고집과 탐착이 강해진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아상(我相)이 견고해진다. 그렇게 되면 식상, 재성, 관성, 인성이 다 파극당할 염려가 있다. 반대로 비겁이 약하면 반대의 양상이 펼쳐진다. 자신이 그저 다른 힘들이 오고가는 통로가 되어 버리니 근기가 약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자기를 버리고 다른 오 145 행과 합(合)을 이룸으로써 다른 오행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일간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중심이 현저히 교란될 가능성이 높다. 그럴 때는 당연히 다른 힘들이 나의 서포터즈가 될 수 있도록 치열하게 훈련을 해야 한다. 결국 신강하면 신강한 대로, 신약하면 신약한 대로 다 그 나름의 강점과 애로사항이 있는 셈이다. 거기에 사회적 가치와 표상이 덧붙여질 때 각종 차별상이 부각되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팔자가 좋다, 나쁘다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팔자의 잠재력을 보려면 이 차별상과의 대결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어떤 팔자를 타고나도 이 차별상 안에 들어가면 운명을 사랑하기란 불가능하다. 특이성이 사라진 곳엔 위계와 서열이 지배하게 되고 거기에선 모두가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운명을 긍정할 수 있는 원초적 토대 자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생극의 파노라마에서 십신의 각축장으로 들어오면 특히 이 점을 더더욱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팔자를 십신의 차원에서 재구성해 보면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나온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리듬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식상생재(食傷生財). 곧 식상이 재성을 생하는 경우, 이것은 유형적인 것으로 발산하고 표현하는 장이다. 말과 음식, 성욕 등으로 기운을 내고 그것이 구체적인 물질적 재화와 자산을 구축하는 흐름이다. - P144

이것이 관성에서 인성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리듬이다. 식상은 생성의 흐름이고 재성은 상극의 리듬이다. 상생과 상극이 이루어 147 지면 하나의 물건, 그것이 무엇이든 구체적인 현장이 만들어진다. 여기서 그치면 다시 또 내고 쌓고 하는 스톡으로 진행된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자기 팔자와는 무관하게 ‘식상생재격’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 배터리가 방전된다. 내가 생하고 내가 극하는 기운으로만 살기 때문이다. 식상생재격으로 타고난 사람도 계속 이렇게 살면 멍~하게 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야 이렇게 살면 몸이 성할 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휴가를 내거나 여행을 떠난다. ‘나를 충전해야겠어’라고 하면서. 재성에서 곧바로 인성으로 튀는 것이다. 관성을 거치지 않고 바로 인성으로 튀면 일시적으로 안정이 되고 편안할 수 있지만 돌아오면 도루묵이다. 관성이라는 관문을 넘지 않고 편안한 울타리로 들어가 안주하는 탓이다. 결국 돈만 날리고(재성은 인성을 극한다) 되돌아와서 다시 이번엔 식상이라는 단계도 건너뛰고 바로 재물을 구하려 든다. 결국 평생 동안 재물과 인성 사이를 오락가락하게 된다.
이럴 때는 반드시 관성을 용신으로 써야 한다. 관성이란 ‘타자들과의 네트워킹’이다. 익숙한 존재들과의 관계는 관성이 아니라, 식상에 가깝다. 계모임이나 동호회, 친목단체 등등. 이 관게에선 나의 변용이 불가능하다. 비슷한 상태의 확장과 변주만 있을 뿐. 반대로, 관성은 낯설고 불편한 관계를 감수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책임을 져야 하고 갈등과 충돌도 불사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전혀 새로운 기운이 형성된다. 그것을 바탕으로 재물을 모을 수도 있다. 그 재물이 다시 관성을 낳기도 하고. 따라서 관성을 적극 활용하면 재성과 148 인성이 서로 맞서는 형국에서 재ㅡ관ㅡ인으로 이어지는 순환이 이루어질 수 있다.
관인상생도 역시 상극과 상생이다. 먼저 관성은 나를 극하는 기운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나를 생해 주는 관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식상생재와는 반대의 흐름이다. 먼저 형극을 감내하면 그 다음엔 아주 느긋하게 나를 생성시켜 주는 대지의 품에 들어설 수 있다. 관성은 나를 규정하고 압박하는 무형의 관계망이다. 거듭 말하지만, 관성의 단계를 밟지 않으면 나는 변용이 불가능하다. 비겁은 나의 양적 확대고, 식상은 그 안에서 나오는 것이고, 재성은 양적 다양성으로 귀결될 뿐이다. 이 단계에는 질적 전환의 과정이 없다. 식상생재로 이어지는 경우 사회적 적응력은 뛰어난 반면 크게 변화를 겪진 못한다. 동일성의 궤도 위를 왕복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관성은 내가 다른 존재로 변이되는 통과의례이자 관문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다. 가수들이 마치 스포츠 선수처럼 경연대회를 하다니. 이거야말로 스스로 자기를 극하는 조건에 뛰어든 꼴이다. 노래는 원래 식상의 힘이다. 인기는 비겁에 해당하고. 즉, 가수라는 직업은 나와 비슷한 취향의 사람들과 공통감각을 주고받으면서(비겁) 즐겁게 놀고(식상) 그 즐거움을 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재성) 흐름을 타는 것인데, 그런 패턴을 가로질러 다음 마디로 넘어간 것이다. 사회적 시선과 경쟁심이 작동하면 이젠 돈이 문제가 아니다. 자존심, 예술혼, 나아가 내공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그래서 그 마디를 넘으면 노래실력은 149 물론 인생 자체에 대하여 큰 공부를 하게 된다. 노래가 갑자기 인생과 철학의 그릇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나가수’ 스타들 가운데는 이 프로를 통해 인생역전을 한 경우가 많다. 국면의 대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이게 바로 관성을 통한 ‘일간’의 변용에 해당한다. 그런 점에서 십신의 다섯 스텝이 하나하나 모두 중요하지만 가장 결정적 마디는 뭐니뭐니해도 재성에서 관성으로 가는 길목이다.
자, 이 정도면 대강 식상생재의 흐름과 관인상생의 흐름이 잡힐 것이다. 이걸 바탕으로 다양한 배치의 변화를 읽어 내면 된다. 예컨대 비겁이 과다할 경우, 그러면 당연히 나에 대한 팽창욕이 강하니까 다른 기운이 약할 수밖에 없다. 또 인성과 식상으로 이루어진 경우는 상생으로만 되어 있으니 구체적인 현장과 유형적 성취가 어려워진다. 또 재성과 관성으로 이루어진 경우는 상극으로만 되어 있으니 몸이 고달프다. 항상 뭔가가 치열하게 이루어지는 현장만 있게 될 터이니 말이다. 중요한 건 상생과 상극의 이치를 아는 것이다. 역술가들도 이런 이치에다 수많은 임상적 경험을 덧붙여 분석을 하는 것이지 다른 특별한 묘방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치와 용법만 익히면 훨씬 더 다이내믹한 흐름을 읽어 낼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개인뿐 아니라 시대의 흐름은 물론 직업이나 활동공간에 따라 어떤 기운을 더 주도적으로 쓰는지도 포착할 수 있다.
가령, 네티즌들은 인터넷 공간 안에서 십신의 흐름을 다 소비할 것이다. 발산하고 수렴하고, 상생하고 상극하고, 유형과 무형의 소비와 충전을 하는 등등. 그 안에서도 모든 과정이 다 이루어진다. 하지 150 만 그것은 순환이 되지 못한다. 사이버 공간 안에서는 아무리 대단한 네트워킹을 하는 것 같아도 결국은 독백이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하지만 소통이라기보다는 거의 배설에 가까운 경우도 많다. 상대와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익명성의 바다에 몸을 숨겨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나를 극하는 배치에 들어서지 못하고, 그저 나의 일부를 일방적으로 발산하는 수준에서 끝나고 만다. 그래서 비겁만 증식되어 망상이 확대되거나 아니면 식상만 쓰느라 기진맥진할 수밖에 없다.(구설수와 송사의 아수라장!) 사이버 공간에 집중할수록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신체적 소통력은 점차 떨어지게 되는 건 그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누구는 오직 돈만 벌고, 누구는 오직 공부만 하는 신분사회, 인류는 이걸 타파하기 위해 온갖 투쟁을 다 해왔다. 누구든 스스로의 힘으로 밥벌이를 하고, 누구든 스스로의 힘으로 삶의 지혜를 닦아 가는 사회, 이것이 인류가 기획하는 최고의 비전이 아니었던가. 헌데, 참 희한하게도 막상 그런 자유와 선택이 주어지자 다들 오직 물질적 분배에만ㅡ그것도 주로 상품과 쾌락의 증식과 관련된ㅡ주력할 뿐 정신적 자산을 나누고 누리는 데는 대체로 무관심하다. 이것이 우리 앞에 놓인 표상의 배치다. 보다시피 그 자체로 태과불급이다. 이 흐름에 장단을 맞추다 보면 당연히 모든 구성원들의 팔자가 꼬이게 마련이다. 원초적으로 타고난 태과불급에다 자본주의적 욕망의 배치가 덧보태지면서 십신의 리듬이 더한층 혼탁해지는 것이다. 리듬이 혼탁해지면 무엇보다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151 살아내기 어렵다. 잘 살고 못 살고는 다음 문제다. 더 중요한 건 타고난 명(命)을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운전할 수 있느냐이다. 운명의 주인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도 긴박한 문제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선 팔자의 진면목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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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가는 우도의 길은 무엇인가? ‘독만권서와 행만리로’의 길이다. 만 권의 독서를 하고 그 다음에 만 리의 여행을 해보는 것이다. 독서와 여행, 이 두 가지가 인간교육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독서만 하고 여행을 안 하면 머리만 있고 가슴이 없다. 여행만 많이 하고 독서가 적으면 머리가 적을 수 있다. 머리에 뭐가 좀 들어 있으면서 여행을 하면 새로운 장면과 상황에 맞닥뜨릴 때마다 통찰이 오고 스파크가 튄다. - P320

① 적선 : 선행으로 복과 운을 저축하다
적선을 해야 팔자가 바뀐다. 평범한 말이다. 그러나 실천이 어렵다. 적선이란 다른 사람 가슴에 저금을 해놓는 것이다. 동시에 자기 가슴에도 저금을 해놓는 일이다. 보다 차원 높은 적선은 자기 가슴에는 저금하지 않는 일이다. 적선하고도 다 잊어버리는 게 수준 높은 삶이다. 그러나 수준 높기 어렵다. 적선을 하면 자기 무의식에 기록을 하는 것과 같다. 마치 비행기의 블랙박스와 같다.
무의식은 자기가 한 일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비행기가 추락해도 블랙박스에 기록된 비행기록은 남는다. 육체가 죽더라도 그 사람의 무의식에 기록된 정보는 남는다. 정보는 후손들에게 계좌이체 된다. 계좌이체 되는 장면은 꿈으로 나타난다. 태몽으로 나타난다. 죽은 조상들의 영혼은 후손의 뱃속으로 들어가 잉태된다. 잉태되는 순간의 꿈이 태몽이다. 태몽을 보면 그 조상들의 삶 전체가 농축된 데이터가 후손의 뱃속이라는 저장고에 입력되는 장면이다. 나는 태몽을 이렇게 이해한다. 그래서 태몽을 무시할 수 없다. 사주팔자가 디지털이라고 한다면 태몽은 아날로그에 해당한다. 전자시계나 시계바늘 시계나 시간 가리키는 것은 동일하다. 태몽과 팔자는 대개 같이 간다.
적선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은 전쟁이다. 난리가 나면 평소에 쌓인 개인감정을 정리하게 된다. 한국전쟁 때 전남 영광에서는 4만 명 이상이 죽었다. 당시 영광 인구가 12만 정도였다고 하는데, 4만 명 이상이면 웬만한 성인 남자 328 는 거의 죽었다고 봐야 한다. 공식적인 기록에는 2만 명 남짓 죽었다고 되어 있지만, 이는 좌익이 우익을 죽인 숫자이다. 우익이 좌익을 죽인 숫자도 현지인들의 중언에 따르면 대개 2만 명 남짓이다. 이 후자의 2만 명은 공식 기록에서 빠져 있다. 얼마나 처절한 기록인가. 작년에 영광에 답사를 갔다가 산비탈의 밭에서 일하는 노인을 만났다. 82세였다. 한국전쟁 당시 중학교 3년생이었다고 한다.
"어르신 6.25 때 사람 많이 죽었죠? 어르신 동창들도 많이 죽었습니까?"
"많이 죽었지. 나만 빼고 다 죽었어."
"어르신 혼자 살았단 말입니까."
"응. 우리 반에서 나 혼자만 살아남고 모두 다 죽었어."
어린 학생이 무엇을 안다고 죽였을까. 아이에게 무슨 이념이 있고 사상이 있었겠는가. 그만큼 전쟁은 처절하고 한편으로 인간의 무식과 잔인함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영광 읍내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누가 있습니까?"
"대선당 약방은 살아남았어."
"살아남은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양반은 인심이 좋았어. 당시 약방을 했으니까 돈도 있었지. 집에 머슴들이 여럿 있었는데, 이 머슴들에게 잘 했어요. 머습들과 밥도 같이 먹었지. 겸상을 했어. 자기가 밥 먹다가 머슴이 옆에 보이면 ‘이리와 같이 먹게.’ 하면서 겸상을 했어. 담배도 나눠 피웠지. 자기 담배는 궐련 담배였고, 머슴들은 대개 봉초 담배를 피웠는데, 머슴들을 보면 자기 궐련 담배를 피우라고 건네주고, 머습들 피우던 봉초 담배를 자기가 피우곤 했지."
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이 내려와 머슴들 8명을 한 조로 만들었다. 8명 뒤에는 북에서 내려온 인민군 한 명이 총을 들고 뒤따랐다. 8명의 머슴들이 읍내의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그 집주인에 대하여 품평을 하였다. 평소에 인심 잃었던 사람들은 ‘이 놈 나쁜 놈 329 이다.’라는 판정을 받았다. 그러면 즉결처분이었다. 대선장 약방 주인은 평소에도 덕인이라는 평판을 들었다. 그 참혹한 즉결처분의 상황에서 평소 적선해놓은 대선당 약방 주인만 살아남았던 것이다. ‘담배 바꿔 피운’ 적선이다.
지난 탄핵과정도 혁명적인 상황이었다. 탄핵정국에서 불려나가 곤욕을 치렀던 고위 인사 A씨. 검찰조사에서도 여러 번 불려 다녔다. 최근에 얼굴 볼 기회가 있어서 관상을 보니 의외로 찰색이 좋다.
"팍 늙은 줄로 알았는데 어찌 이리 혈색이 좋습니까?"
"아내 공덕입니다. 사건이 나 보니까 집사람이 적선해놓은 공덕이 작용한다는 걸 알았어요. 조 선생님 이론대로 팔자 바꾸려면 적선이 중요하다는 걸 실감하는 계기였어요."
A씨의 부인은 충청도 양반집안의 딸이었다. 평소에 차분하면서도 겸손한 인상이었다. 명절이 닥치면 아파트 관리인들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씩 돌렸다. 더운 여름에는 냉장고에 넣어 시원하게 해둔 수박을 두세 통씩 1층 관리실에 가져다주곤 하였다. 겨울에는 선물로 들어온 인삼차 박스라도 관리실에 건넸다. 아파트 관리인이 다른 동으로 옮기면 일부러 찾아가서 3~4명 정도의 저녁식사 값을 봉투에 넣어 쥐여주곤 하였다. 청소하는 아주머니들도 마주치면 그냥 빈손으로 보내지 않았다. 주변의 과일가게에서 과일 살 때도 물건 값을 절대 깎지 않았고, 약간 바가지를 씌우더라도 모른 체하고 달라는 대로 값을 지불하였다. ‘남들 보기에 나는 상류층인데 이렇게라도 적선한다고 생각해야지’가 부인의 생각이었다.
탄핵이 터졌다. 기자들이 아파트 입구에 몰려들면 관리인 한 명은 기자들에게 커피를 타주면서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고, 다른 관리인은 A씨가 평소 모르고 있었던 지하 이동통로를 통해 다른 동으로 몰래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퇴근 시간 무렵에 방송중계차가 아파트 입구에 대기하고 있으면 관리인들이 부인에게 전화해서 ‘상황이 이렇습니 330 다.’하고 알려주었다. 그러면 A씨는 그날 집에 오지 않고 호텔에서 숙박하였다. 검찰조사 받으러 가는 날, 새벽에 부인이 꿈을 꿨다. ‘펄펄 끓는 물에 계란을 삶는데, 계란에서 병아리가 나와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다니는’ 꿈이었다. 그래서 걱정이 안 되었다고 한다. 배우자가 후덕하여 남편이 덕을 본 경우이다.
불교에서는 전생이라고 말하지만, 유교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전생은 조상에 해당한다. 윗대 조상들(특히 증조대나 고조대)이 적선을 많이 한 사람들의 후손들은 아우라가 있다. 대개 성격도 차분하면서 겸손한 편이고 얼굴색이나 머리 뒤쪽에 밝은 빛이 감돈다. 이런 사람들은 하는 일이 잘 풀린다. 뒤로 넘어져도 돈 있는 데로 넘어진다고나 할까. 친가나 외가 쪽에 적선을 많이 해놓은 조상들이 있는 집안의 후손들 팔자를 보면 대개 재복이 있는 것으로 나온다. 그게 참 신기하다. 팔자에 재복이 있으면 별 다른 노력을 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돈이 붙는다. 조상들이 뿌려놓은 재물을 갑절로 이자를 쳐서 후손이 받는 것 같다.
적선을 많이 해야 팔자를 바꾸고 집안이 잘된다는 명제는 이론이 아니라 500년 임상실험 결과(?)다. 적선은 재물로도 하고 마음으로도 한다. 평소 성질 안 내는 것도 적선이고, 고통을 들어주는 것도 적선이다. 강한 적선도 있다. 죽이고 싶은 사람을 살려주는 것이다. 죽일 사람을 살리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적선이다.
적선이라는 것은 주변 사람들이 자기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갖도록 투자하는 이치와 같다. 주변이 우호적인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으면 그 사람은 덕이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덕이 있다는 것은 자기 둘레에 우호적인 사람의 층이 두껍게 쌓여 있는 사람을 말한다. 자기를 보호하는 ‘외호’가 두텁다는 말이다.

② 스승 : 눈 밝은 스승이 대낮의 어둠을 밝힌다
주유천하라는 말이 있다.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는 것이다. 왜 주유천하를 하는가?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그냥 앉아만 있어서는 선생을 만나기 어려우니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나를 지도해줄 선생님이 어디 계시는가 찾으러 다니는 것이 주유천하의 개념이다. 여기에 전제가 있다. 선생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선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필요를 느껴야지 선생도 찾는다. 왜 선생을 찾아야 할까? 그냥 살아도 되지 않겠는가. 선생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뭔가 갈급한 게 있는 사람들이다. 갈증이 없는 사람은 선생이 필요 없다. - P327

④ 독서 : 강한 날에는 경전을, 부드러운 날에는 역사책을 읽는다

운이 나쁠 때는 밖에 나가면 안 된다. 집에 틀어박혀 있어야 한다. 어떻게 집에 있느냐, 독서를 하면서 지내야 한다. 운이 안 좋을 때는 독서가 필요하다. 책을 읽으면서 되도록 사람을 안 만나는 게 좋다. 만나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긴다. 운이 좋을 때는 길에서도 자기 도와주는 사람을 만나지만, 운이 좋지 않을 때는 만나는 사람마다 해가 되기 쉽다.
독서는 재미있는 책부터 읽어야 한다. 무협지라도 읽는 것이 안 읽는 것보다는 낫다. 옛날 사람들은 ‘유일독사, 강일독경’이라고 하였다. 마음이 편안한 날에는 역사책을 읽고, 마음이 심란할 때는 종교 경전을 읽는다는 말이다.
편안하면 나태해지기 쉽다. 이때는 역사책을 본다. 역사에는 고비가 기록되어 있다. 그 고비를 어떻게 넘기고 어떻게 대처했는가가 역사책에 나온다. 해이해진 마음에 긴장과 경각심이 생겨난다. 또 판단 사례를 많이 읽다 보면 실전에 부딪혀서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 가늠이 된다.
마음이 어지럽고 불안할 때는 경전을 읽는 게 역시 마음을 진정시켜준다. 넘치지 않게 한다. 경전은 사서삼경과 같은 책들이다. 기독교로 치면 성경이고, 불교로 치면 금강경, 법화경, 능엄경과 같은 경전들이다. 도교로 치면 도덕경이나 장자도 된다. 경전을 읽을 때는 소리 내어 읽는 것도 좋다. 자기 소리를 자기가 귀를 통하여 듣는 게 더 효과가 있 338 다. 서라운드 효과이다. 큰 소리로 읽으면 정신이 집중되는 효과가 있어서 마음속에 쌓여 있는 근심 걱정도 줄어든다.
무엇보다 책을 읽으면 자신에 대한 성찰이 생긴다. 중세 시대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는 독서를 통하여 불운을 견뎌낸 인물이다. 서기관으로 일하던 마흔셋 나이에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10년 치 봉급의 벌금을 물고 감옥에 갔다. 피렌체에서 쫓겨나 시골구석에서 처자식을 데리고 생계를 이어야 했다. 낮에는 주막집에서 장돌뱅이들과 어울렸지만, 밤이 되면 흙으로 더러워진 평상복을 벗고 관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책이 가득한 서재로 돌아가 독서에 몰입하곤 하였다. 시오노 나나미는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에서 그 대목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예절을 갖춘 복장으로 몸을 정제한 다음, 옛 사람들이 있는 옛 궁전에 입궐하지… 그곳에서 나는 부끄럼 없이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행위에 대한 이유를 물어보곤 하지. 그들도 인간다움을 그대로 드러내고 대답해준다네. 그렇게 보내는 네 시간 동안 나는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않네. 모든 고뇌를 잊고, 가난도 두렵지 않게 되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느끼지 않게 되네."
만약 마키아벨리가 독서하는 습관이 없었더라면 이 시절에 자살했을 가능성이 높다. 독서를 해서 팔자를 바꾼 또 하나의 사례는 고 신영복 선생 이야기다. 그는 소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20년간 옥살이를 하는 고초를 겪었다. 보통 사람이 20년간 감옥살이를 하면 대개 폐인이 되고 만다. 그러나 신 선생은 20년간 수많은 독서와 사색을 하면서 거듭나게 된 것 같다. 그의 저서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더불어 숲》 《강의》 등의 책을 읽다 보면 인간과 세계에 대한 통찰과 달관이 행간마다 배어 있다. - P337

⑥ 지명 : 내 삶의 지도는 스스로 읽을 줄 안다
내가 밴텀급인가, 미들급인가, 헤비급인가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크게 헛손질을 하지 않는다. 신의 섭리는 세 가지로 나타난다. 지분, 지지, 지족이다. 자기 분수를 알고, 그칠 줄을 알고, 만족할 줄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지명이다. 팔자를 알고 있으면 이 세 가지가 어느 정도는 된다. 인생의 시행착오는 자기 분수를 모르고 과욕을 부리는 데서 온다. 과욕을 부리는 것을 ‘적극적’이라고 착각하고, 분수를 지키려는 노력을 ‘소극적’인 태도로 평가절하하는 경우가 많다. 팔자의 핵심은 때를 아는 것이다. 내 인생이 지금 봄인지, 여름인지, 가을인지, 겨울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눈 내리는 한겨울에 씨 뿌리려고 덤벼드는 사람은 때를 모르는 사람이다.
문제는 자기 팔자를 아는 일이다. 자기가 직접 사주명리학을 공부해서 아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게 안 되면 잘 보는 전문가를 만나서 아는 방법이다. 전자가 되었든 후자가 되었든지 간에 자기 팔자와 그릇이 어느 정도 되는지는 숙지하고 있는 게 인생의 지혜이다.
관운이 없고 선거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 돈 좀 있다고 선거판에 나가서 몸 축나고 돈 버리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자기 팔자를 모르다 보니 수업료를 많이 내야 하는 것이다. 원래 인생은 수업료를 내고 배워야 하지만, 자기 팔자를 안다는 것은 수업료를 좀 덜 내고 알자는 노선이다. - P340

나의 팔자는 글 쓰는 일이다. 쓰기 싫다는 생각도 더러 많았지만 팔자이다 보니 쓰는 것이다. 글 쓰는 일 외에 다른 일은 할 줄 아는 것도 없다. 운전도 못 한다. 자기 팔자를 대강 안다는 것은 ‘오버’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분수를 알아 넘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어머니가 어디 용하다는데 가서 아들 팔자를 보니까, ‘이 아들은 붓으로 먹고 살겠소.’라는 점괘가 나왔다고 한다.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40년을 지나 보니까 그 말이 맞다. 글 쓰는 팔자에서 만족하고 더 이상 욕심내면 안 된다고 나는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인생에서 오버만 하지 않아도 큰 지혜를 터득한 셈 아니겠는가.
이상 팔자 바꾸는 방법 여섯 가지를 정리해보았다. 30여 년 동안 고금의 문헌들을 보고 수없이 여행하고 만난 사례들을 정리한 결과이다. 이 여섯 가지를 염두에 두고 조금이라도 일상에서 실천하며 꿋꿋이 걷다 보면, 인생길 어디쯤에서 변화된 ‘나’와 맞닥뜨리지 않겠는가.​ - P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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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선택적포용
임수는 바다나 큰 강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된다. 바다처럼 넓게 포용하고, 강물처럼 유유하게 흐르되 거침이 없다. 이런 이미지는 임수의 대인 관계를 잘 보여 준다. 임수는 사람들을 폭넓게 사귀고, 부드럽게 리드한다. 그 스케일은 무토를 연상케 한다. 다른 점은 무토 보다 훨씬 더 유연하다는 것. 무토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그 과정에서 갈등을 겪어 내고 적응하는 스타일이라면, 임수는 상대의 성향 중에서 감당할 수 있는 것만 취해서 관계의 교집합으로 삼는다. 어떤 사람과도 교집합은 형성될 수 있는 법, 그래서 임수는 매우 광범위하게 대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가 그 교집합을 넘어 자신에게 침투해 오면 상당한 불편함을 느낀다. 예상을 넘어서는 세력에 대해선 처음엔 느긋하게, 때론 좀 음흉하게 눙치고 넘기려 하다가,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면 제법 강하게 되받아친다. 그런 점에서 임수의 포용력이란 선택적 포용이라 할 수 있다.

2교감과 과감한 도전
임수의 포용력이 선택적이라고 하지만 그 역치의 범위는 넓다. 수의 특징인 유연성 혹은 융통성과 양(陽)성질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계수가 가랑비처럼 상대에게 서서히 젖어들며 교감하고 포용한다면 임수는 소나기처럼 한번에 온몸을 적시면서 교감하고 포용한다. 한마디로 통이 크고 속도가 빠르고 넓은 교감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교감으로 임수는 즉흥적으로 자신의 실존적 선택을 바꾸기도 한다.
흥보 아내가 한시도 쉬지 않고 품을 팔아도 늘 굶는 처지를 비관하여 목을 매려고 했다. 그때 흥보가 말리며 자기가 죽겠다고 하자 흥 181 보 아내가 겁이 나서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둘이 서로 통곡하며 울고 있을 때, 한 스님이 나타나 연유를 물었다. 사연을 들은 스님은 탄식을 하고는, 집터 한곳을 알려주고 "이 터에 집을 짓고 편안하게 지내오면 가세 빨리 일어나고 자손이 영화롭고 만세까지 이어지리다" 하였다. 그리고 기둥 자리가 될 네 곳에 막대기를 박아 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흥보는 있던 집을 헐고 스님이 일러 준 자리에 다시 집을 지었다. 여전히 배는 주리고 입을 옷은 없었지만 모진 겨울을 죽지 않고 살아났다. 봄이 되자 그 집에 제비가 찾아와 집을 짓게 되었고, 큰 뱀이 제비 새끼들을 잡아먹고 있는 걸 흥보가 발견하고 마지막 남은 제비를 구해주게 된다. 그 제비가 어느 날 비행 연습을 하다가 다리를 다치게 되자 흥보는 제비 다리를 치료해 준다. 나중에 그 제비가 박씨를 물어다 준다는 뒷얘기는 다 아는 스토리일 것이다.
양상은 좀 다르지만 어떤 천간의 성질이건 약한 존재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다 가지고 있다. 그런 측은지심이 비단 임수만의 교감 능력은 아닐 것이다. 임수의 특성은 그보단 스님과 만나는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아무리 측은한 상황이라도 누군가의 손길이 도움이 되려면 극복하려는 자기 힘이 있어야 한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올 때 어미가 밖에서 쪼고 안에선 새끼가 동시에 껍질을 쪼아야 한다. 이를 줄탁동시(啐啄同機)라 한다. 사제지간에서 스승의 자극과 자기 한계를 깨려는 제자의 노력이 맞물려야 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마찬가지로 복도 그냥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자기 극복의 힘이 있을 때 그 복을 취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 스님의 제안은 복을 받기 위한 하나의 관문이다.
"어허, 신세 가련하오. 부귀 주인 따로 없어 적선하면 따라오니 무지한 중의 말을 만일 듣고 믿을 테면, 집터 하나 알려줄 터 소승 뒤 182 를 따르시오." 흥보는 "크게 기뻐 천 번 만 번 감사하며 중의 뒤를 따라가니, 개국해도 좋을 배산임수 형국이요, 무성한 나무들과 빼어난 대나무밭 빙 둘러 싸인 곳에 집터를 가늠하니 명당자리 분명"하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당장 먹을 것을 주는 것도 아니고, 일거리를 주는 것도 아닌데 흥보는 집을 허물고 다시 짓는 수고로움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것은 스님의 제안을 수동적으로 따른 것이 아니라 기회의 발판을 통해 능동적인 자기 극복 의지를 내디딘 것이라 할 수 있다.
임수의 태도가 이와 닮았다. 임수는 위기의 전환점에서 어떤 기회와 빠르게 교감하고 단호하게 방향을 바꾼다. 계수도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고민하고 결정하는 데까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린다. 반면, 임수는 어떤 것에 꽂히면 과감하게 도전한다. 또한 그 결정에 미련을 두지 않고 성실하고 꿋꿋하게 운명을 다시 시작한다. 그것은 시절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운명으로 가져갈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이다. 물론 같은 이유에서 임수의 결정은 너무 즉흥적이고 시행착오를 많이 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기와 맞지 않는 시류의 흐름을 탔다가 고생을 하는 경우도 많다. 한번 직감적인 교감이 일어나면 답답할 만큼 의심하지 않으며 결국 끝장을 보고 나서야 후회하기도 한다.

3자기 통제
임수는 자기 통제력이 강하다. 다만 강압적인 것이 아니라, 직감적으로 교감되고 해야 하는 일이라고 느낄 때 스스로를 통제한다. 누군가에게 강압적으로 통제될 때는 오히려 뛰쳐나간다. 누구도 임수를 통제하진 못한다.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183 일에 대한 사명감 혹은 책임감, 즐거움, 목적의식 등이 있을 때 강하게 동기부여가 되며, 조금 힘들어도 오래 버틸 수 있다.

4유연한 리더십
임수의 리더십은 처음부터 강하게 제압하는 타입이 아니다. 항상 유연하고 부드럽게 사람을 이끈다.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거칠게 밀어붙인다. 유연하게 이끌어 가건, 거칠게 밀어붙이건, 모두 물이라는 특성을 벗어나지 않는다. 물벼락을 맞는다고 가정했을 때, 그것이 그렇게 치명적이라고 우리가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상대의 입장에선 거부감이 상대적으로 덜 일어난다. 그러나 급류에 휩쓸리면 꼼짝없이 당하게 되는 것처럼 임수의 리더십이 강하게 치고 들어오면 저항할 틈도 없이 일단 휩쓸려 버린다. - P180

자오묘유는 도화살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연지나 일지에 상관없이 글자 각각이 도화살로 작용한다고 보면 된다. - P194

대체로 천간은 욕망과 사유의 방향성, 지지는 현실적 조건과 환경적인 측면과 관련되어 있다. 한마디로 천간은 욕망, 지지는 현장이라 할 200 수 있다. 물론 이 둘을 명확하게 나눌 순 없다. 욕망은 현장을 만들고, 현장은 욕망을 낳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도서관을 찾게 되고, 반대로 도서관에 가 보니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천간과 지지를 욕망과 현장이라는 구도로 나누면 사주를 해석하는 데 더욱 입체적으로 진단과 처방을 내릴 수 있다. 따라서 지지를 해석할 때는 현장의 운세라는 측면을 염두하고 해석하는 것이 좋다. - P199

인목의 기호
호랑이
역동성 : 활발, 추진력, 의욕, 리더십, 폭발적 기운, 급한 성정, 반항적 기질, 자존심, 명예, 의협심, 유능, 자유, 고독
큰 것에 대한 욕망 : 큰 꿈, 모험심
떠돌이 : 독립, 도전, 예측 불허
큰 나무
갑목의 성향 공유, 극단적 승부욕, 인간 중심, 따뜻한 마음, 항상성, 성공 기회
겨울 나무
인월(입춘, 우수), 봄의 시작, 순수함, 노련함 부족, 유아적 도발
지천태 삼양(三陽), 서투름, 이질성과의 교류

1호랑이
ㅇ역동성 인목은 계절로는 봄의 시작이다. 입춘부터 인월이 시작 211 되므로 좀 추운 봄이다. 그러나 그 운기(運氣)는 이미 사람이 체감하기 전에 생동하며 바람을 일으켜 땅과 동물을 깨우기 시작한다. 축월 땅속 얕은 곳에서 준비하고 있던 만물의 기운이 인월이 되면서 땅 위로 튀어나와 대지로 솟아오른다. 이런 역동적인 기운을 12지 동물 중에 가장 용맹한 호랑이에 빗댈 수 있다.
호랑이는 하나의 목표물만 노리고 추격한다. 맹렬한 기세로 질주하는 모습이 천간의 양목인 갑목과도 닮았다. 새싹이 땅을 뚫고 올라올 때도 이런 기세가 필요하다. 인목의 운명은 강하게 하나의 장애물[土]을 뚫고 나오는 것이다. 하늘하늘한 새싹이 때론 아스팔트까지 뚫고 나온다. 그것이 바로 인목의 맹렬함이다.
그래서 인목은 역동적인 힘과 활발함, 그리고 추진력을 가지고 있다. 활발한 성격은 의욕을 부추기고, 추진력으로는 장애물을 치고 나간다. 그런 기운은 리더십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때로는 폭발적이고 급한 성격이나 반항적 기질로 드러나기도 한다. 자존심도 강하고 명예를 중시하며 의협심도 강하다. 일을 할 때도 현장을 빠르게 이해하고 일처리도 정확하게 해내는 편이다. 그러나 그런 유능함에 비해서 협동하는 능력은 좀 약하다. 인목은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홀로 질주하고 홀로 능력을 발휘하는 점이 한편으론 자유롭고 한편으론 고독해 보인다.

ㅇ큰 것에 대한 욕망 호랑이는 큰 사냥감을 좋아한다. 호랑이가 좋아하는 먹잇감 중 하나인 들소는 몸무게가 1톤이 넘는다. 이 거대한 동물과 싸우면서도 다치지 않아야 한다. 호랑이가 상처가 깊어서 사냥이 어려우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호랑이의 사냥 성공률 212 은 낮다. 호랑이 연구가 "조지 쉘러는 호랑이가 13번 중 1번 사냥에 성공한다"스티븐 밀스, <<호랑이>>, 이상임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6, 14쪽는 기록을 남겼다. 위험하고 사냥의 성공률도 낮은 큰 먹이를 노리는 성향은 인목도 비슷하다. 인목은 비교적 큰 것에 대한 욕망이 있다. 꿈의 스케일도 크고 또 그것을 단번에 이루려 한다. 그런데 호랑이의 사냥 성공률이 낮듯이 인목의 도전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인목 특유의 모험심으로 도전이 계속되면 어쩌다 한방에 크게 이루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꿈이 클수록 현실의 결핍감은 커지기 마련이다. 작은 것으로 주린 배를 채워 가는 연습이 필요하다.

ㅇ떠돌이 호랑이 "어미가 발정기에 이르고 다시 짝짓기를 하게 되면, 새끼들에게는 더 이상의 가족생활이란 없다. 특히, 새끼들이 수컷일 경우 더욱 그렇다. 20~24개월쯤 되면 새끼들은 독립하여 정글을 떠돌아다닌다."같은 책, 68쪽 인목도 떠돌이 인생이다. 청년이 되면 독립하여 삶을 실험하며 나그네처럼 떠돌아다닌다. 익숙한 업무를 떠나 새로운 프로젝트에 도전하기도 하고, 편한 직장을 벗어나 벤처 등의 자기 사업을 시작하기도 하는데, 남들이 시도해 보지 않은 것일수록 도전하고 싶어 한다. 호랑이 중에는 "예측불허에다가 심지어 무모하기까지 한 녀석들도 있다."같은 책, 25쪽 인목의 도전도 비슷하다. 인목은 예측 불허의 상황을 자주 만들어 낸다. 그런 도전들이 인목에게 짜릿함을 선물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반대로 인목에게 가장 답답한 상황은 의존적 환경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이다. 동물원의 동물들은 정형행동을 한다. "정형행동이란, 판에 박힌 듯 의미 없는 행동을 기계처럼 반복하는 것을 뜻한다. 일종의 213 정신적 문제라 볼 수 있다. 일정 구간을 끊임없이 오간다든가, 몸을 앞뒤로 춤을 추듯 움직인다든가, 먹은 것을 토하고 다시 먹는다든가, 심지어 털을 물어뜯어 자신을 해치기도 한다. 야생의 삶에 적합하도록 다양한 행동을 지니고 있는 동물들이 인공적인 환경 속에서 살게 되면 얻게 되는 병이다."박하재홍, <<돼지도 장난감이 필요해>>, 슬로비, 2013, 64~65쪽
맹수인 호랑이는 그런 환경이 더욱 답답할 것이다. 인목도 스스로 독립하지 못하고 한곳에 갇혀서 의존적으로 살아가면 정형행동을 보인다. 그런 인목에게 나타나는 정형행동은 자주 답답함을 느끼며 자꾸 밖으로 나가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소화불량, 신경쇠약, 두통, 피로함 등의 병증이 생기기도 한다. 정신적으로는 더 이상 새로운 사유와 창의력이 생기지 않고 변화와 갈등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스스로 결정을 내리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병증은 더욱 심해진다.
새끼들이 독립하여 정글을 떠돌아다니는 "이때가 호랑이 일생에서 두 번째로 위험한 시기이다. 카란스에 의하면, 이 떠돌이 호랑이들의 연간 사망률은 30~35퍼센트에 이른다"스티븐 밀스, 앞의 책, 68쪽 그런데도 이런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 맹수의 자유본능이다. 그 본능을 억제하면 정신적인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동물이건 사람이건 다 비슷하다. 특히 인목에게 모험은 매우 중요한 삶의 추동력이 된다.

2큰 나무
큰 나무의 이미지는 갑목과 같다. 인목의 많은 부분이 갑목과 닮았다. 인간 중심적이고 따뜻하고 넓은 마음을 가졌으나, 예측 불허의 욕망으로 인해 갈피를 잡지 못할 때가 있다. 한방에 승부를 걸려 하지만, 214 뜻대로 안 된다. 관건은 항상성이다. 꾸준하게 도전하는 인목은 성공에 이르게 하는 기회를 많이 갖는다. 기회가 많으면 성공 확률도 높다. 그러나 큰 나무는 강한 폭풍에 쉽게 쓰러진다. 이 점도 갑목과 비슷하다. 조금 멀리 보고 속도를 조절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3겨울 나무(월지 인목) 생략

4지천태
태괘는 땅과 하늘이 위아래로 만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음양의 형상으로 보자면 세 개의 양이 올라오고 있는 모습이다. 이양이 새싹이 땅을 뚫기 직전의 상태라면 삼양은 이제 막 땅을 뚫고 올라온 상태다. 그래서 아직 서툴고 순수한 기운이지만 그만큼 밝고 계산적이지 않으며 낯선 것을 잘 가리지 않는 용기가 있다. 어쩌면 이런 기운이 소통의 첫 문턱을 넘는 데는 가장 유리한 조건이 아닐까 싶다.
<단전>(彖傳)에서는 "하늘과 땅이 교류하여 만물이 소통한다"(天 215 地交而萬物通也)고 했다. 위가 땅이고 아래가 하늘이니, 제자리를 찾기 위해 땅을 내려가려 하고 하늘을 오르려 한다. 이질적인 것들 간의 이러한 동적 교류야말로 음양이 섞이고 만물이 소통되는 길이다. 인목은 낯선 것들에 무심하듯 강하게 접속하는 능력이 있다. 큰 저항 없이 이질성을 받아들이고 교류하는 그 힘은 태괘의 괘사(卦辭)에서 말한 것처럼 "길하고 형통하다"(吉亭). 다만 힘 조절이 필요하다. 소통의 첫 관문을 연 이후의 관계는 또 다른 자세가 필요하다. 인목의 기운으로만 소통하려 하면 에너지가 많이 든다. 그런 관계는 서로 피곤하다. 관계를 지속시키려면 편안하고 느긋한 기운이 요구된다. - P210

사화의 기호

끌림과 꺼림 : 독성, 열기
맹렬한 에너지 : 명석함, 용의주도, 승진, 지략 혹은 권모술수
용광로, 폭탄
급한 성질, 분노조절장애, 만남과 이별의 속도가 빠름, 좁은 대인 관계, 감정적
중천건
육양, 사월(입하, 소만), 양의 절정, 배수진, 추동력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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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역사가 ‘모두가 다 잘사는’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간다는 관념은 ‘지금, 여기’는 물론, 이전의 모든 시대를 과도기요 이행기로 간주하는 사유를 낳게 된다. 이거야말로 소외의 극치가 아닐까. 스티븐 호킹이 말했듯 우주에는 중심이 없다. 우주의 끝을 향해 가다 보면 결국 자신이 출발한 지점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므로 중요한 건 자신이 선 자리에서 한 걸음을 내딛는 것뿐이다. 역사적 실천의 원리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해방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 그 자리를 해방의 공간으로 전환시 99 키는 것ㅡ이보다 더 혁명적인 실천은 없다!
개인의 경우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사주팔자를 뽑아 보면 오행상 어느 쪽으로든 다 기울어져 있다. 심한 경우 한 오행이 고립이거나 아니면 아예 없기도 하다. 한두 개의 오행만으로 된 경우도 있다.(윽!) 고스톱으로 치면 한두 종류의 패만 들어온 셈이다. 그럼 판을 포기해야 하나? 그렇지 않다. 좀 위험성이 있긴 하지만 또 패가 골고루 들어온 경우에는 누릴 수 없는 스릴이 있다. 그 스릴이 오히려 인생역전의 발판이 되기도 한다. 불급의 극단인 고립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고립은 다른 오행에 가로막혀서 순환이 불가능한 경우다. 하지만 그 카드는 존재의 무게중심이 된다. 엉? 어떻게? 아픈 곳이 몸의 중심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손가락이건 발톱이건(자식이 깊은 병이 들면 그 자식을 인생의 축으로 삼는 부모가 그런 것처럼). 그렇기 때문에 그 카드들이 야기하는 파장은 크다. 즉, 가장 문제적인 곳이지만 동시에 그것이 구원처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문제와 사건의 중심이 된 건 다른 일곱 개의 카드 때문이다. 즉, 그것 자체가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카드와의 관계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카드에 대해서는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고 이것만 쏙 뽑아 버리겠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무지의 산물이다. 만약 어떤 비책을 동원하여 그것을 제거해 버린다면 그 순간, 나머지 일곱 개의 카드도 다 위치를 바꾸어 버릴 것이다. 그러면 또 다른 카드가 고립이나 태과에 처하게 될 게 뻔하지 않은가. - P98

팔자가 차별상이 되는 건 어디까지나 사회적 조건과 통념으로 인해서다. 무엇보다 ‘부귀는 당연히 누리고 빈천은 무조건 피하고 싶은’ 욕망이 가장 큰 장벽이다. 원초적 간극에다 이런 식의 탐욕이 중첩되면서 차별이 이중 삼중으로 증폭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찰하지 못하면 마치 모든 차별상이 타고난 운명 탓이거나 아니면 외적 조건 탓이라는 전도가 일어난다. 그렇게 되면 한편으론 자신의 존재를 통째로 부정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운명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 한마디로 태과불급을 더더욱 심화시키는 셈이다. 승가원 꼬마와는 정반대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다. - P101

그 이름도 섬뜩한 공망살도 그렇다. 공망(空亡)이란 천간의 짝이 없이 지지만 있는 오행을 말하는데, 예전에는 독수공방하는 살이라 여겨 아주 꺼렸지만 이것도 운용하기 나름이다. 때론 공망살이 훨씬 유리한 경우도 많다. 또 공망이 다른 오행과 충을 하면 엉뚱한 리듬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런 사항을 알게 되면 살에 대한 맹목적 거부감을 벗어날 수 있다. 심지어 이렇게 토로하는 경우도 있다. "살(殺)이 있어 행복해요!^^" 실제로 그렇다. 명리의 기초를 배우다 보면 처음엔 살이 있을까봐 겁내지만 나중엔 살이 없는 걸 좀 서운해한다. 살이 없으면 안정감(혹은 지루함)은 있겠지만 대신 삶의 역동성을 맛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상식적 통념과는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정보다는 변화를 원한다. 미국의 한 조사에서 90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다시 젊은 날로 돌아가면 뭘 하겠느냐고 물었다. 노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모험을 하겠다!"고 대답했다. 이것이 인생이다. 변화는 고생스럽다. 하지만 그 속에서만이 ‘살 떨리는’(^^) ‘미친 존재감’을 맛볼 수 있다. 그러니 살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오히려 그걸 즐기는 훈련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 P108

모든 사람의 대운이 십 년마다 변한다는 건 여러 모로 의미심장하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의 인생또한 그러하다. 생리학적으로 몸을 이루는 세포들도 최소 7년이면 물갈이를 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아주 다른 존재다. 그렇다면 대운이 달라진다는 건 외부적 조건이기도 하지만 내 113 존재의 주름 하나가 펼쳐지는 내부적 변용이기도 하다. 참 절묘하지 않은가. 하긴 생로병사는 늙고 병든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몸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주름을 펼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대운의 변화 또한 존재가 밟아 가는 단계의 표현일 수 있다. 여덟 개의 카드 위에 겹쳐진 변화의 리듬, 그것이 곧 대운이다. (…)
대운을 주욱 뽑아 놓으면 자신이 밟아 갈 시공의 리듬이 한눈에 펼쳐진다. 거기에서 핵심은 상승과 하강의 변주다. 즉, 지금이 아주 만족스럽다면 분명 다음 혹은 다다음 단계는 반드시 불만족의 양상이 펼쳐질 것이다. 부와 권세를 누리는 경우라면 그 진폭은 더더욱 벌어질 것이다. 원국을 좋게 타고날 수는 있지만, 평생에 걸쳐 대운의 흐름이 계속 좋기란 불가능하다. 당연히 부침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상승할 때는 더욱 몸을 낮추고, 하강할 때는 결코 낙담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또 하나. 나의 리듬이 좋다고 해서 나의 가족이나 친구들이 다 좋은 건 아니다. 서로 대립되는 경우가 더 많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대신 누군가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된다. 내가 기운이 넘치는 대신 누군가는 지금 탈진하고 있을 것이다. 114 이것이 오면 저것이 가고, 저것이 생기면 이것이 사라진다. 공동체 생활을 해보면 그 점이 아주 확연히 드러난다. 작년에는 사건사고의 주역이었다가 올해는 사고를 수습하는 역할을 하고, 도무지 공부가 늘 것 같지 않은 사람도 어느 해가 되면 전혀 예상 밖의 성취를 이루고…… 이런 식의 변전이 실로 무쌍하게 벌어진다. 이걸 알면 누구든지 저절로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운이라는 것이 결국 ‘우주적 인연’의 산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운에도 강밀도의 차이가 있다. 특히 아주 기운이 센 간지가 있다. 갑목, 자수, 진술축미 등이 그렇다. 이들은 오행 중에서도 시작점이나 변화의 마디를 짓는 글자들이기 때문에 이 대운이 들어서면 인생이 그야말로 크게 국면전환을 한다. 상상도 못한 일을 하거나 전혀 예측불가능했던 관계망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위에 등장한 Y의 경우 병자(丙子)대운이 들어왔는데, 여기서 자수는 남편운이다. 거기다 해외역마까지 함께 들어섰으니 그야말로 기막히게 적중한 셈이다. C의 경우 갑신(甲申)대운이 들어왔는데 이걸 풀이하면 동료들과 조직운이 된다. P는 경진(庚辰) 대운이 들어왔다. 앞의 경우에 비해 115 서는 변화가 약한 편이지만, 진(辰)토 역시 환절기의 마디에 해당한다. 이처럼 셋 다 상식의 차원에선 기적에 가까운 일이지만 명리상으론 아주 자연스러운 변화를 겪은 셈이다. - P112

어린 시절의 경험을 생각해 보라. 당신이 명확하게 기억하는 것, 자신이 실제로 거기에 있는 듯이 보고 느끼고 나아가 냄새까지 맡을 수 있는 것, 어쨌거나 당신은 당시에 실제로 거기에 있었다. 그렇지 116 않은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기억하겠는가? 그러나 여기에 깜짝 놀랄 일이 있다. 당신은 거기에 없었다는 것이다. 현재 당신의 몸에 있는 원자는 단 하나도 그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에 거기에 없었다…… 물질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흐르며 순간적으로 모여서 당신이 된다. 따라서 당신이 무엇이든, 당신을 구성하는 재료들은 당신이 아니다. 그것이 당신의 머리카락을 쭈뼛 일어서게 하지 않는다면, 그럴 때까지 다시 읽어라. 중요하기 때문이다.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이한음 옮김, 김영사, 2007, 570쪽)

머리카락이 쭈뼛할 정도는 아니지만 오싹 소름이 돋는 건 사실이다. 내가 뭔가를 기억하는 순간, 나는 이미 그 기억 속의 내가 아니라니. 양자역학적으로 말하면, 나는 오직 지금, 여기만을 살 수 있을 뿐이다. 지금, 여기들이 무수히 모여 나라고 하는 것이 구성될 뿐이다. "‘나’의 정체성은 수많은 ‘너’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역동적인 과정일 뿐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마음은 몸으로 말한다』, 89쪽)이다.
대운의 이치도 그와 다르지 않다. 지금의 너는 이전의 시공간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존재라고 말해 주는 것이 바로 대운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나간 과거를 붙들고 그것에 끄달릴 이유가 없다. 과거의 어떤 상태를 자신의 진정한(혹은 순수한, 혹은 행복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한, 지금의 나는 늘 거기에 미달하거나 부족할 뿐이다. 그게 이어지다 보면 결국 나의 팔자는 온통 결핍으로 채워지고 만다. 117 대운이라는 강물은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는데, 나의 의식의 물결은 어느 한 모퉁이에 들러붙어 앞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의식은 웅동이나 늪이 될 것이다.
대운을 알면 전략을 짜기 쉽다. 시절인연을 만나기 전에는 결코 어떤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금이 잠수를 타야 하는 시기라면 느긋하게 때를 기다리면 되고, 잠수가 끝나고 막 떠오를 때라면 흥분할 필요 없이 여유있게 즐기면 된다. 물론 거기에는 지혜가 필요하다. 보통 일이 잘될 때는 대개 자기의 능력 덕분이라 여긴다. 그래서 자만심이 강해진다. 그리고 그런 식의 행운이 계속 뒤따를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러다가 대운이 바뀌어 만사가 막히게 되면 그때부터는 세상을 탓하기 시작한다. 상처로 얼룩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하나같이 자신은 빠져 있다. 모든 것의 원인과 책임은 세상과 타인들의 몫이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는 뜻인데, 따지고 보면 그게 더 심각한 일 아닌가.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주인이 되지 못하는 것, 그것이 곧 상처의 원천임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팁 하나. 혹시 지금 실연을 당했으면 딱 5년만 기다리시라. 나를 버리고 간 그 사람의 연애도 5년 안에 끝장이 난다. 대운 10년은 천간과 지지로 5년씩 마디가 지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이의 세운에 의해서도 완전 딴판이 될 수 있다. 동시에 그 사이에 자기 자신도 전혀 다른 인연의 장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은근히 감사하게 될 것이다. 자기를 버리고 떠난 옛 연인에게. 그가 아니었다면 어떻 118 게 새로운 삶이 가능했겠는가. 더 나아가 누가 누구를 버리고 버림받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서로 인연이 엇갈렸을 뿐임을,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진통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있을 수 없다. 원인도 주체도 없다. 다만 내 몸을 지배하는 시공간의 조건이 달라졌을 뿐이다. 요컨대, 모든 것은 지나간다. 대운이란 이 무상성의 이치를 깨우쳐 주는 명리학적 키워드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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