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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치열하더라도   

글은 편안한게 좋지 않을까?  

빈틈없는 욕망의 나열이 숨가쁘군.  

내가 달리는 또는 내가 걷는 아니면 내가 품은 길은  

나를 설득하려 하지 않아.  

다만 매혹하고 멀리서 손짓할 뿐이지.  

길은 항상 함께 하지만 강요하진 않아.  

떠난자도 걷는 자도 나일 뿐이지.  

그래서 여행은 항상 나를 주인공으로 세워주는 셈이지. 

그래 이게 내가 지난 3년간  

새벽 4시에 일어나 달리는 유일한 근거이지.  

강요받지 않는 자유로움!  

그처럼 나는 선생이고 싶지 않아.  

그렇다고 고립되고 싶지도 않지.  

그래서 부질없이 이 모순된 글을 쓰는 걸.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다시 시작해야만 해.  

부표처럼 덧없이 흔들리지만   

아주 멀리 갈 수는 없는  

이 지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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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2 10: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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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주도 올레길을 걷다가 생각했다. 관념의 여행도 이렇게 충만하고 행복할 수 있을까? 올레길의 힘은 처음 제주를 찾은 사람에게도 오래된 친근함과 감춰진 놀라움을 펼쳐놓은데 있다. 올레는 만남과 치유, 그리고 감사의 길이다. 

부서지는 파도에서 그리고 부딪히는 마파람에서 나는 희망을 찾았다. 얼기설기 실타래처럼 꼬인 삶의 문제는 실은 이 올레길처럼 여유를 찾게하는 특별하게 마련된 소풍길일 수도 있다. 올레길이 단지 평탄하다면 바람 한 점 없는 진공이라면 이런 생동함을 느끼지 못하리라.   

관념에 바람이 불게하라. 관념에 사려깊음이 배게 하라. 먼저 길을 간 나그네들이여. 뒤에 오는 이들을 위해 더 명쾌하고 따듯한 표지판을 남겨다오. 얼마나 힘들게 여기 다다랐는가 하는 좁은 마음을 버리시라.  

2. 최근에 이중텐, 법정, 오강남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올레길을 떠올렸다. 글은 친근하며 구체적인 일상의 체험과 맞닿아 있으나 자유롭고 여유로와서 한바탕의 소풍과 같았다. 늘상 곁에 있는 단순한 단어지만 깊은 의미를 품고 있었다. 물론 이런 대가들 또는 스승들의 글쓰기를 쫒기는 불가능하다. 근원적이면서 보편적인 것은 쉽게 읽히지만 쉽게 쓰여지는 것은 아니다.  

여하튼, 직업적인 학자들의 글쓰기가 명확하고 간결한 학술어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라면 평 범한 생활인의 글쓰기는 일상어의 나열일 수 밖에 없다. 다만 그 일상어는  절절한 일상의 체험과 맞닿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살며 그렇게 느끼지 않는 이의 글쓰기란 덧없는 관념의 놀이거나 삶과 하나되지 못한 분열적인 모습이지 않을까?   

일상어의 사용은 모든 사람의 삶이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신념에 뿌리내리고 있다. 또 때로는 절망적이고 궁핍한 이 삶이 모든 가치를 품어주는 터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그리고 관념의 벽을 치고 특권적인 권위를 지닌 사람만이 말할 수 있다는 그릇된 관습에 반대한다.   

그 처음이자 나중은 이거다.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면적이기에 결코 분야별로 살 수 없으므로 우리의 생각 역시 경계가 없다고. 그러니 이미 멋대로 그려놓은 관념의 울타리는 사기에 불과하다. 다만 검색의 편의만을 인정할 수 있으리라.

 3. 배암발 : 제주도 올레길도 걷고 200km 마라톤을 통해서 제주도 일주도 이루었다. 33시간 마라톤은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깊은 어둠이었던 것 같다. 특히 70km이후부터 발의 통증으로 발을 절며 뛰어야 했기에 무척 고통스러웠다. 누군가 울트라 마라톤의 매력은 깊은 바닥까지 떨어졌다가 기어나오는 느낌 때문이라고 했다. 조금 그 느낌을 알 것 같았다. 

 내가 느끼는 울트라의 매력은 내가 겪는 기쁨과 고통이 거짓이 아닌가 질문하는 것이 어느 순간 멈춘다는 거다. 그만큼 고통이 절절한 그 순간이 온다. 반면 그 한계 속에서 여전히 살아있는 불꽃같은 자신을 만난다는 것도 놀라운 경험이다. 이제 울트라는 그만 둔다고 이를 갈고 들어왔지만 지금은 다음 대회를 준비 중이다.  참 이상하기도 하다. 고통 속에서 터득한 길의 느낌이 시간이 지나면서 새롭고 황홀하기만 하다. 이제 전보다는 여유롭게 달릴 것 같다.  

끝으로, 내가 말하는 길은 말할 수 없다는 그 道가 아니다. 다만 달리고 걸을 때 느껴지는 땅의 굽이 속에 난 바로 그 밟을 수 있는 길을 말한다. 나는 일상인이고 일상 속에서 경계를 넘는 울트라 마라토너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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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과 김길태 씨  

 

1. 요즘은 어른이 없는 시대라고 한다. 그렇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김대중, 김수환, 법정... 이런 분들은 그 이름만 들어도 조금 삼가는 마음이 든다. 내가 가까이서 뵌 분은 김수환 추기경 밖에 없지만 책을 통해 늘 가까이 계셨던 분은 법정 스님이시다. 군 복무 중에 초기 불교 경전을 읽게 된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 책들은 법정스님이 번역한 것이었다. 그 당시엔 난생처음 불교를 접하는데다가, <숫타니파타>는 이름부터 낯설었다. 그러니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읽으면서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법정 스님이 돌아가시고 나니 이제야 조금 알 것도 같다.   


2. 법정 스님이 돌아가시는 것을 보며 항상 그 전후에 또는 자막으로 함께 한 사람이 있다. 흉악범 김길태씨이다. 그런데 흉악범이란 성급한 이야기일수도 있다. 김길태씨는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신성한 스님의 임종의 자리에 결코 아름답지 않은 자막과 뉴스가 항상 함께 한다는 것은 우울한 일이다. 왜 방송사는 큰 어른이 떠나시는 마당에 그런 작은 배려를 하지 않는 것일까?  


그러다가 떠오른 생각이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김길태씨와 법정 스님은 무슨 인연일까?’였다. 신약성서를 보면 예수님과 극악범 바라바 또는 십자가형을 같이 받았다는 두 강도 이야기가 있다. 바라바는 예수님 덕택에 사형을 면하게 되었고, 예수님께 귀의한 강도는 구원을 받았다. 이렇게 보면 김길태는 예수님을 저주한 또다른 강도와 같은 사람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2010년 전의 사람살이와 지금의 사람살이가 연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3. 6.25 전쟁이라는 살인과 폭력에 회의를 느껴 자유와 진리를 찾아 출가를 하셨다는 55년전의 법정스님과, 욕망과 폭력에 물든 현재 사회를 대변하는 김길태씨, 또는 (김길태씨가 범인이 아닐 경우) 사회적인 약자일 김길태씨를 형벌을 통해 마녀사냥적인 방법으로 소거하려는 우리들.....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질문에 사로잡힌 삶과, 육체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삶의 극명한 대비..... 2010년의 십자가 주변의 풍경과 오늘의 풍경은 어찌 이렇게 닮을 수가 있는 것인지.....  

 

우리는 어떻게 이 오랜 문명의 중력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영원한 평행선으로 안고 가야하는 것인지...  

 

4. 스님의 죽음에서 조금 의외의 것이 있다. 스님께서 80도 채우지 못하고 폐암으로 돌아가신다는 사실이다. 법정스님이 대체로 산속에서 맑은 공기를 쐬고 사셨고 맑은 차와 책 읽는 취미 외에 몸을 해칠 특별한 일을 하셨는지 의문이다. 또한 마지막 몇 년 간 글 속에 드러난 스님의 모습은 병과 친해지고 병을 품는 평온한 모습이셨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도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그렇지만 그분은 세속의 먼지구덩이 속에서 사시지 않았던가. 어쩌면 원래 스님의 명은 더 짧아서 그나마 간소한 삶 때문에 80에 가깝게 사셨는지 모른다. 또한 예로 부터 단명한 고승 대덕도 많았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 시점에서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은 '육체의 중력 중에 질병이란 녀석처럼 불가항력적인 것이 없구나 .'라는 사실이다.  

 

5. 우리는 깨달음이 궁극의 열쇠라고 생각하곤 한다. 따라서 깨달은 사람은 조주스님처럼 120 정도는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육체의 중력을 넘는 지고한 법력의 아우라를 내심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법정스님이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땡중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철 스님의 사리에 대해 노폐물일 뿐이라고 하셨던 도올 선생님처럼! 그러나 스님과 같은 맑음과 향기로움으로도 그놈의 깨달음 또는 깨침이 가닿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현실적이거나 초현실적인 진리일 것이다.  

 

반면 법정 스님의 진리와 자유의 길이란 스님의 삶이라는 한정된 맥락에서 가치있을 뿐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다만 그 길은 심미적이고 현상학적이어서 그 길을 따라나서는 자에게 더 아름답고 귀하게 나타나는 무엇일 것이다. 예를 들어,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비행기를 떠받쳐 준다. 즉, 비행이라는 행위를 할 때만 떠받드는 힘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어찌보면, 비행이라는 행위가 실제로 존재하는 힘, 양력을 창조해낸 셈이다. 마찬가지로 길은 있었지만 길을 직접 갈 때만 풍경을 만날 수가 있다. 또한 풍경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느끼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6. 법정 스님의 죽음에서 나는 사실 복잡한 논의를 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다만 '말기 환자에게 맑은 공기와 좋은 물만 먹고 사랑과 행복이란 생각만 하면 그 긍정의 힘으로 누구나 다시 소생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해왔던 낭만적인 생각을 버려야겠구나 .' 생각한다는 것이다.  새삼 삶과 죽음은 가장 큰 일이고 샛길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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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겨울비가 여러날째 계속 되는군요.

저는 한의원에 나와 빗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조금 센치해져서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고 싶습니다.

넋두리에 불과하니깐 조금 쑥스럽군요.

요즘 제가 사는소식 정도 되겠습니다.

 

저는 대체로 3시 반에 일어나는데

1주일에 2번은 30km를 뛰기 때문에 집에서 나와 바로 전주천을 달리는 편이고

4번은 15km를 뛰기 때문에 한의원에 나와 1,2시간 공부를 하다가 달리는 편이죠.

 

2. 요즘처럼 비가 오는 경우는

이슬비면 뛰고 철철 내리면 잠시 1시간쯤 산책을 하다가 한의원에 옵니다.  

 

오늘은 우산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좋아서 한참을 걷다 왔습니다.

이런 경우가 가장 편안한 시간이 아닌가 합니다.

눈물겨울 정도로 외롭고 충만한 시간입니다.

 

잠시 시간이 멈춘듯하고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시간..

아이 넷에 좌충우돌 한의원을 운영하는 제 입장에서는 사치스러운 시간입니다. 

이 순간만은 잠시 제가 누군지도 잊어버립니다.

어디로 갈지도 생각지 않고

다만 창가에서 들리는 빗소리 속에 저를 둘 뿐이죠.

아주 잠깐이긴 하지만요.

 

3. 순수한 호기심과 즐거움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밝게 생각하기

매 순간을 더불어 즐기기 


이런 것이 요즘 제 화두예요.

 

마라톤이 전해준 지혜인 셈이죠.

사실 언제나 그러자고 다짐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까먹고 허덕이죠.

그래도 뛰다보면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4. 저는 다음 달 제주도 일주200km 대회에 참가합니다.

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죠.

그렇지만 힘겨운 일이다보니 이런 식으로 떠벌이고

안하는게 창피스러우니깐 더 노력해서 이루고

다 그런거죠.  

 

제주도 대회는 잊혀졌던 시간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20대 초 사는 것이 지겨워서 자살을 생각하다가

휴학을 하고 신문배달을 하고 노가데를 하고

군대가고 하다가 돈을 털어 남해안을 거쳐 제주도에 간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무어라도 하나 이루고 싶었어요.

제주도를 하루종일 해안선을 따라 걸었지요.

하루에 바나나 3개가 전부였는데 길은 멀고 바람은 아주 셌지요.  

그러다가 검은 바위에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제 삶도 어느순간 저렇게 부서지고 말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지도책 속의 제주도는 아주 만만해 보였죠.

그런데 생각보다 제주도는 커서

허기와 피로만을 안고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지나고 보니 20대의 바닥에서 찾아간 제주도

채 끝내지 못하고 끝낸 제주도 일주여행에서 부터  

저는 서서히 걸어나왔던 것 같습니다.

 

5. 실패나 패배란 없다고 생각해요.

무상한 인생 속에 다만 채우지 못한 여행이 있을 뿐. 

그러니 젊음은 아름다운 것이죠.

젊은이는 다만 새로운 출발을 재촉하면 되니까요.

 

이런 것은 사실 명료합니다.

그리고 저는 다시 출발을 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는 편이죠.

다만 바라는 것은 새롭게 대면하는 세상을  즐길 수 있는

열림의 경험 뿐이죠.

 

그러나 열림과 깨달음이 거저 얻어지진 않죠. 

오로지 길 저 너머 또는 길 속의 모험 그 자체의 힘이

무언 중에 전해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길을 가는 자만이 길을 가는 감각을 터득한다는 것이 요즘 제 생각입니다.  

 

그러니 힘겨워도 저는 가고 싶습니다.  

이 외의 길은 없다고 스스로를 다그칩니다.  

 

6. 마흔이 되어 

그 동안 노력으로 다듬은 근육으로

제주도를 일주하게 된다니

스스로가 자랑스럽습니다.

 

그러나 제주도는 시작에 불과하죠.

여름이 되면 남해안에서 휴전선까지 달리는

멋진 여행이 계획되어 있고.

초가을에는 인천 앞바다에서 속초 앞바다까지 달리는

또다른 여정이 저를 손짓합니다.

 

이것은 환타지와 같죠.

제 삶 속에서 이런 일들이 펼쳐진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니까요.

 

7. 저도 가끔 힘겹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머의 구원을 생각하기도 하죠.

그렇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고생이 고생만은 아니며

바닥이 꼭 바닥은 아니며

궁색할 때가 반드시 불행할 때도 아니었습니다.

 

삶 속의 처지를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는 없지만

행복함은 언제나 선택할 수가 있죠.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어디 선가 들었던 얘기인 거 같아요.

그렇지만 요즘은 정말 그 말이 맞다고 생각이 듭니다. 

 

8. 아! 20대의 저는 얼마나 어리석었던가요!

그렇지만 저는 그때의 저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아마도 40대의 저를 더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구르는 돌은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말은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제 인생에서 40대를 가장 젊었던 시기로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제주도의 파도처럼 제 인생도 언젠가 스러져 버릴 거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죽는 날까지 번민 속에서 살 것도 아마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땠거나 분명한 것은 저는 행복하고 충만한  길을 갈 것입니다.

 

9. 편지나 전화를 자주 못드려서 죄송합니다.

제가 눈앞에 일에 몰입하면서 사는 편이라 

그 너머의 사람이나 일은 잘 까먹습니다.

 

아마 한의원을 안정시키고

한반도 횡단과 종단을 이룬다는 코앞의 숙제를 이룬다면

좀 여유를 가지게 될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젊은 노무현 대통령처럼 요트같은 걸 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컨트롤할 수 없는 범람하는 파도와 싸우고

힘들면 요트에 누워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죠. 

한걸음 한걸음 딱딱한 땅을 디디는 것을 이어서 긴거리를 완성하는 마라톤과는

조금 다른 세상일거 같아요. 그래서 조금 솔깃합니다. 다만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은?

스카이다이빙이 아닐까요?

그야말로 허공을 향한 죽음과도 같은 점프....죽음과 맞닿은 율동!

그 무엇도 기대지 않은 무아의 시간!

깨달음을 관통하는 상징적인 스포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마 그럴거라는 거죠. 이런 걸 생각하면 어느 순간 별빛을 손에 쥐는 순간도 올거 같아요.

육체라는 한계를 깨고 무궁하게 상상하게 만드니까요.^^

 

 

10. 설날이네요. 

새해 복많이 지으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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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1 1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늘연못 2010-02-12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년간 요양병원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와 함께 지냈습니다. 심한 중풍환자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기 십수년만에 돌아가시는 분들, 치매로 아무데나 똥을 싸고 벌렁 드러누워 치마를 벗는 분들...그러다 돌아가시면 영안사진 속에 너무도 평온하고 행복한 젊은 얼굴!

언젠가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도대체 젊어본 적이 있느냐?'라고. '너는 도대체 네 육신으로 무언가 모험을 한 적이 있느냐?'고. 제가 달리기에 빠져들고 길의 느낌을 배워나가면서 새삼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제가 진정 원해왔던 삶은 높이 되고 무언가를 이루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자유로운 여행자가 되어 새로운 세계를 끝없이 탐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지식은 하나를 더하면 또다른 하나가 나오고 이런 것이 쌓이면 감옥처럼 저를 옭아맸습니다. 그런데 길은 다른 길을 가려면 이전 길을 버려야 했습니다. 길은 지나면 잊혀졌습니다. 이런 게 좋아서 더 먼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울트라 마라토너가 되었습니다. 울트라 마라톤은 여행이고, 속박이되 속박이지 않아서 너무 좋아 울고 싶었습니다.

하늘연못 2010-02-12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트라 마라톤은 그래서 저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무엇입니다. 취미나 레저라기 보다는 영혼과 함께하는 무엇입니다. 계절의 변화와 바람의 흐름과 길의 굽이로 이루어진 여행을 다니다보면 더없이 충만해져서 책을 읽고 싶지가 않습니다. 아니 시간낭비처럼 느껴져서 자꾸 심드렁해집니다.

모리소님! 저도 세상을 모릅니다. 40이란 인생을 알기는 너무 적은 나이이고 그나마 나이가 들수록 더 지혜로와지지도 성숙하지도 않는 시간을 살아왔기 때문에 무어라 드릴 말씀도 없습니다. 저는 다만 가끔 막막한 때가 있다면 언제가는 끝나는 여행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힘겨운 사람을 만나면 저를 성숙시키기 위해 강림한 수호천사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이게 비겁함인지는 몰라도 막다른 길에서는 우선 감정을 추스려야 해결책도 나오니깐 이런 회심이 많은 도움이 되더군요.

하늘연못 2010-02-12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외로운 넋두리에 답해주신 모리소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참! 저도 제 20대를 긍정하게 된 것은 근래 들어서예요. 터무니없는 무기력과 방황, 무의미로 밤을 새던 그 시간이 찬란하게 느껴지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이 20대를 새롭게 성찰하고 해석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단순히 옛날이나 청춘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순간에 이전의 못다이룬 의미를 꽃피게 한다는 것이죠. 시간은 결코 헛되이 죽지 않아요. 살아있는 순간까지는...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고은-(이윤기산문집에서 따옴)







하늘연못 2010-02-12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족> 성인의 독서는 아이들이 낱말카드 외우는-관념을 그저 습득하는 단계에서 더 나아가야 하는데 나이가 들어도 전혀 나아지지가 않습니다. 세상과 겨뤄보지도 세계와 대면하지도 못했고 근근히 버텨왔기 때문에- 살아숨신 시간이 없기 때문에 -교묘하고 겉멋나는 말투의 아이로 영원히 남게 됩니다. 습득한 관념의 울타리가 클수록 도피와 핑계의 폭도 커져서 자신이 주체적으로 생각하며 자유롭게 사색한다고 착각합니다.

알라딘 서재의 터주대감들은 어떤 의미에서 오타 교정반 같은 느낌입니다. '내가 누굴안다 내가 이 책을 읽었는데 이게 맞다.' 학자라면 그게 직업이겠죠. 그렇지만 그것은 그걸로 밥벌어먹는 사람들-그런 지식 가공을 통해 생계를 영위하는 사람들의 특이한 생활 양태입니다. 참 밥맛 없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런 양태가 삶을 옭아매는 한 자신도 주변의 사람들도 즐겁지 않습니다.

-그 분들의 작업을 무의미하거나 가소롭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들의 작업이 독서에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어찌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그 분들 중에는 방대한 관념적 지식에 비해 삶은 빈약한 사람도 있고 특이한 지식 생활자의 삶과 사고양태를 모범적이거나 지향해야할 양태로 착각을 해서는 안된다는 그런 노파심일 뿐입니다. 예로부터 대다수 지식인의 삶은 회색이었고 즐겁지가 않았습니다. 소수 권력을 쥐고 유복한 지식인 만이 때깔을 냈을 뿐입니다. -

공허한 삶이 껍데기만 반지르하게 바꿔서 그걸로 자꾸 목소리를 키워 남에게 자꾸 이래라 저래라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독서는 이렇습니다. 생활의 개선과 시간을 관념적으로 유희하는 즐거움!...생활이 세계로 이어질지는 알 바 아닙니다. 그것은 각자의 선택일 뿐, 당위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배우고 습득한다가 아니라 끌리는대로 노닌다는 양태입니다.

군자에서 소인으로! 허망한 가치의 인간보다는 자신의 체험 밖에는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일상속의 여행을 감내하는 것, 그리고 비록 볼품없어도 이대로의 나야말로 삶의 중심이라는 것...손안의 반쪽이 손밖의 백보다 낫다는 것...몇장 안달린 동화나 허름한 공룡책을 보던 어린 시절의 내가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하는 것...독서와 지식에 위계를 부여하지 않고 그저 새로움의 즐거움에 탐닉했던 아이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나는 출판업자도 아니고 학자도 학생도 아니라는 것!그러니 폼잴 필요도 진지할 필요도 없다는 것!...그 폼과 진지함이 나를 즐겁게도 자유롭게도 하지 못한다면! 결국 무성한 관념과 그로부터 비롯된 무성한 자기 울타리를 벗어나 다만 나인 소박한 자신을 만나야 한다는 것!

자신의 삶이 생겨서 일상 또는 모험에서 끌어올린 체험의 힘으로 독자적인 중력을 형성하지 않는한 끝없는 편집증적 지식 습득과 낭만적 교양의 가식 속에서 삶이 소진되고 말것입니다. 그 가식적이고 집착적인 허황된 에너지를 삶으로 조금만 끌어와도 우리 삶은 윤택해 질 것입니다.

- 책 속에는 구원이 없다. 책을 즐기는 나 속에 구원이 있다.
알라딘은 지식과 교양의 장소가 아니다. 일차적으로는 자본주의적인 책시장이다.
터주대감들은 지식인이 아니다. 일차적으로는 자의든 타의든 책광고를 대신해주는 하수인인 것이다.-

책놀이의 관념성과 책팔이의 종속성을 감안하지 않는다면, 일상의 체험을 키워 자신의 삶의 주체로 자신을 세우지 못한다면, 몰현실적이고 무책임한 관념에 의한 정신의 속박으로 삶 전체가 헛돌 것입니다.

**** 많은 경우 헛된 관념의 감옥 때문에 방황을 합니다. 감옥을 탈출하지 못하면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어요. - 완전 개지랄입니다. 관념의 꼭두각시로 살다가 그런지도 모르고 가는거죠. 정말 외롭고 슬픕니까? 그 외로움은 뭐고 슬픔은 뭐죠? 그냥 그렇게 느껴지십니까? 너무도 주제넘은 질문이었습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하루종일 골방에서 책에 얽메인 인생보다 새벽 4시에 매일 새벽기도 나가는 사람이 더 행복하고 충실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전 종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벽의 느낌과 일상의 작은 여행이 있는 삶이 더 생동하는 즐거운 삶에 가깝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죠. 힘도 있고 느낌도 있고 생활도 있고 그럴때 만나는 성경 귀절이란 삶을 변화시키는 만남이 된다는 것이죠. 우리가 독서를 한다면 적어도 새벽기도 같은 체험이어야 하지 않나요? 겨자씨만한 관념이되 삶에 들어와서 어울려 부풀고 충만한 삶을 이루는 누룩같고 숨결같은 메시지 말이죠.

앞의 이야기와 모순되지만...저도 글을 쓰다가 저도 모르게 빠져버려서 그렇습니다...꽤 괜찮은 방법일 수는 있겠습니다. 독서가 열림과 즐김 그 너머의 깨달음그리고 삶에로의 귀환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어요? 그리고 대화가 바로 그런 여행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일상의 즐김과 영원의 메시지가 결합된다면 더 좋겠죠.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새벽기도는 교회당안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새벽에 잠을 뿌리치고 깨어나는 그 순간부터라고 생각하는 저에게는 결국 영원의 메시지도 일상에서 솓아난다고 생각이 됩니다. 깨달음에서의 귀환은 다만 새로운 여행, 일상이라는 상투의 껍질에 감춰진 Extreme으로의 출발일 뿐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현실보다 위태로운 미스테리가 없습니다.

차츰 삶의 궁극적인 의미랄지 본질이라는 것이 허구적이고 답습된 상투적 질문이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런게 있다해도 그게 언어적인 걸까요? 만약 그런게 있다해도 명석한 자의 거라면 저와는 무관합니다. 만약 그런게 있다해도 성숙하고 지혜로와야 된다면 유치한 현재는 무가치하다는 말입니까? 아니예요. 제 생각에는 하루를 살다가도 세살을 살다가도 스무살에 사고를 당해도 진정한의미라면 어느 순간에도열려있어야 합니다. 지금 바로 이순간 이외의 구원이나 진정한 의미는 없습니다.

상상하건대 구원은 행복한 아이들의 놀이와 같은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놀면서 한없이 즐거운 아이가 구원받은게 아니라면 구원이라는게 과연 무어란 말입니까? 진정한 행복이란 이런게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가치의 기준은 생동하는 삶, 즐거운 삶에 두어야 합니다. 삶은 살라고 있는 것이고 인생은 대체로 긴 길이며 긴 길은 즐기는 자의 것이니까요. 저라면 악취가 나서 코를 틀어막고 달릴지라도 마음만은 편히 가겠습니다. 여하튼 저도 그런 방식으로 살아봐야 겠습니다.

중언부언인데 굳이 안추리고 열어놓습니다.그냥 선술집 개똥철학이니깐 진지하게 듣지 마세요.^^ 다만 지금의 저는 이런저런 삶의 메시지에 귀기울이고 있다는 걸 고백할 뿐이니까요.

수양 2010-02-23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지하게 듣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만 제 서재에 이 글을 통째로 옮겨두고 말았습니다. 저는 대학시절을 미팅과 소개팅 연애 음주 여성잡지 섭렵 미용실과 옷가게 탐방 등으로 탕진하고 졸업해서 또 한동안은 춤판에 빠져 젊은 날을 허송하다가 이제 막 <수유+너머>라는 곳에서 관념의 세계에 눈을 떠가고 있습니다.

이 세계의 원대함에 막 눈을 뜬 지금은 그저 대단한 학식을 갖춘 수유너머 분들이 한없이 경이로워 보이기만 합니다. 중세 벽화에 나오는 성인의 오로라가 막 보이는 것 같고요! 이제 막 날갯짓을 시작한 처지이나 공부가 깊어지면 언젠가는 대지로 귀환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 선생님의 이 답장을 자경문으로 생각하겠습니다.

하늘연못 2010-02-25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아이가 새로 들어간 어린이집에서는 '요정의 눈'이라는 걸 주더군요. 앞에 볼록렌즈가 들어간 망원경인데요. 그 안을 들여다보면 일상적인 공간이나 사물이 모두 알록달록 오각형으로 보여요. 빙글빙글 돌리면 그때마다 변하고 해서 심심할때는 주변을 그걸로 보곤 합니다.

인간이 만든 관념이나 지식이란 이 세계를 제각기 다양한 '요정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요정의 눈' 중에는 더 먼곳을 보는 망원경, 천체망원경..그리고 더 작은 걸 보는 현미경도 있겠지요. 망원경이나 현미경이라는 실용적 권력 앞에 꼬마 '요정의 눈'은 유치한 놀이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요정의 눈'이 주는 자유롭고 평등한 세계는 저를 너무도 편안하고 즐겁게 합니다. <수유+너머>는 저 역시 동경하던 곳이었고 또 하나의 유쾌한 '요정의 눈'이었습니다. 수양님이 <수유+ 너머>를 공작실 삼아 또 다른 '요정의 눈'을 만드신다면 저 역시 키득거리면서 가끔은 부러워하며 가끔은 못 간 길을 한탄하며 그 속을 바라 볼 것입니다.

열림과 즐거움을 향해 항해하시길! 지식의 방대함은 그대의 항해를 지탱하는 드넓은 관념의 파도일 뿐입니다. (저 아부 잘하죠?^^)

참고로 '요정의 눈'은 꼬마 호랑이(www.ltiger.co.kr)에서 사실 수 있습니다.