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정상은 감성 경험 즉 견문을 중시했다. 그렇지만 그는 이 때문에 협애한 경험론에 빠지지는 않았다. 그는 "눈과 귀로 보고 듣는 것을 잘 활용한다면 마음을 넓히기에 충분하다. 그렇지만 그것을 잘 활용하지 못한다면 마음을 협소하게 할 뿐이다"라고 지적하였다. ‘그것을 잘 활용한다’는 말은 감관을 통해 얻은 경험을 이성적 사유로 잘 분석·분별하여 이성의 진일보한 활동 재료로 삼으며, 경험을 누적시켜 보편적인 인식으로 상승시켜 나간다는 뜻이다.

왕정상은 과학 정신을 지닌 철학자였다. 그는 사물을 관찰하는 데 매우 주의를 기울였고 기존의 이론에 대해서도 과감하게 의심하였으며, 실험을 통해 논증하려고 하였다. 보통 사람들은 겨울철 눈꽃은 육각형이고, 봄철 눈꽃은 오각형이라고들 말하면서도 아무도 직접 검증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왕정상만은 "매년 봄눈이 내릴 때마다 그 눈송이를 소매에 올려놓고 관찰해 보았더니, 모두 육각형이더라"라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직접적인 관찰 경험을 통해 봄눈이 오각형이라는 견해의 잘못을 검증해 냈다.

옛 글에서는 땅벌은 새끼를 직접 낳지 않고 뽕나무 위의 애벌레를 자기 벌집 속에 물어다 넣는데, 칠 일이 지나면 그 애벌레가 새끼 땅벌로 변한다고 하였다. 왕정상은 집에 거처하면서 매년 땅벌집을 관찰하였다. 그는 땅벌이 자기 벌집에서 새끼를 낳은 뒤 각종 벌레를 자기 벌집 속에 채워 넣었으며, 며칠이 지나자 새끼가 모양을 갖춰 태어나는 것을 목격하였다. 땅벌 새끼는 벌레를 먹은 뒤 벌집을 뚫고 나온 것이다. 왕정상은 "수년 동안 관찰해 봐도 그렇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하였따. 그는 이 사실을 통해 옛 사람들의 많은 견해들이 실제적인 검증을 거치지 않은 주장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예들은 왕정상이 과학적 태도를 확고하게 지니고 있었음을 밝혀 주며, 또 명대 기학이 실학으로 발전해 나갔던 논리적인 필연성을 드러내 준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철학은 동시대의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세계관과 논증의 방법론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 P456

왕기) 따라서 ‘지’는 청정심이며 ‘식’은 분별심이다. ‘지’는 머무는 곳이 없으면서도 마음을 낳지만, ‘식’은 굳어지고 막히며 선택하면서 집착한다. ‘지’와 ‘식’의 관계는 마음과 뜻의 관계와 유사하다. 이들의 구별은 모두 윤리적인 의미와 존재론적인 의미를 겸한다. 덕성 양지인 동시에 청정 본심이기도 하다. 또 ‘지’와 ‘식’의 관계는 성과 정의 관계와도 유사하다. 왕기는 "뜻이란 마음의 작용이고, 정이란 성의 자식이며, ‘식’이란 ‘지’의 구별이다. 마음은 본래 순수하지만 뜻에는 선악이 있다. 성은 본래 적막하지만 정에는 진위가 있다. ‘지’는 본래 혼연하지만, ‘식’에는 구별이 있다"고 하였다. 마음과 성과 ‘지’는 모두 본체이고, 뜻과 정과 ‘식’은 모두 작용이다. ‘식’의 특징은, 그것이 윤리적이며 생존적인 함의를 지닐 뿐만 아니라 인식적인 의미도 함께 갖는다는 데 있다. ‘식’은 많이 배우고 많이 들으면서 이해를 추구하는 경향을 띠기 때문에 반성적인 양지와 대립된다. 그러므로 지식에 관한 논변에는 분명히 학문 공부의 내용이 담겨 있다. 지식에 관한 논변은 전체적인 심학의 전통 속에서 중요한 부분을 구성한다. - P502

왕간) 어떤 사람이 ‘안신설’을 의심하면서 "백이와 숙제는 몸을 편안케 하지는 못했지만, 마음만은 편안케 하였다"고 말했다. 그러자 "몸을 편안케 하고 마음을 편안케 하는 것이 가장 좋다. 몸은 편안하지 못하면서 마음을 편안케 하는 것은 그 다음이다. 몸도 편안케 하지 못하고 마음도 편안케 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나쁘다. 천지만물 때문에 몸이 위태로워지는 것을 근본을 잃은 것이라고 말한다. 천지만물로부터 몸을 정결하게 하는 것을 말단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고 하였다.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의 곡식을 거부한 채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다. 역대의 유학자들은 모두 그들의 절조를 표창하였다. 맹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생명이란 비록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나,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도덕 이상이다. 따라서 사람이 도덕 이상을 위해 생명을 희생하는 일은 고상한 행위다. 그러나 왕간이 생각할 때, 생명을 지닌 몸이 가장 근본적인 것이므로, 몸이 없다면 그 밖의 것들은 말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왕간은 백이와 숙제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또 왕간은 "사람이 가난에 허덕이면서 몸을 얼리거나 굶긴다면 이 또한 근본을 잃은 것이며, 학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사람이 학문을 하려면 먼저 자신의 생명을 보장할 수 있는 물질적 생활 조건을 구비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학문을 모르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생명 활동을 보장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한 행위는 삶을 도모하는 일(장사하고 농사지으며 노동하는 일을 포괄하여)에서부터 세상을 피해 은둔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왕간의 ‘안신설’은 감성 생명을 아끼고 사랑할 것을 주장하면서 전통적으로 ‘사생취의’의 인물로 받들어 오던 백이·숙제를 비판하였다. 이 때문에 도덕 이상주의의 입장에 선 황종희는 왕간의 이러한 사상이 구차하게 위난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에게 핑계거리를 만들어 주었다고 비판하였다. - P521

이처럼 감성 생명을 본위로 하는 왕간의 사상은 가치관의 입장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왕간의 이러한 사상에서 ‘보신’은 양지의 기본적인 의미이다. 그렇다면 양지는 사람의 생명 충동과 본질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왕간은 양지의 ‘보신’ 의식 속에서 ‘남을 사랑하는’ 윤리를 파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왕간은 묵자와 유사한 논증 방식을 운용하였다. 다시 말해서 남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다. 내가 남을 사랑하는 까닭은 남을 사랑하는 것이 남으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하는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절대적인 도덕 명령도 아니며, 사회적 화합을 이루려는 것도 아니다. 오직 ‘보신’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따름이다. 이러한 윤리관은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전통적인 유가 윤리와 다르다.

이러한 이론은 ‘다른 사람과 내가 서로 감응한다’는 이론을 전제한다. 즉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도 나를 사랑할 것이고, 내가 나만을 이롭게 하고 남을 해롭게 하면 다른 사람도 나에게 그렇게 보복할 것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명철보신’의 윤리학은 비록 최종 목표가 ‘보신’에 있을지라도 결코 이로부터 이기적인 개인주의가 파생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이러한 이론으로부터 ‘나와 다른 사람이 서로 감응하는 관계에 있으므로 상대방의 반응을 통해서 나를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이끌어 낼 수도 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항상 그를 사랑하고, 남을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늘 그를 믿는다. 이것이 감응의 도리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특별히 그 사람이 인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인자하지 못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다른 사람이 나를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특별히 그 사람이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믿을 수 없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타인과 내가 서로 감응하는 관계 속에서 볼 때, 타인의 부도덕한 행위는 내가 도덕적으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은 ‘헤아리는’ 것에서 출발하여 ‘스스로를 반성하는’ 데까지 이르는 것으로서, 여전히 우리를 자아의 수양에 힘쓰도록 이끌어 갈 수 있다. 이것은 ‘오직 곱자만을 바로잡아 나갈 뿐, 네모에서 추구하지 않는다’는 ‘회남 격물’의 해석에서 제공해 준 일종의 상호 감응성의 이론 기초였다.

일반적인 도덕 규범과 도덕 수양에 관해 말하자면, 왕간은 결코 유가의 윤리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평민 노동자 출신이었으며 노동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자신을 보호하고 생명을 아끼며 몸을 사랑하는 평민들의 윤리 관념이 그대로 녹아들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유가 윤리를 설명하고 해석하는 데 묵자와 비슷한 방법을 채용함으로써 자각적이었든 자각적이지 못했든 간에 공리적인 의미의 가치 목표가 보태졌을 따름이다. 이러한 측면들이 그의 윤리관으로 하여금 인생과 가치 체계 속에서 개체적인 감성 생명이 지니는 의미를 돌출시키게 하였다. 의심할 여지 없이, 왕간의 이러한 사상은 ‘세속화된 유가 윤리’의 특질에 한층 더 다가가 있다. 그러므로 문화의 관점에서 볼 때, 왕간의 이러한 사상을 리학의 ‘이단’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정밀하고 빼어난 문화였던 리학의 가치 체계가 민간 문화 속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발전돼 나온 형태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이 사상은 ‘세속화된 유가 윤리’라는 의미에서 긍정되어야 마땅하다. - P522

문화적 시야를 한 걸음 더 확대해 나가자면, 리학은 실제로 11세기 이후 중국의 사상 체계를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전근대 동아시아 각국(조선·월남·일본)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거나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상 체계였다. 송명리학이 근세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공동으로 체현된 사상이었다고 말하더라도 그다지 과장된 주장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리학 체계가 지닌 모든 논리적 연결고리와 실현 가능성을 펼쳐 보이려면, 동아시아 지역 전체의 리학을 종합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점은 지면과 학식의 한계 때문에, 이 책에서는 그러한 임무를 아직 완성할 수 없다는 점이다. 겨우 명대 리학 속에 퇴계 이황에 대한 내용을 서술하는 데 그쳤다. 독자들이 조선 시대 주자학의 발전 내용을 이해하는 데 약간의 도움은 될 수 있을 것이다. 진정으로 동아시아 문명의 관점에서 리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진일보한 연구를 기다려야 한다.

송명리학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문화 유산의 일부분이다. 따라서 송명리학은 엄숙하고도 진지하게 연구돼야 한다. 그리고 송명리학은 여전히 현대의 중국인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문화 전통이며, 모종의 방식으로 어느 정도 우리의 생존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그것을 분석적으로 계승해야 함은 물론이고 시대적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적극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불가항력적인 현대화의 조류와 과정 속에서도, "주나라는 비록 오래된 나라이지만 그 명은 오히려 새롭다"는 옛 경전의 말처럼, 중국 문화가 여전히 인정받고 끊임없이 풍부하게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 P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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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배부르게 먹지 마라
다른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을 때는 배부르게 먹지 말아야 하며, - P116

45.
돼지를 기르고 술을 빚는 것은 재앙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 아니지만 범죄와 소송의 증가는 바로 술로 인한 폐단이 재앙을 만들어 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선왕은 술 마시는 예절을 만들어 술 한잔 주고받는 예법에 손님과 주인이 백 번 절하도록 함으로써 종일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도록 했다. 이것은 선왕이 술로 인한 재앙을 대비하기 위한 조치였다. - P118

46. 음식을 밝히는 사람
음식 밝히는 사람을 사람들이 비천하게 여기는 까닭은 작은 사소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큰 마음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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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재론’과 독일적인 ‘정신’의 부활?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유물론)과 호응하듯이 독일에서도 실재론적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그 중심에 있는 철학자가 마르쿠스 가브리엘입니다. 1980년에 태어나 아직 30대지만 현재 본대학교 교수이며, 발표한 저서도 숱하게 많아서 종종 ‘천재’로 평가받죠.

2013년에 출판된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가 철학서로는 이례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며 가브리엘의 재능을 널리 알렸습니다. 이 책은 굳이 따지자면 전문서라기보다 일반 독자 대상이라서 신실재론이 아주 간결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가브리엘은 신실재론은 ‘포스트모던 이후의 시대에 대한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가브리엘에 따르면 포스트모던의 문제점은 ‘구성주의’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성주의’의 원천은 메이야수와 마찬가지로 칸트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칸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세계를 그 자체로 알기란 불가능하다. 칸트는 우리가 무엇을 알려고 해도 어떤 면에서 인간에 의해 늘 가공된다고 생각했다.

가브리엘은 클라이스트의 ‘녹색 안경’(미디어·기술론적 전환에서 이미 설명했죠)의 예를 인용한 뒤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구성주의는 칸트의 ‘녹색 안경’을 믿는다. 여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음과 같이 덧붙여 설명했다. 우리가 배우는 것은 단 하나의 안경이 아니라 수많은 안경이다. 과학, 정치, 사랑의 언어게임, 시, 다양한 자연언어, 사회적인 규약 같은.

가브리엘은 이런 포스트모던적 구성주의를 대신해 신실재론을 제창했습니다. 그렇다면 신실재론은 어떤 사상일까요? 먼저 가브리엘이 제시한 구체적 예를 들어보죠. 그는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제시했습니다.

아스트리드라는 이름의 한 여성이 소렌토에서 베수비오산을 보고 있다면, 우리(당신과 나)는 나폴리에서 베수비오산을 보고 있다.

먼저 구실재론(가브리엘은 형이상학이라고도 부릅니다)에 따르면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베수비오산뿐입니다. 이 산이 어느 때는 소렌토에서, 또 어느 때는 나폴리에서 우연히 보이는 것뿐입니다. 구성주의 입장에서는 세 가지 대상, 즉 ‘아스트리드가 보는 베수비오산’ ‘당신이 보는 베수비오산’ ‘내가 보는 베수비오산’만 있습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대상과 사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가브리엘이 말하는 신실재론에서는 적어도 네 가지 대상이 존재합니다. ① 베수비오산, ② 소렌토에서 보이는 베수비오산(아스트리드의 관점), ③ 나폴리에서 보이는 베수비오산(당신의 관점), ④ 나폴리에서 보이는 베수비오산(나의 관점)입니다. 그는 이 모두가 존재한다고 생각했죠. 나아가 "화산을 볼 때 느끼는 나의 은밀한 감각조차 사실이다"라고 서술했습니다.

가브리엘에 따르면 구실재론은 ‘보는 사람이 없는 세계’를, 구성주의는 ‘보는 사람의 세계’만을 각각 현실로 간주합니다. 반면에 가브리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며 신실재론을 정당화합니다. "세계는 보는 사람이 없는 세계도 아니고 보는 사람만 있는 세계도 아니다. 이것이 신실재론이다."

이렇게 가브리엘의 신실재론은 물리적 대상만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사상’ ‘마음’ ‘감정’ ‘신념’, 나아가 유니콘 같은 ‘공상’마저도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실재론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가브리엘은 이처럼 존재하는 대상을 확장함으로써 무엇을 의도했을까요?

2015년 출판한 《나는 뇌가 아니다》라는 책 제목이 답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이 책에서 가브리엘은 정신을 뇌에 환원하는 듯한 현대의 자연주의적 경향을 비판했죠. 자연주의에 따르면 물리적 사물이나 그 과정만 존재하고 그 밖의 것은 독자적 의미가 없습니다. 가브리엘의 신실재론은 이런 움직임에 맞서, 근본적 차원에서 존재를 다시 생각해보려 했습니다.

신실재론을 말할 때 우리는 어쩌면 과학적 대상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자연주의를 떠올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가브리엘이 구상하는 신실재론은 과학적 우주만이 아니라 마음(정신)의 고유한 움직임까지 긍정합니다. - P55

결과를 전부 생각한 뒤 움직이려 들면 인간도 아무런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무엇이 목적과 관련된 중요한 결과인지도 확신할 수 없죠. 인간은 단순히 프레임 문제에 구애받지 않고 행동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 탓에 ①번에서처럼 폭파되는 경우도 적지 않고요.

그런데 인공지능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프레임 문제에 빠지지 않고(해결이 아니라) 활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빅데이터를 이용할 수 있어서죠. 자율주행 자동차 실용화를 목표로 삼을 수 있는 것도 그래서가 아닐까요? - P101

최근의 기술적 유행으로서 IoT, 즉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이 급속도로 도입되고 있습니다. 인간을 거치지 않고 사물끼리 통신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의 자율주행을 생각해봅시다. GPS와 레이더와 카메라에서 얻는 모든 정보는 인간을 거치지 않고 자동차로 직접 전달됩니다. 이런 IoT는 가전 분야에 차츰 침투하고 있죠. 이 변화를 새로운 산업혁명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 혁명의 발전 여부는 자율형 인공지능에 달린 것 같습니다.

그러면 자율형 인공지능은 대체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요? 이런 의문에는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이름 붙인 ‘계몽의 변증법’(1947)이라는 개념이 힌트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망명지인 미국에서 《계몽의 변증법》을 집필하고 근대사회의 미래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드러냈습니다.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가는 대신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지는 것일까?

‘계몽’이란 인간을 무지몽매한 미신에서 벗어나게 한 ‘합리적 이성’을 뜻합니다. 근대과학과 근대시민사회와 자본주의경제도 이런 계몽에서 탄생했죠. 그런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 따르면 이런 합리적 계몽은 머지않아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반(反)계몽인 신화와 폭력으로 전환됩니다. 그들은 나치주의와 스탈린주의 같은 ‘전체주의’를 반계몽으로 보았습니다.

계몽에서 반계몽으로 가는 변증법은 인공지능의 미래를 생각할 때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인간에 버금가는 지능을 갖도록 제작되었는데, 이제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율적으로 학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인간의 지능을 크게 뛰어넘으려고 합니다. 인공지능이 인간으로부터 자립하여 상호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머지않아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대항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 《아이, 로봇》에 나오는 로봇 3원칙은 지금까지 공상과학으로만 존재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눈앞에 닥친 미래로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제1조 로봇은 인간에게 위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인간을 모른 척해서도 안 된다.

제2조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 그 명령이 제1조를 위배하는 경우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제3조 로봇은 앞서 제1조 및 제2조를 위배할 위험이 없는 한, 자기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 P107

이 책에 실린 논고 <부디 클론 인간을 처벌하지 말아 주세요>에서 펜스는 과거의 편견과 싸우기는 쉽지만 "현재의 편견과 싸우기는 쉽지 않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과거의 편견이던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을 지금 이 시점에서 비판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 P126

하지만 통상적인 친자관계와 비교했을 때, 복제 인간이 그렇게나 다른 것일까요? 통상적인 부모자식 사이에도 물려받은 유전정보가 평생에 걸쳐 영향을 줍니다. 또 복제 인간으로 태어나도 성장하면 부모에게서 독립해 독자적인 인생을 살게 될 겁니다. 복제 인간은 노예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복제 인간의 무엇이 문제인 걸까요?

복제 인간에게 탄생의 소여성(所與性: 주어진 바)은 어떤 우연적 상황이 아닌 의도적 행위의 결과다. 다른 사람에게는 우연한 사건이지만 복제 기술은 타인에게 책임을 돌릴 여지를 남긴다. 이용 불가능한 영역으로의 의도적인 개입이 귀책 가능성과 함께 도덕적·법적으로 중요한 구별을 만드는 것이다.

일반적인 친자라면 아이가 유전 프로그램을 물려받아도 그것이 우연한 결과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복제 인간은 처음부터 타인이 그에게 어떤 유전 프로그램을 물려줄지 결정합니다. 즉, 하버마스는 타인이 관여하느냐 마느냐가 결정적 차이를 만든다고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설계자와 그 산물의 관계와 유사하며, 둘 사이에 인간관계의 대칭성 조건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왜 문제일까요?

하버마스는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에서 복제 인간을 포함해 인간에 대한 유전자 조작을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그 논거가 바로 다음의 구절입니다.

우연에 의해 이루어져온 종의 진화가 유전자공학이 개입할 수 있는 분야가 되면서 우리가 책임져야 할 행위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생활세계에서는 확실하게 구별되었던 ‘만들어진 존재’와 ‘자연스럽게 탄생한 존재’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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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발리스는 낭만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평범한 것에 높은 의미를, 일상의 것에 신비로운 겉모습을, 잘 아는 것에 모르는 것의 품위를, 유한한 것에 무한한 모습을 주어서 나는 그것을 낭만화한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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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음의 이론을 수행할 수 있을까? - 샐리 앤 테스트

마음의 이론은 특히 다섯 살 이하 어린이들에게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 능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도 물론 있다. 마음의 이론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는 ‘샐리 앤 테스트’라고 불리는 간단한 테스트로 확인해볼 수 있다. 간단한 상황을 그린 만화를 보여주고 그 상황에 대한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하는지 보면 된다.

샐리와 앤이라는 두 명의 아이가 각각 바구니를 가지고 있다. 샐리에게는 구슬이 하나 있다. 앤이 보는 앞에서 샐 리가 이 구슬을 자신의 바구니에 넣는다. 그리고 샐리가 잠시 자리를 비운다.샐 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앤은 샐리의 바구니에 있던 구슬을 꺼내 자기 바구니에 넣는다. 잠시 후 샐 리가 다시 돌아온다. 샐리는 구슬을 어느 바구니에서 꺼낼까?

이 글을 읽은 독자들은 당연히 자기 바구니를 들여다볼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샐리는 앤이 구슬을 옮겨 놓은 것을 모르니까.

아주 쉽고 간단한 것 같지만 이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샐리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봐야 한다. 그런데 만약 다른 사람은 나와 별개로 자기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대답할까? 샐 리가 앤의 바구니에서 구슬을 꺼낼 거라고 답할 것이다. 샐리는 앤이 구슬을 옮긴 사실을 모르지만,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사람의 입장에서는 구슬이 앤의 바구니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대답을 한다면 앤의 바구니를 들여다보는 게 맞다.

실제로 다섯 살이 안 된 어린아이들이나 자폐 증세가 있는 사람 대부분이 이 같은 대답을 한다. 이들에게서는 마음의 이론을 수행할 수 있는 뇌 영역이 제대로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5세 이하의 어린아이들, 또 자폐 증세가 있는 사람 다수는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는 것,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은 나와 독립적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 P230

사랑=성적 욕망?

성적 욕망을 느끼는 대상을 사랑하지 않거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성적 욕망을 전혀 느끼지 않는 경우가 있을까? 당연히 그럴 수 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과 성적 욕망은 완전히 똑같은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낭만적인 사랑, 정신적인 사랑과 성적 욕망이 어떻게 다른지, 그 둘을 구분하려 시도한 연구는 그렇게 많지 않다. 현실 세계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성적 욕망을 느끼고, 또 반대로 성적 욕망을 느끼는 대상과 사랑에 빠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사랑이라는 것은 가족 간에, 부모와 자식 사이에 느끼는 감정을 가리키기도 한다. 또 연인 사이라고 해서 성적 욕망을 매 순간 느끼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도 서로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일종의 ‘애착관계’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을 비롯한 동물들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의지할 수 있고,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상대를 찾게 된다. 그리고 그 대상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는 반대로 나에게 의지하게 하고, 내가 보호하고 안정감을 주는 대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대표적인 관계가 바로 부모와 자식이다. 이런 애착관계에서는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과학자들은 연인 사이에서 순수하게 정신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이 특별히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사람들에게 자신의 연인과, 알고 지낸 기간이나 친밀함을 느끼는 정도가 비슷한 이성인 친구의 사진을 보여주고 뇌의 활성을 확인했다. 다행히도(?!) 두 경우에 대해 뇌에서 활성화되는 영역과 그 정도가 다르게 나타났다.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은 뇌 활성도를 측정하기 전에 설문조사에 응했다. 피험자의 응답에서 그들이 자신이 연인의 사진을 볼 때 느끼는 감정은 성적 욕망이라기보다 정신적인 사랑의 감정인 것으로 나타났다. 즉 이 실험에서 확인한 뇌의 반응은 성적 욕망보다 사랑의 감정을 느낄 때 반응하는 영역이라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사랑하는 사람을 볼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은 시각 영역과 크게 관계가 없었다. 활성화된 영역 중에는 사회적 관계에서 행복함을 느낄 때 활성화된다고 알려진 전대상피질이 있었다. 또 좌뇌의 섬이랑이 활성화되었는데, 섬이랑에서 보통 느낀다고 알려진 혐오감은 앞쪽 부분이 관여하며 여기서는 익숙하지 않은 얼굴에서 매력을 느낄 때 활성화된다고 알려진 뒤쪽 부분이 활성화되었다.

그리고 슬픔이나 우울함과 관계된 것으로 알려진 전전두피질의 오른쪽 중앙 부분과 두려움, 부정적인 감정과 관계된 것으로 알려진 편도체의 뒤쪽 영역은 반대로 그 활성도가 떨어졌다. 전전두피질 영역은 특히 두부자기자극장치(쓴. 머리 표면에 자기장을 발생시킬 수 있는 유도 장치를 대어 뇌에 간접적으로 자극을 가하는 장치)를 통해 인공적으로 억제해주면 우울증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기도 한 영역이다.(왜 전전두피질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김주환교수 주장이랑 다르지?)

이 연구에서 관측된,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볼 때 활성화되는 영역은 다른 감정을 느낄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에 비해 매우 좁은 영역이었으며, 함께 활성화되는 영역 간의 연결이 매우 견고하게 보였다. 어쩌면 진짜 ‘사랑의 회로’가 뇌에 존재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성적 욕망을 느낄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은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볼 때 활성화된 영역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아, 정신적 사랑과 구분됨을 보여주었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볼 때 활성화된 영역의 근처 영역이 일부 활성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 P238

회고절정

사람의 기억은 5세부터 남는다고들 한다. 0세부터 5세까지 있었던 일은 어른이 된 뒤에 기억에 거의 남지 않는다. 그럼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시기는 언제일까?

나이가 든 뒤 과거를 회상해보면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일이 가장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이 시기의 기억이 특별히 선명하게 자주 떠오르는 것을 ‘회고절정’ 현상이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생애 첫 경험을 하기 때문에 기억이 강렬하게 생성될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자아형성에 중요한 시기여서 더 기억에 남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인간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신이 믿고 있는 자아상에 부합하는 행동과 말을 하려고 더욱 노력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뇌가 인식하고 있는 나의 모습과 실제 관찰하는 나의 모습 사이에 괴리가 생긴다. 인간 사회에서는 스스로에 대한 자아상이 형성되는 시기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고, 이 시기에 했던 경험들이 내가 믿고 있는 자아상과 부합하는 경우가 많아 점점 강한 기억으로 남게 된다고 한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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