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가지를 치는 사람이 천 명이라면 악의 근원을 꺾는 이는 한 사람뿐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시간과 돈을 쓰는 사람이 어쩌면 자신의 생활방식을 통해 그가 구하고자 하는 그 비참한 상황을 가장 열심히 더 만들어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한 명의 노예를 판 수익금으로 나머지 아홉 명의 노예들에게 일요일만 자유를 주는 위선적인 노예 주인과 다를 바 없다. 또 가난한 사람에게 부엌일을 시킴으로써 자비를 베푸는 이들도 있다. 그런 일은 자신이 하는 편이 훨씬 더 자비로운 일이 아닐까? 사람들은 수입의 10분의 1을 자선에 쓰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지만 차라리 수입의 10분의 9를 자선에 쓰고 그 일에서 아예 손을 떼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결국 사회는 재산의 10분의 1만을 회수하는 셈이다. 이것을 재산가의 관용으로 봐야 할까, 아니면 사법 관리의 태만으로 봐야 할까? - P88
나는 자선에 의당 따라야 할 찬사를 깎아 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바쳐 인류에게 축복을 안겨준 모든 이들을 공정하게 대하기를 요구하는 것뿐이다. 나는 인간에게서 고결한 행위와 자비로운 마음을 가장 높이 평가하지는 않는데, 그것들은 이를테면 인간의 줄기와 잎에 해당한다. 그 풀이 시들면 사람들은 환자를 위한 비천한 용도로, 그것도 주로 돌팔이 의사들이 애용하는 약초로 쓰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인간의 꽃과 열매다. 인간의 향기가 내게 풍겨 오기를, 그 성숙함으로 우리들의 인간 관계에 풍미를 더할 수 있기를 원한다. 인간의 선함이 부분적이거나 일시적인 행위여서는 안 되며, 그것은 늘 남아도는 것, 그 사람에게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의식적이지도 않은 행위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수많은 죄를 감춰 주는 박애다. 자선가 자신이 헤어난 슬픔에 대한 기억으로 마치 공기처럼 인간을 감싸면서 그것을 연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절망이 아니라 용기를, 질병이 아니라 건강과 안정을 함께 나눠야 하며 질병이 전염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저 울부짖는 소리는 남부의 어느 평원에서 나오는 것일까? 우리가 빛으로 인도할 이방인들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 우리가 구제해야 할 저 사납고 무지막지한 인간은 누굴까? 몸이 아파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심지어 복통만 일어나도(위장이야말로 동정심이 생기는 곳이니까) 그는 즉각 세상을 시정하려 들게 마련이다. 자신이 우주의 축소판인 그는 세상이 풋사과를 먹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그것은 참된 의미에서의 발견이며, 그가 바로 그 발견의 장본인이다). 실제로 그의 눈에는 지구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풋사과이며, 인간의 아이들이 채 익기도 전에 갉아먹을 것이라는 생각만 해도 끔찍스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는 즉각 과감한 박애정신을 발휘하여 에스키모 인과 파타고니아 인을 찾아내고 인구가 밀접한 인도와 중국의 촌락들을 포옹한다. 이렇게 몇 년 동안 자선활동을 벌이고 나면(강대국들은 그런 그를 자기들 목적에 이용한다) 그의 소화불량은 낫게 되고 지구는 흡사 익어 가는 과일처럼 볼이 발그레해지며 삶은 미숙함에서 벗어나 다시 한 번 감미롭고 살 만한 것이 된다. 결국 내가 저지른 짓이야말로 극악무도한 행위인 셈이다. 또한 나보다 더 악한 자는 과거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 P90
인간의 관습은 성자들과의 관계로 오염되고 말았다. 우리의 찬송가집은 하느님에 대한 저주와 영원한 인내의 선율을 반향하고 있다. 예언자와 구원자들조차 인간의 희망을 확립시켰다기보다는 두려움을 달래주는 데 그쳤던 것 같다. 생명이라는 선물에 대한 소박하면서도 억누를 길 없는 만족감이나 하느님에 대한 기념할 만한 찬미를 기록한 내용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건강이나 성공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내게 유익한 것이지만, 모든 질병과 실패는 그것이 내게 또는 내가 그것에 아무리 많은 동정을 품더라도 결국 나를 슬프게 하고 유해한 것이다. 요컨대 만약 진실로 인디언답게, 또는 식물답게, 혹은 매혹적이거나 자연스러운 수단을 동원해서 인류를 회복시키고자 한다면 우선 자연 그 자체처럼 소박하고 넉넉해지도록 하자. 우리의 이마에 드리워진 먹구름을 몰아내고 숨구멍마다 조금이나마 생명력을 불어넣어 보자. 가난한 자의 감독이 되려 하지 말고 이 세상에서 가치 있는 한 인간이 되도록 노력하자. - P91
내가 숲속에 들어간 이유는 신중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하기 위해서, 그리고 인생에서 꼭 알아야 할 일을 과연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삶이란 그처럼 소중한 것이기에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고 싶지 않았고, 도저히 불가피하기 전에는 체념을 익힐 생각도 없었다. 나는 깊이 있게 살면서 인생의 모든 정수를 뽑아내고 싶었고, 강인하고 엄격하게 삶으로써 삶이 아닌 것은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었다. 숲속에 널찍하고 반들반들하게 길을 닦아 삶을 맨 안쪽까지 몰아붙인 다음 가장 비천한 상태까지 내몰아 그 삶이 정말 비천하다고 판명날 경우 삶의 모든 천박함을 있는 그대로 뽑아서 온 세상에 공표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 그 삶이 숭고한 것이라면 직접 체험함으로써 그 숭고함을 알고 싶고 다음번 여행 때에는 그것에 대하여 진정한 얘기를 할 수 있기를 원했다. 내가 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이 악마의 것인지 하느님의 것인지 이상하리만큼 확신하지 못하면서 다소 성급하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영원토록 기쁘게 하는 일’이야말로 이승을 사는 인간의 주된 목적이라는 식의 결론을 내리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 P108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이렇게 쫓기듯이 삶을 영위해서 인생을 낭비하는 것일까? 우리는 허기가 지기도 전에 벌써 굶어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 사람들은 제때의 한 바늘이 아홉 바늘의 수고를 덜어 준다고 하면서 내일 아홉 바늘의 수고를 덜기 위해 오늘 천 바늘을 꿰매고 있는 것이다. 사실 정작 중요한 일은 하나도 없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그저 무도병(舞蹈病)에 걸려 도저히 머리를 가만히 놔둘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내가 불이라도 난 것처럼 교회에 걸린 종줄을 몇 번 당기기만 해도 채 종이 울리기도 전에 콩코드 외곽 농장에 있던 남자든(오늘 아침만 해도 수없이 온갖 약속을 둘러대며 바쁜 시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애든 여자든 할 것 없이 모든 일을 팽개치고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올 것이다. 그것은 주로 화재에서 재산을 구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솔직히 말하자면 불난 구경을 하기 위해서(왜냐하면 어차피 불이 난 이상 타버릴 테고 우리가 불을 지른 것은 아니니까), 또는 불끄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서가 아니면 한몫 거들기 위해서일 것이다(그 일이 제대로 된다면 말이지만).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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