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으로 용어 하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④ ‘心學‘이라는 용어를 보자. 이 용어는 주로 ‘양명학‘을 가리키는데 쓴다. 이에 대해 주자학은 ‘理의 탐구‘를 특징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23 理學으로 불린다. 그렇지만 이 대비적 규정은 맥락적인 것이지, 자체 명확하거나 절대적인 것일 수 없다. 지금 보듯이 진덕수는, 그리고 그 스승을 따라 ‘이 학문‘을 규정하는 유약우도 ‘주자학‘을 ‘心學‘으로 정위하고 있는 것을 보라, 서산 진덕수는 贊에서, 舜이 禹에게 전수한 16글자를 ‘만세 心學의 연원‘이라고 말하고 있고, 유약우 또한 "스승 진덕수의 心學이 주자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수원지는 북송의 염락과 공맹의 원본유학에 두고 있다"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물론, 지금 여기 언급된 心學이 곧 주자학의 배타적 자기정위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주자학이 心學을 자신의 학문으로 적극 규정하고 있다는 점을 확실히 새겨둘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마음의 수련‘을 둘러싼 다양한 방법과 체계들을 가리킬 것이나, 주자학은 자신들의 체계가 그것을 새롭게 제창하고 있으며, 아울러 그 정통적 중심임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요컨대 ‘心學‘은 주자학의 자부가 깔려 있는말이다. 어쨌건 이 곡절을 감안할 때, 心學을 양명학에 독점시키는 것은 아무래도 부당해 보인다.
이 정황에서, 나는 엉뚱하게도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心學‘이라는 이름은 양명학보다 주자학에 더 적당한 개념이 아닐까 하는··· 지금 보듯 주자학은 인심과 도심 사이의 갈등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것에 대한 眞積力久, 오랜 훈련을 한순간의 방심도 없이 촉구하는 점에서 진정 心學의 이름에 어울리지 않을까. 아울러 人心의 위태로움을 살피고 제어하는 克復의 길과, 자신 속의 은밀한 초월성을 보존하고 함양해나가는 두 갈래의 길을 제시하고, 그 방면의 실제 훈련을 다양하고도 치밀하게 구축해놓은 점에서도 역시 심학의 이름에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이에 비해, 양명학은 어떤가. 양명학은 마음의 내적 갈등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마음의 여러 측면을 인식론적, 정동적, 형이상학적으 24 로 각개 다차원적으로 분석하지 않으며, 그에 걸맞은 다면적 수행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어느 편이냐 하면, 양명학은 마음이란 오직 하나이며, 분열되지 않는 전체로 ‘이미 완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工夫는 이 본래의 양지, 그 빛과 힘을 유지하고 발현되도록 유의하는 일에 바쳐진다. 그 각성의 유지 하에 나와 만물은 구분되지 않고, 모종의 통일체를 형성한다. 여기 ‘마음‘은 자체 동일성을 잃고 萬物一體, 사물 속에 —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 동화된다. 요컨대 양명학에 있어 마음은 궁극적으로 문제적이지 않으며, 그렇기에 결국 心學이란 이름에 걸맞은 문제와 노력이 상세하거나 체계화되어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마음이 자체의 문제성을 잃고 사물과 일체가 되는 점에서 나는 양명학이 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양명학은 인간을 자연과 동형화시켰고, 이 점에서 오히려 物學이라는 이름이 더 적절할 수도 있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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