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유전의 메시지의 복제에 잘못을 일으키거나 그것을 가능케 하는 사건과 그 잘못의 기능적 결과 사이에는 앞서의 예와 마찬가지로 전혀 아무런 관계도 없다. 기능적 영향은 변화를 입은 단백질의 구조와 그 실제상의 역할이라든지, 그 단백질이 일으키는 상호작용이라든지 또는 그 단백질이 촉매가 되는 반응 등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들은 모두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사건 자체와도, 그 근인 또는 원인과도 전혀 무관하다.
마지막으로 불확정성을 일으키는 더욱 근본적인 원천이 미시적 레벨에 존재하는데, 이것은 물질 자체의 양자적 구조에 기인하는 것이다. 돌연변이는 그 자체로서는 미시적·양자적 사건이며 따라서 이 사건에는 불확정성 원리가 적용된다. 요컨대 그것은 본성 자체가 본질적으로 예견이 불가능한 사건인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현대의 최대 물리학자 몇 사람에게는 불확정성 원리가 전면적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신이 주사위놀이를 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어떤 학파는 그것을 단지 조작적인 개념으로 인정하고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하였다. 그러나 양자론을 보다 ‘정묘‘한 구조ㅡ불확정성이 남을 여지가 없는ㅡ로 바꿔놓으려는 노력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 버리고, 오늘날에는 이 원리가 언젠가는 자기들의 학문에서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고 믿는 물리학자란 거의 없다.
아무튼 여기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비록 불확정성 원리가 언젠가는 포기되어야 한다 하더라도 DNA 중의 누클레오티드 배열의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결정론적 과정(그것이 아무리 완전한 것일지라도)과 단백질의 상호작용이라는 레벨에서의 영향을 일으키는 결정론적 과정 사이에는 ‘완전히 우연적인 일치‘ ㅡ앞에서 미장이와 의사의 우화로 정의한 의미에 있어서의ㅡ 밖에 보이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여전히 ‘본질적‘ 우연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물론 라플라스의 우주로 되돌아가고자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거기서는 우연이라는 말의 정의조차도 찾아볼 수 없으며, 그 의사가 미장이의 쇠망치에 맞아 죽는 것은 천지개벽 이래로 설정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 P149

그러한 것을 합쳐 현재의 약 삼십억에 이르는 인류는 각 세대마다 천억 내지 일조의 돌연변이를 일으키고 있다. 내가 이 숫자를 드는 이유는 어떤 생물의 유전정보가 우연히 변화하는 가능성이 얼마나 큰 것인가에 대해서 추측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복제기구는 매우 엄격하게 또한 열심히 자기 보존을 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이다. - P157

우주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사건 중에서 어떤 특정한 사건이 생길 선험적인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그러나 우주는 실재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확률이(그것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거의 제로였던 사건도 확실히 일어나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생명이 지구상에서 단 한 번만 출현하였다는 것과 생명이 태어나기 이전에는 출현할 확률이 거의 제로였다는 것을 긍정할 권리도, 부정할 권리도 우리에게는 없다.
이 관념은 단지 과학도로서의 생물학자에게만 불유쾌한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현재의 우주 속에 실재하는 모든 것이 원초에서 미래 영겁에 걸친 필연적인 존재라고 믿는 경향이 있는데, 위에서 말한 관념은 그것과 상충되는 것이다. 우리는 실로 강렬한 이 숙명관에 대해서 항상 경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현대 과학은 일체의 내재성을 무시한다. 운명은 그것이 만들어짐에 따라서 기록되는 것이지 사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생물권에서 상징적 전달이라는 논리적 체계를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종인 인류가 출현하기 이전에도 우리의 숙명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인류의 출현이라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유일무이한 사건이었으므로 우리는 일체의 인간중심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생명 자체의 출현과 마찬가지로 인류의 출현도 유일무이한 사건이었다는 것은, 그것이 나타나기 이전에는 그 출현의 확률이 거의 제로였기 때문이다. 우주는 생물을 잉태하고 있지 않았으며, 생물권도 인류를 잉태하고 있지는 않았었다. 우리가 선택된 기회는 몬테카를로 도박장에서 딸 수 있는 기회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10억 프랑을 따가지고 망연히 서 있는 인간처럼 우리가 자기 자신의 이상스러움에 당혹하고 있다 해도 조금도 놀라울 게 없다. - P183

오늘날에도 아직 일부의 동물 행동학자는 동물의 행동 제 요소는 선천적인 것이거나 아니면 학습한 것 중의 하나며, 이 둘은 서로 다른 쪽을 배제한다는 생각을 고집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는 로렌츠가 철저히 논증하고 있다. 경험에 의해서 습득된 요소가 행동 속에 보일 경우에도 그것은 어떤 프로그램에 따라서 습득된 것이며 이 프로그램은 선천적, 즉 유전적으로 결정된 것이다. 프로그램의 구조가 학습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인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학습이라는 것도 종의 유전적 유산으로서 미리 만들어진 ‘형태‘속에 기입되어 있는 것이다. 유아가 말을 처음으로 익히는 과정도 이와 같이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제 7장 참고). - P192

그러나 어떤 매우 중요한 의미에서, 19세기의 위대한 경험론자는 과오가 없었다. 꿀벌의 기계적인 행동이라든지 인간 인식의 선천적인 구조라든지, 유전적 선천성도 포함하여, 생물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경험에서 유래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대마다 되풀이되는 하나하나의 개체의 경험에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의 도상 전체에 걸친 종의 모든 조상에 의하여 축적된 경험에 유래하는 것이다. 단지 우연에서 이루어진 이 경험만이 그리고 도태에 의하여 나쁜 점이 제거된 그 무수한 시도만이 다른 기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독특한 기능에 적응한 중추신경계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뇌에 관하여 말하자면 감각 세계에 대하여 생물종의 작용에 적합한 표상을 부여하고, 그 자체는 쓸모 없는 직접적인 경험의 데이터를 유효하게 분류하기 위한 구조를 제공하고, 또한 인간의 경우에는 결과를 예견하여 행동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주관적으로 경험을 모시(본떠서 시험함)하는 데 적합한 계로서 형성된 것이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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