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종류에는 네 가지가 있다. 먼저 선견몽(先見夢)이다. 미래를 미리 보는 꿈이다. 앞일이 어떻게 돌아갈지를 미리 예시해주는 꿈이라 하겠다. 둘째는 전생몽(前生夢)이다. 전생의 자기 모습을 보여주는 꿈이다. 이 전생몽은 아무나 꾸는 게 아니다. 의식이 아주 맑은 사람들이 꿀 수 있다.
셋째는 혼백불화몽(魂魄不和夢)이다. 사람이 잠을 잘 때는 의식이 쉬기 때문에 혼(魂)과 백(魄)이 화합을 하게 된다. 혼은 ‘개체의식’이 398 고, 백은 ‘집단의식’에 해당한다. 낮에 활동할 때는 혼과 백이 서로 분리돼 작용을 하지만, 밤에 잠을 잘 때는 다시 뭉치게 된다. 혼백이 화합해야 깊은 잠에 들어간다. 그러나 스트레스가 심하거나, 정신이 너무 산란하면 잠을 잘 때에도 혼백이 화합하지 못하는 수가 있다. 이때 꾸는 꿈은 개꿈이다. 개꿈의 특징은 전혀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개꿈 갖고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넷째는 천상몽(天上夢)이다. 천상세계의 장면을 보여주는 꿈을 말한다. 천상몽은 총천연색으로 꾸는 수가 많다. 보통 꿈은 흑백인데, 컬러로 꾸면 천상몽이 많다. 보통 꽃밭이나 아름다운 광경이 컬러로 보이면 천상몽이다. 이런 천상몽을 꾸는 사람들은 의식이 고양된 사람이다. 한 달 이상 기도에 집중적으로 몰입하면 평소 잘 안 꾸던 천상몽을 꾸는 경우를 봤다.
이 네 가지 꿈 가운데 실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꿈이 선견몽이다. 이럴까 저럴까 하는 갈림길의 상황이나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 직면해서 꿈을 꿀 수 있는데, 이때 나오는 꿈 중에 선견몽이 많다. - P397

이런 명리학의 고전들을 이해하려면 최소한 10년 정도는 공부해야 한다. 타고난 소질이 없으면 중도에 포기한다. ‘차라리 고시공부를 하고 말지 이런 거는 못하겠다’가 된다. 책으로 역술공부를 하려면 머리가 좋아야 한다는 말이다. 암기력, 종합력, 추리력이 요구된다. 그래서 절에서 고시공부하다가 호기심으로 역술책들을 보고 역술에 조예를 갖게 된 고시생들이 상당수 있다. - P409

사람이 어떤 사실이나 원리를 받아들이려면 몸과 가슴의 체험이 반드시 필요하다. 머릿속의 가설이나 이론만 갖고는 부족하다. 일단 이론이 머릿속에 들어와서 이게 가슴까지 내려가야만 확신이 서는 법이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갈 때 거치는 관문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눈물이라는 거다. 눈물을 흘려봐야 확실히 알아진다. 눈물을 흘리면서 확인할 때 확실히 아는 거지, 눈물 없이 도서관에서 책만 읽는다고 감히 인생이 알아지겠는가? 그래서 세월이 필요한 것 같다. - P415

공자는 50세를 넘긴 56세 무렵부터 69세 무렵까지 약 14년간 전국을 정처 없이 떠도는 낭인 생활을 한 팔자다. 낭인 생활이 무엇인가. 그날그날 먹을 것과 잠잘 곳을 걱정해야 하는 신세가 낭인이다. 『사기(史記)』에서 사마천은 ‘상갓집의 개 같은 삶을 살았다’고 공자를 평가하지 않았는가. 그야말로 ‘개팔자처럼’ 밑바닥 생활을 전전해야 했던 것이 공자 말년의 삶이었다. 그것도 자그마치 14년간이나.
공자는 주유천하(周遊天下), 즉 낭인과(浪人科) 생활로 접어들기 직전에 자신의 앞날이 매우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있었던 것 같다. 이때 공자는 주역의 괘(卦)를 뽑아 봤다. 공자는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지도록 주역을 공부해왔던 주역 애호가였음에 비춰볼 때 점(占)을 쳐본 것은 당연하다. 사람은 자고로 딜레마에 빠져봐야 점을 쳐보는 법이다.
공자와 주역의 관계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황태연 동국대 교수에 따르면 공자가 50대 중반 무렵에 뽑은 괘는 ‘화산려(火山旅)’였다고 한다(『공자와 세계』 3권). 위에 불이 있고, 아래에 산이 있는 형상의 괘가 화산려다. 산에 불이 난 모습이기도 하다. 왜 고대인들은 이 모양을 보고 여(旅)를 추상해냈을까? 어찌됐든 이 괘의 핵심은 여에 있다. 여인숙(旅人宿)의 여다. 나그네로 산다는 뜻이다. - P416

공자는 자신의 앞날에 ‘바람을 반찬 삼고 이슬을 이불로 덮어야 하는’ 풍찬노숙(風餐露宿)의 나그네 팔자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예감하지 않았나 싶다. 싫지만 이를 거부할 수도 없다. 오직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 아닌가. 공자도 거부할 수단은 없고, 오로지 자신 앞에 놓인 비포장의 험난한 팔자에 그저 순응하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운명이라는데, 팔자가 그렇다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주님의 섭리가 그렇다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다고 주님에게 맞짱 뜨겠는가?
69세에 낭인생활 종지부를 찍고 돌아와 73세에 죽었으니 불과 4년 동안 말년의 여유가 있었고, 이 말년 기간에 제자들과 함께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는 저술들을 남겼던 것으로 보인다.
공자도 오십에 천명을 제대로 알기는 어려웠다고 본다. 그만큼 자신의 운명을 알기는 어렵다. 운명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미리 알아본들 어떤 효과가 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 희랍의 철학자 세네카가 한 말이 있다. "운명에 저항하면 끌려가고, 운명에 순응하면 업혀간다." 어차피 가기는 가는 것인데 끌려가느냐, 아니면 등에 업혀서 가느냐의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이를 뒤집어보면 운명을 미리 알면 강제로 질질 끌려가느냐, 등에 업혀서 가느냐의 선택은 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끌려가는 것보다는 업혀가는 게 훨씬 낫지 않은가! - P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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