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어려운 일은 남의 고통을 ‘고치겠다고‘ 덤벼들지 않는 일, 그냥 그 사람의 신비와 고통의 가장자리에서 공손하게 가만히 서 있는 일이다. 그렇게 서 있다 보면 자신이 쓸모없고 무력하다는 느낌이 든다. 바로 우울증에 빠진 사람이 이런 느낌을 갖고 있는 것이다. - P122

적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누군가 ‘저 바깥에‘ 있는 사람을 적으로 만들 방법을 수천 가지나 찾아낸다. - P154

"만약 당신이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다면 그 안으로 뛰어드세요!" - P160

왜 사람들은 위압적이고 험난한 내면으로의 여행을 떠나려 하느냐고? 왜냐하면 자기가 처한 내적인 상황에서 빠져 나올 방법이 그것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P160

그늘을 드리우는 첫 번째 괴물은 자기 정체성과 존재 가치에 대한 불안이다. 많은 리더들이 외향적인 성향을 갖고 있어서 이 그늘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외향성은 때로 자기 불신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발전되기도 한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아니면 단지 그 문제를 피하기 위해 외적 활동으로 뛰어든다. 이것은 특히 남성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증후군으로 나타난다. 자기 정체성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어떤 외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다 그 역할을 빼앗기면 우울증에 빠지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다. - P16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날의 지배 전략은 고통을 사유화하고, 그럼으로써 고통의 사회성을 은폐하여 고통의 사회화와 정치화를 가로막는 것에 주력한다. 정치화는 사적인 것을 공적인 것으로 번역하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에는 오히려 공적인 것이 사적인 것으로 해체된다. 공공성은 사적 공간들로 분해된다.
공적 공간과 경청자들의 공동체, 그리고 정치적 경청자 집단을 만들어내려는 정치적 의지는 근본적으로 사라지고 있다. 디지털 네트워크화는 이러한 과정을 촉진시킨다. 인터넷은 오늘날 공동의 소통 행위 공간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인터넷은 오히려 자아의 전시 공간으로 해체되고, 이 공간들 안에서 사람들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광고한다. - P116

미하엘 엔데의 《모모》에서 우리는 경청의 윤리학을 읽어낼 수 있다. 모모의 우선적인 특징은 시간이 많다는 것이다. "모모가 넉넉히 갖고 있는 것은 시간뿐이었다." 모모의 시간은 특별한 시간이다. 이 시간은 타자의 시간이다. 다시 말해 모모가 타인들을 경청함으로써 그들에게 주는 시간이다. 사람들은 모모의 뛰어난 경청 능력을 칭찬한다. 모모는 경청자로서 등장한다. "어린 모모가 누구보다도 더 잘할 수 있는 것은 경청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딱히 특별한 능력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하는 독자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경청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진실로 경청할 줄 아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게다가 모모터럼 경청할 줄 아는 사람은 세상에 모모밖에 없었다." 모모는 그저 거기에 앉아 들을 뿐이다. 그런데도 모모의 경청은 기적을 낳는다. 모모는 사람들이 혼자서는 결코 떠올릴 수 없었을 생각들을 하게 만들었다. 실로 모모의 경청은 헤르만 브로흐의 환대하는 경청, 타인을 그 자신에게로 해방시키는 경청을 연상시킨다. "그럴 때 모모는 그 크고 짙은 눈으로 다른 사람을 쳐다보았고, 상대는 자기 안에 있으리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던 생각들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경청하면 혼란에 빠지거나 어찌할 줄 모르던 사람들도 갑자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사람들도 갑자기 자신이 자유롭다고, 용기가 솟는다고 느꼈다. 불행하거나 우울한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자신감과 기쁨을 느꼈다. 또 자신의 삶은 완전히 실패했고 아무 의미가 없으며, 자기는 수백만의 사람들 중 하나에 불과하고, 전혀 중요하지도 않고, 고장 난 냄비처럼 다른 사람들로 금세 교체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린 모모에게 가서 이런 모든 이야기들을 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말하는 도중에 이미 자기가 자신을 아주 잘못 생각했고, 정확하게 자신과 같은 사람은 세상에서 단 한 명뿐이고, 그래서 자신은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모모는 그렇게 경청할 줄 알았다!" 경청은 누구에게나 그에게 속한 것을 되돌려 준다. 모모는 순수한 경청만으로 싸움도 조정한다. 경청은 화해시키고, 치유하고, 구원한다. "언젠가는 어린 소년 하나가 모모에게 노래를 하지 않는 카나리아를 데리고 왔다. 모모에게는 훨씬 더 어려운 과제였다. 모모는 일주일 내내 그 새를 경청해야 했다. 그러자 결국 새는 다시 지저귀고 환호하기 시작했다." - P1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신들이 가장 행복하고 복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행동을 그들의 것으로 볼 수 있을까? 이를테면 정의로운 행동? [......] 아니면 용기있는 행동? 마치 신들도 무시무시한 대상이나 위험 앞에서 꿋꿋이 버티는 것이 윤리적으로 아름다운 행위라서 그렇게 해야 하기라도 하다는 듯이? [......] 살아 있는 자(이 문맥에서는 신을 가리킴ㅡ역자)에게서 미덕과 영리함에 따른 행동의 가능성을 빼고 나면 [......] 사유밖에는 남는 것이 없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복된 활동으로서 다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신의 활동은 사유하는 활동일 수밖에 없다." - P170

"겉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보다 더 많은 활동을 하는 때는 없으며, 홀로 고독에 빠져 있을 떄만큼 덜 외로운 때도 없다." - P170

"모든 인간사를 경멸하고 지혜의 한참 아래에 있는 것으로 본다면, 그리고 언제나 사유 속에서 오직 영원한 것과 신적인 것에만 몰두한다면, 대체 어떤 장군의 자리가, 어떤 공직이, 어떤 왕좌가 이보다 더 높이 보일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은 마음속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사람이라도 불리기는 하지만, 진정한 사람은 오직 사람으로서 고유하게 지닌 능력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더 뛰어난 형태로 발전시키는 자뿐이라는 것을." - P171

거친 일을 기꺼워하는 너희, 빠른 것, 새로운 것, 낯선 것을 좋아하는 모든 자들아,ㅡ너희는 잘 참지 못한다, 너희의 부지런함은 도피이며 자기 자신을 잊으려는 의지이다. 너희가 삶을 더 믿는다면 순간을 위해 스스로를 던져버리는 일도 적어지리라. 하지만 너희에게는 기다릴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내용이 속에 담겨 있지 않구나ㅡ게으를 수 있을 만한 내용조차 없구나!
ㅡ프리드리히 니체 - P172

아렌트가 『활동적 삶』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사유는 소수의 특권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소수는 오늘날에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완전히 정확한 것은 아니다. 어차피 아주 소수에 지나지 않았던 사상가들이 그나마 더 줄어들었다는 것이 아마도 오늘날의 특징적인 징후일 것이다. 어쩌면 사유는 사색적 삶이 활동적 삶에 자리를 내주고 점점 변방으로 밀려나는 바람에 큰 손상을 입은 것인지도 모른다. 사유는 활동 과잉의 초조, 부산함, 불안함을 잘 소화시키지 못한다. 사유는 점점 커져가는 시간 압박 때문에 그저 동일한 것만 재생산한다. 니체도 이미 자기 시대에 위대한 사상가가 거의 없음을 한탄한다. 그는 이러한 결핍에 대한 원인을 "사색적 삶이 퇴조하고, 그러한 삶이 곧잘 과소평가되고 있다"는 데서 찾는다. "노동과 부지런함이ㅡ보통은 위대한 건강의 여신을 추종하지만ㅡ때로 질병처럼 날뛴다." 사유를 위한 시간, 사유 속에서 평정을 찾을 시간이 없는 까닭에, 어긋나는 견해들은 기피의 대상이 된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증오하기 시작한다. 전반적인 초조와 불안 때문에 사유는 깊어지고 과감하게 멀리 밖으로 나아가며 진정으로 다른 무언가를 향해 뛰어오를 수 있는 기회를 찾지 못한다. 사유가 시간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사유를 좌우한다. 이로써 사유는 잠정적이고 무상한 것이 된다. 사유는 더 이상 지속적인 것과 의사소통하지 못한다. 그러나 니체는 "명상의 신령이 막강한 모습으로 돌아와" 이런 한탄도 잠재울 것이라고 믿는다. - P17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린스키는 "타협은 허약함, 우유부단함, 고매한 목적에 대한 배신, 도덕적 원칙의 포기와 같은 어두움을 가지고 있는 단어"이지만, "조직가에게 타협은 핵심적이고 아름다운 단어"라고 주장한다. 그는 "타협은 언제나 실질적인 활동 속에 존재한다. 타협은 거래를 하는 것이다. 거래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숨 고르기, 보통 승리를 의미하며, 타협은 그것을 획득하는 것이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이 무에서 출발한다면 100퍼센트를 요구하고 그 뒤에 30퍼센트 선에서 타협을 하라. 당신은 30퍼센트를 번 것이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회는 끊이지 않는 갈등 그 자체이며, 갈등은 간헐적으로 타협에 의해서만 멈추게 된다. 일단 타협이 이루어지면 바로 그 타협은 갈등, 타협 그리고 끝없이 계속되는 갈등과 타협의 연속을 위한 출발점이 된다. 권력의 통제는 의회에서의 타협과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사이에서의 타협에 바탕을 두고 있다. 타협이 전혀 없는 사회는 전체주의 사회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회를 한 단어로 정의해야 한다면 그 단어는 ‘타협‘일 것이다. - P226

정상용은 공개적인 글이라 점잖게 이야기한 것일 뿐, 여론 주도층에 속하는 호남인들은 사석에선 친노를 아주 매섭게 비판한다. 노무현 정권 시절 권력 핵심에 있던 친노 그룹이 얼마나 오만하게 횡포를 부렸는지를 보여주는 증언과 실화들이 무더기로 쏟아진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공개적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여론 주도층과 일반 시민 사이에 격차가 나타나는 이유다. - P302

일개 지식인도 자신에 대한 언론 보도에 만족하는 법은 드물다. 기사는 학술 논문이 아니다. 자꾸 "맥락을 제거하고 특정 발언만 부각해 왜곡했다"라고 분통을 터뜨릴 게 아니라 특정 발언이 자극적이지 않게끔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노 정권은 조중동 프레임을 탓하기 전에 노 대통령이 스스로 만든 ‘노무현 프레임‘을 깊이 성찰해야 했다. 그걸 하찮게 여겨 계속 그대로 가려면 ‘언론 탓‘은 그만둬야 했다. 언론을 탓할 수도 없고 해선 안 될 일까지 언론 탓을 하는 건 언론 개혁 담론을 희화화해 외려 언론 개혁을 망치는 일이었고 그건 현실로 나타났다. - P306

박근혜는 보이지 않는 측근들, 즉 ‘인의 장막‘에 둘러싸여 있다. 비밀주의가 매우 심해 ‘철의 장막‘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베일 속에 있어 눈을 맞추기가 어렵다. 자신에게 절대 충성을 요구하는데, 그 절대 충성은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라도 자신에 대해 깍듯하게 말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관계가 끝난다. 그래서 직언하는 사람이 없다. 모두가 박근혜에게 잘못 보일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 P373

375, 8 "이념과 국가 안보로 보면 이석기는 ‘불량 의원‘이다. 그는 반국가 단체 민혁당 활동으로 징역을 살았다. 사면 · 복권돼 의원이 됐지만 그는 여전히 종북주의에 빠져 있는 것 같다. 그는 북한 3대 세습은 내재적으로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종북보다 종미가 더 문제라고 하며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라는 주장까지 한다. 그런 이가 국회를 활보하고 국민 세금으로 세비를 받는다는 현실에 분노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불량이어도 법적으로 그는 국회의원이다. 법이 그를 보호하는 한 한국 사회는 그를 인정해야 한다. 설사 그가 악마라고 해도 그를 다루는 방법은 비악마적이어야 한다. 그것이 이석기 같은 비뚤어진 이념 운동가가 넘볼 수 없는 자유 · 민주 사회의 강점이다." (중략)
재미있지 않은가? 이석기 의원직 제명 반대는 야권에서도 진보파들이 하는 주장이다. 피상적인 편 가르기 논리로만 보자면 김진은 진보파다. 노무현 정권의 위선과 나꼼수의 막말에 대한 비판은 주로 보수파가 하는 주장이다. 이 또한 피상적인 편 가르기 논리로만 보자면 김진은 보수파다. 그런데 이런 피상적인 편 가르기 논리가 타당한가? 전혀 타당하지 않다.
정작 이념적 원칙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이석기 의원직 제명 반대는 보수파가 더 나서야 하는 일이고 노무현 정권의 위선과 나꼼수의 막말에 대한 비판은 진보파가 더 나서야 하는 일이다. 물론 우리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김진의 이석기 의원직 제명 반대가 돋보인다. 평소 그의 박정희 존경이 거슬리긴 하지만, 그는 진정한 보수 논객이다. 그의 칼럼에 동의하기 어려울 때가 많아도 그의 칼럼들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 P3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범죄인을 찾아간 기자들이 감금이나 폭행 또는 그 이상의 해를 입어 언론의 역할이 꾸준히 위축돼왔을지 모른다. 그런데 만약 테러범을 만났고, 그가 대중을 상대로 한 대규모 살상을 곧 저지르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면 신고밖에 선택 사항이 없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결국 원칙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된다. 불행히도 지금까지 딱히 정해진 것이 없다. 그래서 이런 기준을 제시해본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있는 경우에는 기자도 한 명의 보통 시민 역할을 한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은 미국 법원에서 개인의 자유를 유보하고 그에게 도덕적 의무를 강제할 때 활용한 개념이다. 이에 비춰본다면 정씨 신고 문제에는 어떤 답이 나올까. 내가 덴마크 현장에 있었다면 계속 기다리는 쪽을 택했을 것 같다."
고려대학교 공대 교수 윤태웅은 「시민적 정체성과 전문가적 정체성」이라는 칼럼에서 이 문제를 ‘시민적 정체성과 전문가적 정체성을 분리하는 문제‘의 관점에서 접근했다. "훌륭한 방송사의 기자가 선의로 좋은 일을 했으니 괜찮다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럼 극우 언론사의 기자가 수배 중인 해고 노동자를 뒤쫓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경찰에 알리는 경우는 어떤가요? 기자의 가치관이 판단의 기준일까요? 간단치 않습니다. 시민으로서 신고하고 기자로서 취재한 제이티비시 기자의 선택이 정당했다 하더라도, 제기된 문제는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가 있겠다 싶습니다(참고로 제가 제이티비시 기자였어도 신고는 했을 것 같습니다. 다만, 그 이후의 영상을 방송해야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P259

이 기자들은 "왜 진작 나서서 이 사태를 막지 못하고 이제 와서 이러냐고 혼내셔도 좋다. 일선에서 취재한 우리 막내 기자를 탓하셔도 좋다. 다만 엠비시가 다시 정상화될 수 있도록 욕하고, 비난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달라"고 했다. "(시청자 여러분들이) 엠비시를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달라"고 호소했다. 영상 말미의 자막에는 "‘보도 정상화‘를 위해 김장겸 보도본부장, 최기화 보도국장 사퇴, 해직 · 징계 기자의 복귀를 요구한다"고 밝혔다. 2012년 파업 이후 MBC에서 해고된 박성제 기자는 페이스북에 "아마 이 영상을 만든 후배들은 중징계를 받겠지만 MBC 뉴스를 되살릴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썼다. - P262

손석희는 25년 전 공정방송을 위한 50일 파업을 마친 뒤, 1992년 12월호 『말』과의 인터뷰에서 ‘생에서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원칙‘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실체는 분명하지 않더라도 지금껏 제 일생에 지켜온 어떤 일관성이 있다면 그것을 끝까지 지키고 싶습니다." "나이가 든다고, 지위가 달라진다고 해서 제 자신을 바꾸는 일은 없을 겁니다." - P274

"권력은 종편에서 나온다?"
‘손석희 현상‘에 대한 나의 기록은 앞으로도 계속되겠지만, 이 글은 이제 여기서 끝맺어야 할 것 같다. 종편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마무리를 지어보자. 변호사 정정훈은 2015년 12월 16일 『한겨레』에 「권력은 종편에서 나온다?」는 칼럼을 기고했는데, 이 칼럼에 대해 ‘konstar‘라는 아이디를 가진 네티즌이 장문의 댓글 반론을 폈다. 그 내용이 재미있다. 잠시 감상해보자.
"나도 그 <내부자들> 이런 영화를 봤습니다. 거기 보면 보수 언론 논설주간인 이강희(백윤식 분)가 국가 운영의 디자이너처럼 묘사됩니다. 집권당 후보나 재벌 회장까지 그가 조정하는 것처럼 말이죠. 매우 비현실적인 과장입니다. 지금 종편 운운하는데, 글쓴이, 국민은 종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에요. 종편이 내가 하고픈 말을 해주니까 시원하게 생각하면서 보는 거요. 아무리 김대중이라도 『한겨레』같은 헛소리해보세요. 독자들이 당장 떠나갑니다. 명심하세요.
예전에 강준만이란 자가 안티조선운동을 할 때, 그 세력들은 국민들이 『조선일보』를 보고 세뇌당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국민들은 『조선일보』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고 『조선일보』가 자신들의 의견을 시원하게 대변해주니까 애독하는 거예요. 이젠 종편 탓을 합니다. 이 글쓴이는 종편을 보면, 아 박근헤 지지해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던가요? 아니지요? 당신도 생각이 있으니까. 보슈, 다른 국민들도 당신만큼은 알고 선택합니다. 그걸 아세요.
이 글쓴이와 친노들에게 좀 묻지요. 종편을 보면 새누리당과 박근혜를 지지해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던가요? 아니라구요? 그런데 왜 다른 시청자들은 종편에 넘어간다고 생각하나요? 당신네들이 국민들보다 지적 능력이나 판단력에서 더 우월하고 소신도 있다는 건가요? 진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가당치도 않은 자만심은 지나가는 개구리에게 던져주길 바랍니다. 친노들, 당신들보다 못한 국민은 없어요.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제 파악을 하길 바랍니다.
나는 일개 서민에 불과하지만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이라도 내 생각과 다르면 그냥 웃고 넘깁니다. 『한겨레신문』의 무슨 저 곽병찬, 성한용, 김종구니 무슨 김의겸이니 이런 사람들 글……읽어보고 내가 현혹되겠어요? 어림도 없습니다. 나도 그런데 다른 국민들은 어떨까요? 대한민국에 이 Konstar보다 못한 국민은 없습니다. 다들 소신이 있고 생각이 있으며 주관이 있는 거예요. 누가 언론에 넘어간다는 가당치도 않은 억지부터 접어야 글을 제대로 쓸 겝니다." - P276

‘의제설정‘과 ‘순진한 냉소주의‘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을망정 ‘konstar‘의 댓글은 꽤 일리도 있고 그럴듯한 주장이다. ‘konstar‘가 의제설정議題 設定, agenda-setting 이론을 좀더 깊이 있게 알고 썼더라면 더욱 좋은 반론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신문의 1면 머리기사나 TV의 저녁 뉴스 첫머리에 어떤 기사를 내보낼 것인가? 언론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어떤 기사는 크게 보도할 수도 있고 작게 보도할 수도 있다. 즉, 기사의 중요성을 언론이 결정하는 것인데, 이게 바로 의제설정이다.
의제설정 권한은 언론의 존재 근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언론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의제설정을 어떻게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 언론의 영향력이 결정되기 떄문이다. 미국의 대선 캠페인을 분석한 저서를 여러 권 낸 바 있는 정치 전문 저널리스트인 시어도어 화이트는 언론의 의제설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국에서 언론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다. 그것은 공중 토론의 의제를 제공하며, 이 대단한 정치적 힘은 어떤 법률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는다. 언론은 사람들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생각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그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독재자, 성직자, 정당, 정당 총재에게나 부여될 수 있는 권한이다."
언론이 특정 이슈를 강조하거나 부각함으로써 수용자들로 하여금 그러한 이슈들을 중요하게 인식하도록 만드는 효과 또는 기능을 가리켜 ‘의제설정 기능‘이라고 한다. 즉, 언론이 수용자들에게 ‘어떻게 생각하도록what to think‘ 하기보다는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도록what to think about‘ 이끈다는 것이다.
미국 정치학자 버나드 코헨은 "언론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생각하라고 말하는 데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할지 모르지만, 무엇에 대해 생각하게끔 하는 데엔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이다" 고 했다. 이 말은 디지털 혁명의 와중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konstar‘가 잘 지적한 것처럼, 언론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생각하라고 말하는 데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혹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konstar‘의 말마따나 그런 가당치도 않은 자만심은 지나가는 개구리에게 던져주는 게 좋겠다. 물론 지나가는 개구리 보기가 쉽진 않을 테니, 지나가는 개에게 던져주는 게 무난하겠다.
이와 관련된 ‘konstar‘의 주장에 대해선 나는 대체적으로 지지를 보낸다. 아니 지지를 보낼 뿐만 아니라 하나를 더 보태고 싶다. 일각(진보 진영)이 거대 보수 언론을 평가할 때에 보이는 ‘순진한 냉소주의naive cynicism‘도 의심의 대상으로 삼으면 좋겠다는 제안이다.
‘순진한 냉소주의‘는 다른 사람이 실제보다 이기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향이나 편견을 가리키는 말로, 심리학자 저스틴 크루거와 토머스 길로비치가 1999년에 제시한 개념이다. 냉전 시 소련의 군축 협상 제의를 미국이 거절한 것이나 정치에서 상대편에게 무슨 속셈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어떤 제안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갈등을 악화시키는 효과를 그 사례로 들 수 있다. - P27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