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die Higgins Trio - Ballad & Standard Higgins
에디 히긴스 트리오 (Eddie Higgins Trio) 노래 / 지니뮤직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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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 히긴스 트리오는 전형적인 피아노 트리오다. 피아노 베이스 드럼 때로는 드럼이 빠지고 기타가 들어가기도 한다. 아시다시피 이 구성이 가장 고즈넉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피아노 음색이 살아있고 대신 베이스나 드럼의 걸걸한 리듬감이 단조로움을 막아준다. 상쾌한 피아노가 풀잎에 이슬방울 튀기듯하면, 베이스가 오래된 마룻바닥같은 소리를 내며 퉁 투둥하고 울린다. 미녀와 야수같은 환상적 배합!-그래서 피아노 트리오는 질리지 않고 오래 들을 수 있다.

이 앨범은 앨범의 자켓부터 아름다운 여인의 머리카락이 하늘높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게 참 괜찮은 느낌이다. 세련되고 우아한 연주이면서도 산들바람같은 스윙감! 이게 이 앨범의 코드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일본의 [Swing Journal]에서 애청자들의 투표를 통해 에디 히긴스의 베스트 컴필레이션 앨범을 만든것이 이 음반이다. 참고로 이 집계에 의하면, 에디 히긴스의 앨범 중 애청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위 Dear Old Stockholm    2위 My Funny Valentine   3위  Summertime  4위 You And The Night And The Music

재미있는 것은 그동안 에디 히긴스가 40전후의 젊은 피아니스트로 착각했었다는 것이다. 앨범을 보니 70대 중후반 또는 80대로 보인다. 그러니 명인의 반열에 드는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어쨌튼 이 앨범은 Balled Higgins1장과 Standard Higgins 1장 총 2장의 앨범에 무려 24곡의 명곡이 들어있어 전혀 돈이 아깝지 않다. 재즈보다는 뉴에이지를 좋아하는 분들은 Ballad를 듣다가 Standard로 자연스럽게 넘어오리라 생각된다. 당신의 시간에 평안함과 우아함, 풍요로움을 줄 최상의 앨범이 이 세상에 탄생했다.

**** 참고로, 이 앨범을 좋아하시는 분께 70이 다 된 재즈 피아니스트 토미 플래너건의 [Jazz Poet] 를 추천드리고 싶다. 아름다운 재즈연주가 또다른 세계로 넘어간 느낌이다. 나도 70이 되어서 저런 명인이 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마지막 곡의 울림은 너무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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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없다 - 기독교 뒤집어 읽기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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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강남 선생님은 글을 알기쉽게 잘 쓰신다. 전에 [장자]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제 기독교 책을 읽는다. 제목이 꽤 도발적이지만 원래 영어제목이 더 와 닿는다.[No  Such Jesus : Reading Christiannity Inside Out]! 감히 번역을 해 본다면 [그런 예수는 없다 : 기독교 신앙을 속이 드러나도록 까뒤집어본다] 이다. 책의 그림 도안이 예수님이 거꾸로 되어있고 '기독교 뒤집어 읽기'라고 박혀있는 것은 좀 오해의 소지가 있다. 까 뒤집는다는 것은 거꾸로 매달고 비꼬고 한다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털어놓고 바닥부터 고민한다는 뜻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내  생각에는 [Reading Christiannity  straight  from Jesus' Heart]=' 예수의 심정으로 기독교 신앙을 본다' 정도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이 맨 앞에서 적으셨듯이  '그런 예수는 없다'라는 뜻은 다음과 같다. 최근에 영국 BBS방송국에서는 실제 예수의 모습을 법의학적인 지식을 동원해서 복원해 보았다. 그런데 이게 조금 당혹스럽게 되었다. 예수는 우리들 집에 걸려있는 푸른눈의 창백한 서양인이 아니라 곱슬머리의 못생기고 건강한 농사꾼 모습이었던 것이다. 사실 조금만 생각하면 예수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도 우리는 관성적으로 노르웨이 사람 같은 예수를 머리 속에 그려왔던 것이다. 그러면 예수 그림 뿐일까? 우리의 신앙 역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관성적인 신앙인거 아닐까 라고 질문하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즉, 우리는 당연하게 우리 머리 속의 예수가 참으로 있다고 믿지만 '그런 예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 영혼 속에 스민 우상타파! 그런 비판적 신앙을 통한 기독교의 재발견, 새 만남이야 말로 우리의 참된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쓰라린 대목이 많은데, 특히 이런 대목은 가슴아프고 부끄러운 일이다.

 "... 이런 '근본적인 것들'을 사수하고 있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근본주의자들'이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주장이 기독교의 보편적 믿음 내용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이런 근본주의적 입장은 주로 '미국에서 그리고 미국 선교사의 영향을 받은 가난하고 교육수준이 낮은 나라'에서만 서식하고 있을 뿐 서방 유럽 같은 데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기현상이다. 현재 미국에서는 이런 근본주의자의 숫자가 어떻게 계산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략 전체 기독교인의 20 내지 40 퍼센트를 차지한다고 보고 있고, 한국에는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90퍼센트 내지 95퍼센트 절대다수의 개신교 기독교인이 여기에 속한다 보아도 된다. "

물론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네 신자들은 "그래, 이제 하나님의 참 뜻을 가장 잘 섬기는 나라가 우리야. 이제 타락한 미국이나 유럽의 영혼을 우리가 구해야 돼. 선교사를 파송해야겠어."라고 생각하신다는 걸 난 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야말로 "너나 잘 하세요."라는 말에 딱 맞는 분들이 아닐까? 서양인들은 타락해서 그리 된 것이 아니다. 2000년의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역사적 실험과 실존적 결단을 기독교와 함께 했고 현재의 모습은 그런 고뇌에 찬 여정이 이루어놓은 결과인 것이다. 이 장면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180쪽에 그려진 유태인 대량학살 쇼아를 겪었던 엘리 위젤의 말을 들어보라고 외치고 싶다. 가슴을 쥐어뜯게 하는 그의 이야기는 유럽의 기독교 신앙이 왜 구태의연한 답습만으로 20세기를 버틸수 없었는지를 고발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말씀드리겠다. 사람이 사춘기를 겪고 성년이 되면 치매에 걸리지 않는 한 오줌 똥은 가린다. 다시 퇴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네 기독교인은 우리만 멀쩡하고 서양인들이 모두 치매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오줌 똥을 못가리는 것은 우리 기독교 신앙일 수도 있는 것이다.

20년전쯤 우연히 읽게 된 지그 지글러의 책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어느날 지그는 아내가 쏘세지 덩어리의 양쪽 끝을 잘라서 버리고 중간만 요리에 쓴다는 걸 알게 된다. "여보, 우리 어머니는 다 쓰는데 당신은 왠일이오?" 그의 아내가 "사실 전 잘 몰라요. 우리 어머니는 이렇게 요리하시고 저도 따라 하는 거예요." 지그는 그의 장모님께 그걸 묻게 되는데, 백발의 장모는 호호 웃으시면서 글쎄 이랬다는 거다. " 그땐 냄비가 적어서 쏘세지를 한꺼번에 요리 할 수가 없었네. 끄트머리를 내가 버렸다고? 아니라네.잘라낸 끄트머리도 따로 담아놨다가 다 썼다네." 어쩌면 오강남 선생님이 누누이 호소하시는 말씀이 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무의미한 오래된 신앙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고 있지는 않은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는 거다. 왜 이 개명한 21세기에도 기원전의 부족신관으로 사느냐는 거다.

이 책은 무척 다양한 신학적 논쟁을 알기쉽게 찬찬히 설명한 책이다. 그런데 솔직히 요약하기 버거움을 느낀다. 책 자체가 '이렇다 저렇다'가 중요한것이 아니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런 이런 이유때문이다.'가 중요시 되기때문이다.  성서에 바탕을 둔 찬찬한 논리전개가 아니고서야 또 다시 끝없는 감정싸움, 다람쥐 쳇바퀴도는 신앙논쟁 밖에 더 되지도 않을 것이다. 경우 자기와 다른 사람은 사탄이요 불신자로 모는 근본주의자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우리나라에서 이 책은 [예수는 신화다] 꼴로 스러지고 말것이다.  그래서 오강남 선생님은 그야말로 악전고투하신다.  정말 상식에 호소하고 보편적인 논리에 호소하신다.

그럼, 난 137쪽의 [잔인하신 하나님-가나안 정복 이야기]를 인용하여 여러분께 오강남 선생님의 빼어난 글쓰기와 진정어린 고민을 전하려 한다. 다음은 책 그대로 옮긴 것이다. 약간의 팁을 드린다면, 우리가 성경을 읽을때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교리와는 달리 무척 호전적이고 잔인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이런 잔인한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을, 성서의 [출애굽기]의 사건을 통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찬찬히 설명하는 대목이다. 이걸 본다면 오강남 선생님이 기독교를 무너뜨리는 분이 아니라, 현재 느끼는 모순을 솔직히 인정하고 참의미를 찾아보려는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오강남 선생님이 추구하는 기독교를 뒤집어본다는 의미라고 본다. 즉, 도대체 받아들여지지 않는 부분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 모순이 던져주는 실존적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럼 책 속으로 뛰어 들어가 보자.  

이렇게 모세의 지도 아래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풀려난 이스라엘 백성은 일주일이면 들어갈 수 있는 거리를 두고 시내 광야에서 40년간 헤매다가 드디어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을 정복해 들어가게 된다. 이 정복 과정에서 이 땅은 젖과 꿀이 아니라 피가 넘쳐흐르는땅이 된다.

정복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용기를 주신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셨다.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졌다. 요단강 너머 여리고 성이 정복의 첫 대상이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여리고 성을 돌아 그 성을 무너뜨렸다는 이야기는 전에 했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성 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 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였다는 사실이다. 성안에 있는 생명이란 생명은 모조리 죽여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바치고 결국은 그 성마저도 불태워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다음은 아이 성을 칠 차례였다. 여리고 성을 치고난 후 모든 전리품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음에도, 아간이라는 자가 외투 한 벌과 얼마간의 은과 금을 착복했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이스라엘 군대는 아이성에서 참패를 당한다. 특별한 방법으로 아간을 찾아내서 아간은 물론 " 은과 외투와 금덩이와 그 아들들과 딸들과 나귀들과 양들과 장막과 무릇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다.

이제 화가 풀린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아이 성을 치는 데 필요한 전략을 일러준다. 이스라엘 군대 중 일부는 성 뒤에 매복하고 일부는 성 앞으로 가서 아이 성 사람을 성밖으로 유인해 낸 후 성 뒤에 숨었던 군대가 진입해서 불을 지른 다음 양면공격하라는 것이었다. 작전이 성공해서 성 밖으로 나왔던 아이 성 사람을 모두 전멸시키고, 다시 성으로 들어가 성에 있던 사람까지 완전히 진멸시키니 그 날에 죽은 사람이 "남녀가 일만 이천이라"고 했다.

......(한단락 생략)

도대체 이보다 더 잔인한 전쟁사가 어디에 또 있겠는가? 인간이 하는 전쟁이라면 그래도 이해를 하겟는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직접 진두지휘하셨다는 사실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안되는 일이다. 현대전에서처럼 폭탄이나 총에 맞을 경우 금방 죽어버리지만, 이와는 달리 창이나 칼에 찔려 죽은 사람은 며칠씩 고통 속을 헤매다가 죽게 마련이다. 이스라엘이 이기기만 하면 이런 참혹한 꼴을 보고도 좋아하신 하나님이라니 이런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욕하고 깍아 내리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아주 아주 중요한 사실에 눈떠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찾아내려 한다면, 이렇게 한 민족만을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맹목적으로 맹활약하시는 잔인하고 옹졸한 하나님 이상 무엇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이야기는 하나님 자신이 어떠함을 말해주는 이야기가 아니다.  

 (중간단락 생략, 상당히 재미있는 부분인데 생략하는게 안타깝다. 생략의 이유는 인간적으로 베끼는 게 너무 피곤해서이다.이해해 주시길!)

사안의 중요성 때문에 다시 한번 강조한다. 히브리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는 하나님이 스스로 하신 일을 직접 일기처럼 적어놓으셨다가 나중 선지자에게 불러주시고 그것을 받아적도록 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의 역사를 이해할 때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자기를을 도왔다고 믿은 바를 적어 놓은 신앙고백 기록이다. 한 마디로 이 이야기에 나타난 하나님은 이스라엘 부족이 가지고 있던 신관, 그 신관에 비친 하나님일 뿐이다.

몇 천년전 당시 부족사회에서는 어느 부족이든 그 처절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런 신을 모시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런 신을 모신 것이 아니라 신을 이렇게 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신은 무엇보다 전쟁에 능한 신, "만군의 주", 전투 사령관 이어야 했다. 이런 식으로 신이 자기들 편이라 생각하고 그 신에게서 용기와 확신을 얻고 거기에 힘입어 이웃 부족을 무찌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신은 자기들이 미워하는 나라는 무조건 다 미워하는 신이어야 한다. 이렇게 신이 자기들만의 신이라고 보는 신관을 "부족신"의 신관이라 한다.

우리가 지금 몇 천 년 전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고 있던 이런 부족신관을 그대로 채받아 거기에 목줄을 매고 살 필요가 있겠는가? 인류 전체를 상대로 보편적 사랑이나 정의하고는 사돈의 팔촌도 안되는 이런 신을 받들며 살 필요가 어디 있는가? 지구를 판판한 것으로 보던 그들의 생각을 우리가 받아들일 필요가 없듯, 신을 이렇게 자기들만의 신으로 보던 그들의 부족신관도 우리로서는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을 모시려면 이런 부족신관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신관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유대인 자체 내에서마저 바빌론 포로와 함께 의미 없는 신관으로 취급되어 대부분 방기된 신관이다. 제 2 이사야서나 예레미야서에서는 이런 한 민족만을 위한 전투적이고 무자비한 신은 사라지고 만국을 통치하는 보편 신의 생각이 등장한다. 이런 하나님은 '무찌르자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을 불쌍히 여기고 인간과 함께 고통을 당하는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미리 말하자면, 예수님은 이런 부족신관을 거부하고 자비의 하나님을 가르치신 분이다. 이런 부족신으로서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 죽었어야 한다. 만에 하나 기독교에 이런 부족신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그것은 부족신의 망령이다. (이상137-142쪽, 잘못된 신관은 무신론만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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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마할 2006-04-20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 열심히 쓰셨네요. 저도 이 책을 책상위에 놓아 두고 있어요. 언제고 읽으려고. 퍼갑니다.

하늘연못 2006-04-20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지마할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님의 서재에 가 보았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이수태 선생님의 [논어의 발견]을 읽어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불행히도 절판되어서 원래 책을 살수는 없고 알라딘 e-Book코너에서 사시면 됩니다. 만원이 넘지만 원래 2만원정도 하던 책이었고 동양학에 관심을 가진 분이라면 책을 열자마자 눈이 번쩍 떠지실 겁니다.개인적으로 너무 감명깊게 읽어서 추천드리는 겁니다. 무례를 용서하시길!
 
10년 법칙 - 명품 인생을 만드는
공병호 지음 / 21세기북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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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리뷰의 첫머리에서 밝혀두고 싶은 것은 "전 이 책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많이 도움받았어요." 라는 것이다. 다만, 리뷰는 비판적으로 썼다.

자기 계발 서적은 묘하게 종교서적 같은 분위기가 있다. 우선,  "싫다. 시간낭비다." 이런 독자와 "이런 걸 상시 복용하여 성공하고 싶다. 도움 받았다."하는 독자가 공존한다. 이런 것은 신자와 불신자가 대결하는 신앙논쟁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 그런 신앙 논쟁이란게 체험이나 구체적인 실증과 무관하게 감정싸움으로 흐르는 한 무척 소모적이다. 둘째로는, 자기 계발 서적은 종교서적과 너무도 비슷하게도 낡은 생활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선택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만약 건전한 상식과 절절한 체험이 없는 섯부른 이론이 횡행한다면 사이비 신흥종교가 출몰하여 사회문제를 야기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는가? 그런데도 유명한 저자들은 이런 저런 팬들을 몰고다니며 검증되지 않은 이론을 마구마구 뿌려댄다. 인생이 걸려있기에 이런 이론들의 출몰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물론 종교서적도 비판적 독서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자기 계발 서적이 믿음을 먼저 요구하는 무슨 신학 서적도 못되는 바에야 더더군다나 비판적 독서의 대상이 된다고 본다. 대중에게는 종교서적보다 자기계발 서적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시대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열심히 읽고 열심히 까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바라건대, '감정적이지 않은 근본적인 비판을 하다보면 더 나은 계발로 이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비난이 아닌 비판적인 리뷰를 쓰고 싶었다. 그런지 어떤지는 리뷰의 독자가 판단하실 일이지만! *****

이 책의 광고에는 "한가지에 10년을 걸어라"라는 말이 적혀있다. 내가 이 책에서 정말 많이 깨달은 바가 있다면, 그 한가지를 찾아내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거였다. 공병호 선생님은 자신이 이것 저것 자기 일이다 생각하고 전념한 결과 비교적 빠른 시기인 3년만에 무엇을 해야할 지 가닥을 잡았다고 하는 것은 인상깊었다. 따라서 하나를 찾기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로의 모험이 요구된다고 보여진다. 즉,'우리에게 있어 무엇을 할 것인가는 결정되지 않았다. 그러니 우선 진정으로 사랑하고 잘 할만한 일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게 그리 쉽지 않다. 암중모색의 길이다.그러니 사소하게 보이거나 남의 일일지라도 내일이다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혹시 아는가? 그 일이 바로 내 인생을 밝혀줄 그 일인지!' 이거야 말로 반드시 가슴에 새겨둘 좋은 조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이제 비판의 태클을 감행해 보겠다.

이 책의 정확한 제목은 [명품 인생을 만드는 10년법칙]이다. 공병호 선생님이 60년생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제 47살.....? 인생을 논하기에는 아직도 약한 나이이다. 그러면 우리는 인생이 아닌 무엇을 이 책에서 배울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의 제목은 2가지에서 묘한 거부감을 준다. 우선 명품’이라는 단어인데, 자본주의적인 성공을 지향한다는 느낌이 들어 조금 야리꾸리하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공선생님 스타일이란게 이렇게 솔직하다는데 매력이 있다. 소위 경제 자유주의의 전도사가 아니시던가?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명품보다는 명작이 좋지 않았나 싶다. 125쪽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이라는 캔버스를 앞에 두고 앉은 화가다.”자신의 인생을 명작으로 바꾸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의미에서 '명작'이 더 좋지 않았을까? 그러면 책 제목은 이렇게 될것이다. [명작 인생을 만드는 10년 법칙]! 아니면 [10년 동안 노력해서 나만의 명작을 그리자!]

 

그러고 보면 선생님의 ‘명품 인생’이라는 것도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아웃소싱할 수 없는) 성공한 삶을 뜻할 것이다. 그렇지만 직업인으로서 우뚝 설 수 있는 성공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이 책을 썼다(239쪽)는 취지에서라면 [자기 직업에서 명인이 되는 10년 법칙] 정도가 좋지 않았을까? 솔직하되 자본주위적으로 기울어져 있는 분이 바로 공병호 선생님이라는 걸 '명품‘이라는 제목에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 하여튼 나란 놈도 불쌍한 중생이다. 책을 읽기도 전에 이렇게 주저앉아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명품인생'을 벗어나니 또 하나가 나를 잡는다.


두 번째 거부감은 ‘10년 법칙’이라는 단어에서 온다. 법칙이라는 것은 왠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보편적인 질서- 그런게 떠오르는데...게다가 요놈의 법칙은 금시초문이다. 나만 모르는 건가? 이렇게 법칙은 우리를 강박시키는 말이다. 그래서 거부감이 든다. 그렇다면 10년 법칙이라는 생소한 법칙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어떤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성과와 성취에 도달하려면 최소 10년 정도는 집중적인 사전 준비를 해야 한다.”(44쪽, 앤더스 에릭슨)

“어떤 특별한 분야에서 세계적인 수준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그 분야에서 지속적이고 정교한 훈련을 최소한 10년 정도 해야만 한다.”(45쪽, 앤드류 카슨)


적어도 나에게 우선 고개 드는 질문은 “왜 하필이면 10년이냐?”이다. 그럼 이 질문을 풀기 위해  책을 펼쳐 보자. 이 책에서 탁월한 전문가, 즉 명인이 되는 과정을 서술한 부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우선, ‘전문가 발전의 3단계’로 (1) 부모나 선생님의 권유로 훈련을 받게 되는 단계 (2) 파트타임에서 풀타임으로 전환되는 단계로, 이 분야에서 성공 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전력투구하는 단계 (3) 탁월한 성취를 추구하는 단계로 자신만의 독특한 기여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하는 단계이다.( 114쪽-116쪽, 에릭슨과 닐 찬스) 이런 단계론은 그럴만 하다고 쉽게 수긍이 된다. 단계론은 현상에 대한 서술일 뿐 우리를 강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문제의 ‘10년 법칙’으로 교육심리학자인 하워드 가드너의 [열정과 기질]이라는 책의 내용이 핵심이다. ('10년 법칙'과 관계되어서는 이 책에서 가장 상세하게 설명하는 부분이다.)

 

어느 분야의 전문 지식에 정통하려면 최소한 10년 정도는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창조적인 도약을 이루려면 자기 분야에서 통용되는 지식에 통달해야 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10년 정도의 꾸준한 노력이 선행되지 않으면 의미 있는 도약을 이룰 수 없다.

 

흔히 모차르트는 이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 예외라고 말하지만, 그 역시 10년간 수많은 곡을 쓴 다음에야 훌륭한 음악을 연거푸 내놓을 수 있었다. 우리가 다루는 일곱 명의 창조자들 역시 혁신적인 업적을 이루기 전에 최소한 10년의 수련기를 거쳐야 했다. 물론 더 오랜 세월이 필요했던 인물도 있을 것이다.그리고 대다수는 또 다른 10년 후에 다시 한 번 중대한 혁신을 이루었다.”(47쪽, 하워드 가드너)

 

여기서 눈에 띄는 대목은 '최소 10년'이라는 표현과, 법칙이 아니라 '규칙'이라는 단어이다.그러니까 10년 법칙이란게 그렇게 딱딱하고 융통성이 없는 개념이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된다. 11년 법칙도 좋고, 12년 규칙이란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렇다면 왜 굳이 10년인가?

 

사실 공병호 선생님은 ‘ 2장, 10년 법칙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10년 법칙을 옹호하는 뇌과학적 지식과 심리학적인 지식을 나열한다. 해마, 시냅스, 가소성, 장기 증강, 헵 법칙,작업 기억, 장기 증강, 숙련 기억 이론, 재생 가능 구조 등등 뇌 과학 책에서나 볼수 있을 개념들을 동원하여 열심히 설명하신다. 이런 장면을 읽는 독자들은 공 선생님이 참 박식하시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심히 보면 그 많은 이야기가 결국은 '준비와 노력'을 끊임없이 강조 할 뿐이다. 비판에 앞서, 공병호 선생님이 10년법칙을 논증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2장을 나름대로 요약해 보면 핵심은 이거다.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영역에서 장기 기억을 단기 기억 만큼이나 빨리 검색하여(빠른 검색의 핵심은 패턴화이다) 능수 능란하게 문제해결에 이용하는 데 핵심이 있다.(=숙련 기억 이론)  그런데 이 장기 기억이라는 것은 섬세하게 반복된 학습을 통해 생기는 것이므로 우리는 부단히 노력하고 새롭게 학습해야 한다.

 

그렇다. 매우 훌륭한 이야기다.  그러나, 10년이라는 의미는 대충 넘어가신 것이다. 내가 궁금하던 '하필 10년이냐?'라는 질문은 어영부영 이렇게 결론이 나고 말았다. 결국, 10년의 의미는 생각보다 긴 시기를 부단히 노력해야만 탁월한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뜻인 거 같다. 그리고 ‘법칙’의 의미도 적어도 아인슈타인이나 피카소 등의 위인들을 볼 때 그 정도의 규칙성이 있다 정도의 뜻인가 보다. 그러고 보면 이런 부질없는 질문이 퍼뜩 난다. 결국 아인슈타인이나 피카소 같은 사람이 접한 분야의 크기가 10년 정도를 필요로 한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는 3년이 필요했고 싯달타는 6년이 필요했지 않은가?


어쨌거나 사실 이런 책이란게 그런 걸 중시하는 책은 아니다. 실천을 위한 책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결국 10년이란 뼈를 깍는 고통의 길이일 수도 있지만, 가진 건 몸통과 대갈통밖에 없는 평범한 인생도 해뜰날 있다는 복음이기도 한 셈이다. 누구나 고생하면 성공하는데, 그 10년 고생을 견뎌낼수 있는 성실한 인간만이 최후의 승리자이니 말이다.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선불교의 메세지처럼 '10년 법칙'은 깨달음의 메세지이자 평등의 메세지요, 인간의 잠재력에 대한 끝없는 찬사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공병호 선생님은 " 젊은이들이여, 주저앉아 있지 말고 명인이 되기위해 하루하루 몸바쳐 살라. 거기에 희망이 있다."라고 주창하시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에서 [공병호의 자기경영 노트]에 이어 또다시 등장하여 뭇매를 맞는 서총련 출신의 독자가 떠오른다. 그는 이렇게 따질것이다. "그거야. 돈있고 번듯한 직장에 들어간 중산층 이야기 아니요? 실업의 끝이 보이지 않는 평범한 서민 자제에게는 그림의 떡이요. 적어도 10년정도의 안정된 직장이 보장되는 사회가 먼저 있지않는한 배부른 소리일 뿐이오." 물론 이 책에서는 이런 소리는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려하지 않는 무책임하고 무기력한 인사로 조롱받을 뿐이지만... 사실 틀린 말은 아닌거 같다. 서총련 독자는 아마도 공병호 선생님이 과연 경제학자가 맞는지,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경제학을 배웠던 것인지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참고로 난 서총련과 무관하다. 다만 늘상 쥐어박히고 항변의 기회도 없는 서총련 독자도 딱히 틀린 건 아니고 오히려 건전한 반론을 제기한거 아니냐 하는 생각이 있다.나만 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겨. 그게 핵심이었다.)

 

그럼 이 책을 읽었다면 알게되는 최소한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 책의 핵심은 ‘10년 간의 정교한 훈련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기여를 가진 명품 인재가 되자’는 것이다. 한 마디로 줄이면 ‘꾸준한 정교한 훈련이 명인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난처하게도 궁금한 것이 또 생겼다. 정교한 훈련의 원래 말은 deliberate Practice이다. 궁금해서 deliberate의 의미를 찾아보았다. (1) done on Purpose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한다는 뜻이다. (2) slow and careful 천천히 그리고 꼼꼼히 한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왜 ‘정교한’이라고 번역을 했는지 모르겠다. ‘집중적(=목표지향적)’이라든지 ‘꼼꼼한’ 이라든지가 더 나을 거 같다. 사실, ‘정교한’ 이라는 의미가 이런 의미가 다 들어있긴 하지만 어찌 기계같은 느낌이 들어서 거부감이 드나 보다. 과정을 포함하고 있는 '꼼꼼한'이라는 번역이 낫지 않았을까? 


끝으로, 내가 이 책에서 가장 감명깊게 읽었던 대목을 적어보고 싶다. 아마, 이런 것이 공병호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정교한 훈련’의 살아있는 예가 될 거 같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작 펄먼의 말이다. 

 

내게도 젊은 음악도를 연습시킬 때 특별한 규칙이 있다. 반드시 박자를 지켜가며 천천히 연습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시간을 연습에 투자해도 전혀 실력이 나아지지 않는다며 불평하는 학생들이 있다. 이런 경우 어떤 식으로 연습 했는지 보여 달라고 하면 십중팔구 지나치게 빠른 박자로 연습한 경우가 많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선 손가락으로 미세한 음을 반복할 때 뇌의 움직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파가니니의 복잡한 악절처럼 복합적인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 뇌는 반드시 확실하고 정교한 입력을 요구한다. 그런데 바이올리니스트가 복잡한 악절을 미친 듯 내달리며 연습할 경우 뇌는 필요한 정보를 정확히 받아들이지 못해 결국 제대로 된 정보를 손가락으로 전달할 수가 없다. 학생들에게 느린 박자로 연습하라고 하는 건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56쪽) 

 

그렇다. 이 이야기가 10년 법칙의 알파와 오메가다. 거부감으로 부터 시작했으나 괜찮은 책이었다. 선생님이 반복이 중요하다고 하시니, 이제 네번 째 읽는다. 뒤에 읽는 분을 위해 귀뜸하면 2장이 잘 이해 안가도 너무 자책하지 마시란 것이다. 차라리 이케가야 유지 교수의 '해마'나 '뇌, 기억력을 키우다'를 읽으시면 좋을 것이다. 공 선생님이 의학자나 뇌과학자가 아니시기 때문에 깔끔하게 정리하지는 못하셨다고 생각된다. 선생님은 이쪽 전문가가 아니시니 너무도 당연한 거 아니겠는가?

 

이왕 여기까지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마디 한다면,-아마도 눈치빠른 분들은 이미 간파하셨겠지만- 이 책은 충분한 탈고 시간을 갖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명품 인생'이란게 그러하고 '10년'이라는 게 그러하고 '정교한 훈련'이라는 게 그러하고, 무언가 부산한  2장이 그러하다. 너무도 바쁘신 분이기에  알아서 줄거리는 잡아서 읽어야 되는 분위기다. 언뜻보면 매끄러운데 자세히 보면 여기저기 기운 흔적이 보이는 글이다. 그래서 나는 네번에서 읽기를 마칠 생각이다.

 

그래도 선생님의 논지는 잘 전달이 되고 우리를 계몽하는 기본 취지는 살아있는 책이니 [공병호의 자기경영 노트]와 더불어 일독을 권하고 싶다. [10년 법칙]이란 책은 비록 흠은 있지만, 불안한 미래를 안은 우리에게 절실한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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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6-05-20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정말 훌륭한 리뷰예요. 무엇보다도 비판을 하면서도 "공정함"을 잃지 않은 미덕이 돋보여요.^^ text를 정교하게 읽었다는 생각도 들구요. 놀라면서, 끄덕끄덕 하면서 읽었답니다. 즐찾 등록했어요. 앞으로 자주 와서 배워야 겠어요.^^

하늘연못 2006-05-23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길기만한 엉터리글을 읽어주신거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더욱 노력해서 읽을만한 리뷰올리겠습니다. 님께서 배우러 오신다니 눈앞이 아찔하고 등골이 오싹합니다.^^ 저도 님의 리뷰 잘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다 빈치 코드 1
댄 브라운 지음, 양선아 옮김, 이창식 번역 감수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제가 이 소설에 별 다섯개를 못주는 건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이만큼 팔았으니 개정판 좀 내주시라'는 의미에서입니다. 책에서 루브르 박물관의 구조나 로슬린 예배관의 모습, 암굴의 마돈나 그림이나  최후의 만찬 그림은 무척 중요한 배경입니다. 그런데 책에는 어떤 그림이나 사진도 없습니다. 물론 다빈치 코드 공식 싸이트가 있어서 몇몇 사진을 볼 수는 있지만, 아예 몇장의 사진이나 그림을 책앞에 달아놓으면 책도 품위있어지고 독자들도 이해가 잘되어서 좋을 것 같다는 게 제 바램입니다.( [일러스트레이티드 에디션]은 너무 비싸서 대부분의 독자에게는 그림의 떡입니다.) 

개정판을 내야하는 또다른 이유는 몇몇 번역이나 글씨투를 바로잡아야 하지 않나하는 생각에서 입니다. 경영학과 출신의 양선아 선생의 번역을 다시 경영학과 출신의 이창식 선생이 감수하셨다는데 제대로 감수는 하신것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책의 내용상 당연히 종교학 동네에서 자문을 얻어서 꼼꼼한 번역을 해야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사실 이 책은 주된 전개가 신화학과 기호학을 축으로 전개됩니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이윤기 선생님처럼 신화학에 밝은 번역자를 택해야 했다고 봅니다. 아시다시피 이윤기 선생님은 훨씬 난해한 소설 [장미의 이름]을 훌륭한 번역으로 선보이시고, 다시 개정판을 내셨습니다. 그런걸 생각해 볼때 이 번역본은 돈냄새만 풀풀나는 아쉬운 책입니다. 이 아쉬움은 2권의 마지막에 나오는 번역자의 말로 완결됩니다. 별로 애정이 없는 책을 이런저런 이유로 번역한 사람이 무성의하게 채운 말로 끝난다는 게 굉장히 서운합니다.

책머리에서 저자인 댄 브라운은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책을 마칠수 있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해 이 책의 번역이 너무 거칠다는 것은 저만의 생각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출판이 성공적일지 아닐지 모르는 단계에서야 그렇게 공을 들이기 힘들지만 제가 보는 책만해도 2004년 처음 책을 찍은지  1년만에 36쇄를 찍고 있으니, 이제는 독자들의 권리도 존중해줘야 될 때 아닌가요?

소설책의 리뷰를 쓴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줄거리를 요약하기도 그렇고 어쩌다 중요한 결말을 암시한다면 다음에 읽는 독자들께 큰 무례와 폭력을 행사하는 일일 터이니까요.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쓴다는 건 이렇게 즐거운 독서를 마친 저로서는 서운한 일입니다. 제 앞에 있는 여러 리뷰를 보고 저 나름대로 느낀 점을 몇 가지 적어보는 걸로 마치고자 합니다.

우선, 소설책이라는 건 허구이고 상상력 속에서 논다는 게 기본 전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피라미드는 666조각이 아니라는 둥, 최후의 만찬 속의 예수 옆에 있는 사람은 남자라는 둥 호들갑을 떠는 리뷰가 있는데  억장이 무너집니다. 'Just Feel It!  좀 머리를 비우시기 바랍니다. ' 물론 저는 이 책의 90%는 신빙성이 있고 오히려 픽션이 적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반대로 이 책의 99%가 비열한 사기며 1%쯤 봐 줄만 하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렇다고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기를 바라시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저자인 댄 브라운을 딴지걸기 좋아하는 주일학교 학생정도로 생각하는 건, 거꾸로 자신의 상식이 그 만큼 편협된 건 아닌지 돌이켜 보시라는 메아리로 돌아갑니다. 소설은 픽션이고 이야기니까 그 과정 속의 즐거움을 나눌 여유가 필요합니다. 허구란 경직된 현실에서 나와 자신을 돌이켜 보게하는 힘을 주고 꽉막혔던 숨통을 틔우는 자유를 줍니다. 그런데 그걸 원천 봉쇄하시겠다구요. 늘상 비유나 은유로 사람들을 성찰하게 하셨던 당신들의 선생님을 먼저 유심히 보시기 바랍니다.

생각해보니, 몇 년전 읽은 오쇼 라즈니쉬의 신약성경 해설집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너무 슬픈 얼굴로 그린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수는 잔치집에 종종 나타난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행하는 예수는 술꾼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예수는 잔치집에서 술도 마시고 노래도 하고 얼굴이 붉그죽죽해서 춤도 추고 그랬을것이다." 이걸 익살로 받아들여야 할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너무 성경을 단편적으로 또 내 자신의 선입견만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는가?'하는 반성이 일었습니다. 어떤 교인이 예수가 장가갔다고 기독교를 팽개칠것을 고민하신다면, 도대체 그 교인이 무엇을 믿고 있었는지 심각하게 고민 좀 해보시기 바랍니다. 

둘째, 이 소설이 지루하고 이해 안된다는 불평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이 번역본 자체가 독자들의 이해를 도와줄 그림이나 사진을 삭제한 것도 뭔가 밋밋한 지루한 책으로 느끼게 하는 것 같습니다 . 그러나 근본적으로 생각해보면, 유명하다고 해서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이 무언가 독자를 끄는 힘이 있다면, 기독교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는데 그것이 깨져가는 데서 오는 충격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최초의 지식이 없는 사람은 무척 지루한 여행을 하게 되는 셈입니다. 반면 다빈치나 기독교에 대한 약간의 상식과 교양이 있다면-제가 뭐 그런걸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생각해보면 약간이면 되는거 같습니다.-이 책은 이곳 저곳 여기 저기에서 탄성을 유발시키는 재미있는 장면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무겁지도 않고 경쾌하면서 재미는 있는, 바나나 보트를 탄 듯한 느낌을 주는게 이 소설입니다.  

셋째, 이 소설이 헐리우드 영화같은 속물근성의 작품이라는 리뷰인데, 공감합니다. 이 경우 리뷰의 말씀은 줄거리가 뻔히 짐작이 되고 인물들이 평면적이라는 지적을 하십니다. 그런데 이 경우 독자들은 너무 인물 중심의 사건 전개에 집착하고 계시지는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인물 중심으로 볼 경우, 저 자신도 이 소설의 인물이 무척 평면적이라는 생각이 들고 사건도 종종 007시리즈처럼 진부하고 도식적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주요 캐릭터인 소피나 실라, 브쥐 파슈 국장 등등 캐릭터가 들쭉날쭉하고 어느 경우는 색깔이 없습니다. 그냥 사건에 따라 존재할 뿐이죠. 그러고 보면 100년전의 셜록 홈즈가 훨씬 뛰어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그러나 예를 들어, 영화 [트루먼 스토리]를 보면, 우리는 짐 캐리가 결국 자유를 쟁취하리라 저 불쌍한 몰래 카메라에서 벗어날거라 예상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화제목이 true man이기 때문에 설마 저렇게 살다가 끝나지는 않겠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추측이 맞았다고 해서 뭐 대단한 걸까요? 영화 보기는 그 결말을 향해 문제를 풀어가는 트루먼을 지켜보는 과정이고 그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빈치 코드]를 '결국 남녀가 결국 사랑하게 될거야'라는 생각으로 보신다면 어떨까요? '결말이 빤하다'라고 리뷰를 쓰신 분들은 너무나 얇게 읽고 계시지 않나 생각됩니다. 이 소설은 인생이란 무언가를 찾아가는 과정이며(무언가는 책으로 확인하십시오) 그렇게 살아가는 고비고비 만나는 모든 것은 영원과 통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고 봅니다. (제가 대충 얼버무리는 것의 고충을 이해해 주십시오.)  

끝으로, 저도 이 소설을 보다가 '신성한 여성을 강조하는 소설 속의 여주인공 소피가 왜 이렇게 존재감이 빈약한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소설은 소피만 빼고 모두다 남자들로만 채워진 듯 보입니다. 정말 치명적인 약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니, 신성한 여성을 억압해온 교회를 그리는 소설을 쓰면서, 소설자체가 남자가 풀어가는 이야기= history라니! 그런데 꼼꼼히 보면 댄 브라운은 이성적인 남자 로버트 랭던이 마지막 퍼즐을 풀지못할때 소피를 만나 구원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한계에 다다른 남자들의 시대는 신성한 여성을 만나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소피가 마지막 하는 말은 이렇습니다."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은 피렌체에서 당신을 만나는 거예요." 로버트 랭던은 그 일주일동안 일을 안하고 뭐하냐고 묻죠. 이성, 논리, 일, 업적, 성취-이런게 다 남성들의 가치 아닙니까? 그런데 소피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닌거 같습니다. 그때 저자 댄 브라운이 뭐라고 표현하냐면 이러죠." 소피는 몸을 내밀어 랭던에게 다시 키스했다. 이번엔 입술이었다. 처음엔 부드럽게, 그러고는 두사람의 몸이 완전히 포개졌다." 남녀 합일을 통한 존재의 고양을 표현한 거죠. 소피라는 여성의 존재는 이성적이거나 남성적인 존재가 아닌 또 다른 존재이기에 랭던이 문제를 풀어낼수 있게 하는 힘이 있는 거겠죠. 새로운 문제해결의  방식은 "우리가 성배를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성배가 우리를 찾아온다"는 표현으로 절묘하게 나타납니다. 아마도 이 소설의 핵심을 꼽는다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에이, 이런걸 쓴다는게 너무 죄책감이 드는데, 하도 헛다리 짚는 분이 많으시니 이런걸 다 풀어 씁니다.)

저는 몇년만에 모든 걸 잊고 독서에 푹 빠져 보았습니다.  이제 책에 물음표 해둔 부분을 한번 찾아 보아야겠습니다. 우선은 '템플 기사단'이나 '프리 메이슨'이 무언지 부터 찾아 볼 생각입니다. 여하튼 [다빈치 코드]는 정말 재미있는 책이니 일독을 권합니다.

PS. 아참, 책 읽는 내내 자신의 역사와 종교 속의 이미지와 상징으로 책 한권을 만들어실컷 즐기는 서양인들이 부러웠습니다. 그리고, 빨리 끝나는 게 너무 아쉬웠구요. 영화 [다빈치 코드]의 개봉을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반대한다는 우리나라에서 이젠 [천사와 악마]를 볼까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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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란1 2006-05-28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못님 서평이 참 시원스럽군요. 저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영화상영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책을 읽어본 분들이라면요. 예수의 신성을 해치거나 기독교를 폄하했다는 느낌이 안 들거든요. 오히려 종교예찬 쪽이아닐까요?

하늘연못 2006-09-09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년이 지난 리뷰를 보니까 제가 좀 뻔뻔했었다는 생각, 편협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언가 사로잡혀서 마구 소리친 느낌인데 이 어색하고 길기만한 글을 읽고 추천까지 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댓글 달아주신 석란1님께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패러디가 꼭 원본에 대한 훼손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오마쥬일수도 있죠. 적어도 관심의 소산이라는 면에서도 애정 비스무리한 무어라고 생각됩니다.'

하늘연못 2007-04-14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진실이 어디까지인가는 궁금해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빈치 코드 비판서를 몇 권 읽고 있는데요.물론 소설 [다빈치코드]를 까고 기독교를 옹호하려는 생각이 아니라 순수한 호기심 때문입니다. 영화 [달콤한 인생]식으로 말하면 이런거죠. "내가 속는 것은 싫어하지않냐? 속아서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야."
최근에 읽은 [예수는 결혼하지 않았다]가 번역상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좋은 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역사에 애정을 가지신 분이라면 일독을 권할만 합니다. 다음엔 유명한 변신론자인 리 스트로벨의 책을 읽어보려구 하고 있습니다.국내에 번역된 [예수는 역사다]가 워낙 좋았기 때문에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또 국내 비판서로는 라은성교수님의 [다빈치 코드의 족보]라는 책을 보고있습니다. 라교수님은 국제신학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시는데 굳이 책을 안보시려는 분이라면 인터넷상으로는 www.eunra.com으로 들어가시던지 아니면 동영상에서 라은성을 치시면 다빈치 코드를 반박하는 내용을 볼수 있습니다. 적어도 동영상 앞부분에서 [다빈치코드]의 핵심적인 논란거리 성배론과 예수 결혼설을 반박하는 부분은 볼만 했습니다. 후반부는 기독교 변호쪽이라 그리 즐겁진 않았지만요.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봄나무 사람책 1
김은식 지음, 이윤엽 그림 / 봄나무 / 2006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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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아름답다.

우선, 적당한 크기의 판형이 그러하고, 펼치면 큼지막한 글씨가 그러하고, 군데군데 들어가 있는 노동미술가 이윤엽님의 판화가 그러하다. 특히 이윤엽님의 판화는 굵직굵직해서 평생을 올곧게 살아오신 장기려 선생님의 삶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둘째로 글쓴이 김은식님의 글솜씨가 진솔하여 아름답다. 김선생님은 정치학과 사회학을 전공하고 현재는 한겨레문화센터에서 논술을 가르치신다는 데, 장기려 선생님의 삶을 간결한 문체로 잘 잡아냈다는 느낌이다. 사실 이 책은 [봄 나무 사람 책 시리즈]의 1권이다. 출판사의 이념을 대표하고, 흥행을 고려한 최초이자 최고의 책으로 장기려 선생님을 택했다고 생각할 때, 참으로 적절한 글쓴이를 선택했다고 생각된다. 장기려 선생님의 인생과 고충을 당시의 시대상과 함께 엮어내는 솜씨는 절묘한 감이 있고, 마지막의 글맺음에서는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 선생님이 떠오를 정도이다. 조 선생님은 '전태일이 바로 이 시대의 예수가 아니겠는가?'라고 질문했었다. 김 선생님은 '장기려야 말로 참사람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한다.

세째로 서두에 쓰여있는 채규철님의 장기려 선생님에 대한 추억이 애잔하다. 최근들어 이렇게 감동적이고 날 뒤흔드는 글을 본 적이 없다. 너무도 처참한 몰골로 남은 생애를 살아가야만 하는 불구의 몸이면서도 뜨겁게 삶을 불태우시고, 장기려 선생님의 삶에 붉디 붉은 글을 헌화한 채규철 선생님!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부끄럽게 하는 뜨겁고도 아름다운 글이 일주문처럼 책을 지키고 있다.

끝으로 장기려 선생님의 삶이 너무도 아름답다. 평생 가난한 이를 돌보는 의사의 삶을 사셨으나 아무것도 자신이 소유하지는 않으신 성자의 삶을 사신 장기려 선생님!  글을 읽다보면 어쩔수 없이 눈물이 방울방울 맺히는 걸 느끼게 된다. 특히 6.25 동란으로 헤어진 사모님과의 이야기가 애처롭고, 이산가족 상봉의 무산이 가슴을 메이고, 중풍에 걸려 애잔하게 스러지는 최후의 낙조가  처량하다. 평생 하나님을 섬기고 병든자를 고친 성자가 이렇게 거듭된 중풍으로 고통받고, 가족과의 재회가 무산되는 참담한 좌절로 고통받는 걸 보니, 안전한 노후를 위해 보험을 생각하고 투자를 고민하는 나 자신이 부끄럽다.

이 책의 저자 김은식 선생님도 끝내 이렇게 글을 맺었는데 독자인 내 심정과 어찌나 똑같은지!

"그의 삶을 돌아보는 내내 괴롭고 부끄러웠다. 그리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가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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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짱 2006-04-14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칠맛 나는 글솜씨에 장기려 박사님의 삶이 마음으로 다가오는 책입니다. 전 읽고 무척 감동 받았네요. 강추입니다.

하늘연못 2006-04-15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말씀에 공감합니다. 간결하면서 맛깔스런 글쓰기! 된장국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이런 글쓰기도 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늘푸른나무 2006-04-17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른 아이 들 모두 같이 보기에 좋을듯 함니다 .남아있는 감동이 오래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