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 원리는 이 책을 이해하고 암기하는 순간 바로 익힐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사주를 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니, 그것은 사주의 여러 가지 원리가 머릿속에서 다양하게 한꺼번에 종합되면서 응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론 다른 학문을 하는 분들도 그렇겠지만 특히 명리학을 하는 사람들은 수도승처럼 생활을 깨끗하고 맑게 해야 한다.
명리학은 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한 운명을 해석하는 일이다. 때문에 그 책임이 막중하여 지금까지도 인격이 갖추어진 사람이 아니면 전해 주지 않아야 하는 비인부전非人不傳의 학문으로 여겨진다. 남의 인생을 읽고는 그것을 빌미로 금품을 갈취하거나 속이는 일 등의 나쁜 일에 명리를 악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189

사주는 사람의 선천적인 에너지장을 나타내니 운명은 거의 대부분 그대로 흘러간다고 보면 된다. - P198

화기가 많고 강하니 성격 역시 불처럼 급하다. - P199

공망은 그 작용이 반감되기 때문에 - P200

이쯤하여 혹시 사주에 의해 그 사람의 인생이 이미 결정되었다고 보는 독자가 있다면 꼭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음양오행의 방향은 분명히 정해져 있지만 세세하게 사주 인자를 다르게 사용함으로써 전혀 다른 길을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굳센 의지를 가지고 영혼을 순화시키려고 노력하지 않고 오행의 기운에 그대로 휩쓸려 쉽게 살게 되니, 술사는 가능성이 많은 방향으로 사주를 풀이하여 단지 그 사람의 삶을 맞추는 것일 뿐이다. 앞의 사주도 열기를 해소하기 위해 명예에 뜻을 두고 열심히 노력하며 살 수도 있고, 잘못하여 관을 쾌락의 도구로 나쁘게 사용할 수도 있으니, 그 운명이 어떻게 결정되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훌륭한 인생의 목표를 정해 놓고 인내하며 살면, 사주 안의 기질에 201 끌려가지 않고 다른 길로 가게 되어 일반적인 사주 풀이로는 그 인생을 추측할 수 없다. 그러니 운명이 꼭 정해졌다고만 볼 수는 없는 셈이다. 위의 사주는 관과 인이 뚜렷하고 너무 뜨거운 사주라 열기로 가득한 식신 미토의 사용을 꺼리니, 자신의 화기를 식혀 주는 명예를 위해 열심히 공부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희박하지만 혹시 부모나 조부모 대에서 나쁜 생활을 했다면, 그 기운이 후손으로 이어져 잘못된 삶을 살 수도 있다. 관은 명예도 되지만 여자에게 남자도 되기 때문이다. 자식이나 손자가 전혀 모르게 나쁜 생활을 해도 그 기운이 그대로 흘러가니 이를 명심해야 한다. 정말 인과응보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육친에 능통해지면 남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만 봐도 그 사람의 대략을 파악할 수 있다. 말이 거의 없다면 금과 수로 인성이 발달해 점잖은 사람일 확률이 높고, 조용하고 차분하게 말을 한다면 금과 수로 식상관이 발달한 사람으로 유흥을 즐길 수 있다. 빠르고 큰 소리로 말을 유창하게 한다면 목과 화로 식상관이 발달한 자로 남들을 잘 선동할 가능성이 높다. 여자가 조용하면서 공부를 많이 했다면 인성이 발달한 여자인데, 인성이 식상관 곧 자식을 극하기 때문에 그 자손이 드물고 또 잘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부록에도 육친표가 있으니 참고하여 능숙해질 때까지 익히고 또 익히길 바란다.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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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적‘이란 말은 행하려는 일이나 도달하려는 목적에 대한 사람의 강렬한 의향을 가리킨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강렬한 의향을 ‘집착‘에 속하는 것으로 여기며, 모든 번뇌의 근원으로 생각한다. 정호는 불교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일이란 없을 수 없겠지만 마음으로 헤아리면 어긋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이는 ‘주경‘의 시작 단계에서는 반드시 주의하고 힘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볼 때 주의하지 말 것을 강조하거나 ‘주정‘을 강조하는 일은 모두 불교 수양 방법의 특징이다. 그는 "경하면 저절로 허정해지겠지만, 허정을 경으로 부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주경‘하면 자연스럽게 마음의 평정에 이르며, 혼란스럽지 않게 된다. 하지만 ‘정‘ 자체가 ‘경‘은 아니며, 더욱이 ‘경‘의 유일한 내용일 수도 없다. - P167

격물의 목적은 천하의 이치를 장악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결코 만물을 하나하나 전부 궁구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정이의 사상에 따르면, 격물의 과정이 일정한 단계까지 축적되면 자연히 어떤 비약이 생겨나고, 보편적인 원리를 인식하게 된다. 천하의 이치를 구한다는 것이 모든 구체적인 이치를 반드시 궁구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천지만물의 가장 근본적인 법칙을 장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격물의 과정이란 개별 사물의 이치로부터 보편적인 천리를 인식하는 데까지 상승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정이는 이치에 대한 인식이 개별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상승해 갈 수 있는 까닭을 이치가 통일적인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수많은 길을 통해 도읍에 갈 수 있지만 한 길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마침내 통할 수 있는 까닭은 만물이 모두 하나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 P175

정이는 평생토록 자신에 대한 규율과 남을 대하는 태도를 매우 엄격히 하였다. 그는 한평생 "행동거지는 항상 예에 들어맞았고", "나아가고 물러남은 반드시 의례에 합당했으며", "자신을 수양하고 법도를 실천할 때 모두 마땅한 기준에 따라으니, 오직 그만이 유학자의 본보기를 드러내었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어떤 사람은 그에게 "선생께서는 사오십 년 동안이나 예에 맞게 근신하며 사셨으니, 분명 대단히 힘들고 고통스러웠겠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에 정이는 "나는 매일 편안하게 살아왔는데, 어째서 힘들고 고통스러웠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매일 위험하게 살아가니, 그것이 바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다"라고 답변했다. 이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도덕 규범을 자기 자신에게 엄격히 요구하고 자신을 단속해 가면서 그는 진정으로 자기의 이상과 사상을 실천하였다. - P176

4. 천리와 인욕은 본체가 같고, 작용이 다르다
호굉의 생각에 따르면, ‘도‘는 우주의 보편 법칙이다. 폭넓은 관점에서 도를 말하자면 ‘천지에 가득 차 있는‘ 자연계의 보편 규율이며, 좁은 관점에서 도를 말하자면, "식욕이나 색욕과 같은 일상 생활에도 존재하는" 것으로서 인류 생명 활동의 규범이자 준칙이다. 호굉은 "사람들이 부부간의 일을 추하게 여기는 이유는 음욕을 일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인은 그것을 편안하게 여기니, 이는 인류 보존을 위한 결합으로 의미를 새기기 때문이다. 교접하는 데에도 예절이 있고 도가 있음을 안다"고 하였다. 그가 볼 때, 부부 사이의 성관계는 추한 일이 아니다. 합리적인 성관계를 ‘음욕‘으로 간주하는 것은 용속한 사람들의 태도이다.
그는 양성 관계에도 각자 마땅히 준수해야 하는 준칙과 규범이 있다는 생각을 견지하였다. 양성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 입고 먹고 거처하며 행위하는 모든 활동들 가운데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요컨대 사람의 생명 활동은 부정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은 본체적인 의미는 물론이고 도덕적인 의미도 함께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일정한 준칙을 규범화해야 하는 것이다.
호굉은 이러한 사상을 "천리와 인욕은, 본체가 같고 작용이 다르다. 함께 움직이지만 그 상태가 다를 뿐이다"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부부간의 일을 예로 들어 보자면, 성인은 법도가 있으면서 편안하게 그 일을 실행하므로 천리인 반면에, 용속한 사람은 무절제하므로 인욕이 된다. 이것이 바로 본체는 같지만 작용이 다르고, 함께 움직이지만 그 상태가 다른 까닭이다. 나중에 주희는 이 두 마디 말을 놓고 "천리와 인욕을 뒤섞어 하나의 범주로 삼았다"는 말로 호굉을 비판하였다. 이 비판은 사실 옳지 못하다. 호굉은 사람들에게 생리적인 욕구 활동을 할 때는 그 당연한 준칙을 따르도록 주의할 것을 요구하였다. 다시 말해서 정당한 욕구의 발휘가 곧 ‘천리‘이고, 준칙에 합치되지 않는 방탕한 욕구만이 ‘인욕‘인 것이다. 그러므로 천리와 인욕의 구분이란 사람의 정당하며 자연적인 욕망을 배척하거나 금지해야 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람의 자연적인 욕망을 사회에서 통행되는 준칙에 따라 합리적으로 표출시킬 것인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 P228

사람의 실제적인 윤리 생활에서, 사람의 내심은 종종 도덕 관념과 감성적 욕망 사이의 충돌이 교차하고 있다. 도덕 활동의 기본적인 특징은 도덕 의식으로 감성적 욕망을 평가하고 판단하며 제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 평가와 자아 제어의 심리 과정은 리학에서 ‘인심도심설‘의 현실적 근거를 이룬다. 도덕의 기본적인 특징은, 사람들로 하여금 도덕 의식의 활동 중에 도덕 이성으로 개체의 이기적인 욕망을 제한하고 제어하게 함으로써 사회에서 통용되는 도덕 규범에 복종하도록 강조하는 데 있다.
주희는 사람의 자연적 욕망을 일률적으로 배척하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전체적인 사상 경향은 개인의 욕망을 가능한 한 감소시켜서 사회의 도덕적 요구에 복종시킬 것을 강조한다. 이는 그의 사상이 봉건적인 신분 제도에서 출발하여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고 있음을 드러내 준다. 이같은 그의 사상은 근대 이래 자본주의가 계급을 파괴할 것을 요구하며, 개인의 이익 추구를 위해 계급과 봉건적 도덕 원칙의 제한을 받지 않으려 했던 점과 매우 다른 사상으로서, 리학이 전근대적인 사회 사상이었음을 반영한다.
마땅히 알아야 할 점으로서, 리학의 ‘도심인심설‘과 ‘천리인욕설‘은 사회 전체의 이익과 개인의 다양한 욕망 사이의 충돌이 인류 사회의 기본 모순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리학에서 제시하는 사회와 개인, 이성과 감성, 도덕과 욕망이라는 윤리학적 모순은 보편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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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면, 연주는 수많은 조상으로 사주 당사 176 자의 토대다. 그 토대가 사주 당사자와 음양이 맞으면 월주에서부터 60갑자가 순행하고 어긋나면 역행한다. 사주 당사자와 바탕이 어긋나는지 여부는 간단하게 알 수 있다. 남자는 양이니, 그 바탕인 연간이 양이면 사주 당사자와 음양이 맞아 순서대로 돌아간다. 여자는 음이니, 그 바탕인 연간이 음이면 사주 당사자와 음양이 맞아 차례대로 돌아간다. 반대로 남자의 사주에서 연간이 음이거나, 여자의 사주에서 연간이 양이면 바탕이 서로 맞지 않으니 거꾸로 돌아간다. - P175

필자가 지금까지 공부한 경험과 강의를 토대로 명리학에 꼭 필요한 핵심만을 뽑아서 논리적이고 학문적으로 설명했다. 신살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직 필자의 명리학에 대한 학문적인 역량이 모자라 이해는 물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천을귀인이니, 사주에 적용해 보면 신기할 정도로 너무 잘 맞지만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직 논리적으로 명쾌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앞으로 연구가 더 깊이 진행되면 아직까지 이해하지 못한 것까지 연구해서 세상에 전하겠으나 현재까지 연구된 것만으로도 사주를 어느 정도 볼 수 있다고 여겨 감히 글을 썼다.
세상에서는 명리학을 어리석은 사람들이 믿는 미신쯤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앞에서 설명했듯이 명리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두철미하게 음양오행의 상생상극과 그 운행법칙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처럼 체계적인 명리학을 미신 취급하는 것은 미신으로 보는 181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다. 명리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아직까지 그 학문적 구조를 자세히 밝혀내지 못한 것에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감히 이것으로 명리학의 모든 것을 밝혔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상과 같은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고 여겨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전하고자 하였다.
(…)
명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음양오행의 상생상극과 몇 가지 운행 법칙을 적용하여 인생을 바라보며 수행하는 학문이다. 명리를 모를 때는 타고난 기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천지의 기운에 휩쓸려 그렇게 살아간다. 그렇지만 그 기운 때문에 인생이 그렇게 요동친다는 것을 알때 비로소 조용히 내 자신을 돌아보며 몸과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된다. 그러니 명리학을 미리 길흉화복을 알아 부귀를 추구하는 세속의 잡된 술수로 봐서는 안 되고 수행을 시작하게 하는 거룩한 학문으로 봐야 한다.
이 책을 통해 명리를 익히는 독자들은 명심하길 바란다. 명리를 알면 알수록 인과응보의 고리가 아주 질기고 처절하게 얽혀 있음을 깨닫곤 한다. 그러니 명리를 통해 좋은 것을 찾아가고 나쁜 것을 피해갈 것이 아니라 그대로 받아들여 수행으로 극복해야 한다. 내 운명이 이 삶을 택했다면 그것을 아름답게 승화시켜야 다음 생에서 현재의 삶 182 을 반복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수강생들 중에 간혹 이혼한 분들이 있는데, 어느 정도 강의를 듣고 자신의 사주를 되돌아볼 능력이 생기면, 그토록 미운 배우자에게 도리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말을 하곤 한다. 조금만 시각을 달리 보면 인생의 많은 문제가 남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 때문에 생긴 것임을 직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명리학은 젊은 시절에 익히기보다는 빨라도 인생의 희비를 다소 맛본 40대 후반 이후에 익히는 것이 좋다고 본다. 세상에는 의지를 가지고 성실하게 살아도 되지 않는 일도 많고, 어쩌다 시작한 사업이 승승장구하여 성공하는 일도 종종 있는데, 사주를 보면 이미 그렇게 판이 정해져 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사주를 믿지 않는데, 역시 사주를 보면 그 구조가 사업가로 혹은 직업인으로 잘 살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으니, 부처님 손바닥에 있는 손오공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의 사주를 모두 다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100명 중에 2~3명 정도로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있으니, 더 연구해야 할 일이다. - P180

원국은 그 사람이 타고난 선천적인 특성이나 환경으로서 그 사람의 성격을 비롯하여 타고난 모든 것을 알려 주는 상징적인 부호다. 원국에 충이나 형이 많으면 성격이 까칠하여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다고 보고, 합이 많으면 다정다감하고 인간관계가 좋다고 본다. 성격 외에도 가령 재성이 식상관의 도움을 받는 형태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면 대운이 좋을 때에는 많은 돈을 벌 수 있고, 그다지 운이 좋지 않을지라도 망하지는 않는다.
원국에 있는 것은 평생 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운에서 오는 것은 운이 끝나면 사라지기 때문에 먼저 원국에 어떤 특성이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원국대로 살게 되는 것은 선천적으로 자신의 기질 구조에 따라 세상을 그렇게 바라보고 상황에 그렇게 대응하기 때문이다. 원국에 배우자가 병약한 구조로 있으면 그 사람은 건강한 이성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병약한 이성에게 매력을 느끼고 구애하게 되어 있다.
이것에 대해 우리 선조들은 동기상응同氣相應이라 하여 같은 기운은 서로 호응한다고 했다. 천지는 음양오행으로 기운을 뿌리면서 흘러가고, 어느 순간 태어난 생명은 그 시점에서 오행의 기질을 받아 그것을 가지고 세상과 반응하면서 죽을 때까지 사는 것이다. - P183

흔히 <<주역>>의 건乾과 곤坤을 이용해 남자는 건, 여자는 곤으로 표시하는데, 한글로 ‘남’이나 ‘여’로 표시해도 상관없다. 공망과 천을귀인이 사주 원국에 있는지 확인하고 있으면, 동그라미 등으로 표시하여 사주를 보는 도중에도 잊지 않도록 해 놓기 바란다. 원국에 귀인이 둘 이상 있으면 그것들에게 너무 의지해 좋지 않지만 하나 정도 있으면 그것이 육친 중 무엇이든 아주 좋게 작용한다. 언젠가 어느 지방 국립대 교수 부인이 남편 사주를 봐 달라고 해서 보니, 재가 천을귀인이었다. 그 부인이 어렵게 뒷바라지하여 교수를 만들었다고 하니, 얼마나 귀한 재인가!
사주 원국의 구조가 아주 나쁜 경우를 제외하면, 천을귀인이 있을 경우 인생에 그것이 좋은 영향을 많이 미친다. 그리고 운에서 오면 그때 해당 육친에게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니, 천을귀인은 꼭 암기해 두기 바란다. 덧붙여 말하건대, 공망은 오행으로는 작용하지만 육친으 188 로는 그 작용이 약화되는 것이다. - P187

거듭 당부하건대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 아무리 편리하다 할지라도 사주를 익히는 초기에는 핸드폰에 깐 프로그램으로 사주를 뽑지 않기를 바란다. 필자는 2015년 여름까지 핸드폰으로 사주를 뽑지 않고 만세력을 살피며 사주 원리와 관련된 내용에 대해 생각을 다시 해 보고는 했다. 핸드폰이나 컴퓨터를 이용해서 사주를 뽑을 경우, 이와 같은 과정이 생략되어 원리에 대해 고민하는 기반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사주는 비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음양오행의 원리에 대해 아주 무르익을 정도로 생각하고 생각하여 저절로 터져 나오게 하는 것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고수와 하수의 차이는 사주를 익힌 기간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그 기반이 얼마나 튼튼한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에 달려 있을 뿐이다.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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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왕들이 화병(火病)으로 죽었다. 숙종도 그랬고 경종, 그리고 영조의 손자인 정조도 화병에 시달렸다. 그래서 원기를 돋우는 인삼을 먹지 못했다. 인삼은 명약이나 열이 뜬 사람에게는 화(火)를 더 조장할 수 있다. 영조는 인삼을 달고 살았다고 한다. 이상곤 한의사는 영조의 체질이 소음인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그럴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후천적인 노력이 있었다. "그는 소식은 기본이고 기름진 음식과 술을 피하는 절제된 식습관을 평생 고수했다. 소화 기능이 약한 소음인 체질 때문에 자기한테 맞춤한 식습관을 실천한 것이다."이상곤, <<이상곤 낮은 한의학>>, 사이언스북스, 2011, 110쪽 - P415

정치 분쟁에서 논리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리고 공론의 정치를 이끌어가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조는 공부벌레였고 독서광이었다. 그의 실력은 경연(經筵)에서 자신이 직접 신하들을 가르칠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앎을 최선을 다해서 정사를 펼치는 데 이용했다. 그러다 보니 관여할 것도 할 일도 너무 많았다. "정조는 일중독에 걸렸다고 할 만큼 늘 정무에 바빴다."안대회, 앞의 책, 93쪽 스스로 "나는 바빠서 눈코 뜰 새 없으니 괴롭고 괴로운 일"같은 책, 94쪽이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영조가 83세까지 살았던 반면, 정조는 47세에 죽었다. 정조는 몸에 열이 많았다. - P416

화병은 울화(鬱火)병이라고도 한다. 화병이 성립되려면 울증, 즉 감정의 울체가 있어야 한다. 억울함 등의 감정이 몸속에 오래 머물면 울증이 생긴다. 그것이 열을 내면서 몸에 여러 증상들이 나타나는 것이 화병이다. 병증은 일반적으로 분노가 심해지고, 갑자기 울컥한 마음이 생기며, 얼굴에 열감이 오르고, 두통이 생기며, 목에 무언가 걸린 것 같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등의 증상으로 나타난다. 정조의 화병은 자신의 생부인 사도세자의 끔찍한 비극을 겪은 충격이 일차적인 원인이었으리라. 정조는 죽음을 앞두고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몬 자들 418이 자수를 하지 않고 있다. 내가 한 번 행동을 하면 저들이 결단 날 텐데"이상곤, 앞의 책, 116쪽라며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에 정조는 번 아웃이 되도록 열심히 일했다. 말 그대로 에너지를 다 태워 버리고 나가떨어지는 지경이 되도록 정기를 끌어올린 것이다. 이런 행동은 화기를 조장한다. 그는 스스로도 "심혈(心血)이 메말라 눈이 어두워졌다"안대회, 앞의 책, 97쪽고 판단했다. 화기는 심혈을 말린다. 심혈이 마르면 진액이 마르고 간으로 피가 저장되지 않아 눈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진액이 마르면 열은 더 심해지고 결국 기존의 울화병에 화력을 보태는 꼴이 된다. - P417

물론 이런 상황을 여러 가지 사주 이론으로 대입하여 설명할 수 있다. 신(辛)이 나란히 붙어 있다거나, 을과 신의 충이 두 개 있다거나, 421 또 묘유충을 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고, 관성의 부재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사주가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산다고 하는 말은 우리가 가장 피해야 할 초월적 결정론이다. 연예인이 자살을 하는 사건이 벌어지면, 임상가들은 앞다투어 사주가 그래서 자살을 한 것이라고 해설을 한다. 그러나 그런 사주라고 다 자살을 선택하진 않는다. 끼워 맞출 순 있지만 원래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처럼 말해선 안 된다.​ - P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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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적으로 사랑하는 남녀가 자유롭게 사랑과 결혼 생활을 영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종족을 보존하려는 맹목적인 삶의 의지의 한 책략, 혹은 한 가지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하는 남녀는 단지 맹목적 의지의 간지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쇼펜하우어의 발상이 아직도 생물학에서는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기적 유전자』에서 도킨스는 인간이 한 계기적 매체에 지나지 않을 뿐 진정한 주인공은 바로 유전자라고 주장했던 적이 있다. 이에 따르면 모든 개별적 생명체들은 유전자의 의도를 실현하고 있는 단계적 매체에 불과해진다. 따라서 오늘날 현대생물학계의 도킨스 역시 쇼펜하우어의 논리, 더 나아가 헤겔의 논리를 생물학 영역에서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 P228

쇼펜하우어나 도킨스 같은 사람들은 인간의 에로티즘이 종족을 보존하기 위한 맹목적 의지나 유전자의 책략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점에서 보면 인간은 다른 생물들과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을 것이다. 다른 모든 생물종들도 종족 보존의 본능에 따라 짝짓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타유만은 인간의 에로티즘이 동물의 성행위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 인간의 에로티즘은 사회적 금기, 그리고 이 금기에 대한 위반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갖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금지된 것에 대한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먹지 말아라", "보지 말아라"라고 금지된 것에 대한 선망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예외 없이 관찰되는 현상일 것이다. 이런 금지된 것에 대한 인간의 선망이 바로 성적인 대상과 관련될 때, 바타유가 말한 에로티즘이 비로소 강렬하게 발생한다. 바타유가 에로티즘에는 "유혹과 공포, 긍정과 부정의 엇갈림"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 P231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인 개인을 주체로 호명한다"라는 알튀세르의 주장이다. 이것은 흔히 ‘호명 테제’라고 불리는 주장이다. 어떤 인간이 태어났을 때, 그는 벌거벗은 한 개인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는 이미 그를 부를 준비를 모두 다 갖추고 있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김이라는 성을 쓰는 가정의 한 성원, 남자, 한국인, 노동자 계층이라는 사회구조 속에 던져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회구조에 익숙해 있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은 이제 하나둘씩 순차적으로 정해진 내용들을 가지고 그를 부르기 시작한다. "얘야!"라고 부르는 순간,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부르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대답하는 순간, 구체적인 개인은 점차 특정한 주체로 구성되기 시작한다. 결국 호명이란 행위를 통해서 주체는 스스로 사회구조의 어떤 한 가지 배역을 떠맡게 되는 것이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렇게 주체로 호명된 뒤, 구체적인 개인이 현실적으로 수행하는 생각이나 행동들에 이데올로기가 무의식적인 표상 체계로서 작동하게 된다. - P260

『지하생활자의 수기』라는 작품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는 세상에서 도피한 채 홀로 살아가는 한 남자의 유아론적인 삶을 기술하면서 우리 삶에 미치는 타자의 효과를 감각적으로 묘사했던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 레비나스는 도스토예프스키를 통해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배웠을 것이며, 이것이 바로 그로 하여금 타자의 철학을 개진하게 만든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타자의 문제를 핵심적인 과제로 도입했기 때문에 레비나스는 베르그손이나 사르트르와는 전혀 다른 사유를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에 대한 그의 이해가 베르그손이나 사르트르와 다르게 된 것도 당연히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도 나의 손아귀에 쥘 수 없는 것은 미래이다. 미래의 외재성은, 미래가 절대적으로 예기치 않게 닥쳐온다는 사실로 인해서 공간적 외재성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미래에 대한 기대, 미래의 기투는, 베르그손에서부터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이론들이 마치 시간의 본질적 특성인 것처럼 일반적으로 인식해 왔지만, 사실 이것은 미래의 현재에 지나지 않을 뿐 진정한 미래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시간과 타자』

미래는 마치 미개척지처럼 인간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는 베르그손과 사르트르의 생각과는 달리, 레비나스는 단호하게 미래는 "어떤 방식으로도 나의 손아귀에 쥘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미래는 외재적인 것, 다시 말해 나의 내면으로 결코 환원할 수 없는 외재성을 가진 것이다. 미래는 창조적 진화가 작동하는 비어 있는 공간, 혹은 한번 미끄러지면 계속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빙판과도 같은 것이 아니었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미래란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거친 땅"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의 ‘거친 땅’은 내가 앞으로 내디딜 발걸음을 방해하는 온갖 타자를 상징하는 것이다. 타자는 항상 나의 기대나 예측을 좌절시키는 방식으로 출현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레비나스에게 있어 기대나 예측에 의해 적중되는 미래란 진정한 미래가 아니었으니, 이것은 단지 미래로 투사된 현재라는 점에서 미래의 현재에 지나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미래는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이며, 우리를 엄습하여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다. 미래, 그것은 타자이다.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이다. 오로지 홀로 있는 주체라는 관점에서 시간을 이야기한다는 것, 순수하게 개인적인 지속에 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시간과 타자』

이제 레비나스는 왜 미래를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는지 보다 분명히 밝히기 시작한다. 그것은 미래와의 관계가 바로 타자와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타자와 마주치고 그와 관계하면, 우리는 자신의 미래 모습이 과거나 현재의 모습과는 전혀 다를 것이라고 직감하게 된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을, 다른 한편으로는 설레는 마음을 갖게 된다. 앞으로 자신의 삶이 이 타자로 인해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레비나스는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레비나스는 홀로 있는 주체라는 사르트르의 관점 혹은 순수한 개인적 지속이라는 베르그손의 이야기가 공허한 이야기로 보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어떤 타자도 만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내일은 오늘의 반복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레비나스에게 타자란 새로운 삶, 새로운 시간을 가능하게 해주는 축복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사실 타자가 나의 삶에 개입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동요시킬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레비나스가 말한 것처럼 이로부터 진정한 미래가 열리게 된다는 것을 사르트르 본인도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르트르에게 있어 나의 자유와 갈등할 수밖에 없는 타자의 존재는 축복이라기보다 오히려 재앙 혹은 저주에 가까운 것이었다. 사르트르가 타자와의 마주침이 낳는 설렘보다는 두려움에 주목하면서 "지옥, 그것은 타자이다"라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지옥이라도 그것은 타자와 마주쳤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사실 모든 타자와의 마주침이 우리를 반드시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비록 두려운 마음이 든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타자의 마주침을 전적으로 거부할 수도 없고 또한 그래서도 안 된다. 이 점이 바로 레비나스로 하여금 베르그손과 사르트르의 시간 논의를 넘어서도록 만든 중요한 통찰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 P307

사실 우리가 특정 에피스테메나 패러다임이란 규칙에 의해 지배될 때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기 힘들다. 오직 새로운 에피스테메나 패러다임으로 개종했을 때에만, 우리는 과거에 자신이 맹목적으로 따랐던 에피스테메나 패러다임이 어떤 성격을 가진 것이었는지 의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따르고 있는 현재의 규칙들은 과연 어떤 것일까? 푸코나 쿤이 우리에게 던져 준 심각한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미래로 갈 수 없는 우리가 자신의 현재를 알기 위해서 되돌아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바로 과거뿐이다. 과거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영위했던 다른 패러다임 혹은 다른 에피스테메에 충분히 익숙해졌을 때, 우리가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는 현재의 패러다임이나 에피스테메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자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외국에 나가 보았을 때만 자신이 지금까지 따르고 있던 무의식적인 삶의 규칙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쿤과 푸코를 통해 역사학은 과거 시대의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단순한 역할만으로는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현재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내적인 규칙을 반성하기 위한 성찰을 자임하면서, 역사학은 비로소 인문학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 P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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