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나는 종종 우리가 흑인 노예제라는 이 야비하고도 이질적인 노예 행태에 빠질 수 있을 정도로 천박한 인간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실제로 남부와 북부 모두에는 그 제도에 전념하는 교활한 노예 주인들이 적지 않다. 남부의 노예 감독은 거칠다고 하는데 북부의 노예 감독은 한술 더 뜬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쁜 것은 자신이 자신의 노예 감독이 되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신성에 대해서 떠들다니! 밤낮으로 장터를 찾아다니는 저 큰길의 짐꾼을 보자. 그의 내면에 어떤 신성이 작용하고 있는가? 그의 가장 거룩한 의무는 자기 말들에게 사료와 물을 먹이는 일이다! 운송으로 얻는 이익과 비교할 때 그에게 있어서 자신이 처한 운명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는 지금 평판 좋은 시골 지주 나리가 되기 위해 마차를 몰고 있을까? 그는 얼마나 존엄하며, 또 어느만큼이나 불멸의 존재일까? 하루 온종일 움츠리며 굽실거리는 꼴을, 뭔지 모르는 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라. 그것은 그가 불멸이나 신성의 존재가 아니라 바로 자신에 대해 스스로 내린 평가, 자신의 행위에서 얻게 된 평가의 노예이며 죄수이기 때문이다. 대중의 평가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 내린 평가에 비하면 나약한 폭군에 불과하다.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서 하는 생각, 그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짓거나 방향을 지시한다. 공상과 상상으로 만들어진 이 서인도제도에서 자기 해방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윌버포스가 필요할 것인가? 또한 자신들의 운명에 지나친 관심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죽는 날까지 화장대 방석이나 짜고 있는 이 땅의 숙녀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라! 마치 영원을 손상시키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시간을 죽일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 P13

사치품 대부분, 그리고 이른바 생활 편의품이라고 하는 것들 중 상당수는 없어서 안 될 물건이 아닐 뿐 아니라 인류의 발전에 확실한 장애물이기도 하다. 사치와 편의에 대해 말하자면, 현인들은 가난한 이들보다 훨씬 더 소박하고 빈약한 생활을 누려왔다. 중국, 인도, 페르시아, 그리스 등지의 고대 철학자들은 외적인 부라는 면에서는 누구보다도 가난하면서 내적인 부에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부자였던 계층이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 별로 알고 있는 것이 없다. 하지만 지금 알고 있는 정도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그들과 같은 부류로 좀더 현대적이었던 개혁자와 자선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른바 자유의사에 의한 가난이라 할 수 있는 그 유리한 지점에 오르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인생에 대하여 공정하거나 현명한 관찰자가 될 수 없다. 농업이든 상업이든 문학이든 예술이든 간에 사치스러운 삶의 열매는 사치일 뿐이다. 요즘에는 철학교수는 있지만 철학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오늘날에는 대학교수직이 찬탄의 대상인데, 그것은 한때 산다는 일이 찬탄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 P21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심오한 사상을 갖는다거나 학파를 세우는 일뿐만 아니라 지혜를 너무도 사랑하여 지혜가 지시하는 바에 따라 소박하고 독립적이며 관대하고 믿음성 있게 산다는 것이다.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인생의 제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위대한 학자나 사상가들의 성공은 대체로 왕이나 남자다운 성공이 아니라 아부하는 신하로서의 성공에 불과하다. 실제로 그들의 조상이 그랬듯이 영합함으로써만 겨우 삶을 영위해 나가는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고귀한 인간의 본보기라곤 할 수 없다. 하지만 어째서 인간은 이토록 끊임없이 타락하고 있는 걸까? 무엇이 가문을 영락케 만드는 걸까? 국가를 쇠약케 하고 파멸로 몰아가는 사치의 본질은 무엇일까? 우리의 삶에 사치가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철학자는 외적 삶의 양태에서조차 시대를 앞서는 사람이다. 그는 동시대인들처럼 배불리 먹거나 편안히 자거나 좋은 옷을 입거나 따뜻하게 지내지 못한다. 어떻게 철학자이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방법으로 자기 자신의 생명의 열을 유지하지 못할 수 있단 말인가? - P22

그런 식으로 나 역시 섬세한 재료로 일종의 바구니를 엮었지만 결국 남이 살 만한 물건으로 만들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의 경우에는 그것들을 엮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남들이 내 바구니를 살 만한 것으로 만들 궁리를 하는 대신에 어떻게 하면 남들에게 팔지 않아도 될까를 궁리했던 셈이다. 사람들이 찬미하고 성공했다고 여기는 삶은 한 가지뿐이다. 어째서 우리는 다른 삶들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어느 한 가지 삶만을 과장하는 것일까? - P26

또는 식초 한 방울에 든 세균을 들여다보는 사이에 자기 주위에서 우글대는 괴물에 먹혀버릴 수도 있다. 자신이 캐내어 녹인 광석에서 잭나이프를 만든 아이와(그는 그 과정을 배우기 위해 필요한 책을 읽는다), 대학에서 야금학 강의에 출석하면서 아버지에게서 로저스제 주머니칼을 선물로 받은 아이 둘을 놓고 한 달이 지나면 어느 쪽이 더 많은 발전을 이룩했을까? 둘 중 어느 아이가 손가락을 베기 쉬울 것인가? 나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내가 재학중에 항해학을 수강했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만약 내가 한 번이라도 항구로 나간 적이 있다면 항해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웠을 텐데 말이다. 가난한 학생들조차 정치경제학만 공부하고 또 수업 받고 있는데, 정작 철학과 동의어인 삶의 경제학은 오늘날 대학에서 진지하게 교습되지 않고 있다. 그 결과 학생이 아담 스미스와 리카르도와 세이의 저술을 읽는 동안 그의 아버지는 갚을 길 없는 부채에 빠져 버리는 것이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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