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 컴퓨터가 이번에는 다른 것, 이를테면 야생 꿀벌의 집을 연구할 경우를 생각해 보자. 거기에서는 명백히 인공에 기인하는 모든 기준이 발견될 것이다. 즉 밀와와 그것을 구성하는 밀방에서는 단순하며 반복이 많은 기하학적 구조가 발견되고, 그 때문에 벌집은 발비존의 집들과 같은 범주로 분류될 것이다. 이 판단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벌집이 벌의 활동의 소산이라는 의미에서 본다면 그것이 ‘만들어진 것(인공으로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는 이유도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 즉 이 활동은 엄밀히 자동적이고 직접적이지만 의식적으로 기도된 것은 아니다. 한편 양식 있는 박물학자로서의 우리는 꿀벌을 ‘자연으로 된‘ 존재로 보고 있다. 이 ‘자연으로 된‘ 존재의 자동적 활동의 산물을 ‘만들어진 것(인공적)‘으로 본다면 명백한 모순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좀 더 검토해 보면 알겠지만 모순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프로그램을 짤 때의 잘못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판단의 애매성에서 오는 것이다. 즉 만약에 그 기계가 이번에는 벌집이 아니라 꿀벌 그 자체를 검사한다고 하면, 거기에서 발견되는 것은 극히 주의 깊게 제작된 인공적인 물체일 것이다. 극히 표면적인 검사만으로도 꿀벌에게서는 좌우상칭과 평행이동 등의 단순한 대칭요소가 명백히 발견된다. 또 꿀벌을 한 마리씩 검사해 가는 동안에, 그 컴퓨터는 다음과 같은 점을 알게 될 것이다. 즉 그들의 구조의 극단적인 복잡성(이를테면 복부의 털의 수와 위치, 시맥(날개맥) 등)이 개체마다 충실히 재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러한 존재가 깊이 고려되고 건설적이며 또 가장 세련된 활동의 산물이라는 증거가 된다. 그 기계는 이러한 결정적인 자료를 토대로 화성의 NASA 관리에게 이러한 보고를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ㅡ지구에서 한 기술을 발견하였는데, 그와 비교하면 화성의 기술 같은 것은 거의 원시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라고.
이상에서 우리는 공상과학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어보았는데, 이렇게 길을 우회한 것은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명백한 듯이 보이는 ‘자연으로 된‘ 물체와 ‘인공으로 된‘ 물체의 구별을 확정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예시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구조적(거시적) 기준을 기초로 하면 인공적이란 어떤 것인가를 완벽히 정의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즉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것은, 인간은 기술의 산물과 같은 ‘진짜‘ 공예품의 전부를 포함하면서, 다른 편에서는 결정 구조와 같이, 생물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명백히 자연스런 물체를 배제할 수 있는 정의다. 우리는 결정 구조도 생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연 체계 속에 분류하고 싶기 때문이다. - P24

그러나 우리는 바로 객관성이 가리키는 바에 의하여 생물이 갖는 합목적적 성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생물이 제각기 구조와 성능을 통해서 어떤 목적을 실현하고 또 추구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거기에는 외견상 심각한 인식론상의 모순이 있다. 생물학의 중심적 문제는 바로 이 모순 자체며, 만일 이 모순이 외견상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 문제를 풀어야 하고, 만일 실제로 모순된 것이라면 그것이 근본적으로 해답할 수 없는 것임을 입증해야 한다. - P42

도태이론은 지금까지 제출된 모든 이론 중에서 객관성의 원리와 양립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것은 불변성을 유일한 근본적 특성으로 보고, 합목적성을 불변성에서 파생되는 제2차적 특성으로 보고 있다. 또한 도태이론은 단지 현대 물리학과 양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며, 또 그에 아무런 제한이나 부가도 붙이지 않는 유일한 이론이다. 도태적 진화의 이론이야말로 생물학의 인식록적 수미일관성을 결정적으로 보증하고, ‘객관적 자연‘에 대한 제과학(諸科學) 사이에 그것을 정립시키는 것이다. 확실히 그것은 이론을 떠받들기 위한 유력한 논거는 되지만, 이것만으로 그 이론을 충분히 정당화할 수는 없다. - P44

따라서 한편에서는 생물권, 즉 ‘생명을 가진 물질‘ 속에서만 명백히 작용한다고 생각되는 합목적성의 원리를 인정한다는 일군(一群)의 이론을 정의할 수가 있다. 내가 지금부터 ‘생기설(生氣說)‘ 이라 부르는 이들 이론은 생물과 무생물의 세계 사이에 근본적인 구별을 마련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는 보편적·합목적적 원리에 입각하는 일군의 생각이 있는데, 그에 의하면 이 원리는 생물권의 진화뿐만 아니라 우주의 진화도 지배하고 있으며 생물권의 내부에서는 다만 보다 정밀하고 또 강렬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들 이론은 생물 속에서, 보편적으로 방향이 정해져 있는 진화에서 생겨난 더욱 세련되고 더욱 완벽한 산물을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진화의 도달점이 인간과 인류며, 거기까지 도달한 것은 그렇게 미리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ㅡ나는 이것을 ‘물활설(物活說)‘이라 부르기로 한다ㅡ는 많은 점에서 생기설보다도 흥미 있다. 그러므로 생기설에 대해서는 간단히 일별을 던지는 데 그치기로 한다. - P45

이러한 생각에 베르그송이 근본적인 것으로 보았던 또 하나의 생각이 결부되어 있다. 즉 합리적 지성은 비생명 물질을 지배하는 데는 매우 적합한 수단이지만 생명 현상은 전혀 파악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다. 단지 본능만이 생명의 약동과 동질적인 것으로서 생명 현상에 관해 직접적이며 전체적으로 직관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생명에 대한 분석적·합리적인 논문은 모두 무의미한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에 있어서의 합리적 지성의 고도한 발달에 따라 그 직관력은 중대하고 또 유감스러울 정도의 빈곤화를 초래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직관력의 부(富)를 회복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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