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사기 -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과학을 어떻게 남용했는가
앨런 소칼, 장 브리크몽 지음 | 이희재 옮김 / 민음사 / 200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지적 사기]를 재미있게 읽었으면서도 해당 주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서 판단을 보류한 채 몇 년이 지났습니다. 여전히 진전이 없는 상태에서 이정우 선생님의 [탐독]에서 [지적 사기]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발견하고 원문을 인용합니다.

참고로 이정우 선생님은 원래 서울대 공대를 졸업한 분으로 진로를 철학으로 바꾸어 푸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따라서 수학이나 자연 과학에 대한 이해가 일반 철학 교수분들보다는 높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하 원문 인용)

저열한 미국 물리학자들.(220 -222쪽)

'불확정성 원리'로 유명한 하이젠베르크는 많은 책들을 저술하기도 했다. 한참 과학의 세계에 눈뜨고 있을 때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를 정말 감동적으로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후에 [물리학과 철학]을 읽기도 했다.

사실 하이젠베르크만이 아니라 양자역학의 초기 건설자들 대다수가 위대한 물리학자들이었을 뿐 아니라 상당 수준의 철학적 소양을 갖춘 사상가들이었고 나아가 품격 높은 유럽적 교양과 도덕을 한몸에 갖춘 지식인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물리학 논문들만 쓴 것이 아니라 상당량의 철학적 저작들을 쓴 저술가들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유독 하이젠베르크의 책들만이 많이 소개되어 있는 것 같다. 플랑크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의 저작들도 소개되어야 할 것이다. 트기히 루이 드 브로이가 쓴 책들([물리학에서의 연속과 불연속] [물리학과 미시물리학] [빛과 물질] 등은 매우 수준 높은 과학철학서들이다.

(*** 참고 : 적어도 이런 분위기를 짐작케 하는 책을 몇권 알고 있는데 쟈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 , 조셉 니덤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 마티유 리카르의 [손바닥 안의 우주]는 인문학과 자연 과학이 이질적인 것이라는 나의 선입견을 깨뜨리는 책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생리학자나 생명공학자들입니다.***)

그런데 과학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가면서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유럽의 중후함과 깊이가 미국의 천박함과 오만방자함으로 바뀌면서 과학자들의 상이 현저하게 변해간 것이다. 리처드 파인만을 비롯해 미국 과학자들이 쓴 저서들을 읽으면서 유럽적 교양과는 너무나도 판이한 세계를 만나고서 실망했던 기억이 많다. 더구나 책 중간중간 철학에 대한 이해하기 힘든 구절들, 무지와 악감정으로 가득찬 구절들을 보면서 어이가 없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과학(특히 물리학)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잃어버리기 시작했을 때가 바로 미국 과학자들의 이런 책들을 접했던 시기였다. 일급 물리학자의 말이라고는, 지식인의 말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그런 구절들을 보면서 유럽 문화와  미국 문화가 어쩌면 이렇게도 다를까하고 놀라곤 했다. 과학이 계속해서 유럽에서 발달했다면 과학기술 문명의 풍토가 지금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나는 영어 책들 외에도 프랑스, 독일 등 유럽의 과학서들과 일본의 과학서들을 많이 읽지만 이런 실망스러운 경험을 한 적은 별로 없다.

미국이라는 거친 나라가 과학기술을 발달시켰고 오늘날 그 힘으로 세계를 제패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류 모두에게 비극이다. 더욱 더 불행한 것은 바로 한국이 미국의 우산 아래에 있고 문화 일반, 학문의 성격, 지식계의 분위기조차 거의 그대로 미국을 답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 과학계의 이런 분위기가 가장 극단적으로 표현된 경우가 바로 소칼의 [지적 사기]일 것이다. 이 책은 프랑스 사상가들이 과학을 오용한 사례를 분석. 비판하겠다고 했지만 그 근거가 너무나도 허무맹랑해서 한 편의 사기극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볼 수 없다. 이 거칠기 짝이 없는 책이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이 책은 인문학에 대한 미국 과학자들의 폭언, 유럽 문화에 대한 미국 문화의 악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더구나 습쓸한 것은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이 책에 동조했다는 사실이다. 그런 사람들 중에서 라캉의 [에크리]나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같은 책들을 원어로는 그만두고 영어 번역본으로라도 (아직 [차이와 반복]이 우리말로 번역도 되지 않았을 때 였다.)읽어본 사람들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현대 프랑스 철학의 고전들을 제대로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소칼의 책에 별 관심도 갖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가 내게 이 책을 보내주었는데 (누가 보내주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몇 대목을 훑어보고서 어이가 없어 그냥 구석에 던져놓았었다. 그런데 이 책이 화젯거리가 되고, 나아가 상당수의 사람들이 동조하는 것을 보고서 참으로 큰 당혹감을 느꼈다. 나는 이 씁쓸한 '지적 사기'를 보면서 학문의 세계, 지식인들의 세계가 사기와 폭력이 횡행하는 이 세상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는가라는 심각한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배암발 : 이정우 선생님이 구체적인 사실을 지적하면서 소칼을 반박한 글을 쓰셨는지 궁금합니다. 혹시 아시는 분이 있으시면 댓글에 달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하튼, 새삼 공부가 짧구나 하는 한탄을 가지게 했던 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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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1-28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적 사기 저도 관심있는 책인데, 시중엔 이미 절판났고 오프에는 아직 좀 있는거 같더라구요. 한번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 계속 못보고 있는 책입니다.

하늘연못 2007-01-30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친구 책을 빌려서 읽구 맘에 들어서 돌려주지 않음으로써 '지적 사기'에 '민법상의 사기'를 더한 추억이 있던 책이었죠.--" 평생 그런 적이 없었 거든요.
또 책은 경쾌했지만 내심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또는 '도대체 뭐가 진실이야?' 등등 프랑스 철학에도 자연 과학적 지식도 문외한인 자신을 한탄하게 했던 책이죠. 뒤늦게 공부 안했던 거 후회 많이 되드라구요.
여하튼 도올 선생님 책 읽을 때 받는 그런 느낌을 주는 책이죠. 그런데 왜 문제가 많은 책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논박하는 학자들이 없는 걸까요? 그렇게 실력이 없는 걸까요? 아니면 앞마당만 파시느라 옆마당은 보시지 않는 분들만 많은 걸까요?
올해는 '구체적인 사실 뒤집기'라는 게 제 화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Lennon 2007-10-02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정우 선생이 저렇게 말씀하셨다니 실망이 큽니다. 교양이 부족한 미국 과학자들이 많고 그러한 분위기가 마음에 안드시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고 동의하지만 이 책은 정확한 실례를 통해서 구체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내용인데 그걸 한편의 사기극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다니요. 덧붙여서 물리학자로서 한마디 하자면, 파인만의 책 중 철학에 대한 무지와 악감정을 드러낸 책이라면 파인만씨 농담도 잘하시네요 같은 류일텐데, 그런 책을 읽고 물리학에 관심을 잃어버린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조차 잘 가지 않습니다.

하늘연못 2007-10-08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년 전부터 작심하고는 실행에 옮기지 못한 중에는 들뢰즈 읽기도 있고 파인만의 물리학강의 읽기도 있었는데 Lennon님의 댓글을 보니 다시 한번 시작해 보아야겠습니다. 간접지식에 의존해서 무언가를 판단하기는 힘들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는군요.지금은 [지적사기]라는 책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도 없는 시기아닙니까? 여하튼 들뢰즈를 아는 사람은 파인만을 모르고 파인만을 아는 사람은 들뢰즈를 모르고 그런 것이 현실이겠죠. 제 현실은 파인만도 들뢰즈도 멀어보인다는 거고...이런 것이 대학의 전공이 인식상의 벽을 만든 경우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저는 자연계열과 인문, 사회계열 쪽으로 3전공을 했는데도 결국 어느하나 벽을 넘지 못하고 갇혀사는 것이 고통스러운 느낌입니다.

sdd 2008-10-09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음 지나가다 봤는데, 이정우 선생님께서 비판을 하시기는 하셨습니다.
저 글을 쓰신 다음의 일인 것 같은데...

가객 2009-02-24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정우 선생님께서 쓰신, "시간의 지도리에 서서"라는 책 뒷부분에서 구체적으로 소칼의 입장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송시헌 2012-03-03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현재 인문학이나 소위 '철학도' 들이 지적인 가식 허영에 사로잡혀서 자기도 모르는 소리 하는거는 사실입니다. 저는 토마스쿤이나 데이비드 보더니스, 모리스 클라인같이 제대로 철학,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존경하지만, 그외 대다수의 '인문학도'들과 '철학도'들은 솔직히 말해서 한심하더군요.
현재 인문학과 철학 하는 사람들 보면 , 가식이나 허영이 너무 많아요. 마치 중국 무술을 보는 듯합니다. 발경이니 기니, 별 어려운 개소리 다하지만 막상 싸움붙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무용지물처럼요.

검색하다 들렸는데 2014-05-25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 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저 미천한 것이 감히 우리한테 대드는데 왜 사람들은 저 미천한 놈한테 동조하는지 모르겠네 ㅅㅂ"
이런 수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