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은 무의식적으로 존재의 방향을 지시한다. 정관과 정재는 이 방향성에 타자적으로 개입하여 견제하고 길항하는 역할을 한다. 그 역할이란, 운명에 대한 일간의 정치적 독단을 제어하고 주체를 편견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균형의 통치술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균형감이 억압과 방임 사이에서 중심을 잡게 한다. 그래서 정관과 정재를 예로부터 사길신(四吉神), 즉 네 가지 길한 육친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편관과 편재 역시 제어와 견제의 상극관계이긴 하지만 음양이 같은 이유로 쉽게 감정적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정관과 편관은 모두 일간을 자극하는 시련의 아이콘이지만, 정관이 편관보다 더 공적이고 객관화된 시련이다. 편관은 음양이 같아서 좀 사적이고 감정적이다. 아는 사람한테 비판을 받으면 더 기분이 나쁘게 느껴지는 것을 편관적인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럴 경우엔 자기를 들여다보고 성찰을 하기보다는 원망의 감정에 빠져서 시야를 좁히게 된다. - P330

4정임합화목
정화와 임수가 만나면 목으로 변한다. 다만 이 두 결합을 방해하는 충이 없어야 한다. 정화와 충을 하는 천간은 신금과 계수이고, 임수와 충을 하는 천간은 병화와 무토다. 정화는 촛불 혹은 모닥불, 임수는 큰 강물이나 홍수를 표상한다. 정화와 임수의 만남은 강가에 놓인 모닥불 또는 홍수 같다. 강물이 붇기라도 하면 모닥불은 금방 꺼지고 만다. 정과 임의 합으로 목이 된다는 것은 정화의 입장에서는 모닥불에 땔감이 더해진다는 것이고, 임수의 입장에서는 물이 스며들 숲이 생긴다는 것으로 보면 된다. 숲이 물을 빨아들여 홍수를 예방하는 것에 비유할 수도 있다. 모닥불에 땔감을 잔뜩 올려놓으면 불은 처음에 주춤하거나 잘못하면 꺼지게 된다. 게다가 물을 흡수한 나무라면 모닥불은 더 약해질 것이다. 따라서 모닥불의 화력을 결정하고, 큰물의 수 337 위를 조절할 수 있는 주도 세력은 목이 된다. 정과 임이 만나면 화와 수의 성향은 약해지고 목의 힘이 강해진다.
촛불·모닥불[丁]의 상징성은 예(禮), 배려, 형식적, 미시 권력, 의존적인 성향으로 해석할 수 있고, 강물·호수[壬]의 상징성은 폭넓은 대인 관계, 느긋함, 유연한 리더십, 권모술수 등으로 확장할 수 있다. 이 둘이 목으로 변한다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정화의 형식적 예절이 아니라 목의 탈형식적이고 순수한 배려가 되고, 임수의 느리고 유연함은 목기의 빠르고 거친 속도로 변한다. 또한 정화의 의존적 성향은 약해지고 목의 독립적인 기운이 강해지며, 임수의 권모술수는 목의 돌파력으로 바뀐다. 물론 변하고 바뀐다는 말은 합화(合化)의 뜻일뿐, 원국에서 합이 되는 것이므로 원래 태어나면서 그런 바뀐 성향으로 살아가게 된다.

을 정 정 임
사 미 미 오

위 명식은 다산 정약용의 사주다. 천간의 정화와 임수가 합을 한다. 정화가 두 개지만, 하나는 일간이라 합이 안 된다고 보고, 월간 정화와 연간 임수가 합을 하고 있다. 정과 임을 충하는 천간이 없어서 온전한 합을 이루어 목으로 변한다. 하나 있는 임수마저 합을 이루고 나니 사주는 거의 목과 화 위주로 편향되었다. 따라서 임수의 거칠고 느긋하며 포용력이 있는 성향은 약해지고 목의 솔직하고 순수한 성정과 돌파력이 부각된다. - P336

그러나 정화나 임수를 충하는 천간이 대운이나 세운으로 들어올 때는 이 결합이 약해지면서 정화와 임수의 본성이 드러나게 된다. (…) 계수가 정화와 충을 함으로써 정임의 합이 느슨해진다. - P338

천간충은 합이 되는 자리에서 양 옆으로 한 칸 비켜 있는 자리의 천간과의 관계다. 갑이 마주보는 기토와 합을 한다면, 충은 기토 옆에 있는 무토, 경금과 각각 충의 관계를 갖는다. 그렇게 해서 천간충은 천간합에 비해 2배가 많은 10개의 충이 성립된다. 아래의 그림을 참조하시라. 천간합이 상호 견제와 합의의 관계라 한다면, 천간충은 심리적 변 340 화와 도발적 사유를 일으킨다. 이런 변화와 도발은 대체로 갈등 상황과 함께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사건이 없이는 정신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천간합은 정관과 정재의 관계다. 천간충은 모두 편관, 편재의 관계다. 예를 들면, 갑경충에서 갑목 입장에서는 경금이 편관에 해당하는 자리에 있고, 경금 입장에서는 갑목이 편재의 위치에 있다. 편재와 편관은 일간과 상극의 관계에 있으면서 음양이 같은 육친이다. 음양이 같은 상극 관계는 애증과 질투, 설렘과 의욕 등 감정적인 부딪힘이 일어나기 쉽다. 감정의 변화는 사건과 함께 일어나므로, 천간충은 작은 사건에서 비롯된다. 만일 지지충도 같이 있다면 천간충으로 일어난 감정의 돌발적 변수가 또 다른 큰 사건을 야기하게 된다. 원국에 있다면 평생운이 될 터이지만 그건 타고난 운이라 체감되는 것은 약하다. 물론 돌이켜보면 사건사고가 많았다고 후에 복기할 수는 있다. 천간충은 세운이나 대운으로 오는 경우에 체감지수가 높다. 시절 운으로 오면 감정을 일으키게 하는 소소한 사건들이 발생한다. 그것은 대체로 기존의 상태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일어난다. 즉, 안정된 것은 균형이 무너지고, 미미한 것은 역동적으로 일어나며, 번다한 것은 단순해지고, 결합된 것은 깨지고, 나뉜 것은 다시 이어지는 것이 충의 속성이다. 천간충은 육친과 함께 해석해야 더 다채롭고 논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 P339

3사유축금
사유축합화금은 사화와 유금, 축토 세 지지가 만나서 금이 된다는 뜻이다. 단 사유축과 충을 하는 해수, 묘목, 미토가 없어야 한다. 사 347 유축합화가 되면 유금의 성질은 그대로 유지되고, 사화와 축토의 독특한 특징들은 금의 성질로 변하게 된다. 예를 들어, 사화의 강한 에너지는 금의 수렴력으로 인해 그 정도가 약해지고, 축토의 우유부단함은 금의 날카로운 결단력으로 방향을 바꾼다. 또는 사화의 책임감이 유금을 만나면서 더욱 강직해지고, 축토의 우직하고 성실함은 금의 실리를 배워 크게 무리하지 않고 적절하게 힘 조절을 하게 된다.

ㅇ 을 정 ㅇ
ㅇ ㅇ 사 유

위 사주는 월지 사화가 유금과 반합을 하여 금으로 변했다. 그래서 사화 본연의 독성과 강렬함이 금의 수렴으로 인해 그 정도가 많이 약해지고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것을 취한다. 그러나 사화 바로 위에 정화가 있어서 아래 위로 화기운의 기둥이 생긴다. 이를 간여지동(干與支同)천간과 지지가 같음이라 이른다. 간여지동의 경우 합이 잘 안 된다는 말이 있다. 아래 위로 하나의 오행으로 강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다른 오행으로 잘 바뀌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점을 고려했을 때, 사화는 유금과의 결합이 비교적 약하게 결합되어 있고, 다른 대운이나 연운으로 충이 올 때 외에도, 월운이나 일운 정도로도 쉽게 그 결합이 깨질 수 있다. 그래서 자주 사화의 강한 에너지가 봇물처럼 일어나, 갑자기 화를 낸다거나 일을 무섭도록 열심히 한 뒤 번 아웃이 되어 쓰러지는 일을 겪게 될 수 있다. 실제로 이 사주의 여성은 평소엔 매우 실리적이고 냉정한 성향인데, 불현 듯 화가 치밀어 오르거나, 일을 할 때 한 번 348 에 강렬한 에너지를 쏟기 때문에 어떤 때는 멀쩡하다가도 갑자기 기운이 바닥을 보이기도 한다. 이 여성이 미술 분야의 일을 한다는 점도 참고하면 좋다. 미술은 시각적인 일이므로 화기를 많이 쓴다. - P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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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좁은 시야 안에서 살 수밖에 없는 개인들은 실수를 할 수 있다. 문제는 사회의 반응이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이때 ‘그것은 명백한 잘못이다‘라고 말해주면서 실수를 재발하지 않도록 제재를 가한다. 그래서 ‘법‘이 존재하는 것이며 이 법의 가치에 따라 사회의 여러 장치들, 이를테면 학교교육, 언론 등이 그 기능을 수행해야 함이 마땅하다. - P54

하지만 (‘역시나‘로 바꿔 말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지만) 한국에서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문제의식을 느껴야 하는‘ 걸 누가 애써 말해도 별 소용이 없다. 오히려 ‘오래된‘ 전통 운운한다. 그 전통이 ‘폭력적‘이어서 문제라고 말하면 ‘전통적‘이니 대수롭지 않다고 답한다. 조직 전체가 ‘우린 바보요!‘ 하고 세상에 소리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누가 송곳으로 기존의 관념을 ‘찌르면‘ 그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는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사회답다. 오히려 송곳이 되지 않을수록, 혹은 등장한 송곳을 노골적으로 무시할수록 ‘사회생활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 곳 아닌가. 특히 남자가. - P57

윤종빈 감독의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2005)는 ‘군대 적응=비인간화‘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그간의 군대에 관한 분석들은 지나치게 우회했다. 조직 이론을 들먹이기도 하고 영웅주의에 입각한 상징적 심벌을 강조하여 모순을 은폐한다든지, 군가 등을 목청 터질 듯 부르는 의례에서 집단주의가 형성되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등 연역법에 근거해서 이론에 맞는 사례를 발굴했다. 그래서 관념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돌직구를 날린다. 군대는 ‘너무 어린‘ 사람들끼리 ‘너무 오래‘ 함께 살고 있는 곳이라고. - P76

이걸 따지지 않는 사소함이 중요하다. 특히 폭력 행위 ‘그다음‘을 처리해나가는 방식이 그러하다. 어떤 식의 폭력이든 ‘똑같이 되돌려주는‘ 시대가 아닌 이상 일상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거리는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꼴이 되기 일쑤다. 공권력을 통한 법 집행이 위안이 될 수 있지만 피해자가 느끼는 심리적 거리를 가해자가 좁히긴 좀처럼 어렵다. 죽을 때까지 진정성 있게 사과를 해야지만 용서, 그것도 아주 일부만이 ‘극적인 용서‘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군대는 그러지 않는다. 용서를 우습게 안다.
태정은 승영에게 사과한다. 자신은 원하지 않았지만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승영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의 변명에 가까운 사과였지만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승영에게 사과하는 태정의 모습은, 이후 그가 왜 ‘용서받지 못할 자‘인가를 짐작하게 한다. 문제는 용서를 구할 줄 모르는 뻔뻔함이 아니라, 너무나 쉽게 용서를 구하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있다.
가해자가 북 치고 장구 치고 가해자가 병 주고 약 주는 곳이 군대다. 이런 비합리성이 일상화된 공간에서는 폭력을 문제 삼는 자가 유난 떠는 자로 인식될 뿐이니 가해자는 용서받을 것이 없는 자가 되어 살아간다. 일반적인 세상에서 폭력이 동반된 문제가 이처럼 쉽사리 해결될 리 없다. 하지만 군대를 거쳐가는 이들은 세상 이치의 ‘역‘, 즉 오답을 정답으로 배운다. 착한 어른들은 이렇게 살지 않는다. - P78

그런데 아름답지 않은 것을 뒤늦게 눈치채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상황은 ‘아쉽다‘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특히 ‘폭력‘은 특정 언행이 존재한다면 가타부타 따질 필요 없이 그 자체가 ‘나쁜 것‘이다. 이 추잡한 것을 한참 시간이 지나고서야 ‘그것이 폭력이었구나‘라고 인지하는 것은 땅을 치고 억울해할 일이다. 피해자는 물론 잘못을 저지른 줄도 몰랐던 가해자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잘못된 건 ‘잘못되었다‘고 빨리 정의 내려야 한다. 폭력을 폭력이라 말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나쁜 사회‘다. - P90

‘사람‘이 사회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성별 정체성이라는 ‘틀‘에 고착화되는 모습은 마치 돼지가 ‘스톨‘이라는 철제 공간에 갇혀 평생 뒤돌아보지도 못하고 살만 찌우면서 갇혀 사는 것과 흡사하다. 돼지의 몸이 ‘빨리‘, 그리고 ‘좀 더 기름지게‘ 커질수록 남는 장사인 것처럼 성별 정체성의 규격화도 기업의 입장에서는 엄청 좋아할 일이다. 그래서 해외 학자들은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한국의 자본주의가 유독 가파르게 성장한 이유로 (군부독재 외에도) ‘남자들의 사고방식‘을 손꼽는다. 한국의 남자들은 ‘자본주의 노동 세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딛기도 전에 학교와 군대에서 이미 자본가가 ‘부려먹기에‘ 최적화된다는 말이다. 즉 한국의 남자는 어떤 사회에나 있는 남자와는 ‘다른‘ 남자다. 그러니 ‘원래‘ 그런 남자는 없다. - P118

앞서 언급했듯이 이것은 중요치 않다. 우리가 던질 질문은 단 하나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여성의 운전 실력이 ‘평균적으로 남성보다 낮으니‘ 그런 식의 조롱과 멸시가 타당하단 말인가? 운전을 ‘짜증 나게 하는 사람‘을 그렇게 대해도 된다는 말인가? 그럼 남성은 운전을 ‘평균적으로 여성들보다는 잘하니‘ 동일한 경우에도 욕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말인가? 이 질문은 찬반 토론할 성질이 아니다. 우리는 헌법의 가치로 일상이 통제되는 ‘2016년도의 민주 공화국‘에서 살고 있다. 복잡한 지하철에서 누가 나의 발을 ‘실수로‘ 밟았다고 해서 "나도 너의 발을 밟아주마!"라면서 ‘고의로‘ 그딴 행동을 한다면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한다. 이건 상식이다. 여자가 운전을 ‘조금 못한다면‘ 그건 말 그대로 그런 거다. 또한 이것은 모든 여자들이 그렇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고 모든 남자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도로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어떤 운전 미숙자 때문에 자신이 피해를 받을 때‘는 그 운전자의 성별을 따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저 ‘배려‘하는 것만이 필요한 것이다. 그건 운전대를 잡는 ‘모든 사람‘이 고려해야 하는 시민의 덕목이다. 왜냐하면 ‘운전의 달인‘만이 자동차를 이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P136

하지만 이 사회는 ‘사상자가 발생하는‘ 그 끔찍한 사건을 목격하면서도 그런 경우 운전자의 대부분이 남자라는 객관적인 사실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건 운전자가 ‘남자라서가‘ 아니라 그냥 ‘그 사람‘이 운전을 잘못한 경우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주차를 이상하게 한‘ 차량의 운전자가 ‘여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그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이라는 종의 문제로 치부된다. - P139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자들의 이런 위압적 태도가 ‘정말로‘ 여성들의 운전 실력을 위축시켜 객관적으로 ‘운전을 못하는 여성 운전자의 사례‘가 늘어난다는 게 문제다(그러면 다시 ‘김 여사‘ 이미지는 재생산된다. 이는 남자들이 여성 운전자를 무시하는 증거자료가 될 것이고 그렇게 악순환은 무한 반복된다). 이런 실험이 있었다. 여성 운전자를 두 집단으로 나누어 운전 실력을 테스트하는데, 한쪽 집단에만 "너는 운전 잘하니까 걱정 마!"라는 격려를 했다. 그런데 이 집단이 결과도 좋았다. 이는 여성들이 일상에서 ‘내가 운전을 잘할 수 있을까‘라는 압박감을 지나치게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 ‘주눅‘이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 P140

지하철 안에서 남자는 계속 옆에 앉아 있는 여자의 허벅지를 더듬었다. 여자는 치마와 검은색 스타킹을 신고 있었고 옆에서 ‘더듬고 있는 것도‘ 모를 정도로 잠에 빠져 있었다. 성추행을 얼마나 오랫동안 했는지, 그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이 광경을 고스란히 휴대폰에 담았고 인터넷에 올라온 영상은 삽시간에 퍼졌다. 유명한 ‘ㅇㅇㅇ역 성추행 사건‘이다. 경찰은 ㅇㅇㅇ역에서 급히 내렸다는 범인을 CCTV 화면을 통해 추적 중이라고 했고 며칠 지나지 않아 남자는 자수한다. 증거자료를 누구나 확보할 수 있는 세상이기에 가능한 쾌거였다. 누구에게나 평등한 인터넷 공간에서 자료가 ‘퍼지는 속도와 범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과거 수천 건의 ‘동일 범죄‘가 단지 스마트폰이 손에 없던 세상이었기에 면죄부를 받았던 게 아니었던가. 여하튼 이렇게 사건이 해결되자 기술 혁신이 민주주의를 확장시켰다는 말들이 나왔다. 그런데 ‘잡을 사람‘을 원칙대로 잡는 걸 민주주의 확장으로 표현하니 좀 그렇다. 오히려 ‘여전히‘ 전혀 변한 것 없는 세상 풍경을 걱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여자가 그 시간에 술 취해 잠이 들어 있는 건 문제다. 스스로 조심해야지‘라는 식의 의견 역시 여지없이 등장했다. "여자들이 옷을 그렇게 입고 다니니까 성추행을 당하지!"라는 칠푼이 같은 인과관계 분석이 칠푼이 그 이상의 논리로 인정받는 걸 여전히 볼 수 있다는 것은 아직도 양성평등 세상으로 가기에는 멀었다는 뜻일 게다. - P153

‘딸바보‘는 슬픈 단어
마지막으로 ‘딸바보‘라는 말이 없다. 나는 최근에야 등장한 ‘딸바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아들바보‘라는 말은 없는데 ‘딸바보‘라는 말은 왜 생긴 걸까? ‘딸‘을 아빠가 사랑하는 건 당연한 것인데, 도대체 지금껏 어떻게 딸을 대했기에 부모가 자기 자식 사랑하는 게 ‘특별해‘ 보일 수 있을까? 이 단어를 보면 지금껏 한국의 여자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고 어떻게 살았는지가 그대로 드러난다. 온갖 편견 속에서 공정치 못한 대우를 받으며 살지 않았겠는가. "나는 술, 담배, 여자를 멀리한다!"고 버젓이 말하는 사람들을 시시때때로 만날 수 있는 세상에서 ‘딸‘을 출산한 부모는 ‘아들‘을 출산한 부모에 비해 그 기쁨이 덜한 게 사실이다. 이 미세한 차이는 딸을 키우면서 고스란히 ‘차별적으로‘ 드러난다. 이런 역사가 있으니 그냥 자기 딸 사랑해놓고 ‘딸바보‘가 될 수 있는 거다. 차별이 애초에 없었던 곳에서는 ‘원래‘ 그런 거지만 애초에 차별이 있었던 곳에서는 이조차 신기할 뿐이다.
이 토론을 하고 며칠이 지나 한 학생이 사진 한 장을 장문의 문자와 함께 전송했다. 마트에서 ‘아빠 쉼터‘를 발견하고 찍은 사진이었다. 내용은 이랬다.
"선생님. 오늘 마트에 갔다가 깜짝 놀라서 찍었어요. 아니 예전에도 있었겠지만 이제야 깜짝 놀라네요. ‘아빠 쉼터‘가 어딘가 어색하다는 생각조차 못 하고 지금껏 살았네요. 장보기를 함께하는 걸 어색해하는 아빠들을 위한 이 세심한 배려가 놀라운 사회랍니다. 아빠와 엄마의 역할이 확연히 구분되어 있지 않고서야 가능했을까요? 저희가 토론 때 상상한 그런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쉼터겠죠?" - P234

"저 남자 담배 피워요"와 "저 여자 담배 피워요"는 문장의 구성 형태는 동일하지만 그 함의는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특정 사람이 어떤 기호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 혹은 백번 양보해도 ‘요즘 세상에 아직도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있다니‘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또 여기에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흡연할 자유를 구속하지 않겠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흡연의 주체가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래서 ‘저 여자 담배 피워요‘라는 문장에는 ‘어떻게 여자가 담배를 피우지?‘라는 질타의 뜻이 들어 있다. 또 이 문장 뒤에는 "요즘 세상 말세다"가 생략되어 있다. - P254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는 이유가 그 일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는 두려움의 발로라는 점을 생각할 떄, 남동생 밥을 챙겨주는 누나의 행동은 여동생 밥을 챙겨주는 것보다 ‘하지 않았을 때의 후폭풍‘이 더 크다는 것을 본인의 삶을 통해 이미 경험했기 떄문 아닐까. 몇 번쯤은 "내가 왜 밥을 차려줘야 되냐"면서 따져보았겠지만 그때마다 "누나로서의 희생정신이 없다", "누나가 되어서 그것도 못해주나"는 등의 소리를 들으면서 졸지에 ‘나쁜 년‘이 되다 보면 나중에는 이게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 자신이 말하는 ‘이유‘에 사회적 공감대가 충분하다는 확신으로 이어진다. 다른 핑계 내지는 거짓말로 모임에서 끝까지 있지 못하는 이유를 밝혀도 되지만, 전혀 그러지 않는다. ‘남동생 밥 챙겨줘야 하는‘ 누나를 막을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모임에서 빠질 명분을 내세울 때 더 유용하다. 이상한, 하지만 강력한 ‘우선순위‘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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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조직 나를 극하는 기운(관성)은 개인의 사적 영역을 제한하는 힘을 갖는다. 그것은 공적 영역, 즉 ‘조직’, ‘사회적 관계’ 등에 해당한다. 그래서 관성의 상징 중에 대표적인 것이 조직과 사회적 관계다. 가장 대표적인 사회적 조직은 ‘직장’이다. 직장은 일을 하고 돈을 버는 곳이므로 재성에 해당하기도 한다. 굳이 구분을 하자면, 재성은 일·성과·재물에 방점이 있고, 관성은 직장 안에서의 규율과 서열·권력·승진 등 공적 관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사주를 해석을 할 때는 이를 명확하게 나누기보다 오행과 함께 전체적인 시야를 가지고 통합하고 분류해 봐야 한다.
관성의 대인 관계도 이런 공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경향이 많다. 비겁의 대인 관계가 사적 영역에서 유지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따라서 관성의 대인 관계는 친분 관계를 기반으로 한 비겁의 대인 관계에 비해 범위가 넓다. 친하게 지내지 않아도 큰 불편 없이 공적으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차이는 비겁의 대인 관계가 수평적인 반면 관성의 관계는 주로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경향이 있다. 조직 안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조직 밖의 사적인 관계에서도 사람들을 거느리고 지배하려는 속성을 이어 간다. 그 대신 많이 퍼주고 챙겨 주는 덕장으로서의 행동이 뒤따른다. - P303

ㅇ명예 관성은 자기의 존재감을 조직 내에서 찾는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감을 고양시키기 위해 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어 한다. 이것이 명예욕과 권력욕이다. 이러한 욕망은 실제로 조직을 이끌어 갈 수 있는 리더십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실제로 관성이 강하면 명예욕과 권력욕을 현실화시킬 수 있다. 사업가는 리더십을 발휘하여 사업적 성취감을 얻을 수 있고, 직장인은 승진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정관은 명예욕을 단계적으로 실현시키는 임명직에 인연이 있고, 편관은 단숨에 확보하려 하는 선출직에 인연이 깊다. 리더는 자신의 감정과 사욕을 제어하고 넓게 볼 수 있어야 하며 사태를 객관화시키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관성이 지나치면 이러한 미덕이 권력적 폭압으로 변질되면서 사람들을 강제적으로 제압하려 한다. 또한 지나친 용기와 우월감은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무시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리더로서의 능력은 떨어지 305 게 된다.
이러한 객기는 편관에서 심한 편인데, 편관의 용맹함은 자칫 일간의 기운을 끊어 버려 횡액을 겪기도 한다. 물론 편관은 횡액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내재하고 있다. 그래서 편관이 득세하면 검찰, 경찰, 군인 등 온갖 사건 사고가 벌어지는 직업군에서 문제해결 능력을 최대치로 발휘할 수 있다. 정관은 비겁을 제어하는 정도가 편관에 비해 약하다. 편관이 호전적인 무관이라면 정관은 공평무사한 문관이라 할 수 있다. 절제와 안정성을 추구한다. 그래서 보수적이고 원리원칙적인 성향으로 행정을 담당하는 관료직에 인연이 많다. 정관의 세력이 강하면 일을 통해 명예를 얻게 되며 직장에서 꾸준히 승진한다. 특히 정관이 강한 데다 사리사욕에 급급하지 않으면 높은 관직을 얻을 가능성이 크다. 관성이 고립되면 통제력 결핍으로 재물을 잃거나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고, 명예나 관직에 집착할 수 있다.
관성은 대의명분에 의해서 움직인다. 개인보다 조직이 더 중요하고, 사적인 의견보다 명분에 더 가치를 둔다. 그래서 관성이 많은 사람을 설득하려면 명분을 내세우는 것이 유리하다. 명분은 허세를 낳기도 한다. 그래서 관성이 강한 사람들은 자기의 의견이 아니라 대중을 대표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며 자기 주장을 내세운다. 그렇게 스스로 대의를 어깨에 짊어진 듯, 세력을 얻은 듯, 허세를 부릴 때도 있다. 허세도 편관 쪽이 더 강하다. 편관이 정관보다 더 권력적이고 담력도 세기 때문에 허세가 더 자연스럽게 나온다.
고전에서는 정관을 귀하게 여겼다. <<삼명통회>>(三命通會)에서는 "정관은 육격(六格)의 우두머리가 되어 일위(一位)만 있어야 하고 많으면 좋지 않다"라고 하였다. 정관은 귀하기 때문에 많아도 좋지 않 306 고 하나 정도만 있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관이 강하면 자기 제어력이 너무 강해지고 자기뿐만 아니라 비겁에 해당하는 친구, 형제, 선후배, (여자의 경우) 시댁식구를 지배하고 싶어 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비겁 육친과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정관도 너무 강하면 그렇다. 그래서 정관이 많으면 편관이 된다고 하는 말도 있다. 그래서 정관의 절제와 안정성이 드러나는 것은 1~2개 정도라고 볼 수 있다. 절제와 안정성이 다 좋다는 건 아니다. 지나침이 흉이 되고 균형감이 미덕이 되었던 시대의 평가 기준에선 그렇다는 얘기다. - P304

그 중 고정석 8자리는 터주대감 원국이고, 나머지는 유동적으로 손님이 바뀌는 자리다. c의 시주 두 자리는 그 중에서도 매우 변화가 심한 자리다. 2시간마다 손님이 바뀌기 때문이다. 지금은 임진시다. 이 시간에 어떤 운명이 어떤 리듬을 탈지 가늠해 볼 수는 있지만 2시간 만에 지나가 버리기 때문에 큰 변수를 짐작하긴 어렵다. 그래도 매일 같은 시간에 찾아오는 시지의 항상성은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대개 일정한 시간에 출근을 하고 일정한 시간에 밥을 먹는다. 그러면 몸은 그 시간에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각인시킨다. 어떤 사람이 매일 9시에 출근을 해서 9시 반에 일을 시작한다고 하자. 아침 9시 반부터 11시 반까지는 사시(巳時)에 해당한다. 이것이 반복되면 몸에서 사화와 ‘일의 시작’이 무의식적으로 각인된다. 그래서 사월(巳月)이나 사(巳)가 들어간 해와 대운에는 왠지 어떤 일을 시작해야 할 것 같은 무의식적 요구가 몸에서 일어난다. 육친에 상관없이 일어나긴 하지만 육친에 따라 양태는 조금씩 다를 수 있다. 반복되는 것은 몸에 새겨진다. 그 점이 우리를 얽매이게 할 때도 있지만, 잘 활용하면 좋은 습관을 몸에 각인시키는 효과를 얻게 되기도 한다. 그것을 일정한 시간에 시도한다면 더 좋은 효과를 낼 수 있다. 예컨대 인성에 320 해당하는 시지에 책을 본다거나 관성의 시지에 회의를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시지를 활용하는 방법 중의 하나다.
c의 일주는 하루에 한 번씩 바뀐다. 이것을 두고 일진(日辰) 혹은 일운(日運)이라 한다. 흔히 오늘 일진이 어떻다고 할 때의 하루운을 말한다. 일진은 사주 공부를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잘 이용한다. 흔하게 쓰는 방법은 육친과 합충을 이용하는 것이다. 예컨대 앞의 청년에게 오늘 병오(丙午)일은 재성이 들어오는 날이다. 이 청년은 현재 동물병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재성이 들어오니 매출이나 할 일이 늘어날 것이라 예측할 수도 있고,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여성과의 인연이 생길 수도 있고 그냥 여성 손님이 많아진다고 볼 수도 있다. 듣자니 어제 소개팅을 했다고 한다. 어제는 을사(乙巳)일이니까 어제도 재성이 들어온 날이다. 그 인연이 오늘도 계속 이어질지 아니면 다른 재성의 인연 조건이 생길지는 모르는 일이다. 특히 천간에 임병충(壬丙冲)이 있어서 재성과 관련된 마음의 동요와 갈등, 욕망의 전변 등을 겪게 될 수도 있으나 그것도 어떻게 일어날지는 모른다. 그가 연애에 관심을 두고 있다면 그런 방향으로 해석하거나 그런 선택을 하면 된다. 꼭 맞히려고 하지 말고 욕망이 일어나는 방향으로 진단과 처방을 내리면 된다.
c의 월주는 한 달에 한 번씩 바뀐다. 시주와 일주에 비해선 꽤 긴 시간이다. 그만큼 월운(月運)의 영향력은 크다. 사람들은 월별로 운의 느낌을 가늠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이번 달엔 유난히 사건이 많았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리고 월지는 시지처럼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있어서 1년을 주기로 반복적인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특정 달이나 계절에 몸이 안 좋아지는 경우가 그런 예에 속한다. - P319

c의 연주는 1년을 지속하는 운이기 때문에 c의 네 운 중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보통 연운(年運) 혹은 세운(歲運)이라고 부른다. 정월에 사주를 보러 가는 것도 이 세운을 보고 한 해를 가늠해보기 위해서다. 한 해의 기운을 잘 살펴서 일과 공부, 대인 관계, 건강 등의 운을 살필 수 있다. 세운은 특히 결혼과 연애의 운에서 체감되는 경우가 많다. 세운으로 배우자의 운이 오면 결혼, 연애, 때론 이별의 사건이 생길 가능성이 높아진다. 즉, 남성은 재성, 여성은 관성이나 식상운이 왔을 때, 남녀 관계의 사건들이 생긴다. 특히 20세에서 50세 사이에서 주로 일어나며, 이 나이를 벗어나거나 이성에 별 관심이 없으면 세운으로 그런 운이 와도 별 일이 없다.
b의 대운은 10년마다 한 번씩 바뀌는 운이다. 위의 사주에서 원국은 10년 동안 정사(丁巳)라는 간지와 함께한다. 10년을 한 버스에서 같이 지낸다고 생각하면 거의 원국과 다를 바 없는 세력을 얻게 된다. 운명에서 큰 전환점은 주로 대운이 바뀌는 시점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고, 대운이 크게 바뀌면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인생의 큰 리듬을 볼 때는 대운의 흐름을 보면 된다. 대운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리고 그 흐름에 따라 운명이 변해 갈 것인지, 여러 가지 경우를 시뮬레이션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물론 구체적으로 맞힐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하지만 그런 모의 예측이 문득 지금의 선택에 어떤 힌트를 주기도 한다. 예측은 항상 그렇게 삶을 추동하고 새로운 선택을 이끄는 방향으로 사용하는 것이 좋다. 예측으로 인해 두려움과 불안이 생긴다면 차라리 배우지 않는 것만 못하다. - P321

그런데 대운은 정확하게 그 나이에 오는 것이 아니라 조금 빨리 시작된다. 그래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만일 50세인 사람의 대운이 5대운이라면 약 54세나 53세 혹은 그보다 좀더 일찍 대운의 기미가 찾아온다. 사주가 양적일 경우엔 좀 더 일찍 다음 대운의 기운이 기미가 있다. -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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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친에서 대음양의 조화
육친은 일간과 다른 인자들과의 힘의 방향이나 행위를 분석하는 수단이다. 이미 설명했듯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음양의 화합이니, 우선 육친들끼리 크게 음양의 화합을 이루고 있는지를 반드시 살펴봐야 한다.
위의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식상과 인성은 일간과 직접 기운을 주고받는 관계로 연결되어 있어 아주 중요하니, 이것을 잘 활용해야 한다. 또한 일간의 음양 운동은 일간이 재성을 극하는 방향과 관성이 일간을 극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니, 재성과 관성이 나와 가장 활발하게 89 움직이게 하는 연결 통로로 반드시 인성과 식상이 있어야 좋다. 명리학에서 흔히 언급되는 식상관생재食傷官生財와 관인상생官印相生이라는 말이 이 때문에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관이 인을 낳는 관인상생이 아무리 잘 연결되어 있을지라도 관이 식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음양 운동이 활발하지 않아 제대로 작용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식상관이 재를 생하는 식상관생재가 아무리 훌륭한 구조를 갖추고 있을지라도 재가 인성과 음양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역시 음양 운동이 위축되어 활기차게 움직이지 않는다. 조직 생활에서는 윗사람들이나 남들과의 관계가 중요하니 자신을 드러내는 식상이 필요하고, 사업에서는 생산 시설을 넓혀 상품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한 문서로 큰 재산을 보관해야 하니 필요에 따라 인성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간(음)을 기준으로 크게 음양 관계에 있는 것이 재(양)와 관(토)이고, 일간을 제외한 상태에서 다시 재와 관을 기준으로 크게 음양 관계에 있는 것이 식상(양)과 인성(음)이다. 그러니 어떤 간지이든 사주 자체 곧 원국에서 음양 관계에 있는 것이 그 인자를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게 하는 것임을 염두에 두고 잊지 말자. 다만 이런 설명은 초보자에게는 아직 이해되기 어려운 내용이니, 사주가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면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길 바란다. - P88

대음양이 다르고 소음양까지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합이 발생한다. 곧 위로 솟아오르는 갑목은 수렴을 준비하는 기토와 운동 방향이 다르고 음양이 맞아 합을 한다는 것이다. 을목과 경금으로 말하면, 분 96 출 운동이 다소 약해져 옆으로 휘는 을목의 양운동이 밑으로 꺾여 내려오는 경금의 음운동과 방향이 반대이지만 정면으로 서로 부딪히지 않으니, 음인 을목이 양인 경금을 남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서로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음간의 받아들이는 특성과 양간의 뻗어나가는 힘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야 합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런 관계를 육친으로 보면 하나의 천간이 정재나 정관을 만나 아름답게 합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 P95

천간에서 단순히 서로 부딪힐 때, 경·신·임·계가 갑·을·병·정을 힘의 크기로 이긴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옆에서 도와주는 것이 있거나 뿌리의 역할을 하는 지지가 더 강하게 도와줄 경우에는 그 힘을 다시 계산해서 판단해야 한다.
사주 자체에 충이 많으면 부딪히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라고 볼 수 있다. 운에서 들어온 간지가 사주에 있는 간지를 충하면 그것이 사라질 수 있으니, 육친에 따라 명예나 재물, 자식, 배우자 등이 다치거나 없어질 수 있다. 그렇다고 꼭 나쁘게만 볼 것은 아니니, 가령 나를 괴롭히는 무엇을 충이 와서 제거했다면 오히려 잘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니, 섣부른 판단은 자제해야 한다. - P98

그다음에 배워야 할 것은 사주의 구조를 파악하는 것인데 별로 어렵지 않다. 이를 테면 임수壬水가 있을 때, 그것이 신금申金 위에 있느냐 아니면 진토辰土 위에 있느냐 등의 구조를 따지는 것이다. 곧 임수가 자신을 탄생시키는 신금 위에 임신壬申으로 있을 때와 임수가 묘지나 창고로 들어가는 진토辰土 위에 임진壬辰으로 있을 때와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신금 위의 임수는 힘이 세고, 진토 위의 임수는 힘이 없다고 보면 되는데, 벌써부터 이것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먼저 앞에서 육친 관계를 익혀야 하는데, 을목에게는 병화가 상관이고 병화에게는 을목이 정인이라는 것이 바로 머리에 114 떠오르지 않아서는 안 되니 충분히 연습하길 바란다. - P113

충은 반대 방향으로 운동하는 기운이 서로 부딪힌 것이니, 이런 기운이 운에서 올 때 정면으로 부딪히지 않으려면 태어난 나라와 기운이 다른 먼 외국에 다녀오는 것이 좋다. 원국에 있는 경우는 삶의 환경에서 두 기운이 서로 부딪히면서 떠미는 형태다. 이 경우에는 왔다갔다 하는 직업을 택하는 등 삶의 환경을 역마로 사용하는 것이 좋으니 자신의 선천적 특성을 그대로 발휘하는 것이다.
사주 원국에 충이 많으면 서로 부딪히는 원초적인 특성 때문에 성격이 까칠하다고 보면 되고, 합이 많으면 서로 합하는 원초적인 특성 때문에 성격이 좋다고 보면 된다. 이어서 설명할 형이나 파·해·원진이 많아도 성격이 좋지 않다.
충과 합이 반반씩 있을 경우에는 인간관계에 아주 능숙한 사람으로 보면 될 것이다. 부딪히는 성격과 합하는 성격이 동시에 있으니, 때려 놓고 달래거나 달래면서 때릴 수 있다. 정치적인 속성이 뛰어난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한편으로 협박을 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화해의 표시를 보내기도 하니, 충과 합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동시에 사용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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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라고 하는, 운명이라고 하는 이 비의학(秘義學)에 접근하는 통로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 필자도 여러 가지 길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데만 줄잡아 20년은 걸린 것 같다. 이 길 저 길 가서 아니면 되돌아오고 시행착오를 겪느라고 수업료도 상당히 지불했다.
그 길을 아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첫째, 자신의 꿈이다. 중요한 사건 사고는 자신이나 또는 주변 가족의 꿈에 미리 예시되는 경우가 많다. 둘째, 접신(接神)된 샤먼(무당)을 만나 아는 방법이다. 셋째, 명리학 또는 주역을 공부해 아는 방법이다. 넷째, 정신수양을 많이 한 스승을 만나 아는 방법이다. 이 가운데 역술 전문가들을 찾아가서 자신의 팔자를 감정 받아보는 방법이 가장 대중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 P418

팔자를 바꾸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스승을 만나는 경우다. 어떻게 해야 스승을 만날 수 있는 것인가? ‘나에게는 이 시점에서 스승이 정말 필요하다’는 간절한 생각을 항상 품고 있어야 한다. 간절한 생각이 없으면 옆에 스승이 있어도 모른다. 제자가 준비가 돼 있을 때만 스승이 나타난다. 준비라는 것은 충고를 받아들일 만큼의 자기성찰과 겸허한 마음, 그리고 자기가 무엇이 부족한지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래야 스승의 지도를 수용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튕겨버린다. - P420

팔자 고치는 여섯 가지 방법

인도철학에서 오랜 시간 논쟁을 했던 주제가 결정론이다. ‘운명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가, 아니면 중간에 바꿀 수 있는가’이다. 바꿀 수 없다는 입장이 인중유과(因中有果)론이고 바꿀 수 있다는 입장이 인중무과(因中無果)론이다.
인중유과론의 주장은 원인(因) 가운데 이미 결과가 내장돼 있다는 것이다. 어떤 행위를 하는 순간에 이미 그 결과가 정해진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좋은 행위를 하면 나중에 좋은 결과가 오고, 나쁜 행위를 하면 언젠가는 거기에 상응하는 나쁜 결과가 온다. 완전히 결정론이다. 그 결정의 배후에는 원인이 문제가 된다고 보는 원인중시론이 깔려 있다. 애당초 행동을 잘해야 한다.
인중무과는 입장이 다르다. 원인 가운데 결과는 없다는 것이다. 중간에 바꿀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인중무과의 입장은 인간의 자유의지나 노력에 의해 팔자를 바꿀 수 있다고 본다. 유과론과 무과론이 박터지게 싸우다가 타협을 본 중재안이 7.3론이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 그것이다. 결정된 요소가 70퍼센트, 노력이 30퍼센트라는 설이다.
필자의 생각은 팔자론에 기운다. 팔자가 정해져 있다. 어지간해서는 바꿀 수 없다. 자기 팔자대로 산다. 그래서 9.1론을 생각한다. 그렇다면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는가? 10퍼센트는 있다. 그 10퍼센트 방법이 무엇인가?
첫째는 적선(積善)이다. 서울 경찰청 근방의 동네 이름이 적선동 427 (積善洞)이다. 참 좋은 동네 이름이다. 다른 사람의 가슴에 저금을 들어놓는 것이 적선이다. 고아원에 돈을 갖다주는 것도 적선이지만, ‘자기가 죽이고 싶은 사람을 죽이지 않고 용서해주는 것’이 좀 더 효과 높은 적선이라고 한다. 재물로 하는 적선도 있지만, 마음으로 배려해주는 것도 적선이다. 평소에 성질 안 내는 것도 적선이고, 고통을 들어주는 것도 적선이다.
적선이라는 것은 주변 사람들이 자기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갖도록 투자하는 이치와 같다. 주변이 우호적인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으면 그 사람은 덕(德)이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덕이 있다는 것은 자기 둘레에 우호적인 사람의 층이 두껍게 쌓여 있는 것을 말한다. 외호(外護)가 두텁다는 말이다.
둘째는 스승을 만나야 한다. 스승이 있고 없고는 결정적인 순간에 차이가 난다. 인생의 중요 고비에서 이쪽인가 저쪽인가를 고민할 때 상의해주고 해법을 제시해줄 수 있는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대단한 인연이자 복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스승이 없었기 때문에 광주 5·18 민주화운동에서 사람이 죽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때 스승이 있었더라면 ‘지금 가만히 있어도 정권은 네 손에 들어오게 된다’는 충고를 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1980년 광주의 비극은 없었다고 여겨진다. 스승이 없으니까 자기 맘대로 서두르다가 천추에 씻지 못할 불명예를 남겼다.
만약에 이성계를 도왔던 무학대사 같은 인물이 주변에 있었더라면 전두환 전 대통령이 그런 섣부른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 428 승은 제자가 찾아나서야 발견된다. ‘스승이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해야만 스승이 생기는 법이다. 그래서 옛날 도인들은 스승 좀 만나게 해달라고 전국의 명산을 돌아다니며 산신(山神) 기도를 했다고 전해진다.
셋째는 독서다. 독서는 역사적으로 뛰어난 인물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이다. 운이 나쁠 때는 밖에 나가지 말아야 한다. 운이 좋지 않을 때 밖에 나가면 대부분 재수 없는 사람을 만나기 쉽다. 운이 좋을때는 길바닥에서도 자기 도와주는 사람을 만나지만, 운이 좋지 않을 때는 만나는 사람마다 사기꾼이기 쉽다. 이때는 집 밖을 나가지 말아야 한다. 집에서 독서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다.
1970년대 정보부장을 지내며 권세를 휘둘렀던 이후락 씨. 이후락 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죽고 난 뒤에 자기 시대가 끝났음을 절감하고 이천의 도자기 공장으로 숨었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만약에 국회의원을 해야 되겠다고 밖으로 나왔다면 노후가 편치 못했을 것이다. 이후락 씨는 자기가 잘나가던 전성기 때에도 여러 고승이나 도사들을 찾아다니며 수시로 앞날 운세에 대해 자문했다. "내 운이 언제까지입니까?" 그런 다음에 운이 갔다고 여겨지니까, 이천 도자기 공장에서 도자기나 만들든지 아니면 고금의 역사책을 몽땅 갖다놓고 봤을 것이다. 권력을 누렸지만 누구에게 크게 보복당하지도 않고 비교적 천수를 누리며 고향에서 죽었다. 이것도 지혜다. - P426

나를 알아야 삶이 편하다

넷째는 기도다. 하루에 한 시간 씩 기도, 명상, 참선을 하는 것도 팔자를 바꾸는 방법이다. 브레이크가 없으면 부딪히기 십상이다. 하루에 한 시간씩 브레이크 밟고 자기를 되돌아보면 아무래도 실수가 적어진다. 기도가 어려우면 한 시간씩 운동을 하는 것도 방법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중년에 운동하지 않으면 십중팔구 병에 걸리게 된다. 필자는 아주 바쁠 때는 음식점 방석에서라도 앉아 몇 가지 요가 자세를 취한다. 옆에서 보든지 말든지 상관 안 한다. 쟁기 자세와 후굴 자세, 그리고 파스치모타나 아사나(전굴 자세)를 취한다. 몸이 시원해진다. 식전에 10분이라도 한다.
다섯째는 명당을 써야 한다. 명당에는 음택(陰宅)과 양택(陽宅)이 있다. 음택은 묏자리고 양택은 집터다. 시대가 바뀌어서 음택은 쓰기가 어렵게 됐다. 화장이 대세다. 화장을 하면 무해무득(無害無得)이다. 왜냐하면 뼈(骨)를 불에 태워버리면 뼈에 붙어 있던 백(魄)이 사라진다. 혼(魂)은 사람이 죽기 일주일 전쯤에 하늘로 올라간다. 옛날 어른들의 ‘불 나간다’는 말은 혼불이 나가는 모습을 보고 한 말이다. 그 대신 백은 뼈에 붙어서 묏자리 속에 보존되는데, 이 뼈를 매개체로 해서 망자(亡者)와 후손이 교신을 한다.
명당에 들어가면 "나 잘 있다 오버. 너 사업 잘돼라 오버"로 무전을 때린다. 만약 물이 있는 묏자리에 들어가면 "나 물속에서 물 먹고 있다. 너 부도나라 오버, 너 교통사고 나라 오버"로 무전을 때린다. 화 430 장을 해버리면 이 무전기를 폭파해버리는 셈이 된다. 골치 아픈 전화는 받지 않는 것이 최고다. 그래서 화장을 하면 해도 없고 득도 없는 것이다.
집터(양택)가 명당이면 잠자리가 편안하다. ‘백(百)커피가 불여일숙(不如一宿)’이라는 말도 있다. 백 번 커피 마시는 것보다 한 번 잠 자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집터도 마찬가지다. 잠을 자봐서 숙면이 되고 편안하면 명당이다. 이런 명당에서 살아야 승진도 하고 돈도 생긴다. 우선 명당에서 살면 건강해지기 때문이다. 그 집터가 명당인지 아닌지를 잠을 자보기 전에 아는 방법은 없는가? 있다. 꿈이다.
그 집터를 보고 와서 다음 날 꿈을 꿨는데, 큰 구렁이가 꿈틀거리 431 는 꿈을 꿨다든지, 조상이 나타나 열쇠를 줬다든지 하는 꿈을 꾸는 수가 있다. 이런 집은 자기가 들어가서 살아도 좋다는 뜻이다. 인연이 있다. 명당이라는 판단을 해도 좋다. 이런 영몽(靈夢)은 대개 여자들이 꾼다. 와이프가 꿈도 못 꾸면 남편이 큰 사업을 하기 힘들다.
팔자를 바꾸는 여섯 번째 방법은 자기 사주팔자를 아는 것이다. 내 팔자가 밴텀급인지, 웰터급인지, 미들급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면 크게 헛손질을 하지 않는다. 내 팔자는 관운이 있으니까 돈은 적게 벌더라도 조직생활을 해야겠구나, 내 팔자는 물이 많으니까 요식업이나 유흥업을 해야겠구나 하는 것을 대강 알고 있으면 아무래도 고생을 덜 한다.
이상의 여섯 가지가 지난 20년 동안 필자가 고금의 문헌들을 보고 주변 사례들을 목격하면서 정리한 팔자 바꾸는 방법이다. - P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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