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두울 것이요,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울 것이다.

공구는 여기에서 두 가지 공부 방법, 즉 ‘배움’과 ‘생각함’(思) 중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 일어나는 문제를 걱정하여 그 둘의 조화를 강조했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 없이 선생이나 선 141 배들이 알려 주는 내용을 받아들이기만 하고 스스로 그것을 검토하거나 반성해 보지 않는다면, 표면적인 사실은 알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이면의 원리는 알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자기 멋대로 세상의 이치를 생각하기만 하고 선생이나 선배들이 이미 이루어 놓은 성과들을 간과한다면, 완전히 독불장군이 되어서 자기만 옳다고 하는 옹고집 주관주의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배들의 성과를 ‘배우고’ 또 그것을 ‘검토하는’ 두 과정은 반드시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만일 궁극적으로 그 둘의 우선순위를 결정한다면, 역시 ‘배움’이 먼저이고 중요하다. 그래서 공구는 "내 일찍이 온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밤새 잠도 자지 않고서 생각을 했었는데, 아무 소득이 없었다. 그러니 역시 생각만 하느니 차라리 배우는 것이 낫다"고 말했던 것이다. 배우지 않는다면 무엇을 검토할 수 있겠는가? 계발은 자극을 받아야만 가능한 것이다. 배움은 모든 것의 시작이다. - P140

옛날에는 어른을 찾아뵐 때 반드시 폐백을 드렸다. 그중에서 가장 낮은 단계의 폐백이 바로 ‘말린 육포 열 개를 바치는’ 것이었다.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공구는 일단 학생이 찾아와 배움을 청하기만 하면 받아들이지 않은 적이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경제적인 문제나 형식적인 문제는 중요한 것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배움을 추구하는 열망이나 자세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했다. 공구가 학생에게 기본적으로 요구하는 태도는 늘 목마른 듯 배움을 갈망하고, 배운 것을 익히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래서 학생 스스로 어떤 문제를 발견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 애쓰는 모습을 보여야만 가르침을 주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도움을 주지 않았다. 도움을 주려고 해도 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선가에서 전해 오는 고사 ‘줄탁동시’가 바로 이런 의미이기도 하다. 병아리가 안에서 달걀을 부수고 나오려고 몸부림을 칠 때 어미 닭이 밖에서 한 번 쪼아 주면 달걀이 쫙 갈라지는 것처럼, 먼저 학생이 간절하게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 애를 써야만 선생이 그를 도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학생이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해결하려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선생은 단지 그를 계발시킬 뿐이다. - P158

선생과 학생이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에서 또 다른 중요 원칙은 ‘중용’과 ‘인재시교’이다. 먼저 중용이란 양 끝단의 중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음을 뜻하며, 그래서 다른 말로 그 시기에 적절함을 뜻하는 ‘시중’이라고도 한다.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공구의 유명한 명제가 바로 이런 중용의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한다. 그리고 공구는 이런 중용의 원리에 따라 학생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너무 진취적인 학생은 좀 자숙하도록 유도하고 너무 위축되는 학생은 좀 더 적극적일 수 있도록 지도했다. 그래서 "자로가 ‘들으면 곧바로 그것을 실행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공구는 ‘부형이 계신데 어떻게 들었다고 곧바로 그것을 실행하겠는가?’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염유가 ‘들으면 곧바로 그것을 실행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공구는 ‘들으면 곧바로 실행해야지’라고 대답했다. 공서화가 ‘…… 제가 의문이 생겨서 감히 묻습니다’라고 하자, 공구는 161 ‘염유는 물러나기에 나아가게 한 것이요, 자로는 다른 사람을 아우르기에 물러나게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모든 훌륭한 선생의 특징이자 참으로 어려운 교육방법이 바로 이런 ‘인재시교’가 아닐 수 없다. - P160

세 사람이 길을 간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내 선생이 있다. 그 훌륭한 점을 골라 따르고 좋지 못한 점은 가려내어 (그와 같은 나의) 잘못을 고친다.​ - P161

처음 이 책을 쓰기로 계획할 당시, 나는 이 작업이 끝난 후의 후련함을 기대했었다. 그렇지만 이제 편집이 다 되어가는 이 순간에도 후련함은 거의 느끼지 못하겠고, 오히려 약간의 가슴 답답함을 느낀다. 왜일까? 비록 적은 분량이지만, 나는 공자철학의 핵심에 대해 최선의 설명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이 가슴의 답답함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첫째, 내 스스로 고백했듯이 유학의 순진함 혹은 비애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하는 내 무력감 때문일 것이다. 물론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연구를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나뿐만이 아니라 현재까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그 해결책이 온전히 제시된 적이 없다. 정말 그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둘째, 기실 이 225 런 유학 내부의 문제는 20세기에 대만과 홍콩에서 주로 활동하던 소위 ‘현대신유가’라는 중국철학자들에 의해 이미 ‘신외왕’으로 파악되고 그 해결이 모색되던 문제였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현대신유가’가 해결해야 했던 문제였고 또한 그들의 임무이기도 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한다면 그것은 나의, 그리고 우리 즉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심각하게 논의될 철학문제가 아니다. 철학이란 자신의 문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근본적인 작업이지 않겠는가? 물론 위에서 말한 유학의 문제도 우리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문제는 ‘현대신유가’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 같은 정도의 강도로 절박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말 그대로 유비쿼터스의 시대, 그리고 무한경쟁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에 따라 이제 우리의 문제는 스피디한 현실에서뿐만 아니라 가상의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정황들까지 온전히 파악하고 판단하며 평가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난 세기의 숙제도 아직 풀지 못했는데, 지금의 숙제는 더욱 무겁기만 하다. 가슴이 답답하다.
그러나 희망을 버리지는 않는다. 답답하다고 느끼기 때문 226 에, 우리는 분명 그 답답함을 벗어나려 노력할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비슷한 답답함을 느끼는 도반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함께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다음에 다시 독자들과 만나게 될 때에는 더 이상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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