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 컴퓨터가 이번에는 다른 것, 이를테면 야생 꿀벌의 집을 연구할 경우를 생각해 보자. 거기에서는 명백히 인공에 기인하는 모든 기준이 발견될 것이다. 즉 밀와와 그것을 구성하는 밀방에서는 단순하며 반복이 많은 기하학적 구조가 발견되고, 그 때문에 벌집은 발비존의 집들과 같은 범주로 분류될 것이다. 이 판단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벌집이 벌의 활동의 소산이라는 의미에서 본다면 그것이 ‘만들어진 것(인공으로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는 이유도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 즉 이 활동은 엄밀히 자동적이고 직접적이지만 의식적으로 기도된 것은 아니다. 한편 양식 있는 박물학자로서의 우리는 꿀벌을 ‘자연으로 된‘ 존재로 보고 있다. 이 ‘자연으로 된‘ 존재의 자동적 활동의 산물을 ‘만들어진 것(인공적)‘으로 본다면 명백한 모순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좀 더 검토해 보면 알겠지만 모순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프로그램을 짤 때의 잘못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판단의 애매성에서 오는 것이다. 즉 만약에 그 기계가 이번에는 벌집이 아니라 꿀벌 그 자체를 검사한다고 하면, 거기에서 발견되는 것은 극히 주의 깊게 제작된 인공적인 물체일 것이다. 극히 표면적인 검사만으로도 꿀벌에게서는 좌우상칭과 평행이동 등의 단순한 대칭요소가 명백히 발견된다. 또 꿀벌을 한 마리씩 검사해 가는 동안에, 그 컴퓨터는 다음과 같은 점을 알게 될 것이다. 즉 그들의 구조의 극단적인 복잡성(이를테면 복부의 털의 수와 위치, 시맥(날개맥) 등)이 개체마다 충실히 재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러한 존재가 깊이 고려되고 건설적이며 또 가장 세련된 활동의 산물이라는 증거가 된다. 그 기계는 이러한 결정적인 자료를 토대로 화성의 NASA 관리에게 이러한 보고를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ㅡ지구에서 한 기술을 발견하였는데, 그와 비교하면 화성의 기술 같은 것은 거의 원시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라고.
이상에서 우리는 공상과학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어보았는데, 이렇게 길을 우회한 것은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명백한 듯이 보이는 ‘자연으로 된‘ 물체와 ‘인공으로 된‘ 물체의 구별을 확정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예시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구조적(거시적) 기준을 기초로 하면 인공적이란 어떤 것인가를 완벽히 정의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즉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것은, 인간은 기술의 산물과 같은 ‘진짜‘ 공예품의 전부를 포함하면서, 다른 편에서는 결정 구조와 같이, 생물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명백히 자연스런 물체를 배제할 수 있는 정의다. 우리는 결정 구조도 생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연 체계 속에 분류하고 싶기 때문이다. - P24

그러나 우리는 바로 객관성이 가리키는 바에 의하여 생물이 갖는 합목적적 성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생물이 제각기 구조와 성능을 통해서 어떤 목적을 실현하고 또 추구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거기에는 외견상 심각한 인식론상의 모순이 있다. 생물학의 중심적 문제는 바로 이 모순 자체며, 만일 이 모순이 외견상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 문제를 풀어야 하고, 만일 실제로 모순된 것이라면 그것이 근본적으로 해답할 수 없는 것임을 입증해야 한다. - P42

도태이론은 지금까지 제출된 모든 이론 중에서 객관성의 원리와 양립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것은 불변성을 유일한 근본적 특성으로 보고, 합목적성을 불변성에서 파생되는 제2차적 특성으로 보고 있다. 또한 도태이론은 단지 현대 물리학과 양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며, 또 그에 아무런 제한이나 부가도 붙이지 않는 유일한 이론이다. 도태적 진화의 이론이야말로 생물학의 인식록적 수미일관성을 결정적으로 보증하고, ‘객관적 자연‘에 대한 제과학(諸科學) 사이에 그것을 정립시키는 것이다. 확실히 그것은 이론을 떠받들기 위한 유력한 논거는 되지만, 이것만으로 그 이론을 충분히 정당화할 수는 없다. - P44

따라서 한편에서는 생물권, 즉 ‘생명을 가진 물질‘ 속에서만 명백히 작용한다고 생각되는 합목적성의 원리를 인정한다는 일군(一群)의 이론을 정의할 수가 있다. 내가 지금부터 ‘생기설(生氣說)‘ 이라 부르는 이들 이론은 생물과 무생물의 세계 사이에 근본적인 구별을 마련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는 보편적·합목적적 원리에 입각하는 일군의 생각이 있는데, 그에 의하면 이 원리는 생물권의 진화뿐만 아니라 우주의 진화도 지배하고 있으며 생물권의 내부에서는 다만 보다 정밀하고 또 강렬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들 이론은 생물 속에서, 보편적으로 방향이 정해져 있는 진화에서 생겨난 더욱 세련되고 더욱 완벽한 산물을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진화의 도달점이 인간과 인류며, 거기까지 도달한 것은 그렇게 미리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ㅡ나는 이것을 ‘물활설(物活說)‘이라 부르기로 한다ㅡ는 많은 점에서 생기설보다도 흥미 있다. 그러므로 생기설에 대해서는 간단히 일별을 던지는 데 그치기로 한다. - P45

이러한 생각에 베르그송이 근본적인 것으로 보았던 또 하나의 생각이 결부되어 있다. 즉 합리적 지성은 비생명 물질을 지배하는 데는 매우 적합한 수단이지만 생명 현상은 전혀 파악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다. 단지 본능만이 생명의 약동과 동질적인 것으로서 생명 현상에 관해 직접적이며 전체적으로 직관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생명에 대한 분석적·합리적인 논문은 모두 무의미한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에 있어서의 합리적 지성의 고도한 발달에 따라 그 직관력은 중대하고 또 유감스러울 정도의 빈곤화를 초래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직관력의 부(富)를 회복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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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나는 종종 우리가 흑인 노예제라는 이 야비하고도 이질적인 노예 행태에 빠질 수 있을 정도로 천박한 인간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실제로 남부와 북부 모두에는 그 제도에 전념하는 교활한 노예 주인들이 적지 않다. 남부의 노예 감독은 거칠다고 하는데 북부의 노예 감독은 한술 더 뜬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쁜 것은 자신이 자신의 노예 감독이 되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신성에 대해서 떠들다니! 밤낮으로 장터를 찾아다니는 저 큰길의 짐꾼을 보자. 그의 내면에 어떤 신성이 작용하고 있는가? 그의 가장 거룩한 의무는 자기 말들에게 사료와 물을 먹이는 일이다! 운송으로 얻는 이익과 비교할 때 그에게 있어서 자신이 처한 운명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는 지금 평판 좋은 시골 지주 나리가 되기 위해 마차를 몰고 있을까? 그는 얼마나 존엄하며, 또 어느만큼이나 불멸의 존재일까? 하루 온종일 움츠리며 굽실거리는 꼴을, 뭔지 모르는 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라. 그것은 그가 불멸이나 신성의 존재가 아니라 바로 자신에 대해 스스로 내린 평가, 자신의 행위에서 얻게 된 평가의 노예이며 죄수이기 때문이다. 대중의 평가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 내린 평가에 비하면 나약한 폭군에 불과하다.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서 하는 생각, 그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짓거나 방향을 지시한다. 공상과 상상으로 만들어진 이 서인도제도에서 자기 해방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윌버포스가 필요할 것인가? 또한 자신들의 운명에 지나친 관심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죽는 날까지 화장대 방석이나 짜고 있는 이 땅의 숙녀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라! 마치 영원을 손상시키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시간을 죽일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 P13

사치품 대부분, 그리고 이른바 생활 편의품이라고 하는 것들 중 상당수는 없어서 안 될 물건이 아닐 뿐 아니라 인류의 발전에 확실한 장애물이기도 하다. 사치와 편의에 대해 말하자면, 현인들은 가난한 이들보다 훨씬 더 소박하고 빈약한 생활을 누려왔다. 중국, 인도, 페르시아, 그리스 등지의 고대 철학자들은 외적인 부라는 면에서는 누구보다도 가난하면서 내적인 부에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부자였던 계층이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 별로 알고 있는 것이 없다. 하지만 지금 알고 있는 정도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그들과 같은 부류로 좀더 현대적이었던 개혁자와 자선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른바 자유의사에 의한 가난이라 할 수 있는 그 유리한 지점에 오르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인생에 대하여 공정하거나 현명한 관찰자가 될 수 없다. 농업이든 상업이든 문학이든 예술이든 간에 사치스러운 삶의 열매는 사치일 뿐이다. 요즘에는 철학교수는 있지만 철학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오늘날에는 대학교수직이 찬탄의 대상인데, 그것은 한때 산다는 일이 찬탄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 P21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심오한 사상을 갖는다거나 학파를 세우는 일뿐만 아니라 지혜를 너무도 사랑하여 지혜가 지시하는 바에 따라 소박하고 독립적이며 관대하고 믿음성 있게 산다는 것이다.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인생의 제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위대한 학자나 사상가들의 성공은 대체로 왕이나 남자다운 성공이 아니라 아부하는 신하로서의 성공에 불과하다. 실제로 그들의 조상이 그랬듯이 영합함으로써만 겨우 삶을 영위해 나가는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고귀한 인간의 본보기라곤 할 수 없다. 하지만 어째서 인간은 이토록 끊임없이 타락하고 있는 걸까? 무엇이 가문을 영락케 만드는 걸까? 국가를 쇠약케 하고 파멸로 몰아가는 사치의 본질은 무엇일까? 우리의 삶에 사치가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철학자는 외적 삶의 양태에서조차 시대를 앞서는 사람이다. 그는 동시대인들처럼 배불리 먹거나 편안히 자거나 좋은 옷을 입거나 따뜻하게 지내지 못한다. 어떻게 철학자이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방법으로 자기 자신의 생명의 열을 유지하지 못할 수 있단 말인가? - P22

그런 식으로 나 역시 섬세한 재료로 일종의 바구니를 엮었지만 결국 남이 살 만한 물건으로 만들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의 경우에는 그것들을 엮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남들이 내 바구니를 살 만한 것으로 만들 궁리를 하는 대신에 어떻게 하면 남들에게 팔지 않아도 될까를 궁리했던 셈이다. 사람들이 찬미하고 성공했다고 여기는 삶은 한 가지뿐이다. 어째서 우리는 다른 삶들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어느 한 가지 삶만을 과장하는 것일까? - P26

또는 식초 한 방울에 든 세균을 들여다보는 사이에 자기 주위에서 우글대는 괴물에 먹혀버릴 수도 있다. 자신이 캐내어 녹인 광석에서 잭나이프를 만든 아이와(그는 그 과정을 배우기 위해 필요한 책을 읽는다), 대학에서 야금학 강의에 출석하면서 아버지에게서 로저스제 주머니칼을 선물로 받은 아이 둘을 놓고 한 달이 지나면 어느 쪽이 더 많은 발전을 이룩했을까? 둘 중 어느 아이가 손가락을 베기 쉬울 것인가? 나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내가 재학중에 항해학을 수강했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만약 내가 한 번이라도 항구로 나간 적이 있다면 항해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웠을 텐데 말이다. 가난한 학생들조차 정치경제학만 공부하고 또 수업 받고 있는데, 정작 철학과 동의어인 삶의 경제학은 오늘날 대학에서 진지하게 교습되지 않고 있다. 그 결과 학생이 아담 스미스와 리카르도와 세이의 저술을 읽는 동안 그의 아버지는 갚을 길 없는 부채에 빠져 버리는 것이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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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류는 뇌가 커지면서 두 가지 대가를 지불했다. 첫째, 식량을 찾아다니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썼다. 둘째, 근육이 퇴화했다. 국방예산을 교육 부문으로 전용하는 정부처럼 인류는 근육에 쓸 에너지를 뉴런에 투입했다. 이것이 아프리카의 대초원에서 살아남기 좋은 전략이었다고 성급히 결론을 내려버릴 수는 없다. 침팬지는 호모 사피엔스와 논쟁을 벌여 이길 수는 없지만 인간을 헝겊 인형처럼 찢어버릴 완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 우리의 큰 뇌는 좋은 성과를 올리고 있고, 덕분에 우리는 자동차와 총을 만들 수 있다. 자동차 덕분에 우리는 침팬지보다 훨씬 빨리 이동할 수 있고, 레슬링을 하는 대신 총으로 안전한 거리에서 침팬지를 쏠 수 있다. 하지만 차와 총은 최근에 등장한 산물이다. 인간의 신경망은 2백만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성장을 거듭해왔으나, 몇몇 돌칼과 날카로운 막대기를 제외한다면 그것이 이룬 성과는 극히 미미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지난 2백만 년간 인간의 엄청난 뇌 용량 증가를 일으켰을까? 솔직히 우리는 모른다. - P27

이에 비해 인간은 너무나 빨리 정점에 올랐기 때문에, 생태계가 그에 맞춰 적응할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인간 자신도 적응에 실패했다. 지구의 최상위 포식자는 대부분 당당한 존재들이다. 수백만 년간 지배해온 결과 자신감으로 가득해진 것이다. 반면에 사피엔스는 중남미 후진국 독재자에 가깝다. 인간은 최근까지도 사바나의 패배자로 지냈기 때문에, 자신의 지위에 대한 공포와 걱정으로 가득 차 있고 그 때문에 두 배로 잔인하고 위험해졌다. 치명적인 전쟁에서 생태계 파괴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참사 중 많은 수가 이처럼 너무 빠른 도약에서 유래했다. - P31

농업혁명의 핵심이 이것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을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 있게 만드는 능력. 하지만 이런 진화적 계산법에 왜 개인이 신경을 써야 하는가?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호모 사피엔스 DNA 복사본의 개수를 늘리기 위해 삶의 질을 포기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 거래에 동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농업혁명은 덫이었다. - P129

20세기 중반에 과거 남부연합에 속했던 주들에서 자행되었던 인종차별은 19세기 말보다 더욱 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58년 미시시피 대학교에 지원한 흑인 학생 클레넌 킹은 정신병원에 강제 수용되었는데, 판사가 미시시피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 흑인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판결했기 때문이었다. - P210

20세기 전반의 학자들은 모든 문화가 완전하고 조화로우며 언제고 스스로를 규정하는 불변의 본질을 지니고 있다고 가르쳤다. 인간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계관과 사회적, 법적, 정치적 처리방식의 체계를 지녔으며, 이것들은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처럼 순조롭게 운영된다고 했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외부의 간섭이 없는 상태로 남겨진 문화는 변하지 않았다. 변화는 외부에서 가해진 힘이 있을 때만 생겨날 수 있었다. 그래서 인류학자, 역사학자, 정치가 들은 마치 사모아나 태즈메이니아 사람들이 태곳적부터 동일한 신념과 규범과 가치관을 지니고 살았던 것처럼 ‘사모아 문화’니 ‘태즈메이니아 문화’니 하는 식으로 언급했다.
오늘날 문화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진실은 그 반대라는 결론을 내렸다. 모든 문화는 나름의 전형적인 신념, 규범,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이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환경의 변화나 이웃 문화와의 접촉에 반응해 스스로 모습을 끊임없이 바꾼다. 스스로의 내부적 역동성으로 인해 변이를 겪기도 한다. 안정된 생태계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존재하는 문화조차 변화를 피할 수 없다. 모순이 없는 물리법칙과 달리, 인간이 만든 모든 질서는 내적 모순을 지닌다. 문화는 이런 모순을 중재하려고 끊임없이 노럭하며, 이런 과정이 변화에 불을 지핀다.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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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궁의 애정관계를 볼 때에는 언제나 음양이 맞는지를 유념해서 살펴야 한다. 남자는 양간 일간에 음간인 정재가 부부궁이나 자식인 관과 가까이 있고, 여자는 음간 일간에 양간인 정관이 부부궁이나 자식인 식상과 가까이 있는 것이 찰떡궁합이다. 이 경우 정재나 정관이 또 있지 않다면 서로 아끼며 거의 한눈을 팔지 않는다. - P266

4. 나쁜 운에 대처하는 법
다음의 임인일주 사주에는 특색이 있으니, 일지인 식신 인목이 미토 묘지 옆에서 신금의 충을 당해 몹시 약하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이상하게도 아무 일없이 고관절이 자주 아팠다고 한다. 만약 1933년 계유년생이라면 15세부터의 정사대운에는 인사신 삼형살이 걸려 고생이 아주 심했을 것이다. 중년과 말년으로 가면서 점점 좋아질 것이다. 식신이 약함은 물론 일간 276 임수도 약한데 대운이 수와 목으로 흘러 보완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도 2013년 계사년은 물론 2016년 병신년에는 다소 조심해야 한다. 묘지와 충으로 약할 대로 약한 식신 인목이 정사 대운에서의 사화 형살까지 받기 때문이다. 계사년에 몹시 고생했을 것인데, 약한 식신이 다치기 쉬우니, 을미년도 그렇고 병신년에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이렇게 운이 나쁠 때는 흔히 외국에 다녀오라고 한다. 내가 태어나면서 형성된 사주의 에너지가 아주 멀리 다른 곳에 가면 뒤죽박죽으로 엉켜 원래 그대로 작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때는 가능하다면 자신과 식신을 강화시켜 주는 곳으로 바다나 강과 가까우면서 나무가 많은 곳에 사는 것이 좋고, 사는 곳의 지명을 수나 목이 들 277 어간 곳을 택하는 것도 방법이다. 물론 검은색이나 푸른색 옷으로 자신과 식상을 강화시켜도 되고, 집안에 어항이나 화분을 많이 두어도 좋다. 운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 매사에 언행을 조심하고 덕을 베풀며 건강을 챙기는 것이 우선이다. 나이 들어 아주 나쁜 운이 왔다면, 세상의 활동을 접고 조용히 심신을 안정시키고 수행을 하거나 그동안 해 보고 싶었던 공부를 하면서 지내는 것이 최상이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육체적인 욕망이나 안락함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므로 타고난 사주의 인자를 무화시키는 것이고 이 때문에 나쁜 운이 와도 내 사주의 에너지가 운과 강하게 부딪히지 않고 넘어가기 쉽다. - P275

일반적으로 알아야 할 사실 하나는 사주에서 식상이 약하면 말을 굉장히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잘한다는 것이다. 식상이 아예 사주에 없으면 말하는 기운이 없어 말이 투박하고 재미가 없다. 그렇지만 식상이 약할 경우, 그 기운이 약해 함부로 내뱉지 않고 남들의 눈치를 살피며 가능한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즐겁게 이야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강한 것만이 굳이 좋다고 볼 필요는 없다. 어떤 육친이 사주에 강하게 있는데 또 운에서 강하게 오면, 그것을 반드시 실현하기 위해 피를 보는 싸움도 마다하지 않아 몹시 피곤한 삶을 살게 된다. 곧 상황에 따라 강하면 강한 그대로 약하면 약한 그대로 잘 사용할 수도 있고 함부로 마구 사용할 수도 있으니, 그것을 알고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응용할 줄 알아야 한다. - P278

물론 남자의 경우도 식상관이 유흥으로 나타 283 나 주색잡기로 사용할 수 있는데, 이것은 여자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 P282

한쪽으로 치우친 사주 때문에 남녀 관계로 잘못되는 경우는 막기가 아주 어렵다. 사람의 기본적인 욕망 중에서 특히 성적인 욕망은 다른 것보다 강하다. 그리하여 절제가 없으면 윤리적인 문제는 차치하고 치정 관계로 곤란을 당하기 쉬우니, 굳은 마음을 가지고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사주를 안다면 무엇보다 가정에 충실하고 남편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도록 노력하고, 넘치는 기운은 취미 생활이나 종교 생활 또는 수행으로 극복해야 한다. 종교 생활이나 수행이 싫다면 마음을 가다듬는 책이라도 가까이 두고 틈날 때마다 보면서 마음을 정화시켜야 한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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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 언어에 대한 장자의 원칙적인 입장을 분석해 보았다. 그렇다면 장자는 어떤 식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었으며, 또한 구체적 삶에서 과연 어떤 식으로 언어를 사용했을까? 『장자』의 「제물론」 편에 등장하는 다음의 유명한 에피소드는 우리의 이 같은 궁금증을 해소해 줄 것이다.



원숭이 키우는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 셋, 저녁에 넷을 주겠다"라고 말했다.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러면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겠다"라고 말했다.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 『장자』, 「제물론」



방금 읽어 본 것은 ‘조삼모사’라는 고사로 더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간사한 꾀로 남을 속일 때 흔히 언급되곤 하지만, 장자가 강조하려고 했던 것은 그런 맥락의 의미가 아니었다. 이 에피소드를 읽을 때는 다음과 같은 단서를 고려해야 한다. 그것은 원숭이 키우는 사람, 즉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원숭이들을 무척 아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주인공에게는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다. 경제적 사정으로 인해 원숭이들에게 줄 수 있는 도토리의 양을 7개로 줄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원숭이들을 아끼지 않았다면, 그는 아예 원숭이들을 내다 팔아서 경제적 곤란을 모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잘 키워 온 원숭이들을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주인공은 심사숙고하여 아침에 도토리를 세 개 주고, 저녁에는 네 개를 주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것이 그가 원숭이와 소통하기 위해 제안한 첫 번째 도였다. 아마도 그는 저녁에 많이 주어야 원숭이들이 숙면을 취할 것이라고 추측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첫 번째 제안은 여지없이 거부되고 만다.

주인공은 원숭이들과 대화하기 위한 길을 잘못 뚫은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실망하지 않고 아침에 네 개를 주고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는 두 번째 제안을 다시 내놓는다. 원숭이와 소통하려는 두 번째 도인 셈이다. 이때 다행스럽게도 원숭이들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마침내 원숭이들의 마음에 이르는 길이 새로 만들어진 셈이다.

방금 우리는 "도는 걸어 다녔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고, 사물은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그렇게 구분된 것"이라는 장자의 전언을 풀어 주는 한 가지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보았다. 계속 도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리고 새로운 제안을 계속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모두 원숭이로 상징되는 타자의 타자성 때문이었던 셈이다. 물론 새로 만들어진 도 혹은 언어가 지속적으로 통용 가능한 것으로 남을지의 여부는 여전히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 P487

사실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은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역설에 빠질 때 우리가 흔히 정신적 분열증에 노출된다는 점이다. 베이트슨은 ‘이중구속‘이란 조건 속에서 우리가 분열증에 빠질 수 있다고 지적했던 적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이중구속의 사례로 인용했던 말들이 대부분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벌을 주면서) ‘이것을 벌로 생각하지 마라‘, (처벌을 하면서) ‘나를 처벌의 행위자로 생각하지 마라‘, ‘내가 금지한 것에 복종하지 마라‘, ‘네가 반드시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생각하지 마라‘ …… 등등이다. 이중구속이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에 의해 고통받을 때는 다른 예들이 가능하다. 예를 들면 부모 중 한 사람은 다른 부모의 명령을 더 추상적인 차원에서 부정할 수 있다. 『마음의 생태학』



베이트슨이 든 이중구속의 예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내가 금지한 것에 복종하지 마라"라는 어머니의 말을 생각해 보자. 어머니에게 이 말을 듣는 순간, 아이는 몹시 당혹스러울 것이다. 어머니가 금지한 행동을 수행하는 순간, 아이는 어머니의 말을 따른 것이고 동시에 어긴 셈이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머니가 금지한 행동을 수행하지 않는 순간, 아이는 어머니의 말을 어긴 것이며 동시에 따른 셈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분열증적 상황에 빠지게 될 것이다. 지금 어머니는 자신이 금지한 것을 나보고 하라는 것일까, 하지 말라는 것일까? 그러나 이런 말을 듣는다고 모든 아이들이 분열증에 빠지게 될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들의 변덕이나 경솔함에 의해 내뱉어진 이중구속의 명령을 듣고도 분열증에 빠지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논의를 단순화하기 위해서 베이트슨이 들고 있는 이중구속의 또 다른 예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아이에게 손을 들고 있으라고 하면서 "이것을 벌이라고 생각하지는 마라"라고 아이의 어머니가 말했다고 해보자. 어머니에게서 이 말을 듣고 과연 모든 아이들이 당혹스럽게 생각할까? 간혹 이중구속의 논리에 빠져 분열증을 느끼는 아이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논리적으로 보았을 때 명확한 이중구속의 사례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분열증에 빠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이들이 어머니의 이야기가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그냥 ‘수사학적‘인 표현이라는 사실을 지레짐작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령 그들은 논리적으로는 분명 모순적인 어머니의 말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행동을 잘못했기 때문에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래야 다시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테니까. 네가 꼭 미워서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네가 잘 되기를 바라는 엄마의 마음 때문에 그런 것이란다. 그러니 이것을 벌이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앞서 언급한 에피메니데스의 역설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끝끝내 역설로만 보이는 사람들은 논리를 맹신하는 사람들의 경우뿐이다. 이 점에서는 철학자 러셀도 예외가 아닐 수 없다. "에피메니데스라는 크레타 사람이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했다"라는 명제는 ‘논리‘의 수준에서는 여전히 역설을 일으킨다. 그렇기 때문에 러셀은 1차 명제와 2차 명제를 구분하는 논리적 절차를 통해 이 역설을 없애려는 부질없는 노력을 시도했던 것이다. 하지만 ‘수사학‘의 수준에서는 이 명제가 전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하자 누군가가 ‘너도 크레타 사람이니까 너의 말은 역설이다‘라고 말했다면, 당사자 에피메니데스는 당혹감을 느끼고 침묵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상대방이 대화를 나눌 필요도 없는 고지식한 사람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모든‘이란 단어가 ‘대부분‘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과 대화한다는 것은 난감한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도 없어"라고 말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러셀이나 베이트슨이 이러한 표현을 들었다면 여전히 역설이라고 혹은 이중구속이라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어떤 문장을 역설로 만드는 것은 그 문장의 내용이 아니라 논리를 맹신하는 사람들의 집착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자신의 『국가』 안에서 시인들을 추방하려고 했던 플라톤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플라톤은 시인이 역설적인 표현이나 모순적인 묘사 없이는 자신의 미묘한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데아의 자기동일성만을 추구했던 플라톤은 이 점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마치 사랑의 고뇌에 빠진 애인에게 "나를 사랑하거나 혹은 사랑하지 않거나 둘 중에 하나일 수밖에 없다"라고 따져 묻는 사람과도 비슷했던 것이다.

고대의 플라톤으로부터 현대의 러셀에 이르기까지, 논리중심주의 혹은 이성주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매우 불행한 일일지 모르지만, 사실 논리의 한계는 매우 명확한 것이다. 누구에게든 적용 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논리에는 타자란 것이 전혀 고려되지 않기 때문이다. 논리를 맹신하는 사람들이 대화 상대방, 즉 타자의 속내를 읽으려 하지 않고 말꼬리만을 잡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바로 이런 측면 때문이다. 이 점에서 논리는 보편적인 것 같지만, 그 내면에 지독한 유아론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경향은 논리를 맹신하는 사람이 ‘모든‘ 혹은 ‘~하지만 동시에 ~하지 않는‘과 같은 언어 표현에 과도하게 집착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수사학‘은 항상 타자를 염두에 두고 진행된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수사학은 언어의 표면적 내용에 집착하지 않고 타자의 속내를 읽으려는 인문학적 감수성을 갖추고 있는 사람에게만 적용된다고 할 수 있겠다. 논리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우리에게는 비트겐슈타인의 경우에서 확인되듯이 ‘수사학적 전회‘가 불가피하다고 볼 수 있다. - P506

코멘터리 혜시 VS 공손룡

고대 그리스철학에서 논리가 발달했던 이유는 당시 폴리스가 제한적이나마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던 곳이었다는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인정되는 폴리스 주민으로서 당시 그리스 사람들은 상대방을 폭력이 아니라 논리로 설득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제자백가는 고대 그리스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조건에서 자신들의 사유를 피력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군주들이 자신의 이론을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자신의 철학을 현실화시킬 창구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제자백가의 그들은 다분히 수사학적으로 진행된다. 복잡한 논리보다는 정서적으로 군주를 감동시켜야만 했기 때문이다. 제자백가의 저술에서 논증보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들, 전설, 우화, 에피소드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이것이 곧 동양의 사유가 논리를 거부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인가를 누군가에게 주장한다면, 그의 최종 목적은 상대방이 자기의 주장을 따르도록 설득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제대로 설득할 수 있을까? 그 방법은 물론 설득해야만 하는 상대방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 상대방이 자신과 동등한 권리와 자신과 유사한 지적 상태를 보유하고 있다면, ‘논리’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다시 말해 상대방의 지적인 수준이 자신과 다르거나 혹은 신분의 차이가 현격하다면, ‘수사학’이 가장 좋은 설득의 한 방법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제자백가 가운데 혜시와 공손룡으로 상징되는 명가가 왜 독특한 성격의 ‘논리’를 지향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혜시가 ‘합리론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고 공손룡이 ‘경험론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상가는 결국 자신들과는 다른 입장과 지위를 가진 한 나라의 군주들을 혹은 다른 사상가들을 상대하면서 설득의 논리를 피력했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 P569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죽여 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 그렇게 한다면 비로소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임제어록』



정통 인도철학에서 해탈은 윤회의 수레바퀴로부터 벗어나서 다시는 윤회하지 않고 우리의 아트만이 브라흐만에 머물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불교에서의 해탈은 본질과 실체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났을 때의 자유를 상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해탈이란 다른 어떤 것의 지배도 받지 않고 스스로 주인으로 서게 되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임제가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죽여 버려라"라고 그토록 강하게 역설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해탈에 대한 지나친 열망 때문에 자기 내면에 부처의 모습이 자꾸 떠오르면 이것마저도 제거해야 한다고 보았다. 부처가 되려는 열망은 고통을 낳아 오히려 해탈하는 데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외적으로 스승을 만났을 때 그 스승이 자신의 모범이나 혹은 이상향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결국 그 스승도 제거하라고 말한다. 스승을 본받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집착이며 해탈의 장애물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임제가 현실적으로 직접 스승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권위의 상징으로서 내면에 자리 잡은 스승의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이런 그에게 종밀의 자성청정심은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아마도 그는 ‘자성청정심‘을 비유하는 맑은 거울 자체를 깨 버려야 해탈할 수 있다고 역설했을 것이다. 임제가 죽이라고 역설했던 대상들은 사실 구체적인 현실적 대상들이 아니라, 내면에 우리를 지배하는 주인들로 들어서 있는 이상향 혹은 특정 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가 죽이려고 했던 대상은 프로이트의 용어를 빌리자면 ‘초자아‘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육체적 욕망을 반영하는 이드, 사회적 금기를 반영하는 초자아, 그리고 자아라는 마음의 위상학을 고려한다면, 초자아를 제거했을 때 남는 것은 자아와 이드뿐일 것이다.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조건도 그대로 남겨지지만 말이다. 초자아를 제거한 자아는 이제 자신의 육체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 사이를 직접 매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임제의 다음 구절은 이런 측면에서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임제가 법당에 오르면서 말했다. "‘벌거벗은 신체‘에 하나의 ‘무위진인‘이 있어서 항상 그대들의 얼굴에 출입하고 있다. 아직도 이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거듭 살펴보아라." 『임제어록』



집착의 근원인 이상적인 초자아를 제거하는 순간, 우리의 자아는 자유를 얻게 된다. 임제의 ‘무위진인‘이란 것은 바로 자유를 얻은 자아를 의미한다. ‘무위‘라는 말은 정해진 자리가 없다는 뜻이다. 선생 앞에서는 제자의 자리, 군주 앞에서는 신하의 자리, 아내 앞에서는 남편의 자리, 학생 앞에서는 선생의 자리, 남편 앞에서는 아내의 자리 등, 자리라는 것은 바로 자신에게 기대되는 임무나 역할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임무나 역할로 인해 우리는 자신의 삶을 검열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리‘란 결국 앞서 말한 초자아의 기능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임제가 참다운 사람, 즉 진인의 수식어로 ‘자리가 없음‘을 든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주의를 기울여 보아야 할 것은, 초자아가 제거되었을 때 비로소 자아와 이드는 서로 화해하게 된다는 점이다. 초자아가 진정으로 우려했던 것은 바로 육체적 욕망, 즉 이드가 자아를 지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초자아를 제거한 자아는 이제 이드를 검열할 이유가 없어진다. 이제 우리 자아는 이드의 욕망, 혹은 육체적 역능을 마음껏 향유하는 주체가 된다. 임제가 "‘벌거벗은 신체‘에 하나의 ‘무위진인‘이 있어서 항상 그대들의 얼굴에 출입하고 있다"라고 말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벌거벗은 신체란 바로 검열로부터 벗어난 우리의 육체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초자아를 제거하자마자 자아는 무위진인이 되고 결국 벌거벗은 신체와 화해하게 된다. 자유를 얻은 우리가 신체적 자아이면서도 동시에 자아적 신체로 통일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위진인 혹은 벌거벗은 신체는 어떻게 현실의 삶을 영위하게 될까?



불교의 가르침에는 특별히 공부할 곳이 없으니, 다만 평상시에 일없이 똥을 누고 소변을 보며,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며, 피곤하면 누워서 쉬는 것일 뿐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비웃겠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알아들을 것이다. 옛사람은 "외부로 치달아서 공부하는 자들은 모두 멍청한 놈들이다"라고 하였다. 그대들이 어느 곳에서나 주인이 된다면 자신이 있는 그곳이 모두 참될 것이다. 『임제어록』



평상심이 바로 도라고 사자후를 토했던 선종의 정신은 바로 이로부터 생긴 것이다. 세계에 대한 모든 생각이 단지 마음으로 수렴된다고 이야기했던 불교의 사유가 이제 임제 선사를 통해서 생활과 몸의 세계로 내려오게 된 것이다. 구체적 삶의 세계 속에 이미 진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임제의 통찰은, 비트겐슈타인의 다음 이야기를 통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에 오직 사다리를 통해서만 올라갈 수 있다면, 나는 거기에 도달하려는 것을 포기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정말로 가야만 하는 곳, 그곳에 나는 원래 이미 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사다리에 의해 도달될 수 있는 곳은 나에게 흥미를 주지 못한다. 『문화와 가치』



『논리철학논고』에서 청년 비트겐슈타인은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한다"라고 강조했던 적이 있다. 이것은 물론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면서 ‘말할 수 없는 세계‘로 건너가려는 그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철학적으로 성숙해지면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초월에의 의지를 스스로 내던지고 만다. "사다리에 의해 도달될 수 있는 곳은 나에게 흥미를 주지 못한다"라고 술회할 정도로 말이다. 마침내 그는 임제가 도달했던 생활 세계에 대한 긍정에 이르렀던 셈이다. "내가 정말로 가야 하는 곳, 그곳에 나는 원래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배변의 욕구가 느껴지면 배변을 하고, 추우면 옷을 입고, 배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누워서 쉰다. 너무나 쉽지 않은가? 지금 임제는 자유를 되찾자마자, 우리가 신체적 역량과 정신적 역량의 통일 속에서 삶을 영위하게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일상적인 사람들은 배변의 욕구를 느끼지만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서 참는다. 또 그들은 춥지만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 옷을 입지 않는다. 그들은 배고프지만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서 먹기를 거부하기도 한다. 심지어 그들은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 피곤하지만 졸음을 쫓기까지 한다. 이것은 그들이 자신의 삶의 역량이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를 숭배하기 때문이다.

다른 무엇인가의 자리에는 ‘자본‘, ‘국가‘, ‘관습‘, ‘사회적 통념‘, ‘이상‘, ‘신‘, ‘부처‘, ‘불성‘, ‘자성청정심‘, ‘인간의 본성‘ 등 어느 것이라도 들어올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부자유가 놓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임제는 자신의 - P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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