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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글씨 SE (2disc) - 할인행사
변혁 감독, 한석규 외 출연 / 베어엔터테인먼트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글을 쓰기 앞서서 왜 이 영화를 보게되었나 생각해 봅니다. 솔직히 이은주, 성현아 라는 매혹적인 여배우들의 섹시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들의 미끈한 육신과 매혹적인 음성은 지루한 일상 속에 잠깐의 도피가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영화는 제가 바라던 뜨거운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누구나 며칠 동안은 속이 미슥미슥한 구토감을 안게 하는 트렁크 장면에서 저는 초라한 성욕을 잊어야했습니다. 삶의 이중성 속에 위태롭게 걸려 있는 현실과 직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1. 인트로 : Pace, Pace, Dio, Mio (신이시여! 저에게 평화를 주옵소서!)
영화의 첫 장면부터 남자 주인공은 묘한 긴장감을 보여줍니다. 주인공 한석규는 유능한 수사팀장으로 살인 현장에 가고 있습니다. 한석규는 클래식을 들으며 자유롭게 도로를 질주하지만, 마음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감정이 폭발할 듯 위태위태합니다. “이렇게 좋은 날 말이야. 대가리가 깨진 분은 얼마나 평화로울 것인가? 이렇게 좋은 날 대가리를 깨뜨린 사람은 또 얼마나 평화로울 것인가?”
그러나 한석규는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의 성공을 지탱하고 있던, 자신의 자신감을 받치고 있던 삶의 토대가 서서히 붕괴되고 있음을! 아내인 엄지원과 애인 이은주 사이에서 수컷으로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평화로운 삶의 붕괴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파국은 대가리가 깨지는 상황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오! 이렇게 좋은 날 말입니다.
(참고 : naver 지식 검색에서 hbula님의 의견이 이 글을 쓰게 된 동기입니다. 그 탁월한 리뷰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부분 인용)
“첫 장면의 한석규가 드라이브 하는 장면은 영화의 전 내용을 암시하는 역할을 합니다. 빠체(평화)라는 클래식 음악을 따라 부르는 한석규가 핸드폰 통화를 하면서 머리가 부서진 사람이 평화롭겠느냐고 머리를 부숴뜨린 사람이, 그걸 수사하러 가는 내가 평화롭겠냐고 합니다.
결국 (직업적으로나 남자로서나) 유능한 한석규의 평화는 평화롭지 않은 진실 위에 위태롭게 서있음을 말하고자 합니다. 아내의 중절 사실이 드러난 후에도 한석규는 평소와 다름없이 밥을 먹으면서 아내의 이야기(진실)을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평소와 다름없는, 거짓 위에 세워진 평화를 유지하려 합니다.“)
2. 영화의 구조 : 한석규와 성현아의 다중 인생을 통한 전개:"성현아는 왜 나오는가?“
영화 [주홍글씨]는 좋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혹평 속에 흥행에 실패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1) 관객 입장에선 포스터나 홍보과정에서 강조한 화끈한 아니면 아리아리한 성애의 장면은 없으며 있더라도 불만스럽고 (2) 끊임없이 진행되는 이야기가 무언가 뒤섞인 듯 잘 아귀가 안맞다고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의 혐오감만을 가지고 ‘엽기 퇴폐 영화’라는 지적을 하는 분이 많으셨습니다. 여하튼 불편한 영화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나서 답답한 마음에 인터넷을 뒤적이다 이런 질문이 눈길을 끌었고 그것이 그동안 답답하던 실마리를 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질문이란 “성현아는 도대체 왜 나오는가?”였습니다.
질문의 대답은 이 영화의 시나리오가 김영하의 단편소설 [사진관 살인사건]과 [거울에 대한 명상]을 결합시킨 것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감독은 전혀 다른 소설 두 개를 결합하면서 스릴러를 만들고도 배후의 드라마를 찬찬히 설명할 수 있는 구조를 찾아낸 것입니다. 따라서 사진관 사건과 한석규 사건을 동일한 사건에 대한 입체적 시각이라고 보고 퍼즐을 맞추면 아귀가 잘맞는 무척 재미있는 영화가 되지만, 별도의 사건으로 보게 되면 아주 난삽한 드라마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화가 난해하게 보인 이유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 한석규, 엄지원, 이은주가 불륜의 관계라면 성현아와 남편, 사진작가 역시 불륜의 관계입니다. 게다가 모두 죽은 자들의 머리가 부숴지지요. 그리고 과연 누가 죽였냐가 석연치 않습니다. 양쪽다 얼마전까지 멀쩡한 사람이었는데 왜 죽었느냐를 찾아가는 게 이 영화이지요.
(2) 엄지원과 성현아 모두 남편 몰래 낙태합니다. 이것은 곁으로는 평화로운 삶이지만 사랑과 신뢰는 없는 위태로운 평화를 표면에 끌어올려 파국으로 치닫게 하는 계기로 작용합니다.
(3) 극중의 구체적인 사물 역시 서로 이어지는데 성현아가 사온 콩나물이라는 일상적인 삶의 소재가 한석규의 콩나물로 이어지는 식으로 서로 혼합됩니다. 이것은 아마도 ‘사진관의 살인과 한석규가 겪는 일은 같은 일이다. 또는 성현아가 한석규의 또다른 분신이다.’라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
(4) 한석규가 이은주의 침대에 놓고간 ‘마음’이라는 그림과 사진작가가 보낸 ‘경희야 사랑해’라는 글자 역시 위태로운 평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고 서로 대칭을 이룬다고 생각됩니다.
결국 성현아는 한석규가 되기도 하고 이은주가 되기도 하는 식으로 변형을 이루면서 사건의 나래이션을 하는 셈입니다.
특히 “사진관에 혼자 앉아 있으면 참 심심해요.”장면은 이은주가 한석규와 처음 사랑에 빠지게 되는 내면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사진만 봐도 모든 걸 알 수 있다는 성현아와 사랑하는 사람의 응큼한 속내를 알지만 사랑하기에 진심을 담은 음악으로 속마음을 들려주는 이은주는 참 서글프고 외로운 처지입니다. 그래서 어떤 장면에서는 성현아가 대신 “여자분이 기다리시겠어요. 전화를 걸어봐요.”하는 식으로 한석규를 다그치기도 하지요. 참 멋진 장면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한석규는 그 이야기를 무시합니다. 당연히 이은주의 외로움, 슬픔, 사랑하면서도 사랑받지는 못하는 애닯은 처지 등이 더 안타깝게 느껴지게 됩니다.
3. 삼중 사중의 중층 구조의 완결 : 이은주의 자살과 곤객의 관음증이 트렁크에서 만나다.
이 영화가 부각된 것은 이은주가 자살한 후 ‘[주홍글씨]에 노출이 많아서 우울해했다’라는 기사가 실려서 였습니다. 이 영화를 본 경험으로 판단하자면 ‘그럴 리가 없어요. 이은주는 더 어렸을 적에도 [오 수정]같은 영화를 찍었는데 갑자기 노출이 심하다고 죽다니 말이 됩니까? 그리고 배우라면 이 영화가 매우 좋은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적재적소에 노출씬을 배치했다는 걸 알 것입니다. 노출은 절제되어 있고 노출씬마다 가슴을 저미게 하는 감동을 줍니다. 제가 배우라도 이런 영화 찍는 걸 행복해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트렁크 장면은 사실 생각이 다릅니다. 아주 장시간에 걸쳐 감정을 쥐어짜며 연기를 하는데 저같은 무덤덤한 관객이 일주일 동안 그 장면에 휘둘리고 있는게 사실이라면, 배우는 훨씬 힘든 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영화 속의 격정 때문에 자살해야 한다면, 한석규씨가 먼저 자살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강인한 한석규씨는 영화처럼 살아 남으셨고, 실제로 죽은 것은 영화에서 처럼 애처로운 이은주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만큼 이은주가 감성적이고 연약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은주의 영결식장에서 한석규씨가 억지로 울음을 참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 영화가 배우 이은주의 자살과 이어져서 죽음의 삼중구조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이 삼중의 대칭구조는 영화에 무덤덤하던 저같은 사람이 노출씬에 대한 욕망으로 영화를 보게 되고,(이은주의 자살과 뒤이은 선정적 기사가 아니라면 어찌 제가 [주홍글씨]를 보았겠습니까?) 관객 자신의 삶이라는 마지막 사중의 대칭구조를 이루면서 완결됩니다. 이런 걸 생각해보면, 화엄경에 나온다는 인드라의 망이니 사사무애, 이사무애 법계 같은 끊임없는 인연의 세계가 저절로 떠오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끝내 닿게되는 것은 처절한 현실, 사랑없이 영위해 하는 일상성에 매몰된 바로 지금 '나'의 모습입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가슴을 치는 대사는 이은주의 “소원하나 이루어졌네.”입니다. 트렁크씬은 가장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고백이기에 가장 처절한 종말을 품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또 가장 가슴을 치는 나래이션은 한석규가 “그 와중에도 나는 그녀가 자살했다고 진술했다”입니다. ‘미안하다’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이은주와 헛된 꿈 이었지만 끝내 돌아가고 싶은 고향 엄지원 사이에서 터져나온 추락한 수컷의 서글픈 대사라고 생각됩니다.
4. 에필로그 : “사랑했으면 괜찮은 건가요?”
마지막 장면에 다다라 한석규가 자신의 분신인 성현아에게 “사랑하셨나요?”라고 묻는 걸로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이 장면은 '과연 한석규는 이은주를 사랑했는가?'를 스스로 질문하는 것인데, 성현아의 “사랑했으면 괜찮은 건가요?”라는 반문으로 돌아옵니다. 무척 어려운 질문인데 굳이 짐작하자면 이렇습니다. 비록 사랑했을 지라도 누군가의 삶을 망가뜨려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누군가의 삶을 망가뜨린다면 거기서는 어떤 결실도 거둘 수가 없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영화 감독인 변혁씨가 실제로 답변한 적이 있습니다. 인터뷰를 옮기면 :
질문 : 경희의 마지막 대사, “사랑했으면 괜찮은 건가요”라는 말에 대한 감독의 대답은?
“사랑했으면 그것으로 된 거지, 괜찮은 건 아닌 것 같다. 사랑했으면 굉장히 좋고, 그 자체만으로도 네가 누릴 것은 다 누린 거다. 하지만 사랑했다고 해서 네 부인이 속고 살아도 되고, 어떤 사람이 아파해도 되는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이 석고상에 머리가 깨져서 죽으면 안되는 거다. ”사랑으로 인해 얻을 것을 얻었다면, 다른 희생은 강요하지 마라.“가 내 대답이다.”
5. 오마주 : hbula님의 리뷰(이 글을 쓰기까지 가장 많이 실마리를 주신 네이버 리뷰어 글)
“이 영화를 본 분들은 반전에 집착하는데, 이 영화는 앞 부분은 스릴러로 시작하지만 중반 이후 범인이 누구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오히려 삼각 관계의 파산을 보여주는 드라마로 전개됩니다. 따라서 범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스릴러로서의 반전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전은 한석규의 사생활에서 드러납니다. 한석규는 이은주(재즈, 도발적인 언행, 그녀의 아파트는 빨강색)과 쾌락을 즐기지만 아내는 순수한 여성(클래식 전공, 다소곳함, 하얀 아파트, 결국 가족이라는 규범에 맞는 아내)으로서 사랑합니다. 이은주와는 성관계를 즐기고 엄지원과는 함께 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트렁크 씬에서 그런 아내가 동성애자이며 한석규를 사랑하지 않는 가장 거짓된 인물임이 드러납니다.
이 반전은 스릴러의 반전이 아니라(그래서 사람들이 웃는 거지요. 또 제가 본 영화관에서는 웃음보다는 혐오감의 속삭임이 많았습니다. 동성애는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금기의 영역이지요.) 한석규가 품고 있는 꿈(빠체)의 진실이 드러나는 그런 반전입니다.
덧붙여, 살인 도구가 성모 마리아 상임이, 엄지원이 진실을 드러내는 곳이 성당임에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부부싸움을 한 성현아가 콩나물을 사오고 남편의 시신 아래에 콩나물이 흩어져 있음과 한석규가 아내를 위해 콩나물 국을 끓여주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사회적 금기(마리아상)과 쿨하고 평화로운 삶(콩나물 국) 사이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우리의 모습이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